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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피히테 150310강의[신학]

피히테 150310

이름 : 이근호(IP:119.18.83.91)

한윤범(IP:14.♡.134.30)

15-03-13 10:49

20150310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1-피히테
(강의:이근호 목사)

우리가 철학이나 신학 같은 것을 공부하는 이유는 살기 바쁘면 남들이 이 세상에 정리한 것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해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잘 모른단 말이죠. 우리가 한가할 것 같으면 소설이나 문학을 보겠지만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심지어 한가해도 못 봐요. 나이 많아 한가해도 그때는 눈이 어두워서 안 봐요. 잠 온다고 안 보고.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이 어느 세계에 속했는지 어느 별에 사는 지를 계속해서 놓치고 사는 겁니다.

아마 그런 것에 대해서 구태여 알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마귀가 인간에 심어 넣어준 것 같아요. 몸 하나 챙기면 되지 세상에 대해서 알아서 뭐 하느냐? 자기 몸 하나 챙기다 보니까 우리 곁에 예수님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여기서 두 가지 상반된 견해를 띠게 돼요. 하나는 우리 세계에 도움 주려고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오셨구나. 이런 부류가 있어요. 99.99%지요. 힘든 인생을 살리기 위해서 또는 우리 잘 되기 위해서 우리 세계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중보자가 오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데 극히 일부 사람들인데 선지자 계열이죠. 우리가 살았다고 여겼던 이 세상이 사실상 온통 하나님의 저주받기 위해서 집결된 장소라는 것을 깨닫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어요. 특히 선지자들이 그런 예가 되겠지요. 선지자들은 고난 받는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으면서 출애굽을 늘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떠나야 되는데. 그런데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은 고생하면서도 떠날 생각은 들지 않아요. 애굽 바로의 압제 밑에서 시달리면서도 떠날 생각을 못 합니다. 왜냐하면 떠나기는 왜 떠나는데 살든 죽든 여기서 살아야지 떠날 수 없잖아요. 출애굽 의식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출애굽 의식은 본인들이 모여서 출애굽 하는 게 아니에요. 출애굽 의식을 유발시키는 자극제는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출애굽 의식이 발현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떠날 수가 있느냐? 떠나고 싶어도 떠날 능력이 없을 때 그것은 떠나라고 처음에 모든 계획을 잡았던 그분으로부터 떠나는 능력도 그분이 일방적으로 주셔야 된다는 사실도 알리죠. 이 말을 요약하면, 우리는 떠나고 싶어도 묶여있다, 못 떠난다, 발목 잡혀있다, 아무리 몸부림치고 아무리 신을 찾더라도 그것으로 이 땅에서 1인치도 1센티도 우리의 발을 뗄 수 없는 그러한 단단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현실은 무엇인가? 현실은 바로 죄의 감옥이죠. 죄에 갇혀 있는 꼴인 것을 알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제2의 선지자가 되는 겁니다.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할 것은 그것까지예요. 성도가 할 것은 탈출이 아닙니다. 탈출될 수 없다고 아는 것까지가 성도가 할 일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다른 사람과 같이 세상을 보면 안 돼요. 다른 관점으로 봐야 돼요.

성도의 관점으로 봤을 때 구원받겠다는 모든 시도는 사기입니다. 이건 마귀의 시도에요. 마귀가 사람들을 곤란에 빠뜨리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는 그 사실, 자기 힘으로 세상에서 빠져나오겠다는 모든 시도가 우리가 공부하는 신학과 철학입니다. 그래서 이걸 해야 돼요. 신학과 철학을 하면서 인간들은 자기를 집어삼키고 있는 이 현실이 어떤 식으로 돼있는가? 그리고 돼있는 현실 속에서 자신은 별로 할 게 없다는 것, 어떻게 몸부림 칠 게 없다는 것을 확연히 알아야 되지요.

그래서 철학과 신학의 결론은 뭐냐? 모른다는 겁니다. 뭘 모르냐? 다 몰라요.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위대하다고 하는 겁니다. 소크라테스가 한두 개 모르는 게 아니고 다 몰라요. 선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이며, 정의가 무엇이며, 국가가 무엇이며, 내가 무엇이며 전혀 아는 게 없어요.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그 일에 나서기 전에 신의 신탁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잖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내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에요?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세상에서 위대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게 산파법이라는 거예요.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뭐라 하잖아요. 또 묻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진리입니까? 자꾸 하다보니까 그 사람이 어떻게 돼요? 진리 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 만나고 난 뒤에 진리가 뭔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돼요.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실망하고 다른 사람을 또 찾아가요. 도대체 진리를 아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그 정답은 뭐냐?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소크라테스가 알았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중에 가장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에요. 그게 철학이에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일종에 철학자로 볼 수 있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 이미 말씀에 대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사울이 받았던 모든 말씀의 내용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성된 거예요. 말씀을 지키고 알고 믿고 똑같은 용어니까 그런 것은 그만두고 하여튼 말씀으로 만든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게 되면 이 땅이 하나님 나라가 되겠지요. 사울이란 사람이 그걸 진리라고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난 뒤에 말씀으로 만들어졌고 말씀대로 믿고 살게 되면 그게 하늘나라라는 것을 그것 자체가 바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에서, 자기 주제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힘으로 구원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몸짓이란 사실, 몸부림인 거예요. 사울은 나중에 바울이 되어 알았지요. 그것이 바로 마귀의 세계, 악마의 세계란 겁니다.

악마의 세계에서 인간의 특징은 뭐냐? 나름대로 안착하고, 나름대로 정리가 돼있다는 겁니다. 세상에 대해서. ‘나름대로’입니다. 문제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게 되면 그 나름대로가 수정과 개성이 가해지겠지요. 나만 똑똑하다고 하는데 나만 똑똑한 게 아니고 다른 사람한테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게 문제의 시발점이 돼요. 왜냐하면 만약에 어떤 사람에게 한 수 배우게 되면 배우고 난 뒤에 이제는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동시에 뭘 느끼겠어요? “내가 한 사람만 알아서는 안심 못하겠다고 적어도 두세 사람 더 알아볼까?”라고 나오겠지요. 두세 사람하면 안심이 됩니까? 356명은 어떻게 하고, 칠천 명은 어떻게 하고, 오만 명 만나야지, 칠십만 명은 만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보다 많은 사람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는 보다 많은 진리를 확보한 그것이 뭐냐?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철학이라는 겁니다. 신학이라는 거예요. 만약에 이런 것을 안 하게 되면 어떻게 돼요? 나름대로 정리가 되겠지요. 그런데 나름대로 정리를 피히테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다른 사람도 이야기하지만 이걸 ‘기만’이라고 하는 거예요. 기만이란 본인이 모르면서도 대외적으로 마치 아는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행동에 나서려는 시도입니다. 기만은 더 쉬운 말로는 속이는 거죠.

