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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5. 2. 27) 1강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 강의(2015. 2. 27) 1강

이름 : 서경수(IP:118.35.138.177)

광주 강의(2015. 2. 27) 12-1

마가복음 4장 3절에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라고 되어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이 구절을 ‘천국에 대한 비유’라고 했어요.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는 것과 구원이 관계 있습니까?

‘천국은 저기 있고, 너희는 여기 있으니까 이렇게 하면 천국에 간다.’라는 식으로 정확하게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피곤하냐? 그렇다면 비타 500을 먹으라.” 이렇게 하면 얼마나 간단합니까? 목적이 있고, 목적에 이르는 방법이 있으면, 그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면 굉장히 간편하지요.

‘씨 뿌리는 비유, 농사짓는 이야기를 주님이 왜 하시는가? 별 소용도 없는 이야기를 왜 하셨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아시고 그걸 거부해 버립니다. 우리의 질문은 ‘우리가 여기 있고, 천국은 저기 있는데 어떻게 하면 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는 것인데, 주님 대답은 ‘저 천국도 가짜고 너도 가짜다.’라는 것입니다.

세상 자체가 가짜고, 세상살이도 가짜고, 있다고 하는 것도 나중에 사라질 것들입니다.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있으면서 천국을 구상하고, 그 천국에 가겠다는 구상도 일시적인 현상이지요. 그저 잠에서 꿈을 꾸다가 깨어나면 그만인 꿈에 불과한 겁니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면 인간들이 이해하는 천국과 전혀 다르기에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파괴해 버립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은 천국 비유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천국 비유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칙 네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비관계. 2) 무. 3) 주체. 4) 하나님. 여기 순서를 보면 하나님이 언제 등장합니까? 하나님이 등장하려면 비관계, 무, 주체를 거친 후에 등장하십니다. ‘비관계’란 관계없다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아예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데 사람들이 4명 있다고 합시다. 이 중에 내 동창생이 있다면 이것은 ‘관계’죠. 그러면 동창생이 아닌 사람들은 ‘무’관계가 되는 겁니다. 이들은 동창생이 아니니까 모르는 사이죠.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이 중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관계가 무관계(관계없음)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비관계’는 뭔가 하면, 안다는 것도 아는 것이 아니라면 관계없다는 것도 관계없는 것이 아니게 되는 거예요.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광주 집사님 집에 있는 [비타 500]을 내가 대구 있을 때는 이런 것이 있는 줄 몰랐지요. 그러면 이것이 있더라도 나에게는 ‘무관계’가 아니고 ‘비관계’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광주에 오니까 비로소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데 “나는 너희를 구원한다.” 이것이 아니고, 주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우리에게 이를 때 비로소 주가 원하는 관계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주님이 나를 찾기 전에는 우리는 주님과의 ‘비관계’ 속에 있는 거예요. ‘무관계’가 아닙니다. 아예 관계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상태란 말이지요.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끊어졌다는 것은 ‘나는 다른 사람은 아는데 주님은 몰랐다.’ 이런 경우에는 ‘관계있다, 관계없다’가 성립 되는데, ‘비관계’가 되면 ‘나는 저 사람을 안다.’는 것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은 이런 거야. 천국은 이런 거야. 저 사람은 내 동창생이야.’ 이것을 내가 일방적으로 말했을 뿐 아무 관계없는 거예요. 어쨌든 이 ‘비관계’는 2단계 ‘무관계’에서 밝혀집니다. ‘무’는 없다는 것인데, 없다는 말은 없다는 것이 나타나야 되는데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은 없는데서 있게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비관계가 아니고 관계, 혹은 무관계 속에서의 무에서 유는 신학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만들었지요?” “없는데서 있게 했습니다.” 이게 엉터리입니다. 이게 왜 틀렸는가 하면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없던 곳에서 현재는 있게 되었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이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옳은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있어도 내가 스스로 있다고 인정한 것이지 주님이 나타나서 “네가 여기 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손에 만져지니까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내가 나를 규정할 때 하는 짓입니다. 화장실 밖에서 노크를 할 때 안에서도 노크를 하면 안에 사람이 있다는 신호지요. 그 때는 노크 소리를 듣고 사람이 있다고 판단하잖아요.

