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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고정석 150306강의출애굽기

고정석 150306

이름 : 이근호(IP:119.18.83.91)

한윤범(IP:14.♡.134.30)

15-03-10 10:22

20150306a 울산강의-출애굽기 33장 : 고정석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33장 20절에서 23절까지 하겠습니다. 분량은 얼마 안 되는데 상당히 응축된 내용이 있어서 많은 시간이 소모됩니다. 여기 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한 곳이 반석이고 그 위에 모세가 서 있으면,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하나님의 손으로 모세를 덮는데 덮는 이유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덮어두셨다가 지나고 난 뒤에 손을 떼게 되면 등은 보지만 얼굴을 못 보게 한다고 돼있거든요.

이런 하나님을 인간이 창작해낼 수 있을까요? 없지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서 어진 모습으로, 대표적으로 금복주 소주의 모습이라든지 또는 kfc 프라이드치킨 할아버지 모습이라든지 이런 인자한 모습으로 지켜보는 그것을 자꾸 염두에 두고 상상하잖아요.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얼굴을 보지 못하게 스스로 하십니다. 이것이 산 위에서 하는 행동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모세가 산 밑에 내려오면서 산 밑까지 확산이 되고 확장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산 밑에서 상상하는 하나님의 인상과 충돌을 일으켜요. 인간이 상상한 것은 우상이 되겠고 그 우상을 우상으로 지적하고 꺾어버리는 분은 진짜 하나님이 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알아야 될 것은 왜 하나님은 이런 행동을 하시는가? 이런 행동이 가미되지 아니하면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셈이 돼버리죠.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특이한 행동이 가미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어버리면 그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상상한 것이나 조성해낸 엉터리 하나님을 그동안 우리가 신봉해 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본문을 파악해낼 건데요, 이제부터 이 어려운 작업을 하는데 작업을 하다보면 금요일 저녁에 잠이 오고해서 놓칠까 겁이 나서 제가 미리 결론부터 먼저 던져드립니다. 변화하는 인간에게 고정지점, 고정자리를 만들어주는 방법입니다. 반석 위에서 주께서 덮어주는 자리, 이것이 모세가 산 위에서 뿐만 아니라 제가 확산된다고 했지요. 이런 하나님의 행위가 모세가 만났던 산 위에서 일회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모세가 산 밑에 내려오면 그 행위가 따라 내려와서 모세로 형성된 모세가 구심점이 되어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모든 이스라엘 내부에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된 자리를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그 자리가 바로 죄의 자리에요. 하나님께서 손으로 덮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한 그것이 19절에 보면,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그 작업에 참여하게 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혜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보호받는 지정된 자리를 부여받게 되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사적으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만나는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벌이시는 기획된 작업에 참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돼요. 물론 그 계획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제공한 계획입니다. 그 실마리는 우리는 몰라요. 알 수가 없어요. 다만 참여되었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느끼게 돼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이런 성경구절을 모르게 되면 어떤 결과가 되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고정된 자리를 찾게 되겠지요. 그것은 우상숭배로 이어집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내 생각한 계획대로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이여, 좀 도와주소서.” 이렇게 되겠지요. 주객이 반대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고정된, 확정된 자리 만들기에 하나님께서 후원 좀 해주시면 좋겠다고 되겠지요.

제가 언급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모든 행위와 생각과 사고방식은 내 자리 확정짓기입니다. 이 땅에서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은. 어떤 사람은 3월 1일 중국, 3월 4일 사우디아라비아. 이건 결국 그 자리가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자리가 누구 자리에요? 내 자리잖아요. 울산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이여, 내 자리 잡는데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우상숭배로 전락한 자리입니다. 네가 누굴 위한 자리냐?

22절에 보니까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인간들이 이 땅에서 확정된, 자기와 자기 가족을 영원히 돈 벌고 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은 자신의 영광과 결부돼있어요.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모세는 누구의 영광과 결부된 인생이냐 하면, 자기 영광을 따로 챙길 여유를 두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돼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그 관계가 바로 19절에 나오는 것처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여기는 것과 관련돼있어요.

다시 말해서 은혜를 주고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작업에 참여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거예요. 은혜 챙겨서 천당 가는 게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영광 돌리는데 필요한 소요되는 게 은혜고,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말입니다. 철저하게 나의 모든 영광과 자존심과 나의 의는 박탈당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모세가 하나님 영광을 봤다면 모세는 뭐로 변하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 영광을 봤던 사적인 영광이 전환돼버립니다. “너, 하나님 봤어? 난 봤어.” 그렇게 돼버려요. 그런데 산 밑에 내려와서 백성들이, “모세님, 하나님 영광 봤습니까?” “못 봤어. 그럼 왜 올라갔습니까? 왜 못 봤습니까?” 주께서 보지 말라고 눌러버렸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자기 영광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울산이나 대구나 이 땅에 살면서 자기 영광을 위해서 다른 말로 자기가 영원히 밥 먹고 살 수 있는 안식처, 고정된 자리, 고정석, 평생 내가 내 영혼아, 이제 걱정하지 말라고 자리 잡을 수 있는 그런 자리, 누가복음 12장에 나오지요. 어떤 부자가 창고 크게 짓고 곡식 가득 채워 넣고 이제는 됐다. 내 영혼은 살았다고 안심하는 그 자리. 그런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은 들어갈 틈이 없지요. 거기에선 하나님의 영광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자기 고정적인 자기 영광을 확보하겠다는 그것이 사정없이 박탈당하고 삭제당할 때 그것을 허용하지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일을 그렇게 하시는가?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환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여기 여호와 이름이 나오잖아요.

사람이 이름이 두 가지가 되게 되면 그 두 가지 이름 때문에 상호 경쟁이 돼버려요. 보통 연말에 시상식에서 올해 신인상, 올해 최우수연기상 나오잖아요. 최우수연기상 할 때 올해는 공동수상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야유를 보내지요. 공동수상이 어디 있어? 둘 중에 하나 줘야지. 누구의 이름이냔 말이죠.

이 세상은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여러분 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만들었거든요. 하나님이 없는 데서 만들었다는 말은, 모든 만들어진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기 이름으로 통치하고 삼켜버리고 장악해버려요.

그런데 원래 쌀독에 쌀 오래 놔두면 쌀벌레 생기잖아요. 꼬물꼬물한 구더기 같은 것, 징그럽지만.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만든 창조세계에 더러운 구더기 같은 자기 나름대로 꼬물꼬물한 이름들이 바글거리면 기뻐하시겠어요, 좋아하시겠어요? 없애버리겠지요. 주의 이름으로 만든 창조세계에서는 오직 모든 것은 창조의 영광을 받으려면 꿈틀거리는 피조물들이 더 이상 자기 이름에 의미를 두지 말아야 돼요. 오직 주의 이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려는 방식이 창조의 원활한 유지입니다. 빌립보서 2장 9절에서 11절. 주께서 십자가 죽으시고 그를 높여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이름을 믿어서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심이라. 보세요. 딱 나오잖아요.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드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모든 구더기들, 나름대로 이름을 가진 자기 이름, 진주라든지, 현숙, 근호, 그 이름들에 의미를 주고, “우리는 얘는 어떻게 되는데요? 제 아내는 어떻게 되고 저는 어떻게 됩니까?”라는 모든 입을 막아버리고.

