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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여호와의 문 150311우리교회에스겔

여호와의 문 150311

이름 : 이근호(IP:119.18.83.91)

여호와의 문(에스겔 44:1-3)

이근호

15-03-11 21:12

여호와의 문

2015년 3월 11일 본문 말씀: 에스겔 44:1-3

(44: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 동향한 바깥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히었더라

(44: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 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

(44:3)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성전을 거론하면서 ‘닫혀야 될 문’이 언급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참된 성전에 어떤 식으로도 특징이 있는 증거를 남긴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즉 그냥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 제대로 된 성전이 아니라 사람은 일체 들어설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열 수 있는 문이 장착된 성전만이 참된 성전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들어서지 아니하면 성전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닫힌 문’에 두어야 합니다. 이는 곧 이 인간 세상이 ‘갇혀있는 현실체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은 갇혀있는 형편에서도 나름대로 ‘현실의 전부’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이 현실 밖에는 하나님의 현실이 있는데 그 현실의 일부가 이 인간 현실이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성전의 동쪽 문을 닫아주신 취지가 가로막히게 됩니다. 닫힌 문을 통해서 들어서시는 하나님을 영접할 위인은 보통 인간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 뿐이라는 점을 같이 살려내어야 합니다. 다른 인간은 단호히 배제되어야 합니다. 이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성전에 대해서 아는 바 없음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즉 성경을 통해서 나타내시는 참된 현실은 이스라엘 왕이신 예수님과 그분만이 알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 외에는 알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성전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제사와 제물의 희생은 죄를 의로 바꾸시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작업장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사실에 인간 세상의 ‘죄’개념을 제대로 규명되어야 합니다.

인간들의 ‘하나님 섬기기’는 종국에는 ‘자기 신뢰’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흔히 말씀 지킨다는 것은 마치 유교의 명심보감 지키는 것처럼, 책 안의 내용이 자기 마음 안에 구체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을 뜻한다고 그렇게 믿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진짜 믿음과 정반대의 양상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자신이 씨앗 한 알이라고 믿는 사람이 정신병원에 보내졌습니다. 그곳에서 의사들이 그에게 씨앗 한 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고 드디어 본인 스스로 씨앗 한 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병원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스니다.

그런데 병원문 나가자마자 몹시 무서워하면 도로 병원 안으로 뛰어들어왔습니다. 병원 문밖에 닭이 한 마리 있었던 것입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당신이 한 알의 씨앗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하며 답답해하니, 그 정신병자가 하는 말이, “물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닭이 그것을 알까요?”라고 되묻습니다.

즉 교인이,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이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도 인정해줄지가 염려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교인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믿지만 하나님이 이점에 대해서는 도무지 못믿겠다는 겁니다. 자신을 한 알의 씨앗이라고 여기는 정신병자를 보고 보통 사람이 참 답답해하지만 실은 신앙현실 안에서 이 정신병자의 태도가 맞는 겁니다.

그 이유는, 내가 나를 여전히 믿는다는 것이 곧 ‘믿음없음’이 되고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현실은 이스라엘 왕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운용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참된 신자는 마치 국민연금공단에 날마다 연급을 불입하듯이 자신의 현실을 그 하나님의 현실에다 집어넣어 섞어버려야 하는 겁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현실을 날마다 뭉개야 하는 겁니다.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한 겁니다.(마태복음 6:34) 나의 현실을 따로 챙겨가지고 나에게 집어넣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즉 내가 지켰다고 여기는 성경 말씀을 내가 갖고 있으면 아니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의해서 조성된 현실은, 막혀있는 문을 가진 성전으로 표현이 되고 설명이 됩니다.

