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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50306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고정석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150306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고정석

이름 : 한윤범(IP:14.39.134.30)

20150306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고정석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성경 속에 말하는 현실과 우리가 온 몸으로 실감하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과 얼마나 격차가 있는지 아셔야 돼요. 공통점이란 것은 완전히 제로입니다. 그것을 단절이라고 해요. 영원한 단절. 마치 에덴동산과 쫓겨난 그 세계가 철저하게 단절된 것처럼 지금도 유효합니다. 똑같이 하늘나라는 완전히 단절돼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단절이 아쉬우니까 자꾸 천국을 만들어내요. 항상 만들어낼 때 꼭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본인의 영광과 본인의 구원과 본인의 불멸과 본인의 영생, 그게 꼭 핵심, 최고의 중요부분을 턱하니 자기 이름이 차지하고 시작하니까 이렇게 되거든요.

자기 존재에 대한 조작 아닙니까. 인공적인 것이 가미되거든요. 자기 존재를 조작해놓고 조작된 존재를 자기가 도로 회수하면서 “믿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전에는 술, 담배 못 끊었는데 술, 담배 끊은 괜찮은 자기의 존재를 믿음의 목표로 삼는 거예요.

첫째 시간은 지나갔으니까 잊어버렸으니까 또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목회가 뭡니까? 수그리. 이게 목표가 돼야 되는데 우리가 숙였기 때문에 살은 거예요. 만약에 고개 쳐들고 봤으면 죽여 버립니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본 사람은 다 죽여 버려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아까 출애굽기 본문에 나오잖아요. 33장 20절에 보면, “내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이것은 죽음이냐, 영생이냐는 누가 기준을 제시합니까? 하나님께서 제시하고, 장소는 시내 산 위거든요. 시내 산 위에서 모세가 했던 기준은 산 밑의 인간의 기준과 달라요. 인간은 악착같이 오래 버티면 그게 사는 줄로 알지만 오래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오래 살 것 같으면 그건 저주에요. 선악과 따먹고 영원히 오래 산다? 저주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은 데서 부활해서 영원히 저주받아요.

그래서 우리가 아는 오래 사는 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내용이 달라야 돼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내용물로 차야 되고 왕자님의 신발이 그 안에 들어있어야 돼요. 그 안에 내용물이 들어있으면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은 벌써 날아가 버린 후에요. 우리 안에 주님의 영광과 주의 이름이 장악하고 차지한 그런 상태에 돌입된 상태입니다.

이미 주님의 손아귀에 있는 이상은 우리가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다든지 이런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잊어버리고, “내가 말씀 지켜서 옛날 매 맞아서 잊어버린 걸 되찾아올까?” 이렇게 되면 그게 매 맞을 짓이 되는 겁니다. 네가 내가 해준 건 모르고 엉뚱한 것을 네 개성과 네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네 존재를 조작하는구나. 존재의 조작입니다. 인공적인 것이 가미되고.

그러면 이 두 번째 시간에 주의 이름이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이게 주제가 되겠지요. 첫 번째는 주의 이름이 왔는지 어떻게 아느냐? 두 번째는 주의 이름이 왔을 때 바꿔치기 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이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나옵니다. 3장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모세가 묻습니다. 13절에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름을 안 가르쳐주지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스스로 있는 자는 인간들이 자기에게 이름을 붙이는 식의 이름을 하나님께서는 붙일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내가 여기 있네.”라고 자기 존재감을 느끼고 내 이름을 뭐라고 부르지? 내가 자식을 낳았는데 이름을 뭐라고 부르지? 이런 우리가 파악하는 거울 앞에 있는 내 존재, 또는 내 앞에 어리광부리는 내 자식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 이런 식으로 존재성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인간 세계에선 그것이 통할 수 있지만 하나님한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없고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분이에요. 네가 부를 이름은 없다는 거지요. 너희들끼리 통하는 이름은 없다. 위아래, 위위아래. 아래와 위가 다르단 말이죠. 성도가 뭐냐 하면, 바로 아랫동네에 살면서 윗동네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삶이 바로 성도가 증거할 삶이에요.

이름에 의해서 변화가 돼야 되는데 그 이름은 어떻게 되느냐? 그 다음에 3장 15절 봅시다.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해놓고 아브라함의 하나님도 되고 이삭의 하나님도 되고 야곱의 하나님도 되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름입니까? 아브라함은 사람의 이름이지 하나님의 이름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뒤에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 땅에서 누구와도 접촉되지 않고 누구와도 차이 나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기능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자기 이름이 되는 겁니다.