네가 창조됐나? 창조됐습니다. 창조된 게 왜 네 이름을 붙여? 건방떨면서. 건방이 늘어졌구먼. 원래 이름이 없잖아. 왜 이름이 없었어? 창조된 것은 누구의 소유다? 주의 이름이 붙여지기 위해서 창조됐는데 건방지게 네 이름을 붙여. 아담 이름도 흙으로 돌아갔는데, 네가 뭔데? 자기 이름을 붙이니까 그 다음부터 영광을 챙기는 거예요. 저 사람 아니고 내 영광. 저 사람 자리가 아니고 고유한 내 자리, 확보한 내 자리.

제가 어느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미국에 있는 목사한테 하나 배웠어요. 저는 대중가요라고 하는데 미국에 있는 어떤 목사님은 새로운 용어를 썼는데 그게 맞다. 새로운 용어를 붙이겠습니다. 대중찬양. 제가 설교할 때 이름을 언급하면서 언뜻 생각난 가사가 “할 말을 잊었지만은”하는 노래가 있어요. 그 이야기를 언급해놓고 누가 불렀는데 어느 노래인지 삼일 동안 생각이 안 나서 설교는 끝났는데 찝찝한 거예요. 그동안 정보를 제공했는데 사흘 만에 찾았어요. 주의 은혜로 찾았습니다. 그 대중찬양을. 김수희가 불렀던 <잃어버린 정>,

당신의 고운 눈매에
할 말을 잊었지만은

냉정히 돌아선 무정한 사람은
눈물을 모르겠지요

말문이 막혀서인지
할 말을 잊었지만은

다정한 그날의 뜨거운 추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나

미소가 머물다 갈 시간도 없이
떠나는 사람이면

아쉬운 미련도 아쉬운 마음도
남기지 말아요

잃어버린 정이 그리워지면
그때는 어찌하나요

모든 이름으로 사람이 자기 이름을 위해서 자기 자리를 확보를 위해서 살게 되면 모든 게 수세고, 사수가 되고, 방어를 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이 많아요. 왜?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를 공격하는 모든 것을 퇴치해야 되니까. 말의 힘으로. “가까이 오지 마. 우리 집이야. 누구 허락 받고 우리 집에 들어왔어? 주거침입죄로 고발해버릴 테니까.” 말이 많아요. 주님 오실 때 주거침입죄로 고발할까요?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 허락 받지 않고 오시기 때문에 도둑같이 오는 거예요. 무슨 허락 받고 오는 도둑이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도둑같이 오거든요. 왜 와야 됩니까? 자기 것이거든요. 사나 죽으나 값을 치룬 자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 것도 아닌 걸 내 것 같이 쥐고 있어요.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그래 놓고 성경을 본다고요. 왜 봅니까? 내 것 지키기 위해서, 내 자존심 지키기 위해서. 수고 노력해서 지금까지 얻은 모든 것, 내 아파트, 내 직장, 모든 것을 사수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이 많아요. 그 말, 말들을 어디서 푸는가? 금요 철야기도회에서 풀고 새벽기도회 나가서 풀고. 울면서 통곡하면서 풀어요. 주여, 어찌하여, 이렇게. 왜 그렇게 말이 많은지 몰라요. 자기 것도 아닌데 자기가 왜 사수합니까? 뻔하지요, 사수하는 이유는. 하나님 영광은 뒷전이고 내 영광. 이래놓고 잘만 살아요. 이 시간도 잘만 살아요. 전~혀 성경과 관계없어요. 마치 자기가 자기를 창조한 듯이.

창조주를 생각해요? 창조주 생각 안 합니다. 여유만만한데 왜 생각합니까? 창조주는 자기 것이 상실될 때, 몽땅 다 파괴될 때,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누군가 강제로 나를 죽음으로 이끌기 위해서 시커먼 옷 입고 왔을 때, 저승사자 왔을 때 그때 찾지요. 정녕 여기가 끝입니까?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대중찬양에 그런 게 있어요. 김광진의 <편지>란 노래 있지요. 인터넷 찾아보면 다 나와요. 앞으로 대중찬양 많이 이용.

그렇게 살다가 해결되면 다시 자기 영광. 잃어버린 것들이 뭐가 있을까? 이게 내 것이었지. 다시 찾고 가지고 사수하고 확장한다고 그때부터 쓸데없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내 것 지키기 위해서. 한미훈련 반대한다고 왜 그렇게 말이 많아요, 지금. 무슨 한국이 있고, 미국이 있습니까? 한국이나 미국이나 누가 붙여준 이름이에요? 이건 창조주가 주님이 붙여준 이름입니까? 인간이 붙여준 거예요. 이름이 한국이 뭐예요, 아메리카가 뭐예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어요. 이름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확정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붙인 이름은 사실은 우리가 강탈, 도적질한 거예요. 원래 만들어진 피조물들은 만들기 이전부터 이름이 먼저 있고 이름에 준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그 이름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아까 빌립보 2장에서 예수의 이름이에요. 원래 주인이 나타났어요. 그것도 마지막 때에 나타났어요.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의 이름,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돼있어요. 신약성경에. 이게 어려운 게 아니고 당최 믿어지지 않는 게 문제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성경에 나온 걸 한두 번 들은 게 아니거든요. 현실감이 뚝 떨어져요. 오늘 새벽에 참 더웠지요. 이 말을 내가 하게 되면 미쳤다고 합니다. 오늘 추웠지. 감기 걸릴 뻔했는데. 옷 두껍게 입고 왔지요. 오늘 새벽에 너무 더워서 창문 다 열어 놨어. 현실감 뚝 떨어지잖아요.

이걸 오늘 강의할 건데요. 인간은 자기 몸을 중심으로 해서 시간과 공간을 형성해요. 자기는 지금 여름이 아니고 겨울이라는 겁니다. 내가 안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건 여름이고, 3+5=8이고, 아는 게 문제야. 아는 게 말썽이라. 이걸 아니까 그 아는 걸 사람들은 믿음으로 바꾼 거예요.