언제 하나님이 다녀갔습니까? 언약궤가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것을 봐서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약궤 있는 그것이 하나님의 세계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11:11에서 우리아 장군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사람으로서 늘 구심점으로 여기는 것은 자신의 가정집이 아니라 언약궤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언약궤 중심의 새로운 현실관을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이 언약궤를 갖고 오시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부에 새로운 현실을 발생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광야’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거쳐서 성전이 세워질 땅에 안착했습니다. 광야란 사람을 자력에 의해서 살게 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차라리 사람을 죽이는 공간입니다. 오직 산다는 것은 하늘에게 매일 같이 내리는 만나뿐이며 가야 될 방향은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을 뿐입니다.

이 만나와 불기둥은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성취해내실 현실과 관련되어 주어지고 움직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기대하는 삶의 목적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의 행복하고도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오직 언약궤를 영원히 안치한 현실 만들기와 관련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은 죽은 자들의 집단체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전의 성전이 불탄 이유가 바로 할례받지 않는 이방인을 출입했기 때문이라고 7절에 나와 있습니다. “대저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케 하는 것이 되었으며”

할례란 마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스실에 죽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오른쪽 가슴에 단 오각형 별마크와 같습니다. 즉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더불어 친히 만들어 주시는 의의 나라에 일방적으로 넣어주심을 성사시키는 현실에 늘 자신을 거기에다 집어넣어야 합니다.

즉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은 내가 지켜서 내 것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시도가 큰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런 죄를 가지고 주님께 모든 것을 집어넣는 삶이 바로 성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중심으로 자리잡은 현실을 늘 부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3-12 17:28

129강-에스겔 44장 1-3절(여호와의 문)15031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4장 1절-3절입니다. 구약성경 122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4:1-3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 동향한 바깥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히었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찌니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 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찌니라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성경에 나와 있는 이 내용을 가지고 신자치고, 교회 나오는 사람치고 ‘이것은 현실이 아니고 가상입니다. 실제로 이런 일은 없습니다.’라고 우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 성경말씀이 진짜 현실입니다.’라고 말은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이 현실이 우리가 아는 현실의 일부로서 장착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버립니다. 하나님이 이 문으로 들어오셨다는 이 성경속의 현실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현실 어디서 찾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지요.

그걸 설명해 줘야 돼요. “성경 말씀도 현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현실은?” “우리가 사는 그것도 현실이지요.” 성경도 현실이고 우리가 사는 이것도 현실이라면 이 두 현실이 충돌되지 않고 성경말씀이 이 안에 포함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어느 백화점을 찾아갔습니까? 하나님이 어느 백화점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성전 동쪽 문으로 들어왔다는데 언제 하나님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셨습니까? 들어오실 때 하나님이 무슨 구두 신으시고 무슨 양복을 입으셨는지. 언제 들어왔느냐는 말이지요.

제가 신학교 들어가고 전도사생활 하면서 제 마음속에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은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뭔가 제일 중요한 것을 모르는 채로 교인들 앞에 설교를 한다는 그 점에 마음에 괴로웠습니다.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도대체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뭐냐는 거지요.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뭐냐?’ 저는 많은 선배 목회자나 교인들, 먼저 교회를 다닌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성경 말씀을 지키게 되면 성경 안에 있는 그 현실이 당신 속에 하나의 현실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그럴 때 그것이 말씀을 지킨 것이 됩니다.” 그렇게들 이야기했고 그렇게들 가르쳐왔어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성경속의 현실에서는 하나님이 문 열고 성전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그러면 내가 만든 현실 속에서는 이게 어디에 들어 있느냐는 말이지요. 대체 어디에? 명심보감이라는 게 있거든요. 이 명심보감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명심보감에 보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명심보감을 지키는 방법은 간단해요. 자기 마음속에 ‘나도 부모를 공경하자.’라는 마음이 들면 이것은 명심보감을 지킨 게 되는 겁니다. 명심보감 지키듯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 과연 성경을 지키는 것이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의문점을 가졌지요. 성경이 있기 전에 많은 사람이 국어책, 산수책, 자연책, 이걸 보고 숙제도 하고 지키기도 해요. 역사책 보면 이순신장군의 임진왜란이 1592년에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 우리는 그 책에 있는 내용이 내 마음속에, 내 머릿속에 왔으니까 나는 그 역사책을 지키는 것이 되지요.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그런 식으로 뭘 지킨다는 것이 확립된 상태에서 성경말씀까지 그렇게 지켜버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내가 내 마음속에 확인된 것만 지키고 나머지 확인되지 않은 것은 안 지킨 것이 되는데 성경의 몇 퍼센트는 지키고 몇 퍼센트는 안 지킨다면, 그래서 평생을 다해도 100퍼센트 못 지킨다면 과연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그 문제가 신학교 때 큰 짐처럼 있었던 거예요.

