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503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1-피히테자유게시판로마서

201503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1-피히테

이름 : 한윤범(IP:14.39.134.30)

201503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1-피히테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끝에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인간의 자유란 칸트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문제다.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도덕성을 우리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강제로 이야기하면 인간이 기계가 되기 때문에 자유의지로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고 그 자유로 성취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율법을 준 거지요. 하나님의 율법이란 못 지키는 게 아니고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마음껏 자유를 주셨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피히테는 윤리, 도덕을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곧 신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는 겁니다. 네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이 곧 하나님의 본래 뜻이라는 거죠. 왜냐하면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기가 아닌 것을 알고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그걸 자기 속으로 회수시켜요. 마치 로마서에 11장에 나오는 주로부터 나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속성이 모든 인간 내에 그 절대성이 있다는 거예요. 자기 자아 전개가 모든 인간이 포함돼있다는 겁니다.

그걸 하는 가운데서 칸트처럼 자유를 신의 영역으로 돌릴 게 아니고 인간이 스스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그 자체가 자유를 동반하면서 이뤄지게 돼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유는 어떤 때 쓰였고 어떤 때 발생되느냐? 인간의 자아는 내가 아닌 비자아에 대해서 이것을 그냥 저건 내가 아니라고 멈추는 존재가 아니고 이걸 기어이 정복하는 거예요. 전부 차지해서 자기 것으로 되돌리는 그러한 일을 해요. 비자아와 자아 사이에는 경계가 있는 경계를 넘어서려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논리를 보세요. 이 비자아는 내 인식에서 나왔거든요. 내 인식에서 나온 비자아를 극복하는 모든 실천력도 내게서 나온 겁니다. 내 절대성, 내 무한성이 내가 아닌 것까지 차지하겠다는 거예요. 이걸 욕구라 하는데 이런 욕구를 통해서 그것마저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저건 내가 아니라는 기준, 경계 정하는 것도 내게서 나온 내 실천력 속에 포함돼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 자아의 절대성이란 말이 반박이 안 된다면 이 말이 맞는 셈이 돼버려요.

그런데 우리가 피히테의 이러한 자꾸 경계 되는 비자아를 넘어서려고 하고 그걸 계속하려는 결국 모든 걸 자기 것으로 만들 순 없는 건 아닙니까. 불가능성이 있겠지요. 잘 들어보세요. 불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느끼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부잣집 아들에게 모든 걸 줘버리면 귀한 줄 모르죠. 그런데 엄마가, “안 돼. 그건 안 사줘.” 하는 순간 그 얘는 소유될 것과 소유 안 될 것을 발견하죠. 자아를 발견하죠. 엄마가 내 것 빼앗아 가는 순간 나는 저걸 언젠가 내 것 만들려는 의욕이 생기면서 내 자아는 거침없이 한계 없이 무한대로 발휘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무한대에 대한 다시 내 것이 만들고자 하는 시도, 끝없는 자유가 되겠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신이 맞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비자아라 할 때 우리가 비자아가 뭘 의미하는지 세밀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인간이 내 것 아닌 것의 판단에 두 가지 판단이 있어요. 부정否定판단과 부정不定판단이 있어요. 둘 다 ‘아니요’ 판단인데 앞의 것은 서술에 대한 부정판단이고, 밑에 것은 비서술에 대한 긍정판단이라고 해요.

돈도 안 되고 쓸데없는 이걸 왜 해야 되는데 하면, 피히테 의견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가 절대자가 아니고 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비겁하게 돼요. 힘센 사람에게 비비고 고개 숙이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써먹지를 못해요. 이런 판단을 구분하지 않으면. 저것 내 것 아닌데, 비자아지요. 내 것 아닌데 욕심내서 뭐 하노?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이런 모습이 기만, 속임수라니까.