사람의 이름을 따서 뒤에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놓고 그 다음에 아브라함의 이름으로 기능, 어떤 일을 해버리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고 어떤 일입니다. 액션이에요. 활동성입니다. 변화시키는 활동성이에요.

신데렐라 이야기 계속 해봅시다. 왕자가 와서 이 동네에 신발 주인 있는지 맞춰볼 때 다른 언니들은 안 맞는데 신데렐라에게 딱 맞거든요. 너무 감사해서 “당신이 바로 그 여인이었군요. 그때 조명이 별로 안 좋아서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더 예쁘군요. 나랑 가서 왕비가 되어 영원히 행복하게 삽시다.” 신부가 묻기를 “실례지만 저는 왕자님의 이름을 모릅니다.” 왕자가, “이름은 알 것 없고 이렇게 신발을 신겨주는 이것이 바로 내 이름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나는 누구로부터 부름을 받는 게 아니고 내가 부르면 불렀지 당신들이 부를 때 좇아오는 그런 신은 아니다. 나는 스스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내가 알아서 스스로 하고 너희들은 내 스스로 하는 일에 포함이 될 뿐이지 너희 일 따로 있고 내 일 따로 있어서 둘이 거래하거나 흥정할 대상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마치 하인 부르듯이 자기 비서 불러서 이름 부르듯이 개 이름 불러서 일 시키듯이 인간은 갑질하고 주님은 을로서 부리지 않습니까? 온갖 찬양과 수식을 붙이더라도 기본의 의식이 내 위주가 되고 내 우선이 된다면 내가 갑이에요. 그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여호와 믿고 자기를 위해서 예수 믿는 것,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우상숭배자입니다. 저주의 대상이에요. 지옥 갑니다. 아예 삼위일체로 도배를 해보세요. 지옥 가지.

주의 이름이란 천지창조를 할 때 이미 이름이 먼저 있었고 그 이름에 의해서 천지는 창조되었기에 마땅히 주님께서는 자기 창조물을 자기 것으로 회수할 권한이 있습니다. 회수한다는 것은 구원한다는 뜻이 아니고 누구는 버리고 누구는 데리고 천국 가서 살게 하는 권한도 피조물이 왜 이렇게 했습니까, 왜 저를 명단에서 삭제시킵니까? 라고 할 권한은 피조물에게 없습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천히 쓸 것을 따로 만들고 귀히 쓸 걸 따로 만든다고 해서 천히 쓸 것으로 분류된 자들이 자기 위치 바꿔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여전히 자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권한을 주의 권한으로 바꾸는 방법은 주의 이름으로 벌이는 기능과 그 작업, 그것에게만 가능하지 우리 힘으로 우리 자신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의 사람은 없어요. 아브라함은 있지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면서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계제된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제가 구원받은 것은 주의 이름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 네가 과거의 너에서 지금의 너로 주의 이름이 이끌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잖아요.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예수님은 중보자가 되는 겁니다.

첫째 시간부터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복잡한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복잡하지만 굉장히 간단하지요.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보내셔서 모든 세상을 중보자를 주로 인정하여서 주의 나라를 만드는 것, 끝. 굉장히 간단한 문제지요. 순순히 거기에 따라주면 아무 문제없지요. 그런데 문제는 순순히 안 따라주는 요소들이 우리를 꽉 쥐고 있는 거예요. 그게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이제는 사나 죽으나 내가 나를 돌보지 않으면 아무도 돌 볼 사람이 없어요. 내가 내 인생 책임지지 않으면 아무도 책임질 사람 없습니다. 이마에 땀 흘리면서 악착같이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애써야 되지요.

그러다보니까 오기만 남았지요. 내 영광과 내 자존심과 내 나름대로의 시간과 역사를 간추리고 그걸 정리하고 그걸 사수하고 지키고 확대시키고 확장시키는 그런 오기와 그런 습관과 몸에 배인 나의 이름, 자존심을 걸고 하는 활동성만 내 몸에 가득 차있는 거예요. 자진해서 주 앞에 순종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 노리고 뭔가 내 이익을 얻고자 주의 이름을 부르지요. 그런 이름은 거짓 이름이지요.