저는 그게 고민거리였고 걱정이었고 설교를 하는 전도사로서 사기를 치고 속임수를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같은 교인인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교인들을 보면 왜 그렇게 태평인지, 그런 고민도 없는 모양이에요. 그들이 하는 이야기, 그들의 설교를 들어보게 되면 성경의 다른 대목과 맞지를 않아요. 예를 들어서 십계명에 보면 “부모를 공경하라.” 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5월 초에 목사가 막 침을 튀겨 가면서 “여러분은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하는데 아무리 봐도 그것은 유교나 불교나 교회 안다니는 사람도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 할 때 그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 하고, 주님 빼놓고 하는 부모공경하고 그 차이점이 뭐냐를 그 목사님이 모르는 거예요. 목사가 모른다는 말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지금 목사 맘속에 안 들어 있다는 겁니다. 성경 말씀도 안 들어있으면서 무슨 부모에 대한 공경을 설교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기꾼인지, 저게.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그런데 교인들은 그걸 보고 아멘, 하고 있다고요. ‘아, 교인들은 목사가 하는 이야기를 본인들이 알고 있는 명심보감처럼 알고 있으니까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명심보감에 대해서 동의한다고 아멘, 하는 거구나.’ 설교 끝나고 아멘, 해야 은혜 받은 티가 난다고 교육을 그렇게 했으니까 이것은 하나의 추임새에요. 얼쑤, 하듯이 아멘, 아멘. 아멘, 할 자리도 아닌데 “그러므로……” 하는데 그만 아멘, 아멘. 대구에 그런 교회, 지방교회라고 있어요. 이 현래라는 사람, 그 사람 강의하는데 들어보면 그저 아멘, 아멘, 아멘. 이게 무슨 장난도 아니고 자기최면 거는 집회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신병원에 갔는데 그 이유가 뭐냐? 자기를 자구 곡식 한 알로 생각하는 겁니다. 정신병이지요. 그래서 가족들이 안 되겠다 싶어 정신병원에 집어넣었습니다. 수개월동안 의사가 “당신은 곡식 한 알이 아니라 사람입니다.”라고 설득을 해서 본인이 알아들었어요. “당신은 곡식입니까?” “아니요, 난 사람입니다. 난 청년이에요.” “그렇지요. 이젠 나았습니다. 퇴원하세요.”

그런데 정신병원에서 나가자마자 도로 들어왔어요. 정신병원 정문에 닭이 한 마리 있었던 거예요. 닭이 곡식 쪼아 먹잖아요. 닭이 보이자 도로 후다닥 되돌아온 거예요. 답답해진 의사가 “당신은 분명히 곡식 한 알이 아니고 사람이라고 분명히 고백했잖아요. 잘 알고 있잖아요.” 하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알지요. 내가 곡식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아는데, 나는 그걸 아는데 저 닭은 내가 사람인 것을 알겠습니까?” 참 미친 사람도 여러 종류인 모양이지요.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 저 닭도 알고 있겠는가? 나는 분명히 사람이 맞아요. 그걸 자기는 아는데 닭도 내가 사람인 것을 알아야 나를 안 쪼아 먹을 것인데 만약에 닭이 나를 곡식으로 알 것 같으면 나는 죽잖아. 그래서 나는 무서워서 도저히 닭 앞을 못 지나가겠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는 말씀 지켰는데 내가 말씀 지켰다는 그것을 하나님이 알아주겠느냐, 그 문제입니다. 신학교 때 고민이 그거였어요. 내가 말씀을 지켰다고 할 때,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말씀을 볼 때 이 성경가운데서 일반 교훈 같은 것들, 예를 들어, ‘온유 하라. 화평 하라.’ 그것은 지켜내겠는데 홍해가 갈라지는 것, 요단강 갈라지고, 전쟁할 때 골리앗 쓰러뜨리는 이런 것은 지킬 자신이 없었던 거예요. 키가 3미터 가까이 되는 사람하고 나하고 한 번 붙어보라고 하면 나는 져요.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런데 다윗은 이겼잖아요.