3+5=8이라고 알고 계셨지요. 내가 여자가 아니고 남자인 걸 알고 계셨지요. 그럼 묻습니다. 우리가 우리한테 이름 붙일 수 있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니까. 그런데 믿습니까? 왜 안 믿습니까? 현실감이 뚝 떨어져요. 내 주위에는 내가 아는 것만 포진돼있어서 그래요. 약간 의심스럽다하면 경계선 밖으로 던져버리고 자기 아는 것만 모아 놓은 거예요.

기도하면 예수 이름으로 응답받는다. 현실성 뚝 떨어져요. 그런데 갑자기 암 걸렸습니다. 기도원에서 기도했더니 암이 나았어요. 그러면 전에는 경계선 밖에 두었던 병을 위해서 기도하면 낫는다는 그건 체험했으니까 밖에 있지 않고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게 믿음입니까? 기도하니까 병 나은 게 믿음이에요, 아는 거예요? 이게 아는 거예요. 그런데 기도하면 병 나았다는 바로 옆에 3+5=8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할까요, 도대체? 소위 안다는 게 무지라는 걸 무슨 수로 다시, 경상도 말로 곡괭이로 다 뜯어내야 되는데 리모델링 다시 해야 돼요. 택지조성하면서 불도저 동원해서,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봉천동 등 재개발할 때 불도저로 집들을 밀잖아요. 실제로 제가 길을 잘못 들어서 가본 적이 있어요. 개발지역에 가보니까 황량하지요. 잔해가 드문드문 남아있는데 벽지 뜯어내고 안방이 있던 평소에 공개 안 되던 지붕 날아가고 대문 다 날아가고. 그 벽지에 뭐가 남아 있느냐 하면, 얼마 전까지 살았던 그 집 얘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금 그어놓은 게 있어요. 그런데 만약에 그 얘가 우연히 자기가 옛날에 살던 집에 왔다면 불도저가 뜯을 때 얼마나 아깝겠어요. 그게 자기 추억이고 자기 커 왔던 과거사, 자기 나름대로 역사란 말이죠. 그게 육중한 칼날에 전부 부셔질 때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아저씨, 내가 낙서한 이건 손대지 마세요.” 손 안 대면 아파트는 언제 짓는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게 내가 납득이 되는 것만 끌어 모아 그걸 믿음이라고 일방적으로 처리한 거예요. 그런데 그 믿음을 누가 믿느냐? 내가 믿는 거예요. 내가 먼저 있고 내가 믿어서 내가 아는 걸 믿음으로써 나를 천국으로 올려붙이는 겁니다. 지 마음대로에요. 지가 교주돼버렸어요. 그러니까 행동 하나하나, 신앙생활 하나하나가 영광이 누구한테 오겠습니까? 이름이 자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이상은 전부 다 나에게로 영광이 쏠리게 되는 거예요.

사람이 사는 것은 자기를 주시하는 눈들이 있기 때문에 사는 거예요. 아무도 없다면 발가벗고 다녀도 괜찮아요. 남의 눈이 있기 때문에 옷을 갖춰 입는 이유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남들이 심판주입니까, 남들이 구세주에요? 자기와 똑같은 인간이에요. 그 사람들이 허수아비로 보이지 않는 것은, 본인이 허수아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의미를 두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 정리 안 되면 진도 못 나갑니다. 정말 오늘 할 게 너무 많아요. 진도 못 나가도 캐낼 건 캐내야 돼요. 이걸 안 캐내면 그 다음 장, 34장 못 들어갑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면,

오늘 본문 33장 20절에서 23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고장석을 따로 마련해주셨습니다. 네가 지상에서 네 이름을 위해서 네 영광을 위해서 고정석을 만들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고정석을 만들었으면 그 고정석은 내 것이네요. 이렇게 오해하잖아요. 내 것 되는 고정석을 없어요. 그럼 고정석을 왜 줬느냐? 주님의 이름과 주님의 영광의 일을 하는 작업하기 위해 필요한 고정석이 우리에게 할당된 고정석이 되는 겁니다. 내 영광과 내 이름이 아니고.

그래서 주님께서 고정석을 모세를 위해서 만드는데 시내산 위에서 만들어요.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경상도 말로 수그리 해놓고 손으로 덮어버려요. 영광을 보지 못하고 얼굴을 보지 못하고 다만 뒷모습만 봤을 뿐이죠. 그런데 못 보도록 한 조치를 은혜라고 했고 불쌍히 여김, 긍휼이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그렇게 돼있는데 지상에 있는 우리는 이 말은 이렇게 오해해요. “내가 천국 가려고 하는데 갈 수가 없구나. 어떻게 하지? 옳지 은혜 입으면 되겠구나.” 이렇게 가버리면 나는 안 죽고 그대로 살아 있는 채로 은혜와 긍휼의 후원으로 살아있는 내가 천국 가는 셈이 되는데 그런 구원은 없어요. 제가 죄송하다고 말할 입장은 안 되고 실제입니다. 내가 구원받을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받을 것 같으면 아예 주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지도 않았어요. 네가 못나나 잘나나 같이 살아서 구원하자고 나오지 아낌없이 추방하고 거기다가 천국 가는 길을 크로스, 아예 오지 말라고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 경계가 강화됐어요.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근처도 오지 말라고 경계를 강화시켰어요. 주님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겁니다. 너는 생명은 끝났다. 못 먹는다.

그렇게 확고한 취지를 우리가 안다면 어디 구원을 넘봐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그런 엉터리 종교가 어디 있어요. 그건 성경, 복음이 아닙니다. 구원을 생각할 수는 있어도 생각한다고 구원되는 건 아닙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참 하루일과 바쁜 사람보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3월 14일에 전국 농협조합장 선거 있습니다. 이건 먹혀 들어가는데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농협에 가서 이야기하면 먹혀 들어갑니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뭔 뜻입니까?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이야기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혹시 여러분 가운데 자기 소속이 하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줄 알지만 혹시 있는지 묻는 거예요. 사람 설득하는 게 아닙니다. 혹시 아버지께서 남겨두신 자가 혹시 계십니까? 자기 사람 찾는 방법이 이 방법이에요. 편지가 그래요. 편지는 주인을 찾아간다는 말이 있듯이 편지를 쓸 때는 반드시 주인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분명히 어떤 여인이 왕자의 파티장에서 신발을 잃었기 때문에 그 왕국의 모든 처자들은 신발 주인 찾는 기회를 갖는 거예요. 왕자님이 자기와 파티했던 여자가 너무 마음에 들었는데 가정교육이 잘 됐는지 열두 시 땡 치자마자 후다닥 가는 바람에 신발짝 하나 놓쳤는데 혹시 신발 주인이 이 동네 오정리 25번지에 혹시 있는지 찾아다니는 거예요. 언니는 맞지도 않는 신발을 신다가 까져서 피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허름한 신데렐라가 신을 신으니까 세상에, 동화가 되려면 신이 맞는다고 해서는 안 되고, 동화가 재미있게 되려면 이렇게 돼야 돼요. 신데렐라가 원래 고생을 많이 해서 춤추던 그 발이 아니고 다른 발, 빨래 많이 해서 퉁퉁 불어 있었는데 신발이 알아서 자동적으로 조여 주니까 이걸 스마트라 하죠. 스마트한 디지털 기능에 의해서 알아서 신발이 딱 조여 놓고 “맞네!” 이러고 있다고.