형제가 열 명 있는데 병든 어머니가 왔지요. 그때 할 수 없지. 내가 모셔야지. 이게 효심입니까? 아니라고 했지요. 만약에 큰 형님이 와서 내가 모셔갈게, 하면 고맙다고 하면서 내가 모셔도 되는데, 라고 한단 말이죠. 이건 제가 아까 파먹는다고 했지요. 처음부터 부모를 좋아서 모신 게 아니고 억지로 모신 거예요. 자기는 모실 때 다른 형제들은 유럽으로 놀러가고, 지는 꼼짝도 못하고 뒷수발하고 있었던 거예요. 힘이 없기 때문에. 힘이 없다고 여긴 것은 자유가 없다고 여긴 거예요. 피히테는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힘이 센 사람은 큰 자유가 가졌고 힘없는 사람은 작은 자유를 가진 게 아니고, 그 사람들은 솔직했고 너는 자신을 너무 많이 속이고 있었던 거예요.

십자가가 그렇잖아요.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 되잖아요. 죄인이라고 그렇게 살면 되는데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무슨 행세합니까? 나는 이제 죄를 아는 의인 행세하잖아요. 그러니까 기만이 되는, 위선이 되는 겁니다. 그냥 솔직하게 살면 되는데. 그 솔직함이 자유란 말이죠. 자유하지 못하니까 벌벌 떠는 거예요. 들킬까 싶어서. 행여 누구한테 노출될까 싶어서. 음지에 사는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간통 저지른 사람들 얼마나 음지에 살았습니까. 그런데 고마운 헌법재판소에서 간통죄 폐지하니까 나이트클럽에서 축배의 노래를 불렀다 안 합니까. 브라보! 이젠 음지에서 양지로 나와도 되거든요. 돈으로 해결하면 되니까.

그걸 보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게 뭐냐? 얼마나 인간은 법에 대해서 주눅 들고 살고 있는지. 그런데 예수님은 법으로부터 해방이거든요. 그런데 피히테처럼 돼버리면 법으로부터 해방해버리면 어디로 돌아가요? 자유의 절대성으로 돌아가요. 피히테는 복음을 모르니까 법으로부터 해방된 그 자체가 바로 죽음 안에 갇혀있다는 다른 면인 것을 그들은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겁니다.

주께서 주신 것은 죽음으로부터 저주로부터 해방이거든요. 철학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없잖아요. 그럼 죽음을 경험했어요? 누가 천국 안 가봤잖아요. 지옥 안 가봤지요. 경험하지 않은 것은 이론상 있는 거예요. 피히테는 행동하는 실천하는 그것이 곧 진리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자살까지 해봐도 죽음 이후는 피히테가 경험 안 했잖아요. 그래서 칸트 말이 맞잖아요. 신과 자유와 영혼은 하나님께 맡겨야 된다고. 피히테는 그럴 필요 없다는 거예요. 왜? 행동하는 자체가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론상 절대자가 아니라면 피히테는 실천적 활동성 속에서 절대자를 뽑는 겁니다. 거기서 자유를 뽑아내지요. 어떻게 판단해야 되는가? 판단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거죠. 이래서는 모르겠지요. 예를 들면 됩니다. He is dead. 그는 죽었다. he는 주어에 속하고, 술부/술어에 속하죠. 否定판단은 서술에 대한 부정이에요. ‘그는 죽었다’의 반대말은 He is not dead. ‘그는 죽지 않았다’가 반대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否定판단이에요. 앞에 not이 들어가요. 그런데 밑에 입 구口가 없는 이 不定판단은 비非라 하는데 위에 것은 서술에 대한 반대를 否라 하고, 비서술에 대한 긍정을 非라 이야기해요. He is undead. 그는 죽지 않았다. 안 죽었다는 겁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이 문제가 똑같이 보이죠. 똑같이 보인다는 것이 우리의 평소 생활방식에서 얼마나 대충 살았느냐는 것이 들통 나는 겁니다. 그가 죽지 않았다는 말은 무엇을 근거로 하느냐 하면, 우리가 이미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다만 죽었다는 사실에 도달하지 않아서 죽지 않았다고 할 때 죽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는 안 죽었다는 말은 긍정이 뭐냐 하면, 비서술이 긍정이 되고 일종에 주어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죽음 말고 또 다른 넓은 의미로 죽음에 속한 인물이라고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죽음 말고 더 큰 우리가 아는 죽음 세계 바깥에 나가있는 사람이라서 그는 안 죽었다. 또는 안 죽는 존재라는 겁니다.