그러면 그 말씀은 내가 지킬 수 없는 것인데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못 지켰다고 할 때 과연 나는 분명히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쓰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까지도 포함해서 믿느냐고 이야기해 버릴 때 주님은 닭이 되고 나는 곡식이 되는 겁니다. 나는 지켰지만 주님이 내가 지켰다는 것을 인정 안 해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내가 생각해도 다 안 지켰으니까. 술 취하지 말라는 이것은 지켰지요. 왜? 그 때는 술을 끊었으니까.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는데 해질 때가 보통 여름철에는 좀 늦고 요새는 6시면 해가 지잖아요. 그때까지만 화를 내고 그 다음부터는 화를 안 내면 되거든요. 이거는 지킬 수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주님 말씀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뽑아서 바다에 던진다고 할 때 그것은 못 지키겠어요. 그것을 못 지킨다고 하면 내 믿음이 겨자씨보다 더 작은 것인데 이건 아슬아슬하거든요. 겨자씨보다 믿음이 더 적다면 신앙이 적다는 말은 신앙이 크게 될 여지가 바깥에 있는데 그 여지를 내가 중지하고 이 작은 것 가지고 천국 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요만한 믿음가지고 천국 가 봐야 저 구석에서 꿇어앉아 손들고 있고 “네 믿음이 그것밖에 안됐어?” 하고 영원토록 꾸중이나 듣는 건지, 그야말로 상급 없이 천국 가서 영원토록 왕따 당하고 사람취급 못 받고 다른 사람들은 대우받는데 나는 “부끄럽습니다. 겨우 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영원토록 사는 그것이 천국인지, 대체 지킨다는 것이 뭐냐는 거예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내용이 뭐냐 하면, 에스겔을 데리고 안뜰로 가서 지성소 성소 구경하고 바깥으로 나간 거예요. 안쪽에서 바깥쪽을 향해서 나간 거예요. 나가자마자 문이 닫혀버렸어요. 들어가려고 하니 “문이 닫혀서 못 들어가.” 그렇게 된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쪽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문 열고 들어왔을 때 마중하는 사람도 오직 한 사람밖에 마중을 못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왕이 마중을 나오는데 왕도 그 문으로 못 들어가요.

출입구가 세 개밖에 없는데 동쪽은 막혀 있으니까 남쪽과 북쪽밖에 없거든요. 남쪽 문을 통해서 동쪽 문에 대기하고 있는 거예요. 문이 열리고 하나님이 들어오시게 되면 거기서 이스라엘의 대표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양식을 먹고 영원한 성전이 완성되는 그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지켜내요? 이걸 우리가 어떻게 지킵니까? 못 지키지요. 구약 내내 이스라엘 백성보고 네가 말씀을 못 지켰다고 닦달해서 멸망했다면 그 이스라엘이 아예 정말 하나도 못 지켰을까요? 아니지요. 말씀 가운데 지킨 것도 있고 못 지킨 것도 있잖아요. 이것은 오늘날 신약시대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과 똑같은 입장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온전하게는 다 못 지켰어요. 이 말씀도 주시고 저 말씀도 주셨는데 이 말씀은 지키고 저 말씀은 안 지켰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다 지키라고 줬는데 “알아서 내가 지킬만한 것은 지키겠습니다.”라고 한 그 자체가 모든 계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주신 취지에 대한 위반이기에 그들이 멸망했다는 말이지요. 모든 말씀을 못 지키면 우리는 멸망당하는 거예요. 이런 점에 대해서 설교자로서 본인도 정리 안 된 상태에서 “이것이 주의 뜻입니다.” 하고 설명을 해줄 수 있느냐 하는 말이지요.