우리가 죄인이잖아요. 죄인이 스스로 회개해서 의인돼야 되는데 하나님의 십자가 능력이 회개할 줄도 모르고 반성할 줄도 모르고 자기 죄가 뭔지도 모르는 인간에게 조여 놓고, “회개도 잘해. 믿기도 잘 믿어.” 하고 본인이 조여 놓고 신발 딱 맞네, 하고 데려가는 게 구원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우리 구원? 아닙니다. 딱 맞게 하는 것은 주께서 남겨진 그때 모세에게 미처 안 알려준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영광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기 때문에.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영광 돌리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성도가 된다면, 여자들이 속에 입는 코르셋, 뱃살 나왔는데 안 보이는 척하게 만드는 것 있잖아요. 아랫배 꽉 눌러주는 것. 매일 성도의 삶이 주의 이름으로 꽉꽉 눌러주는 촉이 있어야 돼요. 날마다 주님이 조여 줄 때 “주여, 이건 주의 솜씨입니다.” 이럴 때 주께 영광이 되는 거예요.

모세에게 미처 알려주지 않은 것을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 알려주지 않고 엘리야냐 예레미야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을 마지막 때 예수, 자기 아들의 이름으로 비로소 다 공개한 거예요. 너의 구원은 너한테 달려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한테 달렸다. 너는 그걸 믿을 수가 없지. 믿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내 영광, 내 자리 확보하고 사수한다고 말들이 많은데 어떻게 자기 영광 안 되는데 관심이 있겠어요. 그런데 조여 주는 거예요. 뭐지? 이 낯선 현실은 뭐지?

그 낯선 현실을 저는 이 용어로 이야기합니다. 하도 서론 하다보니까 글자도 하나 안 썼는데 하나 씁시다. 잠입. 제가 미국 가스펠펠로우쉽교회 성한경 목사님이 강의할 때 저는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분은 글자를 반듯하게 어린애 글씨처럼 그렇게 써요. 저도 배워야 돼요. 매일같이 코르셋처럼 조여 주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조여 주지. 이건 내가 내 주인이 아니구나. 창조주가, 내가 주인이라고 잠입한 거예요.

잠입이란 의미를 쉽게 하면, 요구르트나 바나나우유 마실 때 빨대 있잖아요. 빨대를 어떻게 꽂습니까? 바나나우유한테 양해를 얻고 꽂습니까? 사정없이 뚫어 찢어지면서 완전히 치고 들어오지요. 허락도 없이 치고 들어오잖아요. 예수님 설교할 때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양해구하고 들어왔습니까? 지붕 뚫고 들어와 버렸죠. 주님 어깨에 흙 안 묻었는지 몰라. 잠입하고 난입해서 구멍을 뚫듯이 우리 인생에 쳐들어와버립니다. 그렇다면 그 시내 산 사건은 모세를 따라서 시내 산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이제는 시내 산 밑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그걸 요새 유행하는 대중찬양에 의하면 위아래, 위위아래 하듯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요. 그런데 하늘에 있다는 것이 우리가 쳐다보는 하늘이 아니고 그 하늘이 지상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가락교회에서 할 때는 이것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원이 있는데 또 하나의 원이 있는 거예요. 원은 전체를 의미하는데 전체 안에 전체가 들어있는 거예요. 우리의 상식은 안에 들어있으면 이것이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부분이 아니고 부분이 오히려 그 전체를 부분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하면서 붕붕 날아다니는 게 아니고 지상에 두 발 딛고 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다? 하늘에 있다. 김 하늘, 최 하늘, 박 하늘, 이 하늘.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말은, 소속이 하늘에 있고 소속만이 아니고 우리의 이름이 주님의 이름이 되고 우리 인생에 남은 모든 책임도 이름을 주신 그 이름에 걸 맞는 주의 가신 그 길을 우리한테 재생하는 방식으로 코르셋이 조여 주는 겁니다. 완전히 자동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길로 가지 못하도록.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는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매를 들고 나타나죠. 주께서 아버지가 매 들고 나타나는 게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징계가 없으면 내 자식이 아니다. 내가 아버지기 때문에 매 들고 나타난 겁니다. 그래야 영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늘 봐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마귀가 매 들고 나타나는지 주님이 매 들고 나타나는지 말씀을 통해서 이 차이를 알아야 되거든요. 성경에서 아버지가 매 들고 오는 것과 마귀가 매 들고 오는 것이 달라요.

마귀가 매 들고 오는 것은, 네가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맞아라. 이건 마귀가 매 들고 온 겁니다. 주님이 매 들고 온 경유는, 율법이 없어도 네가 의로운데 왜 자꾸 율법 지켜서 복 받으려고 하고 때리는 거예요. 말씀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 말씀 지키겠다는 그 의도가 수상하다고 때리시는 거예요.

왜 사람들은 말씀 지키려고 합니까? 아직도 어디에 미련이 있기 때문에? 내 인생 내가 사수하고 내 이름과 영광을 위해서 내 인생 내가 관리하기 위해서 말씀 지키려는 의도가 강렬하기 때문에 말씀을 지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복음은, 말씀은 누가 지켰지요? 주님이 지켰잖아요. 주님이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또 지킨다는 말은, 내 몸은 내 인생은 남한테 넘겨주기 싫다는 뜻이에요. 이게 바로 우상숭배자입니다. 나는 내 것으로 인하여 감동받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겠다.

강의 다시 해봅시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남들이 보지 못한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사건을 겪습니다. 그 사건이 뭐냐고 저한테 물으신다면, 주께서 고개 수그리. 주께서 못 보게 하고 살려주셨다는 겁니다. 네가 봤다, 안 봤나? 안 봤습니다. 만약에 봤으면 죽었어요. 이미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죽었잖아요. 죽은 자를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살릴 것이냐는 문제가 남아있거든요. 살려내야 천국에 자기 백성을 채우니까. 이미 다 죽은 자에요. 죽은 자를 어떤 방법으로 살리느냐?