안 죽는 존재라는 것은 그게 아마 기계라든지 신이 되든지 그런 존재고, 죽지 않았다는 말은 아직 숨이 안 끊어졌다는 그런 말이거든요. 이제 이해되시겠습니까? 범위 문제지요. 우리가 아는 인간인데 아직 안 죽었데. 이건 죽지 않았다는 것이고, 당신은 어느 별에서 왔어요? 우리는 죽음이 없는 별에서 왔습니다. 그럼 안 죽는 사람이구나. 안 죽는 사람은 그 동네고.

바로 피히테가 아와 부아가 아니고 비아라는 말을 한 것은 내가 아는 절대세계와 전혀 관계없는 절대적으로 다른 세계를 염두에 두고 나를 절대세계로 배치, 자리 잡은 거예요. 이 이야기가 중요한데 아까 마가복음 9장이라 했습니다. 지옥은 어떤 데라 했습니까? 불이 꺼지지 않고 소금 뿌리는 세계라 했지요. 예수님이 오니까 사람들이 요셉의 아들로 봤습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본 거예요. 그런데 예수 입에서 나오는 발언은 둘 다 나와요. 위에 있는 부정판단도 나오고 밑에 있는 부정판단도 나오고 둘 다 나와요. not도 나오고 non도 나오고 둘 다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지옥 불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구약을 통해서 특히 다니엘 이후에 묵시문학이 많았거든요. 묵시문학에 지옥의 모습이 마귀가 들어가는 불붙는 내용이 나와요. 그래서 그것을 유대인들이 그대로 인수해서 지옥이라는 곳은 불붙는 곳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점을 예수님이 그대로 사용해요. 사용한다는 점에서 예수님이나 유대인이나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지지요.

그걸 사용하면서 그런 것을 당하는 것은 바로 그걸 사용하는 네가 당한다고 이야기해버린 겁니다. 그럼 누가 누굴 부정해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부정해버리죠. 부정하면서 예수님이 속한 세계는 그들과 같은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고 非, 다른 세계에 속한 겁니다.

이걸 기하학적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신화학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옛날 신화에 두 민족이 있는데 어떤 다른 민족이 이 마을에 왔을 때 마을의 구조를 그릴 때 이렇게 그립니다. 큰 원 그리고 작은 원 그리고. 큰 원은 기존에 원주민이고 작은 원은 투입된 자기 종족이고. 그런데 기존의 종족을 어떻게 그리느냐 하면, 하나의 원을 두 조각내서 그들은 여기 살고 우리는 여기 산다는 겁니다. 벌써 이런 기학적으로 인식이 다르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데 너희가 쳐들어왔잖아. 비겁한 것. 그러니까 일본이 한국에 와서 산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영토의 일부를 차지한 게 되잖아요. 그런데 일본 사람 보기에는 일부를 차지한 게 아니고 전체를 다 먹었다는 겁니다. 일본이 조선을.

예수님 안목으로 봅시다. 유대인 안목은 우리가 사는 동네에 예수님이란 낯선 사람이 왔다. 단도리를 잘 하자. 예수님 보시기에는 유대인이고 이방인이고 전체가 다 누구 소관입니까?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친히 만든 세계에 속하는 겁니다. 여기서 피히테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피히테는 부아가 아니고 비아에요. 내가 생각한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 그러면 둘 다 절대적이에요. 아 세계도 절대적이고 비아 세계도 절대적이에요.