이렇게 설명이 됩니다. 어디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여호와 나오지요? 그 다음에 이스라엘 왕이 나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여호와와 이스라엘 왕이에요. 동쪽 문이라고 동쪽이라는 방향성을 나타낸 경우가 에덴의 동편에서도 동편이고 그 다음에 민수기 2장 3절에서 “동방 해 돋는 편에 진 칠자는 그 군대대로 유다의 진기에 속한 자라.” 유다의 진기에 속한 자가 동쪽에 진을 친다고 해서 유다지파가 나오고 그 유다지파가 다윗지파거든요. 다윗이 태어나는 지파잖아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성소 지을 때 문이 하나밖에 없어요. 성소는 동쪽으로만 문이 있어요. 북쪽과 남쪽은 문이 없고 동쪽으로만 문이 있어요. 이것은 에덴동산의 경우가 그대로 지상에 내려앉은 겁니다.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왕이 주인공이 된다면 성경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 이스라엘 왕 사이에 맺었던 약속이 구체화된 거지요. 그 분들이 설치한 현실이 되는 거예요. 그 분들이 장만하고 확산시켜 나가는 현실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국민연금 매달 넣잖아요. 지킬 생각 말고 내가 안 해도 현재 우리나라에서 국민연금이 운용되고 있어요.

그러면 나는 매달 거기에 국민연금을 집어넣으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만드는 그 현실에 내 현실을 포기하고 그것만이 현실이라고 나를 날마다 집어넣으면 그게 말씀을 지킨 게 되는 거예요. 자꾸 저쪽을 내 것으로 잡아오려고 하니까 ‘나는 몇 퍼센트를 지켰는가? 30퍼센트인가, 20퍼센트인가?’ 이렇게 되지만 이미 운용되고 있고 잘 돌아가고 있는 그 현실에 내 것을 집어넣게 되면 저쪽에서 알아서 국민연금을 운용해 주니까, 뉴질랜드에 빌딩을 사든 프랑스에 투자를 하든지 알아서 다 운용을 해주니까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되거든요.

말씀을 알아서 잘 운용해서 현실을 만들고 나는 내가 스스로 관리할 것을 포기하고 나를 주님에게 맡겨버리면 그 주님이 만든 말씀의 현실 속에 내가 그 일부로서 가담이 돼 버려요. 그러면 그 전체가 말씀이 지켜지는 현실 속에 우리가 푹 파묻히게 되는 겁니다. 그게 말씀 지키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말씀 지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말씀 지키는 거예요. 얼마나 쉽습니까? 전도사 때 진작이 그걸 알았으면! 명심보감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면 되지요. 내가 생각한 현실은 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인공이니까. 이것은 여호와가 주인공이 아니고 내가 주인공이니까. 이것은 결국 내 잘난 것 밖에 안 된다. 천국 가봐야 내가 상상한, 나를 주인공으로 한 엉터리 천국, 그게 지옥인데 그 엉터리천국밖에는 모르지요.

이제 남은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 가지고 하나님과 왕이 어떻게 운용하는가? 국민연금을 어떻게 운용해서 연금혜택을 주는가,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바친 모든 것, 죄인인 나를 주 앞에 던지니까 죄인을 가지고 주께서는 합당하게 말씀의 완성태로 만드는 그 방식이 중요한 겁니다. 성전을 만드시는데 성전의 특징이 뭐냐 하면, 닫힌 문이 있다, 문이 닫혀 있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아까 그 정신병환자 이야기해 다시 해 봅시다. 어떤 환자가 자신이 하나의 곡식낱알이라고 생각했는데 병원에서 고쳤어요. ‘나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사람인 것을 아는데 저 닭은 여전히 나를 곡식으로 여겨서 나를 쪼아버린다면 나는 죽잖아.’ 하고 겁이 나서 다시 오는 것처럼 나는 주님을 믿는데 주님은 내가 믿는 것을 인정하겠는가 하는 그 문제가 생기겠지요.