그런데 인간이 자기를 속이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이런 건 있어요. 어떤 새로운 상황이 닥칠 때는 옛날에 알았던 사고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단 말이죠. 잘 안 되잖아요. 새로운 상황인데. 그때는 자포자기하죠. “어이, 모르겠다.”고 하잖아요. 처음부터 몰랐어요. 그 사태에 대해서 모르겠다고 발뺌한다면 앞으로 두 번째, 세 번째, 열 번째, 백 번째 사태가 일어났을 때 또 마찬가지로 모르겠다고 해요.

그래서 하이데거나 칸트, 헤겔이나 철학자들이 말하기를 결국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내가 어떻게 해. 이만큼 살면 되지, 라고 했을 때 마지막에 죽음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할 거냐? 죽음이란 것이, 살아있을 때는 아직 자기가 살아있으니까 어떤 사태를 해결 못하더라도 도피하면 돼요. 한국에서 사업하다 망했다. 빚쟁이들 오니까 드라마에 나오듯이 유학가든지 이민가면 되지요. 피하면 되지요.

그런데 죽음의 특징은 피할 여지가 없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죽음이란 저승사자가 큰 창 들고 버티고 있었던 같아. 두 다리로 벌리고 지키면서. 여기까지가 끝이지. 기껏 네가 여기 오려고 평생 살았어. 들어와 이제. 지금까지는 네가 능동적이지만 이제부터는 수동적이야. 끝났어.

하이데거는 고민을 한 겁니다. 철학가들도 고민했지만. 내가 아무리 진리를 알고 아무리 바르게 살고 도덕적으로 살아도 왜 죽음 문제는 내 손에서 벗어나느냐 하는 겁니다. 칸트도 마찬가지에요. 영혼의 문제와 자유의 문제와 신의 문제, 이 세 가지는 입 다물고 말하지 말기. 왜 나는 저 돌과 같지 않고, 저 코끼리와 같지 않고, 코스모스와 같지 않고, 왜 내 속에는 영혼이 있느냐? 여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기다.

이건 마치 “아버지여, 왜 저를 낳았습니까?”라고 아버지 앞에서 말하지 말기와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칸트는 그걸 한계지음이라고 했거든요. 한계지음이란 인간이 한계를 생각 안 하면 이만하면 됐다고 자기의 능동성에 빠져요. 한계에 있으면서도 마치 한계를 잊어버리면 한계 없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거든요.

겨울철에 밖에 나가면 붙들고 간섭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까? 하는 것은 5공 시절에나 하는 이야기고 지금은 그런 게 없지요. 보세요. 누가 나를 한정 안 짓잖아요. 어릴 때나 추운데 옷 그렇게 입고, 하지만 아무도 한정 안 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무지에요. 이상하다. 내가 분명히 죽게 되면 죽음을 내가 요청한 것도 아닌데 죽음 안에 갇혀있는데 왜 평소에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처럼 느껴지지. 칸트는 말하지 마. 영혼과 자유문제와 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네가 말하는 게 아니야. 여기에 대해서 오늘 공부할 피히테는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우린 지난 시간에 칸트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피히테(1762~1814) 이 사람 등장해서 칸트에 대한 불만은, 칸트는 갈 때까지 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끝까지 밀어붙여야 돼요. 칸트는 영혼과 신의 문제, 자유문제는 인간이 말하지 말기, 입 다물기. 그걸 예지계라고 했습니다. 예지계 반대 세계가 현상계에요. 예지계는 초월적이에요. 현상계는 인간의 지평 한계 안에 있어요. 특히 신의 문제에 대해서 인간은 입 다물기라는 거예요.

왜 입 다물어야 되느냐 하면, 마치 부모님한테, “왜 저를 낳았습니까?”라고 할 때 부모가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제대로 된 부모 같으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태어난 자는 태어나게 하신 분에게 왜 태어나게 하느냐고 묻는 게 아니죠. 불효적인 차원이 아니라 논리적인 차원으로 봐도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부모에게 왜 태어나게 했느냐고 따지고 불만스럽게 물을 때는 어떤 경우냐 하면, 왜 저와 의논하지 않고 태어나게 했느냐고 아버지와 의논할 자리가 마련될 때나 그게 가능한 논리잖아요.

사사기에 기드온이 전쟁하러 갈 때에 누가 불만 있었습니까? 에브라임이 불만 가졌잖아요.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니까 에브라임지파가 뭐라고 합니까? 왜 기드온 당신은 우리와 의논하지 않고 전쟁하러 갔느냐고 한 거예요. 그런데 에브라임지파가 자기 주제파악이 안 됐지요. 상당히 중요한 문제에요. 이번 여름에 사사기할 거예요.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지금 에브라임지파는 기드온과 자기를 동등하게 본 거예요. 네 아는 것 내 알고, 내 아는 것 네 알잖아. 같이 본 겁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뭘 알았습니까? 기드온도 처음에는 하나님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똑같았어요. 젖은 양털로 새벽에 놔두니까 양털에만 이슬 맺히고 나머지는 뽀송뽀송하고 다시 바꾸어서 양털은 바짝 말랐는데 주변에는 촉촉하고 그러한 기적을 통해서 지금 언약의 하나님과 통하고 있잖아요. 언약의 하나님을 통하는 사람과 통하지 않는 사람과 세계를 볼 때 진리를 볼 때 같다고 할 수 없지요. 오늘 용어로 사용하면 기드온은 한정, 한계가 없어요. 이미 하나님이 거기 개입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자체가 창조주기 때문에 하나님 자체는 모든 한계를 벗어나 있습니다.

피히테는 이걸 ‘무한’이라 하고 다른 말로 ‘절대(성)’이라고 한 겁니다. 칸트는 인간의 자아에서 절대적인 것, 무한적인 것을 뺐지만 피히테는 무한과 절대를 인간의 자아 속에 집어넣었다고 생각하시면 모든 이야기가 굉장히 쉽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피히테가 교만해 보일 수 있지요. 세상에, 신의 절대와 무한을 인간 속에 집어넣다니.

그런데 아까 사사기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기드온이 이스라엘 위해서 전쟁에 나서는 것이 본인이 하고 싶어서 나섰어요? 이렇게 해야 나라가 된다고 본인이 계획해서 하나님께 기도한 적 있습니까? 기드온은 기도한 적이 없어요. 그냥 만남이에요. 왜 기도하지요? 자기가 뭘 해보려고 할 때 기도하는데 그냥 하나님 쪽에서 들이닥친 거예요. 심지어 들이닥쳤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기드온은 안 하려고 했어요. 빼려고 했다니까요. 그 말은 기드온이 처음에 나 같은 인간은 감당 못하겠다고 빼려고 했다는 것은,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 나름대로 자기 긍정과 자기 한계 안에서 자기 자유를 마음껏 누리려고 하는 보통 사람과 똑같은 거예요.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기드온과 하나님과 만나고 난 뒤에 그가 가진 것은 죽음보다 더한 걸 갖게 돼요. 죽음을 가하면, “죽으면 되지, 뭐.” 이렇잖아요. 그런데 죽음보다 더한 게 뭐죠? 죽든 살든 그것조차도 자기가 관여 대상이, 내가 죽는 것에 대해서 내가 신경 쓸 자격이 없다는 것, 이게 죽음보다 더한 것이 들이닥칠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삽니까? 여러분 안 죽으려고 사는 것에요, 안 그러면 죽음보다 더한 게 들이닥친 거예요?