그 죽음이라는 의미를 위해서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기준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은혜 줄 자와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만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거예요. 그런데 은혜 주고 긍휼히 여겨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주님 보면 죽는다는 자기 자신이 주제파악이 되는 상태에서 긍휼을 입을 때 그 사람은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진즉에 죽어야 되는 은혜와 긍휼로 살았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신데렐라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신데렐라가 우연히 파티장에서 춤을 췄어요. 그리고 열두 시 되기 전에 빨리 네 주제파악으로 돌아와야 산다고 했고 급하다보니까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어요. 신발 한 짝을 잃은 상태에서 왕자가 신발주인을 찾아서 둘이 행복하게 살잖아요. 행복하게 살고 난 뒤에 문제입니다. 그 신데렐라가 “역시 사람은 예쁘고 볼 일이야.” 이렇게 자기한테 여전히 가치를 두겠습니까? 안 두지요. 나는 그냥 식모나 해야 될 처지였는데 웬 횡재냐고 하겠지요.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이야기 나오잖아요. 탕자가 아버지 집에 가고 난 이후에 탕자의 생활이 어떠해야 됩니까? “역시 그때 가출을 잘하긴 잘했어.” 자기 자랑하라고 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아버지여, 제가 아들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두 달 이후에 지가 행세깨나 합니까? 제대로 된 인간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아버지,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다시 추방시켜서 돼지 쥐엄 열매로 먹여도 되는데 두 달 가는가 싶더니 석 달, 넉 달 계속해서 주께서는 귀한 아들로 대우해주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줄곧 이렇게 되겠지요.

그것이 그렇게 되려면 하나님께서 그 탕자를 용납했을 때 그 긍휼과 은혜가 지속돼야 되겠어요, 단발성으로 끝나야 되겠어요? 지속돼야 되겠지요. 지속되는 근거가 뭐냐 하면, 주의 이름과 주의 영광의 동행입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이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기도할 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게 중요한 겁니다. 주여, 제가 기도할 자격도 못 됩니다. 그게 유지되는 가운데서 하지만 기도하는 이유는 저 때문에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래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된단 말이죠.

여러분들의 강의할 때 놓친 것을 녹취 보시면 70% 다시 나올 거예요. 후딱후딱 지나간 것. 제가 첫째 시간 강의하면서 강조한 것은 그겁니다. 사람이 눈만 뜨면 생각하는 것이 이것은 내 자리다. 남한테 안 빼앗겨야지. 그런 자기가 만든 자기의 고정석, 하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 있다고 했어요? 하늘에 있다면 하늘에서 만든 고정석을 봐야지 지상에서 만든 고정석을 내 것이라고 해버리면 그건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골로새서 3장에 땅에 생각하는 그것이 탐심이요, 그것이 곧 우상숭배라 했습니다.

그냥 교회 와서 예배 참석하는 걸로 신앙생활 다 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늘 코르셋처럼 주께서 나를 조여 줘야 돼요. 이건 내가 구원받지 못할 상황을 주께서 구원받게 하시기 위해서 조치를 하시는데 그 조치가 주의 이름으로 조치하시고 그리고 그렇게 한 이유가, 내 구원이 아니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조치할 때 그 효과, 결과가 영생이 되고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그게 천국이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시민권이 시민권다운 효과를 나로 증거케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의 일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요.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30)

15-03-10 10:24

20150306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고정석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성경 속에 말하는 현실과 우리가 온 몸으로 실감하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과 얼마나 격차가 있는지 아셔야 돼요. 공통점이란 것은 완전히 제로입니다. 그것을 단절이라고 해요. 영원한 단절. 마치 에덴동산과 쫓겨난 그 세계가 철저하게 단절된 것처럼 지금도 유효합니다. 똑같이 하늘나라는 완전히 단절돼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단절이 아쉬우니까 자꾸 천국을 만들어내요. 항상 만들어낼 때 꼭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본인의 영광과 본인의 구원과 본인의 불멸과 본인의 영생, 그게 꼭 핵심, 최고의 중요부분을 턱하니 자기 이름이 차지하고 시작하니까 이렇게 되거든요.

자기 존재에 대한 조작 아닙니까. 인공적인 것이 가미되거든요. 자기 존재를 조작해놓고 조작된 존재를 자기가 도로 회수하면서 “믿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전에는 술, 담배 못 끊었는데 술, 담배 끊은 괜찮은 자기의 존재를 믿음의 목표로 삼는 거예요.

첫째 시간은 지나갔으니까 잊어버렸으니까 또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목회가 뭡니까? 수그리. 이게 목표가 돼야 되는데 우리가 숙였기 때문에 살은 거예요. 만약에 고개 쳐들고 봤으면 죽여 버립니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본 사람은 다 죽여 버려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아까 출애굽기 본문에 나오잖아요. 33장 20절에 보면, “내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이것은 죽음이냐, 영생이냐는 누가 기준을 제시합니까? 하나님께서 제시하고, 장소는 시내 산 위거든요. 시내 산 위에서 모세가 했던 기준은 산 밑의 인간의 기준과 달라요. 인간은 악착같이 오래 버티면 그게 사는 줄로 알지만 오래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오래 살 것 같으면 그건 저주에요. 선악과 따먹고 영원히 오래 산다? 저주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은 데서 부활해서 영원히 저주받아요.

그래서 우리가 아는 오래 사는 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내용이 달라야 돼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내용물로 차야 되고 왕자님의 신발이 그 안에 들어있어야 돼요. 그 안에 내용물이 들어있으면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은 벌써 날아가 버린 후에요. 우리 안에 주님의 영광과 주의 이름이 장악하고 차지한 그런 상태에 돌입된 상태입니다.

이미 주님의 손아귀에 있는 이상은 우리가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다든지 이런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잊어버리고, “내가 말씀 지켜서 옛날 매 맞아서 잊어버린 걸 되찾아올까?” 이렇게 되면 그게 매 맞을 짓이 되는 겁니다. 네가 내가 해준 건 모르고 엉뚱한 것을 네 개성과 네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네 존재를 조작하는구나. 존재의 조작입니다. 인공적인 것이 가미되고.

그러면 이 두 번째 시간에 주의 이름이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이게 주제가 되겠지요. 첫 번째는 주의 이름이 왔는지 어떻게 아느냐? 두 번째는 주의 이름이 왔을 때 바꿔치기 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이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나옵니다. 3장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모세가 묻습니다. 13절에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름을 안 가르쳐주지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스스로 있는 자는 인간들이 자기에게 이름을 붙이는 식의 이름을 하나님께서는 붙일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내가 여기 있네.”라고 자기 존재감을 느끼고 내 이름을 뭐라고 부르지? 내가 자식을 낳았는데 이름을 뭐라고 부르지? 이런 우리가 파악하는 거울 앞에 있는 내 존재, 또는 내 앞에 어리광부리는 내 자식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 이런 식으로 존재성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인간 세계에선 그것이 통할 수 있지만 하나님한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없고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분이에요. 네가 부를 이름은 없다는 거지요. 너희들끼리 통하는 이름은 없다. 위아래, 위위아래. 아래와 위가 다르단 말이죠. 성도가 뭐냐 하면, 바로 아랫동네에 살면서 윗동네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삶이 바로 성도가 증거할 삶이에요.