그 문제가 생기는데……, 제가 말을 하면서도 이걸 이해할까 참 걱정이 됩니다. 하도 어렵다고들 해서. 생각해 보세요. 지금 주님이 하는 그 생각에서 내 생각을 따로 떼 내면 안돼요. 정신병 환자의 말이 맞아요. 정신과 의사가 잘못됐어요. 정신과 의사가 그 환자보다도 더 현실을 제대로 못 봐요. 그 정신병 환자의 사고방식,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닭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그 사고방식이 진짜 복음에 합당한 생각입니다. 닭 앞에 나는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는 어떻게 보이느냐, 똑같은 이야기에요.

그런데 당신이 정상이라고 하는 정신과 의사 말은 “당신만 구원 받았다고 하면 되는 거예요.”라고 자꾸 윽박지르는 거예요. 그건 아니지요. 네가 무식한 거예요. 저 닭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내가 닭을 어떻게 보느냐 보다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만들 때 문이 닫혀있다고 하는데 문이라는 것은 원래 문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고 나가고 하라고 문이 있잖아요. 그런데 문을 만들어놓고 닫혀 있다는 말은 이 현실은 인간이 들락거릴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는 그 표시가 네 마음속에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네 마음속에 닫힌 문의 흔적을 갖고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닫힌 문이 있다는 말은 결국 우리는 뭐냐?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갇혀 있는 형태, 닫힌 문 안에 갇혀 있지요. 결국 우리는 폐쇄된 현실, 제한된 현실밖에 모르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문을 열고 하나님을 영접해야 될 일이 걱정되지요. 그것은 네가 하지 말고 너를 대신할 분이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왕이 너를 대신해서 하나님아버지를 영접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못하지만 내 대신 하나님 아버지와 내통하는 분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주님이 만든 말씀의 현실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 속에 하나의 곡식이 되세요. 곡식이 된다면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식으로 문을 닫아놓고 여호와께서 이 문으로 출입했다는 그 이야기를 언급해야 하는가? 원래 언약궤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실 곳이 언약궤에요. 그런데 언약궤가 이 지상에 있다는 말은 뭔가 언약궤가 왜 여기 있는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나중에 점점 더 계시가 신약 쪽으로 와 보니까 하나님께서 동쪽으로 해서 언약궤를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안치해놓으셨다는 그 흔적과 경로를 표시한 거예요. 언약궤는 원래 하나님이 제공해야 되는데 누가 제공했는가, 하나님이 제공했다. 하나님이 제공할 때 어느 노선으로 왔는가? 보니까 동쪽으로 들어온 거예요.

하나님이 동쪽으로 들어와서 길을 내서 언약궤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겨준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과했던 그 길, 그 길은 어디서 찾을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겠지요. 그 길이 동성로인가, 태평로인가, 그 길이 뭐냐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광야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궤를 만나기 이전에 그들의 그 장소가 광야로 돌변했어요. 광야라는 것은 인간의 모든 자아를 죽여 버리는 겁니다. 인간의 죽음을 유발시키는 환경이 광야에요. 이 세상이 광야에요. 저와 여러분이 지금 광야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좀 추웠지만 남들 보기에는 따뜻한 봄날이 왔지만 우리 보기에는 말씀 안에서, 국민연금 안에서는 이곳이 광야입니다. 광야는 우리를 죽이는 곳이에요. 자립해서 살 수 있다? 안 됩니다. 천국 가는 방향을 안다? 안돼요. 구름기둥과 불기둥 없이는 아무것도 안돼요. 그러면 우리가 살 수가 없는데 뭘 주는가? 만나로 줍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매일같이 먹이는 조건들이 갖추어진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 광야에서 우리보고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밖에 없네? 광야에 동행하시는 분이 계셔요. 그분이 바로 언약궤를 가져다주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입니다.