출애굽기 6장을 봅시다. 드디어 주의 이름이 알려집니다. 2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그러면 여호와는 뭐냐 하면, 언약대로 애굽에서 빼내서 구속하여서 너로 하여금 약속한 땅에 집어넣는(6장 9절까지) 그런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지상에 펼치는 계획이 주의 이름을 알려주는 순간 계획도 함께 알려졌지요. 그럼 이 계획에 대해서 인간의 이름들은 여기에 간여할 수 있습니까? 못 해요. 이미 이름 속에 이름과 동시에 계획이 나왔다는 말은 추진되는 모든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이름을 알려준 그 이름으로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의 이름에 합당한 그 실체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시다. 출애굽기 33장, 점점 더 어려워지지요. 미안합니다만 할 수 없어요. 여기 33장 19절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고 돼있지요.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면서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지요. 그렇다면 주의 이름으로 실시하는 그 일에 있어서 산 위에 있는 모세를 산 밑으로 내려 보냅니다. 보내시고 주의 이름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체가 있다는 거예요. 존재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19절에 보면,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주의 이름과 최종적인 주의 영광이 관련돼있어요. 왜냐하면 모세는 영광을 못 봤잖아요. 특히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못 봤지요. 그런데 마지막에 주의 이름이 자기 실체를 드러내는 그분이 바로 그동안 모세가 못 봤던 영광이고 주의 얼굴이 되는 겁니다.

실체가 먼저 있었고 이름만 등장하고 실체는 나중에 이름과 결합이 될 거예요. 언제? 그게 바로 마지막 때, 마지막이란 글자 크기와 때라는 글자가 확연히 다르지요. 마지막 카이로스, 때가 되매, 마지막이 때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고 때가 된다면 그게 마지막이에요. 예수님 오실 때가 그게 마지막 때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끝에 나타납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끝에 나타나는 분이 이름으로 나타난다는 말은, 주의 이름이란 과거에 속한 이름이 아니고 미래에 완성된 끝장날 그 환경이 미리 앞서서 당겨서 지금 모세에게 나타나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고 엘리야, 사무엘에게 나타나고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 있다 했습니까? 지금 우린 안 죽었는데? 하늘나라 안 갔어요? 울산에 살고 있잖아요. 울산에 살았으면 시민권은 울산에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뭐라고 돼있어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요. 위아래, 위위아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실감이 안 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믿을만한 것만 배치돼있기 때문에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것은 저 뒤에 아스라이 멀어 보이는. 가만있어봐. 저 뒤에 뭔가 있는데 빌립보서 3장 20절에 뭐 있는데? 하늘에 시민권이 있느리라. 죽어서 가겠지. 죽어서 가는 게 아니라니까요. 지금, 지금 주께서 코르셋으로 꽉 조이면 우리가 아는 건 다 자리를 비켜주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걸 코앞에 둬야 돼요.

학생들 책상에다 공부가 남는 거다. 이런 것 쓰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하지 말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걸 책상에 써야 되는데 그걸 쓴 학생들은 지금까지 못 봤어요. 아마 그런 것 썼으면 종교는 대학 가서 하라고 집어 던져버려요. 고3이 공부나 해야지 이런 건 시험에 안 나온다고 집어 던질 거예요.

그걸 존재의 조작이라고 해요. 가짜 존재를 계속 만드는 거예요. 마귀가 시키는 대로. 내 존재가 아닌데. 꼭 신데렐라 언니 같아. 열심히 살면 하늘나라 신발 맞을 거라고. 신겨줘야 맞지. 지가 신는다고 발 치수 재고 성형수술하면 신발이 맞는 줄 알아요? 안 맞습니다. 주님이 친히 신겨줘야 맞게 돼있어요. 주님에 수그리. 고개 숙이세요.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지라. 이 말은 늘 고개 숙이고 주께서 은혜와 긍휼이 우리를 무겁게 누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세요. 이게 바로 책상 앞에 있어야 되고 그걸 보고 난 뒤에 출근해야 되는데 “파이팅!” 이러고 시작한다고. 오늘도 행복하고 부자 되세요. 이런 게 들리는 거예요. 부자 되서 뭐하게? 고정된 내 자리 확보하기 위해서. 이게 인간들이 사는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서. 신데렐라 언니들 사는 인생이고 우린 그걸 부러워했지요. 남의 신발 부러워하고.