죽음보다 더한 게 들이닥치면 평범하지 않은 짓을 해요. 그것은 본인이 생각한 본인이 원하는 평범한 인간을 본인이 허락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난 뭐지? 왜 난 저 사람과 같이 평범하게 어울려 살지 못해? 난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건데? 난 이런 인생 안 할래. 발 빼렵니다. 이러고 싶어도 꼭 주인 집 나가면 강아지 따라오는 것처럼 벌써 시장까지 다 따라왔어. 집에 가라고 해도 강아지가 계속 따라오듯이 우리가 뿌리쳐도 주님은 계속 따라와서 우리로 하여금 무한과 절대를 우리에게 계속 강요하고 그 관계망을 엮어버리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감당 못하지요. 기드온이 감당 못합니다. 중요한 이야기에요.

우리는 하나님 일을 감당합니까? 감당 못해요. 감당 못하기 때문에 감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느 날 우리가 감당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시 똑같이 돼버립니다. 우리는 감당 안 하는 일을 하는 거예요. 피히테의 생각이 그렇게 깊은 거예요. 우리가 감당 못할 일을 하면서 무한과 절대를 우리가 모시고 있는 그것도 강제로 모셔야 될 형편에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감당 못할 일을 하기 때문에.

병든 시어머니를 형제가 열이나 있는데 아무도 안 모시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일곱 번째 아이가 모시게 되었어요. 그래서 주위에서 칭찬이 자자하면서 아무도 안 모시려는 걸 어떻게 모시게 되었느냐고 물으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아무도 안 하니까 모시게 되었다고 답변해야 되지요. 그게 정답이에요. 나라도 모셔야지, 이러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게 아까 이야기한 기만이라는 거예요.

만약에 큰 형님이, “수고했지. 이제부터 내가 모실게.” 그러면 얼른 줘버리죠. 그러면 나라도 모셔야지, 하는 효심의 순수함이 처음부터 없었던 거예요. 이걸 말을 어떻게 해야 되나. 처음부터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온 시점부터 동행하는 게 아니고 찾아오지 않았던 과거까지 갉아먹고 있어요. 터널을 판다니까. 구멍을 뚫어버려요.

그림을 그려야 돼. 우리가 여기 있는데 목회자나 교인들이나 일반사람들이 하나님을 너무나 오해하는 게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찾아오는 시점, 만약에 2012년 7월 5일이라면 그때부터 우리와 동행하는 줄 알고 있다고. 그게 아니고 우리는 우리 속을 파 들어가요. 우리 속에 마귀가 들어있었던 거예요. 주님께서 우릴 구원하려 온 게 아니라니까. 우리 속에 마귀 들어있다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그중에 하나를 우릴 대상으로 삼아서 파헤치는 거예요. 완전히 <국제시장> 영화에 나오는 독일 탄광 같아. 석탄을 계속 캐내는 거예요. 육을 캐냄을 당하는 쾌감이 상당해요, 성도는. 삽질해서 계속 우리의 죄를 뜯어내고 캐내는 거예요. 끝도 없어요. 죽을 때까지 계속 되는 거예요.

캐내다보니까 거기서 뭘 만나느냐 하면, 애초부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이 우리 안에 석탄처럼 깔려있다는 걸 발견합니다. 제가 아까 뭐라고 했던가요? 하나님이 찾아온 것은 죽음보다 더한 거라고 했지요. 죽음이란 어떤 지평이냐 하면, 우리가 살아있을 때 생각하는 게 죽음이기 때문에 그 죽음은 살아있는 지평의 일부분이에요. 그러니까 동네가 같은 동네라니까요. 나는 살았는데 저쪽은 죽었다. 죽었다는 개념이 살았다는 개념이 먼저 있고 살지 않은 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철학에서 반명제라고 해요. 반명제는 반드시 명제가 있어야 생기는 게 반명제란 말이죠.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네가 살아 있잖아. 그러니까 죽으면 안 되는 거야. 열심히 살아야지. 우리가 다 익히 동의하는 그 평지를 마귀가 장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죽음보다 더한 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까마득하게 몰랐던 거예요. 죽음보다 더한 게 뭐냐 하면, 죽음이 아니고 저주고 심판이에요. 심판이란 어떤 어르신네와의 만남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고 했잖아요. 그것은 죽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아니고 죽음보다 더한 거예요. 살아 있을 때 못 만난 분을 이렇게 만나게 했으니까 더 이상 죽고 사는 것을 문젯거리도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어제 영대병원에 갔는데 죽음이 가까이 온 분을 심방을 했어요. 거기서 한 설교가 요한복음 2장으로 말씀을 드렸어요. 거기에 가나 혼인잔치 나오잖아요. 그때 예수님께서 참석했을 때 마리아가 포도주 떨어졌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포도주 떨어진 것과 나와 무슨 상관있느냐고 했지요. 보세요. 마리아가 포도주 떨어졌다는 것은, 자기는 자기가 아는 친척집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포도주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마리아가 자기 죽음을 생각했습니까, 자기 한정을 생각했습니까, 마지막을 생각했습니까, 마리아가 칸트와 피히테를 생각했어요? 그런 걸 생각하고 포도주 생각했습니까? 마리아는 그냥 포도주 없으니까 포도주 있으면 좋겠다는 그 생각뿐이에요. 그건 자유에요. 마리아가 포도주 떨어졌는데 포도주 떨어졌다는 말을 할까, 말까. 누구한테 심사받는 것 아닙니다. 그냥 편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한정 없어요. 거기에 대해서 잔소리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님 계셨지요. 마리아여, 이 포도주 떨어진 것과 나와 무슨 상관있느냐? 네가 속한 세계와는 상관있지만 네게 속한 이야기를 왜 예수님, 내 세계에도 동일한 세계인 줄 착각해서 그 문제를 나한테도 문제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느냐는 그 이야기입니다.

지금 환자가 몸이 아픕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문제에요. 그래서 가족들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살려 달라. 그럼 주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있느냐, 이 말입니다.