비아 세계가 절대적이라는 말은, 내가 미처 모르는 게 있다고 해서 나를 부분으로 몰아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난 이렇게 맛있는 주스는 처음 봤어.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무식하다고 여기지 말란 말이죠. 왜냐하면 이걸 내가 모른다고 이야기함으로써 모른다고 이야기한 내가 이미 모르는 것까지 포함시킨 절대자가 되는 겁니다. 난 이건 할 줄 몰라. 이것이 그만큼 똑똑하다는 뜻이에요. 내가 뭘 모르는지 안다는 게 그만큼 똑똑하다는 뜻입니다. 뭔 뜻인지 아시겠어요?

그리고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닙니다. 나는 비타500이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는 말은 이미 나한테 경험된 거잖아요. 경험됐으면 내 욕구가 가만있습니까? 이미 경험된 것을 차지한 이상은, 만든 제조성분은 모르지만 이미 먹었다는, 경험했다는 말은 내 품 안에 들어온 셈이 돼요. 따라서 나는 이게 뭔지 몰랐다는 점을 포함시킴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나한테는 모르는 게 안 남아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 말고 다른 주스가 왔다. 다른 주스가 와도 마찬가지에요.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절대성에 의해서 저건 나의 비아가 되는 겁니다. 내가 비아가 되는 이상은 나는 무식한 게 아니고 저건 비아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자체가 이미 나는 그쪽 세계를 경험했다는 게 되고 경험하게 되면 그쪽 세계도 내 세계로 포함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말장난처럼 느껴지십니까? 피히테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는 이유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마귀가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네가 신처럼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그때부터 아담과 마귀가 타조처럼 빠르고 절대로 안 죽고 그런 뜻입니까? 피히테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는 안 죽습니까? 죽어요. 그리고 힘들어요. 그래도 본인은 본인을 힘들고 어렵고 무지해도 본인이 전부라는 사실을 아무리 힘들어도 한 순간도 포기 안 해요.

너, 무식하지, 힘들지? 우리 집에 와서 노예 되어라. 이러면 내가 못 먹는다 할지라도 내 자존심을 포기할 수 없다. 그게 바로 마귀적인 생각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모습이잖아요. 그걸 피히테가 철학적으로 묘사하는 거예요. 무지하고 무식해도 뭔가 자기 절대성은 어느 순간도 놓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이래놓고 교재 봅시다. 173페이지 밑에서 네 번째 줄에, [하나님의 개념이 특별한 실체로서는 불가능하며 오히려 모순된다는 것이다.] 피히테는 말합니다. 173페이지 제일 위에 보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다. 하나님은 영원한 큰 강의 원천이다. 생명과 능력과 행위, 즉 근원적인 생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그분의 생명으로부터, 무한한 자로부터 흘러나온다. 왜냐하면 생명은 그분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눈만이 참된 아름다움의 나라를 본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절대적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뒤에 칸트 이야기하면서 칸트는 생동감 있고 활동하는 이걸 하나님이라 보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인격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내가 움직이는 것, 이게 하나님이지 하나님을 대상으로 봐서 하나님은 나처럼 생긴 어떤 분, 이렇게 되면 그게 특별한 실체가 되는데 특별한 실체는 이 땅에 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특별한 실체로서는 불가능하면 오히려 모순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 페이지 봅시다. 174페이지. [이와 마찬가지로 피히테에 따르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표상한다는 것은 자기당착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되면 나의 대상이 돼버립니다. 대상이 되면 인간이 만든 하나님이 돼요. 비아가 된다니까. 그런데 비아는 그냥 있다, 없다? 비아는 반드시 결국은 내 자유, 내 욕구에 의해서 비아는 내게 흡수가 된다면 최종적으로 절대 자아를 만들어주신 그분이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내가 어떤 대상으로서 바깥의 하나님을 믿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섬길 때만 섬기고 안 섬기면 하나님이 없게 돼요. 왜? 경험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피히테는 자아는 곧 자아 경험입니다. 자아 경험에 대해서는 지금 내가 활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뭐든지 행위하고 있다는 겁니다. 행위하고 활동해야 되지 앉아서 이론적으로 따지면 안 된다는 거죠. 내가 하나님 생각할 때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 생각하지 않으면 자기만 생각하고. 그래서 무슨 하나님이 묘사되느냐 말이죠. 내가 쉴 때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내가 하나님 생각 안 할 때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내가 하나님이 생각할 때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그게 바로 하나님은 영원한 큰 강의 원천과 생명과 능력과 행위, 특히 행위, 모든 행위, 근원적인 생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원천이라고 돼있어요. 모든 것의 원천이란 말이죠.