얼마 전에 제 아내 동창생 모임이 있었는데 동창생 모임 되면 명품들 다 들고 나옵니다. 나이 오십 대 후반이니까. 안 그래도 사놓고 자랑질 할 기회가 없잖아요. 육백만 원짜리, 팔백만 원짜리 들고들 왔어요. 제 아내는 십만 원짜리에요. 전부 다 십만 원짜리가 부러워서. 예쁘니까.

왜 우리는 주님을 못 자랑하지요. 로마서에 보세요. 이렇게 당부합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복음은 너희들 앞에서 너희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한다. 주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데 너는 세상에서 사람들한테 갑 앞에서 부끄러워하느냐 이 말이죠. 수그리, 고개 숙일 대상이 주님 앞에 고개 숙여야 되는데 너는 가진 자 앞에서 고개 숙이고 너는 왜 그렇게 사느냐? 그러니까 본인이 스스로 자기 영광을 포기 못하니까 누가 힘들어요? 본인이 힘든 거예요. 주님의 긍휼과 은혜를 자기 행함의 실적으로 그걸 대체해버리니까 그 실적을 계속 쌓으려고 하니까 본인이 괴로운 거예요.

암 걸렸습니까? 쉬운 해답을 놔두고 어떻게 하면 암에서 낫는지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언젠가 오후설교하면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했지요. 날개 짓하니까 추락중이에요. 백날 해보세요. 떨어지고 있지요. 독도는 우리 땅, 한민족은 통일을 방해하지 마라. 이러다가 추락하고 있는 거예요. 과도 들고. 평소에 농사지면 되는데. 한민족통일운동 하다보니까 그 자체가 추락 중이라니까. 우리가 설치면 설칠수록 지옥에 가까워요.

성경에 가만있으라고 했잖아요. 가만있어도 되는데 어떻게 가만있어요? 수그리. 주께서 시키는 대로 은혜가 누르는 대로 살면 되는데 본인이 하려고 하니까 자기 애쓰는 것만 보이고 주님의 일로 일어나는 이적들과 표적들은 전혀 눈에 띠지 않는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애굽에 벗어버리고 너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보내겠다. 이건 누구 숙제냐 하면, 이스라엘 본인들의 숙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숙제에요.

마치 이와 같은 겁니다. 주님께서 수학문제를 낼 때 학생들은 자기가 풀려고 오해를 하는데 주님이 숙제 낸 것은 학생들에게 풀라고 낸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가 푼다고 낸 문제에요. 어쭙잖게 지가 푼다고 풀어도 풀리지도 않을뿐더러 문제는 후유증이 뭐냐? 풀지도 못했으면서 풀었다고 복 달라고 내미니까 이게 더 골치 거리에요. 주께서 애굽에서 끄집어낸다고 했는데 모세가 지가 안중근 의사도 아니고 독립투사도 아닌 게 지가 사람을 죽여서 내가 총대 들고 앞서겠다. 나를 따르라. 이런 식으로 히브리인들을 해방하려고 하다가 완전히 현상수배범으로 무서워 도망치기 급급했어요.

선교한답시고 캐나다 국적의 목사가 북한에 갔는데 선교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선교는 그냥 밥 먹고 살면 선교에요. 주기도문에 뭐라고 돼있어요? 일용할 양식을 주고 그걸 고백하기만 해도 이미 선교하고 있는 중이에요. 선교는 일차적으로 주님이 성도를 향하여 매일같이 전도해요. 그 전도 받은 자가 주께서 인도했음을 전도하면 그게 일차적인 전도에요. 그래서 통합하게 되면 전도는 누가 하신다? 주께서 자기 숙제를 자기 이름으로 시작한 일을 마지막까지 자기 이름으로 그걸 다 완수시킵니다.