주님이 노크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반응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왜냐? 주님이 늘 노크를 해도 우리는 바람소리인지 천둥소린지 몰라요. 그러니 주님께서 의미 있게 노크하는 순간이 있어요.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사울에게 주님이 노크를 했을 때, 다른 사람은 ‘우레가 쳤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울은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했어요. 그 때 예수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런 대화는 주님과 사울간에만 오고갔을 뿐 사울과 동행한 사람은 전혀 몰랐습니다. 사울은 그 이전에는 주님과 비관계에 있었던 거예요. 관계라는 말도 쓸 수 없는 상태에 있었던 거예요. 그렇다면 그 때부터 사울이 한 모든 행동이 주님을 핍박하는 관계로 주님 쪽에서 그 관계를 의도적으로 형성시키고 만들어낸 겁니다.

어떤 부부가 있는데 여자 쪽에서 먼저 성령을 받았어요. 성령 받기 전에는 교회 가서 성경을 보니까 믿지 않는 남편과는 이혼할 수 있다고 해서 남편과 이혼하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자기가 여기 있고 주님이 저기 계시니까(관계지요) 내가 주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내 남편은 무관계로 내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성령을 받고 보니 ‘저 남편을 왜 나에게 붙여 주셨을까? 불신 남편을 나에게 붙여주신 것도 하나님의 관계성 때문이구나.’라고 깨달아지지요. 그 때 비로소 그 전의 상태는 비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아야지.’ 이것은 비관계에 있는 겁니다. 아무리 믿어도 천국 못가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 믿어서 접근해서 나를 천국 보내려는 모든 시도는 복음이 아닌 환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일을 벌려 찾아오고, 찾아오심을 내가 느낄 때 비로소 주님과 나는 관계에 돌입되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관계가 아니고 비관계의 행위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는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라고 여기는데 아닙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내 쪽에서 하는 모든 것은 비관계고, 주님 쪽에서 조치하는 모든 것이 관계가 되어 우리가 일방적으로 구원 받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인간은 누구나 ‘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여기 있으니까 누가 나를 욕하면 화나고, 누가 성령 받아서 천국 간다고 하면 나도 천국 가고 싶고, 이 모든 출발점이 내가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말이 맞아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여기서 있을 때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생각하면서 있으니까 이것을 데카르트는 진리로 봤습니다. 내가 있다는 것에서 시작해서 언어가 발달합니다. 언어, 문장, 대인관계, 교회 다니기, 하나님 믿기 등 모든 것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없다.’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설정한 관계 속에 천국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했지요. ‘부자가 천국 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만큼 힘들다.’고 할 때, 제자들이 묻기를 ‘그러면 누가 천국 갑니까?’라고 했어요. 예수님 입에서 나온 모든 이야기를 주와 나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인정하기 위해 채워 넣는 겁니다. 이 자체가 반칙이죠.

채우지 마세요. 그냥 막 사세요. 듣고 잊어버려야 해요. 왜냐? 우리는 듣고 잊어버려도 주님께서 관계로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지요. 마치 사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것처럼 뒤늦게 느껴진다니까요. 뒤늦게 느껴지고, 어떤 때는 순간순간 느껴지고.

‘내가 왜 있지?’ 전에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다가 ‘아니 내가 왜 있어야 하지? 없어도 되잖아! 그런데 왜 있지? 사는 것이 힘드니까 죽어버릴까?’ 스마트폰 조작하는 것이 괴로우니까 투신자살할까요? 처리를 해도 본인이 자살해서 처리하려고 해요. 처리하지 마세요. 그래서 자살이 죄가 되는 겁니다. 갑자기 자살한 목사가 생각나네요.