이름에 의해서 변화가 돼야 되는데 그 이름은 어떻게 되느냐? 그 다음에 3장 15절 봅시다.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해놓고 아브라함의 하나님도 되고 이삭의 하나님도 되고 야곱의 하나님도 되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름입니까? 아브라함은 사람의 이름이지 하나님의 이름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뒤에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 땅에서 누구와도 접촉되지 않고 누구와도 차이 나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기능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자기 이름이 되는 겁니다.

사람의 이름을 따서 뒤에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놓고 그 다음에 아브라함의 이름으로 기능, 어떤 일을 해버리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고 어떤 일입니다. 액션이에요. 활동성입니다. 변화시키는 활동성이에요.

신데렐라 이야기 계속 해봅시다. 왕자가 와서 이 동네에 신발 주인 있는지 맞춰볼 때 다른 언니들은 안 맞는데 신데렐라에게 딱 맞거든요. 너무 감사해서 “당신이 바로 그 여인이었군요. 그때 조명이 별로 안 좋아서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더 예쁘군요. 나랑 가서 왕비가 되어 영원히 행복하게 삽시다.” 신부가 묻기를 “실례지만 저는 왕자님의 이름을 모릅니다.” 왕자가, “이름은 알 것 없고 이렇게 신발을 신겨주는 이것이 바로 내 이름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나는 누구로부터 부름을 받는 게 아니고 내가 부르면 불렀지 당신들이 부를 때 좇아오는 그런 신은 아니다. 나는 스스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내가 알아서 스스로 하고 너희들은 내 스스로 하는 일에 포함이 될 뿐이지 너희 일 따로 있고 내 일 따로 있어서 둘이 거래하거나 흥정할 대상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마치 하인 부르듯이 자기 비서 불러서 이름 부르듯이 개 이름 불러서 일 시키듯이 인간은 갑질하고 주님은 을로서 부리지 않습니까? 온갖 찬양과 수식을 붙이더라도 기본의 의식이 내 위주가 되고 내 우선이 된다면 내가 갑이에요. 그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여호와 믿고 자기를 위해서 예수 믿는 것,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우상숭배자입니다. 저주의 대상이에요. 지옥 갑니다. 아예 삼위일체로 도배를 해보세요. 지옥 가지.

주의 이름이란 천지창조를 할 때 이미 이름이 먼저 있었고 그 이름에 의해서 천지는 창조되었기에 마땅히 주님께서는 자기 창조물을 자기 것으로 회수할 권한이 있습니다. 회수한다는 것은 구원한다는 뜻이 아니고 누구는 버리고 누구는 데리고 천국 가서 살게 하는 권한도 피조물이 왜 이렇게 했습니까, 왜 저를 명단에서 삭제시킵니까? 라고 할 권한은 피조물에게 없습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천히 쓸 것을 따로 만들고 귀히 쓸 걸 따로 만든다고 해서 천히 쓸 것으로 분류된 자들이 자기 위치 바꿔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여전히 자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권한을 주의 권한으로 바꾸는 방법은 주의 이름으로 벌이는 기능과 그 작업, 그것에게만 가능하지 우리 힘으로 우리 자신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의 사람은 없어요. 아브라함은 있지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면서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계제된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제가 구원받은 것은 주의 이름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 네가 과거의 너에서 지금의 너로 주의 이름이 이끌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잖아요.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예수님은 중보자가 되는 겁니다.

첫째 시간부터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복잡한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복잡하지만 굉장히 간단하지요.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보내셔서 모든 세상을 중보자를 주로 인정하여서 주의 나라를 만드는 것, 끝. 굉장히 간단한 문제지요. 순순히 거기에 따라주면 아무 문제없지요. 그런데 문제는 순순히 안 따라주는 요소들이 우리를 꽉 쥐고 있는 거예요. 그게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이제는 사나 죽으나 내가 나를 돌보지 않으면 아무도 돌 볼 사람이 없어요. 내가 내 인생 책임지지 않으면 아무도 책임질 사람 없습니다. 이마에 땀 흘리면서 악착같이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애써야 되지요.

그러다보니까 오기만 남았지요. 내 영광과 내 자존심과 내 나름대로의 시간과 역사를 간추리고 그걸 정리하고 그걸 사수하고 지키고 확대시키고 확장시키는 그런 오기와 그런 습관과 몸에 배인 나의 이름, 자존심을 걸고 하는 활동성만 내 몸에 가득 차있는 거예요. 자진해서 주 앞에 순종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 노리고 뭔가 내 이익을 얻고자 주의 이름을 부르지요. 그런 이름은 거짓 이름이지요.

출애굽기 6장을 봅시다. 드디어 주의 이름이 알려집니다. 2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그러면 여호와는 뭐냐 하면, 언약대로 애굽에서 빼내서 구속하여서 너로 하여금 약속한 땅에 집어넣는(6장 9절까지) 그런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지상에 펼치는 계획이 주의 이름을 알려주는 순간 계획도 함께 알려졌지요. 그럼 이 계획에 대해서 인간의 이름들은 여기에 간여할 수 있습니까? 못 해요. 이미 이름 속에 이름과 동시에 계획이 나왔다는 말은 추진되는 모든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이름을 알려준 그 이름으로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의 이름에 합당한 그 실체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시다. 출애굽기 33장, 점점 더 어려워지지요. 미안합니다만 할 수 없어요. 여기 33장 19절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고 돼있지요.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면서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지요. 그렇다면 주의 이름으로 실시하는 그 일에 있어서 산 위에 있는 모세를 산 밑으로 내려 보냅니다. 보내시고 주의 이름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체가 있다는 거예요. 존재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19절에 보면,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주의 이름과 최종적인 주의 영광이 관련돼있어요. 왜냐하면 모세는 영광을 못 봤잖아요. 특히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못 봤지요. 그런데 마지막에 주의 이름이 자기 실체를 드러내는 그분이 바로 그동안 모세가 못 봤던 영광이고 주의 얼굴이 되는 겁니다.