그 와중에 나타난 것이 뭐냐 하면, 성도를 어디에 몰아넣느냐? 이것이 두 번째 풀어야 될 문제에요. 첫 번째는 주의 이름으로 기능이 있고 그 기능으로 일하신다는 것. 두 번째는 자기 백성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

밑에 쓰겠습니다. 자기 백성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왜냐하면 궁지 위에 글자가 무슨 뜻입니까? 마지막이죠. 주께서 주의 이름이 마지막 때에 실체가 드러나잖아요. 물어봅시다. 남들은 모르지만 아브라함은 늘 마지막 때였어요. 왜? 마지막에 이름이 실체가 드러날 그 하나님이 미리 앞서서 이름으로 자기를 찾아왔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름을 보여주는 실체로서 미리 앞당겨서 주의 이름을 만났잖아요. 육신을 가졌잖아요. 마지막 때는 이름이 직접 이름을 가져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지만 그전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왔잖아요. 그러면 그전에 주의 이름을 드러낼 육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말이죠.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들어가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고 주께서 야곱에게 찾아오면 야곱의 하나님 되거든요. 우리에게 찾아오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그런데 찾아온 하나님이 마지막 때를 염두에 두고 미리 찾아왔기 때문에 남들은 모르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날마다 마지막이에요. 날마다 어디로 갈지 갈피를 못 잡는 인생길로 인도함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한 거예요. 날마다 궁지에 몰린 거예요. 그러면 갈 바를 알지 못했으면 아브라함이 점잖게 “주여, 인도하옵소서.” 이랬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나름대로 자기 갈 길을 잡아요. 그 잡는 과정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몸을 가지고 자기 이름을 사용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할 때 자기 이름에게 의미를 주기 위해서 의미가 되는 장소를 찾게 마련이에요. 이게 첫 번째 시간에 말한 내 장소 확보책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뭘 제일 싫어하느냐 하면, 내 이름이 무의미하게 되는 것을 제일 싫어해요.

제가 미국에서 중국사람 모인 교회에서 설교한 것 들어본 적 있습니까? 말을 할 때 통역 때문에 빨리 하지 말라고 해서 3배속이 아니고 반대로 1/3정도로 낮췄잖아요. 지금 제가 이런 입장입니다.

인간이 자기 몸을 두고 이름을 붙여놓고 내가 붙인 이름을 위하여,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 이름을 포기 안 해요. 죽으면 죽었지 자기 이름 훼손되는 건 용서가 안 돼요. 몸을 가지고 어디를 찾아가느냐? 의미가 되는 장소를 찾아가요. 의미가 된 장소가 되려면, 의미가 반대말이 무의미에요.

인간이 무의미와 의미를 본인이 판정해요. 예를 들면 여자 분들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프로야구에 강정호란 선수가 있어요. 그 사람이 홈런 40개 쳤어요. 우리나라 프로야구 계에서 잘 나갔거든요. 돈도 수십 억 줘요. 그런데 그 사람은 의미 있던 것이 점점 무의미가 됐어요. 그래서 자기 의미에 합당한 것을 찾으려고 미국에 갔어요. 메이저리그에 입성해서 피츠버그에 갔단 말이죠.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나는 누구다? 나는 적어도 미국에서 노는 그 정도야. 이게 새로운 의미로 자기에게 부과가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하는 줄 알아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왔지만 아브라함 나름대로 뭔가 실시하고 뭔가 꿈틀거리는 게 있단 말이죠. 꿈틀거리는 모든 본심이 뭐냐? 자기의 몸과 그것을 어디를 간다? 의미가 되는 자기에게 합당한 장소를 찾아가는 거예요. 나는 노숙자 될래, 이런 사람 없습니다. 의미를 찾다가 자꾸 시험에 떨어지고 탈락하니까 나중에 남들 보기에는 무의미한 곳에 간 거예요.

여기에서 물어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지요. 이 땅에서 마지막 간 곳이 어떤 의미의 장에 갔습니까? 빌립보서 2장에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어디까지 갔어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예수님은 바로 말씀대로 죽는 그곳이 주님 찾아간 의미죠. 그런데 그 주님이 누구냐 하면, 우리의 창조주고 구세주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죠.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로 예수 믿을까요?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의미 없다, 무의미하다는 장소에 가서 쓸쓸히 돌아가셨고 거기서 부활했습니다. 그게 바로 요구르트 빨대 꽂은 장소에요. 존재가 찢어진 장소에요. 인간이 조작한 존재에 구멍을 뚫은 거예요. 그리고 사도 바울을 말합니다. 복음은 뭐냐? 예수님 죽은 게 복음이다. 십자가 죽음이 복음이다. 그게 현실이라는 겁니다.