칸트는 굉장히 신앙이 아니고 신앙적인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 도덕이 없는 것은 신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신만 생각한다면 신과 자유와 영혼의 문제는 우리 몫이 아니고 신의 몫이다. 신의 몫이 도덕적인 강제성을 우리의 의무로써 짐승이 아니고 인간이라면
반드시 여러분 속에 하나님이 심어준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걸 지킬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굉장히 신앙적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신앙적인 칸트에게 주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것과 나와 무슨 상관있으냐, 이 말이죠. 네가 신을 섬기는 것은 네가 살았고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역량이 있고 그런 것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 돌리고 감사하겠다고 나오는데 그 세계가 나와 무슨 상관있느냐, 이 말이죠.

이 그림 다시 보세요. 인간이 여기 있는데 하나님이 찾아왔다고 하잖아요. 인간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려고 찾아온 줄 알았지요. 자기를 빵구내는 줄 몰랐던 거예요. 주여, 제가 주님을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영광 돌릴게요. 이건 칸트한테도 욕 얻어먹어요. 소크라테스에게도 욕 얻어먹어요. 네가 하나님을 알아? 나는 하나님을 모르겠는데 너는 알아? 나한테 설명해봐라. 그럼 이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몰라, 몰라. 하여튼 나는 그런 식으로 믿고 싶어.

그런데 그런 식으로 믿고 싶다는 것은, 나는 죽지 않고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전제로 할 때 그런 소리하거든요. 만약에 죽음이 오게 되면 평생 살아온 것이 나밖에 모르고 자기 편한대로 살았던 것밖에 모르는데 그때는 어떻게 할래? 에브라임 사람도 살아 있었고 기드온도 살아 있었어요. 둘 다 살아 있으니까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한테 전쟁할 때 왜 날 안 불렀어. 나도 하나님을 위해서 전쟁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데 신앙심 있는데 너만 칭찬받기 위해서 혼자 나가서 승리해서 좋디? 이러고 있단 말이죠. 똑같이 본 거예요.

그러나 아까 이야기했지만 기드온이 하고 싶어서 했습니까? 하나님이 쳐들어온 거죠. 만약에 기드온에게 하나님이 안 쳐들어왔으면 기드온은 전쟁할 마음도 없어요. 이대로 살면 돼. 미디안 군사가 뺏으면 좀 주고 나머지 갖고 아쉬운 대로 밥 먹고 살면 그만이지, 뭐. 포도주? 주면 되고.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이렇게 됐을 거예요. 그러나 마리아에게 예수님 찾아오셔서 무슨 상관있느냐고 하시고, 그 다음에 마리아는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 물을 가져왔지요.

그래서 내가 병원에서 설교하기를 우리는 바로 물이다. 물인데 예수님이 원하는 포도주가 됐지요. 마리아가 원하는 포도주가 아니고 예수님이 원하는 포도주가 되면 너희들이 원하는 포도주가 아니고 내가 원하는 포도주의 전제는 너희들은 물일 수밖에 없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우리는 물 같을 수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죠.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죽고 사는 문제는 물에 속한 문제기 때문에 사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살다 죽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진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분의 나라. 그래서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젯거리도 안 되니까 그런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마라. 염려되거든 하루에 족하다.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고.

그래서 환자에게 그랬어요. 이제부터 할 일은 우리 속을 말씀으로 바꾸는 거예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살아요. 처음부터 말씀 때문에 내가 태어난 겁니다. 아버지에게 왜 태어나게 했느냐고 하지 말고 우리는 그렇게 위치에 있지 않아요. 욥처럼 욥의 마지막 결국은 유구무언,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지요. 주님이 찾아와서 욥을 다 파내요. 욥을 마치 석탄 갱도로 여겨서 속을 다 파내요. 파내니까 나중에 욥 자체를 없애버려요. 그리고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욥으로 달라지지요.

제가 방금 성경으로 피히테가 하도 복잡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철학하면 사람들이 아예 기피하는 인상이 강렬하기 때문에 피히테 이야기하기 전에 성경 이야기부터 먼저 말씀드린 겁니다. 그냥 피히테 들어가면 용어 하나하나가 철학자들끼리 사용하는 용어로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잖아. 이렇게 밀칠까봐 내가 걱정이 되서 성경이야기 언급한 거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정리하면, 칸트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 따로 있고 우리나라 따로 있는데 그 사이에 도덕으로 연결돼있다는 게 칸트 주장이잖아요. 그런데 피히테는 하나님 나라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존재 안에 이미 스며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럼 내가 신이가? 피히테는 말이기를 자아가 절대자고 신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돼요.

여기서 피히테가 어렵습니다. 내가 신이냐, 내가 절대자냐? 할 때 피히테는 오케이, 그렇다고 이야기해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이론상 그런 것이 아니고 활동상 그래요. 행위의 투입으로 그렇다는 거예요. 피히테가 보기에 칸트의 문제점은 전부 이론이라는 거예요. 실천적이 아니고. 실천적으로 봤을 때 우리가 신으로서 행동한다는 겁니다. 절대자로 행동한다는 거예요.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피히테의 주장을 따라가 봅시다. 피히테의 주장은 의식에는 의식하는 내가 있고 의식해서 보여주는 세상이 있잖아요. 바깥세상이 있지요. 그런데 바깥세상은 누가 의식해요? 내가 의식할 경우에만 바깥세상이 의식되잖아요. 내가 만약에 의식하지 않는다면 바깥세상은 있어도 없는 게 되죠. 그러니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절대자 맞잖아요. 왜 칸트가 그런 걸 모르지? 내가 의식하니까 이 세상이 비로소 우리 앞에 나타난 겁니다. 이 말은 경험되지 않는 세상은 없어요.

아까 기드온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만났잖아요. 그런데 에브라임은 안 만났지요. 그러면 기드온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에브라임의 하나님은 다르지요. 이걸 피히테는 경험되지 않는 세상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경험된다는 말이 뭐냐 하면, 그냥 존재로서 자아 자체를 없애버리자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있느냐? 행동하는 뭔가 생각하는 것도 행동한다. 뭔가 생각하는 것도 행위에 포함시키면 한 순간도 행동 안 하는 순간이 없지요.

목사님, 잠자는 것은 행동하는 게 아니잖아요. 잠자는 것은 행동하지 않는 겁니다. 시체라든지. 그런데 꿈도 안 꾸는 잠자는 동안에 세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맞잖아요. 생각하는 자체가 행동이라면 세상은 내 행위로 말미암아 경험되고 경험된 세상이 나로부터 유발된 세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절대자잖아요.

그런데 왜 칸트는 자기 절대자를 부정하느냐? 칸트 입장에서는 부정할 수밖에 없지요. 내가 전부라고 여겼는데 새로운 사태나 해외여행을 가니까 나는 이런 걸 몰랐네. 나는 이런 과일이 있는 줄 몰랐다. 이런 좋은 옷이 있는 줄 몰랐네. 나는 너한테 그런 면이 있는 줄 몰랐다. 살면 살수록 자꾸 새로운 면이 등장하지요. 내가 세상을 다 아는 게 아니구나. 나는 세상이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러니까 내가 무한하지 않고 유한하고 나는 일부만 알고 전부를 모른다는 것이 파악이 되는 겁니다.