172페이지, [피히테의 경우에 칸트와 달리 이론적 철학과 실천적 철학이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 뒤에 계속 봅시다(174페이지). [이 표상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즉 인격성과 의식이라는 것은 제한과 유한성을 전제하지 않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인격을 가졌다는 말은, 하나님이 유한의 대상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자아가 비자아 때문에 자아는 순간적으로 유한이 돼버렸어요. 유한은 유한으로 머무는 게 아니고 그 비자아를 내 것으로 통합시킴으로써 우리는 다시 유한자가 아니라 무한자로 확인되는 거죠. 무한자로 확인되기 위해서 인간은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날마다 비자아를 만들어 내놓고 자기 것을 만들면서 경계를 짓고 경계 진 것을 통합시키는 작업, 행동을 하면서 인간은 절대자 맞는다는 걸 확인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데 왜 우리 바깥에 하나님을 세워놓고 하나님을 찾아가야 만나는 유한자로 세웁니까? 우리가 유한한 것뿐만 아니고 하나님조차 우리를 못 찾아오는 게 돼요. 우리가 찾아가야 만날 하나님 같으면 하나님 자체가 무한한 분, 절대적인 분이 아니고 유한한 분이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피히테에 의하면.

[따라서 그 본질은 이런 술어가 첨부됨으로써 우리들에게 유한자가 되며 우리 같은 이들에게 본질이 된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들이 원했듯이 아무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 ..... 이런 언급은 기독교의 하나님의 이해가 인간의 투사라는 점을 비판했다.] 결국 하나님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피히테가 비판하는 거예요.

그러면 도덕이 뭐냐는 문제지요. 이 세상은 윤리, 도덕이 없으면 못 사는데 윤리, 도덕은 어떻게 생기는가?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피히테는, 간단하게 말씀드려서 이렇습니다. 윤리, 도덕이란 자아와 비자아, 양쪽 다 경계선에서 만남으로써 둘 다 반성을 하게 돼요. 반성하는 자체가 이것이 도덕이 돼요. 반성을 유발하는 동기가 하나님이 주신 활동력/활동성입니다. 피히테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움직임 자체가 반성을 유발하는 활동이란 점에서 대단히 도덕적이고 자기 이론이 윤리적 이론이 된다는 거죠.

어떤 사태가 일어나고 어떤 만남이 일어나고 어떤 물건을 만나도 나는 비타500을 먹기 전까지는 비타500이 우리 목이나 축이고 영양분 주는 줄 알았는데 고속도로에서 잠 깨우는 줄은 처음 알았어요. 이게 반성이에요. 그런데 그 반성하는 동시에 비타500이 훌륭합니까? 아니에요. 그렇게 비타500을 보고 한 것이 비아가 한 게 아니고 자아가 했잖아요. 자아가 반성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경험했잖아요. 이런 새로운 면이 있구나. 고속도로에서 졸음 쫓을 때 이게 최고구나. 알 때 나는 다시 절대자가 되는 겁니다.

피히테가 말하는 도덕과 윤리란 것은 나만 잘났다는 말이 아니에요. 활동 가운데 내가 맨날 반성해야 될 존재로서 주께서는 우리를 절대자로 만들었다는 사실, 이게 피히테의 사상입니다. 이 사상 끄집어내는 데 애먹었다.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이론적으로 홀로 있으면 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아니고 날마다 반성해야 돼요. 반성하게끔 하셔서 절대자로 신의 자녀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었다는 이 사실을 내가 알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너도 신이야, 너도 무한자야, 라는 취지에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이게 피히테의 사상이라니까요.