이 현실은 우리가 생각한 우리가 기대한 현실 속에 포함될까요? 우린 그런 걸 기대합니까? 빨리 살다가 십자가 죽어야지. 그런 것 기대 안 하잖아요. 우리는 그걸 매끈한 바나나우유, 매끈한 그것, 그걸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백날 시민권은 위에 있다고 이야기해도 우리는 뭐만 쳐다보며 삽니까? 그건 성경의 어떤 단어에 불과하고 저 멀리 치워버리고 내게 의미가 되는 의미의 장에 필요한 것들만 내 앞에 배치해놓고 그걸 내 장소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무의미와 다르게 의미의 장이라 할 때 여기에서 두 가지 요소가 있어요. 공간과 시간을 통해서 거기에 자기를 안치시키려고 합니다. 이걸 자기를 위한 성전이라고 합니다. 내 영혼의 성전이죠. 이만하면 됐다. 연금 타고 이만하면 됐지. 자기를 위한 성전입니다. 공간은 뭐냐 하면, 안정적인 구조체제. 시간은 흐름의 계열. 계열이란 목걸이처럼 사건과 사건을 엮어내는 걸 말합니다. 내 의미를 위해서 나는 이런 식으로 고생했고, 이런 식으로 착한 일 많이 했다는 것을 진주목걸이 엮듯이 사건들을 굴비 꿰듯이 꿰어있어요.

그리고 공간은 뭐냐? 이만하면 죽을 때까지 밥 먹고 살지 않겠느냐고 안정적인 공간을 확보해요. 공간과 시간이 바로 인간이 자기 이름을 의미를 두기 위해서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겁니다. 이것 안 할 사람 있겠어요? 이거는 타고난 건데. 모든 인간들이 다 이걸 시도하게 됩니다.

여기가 교회가 아니고 일반 인문학강좌라든지 일반회사 신입사원 교육하는 장소라고 봅시다. 안 그러면 교감 연수장이라고 봅시다. 앞에 성경 이야기 하나도 안 하고 이것만 이야기해보세요. 사람들이 충분히 납득을 하고 이해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여러분 이름을 이 땅에 빛나고 살다 죽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여러분이 시시하게 놀지 말고 수준을 격상시켜서 여러분의 의미를 스스로 확장시키세요. 어떻게? 무의미한 것을 버리시고 의미 있는 걸 하세요. 그 의미가 뭐냐? 여러분이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봉사정신을 발휘해서 궁극의 정신으로 나 하나 때문에 민족이 산다든지 그런 의미 있는 시간과 공간을 시도한다면 안정적인 구조를 줄 것이고 여러분의 역사는 남들에 귀감이 될 정도로 훌륭하게 정말 이순신 장군처럼 존경할 그러한 계열의 아름다운 보람 있는 가치 있는 인생을 살 것입니다. 이것으로 강의를 끝내겠습니다, 하면 박수칠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이러한 모든 것이 뭐다? 인간이 어디서 나왔어요? 몸에서 나왔지요. 이 몸이 마지막 때에 죽으리라. 그것도 필히 죽으리라에 해당되는 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으려고 환장한 거예요. 몸이 인간을 죽입니다. 나를 죽이고 나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늘 우리는 말이 많고 자기 하루일과를 변명으로 시작해서 변명으로 끝나요.

여러분이 부부를 보게 되면 부부가 주고받는 말을 조사를 해보세요. 아침 눈 떠서부터 끝날 때까지 자기변명이 시작됩니다. “자, 오늘은 신문에 무슨 소식이 들릴지?” 이런 소리하고 화장실에 들어간다는 말은, 화장실에 오래 있더라도 재촉하지 말라는 자기변명을 미리 깔고 들어가는 겁니다. 모든 것은 자기의 의로움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이걸 다 아시고 성경을 주신 거예요. 문제는 성경을 모른다는 거예요. 이것만 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이 모세에요. 그 모세를 시내 산에 불러 세운 겁니다. 자기 힘으로 여기서 벗어날 위인이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놓고 수그리, 고개 숙이세요. 기다려! 수그리가 새로운 공간이고 새로운 시간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아니요. 하나님의 이름이 육신을 입을 때까지 모세를 하나님의 집의 사환으로 활용하신 거예요.