제가 하는 말이 별로 어려운 말이 아니지요. 왜 의미를 주는지 모르니까 어려운 거예요. 뻔한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하는데 피히테가 이 이야기합니다. 바로 내가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되면 나는 이것밖에 몰랐구나. 내가 전부를 알고 절대자고 무한한 줄 알았더니만 세상에 이것밖에 모른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행위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한 것을 뒤돌아서서 다시 이론화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람은 자기가 전부가 아니고 다 부족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순간은 행동하는 것을 정리하는 순간입니다.

지금 만약에 식당에 갔는데 손님이 들이닥쳤어요. 만약에 전에 갔던 추어탕 집에 갔다면, 아줌마들이 한창 분주한데 묻습니다. “아줌마는 본인이 세상에 절대자로 생각합니까, 부분적으로 안다고 생각합니까?” 하면, “지금 바쁘니까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세요.” 그게 바로 행동이에요. 지금 아줌마는 국자로 추어탕을 푸지요. 그게 절대적 행동이라니까. 그런데 나중에 그 행동이 멈췄을 때 점심시간 지나서 한가할 때 오늘 몇 그릇 팔았지? 어제는 백 그릇 팔았는데 오늘은 칠십 그릇 팔았구나. 역시 나는 부족해, 라고 생각하는 것은 행동을 안 할 때나 나오는 생각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행동하는 순간은 절대자가 되는 거예요.

피히테는 말합니다. 자꾸 이론화시키는 이유가 뭐냐?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이제 피히테의 주장을 감 잡았습니까? 인간의 어떤 행위, 행동, 실천 자체에서 봐야지 그걸 스톱시켜서 정지해서 다시 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피히테는 더 나가요. 아마 내가 부분이고 모자란다, 나는 전부를 아는 게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도 그게 절대자의 신의 모습으로 행동한 거란 거예요.

그것을 비아非我라고 해요. 내가 아닌 비아. 이론상은 이걸 객관적 활동성이라 하는데 그런 건 필요 없고요. 하여튼 나라는 것이 이론상은 내가 나라고 아는 것은, 내가 아닌 것들을 통해서 나를 안다. 이게 이론상입니다. 그러니까 가방은 내가 아니잖아요. 가방은 비아非我가 되는 겁니다. 나는 아我가 되고. 이것까지가 나라는 것은 내가 아닌 것들을 통해서 반추해서 나라는 것을 정립한단 말이죠. 이론적으론 맞잖아요. 그런데 가방이 아닌 게 나라는 걸 남이 아닌 내가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비아는 어디에 포함돼있어요? 이미 나 속에 포함됐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의 절대성은 유지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순수 활동성이라고 표현하는데 내가 아닌 것을 통해서 다시 나를 정립한다. 예를 들면 신이 계시다. 신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아요? 내가 알잖아요. 신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나를 통해서 알지요. 신이라는 것도 나에게서 나온 거예요. 무조건 가방은 내가 아니에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피히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A는 A다. A라고 내가 생각하는 동시에 뒤에 A는 존재한다는 거거든요. 생각한다, 그래서 존재한다. 데카르트처럼 되는데 생각하는 것과 존재와 일치되는 걸 A는 A라고 하는 겁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나는 나다. 내가 나를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 존재하는 게 확실하다는 겁니다. 데카르트가 그렇게 이야기했듯이. 맞지요.

이렇게 돼버리면 아까처럼 내가 나를 규정해야 되면 내가 아닌 것을 통해서 나를 규정해야 되기 때문에 나는 ○○가 아님을 통해서 내가 되는 거죠. A는 A 아닌 것과 같지 않다. 내가 아닌 것은 내가 아니다. 그러면 내가 아닌 것이 필연적으로 있어야 되지요. 그 다음에 내가 아닌 것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요. 실천성을 통해서 돌아오게 돼있어요. 피히테의 대단한 점이 여기서부터 나오는 겁니다. 나와 나 아닌 것에서 경계가 발생되는 겁니다. 경계를 통해서 나와 나 아닌 것이 구분되고 그 경계를 만드는 그것을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아까 칸트 이야기하면서 칸트는 뭐라고 했지요? 신과 영혼에 대해서는 입 다물라고 했지요. 그런데 피히테는 입 다물게 아니고 내가 나로 돌아오기 위해서 반드시 자유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자유는 어디서 생기느냐? 경계를 만들고 장애가 생기면서 자유가 발생된다는 겁니다. 이게 대단한 점이에요. 이 이야기는 10분 쉬고 합시다.

한윤범(IP:14.♡.134.30)

15-03-13 10:51

201503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1-피히테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끝에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인간의 자유란 칸트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문제다.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도덕성을 우리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강제로 이야기하면 인간이 기계가 되기 때문에 자유의지로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고 그 자유로 성취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율법을 준 거지요. 하나님의 율법이란 못 지키는 게 아니고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마음껏 자유를 주셨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피히테는 윤리, 도덕을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곧 신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는 겁니다. 네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이 곧 하나님의 본래 뜻이라는 거죠. 왜냐하면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기가 아닌 것을 알고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그걸 자기 속으로 회수시켜요. 마치 로마서에 11장에 나오는 주로부터 나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속성이 모든 인간 내에 그 절대성이 있다는 거예요. 자기 자아 전개가 모든 인간이 포함돼있다는 겁니다.

그걸 하는 가운데서 칸트처럼 자유를 신의 영역으로 돌릴 게 아니고 인간이 스스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그 자체가 자유를 동반하면서 이뤄지게 돼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유는 어떤 때 쓰였고 어떤 때 발생되느냐? 인간의 자아는 내가 아닌 비자아에 대해서 이것을 그냥 저건 내가 아니라고 멈추는 존재가 아니고 이걸 기어이 정복하는 거예요. 전부 차지해서 자기 것으로 되돌리는 그러한 일을 해요. 비자아와 자아 사이에는 경계가 있는 경계를 넘어서려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논리를 보세요. 이 비자아는 내 인식에서 나왔거든요. 내 인식에서 나온 비자아를 극복하는 모든 실천력도 내게서 나온 겁니다. 내 절대성, 내 무한성이 내가 아닌 것까지 차지하겠다는 거예요. 이걸 욕구라 하는데 이런 욕구를 통해서 그것마저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저건 내가 아니라는 기준, 경계 정하는 것도 내게서 나온 내 실천력 속에 포함돼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 자아의 절대성이란 말이 반박이 안 된다면 이 말이 맞는 셈이 돼버려요.