그런데 칸트는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인간은 교만하면 안 되고 겸손해야 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잘나도 자기 분수를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그건 뭐냐? 영혼의 문제, 아버지 왜 날 낳았어요? 그런 식으로 건방지게 질문하지 말고, 영혼의 문제, 신의 문제, 자유의 문제는 하나님께 달린 문제지 우리가 건방지게 현상계에 속하면서 신의 세계까지 넘보는 그런 교만은 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그저 아무리 해도 부족하고 아무리 해도 못났다는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도덕을 지키는 자유스런 마음이란 거죠.

방금 제가 피히테 이야기하고 칸트 이야기했는데 여러분 똑같이 들리지 않습니까?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릴까요? 차이점이 뭐지요? 제가 아까 했지요. 피히테는 끝까지 가지요. 끝까지 가면 이렇게 부족하고 신 앞에서 연약한 인간이라고 알게 하신 그것이 절대적인 활동성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작품이고 그 결과가 우리 자신이라는 거예요. 그게 피히테 생각이에요.

여기 174페이지에 봅시다. [무신론 논쟁 본문에서는 인간의 운명에서 직접 다루어진 것처럼 피히테는 우리 안에 있는 실천 이성의 도덕적 의욕을 생각했다. 반면에 뒷날 기획한 지식학에서는 우리에게 작용하는 빛에 대해서 언급했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면 도덕적 의욕들이 생겨난다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이 신을 인격자로, 174페이지 밑에 보면, [전통의 유신론적 하나님의 표상인 ‘신인동형동성론’을 피할 수도 있다.]

신인동형동성론이 뭐지요? 인간이 생각하는 감정만큼 하나님도 같이 생각한다는 뜻이지요. 성경에도 나오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후회하신다. 신인동형동성론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한탄하사, 이런 것. 하나님이, 너희들 괜히 지었다, 이런 것.

그걸 해석하면서 사람들은 뭐라고 정리했느냐 하면, 신도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진 인격체라고 신학에서 규정했거든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신에게도 이성과 의지와 감성이 있다고 본 겁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과 의지와 감성은 신으로부터 왔다고 본 겁니다. 그걸 신과 인간의 공유적 속성이라고 조직신학에서 가르쳐요. 더 나가서 그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거룩과 의로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동물과 달리 의와 거룩함을 줘서 인간을 만들기 때문에 천주교에선 인간이 타락해도 아주 타락하진 않았고 인간 속에 있는 의와 신,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있어야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졌다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 신도 속성이 사랑이고 그 사랑이 이미 우리 속에 이미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은 사랑을 찾아서 오게 돼있기 때문에 둘이 만나면 스파크 일어나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잠재돼있던 그동안 잠자고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말씀이 오게 되면 잠자는 형상이 자극을 받아서 형상을 일깨우면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본받게 되고 그게 바로 성화론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피히테는 어떻게 봅니까? 그런 신인동형동성론이란 게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에서는 인식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으로 구분돼요. 인식되는 것은 대상이요, 곧 세계요, 세상입니다. 인식하는 것은 자아에요. 인식하는 게 있기 때문에 인식되는 게 있지요.

귀신 봤나? ufo 이야기하는 사람과 제일 말이 안 되는 게 그거잖아요. ufo 없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ufo 믿는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나는 ufo 봤는데 너는 안 봤기 때문에 그런 소리한다는 거예요. 그럼 ufo는 뭡니까? 인식된 거고, ufo 본 본인은 인식한 사람이죠. 인식된 것은 인식하는 걸 위하여 인식된 거예요. 인식하는 사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인식되는 게 있단 말이죠. 경험했으니까. 그런데 ufo 본 사람이 말하기를 전에 ufo 봤다고 했잖아. 그런데 사진판독 해보니까 ufo가 아니고 그게 조개구름이었대. 구름이 햇빛에 반사되어서 반짝였대. 내가 ufo 봤다는 것 취소할게, 라고 했을 때는 그걸 반성. 인식한 것 아, 인식된 것 비아. 둘 다 반성을 하면서 둘 다 자아가 본부에요. 본부 속으로 돌아온 거예요.