22절 봅시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이것이 누구라 했습니까? 이렇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 이름이죠. 그 이름이 이제는 모세를 따라서 산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고 산 밑으로 내려옵니다. 그러면 주님이 활동하는 공간은 어디입니까? 이스라엘 내부가 되겠지요. 이스라엘이 넓은 원이라고 주의 이름이 들어가는 공간은 그 속에 속한 또 하나의 원이겠지요. 이 원에 뭐가 있느냐? 하나님의 성소가 만들어집니다. 여러분, 이제 출애굽기에서 제사법, 성소의 의미를 알겠지요.

성소에 누가 살지요, 누가 임재하지요?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하십니다. 뭐 하기 위해서? 수그리. 오늘 강의 제목을 수그리라고 하면 못 알아듣겠지요. 그런데 이 성소 성전에 계신 분이 나중에 몸을 입고 와요. 마리아의 몸을 입고 오지요. 오게 되면 그분이 성전이 되지요. 그리고 그분 육신의 영광, 몸의 영광을 위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것처럼 우리를 아브라함으로 여기고, 이삭으로 여기고, 야곱으로 여기고 우리를 찾아와버려요. 완성된 상태에서 우리를 찾아오면 우리의 몸이 주의 이름이 거하시는 몸이 되지요. 우리의 몸은 교체가 돼야 돼요. 현재 아담에 속한 몸은 사라지고 하늘에 속한 예수님의 몸으로 바꿔치기해야 됩니다. 이게 고린도후서 5장에 나와요. 우리가 새 옷을 갈아입는 거예요.

저나 여러분 어릴 때 있어서 압니다만 엄마가 아침에 일어나서 빨래할 때 자녀 입장에 제일 힘들고 짜증나는 게 뭐냐 하면, 자고 있는데 강제로 엄마가 내복 벗길 때 우리는 극렬하게 반항합니다. 발로 막 찹니다. 좀 더 자고. 그러면 궁둥이 철썩 때리면서 빨리 네가 옷을 벗어야 빨지. 그때 우리는 강렬하게 반대합니다. 그동안 정들었거든. 빈대 봐라. 시커먼 빈대도 있고. 강제로 벗겨서 빨잖아요.

우리가 이 땅에 살고자하는 것은 내복 안 벗으려는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에요. 정 안 벗으면 아버지가, 엄마가 매를 들고 나오지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손에 매 안 들 때가 없어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계속해서 때려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이 우선순위가 코앞에 나오도록 매일같이 코르셋 조이듯이 주께서는 매일같이 때리면서 우리의 더러운 옷을 갈아입히는 수고를 하십니다.

우리가 구원받는데 우리가 수고한 게 아니고 주님이 수고하신 거예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니에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구원은 없어요. 구원은 결과라니까요. 주의 일에 참여하면 그게 구원이에요.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구원받아요. 구원받을 자격 없어요. 주께서 옷을 갈아입히니까 이것이 바로 구원의 작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순간만큼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님의 마지막 때 의미가 살아있는 주님께서 침범한 침입한 난입한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 되는 겁니다. 그걸 값을 주고 샀다고 이야기해요.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 보면 나와요. “(너희는)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마지막으로 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영광 돌릴까요? 죽은 자는 가만있는 게 죽은 자가 아니고 설쳐도 그 설치는 것이 하나님께 아무 영광이 되지 않음을 알 때 진정 죽은 자가 되거든요. 그래서 성도가 어떻게 살까요? 우리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해도 그것으로 영광을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면 영광이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지 우리로는 영광을 안 받습니다. 내 이름으로 하는 건 영광이 안 되고 주의 이름으로 할 때 영광이 되거든요.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그냥 이름만 걸친다고 영광이 아니고 직접 주께서 나한테 작업을 해서 내가 혼줄 나는 경험을 했을 때 그 경험 속에서 내 인생이 주께 다뤄지는 인생이라고 느낄 때 그게 고백 안 해도 이미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을 새삼 확인되는 겁니다. 그럴 때 주께 영광이 되는 거예요. 나 같은 죄인을 은혜로 살려주시는군요. 은혜와 긍휼로 또 나를 인간 만들게 하시는군요. 깨닫게 될 때 주의 영광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그 순간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거죠. 죄인 중의 괴수의 본성이 뭡니까?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도 결국 막 산 게 돼버리죠. 그 책임은 주의 십자가로 책임져서 영광되게 하셨다. 지금 그 주의 일이 놀랍게도 아무것도 아닌 내 몸으로 그 일을 하셨다는 그 사실이 그저 감사할 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관된 일이 우리의 게으름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여전함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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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7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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