그런데 우리가 피히테의 이러한 자꾸 경계 되는 비자아를 넘어서려고 하고 그걸 계속하려는 결국 모든 걸 자기 것으로 만들 순 없는 건 아닙니까. 불가능성이 있겠지요. 잘 들어보세요. 불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느끼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부잣집 아들에게 모든 걸 줘버리면 귀한 줄 모르죠. 그런데 엄마가, “안 돼. 그건 안 사줘.” 하는 순간 그 얘는 소유될 것과 소유 안 될 것을 발견하죠. 자아를 발견하죠. 엄마가 내 것 빼앗아 가는 순간 나는 저걸 언젠가 내 것 만들려는 의욕이 생기면서 내 자아는 거침없이 한계 없이 무한대로 발휘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무한대에 대한 다시 내 것이 만들고자 하는 시도, 끝없는 자유가 되겠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신이 맞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비자아라 할 때 우리가 비자아가 뭘 의미하는지 세밀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인간이 내 것 아닌 것의 판단에 두 가지 판단이 있어요. 부정否定판단과 부정不定판단이 있어요. 둘 다 ‘아니요’ 판단인데 앞의 것은 서술에 대한 부정판단이고, 밑에 것은 비서술에 대한 긍정판단이라고 해요.

돈도 안 되고 쓸데없는 이걸 왜 해야 되는데 하면, 피히테 의견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가 절대자가 아니고 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비겁하게 돼요. 힘센 사람에게 비비고 고개 숙이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써먹지를 못해요. 이런 판단을 구분하지 않으면. 저것 내 것 아닌데, 비자아지요. 내 것 아닌데 욕심내서 뭐 하노?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이런 모습이 기만, 속임수라니까.

형제가 열 명 있는데 병든 어머니가 왔지요. 그때 할 수 없지. 내가 모셔야지. 이게 효심입니까? 아니라고 했지요. 만약에 큰 형님이 와서 내가 모셔갈게, 하면 고맙다고 하면서 내가 모셔도 되는데, 라고 한단 말이죠. 이건 제가 아까 파먹는다고 했지요. 처음부터 부모를 좋아서 모신 게 아니고 억지로 모신 거예요. 자기는 모실 때 다른 형제들은 유럽으로 놀러가고, 지는 꼼짝도 못하고 뒷수발하고 있었던 거예요. 힘이 없기 때문에. 힘이 없다고 여긴 것은 자유가 없다고 여긴 거예요. 피히테는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힘이 센 사람은 큰 자유가 가졌고 힘없는 사람은 작은 자유를 가진 게 아니고, 그 사람들은 솔직했고 너는 자신을 너무 많이 속이고 있었던 거예요.

십자가가 그렇잖아요.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 되잖아요. 죄인이라고 그렇게 살면 되는데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무슨 행세합니까? 나는 이제 죄를 아는 의인 행세하잖아요. 그러니까 기만이 되는, 위선이 되는 겁니다. 그냥 솔직하게 살면 되는데. 그 솔직함이 자유란 말이죠. 자유하지 못하니까 벌벌 떠는 거예요. 들킬까 싶어서. 행여 누구한테 노출될까 싶어서. 음지에 사는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간통 저지른 사람들 얼마나 음지에 살았습니까. 그런데 고마운 헌법재판소에서 간통죄 폐지하니까 나이트클럽에서 축배의 노래를 불렀다 안 합니까. 브라보! 이젠 음지에서 양지로 나와도 되거든요. 돈으로 해결하면 되니까.

그걸 보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게 뭐냐? 얼마나 인간은 법에 대해서 주눅 들고 살고 있는지. 그런데 예수님은 법으로부터 해방이거든요. 그런데 피히테처럼 돼버리면 법으로부터 해방해버리면 어디로 돌아가요? 자유의 절대성으로 돌아가요. 피히테는 복음을 모르니까 법으로부터 해방된 그 자체가 바로 죽음 안에 갇혀있다는 다른 면인 것을 그들은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겁니다.

주께서 주신 것은 죽음으로부터 저주로부터 해방이거든요. 철학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없잖아요. 그럼 죽음을 경험했어요? 누가 천국 안 가봤잖아요. 지옥 안 가봤지요. 경험하지 않은 것은 이론상 있는 거예요. 피히테는 행동하는 실천하는 그것이 곧 진리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자살까지 해봐도 죽음 이후는 피히테가 경험 안 했잖아요. 그래서 칸트 말이 맞잖아요. 신과 자유와 영혼은 하나님께 맡겨야 된다고. 피히테는 그럴 필요 없다는 거예요. 왜? 행동하는 자체가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론상 절대자가 아니라면 피히테는 실천적 활동성 속에서 절대자를 뽑는 겁니다. 거기서 자유를 뽑아내지요. 어떻게 판단해야 되는가? 판단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거죠. 이래서는 모르겠지요. 예를 들면 됩니다. He is dead. 그는 죽었다. he는 주어에 속하고, 술부/술어에 속하죠. 否定판단은 서술에 대한 부정이에요. ‘그는 죽었다’의 반대말은 He is not dead. ‘그는 죽지 않았다’가 반대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否定판단이에요. 앞에 not이 들어가요. 그런데 밑에 입 구口가 없는 이 不定판단은 비非라 하는데 위에 것은 서술에 대한 반대를 否라 하고, 비서술에 대한 긍정을 非라 이야기해요. He is undead. 그는 죽지 않았다. 안 죽었다는 겁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이 문제가 똑같이 보이죠. 똑같이 보인다는 것이 우리의 평소 생활방식에서 얼마나 대충 살았느냐는 것이 들통 나는 겁니다. 그가 죽지 않았다는 말은 무엇을 근거로 하느냐 하면, 우리가 이미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다만 죽었다는 사실에 도달하지 않아서 죽지 않았다고 할 때 죽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는 안 죽었다는 말은 긍정이 뭐냐 하면, 비서술이 긍정이 되고 일종에 주어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죽음 말고 또 다른 넓은 의미로 죽음에 속한 인물이라고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죽음 말고 더 큰 우리가 아는 죽음 세계 바깥에 나가있는 사람이라서 그는 안 죽었다. 또는 안 죽는 존재라는 겁니다.

안 죽는 존재라는 것은 그게 아마 기계라든지 신이 되든지 그런 존재고, 죽지 않았다는 말은 아직 숨이 안 끊어졌다는 그런 말이거든요. 이제 이해되시겠습니까? 범위 문제지요. 우리가 아는 인간인데 아직 안 죽었데. 이건 죽지 않았다는 것이고, 당신은 어느 별에서 왔어요? 우리는 죽음이 없는 별에서 왔습니다. 그럼 안 죽는 사람이구나. 안 죽는 사람은 그 동네고.