실체가 먼저 있었고 이름만 등장하고 실체는 나중에 이름과 결합이 될 거예요. 언제? 그게 바로 마지막 때, 마지막이란 글자 크기와 때라는 글자가 확연히 다르지요. 마지막 카이로스, 때가 되매, 마지막이 때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고 때가 된다면 그게 마지막이에요. 예수님 오실 때가 그게 마지막 때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끝에 나타납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끝에 나타나는 분이 이름으로 나타난다는 말은, 주의 이름이란 과거에 속한 이름이 아니고 미래에 완성된 끝장날 그 환경이 미리 앞서서 당겨서 지금 모세에게 나타나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고 엘리야, 사무엘에게 나타나고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 있다 했습니까? 지금 우린 안 죽었는데? 하늘나라 안 갔어요? 울산에 살고 있잖아요. 울산에 살았으면 시민권은 울산에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뭐라고 돼있어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요. 위아래, 위위아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실감이 안 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믿을만한 것만 배치돼있기 때문에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것은 저 뒤에 아스라이 멀어 보이는. 가만있어봐. 저 뒤에 뭔가 있는데 빌립보서 3장 20절에 뭐 있는데? 하늘에 시민권이 있느리라. 죽어서 가겠지. 죽어서 가는 게 아니라니까요. 지금, 지금 주께서 코르셋으로 꽉 조이면 우리가 아는 건 다 자리를 비켜주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걸 코앞에 둬야 돼요.

학생들 책상에다 공부가 남는 거다. 이런 것 쓰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하지 말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걸 책상에 써야 되는데 그걸 쓴 학생들은 지금까지 못 봤어요. 아마 그런 것 썼으면 종교는 대학 가서 하라고 집어 던져버려요. 고3이 공부나 해야지 이런 건 시험에 안 나온다고 집어 던질 거예요.

그걸 존재의 조작이라고 해요. 가짜 존재를 계속 만드는 거예요. 마귀가 시키는 대로. 내 존재가 아닌데. 꼭 신데렐라 언니 같아. 열심히 살면 하늘나라 신발 맞을 거라고. 신겨줘야 맞지. 지가 신는다고 발 치수 재고 성형수술하면 신발이 맞는 줄 알아요? 안 맞습니다. 주님이 친히 신겨줘야 맞게 돼있어요. 주님에 수그리. 고개 숙이세요.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지라. 이 말은 늘 고개 숙이고 주께서 은혜와 긍휼이 우리를 무겁게 누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세요. 이게 바로 책상 앞에 있어야 되고 그걸 보고 난 뒤에 출근해야 되는데 “파이팅!” 이러고 시작한다고. 오늘도 행복하고 부자 되세요. 이런 게 들리는 거예요. 부자 되서 뭐하게? 고정된 내 자리 확보하기 위해서. 이게 인간들이 사는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서. 신데렐라 언니들 사는 인생이고 우린 그걸 부러워했지요. 남의 신발 부러워하고.

얼마 전에 제 아내 동창생 모임이 있었는데 동창생 모임 되면 명품들 다 들고 나옵니다. 나이 오십 대 후반이니까. 안 그래도 사놓고 자랑질 할 기회가 없잖아요. 육백만 원짜리, 팔백만 원짜리 들고들 왔어요. 제 아내는 십만 원짜리에요. 전부 다 십만 원짜리가 부러워서. 예쁘니까.

왜 우리는 주님을 못 자랑하지요. 로마서에 보세요. 이렇게 당부합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복음은 너희들 앞에서 너희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한다. 주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데 너는 세상에서 사람들한테 갑 앞에서 부끄러워하느냐 이 말이죠. 수그리, 고개 숙일 대상이 주님 앞에 고개 숙여야 되는데 너는 가진 자 앞에서 고개 숙이고 너는 왜 그렇게 사느냐? 그러니까 본인이 스스로 자기 영광을 포기 못하니까 누가 힘들어요? 본인이 힘든 거예요. 주님의 긍휼과 은혜를 자기 행함의 실적으로 그걸 대체해버리니까 그 실적을 계속 쌓으려고 하니까 본인이 괴로운 거예요.

암 걸렸습니까? 쉬운 해답을 놔두고 어떻게 하면 암에서 낫는지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언젠가 오후설교하면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했지요. 날개 짓하니까 추락중이에요. 백날 해보세요. 떨어지고 있지요. 독도는 우리 땅, 한민족은 통일을 방해하지 마라. 이러다가 추락하고 있는 거예요. 과도 들고. 평소에 농사지면 되는데. 한민족통일운동 하다보니까 그 자체가 추락 중이라니까. 우리가 설치면 설칠수록 지옥에 가까워요.

성경에 가만있으라고 했잖아요. 가만있어도 되는데 어떻게 가만있어요? 수그리. 주께서 시키는 대로 은혜가 누르는 대로 살면 되는데 본인이 하려고 하니까 자기 애쓰는 것만 보이고 주님의 일로 일어나는 이적들과 표적들은 전혀 눈에 띠지 않는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애굽에 벗어버리고 너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보내겠다. 이건 누구 숙제냐 하면, 이스라엘 본인들의 숙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숙제에요.

마치 이와 같은 겁니다. 주님께서 수학문제를 낼 때 학생들은 자기가 풀려고 오해를 하는데 주님이 숙제 낸 것은 학생들에게 풀라고 낸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가 푼다고 낸 문제에요. 어쭙잖게 지가 푼다고 풀어도 풀리지도 않을뿐더러 문제는 후유증이 뭐냐? 풀지도 못했으면서 풀었다고 복 달라고 내미니까 이게 더 골치 거리에요. 주께서 애굽에서 끄집어낸다고 했는데 모세가 지가 안중근 의사도 아니고 독립투사도 아닌 게 지가 사람을 죽여서 내가 총대 들고 앞서겠다. 나를 따르라. 이런 식으로 히브리인들을 해방하려고 하다가 완전히 현상수배범으로 무서워 도망치기 급급했어요.

선교한답시고 캐나다 국적의 목사가 북한에 갔는데 선교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선교는 그냥 밥 먹고 살면 선교에요. 주기도문에 뭐라고 돼있어요? 일용할 양식을 주고 그걸 고백하기만 해도 이미 선교하고 있는 중이에요. 선교는 일차적으로 주님이 성도를 향하여 매일같이 전도해요. 그 전도 받은 자가 주께서 인도했음을 전도하면 그게 일차적인 전도에요. 그래서 통합하게 되면 전도는 누가 하신다? 주께서 자기 숙제를 자기 이름으로 시작한 일을 마지막까지 자기 이름으로 그걸 다 완수시킵니다.