그럴 필요 없어요. 주의 말씀을 오해해서 그래요. 주의 말씀은 우리의 있음을 기정사실로 하지 않습니다. 가수 전영록이 불렀던 노래 가사 중에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 필요하면 지우개로 지워야 하니까.” 이런 게 있어요. 내가 나를 지워도 나는 있어요. 그러나 내가 안 지워도 나는 없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나를 다룰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를 주관할 수 없어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여기 있는 것이 하나님 계신 거예요. 몰론 내가 하나님이란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있다면 나에 대해서 관여하지 맙시다. 이 세상 모든 일에 주제넘게 관여하지 맙시다.

관여한다는 자체가 수상해요. 주께서 말씀 주시는 것은 ‘가만히 있어! 관여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4절처럼. 이런 말씀이 사무엘상 12장 16절에도 나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만히 있는 것입니까? 설치면 됩니다. 어떻게 설치는가? 막 설치면 돼요. 막 설치면서 가만히 있는 방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설침도 의미를 두지 마세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실 때 이런 식으로 사셨습니다. “아버지여, 다음에는 뭘 할까요?” 아버지께서 차려놓으신 밥상입니다. 다음에 어느 반찬을 먹을까요? 어떤 일을 하면 됩니까? 그것은 아버지께서 일을 만들어요. 시간은 채우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지 말고 본인이 뭔가 움직이면 움직이기 전에 생각했던 시간과는 다른 새로운 시간이 나와요. 우리는 늘 시간을 품고 있고 시간을 토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사로 일하다가 퇴직해서 보내는 시간과 교사로 있으면서 아이들과 보냈던 시간이 같은 시간이 아닙니다. 달력으로는 같은 시간이지만 본인이게는 같은 시간이 아니에요. 그래서 시간은 수천만 개가 됩니다. 다 다른 시간입니다. 1시간이다. 이것은 과학적 사고방식이고, 시간은 행동에 따라 새로운 시간이 만들어져요.

미래를 상상하고 꿈꾸는 한가한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시간이 창조되고 있습니다. 감이 그냥 있을 때와 깎아 먹을 때는 달라요. 깎으면서 새로운 시간이 만들어졌어요. “감이 참 맛있다.” 뭔가 새로운 창조가 만들어진 거예요. 나중에 오늘 감 먹은 것을 회상할 수도 있고 --

어쨌든 간에 새로움이 나왔잖아요. 그러니 시간을 때우려 하지 말고, 내 시간을 만들어 가면 됩니다. 그래서 ‘시간은 의식이다.’ 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들이 자기 있음을 근거로 해서 구원 받고, 복음 받으려 한다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 “가만히 있어! 이제부터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새로운 시간을 창조할 거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천국입니다.

천국에 가면 그 모든 것을 누가 만들었지요?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예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모든 근거가 뭡니까?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천국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고 내가 만든 내 세계, 내 시간 밖에 모르는 인간이기에 인간들이 천국 못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천국을 생각해도 그 천국은 주님의 천국이 아니고 나의 천국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늘 내가 생각하고 나의 현실만 아는데 그런 자가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준비된 것이 2, 3, 4번째 단계입니다.

첫 번째는 아시겠지요? 인간은 자기 존재에서 관계를 만드는데 주님이 오게 되면 그 관계는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되는 관계다. “주님이여, 헌금을 많이 하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것은 나에게서 출발한 관계이기에 안 됩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꼴 보기 싫기에 저 사람과 관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멀리해서 그것으로 무관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나에게 도움을 주고 필요한 상황이 올 수도 있어요.

“나는 네 얼굴은 절대 안 보겠다.”고 해도 주께서 상황을 만드시면 10년 뒤에 그가 나의 생명의 은인으로 다가올 수도 있어요. 어쨌든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것은 다 엉터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냥 막 살면 돼요. 그러면 주께서 알아서 조립해 주십니다. 믿으세요. 왜냐하면 이 세상이 주님의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아요.