바로 피히테가 아와 부아가 아니고 비아라는 말을 한 것은 내가 아는 절대세계와 전혀 관계없는 절대적으로 다른 세계를 염두에 두고 나를 절대세계로 배치, 자리 잡은 거예요. 이 이야기가 중요한데 아까 마가복음 9장이라 했습니다. 지옥은 어떤 데라 했습니까? 불이 꺼지지 않고 소금 뿌리는 세계라 했지요. 예수님이 오니까 사람들이 요셉의 아들로 봤습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본 거예요. 그런데 예수 입에서 나오는 발언은 둘 다 나와요. 위에 있는 부정판단도 나오고 밑에 있는 부정판단도 나오고 둘 다 나와요. not도 나오고 non도 나오고 둘 다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지옥 불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구약을 통해서 특히 다니엘 이후에 묵시문학이 많았거든요. 묵시문학에 지옥의 모습이 마귀가 들어가는 불붙는 내용이 나와요. 그래서 그것을 유대인들이 그대로 인수해서 지옥이라는 곳은 불붙는 곳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점을 예수님이 그대로 사용해요. 사용한다는 점에서 예수님이나 유대인이나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지지요.

그걸 사용하면서 그런 것을 당하는 것은 바로 그걸 사용하는 네가 당한다고 이야기해버린 겁니다. 그럼 누가 누굴 부정해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부정해버리죠. 부정하면서 예수님이 속한 세계는 그들과 같은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고 非, 다른 세계에 속한 겁니다.

이걸 기하학적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신화학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옛날 신화에 두 민족이 있는데 어떤 다른 민족이 이 마을에 왔을 때 마을의 구조를 그릴 때 이렇게 그립니다. 큰 원 그리고 작은 원 그리고. 큰 원은 기존에 원주민이고 작은 원은 투입된 자기 종족이고. 그런데 기존의 종족을 어떻게 그리느냐 하면, 하나의 원을 두 조각내서 그들은 여기 살고 우리는 여기 산다는 겁니다. 벌써 이런 기학적으로 인식이 다르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데 너희가 쳐들어왔잖아. 비겁한 것. 그러니까 일본이 한국에 와서 산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영토의 일부를 차지한 게 되잖아요. 그런데 일본 사람 보기에는 일부를 차지한 게 아니고 전체를 다 먹었다는 겁니다. 일본이 조선을.

예수님 안목으로 봅시다. 유대인 안목은 우리가 사는 동네에 예수님이란 낯선 사람이 왔다. 단도리를 잘 하자. 예수님 보시기에는 유대인이고 이방인이고 전체가 다 누구 소관입니까?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친히 만든 세계에 속하는 겁니다. 여기서 피히테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피히테는 부아가 아니고 비아에요. 내가 생각한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 그러면 둘 다 절대적이에요. 아 세계도 절대적이고 비아 세계도 절대적이에요.

비아 세계가 절대적이라는 말은, 내가 미처 모르는 게 있다고 해서 나를 부분으로 몰아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난 이렇게 맛있는 주스는 처음 봤어.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무식하다고 여기지 말란 말이죠. 왜냐하면 이걸 내가 모른다고 이야기함으로써 모른다고 이야기한 내가 이미 모르는 것까지 포함시킨 절대자가 되는 겁니다. 난 이건 할 줄 몰라. 이것이 그만큼 똑똑하다는 뜻이에요. 내가 뭘 모르는지 안다는 게 그만큼 똑똑하다는 뜻입니다. 뭔 뜻인지 아시겠어요?

그리고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닙니다. 나는 비타500이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는 말은 이미 나한테 경험된 거잖아요. 경험됐으면 내 욕구가 가만있습니까? 이미 경험된 것을 차지한 이상은, 만든 제조성분은 모르지만 이미 먹었다는, 경험했다는 말은 내 품 안에 들어온 셈이 돼요. 따라서 나는 이게 뭔지 몰랐다는 점을 포함시킴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나한테는 모르는 게 안 남아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 말고 다른 주스가 왔다. 다른 주스가 와도 마찬가지에요.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절대성에 의해서 저건 나의 비아가 되는 겁니다. 내가 비아가 되는 이상은 나는 무식한 게 아니고 저건 비아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자체가 이미 나는 그쪽 세계를 경험했다는 게 되고 경험하게 되면 그쪽 세계도 내 세계로 포함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말장난처럼 느껴지십니까? 피히테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는 이유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마귀가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네가 신처럼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그때부터 아담과 마귀가 타조처럼 빠르고 절대로 안 죽고 그런 뜻입니까? 피히테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는 안 죽습니까? 죽어요. 그리고 힘들어요. 그래도 본인은 본인을 힘들고 어렵고 무지해도 본인이 전부라는 사실을 아무리 힘들어도 한 순간도 포기 안 해요.

너, 무식하지, 힘들지? 우리 집에 와서 노예 되어라. 이러면 내가 못 먹는다 할지라도 내 자존심을 포기할 수 없다. 그게 바로 마귀적인 생각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모습이잖아요. 그걸 피히테가 철학적으로 묘사하는 거예요. 무지하고 무식해도 뭔가 자기 절대성은 어느 순간도 놓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이래놓고 교재 봅시다. 173페이지 밑에서 네 번째 줄에, [하나님의 개념이 특별한 실체로서는 불가능하며 오히려 모순된다는 것이다.] 피히테는 말합니다. 173페이지 제일 위에 보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다. 하나님은 영원한 큰 강의 원천이다. 생명과 능력과 행위, 즉 근원적인 생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그분의 생명으로부터, 무한한 자로부터 흘러나온다. 왜냐하면 생명은 그분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눈만이 참된 아름다움의 나라를 본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절대적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뒤에 칸트 이야기하면서 칸트는 생동감 있고 활동하는 이걸 하나님이라 보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인격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내가 움직이는 것, 이게 하나님이지 하나님을 대상으로 봐서 하나님은 나처럼 생긴 어떤 분, 이렇게 되면 그게 특별한 실체가 되는데 특별한 실체는 이 땅에 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특별한 실체로서는 불가능하면 오히려 모순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 페이지 봅시다. 174페이지. [이와 마찬가지로 피히테에 따르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표상한다는 것은 자기당착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되면 나의 대상이 돼버립니다. 대상이 되면 인간이 만든 하나님이 돼요. 비아가 된다니까. 그런데 비아는 그냥 있다, 없다? 비아는 반드시 결국은 내 자유, 내 욕구에 의해서 비아는 내게 흡수가 된다면 최종적으로 절대 자아를 만들어주신 그분이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내가 어떤 대상으로서 바깥의 하나님을 믿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섬길 때만 섬기고 안 섬기면 하나님이 없게 돼요. 왜? 경험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피히테는 자아는 곧 자아 경험입니다. 자아 경험에 대해서는 지금 내가 활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뭐든지 행위하고 있다는 겁니다. 행위하고 활동해야 되지 앉아서 이론적으로 따지면 안 된다는 거죠. 내가 하나님 생각할 때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 생각하지 않으면 자기만 생각하고. 그래서 무슨 하나님이 묘사되느냐 말이죠. 내가 쉴 때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내가 하나님 생각 안 할 때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내가 하나님이 생각할 때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그게 바로 하나님은 영원한 큰 강의 원천과 생명과 능력과 행위, 특히 행위, 모든 행위, 근원적인 생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원천이라고 돼있어요. 모든 것의 원천이란 말이죠.