내가 신인데 신이 지금 나에게 능력을 줬는데 왜 자꾸 구체화시키느냐는 말이죠. 예배드리고, 왜 그런 짓 하느냐는 말이죠. 피히테는 그걸 우상숭배라고 본 거죠. 그럼 피히테, 당신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느냐? 우리 마음속에 활동력을 주신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반성하는 도덕성을 준 거예요. 날마다 자기반성에 열중하는 그것이 도덕적인 성품이고 그걸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겁니다.

그럼 그게 원활하냐? 원활하지 않지요. 왜 원활하지 않느냐? 그게 바로 아까 반성이란 말을 했잖아요. 반성은 반드시 장애요소가 있어야 돼요. 예를 들어봅시다. 아까 목사님 이야기한 게 좋은 예가 되네요. 비타500을 마시는 비타민c라고 봤는데 나는 몰랐지. 고속도로에서 졸음 쫓는데 최고라고.

모른다는 것은 내 절대성에 장애요소지요. 뭐든지 아는데. 왜냐하면 지금껏 아는 것 아니까. 피히테 논리는 간단한 거예요. 우리가 지금껏 아는 것 안에서는 신이라니까. 다 알아요. 곧 죽어도 신이에요. 노숙자도 신이에요. 얼마 전에 부산에 중국영사관에 노숙자가 벽돌 던진 것 알지요. 지는 나름대로 애국자라니까요. 왜 던졌느냐고 하니까 중국의 태도와 북한의 나쁜 짓을 생각해서 벽돌 던졌다는 거예요. 지 밥벌이 할 생각은 안 하고 국제정세를 생각했다고. 나름대로 애국자라니까.

왜 그렇게 합니까? 자기가 국제정세에서 나름대로 신이에요. 다 알아요. 그 사람이 모르는 게 뭐냐 하면, 대사관에 벽돌 던지면 안 된다는 걸 몰랐지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앞으로 안 하면 되잖아요. 잡혀 가서 알면 돼요. 장애요소를 알 때 반성할 때 그게 뭐냐? 나는 스스로 반성하고 내가 조금 더 신이 될 수 있는 자유가 이미 내게 장착돼있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그러니 문제될 게 없지요. 무식해도 괜찮고 노숙자 되도 괜찮아요. 왜냐? 자체적으로 나는 이미 태어난 자체가 신이기 때문에.

신인동형동성론 밑에 보면, [여기서 순환적이라는 말은 다른 자아와 절대 자아의 대립이 순환한다는 것인데 이 절대 자아는 절대와 구별된 구성적 토대를 필요로 한다.]

무슨 말인지 그냥 넘어가고요. 순환한다는 것, 이걸 주의하면 돼요. 자체적인 순환이 계속 되는 거예요. 아에서 비아로, 비아에서 다시 아로, 그런데 새로운 사태가 일어나면 반성이 되고 절대적 자아가 비아를 만들고 비아를 통해서 내 자신의 무한과 한계를 느끼고 한계를 느낀다는 자체가 절대성에서 나오는 활동성으로 이어져서 욕구와 욕망으로 이어져서 그것이 또 나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고 자유케 해서 신이 만든 날마다 반성하는 도덕성을 일구어나가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든 내용이라는 겁니다.