명심보감만 생각하는, 이 대한민국만 생각하는 이런 현실 속에서는 전혀 그 성경 속 현실에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침투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고 나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주민등록이 대한민국으로 되어 있고 나는 명심보감을 알고 있으며 나는 어느 학교를 나왔고 ……, 이런 것을 전부 다 광야로 만들면서 나는 어느 대학 다니면서 죽어가고 있었고, 어느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죽어가고 있었고, 나는 시집가서 죽어가고 있었으며, 장가가서 죽어가고 있었으며, 이번에 50평짜리 아파트를 사면서 죽어가고 있었으며, 이번에 차를 그랜저로 바꾸면서 죽어가고 있었으며, 이번에 부동산 약 25만평을 사는 죽음의 행동을 했으며……, 어쨌든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 내가 뭘 사고팔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이 전부 다가 결국에는 내가 죽어 마땅함을 보여주는 흔적들인 겁니다.

그게 바로 말씀의 세계에요. 내가 죽지 아니하면 주님이 나에게 진짜 중요한 것, 언약궤를 턱 하니 내 안에 마련해 줬다는 그것이 눈에 중요하게 안 들어와요. 지난 낮 설교에 이야기했잖아요. 행복을 포기해야 예수님이 보인다고. 개인적으로 행복하다는 이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거예요. 이것은 다른 현실입니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내가 여기 있어야 된다고 해서 행복을 추구하거든요. 그러나 닭, 닭의 안목에서 봤을 때는 그런 것이 필요 없어요. 닭의 안목에서 볼 때는 언약궤만 있으면 돼요. 언약궤. 언약궤가 천국의 중심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사무엘하 11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이게 뭐냐 하면, 암몬과 우리아 장군이 전쟁 중에 있었어요. 전쟁할 때 언약궤를 앞장세웠으니 언약궤도 거기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하고 있었는데 본국에 있던 다윗은 심심했던지 밖에 나왔다가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는 그녀와 통간을 했어요. 우리아장군의 아내와 사적으로 동침을 한 겁니다.

밧세바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진짜 남편의 아이가 임신한 것으로 꾸미기 위해서 ……, 완전히 막장 드라마라니까요, 꾸미기 위해서 지금 전쟁 중에 있는 우리아장군을 불러서 휴가를 줬어요. 사흘 동안 먹고 마시면서 아내와 함께 지내라고 자꾸 유도를 하는데 우리아가 하는 말이 “지금 언약궤가 어디 있는데 내가 여기서 한가하게 아내와 휴가를 즐기겠습니까? 내 중심은 언약궤가 중심이고 내 가정이 중심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우리아의 현실관입니다. 그 우리아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 있는 겁니다.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를 안 믿는다는 이야기에요. 간단한 방정식입니다. 이 방정식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면 이제는 내가 두 번 다시 나를 믿으면 내가 성을 갈고 내가 개다, 이렇게 돼야 돼요. 나를 안 믿기로 작심하고 예수 믿는 거예요. 이 말은 내 생각을 잡고 닭의 생각에 내 생각을 집어던져 버리는 겁니다. “주님이 생각하는 그 나라, 주님이 생각하는 그 의,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그 나라와 의 앞에서 내가 생각하는 천국과 내가 생각하는 의를 과감하게 없애버렸습니다.” 하는 거예요.

광야에서 그 경로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느냐? 7절에 보면 나옵니다. “대저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전에 성전을 지었는데 성전이 불타버리고 성전에 하나님을 모시는 그 일에 실패했잖아요. 그 실패한 이유가 뭐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을 성전에 데려온 거예요. 그러면 할례라는 것이 뭐냐? 말씀이, 말씀 전체가 우리 속에 들어왔다는 증거가 뭐냐? 아우슈비츠라는 2차 대전 때의 포로수용소가 있어요. 거기서 유대인들을 한 150만을 죽였어요. 다 해서 6백만을 죽였지만 거기서 한 150만의 유대인을 죽였는데 유대인들의 죄수복에 별 마크를 했어요. 그 별 마크가 붙어 있는 자가 유대인이에요. 독일 히틀러 나치정권이 그렇게 했어요.