172페이지, [피히테의 경우에 칸트와 달리 이론적 철학과 실천적 철학이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 뒤에 계속 봅시다(174페이지). [이 표상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즉 인격성과 의식이라는 것은 제한과 유한성을 전제하지 않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인격을 가졌다는 말은, 하나님이 유한의 대상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자아가 비자아 때문에 자아는 순간적으로 유한이 돼버렸어요. 유한은 유한으로 머무는 게 아니고 그 비자아를 내 것으로 통합시킴으로써 우리는 다시 유한자가 아니라 무한자로 확인되는 거죠. 무한자로 확인되기 위해서 인간은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날마다 비자아를 만들어 내놓고 자기 것을 만들면서 경계를 짓고 경계 진 것을 통합시키는 작업, 행동을 하면서 인간은 절대자 맞는다는 걸 확인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데 왜 우리 바깥에 하나님을 세워놓고 하나님을 찾아가야 만나는 유한자로 세웁니까? 우리가 유한한 것뿐만 아니고 하나님조차 우리를 못 찾아오는 게 돼요. 우리가 찾아가야 만날 하나님 같으면 하나님 자체가 무한한 분, 절대적인 분이 아니고 유한한 분이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피히테에 의하면.

[따라서 그 본질은 이런 술어가 첨부됨으로써 우리들에게 유한자가 되며 우리 같은 이들에게 본질이 된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들이 원했듯이 아무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 ..... 이런 언급은 기독교의 하나님의 이해가 인간의 투사라는 점을 비판했다.] 결국 하나님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피히테가 비판하는 거예요.

그러면 도덕이 뭐냐는 문제지요. 이 세상은 윤리, 도덕이 없으면 못 사는데 윤리, 도덕은 어떻게 생기는가?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피히테는, 간단하게 말씀드려서 이렇습니다. 윤리, 도덕이란 자아와 비자아, 양쪽 다 경계선에서 만남으로써 둘 다 반성을 하게 돼요. 반성하는 자체가 이것이 도덕이 돼요. 반성을 유발하는 동기가 하나님이 주신 활동력/활동성입니다. 피히테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움직임 자체가 반성을 유발하는 활동이란 점에서 대단히 도덕적이고 자기 이론이 윤리적 이론이 된다는 거죠.

어떤 사태가 일어나고 어떤 만남이 일어나고 어떤 물건을 만나도 나는 비타500을 먹기 전까지는 비타500이 우리 목이나 축이고 영양분 주는 줄 알았는데 고속도로에서 잠 깨우는 줄은 처음 알았어요. 이게 반성이에요. 그런데 그 반성하는 동시에 비타500이 훌륭합니까? 아니에요. 그렇게 비타500을 보고 한 것이 비아가 한 게 아니고 자아가 했잖아요. 자아가 반성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경험했잖아요. 이런 새로운 면이 있구나. 고속도로에서 졸음 쫓을 때 이게 최고구나. 알 때 나는 다시 절대자가 되는 겁니다.

피히테가 말하는 도덕과 윤리란 것은 나만 잘났다는 말이 아니에요. 활동 가운데 내가 맨날 반성해야 될 존재로서 주께서는 우리를 절대자로 만들었다는 사실, 이게 피히테의 사상입니다. 이 사상 끄집어내는 데 애먹었다.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이론적으로 홀로 있으면 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아니고 날마다 반성해야 돼요. 반성하게끔 하셔서 절대자로 신의 자녀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었다는 이 사실을 내가 알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너도 신이야, 너도 무한자야, 라는 취지에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이게 피히테의 사상이라니까요.

그런데 칸트는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인간은 교만하면 안 되고 겸손해야 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잘나도 자기 분수를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그건 뭐냐? 영혼의 문제, 아버지 왜 날 낳았어요? 그런 식으로 건방지게 질문하지 말고, 영혼의 문제, 신의 문제, 자유의 문제는 하나님께 달린 문제지 우리가 건방지게 현상계에 속하면서 신의 세계까지 넘보는 그런 교만은 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그저 아무리 해도 부족하고 아무리 해도 못났다는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도덕을 지키는 자유스런 마음이란 거죠.

방금 제가 피히테 이야기하고 칸트 이야기했는데 여러분 똑같이 들리지 않습니까?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릴까요? 차이점이 뭐지요? 제가 아까 했지요. 피히테는 끝까지 가지요. 끝까지 가면 이렇게 부족하고 신 앞에서 연약한 인간이라고 알게 하신 그것이 절대적인 활동성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작품이고 그 결과가 우리 자신이라는 거예요. 그게 피히테 생각이에요.

여기 174페이지에 봅시다. [무신론 논쟁 본문에서는 인간의 운명에서 직접 다루어진 것처럼 피히테는 우리 안에 있는 실천 이성의 도덕적 의욕을 생각했다. 반면에 뒷날 기획한 지식학에서는 우리에게 작용하는 빛에 대해서 언급했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면 도덕적 의욕들이 생겨난다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이 신을 인격자로, 174페이지 밑에 보면, [전통의 유신론적 하나님의 표상인 ‘신인동형동성론’을 피할 수도 있다.]

신인동형동성론이 뭐지요? 인간이 생각하는 감정만큼 하나님도 같이 생각한다는 뜻이지요. 성경에도 나오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후회하신다. 신인동형동성론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한탄하사, 이런 것. 하나님이, 너희들 괜히 지었다, 이런 것.

그걸 해석하면서 사람들은 뭐라고 정리했느냐 하면, 신도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진 인격체라고 신학에서 규정했거든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신에게도 이성과 의지와 감성이 있다고 본 겁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과 의지와 감성은 신으로부터 왔다고 본 겁니다. 그걸 신과 인간의 공유적 속성이라고 조직신학에서 가르쳐요. 더 나가서 그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거룩과 의로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동물과 달리 의와 거룩함을 줘서 인간을 만들기 때문에 천주교에선 인간이 타락해도 아주 타락하진 않았고 인간 속에 있는 의와 신,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있어야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졌다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 신도 속성이 사랑이고 그 사랑이 이미 우리 속에 이미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은 사랑을 찾아서 오게 돼있기 때문에 둘이 만나면 스파크 일어나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잠재돼있던 그동안 잠자고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말씀이 오게 되면 잠자는 형상이 자극을 받아서 형상을 일깨우면 우리는 점점 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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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7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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