그 와중에 나타난 것이 뭐냐 하면, 성도를 어디에 몰아넣느냐? 이것이 두 번째 풀어야 될 문제에요. 첫 번째는 주의 이름으로 기능이 있고 그 기능으로 일하신다는 것. 두 번째는 자기 백성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

밑에 쓰겠습니다. 자기 백성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왜냐하면 궁지 위에 글자가 무슨 뜻입니까? 마지막이죠. 주께서 주의 이름이 마지막 때에 실체가 드러나잖아요. 물어봅시다. 남들은 모르지만 아브라함은 늘 마지막 때였어요. 왜? 마지막에 이름이 실체가 드러날 그 하나님이 미리 앞서서 이름으로 자기를 찾아왔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름을 보여주는 실체로서 미리 앞당겨서 주의 이름을 만났잖아요. 육신을 가졌잖아요. 마지막 때는 이름이 직접 이름을 가져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지만 그전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왔잖아요. 그러면 그전에 주의 이름을 드러낼 육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말이죠.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들어가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고 주께서 야곱에게 찾아오면 야곱의 하나님 되거든요. 우리에게 찾아오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그런데 찾아온 하나님이 마지막 때를 염두에 두고 미리 찾아왔기 때문에 남들은 모르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날마다 마지막이에요. 날마다 어디로 갈지 갈피를 못 잡는 인생길로 인도함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한 거예요. 날마다 궁지에 몰린 거예요. 그러면 갈 바를 알지 못했으면 아브라함이 점잖게 “주여, 인도하옵소서.” 이랬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나름대로 자기 갈 길을 잡아요. 그 잡는 과정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몸을 가지고 자기 이름을 사용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할 때 자기 이름에게 의미를 주기 위해서 의미가 되는 장소를 찾게 마련이에요. 이게 첫 번째 시간에 말한 내 장소 확보책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뭘 제일 싫어하느냐 하면, 내 이름이 무의미하게 되는 것을 제일 싫어해요.

제가 미국에서 중국사람 모인 교회에서 설교한 것 들어본 적 있습니까? 말을 할 때 통역 때문에 빨리 하지 말라고 해서 3배속이 아니고 반대로 1/3정도로 낮췄잖아요. 지금 제가 이런 입장입니다.

인간이 자기 몸을 두고 이름을 붙여놓고 내가 붙인 이름을 위하여,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 이름을 포기 안 해요. 죽으면 죽었지 자기 이름 훼손되는 건 용서가 안 돼요. 몸을 가지고 어디를 찾아가느냐? 의미가 되는 장소를 찾아가요. 의미가 된 장소가 되려면, 의미가 반대말이 무의미에요.

인간이 무의미와 의미를 본인이 판정해요. 예를 들면 여자 분들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프로야구에 강정호란 선수가 있어요. 그 사람이 홈런 40개 쳤어요. 우리나라 프로야구 계에서 잘 나갔거든요. 돈도 수십 억 줘요. 그런데 그 사람은 의미 있던 것이 점점 무의미가 됐어요. 그래서 자기 의미에 합당한 것을 찾으려고 미국에 갔어요. 메이저리그에 입성해서 피츠버그에 갔단 말이죠.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나는 누구다? 나는 적어도 미국에서 노는 그 정도야. 이게 새로운 의미로 자기에게 부과가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하는 줄 알아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왔지만 아브라함 나름대로 뭔가 실시하고 뭔가 꿈틀거리는 게 있단 말이죠. 꿈틀거리는 모든 본심이 뭐냐? 자기의 몸과 그것을 어디를 간다? 의미가 되는 자기에게 합당한 장소를 찾아가는 거예요. 나는 노숙자 될래, 이런 사람 없습니다. 의미를 찾다가 자꾸 시험에 떨어지고 탈락하니까 나중에 남들 보기에는 무의미한 곳에 간 거예요.

여기에서 물어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지요. 이 땅에서 마지막 간 곳이 어떤 의미의 장에 갔습니까? 빌립보서 2장에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어디까지 갔어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예수님은 바로 말씀대로 죽는 그곳이 주님 찾아간 의미죠. 그런데 그 주님이 누구냐 하면, 우리의 창조주고 구세주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죠.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로 예수 믿을까요?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의미 없다, 무의미하다는 장소에 가서 쓸쓸히 돌아가셨고 거기서 부활했습니다. 그게 바로 요구르트 빨대 꽂은 장소에요. 존재가 찢어진 장소에요. 인간이 조작한 존재에 구멍을 뚫은 거예요. 그리고 사도 바울을 말합니다. 복음은 뭐냐? 예수님 죽은 게 복음이다. 십자가 죽음이 복음이다. 그게 현실이라는 겁니다.

이 현실은 우리가 생각한 우리가 기대한 현실 속에 포함될까요? 우린 그런 걸 기대합니까? 빨리 살다가 십자가 죽어야지. 그런 것 기대 안 하잖아요. 우리는 그걸 매끈한 바나나우유, 매끈한 그것, 그걸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백날 시민권은 위에 있다고 이야기해도 우리는 뭐만 쳐다보며 삽니까? 그건 성경의 어떤 단어에 불과하고 저 멀리 치워버리고 내게 의미가 되는 의미의 장에 필요한 것들만 내 앞에 배치해놓고 그걸 내 장소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무의미와 다르게 의미의 장이라 할 때 여기에서 두 가지 요소가 있어요. 공간과 시간을 통해서 거기에 자기를 안치시키려고 합니다. 이걸 자기를 위한 성전이라고 합니다. 내 영혼의 성전이죠. 이만하면 됐다. 연금 타고 이만하면 됐지. 자기를 위한 성전입니다. 공간은 뭐냐 하면, 안정적인 구조체제. 시간은 흐름의 계열. 계열이란 목걸이처럼 사건과 사건을 엮어내는 걸 말합니다. 내 의미를 위해서 나는 이런 식으로 고생했고, 이런 식으로 착한 일 많이 했다는 것을 진주목걸이 엮듯이 사건들을 굴비 꿰듯이 꿰어있어요.

그리고 공간은 뭐냐? 이만하면 죽을 때까지 밥 먹고 살지 않겠느냐고 안정적인 공간을 확보해요. 공간과 시간이 바로 인간이 자기 이름을 의미를 두기 위해서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겁니다. 이것 안 할 사람 있겠어요? 이거는 타고난 건데. 모든 인간들이 다 이걸 시도하게 됩니다.

여기가 교회가 아니고 일반 인문학강좌라든지 일반회사 신입사원 교육하는 장소라고 봅시다. 안 그러면 교감 연수장이라고 봅시다. 앞에 성경 이야기 하나도 안 하고 이것만 이야기해보세요. 사람들이 충분히 납득을 하고 이해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여러분 이름을 이 땅에 빛나고 살다 죽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여러분이 시시하게 놀지 말고 수준을 격상시켜서 여러분의 의미를 스스로 확장시키세요. 어떻게? 무의미한 것을 버리시고 의미 있는 걸 하세요. 그 의미가 뭐냐? 여러분이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봉사정신을 발휘해서 궁극의 정신으로 나 하나 때문에 민족이 산다든지 그런 의미 있는 시간과 공간을 시도한다면 안정적인 구조를 줄 것이고 여러분의 역사는 남들에 귀감이 될 정도로 훌륭하게 정말 이순신 장군처럼 존경할 그러한 계열의 아름다운 보람 있는 가치 있는 인생을 살 것입니다. 이것으로 강의를 끝내겠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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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2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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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