할례를 행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나의 육은 죽어 마땅합니다.’ 하는 표시를 문신처럼 새긴 거예요. 광야에 나설 때, 홍해를 건너올 때 반드시 아우슈비츠수용소의 유대인들이 가슴에 별 마크를 달고 수용소에서 죽어야 하듯이 그들은 할례의 표식을 하고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육적인 나는 죽었습니다.” 이게 몸의 할례거든요. 몸의 할례를 파고 들어가면 나중에 유일하게 하나님께 받아들이는 진짜 몸의 할례자가 따로 있어요. 그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같이 동참하면서 이 세상을 광야로 돌변시키면서 그렇게 나갈 때 그들이 성전의 완성이 되는 거예요. 왜? 그 속에 언약궤가 있으니까.

그 죽은 자들이 구원 받는 것은 그들 가운데서 육신의 몸으로 오신 이스라엘 왕이 나왔고 왕이 대표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만나서 그 장소를 유일무이한 천국,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낸다는 그것이 국민연금 운용상태 입니다. 하나님께 국민연금운용의 현실을 그런 식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실제로 있었고, 그들은 실제로 할례를 했고, 그리고 예수님도 실제로 죽었고, 예수님께서 실제로 부활했고,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는 진짜 할례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십자가가 진짜 할례라고 분명히 언급을 했습니다.

성경전체의 내용이 다 그래요.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그 현실에다가 날마다 솟아오르는 내 중심, 내가 주인공, 명심보감 내가 지켰다, 이것을 거기다가 그냥 던져 넣으면 되는 거예요. 그걸 주일 낮에 각 가정마다 화장실이 있듯이 성도에게 배출구가 있다고 했어요. 육적인 것, 육적인 생활이 나오면 거기에 집어넣으면 돼요. “주여, 이런 죄도 필요하거든 쓰시옵소서.” 하고 국민연금에다 집어넣으세요. 이 죄를 집어넣어요. 죄를 집어넣고 거기서 의가 나오고, 그게 다 이스라엘 왕 예수님 안에서 일어나는 변환기, 뭔가 바꾸어주는 기능이 있어요.

“죄를 가져오너라. 내가 의로 바꿔주마.” 그 기능을 임금님이 했어요.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가 의를 위해 살았기에 오기만 오면 살려내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그걸 믿은 겁니다. 이삭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통해서 장차 오실 분도 내 아들처럼 그런 기능을 해서 그 기능을 내가 믿을 때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의 조상이고 우리는 이걸 믿게 되면 아브라함과 같은 가족이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실은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명심보감 지키듯이 “주님이여, 내가 오늘도 이것 지켰습니다.” 하는 것이 우리의 할례 받아야 마땅한 육적인 자연스러운 요소입니다. ‘내가 이만큼 말씀 지켰는데 하나님이 어떤 선물 줄 거예요?’ 하다가 아차! 내가 국민연금 운용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 후딱 그걸 집어던져야 돼요. 그래서 이렇게 해야 돼요. “여러분, 말씀 지킵니까? 그 지켰다는 죄를 교회 가지고 나오시고 십자가 앞에서 그게 내 자랑질을 하는 죄인 것을 발견하시면 여러분은 성도입니다.”라는 설교를 전도사시절부터 해야 했는데 이제는 말한다.

여러분 가슴속에 유대인의 별표처럼 영적인 할례, 마음의 할례를 다 부착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또 다른 현실, 우리가 모르는 현실이 말씀대로 이미 덮쳤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서 자기 자랑하면서 ‘아,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죄라는 현상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가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를 우리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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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7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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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