오늘 아침에 미국에 계시는 어떤 분이 전화를 했어요. 이분은 전화만 하면 30분 이상 통화를 해요. 여자 선교사인데 전화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설교는 다 이해가 되는데 한 가지가 잘 납득이 안 됩니다.”라고 해요. 그 한 가지가 뭔가 하면, ‘어떤 선교사 말을 들으면 이슬람 사람에게 잡히면 36번 찔러서 죽인다는데 나는 36번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실수하면 되잖아요.”라고 했어요. 실패하면 됩니다. 믿음에 실패하면 되잖아요. 그만한 믿음 없습니까? “예, 이제부터 예수 안 믿고 알라 신 믿을 게요.” 이렇게 실패하면 되잖아요. 왜 실패 안 하려고 합니까?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예수님이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는데,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이미 죽으셨는데--

주께서 이미 벌이신 일이 우리의 실수 때문에 취소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동안 뭘 믿었습니까? 우리는 실수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인간에게는 성공이 없습니다. 아무리 결심을 하고 노력을 해도 인간은 믿음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사가 필요 없어요. 예수님의 피 제사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 얘기를 듣고 “이제 해결됐습니다.”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어요.

‘실수해도 됩니다.’ 이 한마디가 오늘의 교훈입니다. 우리가 실수 안 한 적이 있던가요? 만약 전임자가 교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떠났는데 내가 후임자로 간다면 나는 참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왜 교실을 이 지정으로 만들어놓고 갔냐? 다음부터는 이렇게 하지 마라.’고 따졌을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도 ‘내가 너무 경솔했나? 혹시 목소리를 너무 높여서 말을 했나?’ 또 되돌아보겠지요.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늘 실수합니다. 목소리 높인 것만 실수가 아니고 모든 것이 다 실수입니다. 인생은 출발부터 끝까지 실수의 연속입니다. 왜냐?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모든 일이 실수입니다.

주께서 이것을 아시고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거예요. 왜 씨를 뿌립니까? 왜 주님이 일방적으로 씨를 뿌리냔 말이지요. 천국을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말씀으로 천국을 만들어야 됩니다. 우리는 주께서 어떻게 천국을 만드시는지를 알면 됩니다.

이제 두 번째로 넘어갑시다. 무(없다)는 것은 내가 여기 있는데 없을 때가 있다는 식의 무가 아닙니다. 있는 인간이 무를 생각하면 그 무(없음)는 있음에 포함이 됩니다. 이게 바로 불교의 한계요 실수입니다. 불교는 자아가 있으면 욕심이 생기기 때문에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 자아를 없애려고 했는데 자아가 없어지지를 않아요.

있음이 생각하는 없음은 넓은 의미의 있음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없음은 있음의 반대 명제라고 합니다. 있음과 없음이 짝을 이루는 거지요. 있다고 할 때는 반드시 없음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있음이란 말 속에는 반드시 없음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없음은 있음 안에 들어있는 없음이기 때문에 이것은 가짜 없음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없는데서 만들어내는 것, 말씀으로 창조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의사에게 환자가 찾아왔는데 그 환자가 기침을 해요. 이 기침을 증상이라고 하지요. 이마를 만져보니 열도 납니다. 열도 증상이고 또는 징후라고 이야기합니다. “감기에 걸렸네요.” 라고 진단을 합니다.

환자가 묻습니다. “감기가 왜 걸렸지요?” 의사가 하는 말이 “당신이 피곤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식사도 제 때 못하고 무리하다보니 면역력이 저하되어 바이러스가 침투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면 환자가 그 말을 듣고 가면 되는데 또 묻습니다. “바이러스는 왜 있지요?” “그것은 진화론적으로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처방전대로 약국에서 약 먹으면 됩니다.”라고 하지요.

무엇을 설명할 때 항상 있음은 있음을 가지고 설명해야 되고, 그 있음은 또 다른 있음으로 설명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계시기 전에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또는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지?’ 이런 의문이 생겨요. 따라서 진짜 없음이란 있음으로 아무리 해명해도 해결되지 않는 그런 상황이 바로 무(없음)가 돼요. 이것을 성경적 용어로 표현하면 ‘죄’입니다.