하여튼 공부를 하게 되면, 어떤 학자들의 이야기에 나름대로 허점이 없어요. 완벽하지 않습니다. 칸트 이야기할 때는 나름대로 완벽했고, 안셀무스 이야기도 완벽하고, 피히테 이야기도 완벽하지요. 그리고 피히테는 더욱 더 완벽한 게 뭐냐? 부아, 내가 아닌 정도가 아니고 비아. 비아란 말은, 내가 아니라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마을의 일부를 이야기하지만 비아란 전체 속에 나타난 새로운 전체, 장애요소라고 여긴 속에 내가 알아야 될 새로운 신의 세계가 장애요소 안에 포함이 돼있는 거예요. 이게 비아지요. 내가 생각도 못한 내가 만약에 미처 몰랐던 게 있으면 그건 내가 절대자가 되고 부분자가 돼요.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비아로 등장하면 그 비아를 통해서 나는 반성하면서 다시 절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겁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피히테는 끝까지 간다고 했지요. 끝까지 가보면 천상천하유아독존, 이것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 나만 남아요. 물론 여기 존재자로 나를 말하는 게 아니고 활동하는 나. 들어보니 어떻습니까? 너무나 불교적이죠.

그러면 여러분이 피히테를 알았다 치고 피히테에 대해서 복음적으로 반박해보세요. 반박 안 되지요. 다 맞는 말이니까. 피히테한테 물어보세요.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자기의 신 됨을 믿지요. 그러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자기가 아니고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누구에요? 예수 그리스도지요. 그런 의미에서 피히테 공부가 진짜 중요한 공부에요. 내가 누군지 제대로 알려주니까. 나는 누구밖에 모른다? 예수를 믿든 결국은 다시 나에게로 소급하니까. 내 믿음을 믿고 예수 앞에서 복음 안다는 나 자신을 믿는 이것이 바로 내가 보여줄 궁극적인 악마의 모습이죠. 그걸 아까 이야기한 터널로 파고들어가는 거예요.

강의 다시 해보겠습니다. 철학이나 신학은 뭐냐?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아는 남들이 뭘 알고 있을까? 피히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들어보니까 결국 기드온에 나타난 하나님은 이런 걸 주면서도 내부적으로 파고들어가죠. 파고들어가 보니까 거기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지난 낮 설교처럼 우리는 습자지에 불과하고 그 안에 마귀가 들어있지요. 그런데 그 마귀를 들춰내시는 분은 내가 아니고 나를 날마다 죽이시면서 내 안에 예수님이 나로 하여금 그 안에 들어있는 마귀가 이런 식으로 병들게 했다는 것을 밝혀내지요.

피히테는 그런 예수를 믿는 내가 있잖아, 라는 거예요. 제 이야기 다 듣고 피히테가 옆에 있다면, 글쎄 그렇게 믿는 게 니 자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십자가 앞에서 누굴 부인하라?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지요. 피히테에서 배울 것은 뭐냐?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매일 삶을 통해서 자기를 부인해야 되는 것이고 피히테는 매일 삶을 통해서 자기를 긍정해야 되는 것이고.

그런데 피히테가 개혁주의신학이에요. 날마다 자기 잘난 맛에 자기 신앙 좋은 맛에 살아가는 이만하면 됐다는 자기 절대성, 그런 쪽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개혁주의신학의 이론에 의하면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 듣는 자는 신이라는 그 대목을 그런 식으로 긍정적으로 사용해버려요.

그 본문으로 설명해보라 하면 그 사람이 개혁주의자인지 복음 아는 자인지 대번 들통 나요. 사실은 예수님이 그 당시 유대인들이 했던 사고방식을 인용해서 참조해서 하신 말씀이잖아요. 니들의 주장에 의하면 네가 신이라면 내가 내 말한다고 신이 아니라고 하느냐? 그런 투로 이야기하셨단 말이죠.

요한복음 몇 장이죠? 그것만 보고 마치겠습니다. 10장입니다. 10장 35절,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이 대목에 대해서 우리 신 맞잖아. 피히테가 맞네. 피히테가 인간을 절대자 신이라 했잖아요. 요한복음 10장 35절 그대로 해석한 거네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아요? 모든 성경은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는데 피히테는 모든 성경은 나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게 피히테와 복음의 차이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철학적인 말을 들으면서 곧 우리가 평소에 생각했던 말이 생각들이 펼쳐졌습니다. 십자가 앞에 주께서 죽으신 것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우리는 죽고 주 안에서 그리스도만 산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경험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50310b 부산강의.hwp (49.5K), Down:14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71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