왜? 설명을 못하니까 진리가 아니고, 진리가 아니니까 죄가 됩니다. 정확하게 무엇인가를 몰라요. “진리가 무엇이냐?” 이 질문은 “이발소가 어디 있습니까?” “미장원 옆에 있습니다.” “그럼 미장원은 어디 있습니까?” “이발소 옆에 있습니다.” 이런 말과 같아요. 이런 대답은 하나마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 사람들을 그 말을 들으면서 해석의 한계를 가져요. 아무리 설명해도 설명이 안 되는 한계를 가져야 돼요. 첫 번째는 뭔가 하면, 인간은 자기와 얽힌 가상적 현실로 하나님, 천국을 이해하다가 주님이 오시면 그 모든 것이 엉터리인 것이 드러나고. 두 번째는 주의 말씀을 해석하려 하는데 아무리 해석해도 안 돼요. 주춧돌이 하나 모자라서 옆에 것을 뽑아 빈자리를 메웠는데, 또 옆에 빈자리가 생기는 식입니다. 세 번째로, 해명이 안 되면서 마지막 도달되는 지점이 있어요. 유에서 유로 돌아다니다가 마지막 결론은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여기에서 주체가 나와요.

주님 말씀은 인간의 주체가 마귀라는 사실을 들춰냅니다. 우리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내가 주인이라고 유발시켰던 그 작업현장(에덴동산의 선악과 따먹은 그 현장) ---. 선악과 따먹고 난 후 제일 먼저 한 행동이 뭡니까? 자신의 벌거벗음을 가렸지요. 벌거벗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그 전에는 벌거벗었다는 것 자체가 없지요.

자아가 두 개가 된 거예요. 벌거벗은 자아와 안 벌거벗은 자아 두 개로 나눠져 버린 거예요. 이것을 고칠 병원이 없습니다. 자아가 두 개 되니까 자기가 자기를 보니 창피한 거예요. 그러니까 더 무서운 것은 내가 나에게 늘 쫓깁니다. 사람이 평생 고칠 수 없는 병이 누구한테 쫓겨 다니는 것입니다.

고기 먹고 싶다는 부모한테 효도한다고 가난한 집 아들이 공동묘지에 가서 시체의 다리를 가지고 오는데, 뒤에서 따라오면서 “내 다리 내놔라!”고 합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자기 의’가 따라온다고 합니다. “네가 그런 인간 아니었잖아?”

오늘 낮에 버스타고 오는데 뉴스에서, 화성에서 74세 동생이 82세 된 형을 엽총으로 살해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술 먹고 돈 내놓으라고 합니다. 엽총 팔아서 술 먹으면 안 되나? 엽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냥하러 다녔다는 말이고, 사냥을 한다면 4륜구동 차를 타고 다닌다는 말이고, 한 때는 돈도 좀 있었다는 말이잖아요.

그 사람이 엽총으로 경찰과 형과 형수를 죽이고 자살했는데 왜 그랬습니까? 그 사람 속의 마귀가 그들을 죽인 거예요. 마귀가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돈 없는 인간이 아니야. 너는 돈 없으면 안 돼.”라고 하면서 쫓아온 거예요. “너는 돈을 쓰면서 사냥도 하고 즐겁게 살 사람인데 돈 없어 술이나 마시고 비참하게 살 인간이 아니야.” 이게 계속 따라온 거예요.

모든 사람이 자아가 두 개입니다. 이건 고질병입니다. 평생 이 병을 못 고칩니다. [님아,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들 모두 정신병자입니다. “아이고 영감, 당신은 죽어서 차가운 흙속에서 자는데 나는 따뜻한 방에 자네. 잠을 못자겠다.” 이게 제 정신입니까?

모든 사람은 다 정신병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죠. 다른 사람은 자아가 두 개인데 예수님은 하나거든요. 때로는 예수님도 두 개인 것 같기도 해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지요.

무(없음)란 한계를 말해요. 이게 전혀 해명이 되지 않습니다. 왜 갑자기 벌거벗었다는 것이 부끄러움으로 느껴졌는가? 마귀가 만든 자아가 따로 있고 주님 주신 자아가 따로 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만든 자아를 내가 스스로 부정해버리고 마귀가 만들어준 자아를 나의 자아로 삼는 겁니다. IS 같아요. 부모 버리고 사람 죽이는 게임을 하겠다고 이슬람 지역으로 갑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다면 인간에게 예수님 말씀은 전혀 해명이 안 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주체’라는 겁니다. ‘내가 왜 이러지?’ 이미 인간은 주님이 주신 자아를 잊어버렸지요. 그래서 잊어버린 나의 자리에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몰론 성도에게만. 예수님이 등장하면 마귀가 만든 자아가 극구 예수님을 핍박하지요.

이게 바로 네 번째 나타나신 주님입니다. 주님이 나의 자리에 들어오면 여기서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나는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마귀는 예수님을 죽이는 거예요. 여기서 십자가 사건이 매일 반복되겠지요. 그런데 주님은 만만한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마귀의 죽음이 장착이 되어 있어요. 대구(생선) 뱃속에 알이 굉장히 많아요. 그 알 하나하나가 나중에 다 대구가 되겠지요. 예수님 안에 누가 들어있는가 하면 144,000 주님이 구원할 자기 알들이 있는 거예요. 그 알들을 한꺼번에 죽이고 한꺼번에 부활했잖아요.

부활했으니까 그 부활을 우리한테 주면 나의 악마적인 것은 그 순간 십자가에 죽고 주님의 것으로 다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지요. 주님은 이런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이런 방법, 십자가 사건으로 확정지었어요. 따라서 주의 모든 말씀은 이 절차를 말씀에다 담는 겁니다. 담아서 그것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거지요.

3장 35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했는데, 하나님 뜻대로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의 관계 속에서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몰라요. 왜? 자기 자신도 모르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아는 하나님은 마귀가 갖고 놀라고 준 가짜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도 자기가 실천할 수 있는 방법만 인정해요. 그게 바로 가짜라는 뜻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신을 섬기기 때문에 그 신은 내가 갖고 노는 장난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 자매, 모친이다.’고 했기에 형제, 자매, 모친은 주님이 말씀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멀리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형제, 자매여!”라고 하지요. 자매, 형제, 모친은 비관계 상태를 만들어서 그 비관계를 만든 주님이 관계성을 가지고 ‘내가 부르던 자매는 자매가 아니고 내가 만든 형제는 형제가 아니구나. 교회에서 은근히 상대방을 이용하기 위해 만든 관계구나.’하는 것을 느끼고, 나의 악마적인 주체성이 파악이 되고, 그 다음 그 주체성에서 살해당하고, 밉상 받고, 핍박 받으신 그 주님이 도리어 부활의 능력으로 날마다 우리의 주체를 죽일 때, 그 때 비로소 성령 안에서 주와 연합이 되는 겁니다.

우리교회 장로님이 어느 날 제게 질문을 했어요.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연합이 뭡니까?”라고. 연합은 존재와 존재의 결합이 아니고 사건입니다. 존재로 보면 안 되고 사건으로 봐야 합니다. 이 사건은 말씀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사건이죠. 성경책 속에 문자로 갇혀있는 말씀이 아니고 이 말씀이 날아다니면서 세상을 뒤덮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때 그것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사는 거지요. 왜냐하면 말씀이 주도권을 갖고 있으니까요. 말씀이 말씀을 드러내는 대로 우리가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뒤돌아보면서 ‘나는 못 지킨 말씀을 주께서 지켜서 성도되게 했구나.’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지요.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1, 2, 3, 4가 반복되는 겁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4장부터 주님 뜻대로 형제, 자매, 모친을 만들어 냅니다. 만들어내게 되면, ‘하나님의 뜻대로’는 우리가 지켜서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뜻대로 나를 형제, 자매로 만들어 놓고 아버지께 뜻대로 했다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덩달아 혜택을 입은 거예요. 이게 바로 주님과 우리의 연합입니다.

10분 쉽시다.

(2015. 3. 11. 08:3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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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7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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