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강-에스겔 43장 18-24절(사독제사)150304-이 근호목사
128강-에스겔 43장 18-24절(사독제사)150304-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18.40.189.170)
128강-에스겔 43장 18-24절(사독제사)15030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3장 18절-24절입니다. 구약성경 1221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3:18-24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가 이러하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를 가까이 하여 내게 수종드는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너는 어린 수송아지 하나를 주어 속죄 제물을 삼되 네가 그 피를 취하여 제단의 네 뿔과 아랫층 네 모퉁이와 사면 가장자리에 발라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케 하고 그 속죄 제물의 수송아지를 취하여 전의 정한 처소 곧 성소 밖에서 불사를찌며 다음 날에는 흠 없는 수염소 하나로 속죄 제물을 삼아 드려서 그 제단을 정결케 하기를 수송아지로 정결케 함과 같이 하고 정결케 하기를 마친 후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와 떼 가운데서 흠 없는 수양 하나를 드리되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더 읽어도 되는데 그 뒤의 이야기는 제단을 정결케 하는 제사방식이 계속 나옵니다. 상당히 구체화된 제사와 그리고 성전 측량하는 치수의 모든 것이 정확하게 나와 있기 때문에 이것은 필히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시고 제사장들이 거기에 종사하도록 해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마무리 짓겠다는 확정 같은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앞서서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이 모든 측량이라든지 여기서 활동하는 제사장, 이런 사람들은 인간의 육으로서 다 이해가 되는 겁니다. 성전치수 같은 것은 머릿속에 그릴 수가 있잖아요. 집 설계도를 보게 하면 집 설계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처럼 구체화되어서 우리 속에 나타나는 거지요.
이런 것은 평소에 인간이 인간의 육으로 살던 그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사용 하시면서 육을 통해서 영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시키는 하나님의 방식이 되는 겁니다. 세밀하게 육적으로 설명을 한다는 그것은 바로 아무리 애써도 영의 세계에 넘어갈 수 있는 힘이나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다는 거지요. 기껏 생각해서 이런 모양과 활동을 충실히 다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 말씀대로 육은 육으로 끝나버리지요. 그래서 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극단적인 육의 방법으로 영을 설명하시는 겁니다.
“네가 철저히 한다고 해서 그것이 영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는 가질 수가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전과 제사장이 나오는데 이걸 설명하기 전에 먼저 염두에 둘 것은 하나님께서 기존의 성전을 불태우고 난 뒤에 이 성전과 이 제사방법을 줬다는 것을 우리가 감안해줘야 돼요.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전에 성전을 불태웠느냐 하면, 그들은 우상숭배를 했기에 성전을 불태웠다고 성경에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하면서, 이 성전과 이 제사가 지금 진행된다는 말은 더 이상 우상숭배를 안 하고 있다는 조건하에 이 성전과 그리고 제사장이 활동을 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구원 작업을 마무리하신다는 뜻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방금 제가 언급했는데 더 이상 우상을 섬기지 않는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하는 거지요. 더 이상 우상을 섬기지 않는 상태에서 제사와 성전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면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말이지요.
옛날에 처음 성전 만들 때 대놓고 우상 섬기겠다고 하고 우상 섬기는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 것은 아니거든요. 그들도 여호와를 섬겼다는 말이지요. 여호와를 섬겼는데 우상 섬겼다는 평가를 받아서 이스라엘도 망하고 성전도 불타버렸다면 그 인간에게 아무리 확정되고 철저히 계산된 법칙과 계명을 준다 할지라도 이미 우상 섬길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고 우상을 섬긴 경력이 있는 자들의 후손인데 그 선조가 그랬다면 그대로 후손들도 우상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 최종적인 성전과 제사가 나열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18절에 보면,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여기에 인자가 나오는 겁니다. 이 일은 인자 외에는 다른 사람한테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거지요. 그러면 인자는 무슨 수로 우상을 이기고 이 제단과 제사를 완전히 성취를 시켜낼 수 있는가, 그 방안이 무엇인가?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역량……, 우상이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인데 자기를 위해서 뭔가 할 수밖에 없는 신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육인데요. 그렇다면 우상을 섬기지 않는 방법이 어떤 방법이냐 하면, 그 인간을 죽이면 되겠지요. 그 인간을 죽이면 돼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안 죽으려고 행동한다는 말이지요. 일단 죽어버리면 더 이상 손 털고 뒤돌아설 수밖에 없어요. 할대로 다 했지만 죽어버렸는데 이제 더 이상 할 것은 없어요. 그래서 죽음 앞에서 누구든지 인간은 되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죽음 앞에 인간은 더 이상 어떤 기대나 가능성의 손을 놔버리지요. 인자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아담의 죄 속에 있던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까지 데려와 놓고 죽음에서 예수님과 갈라서게 만들어버려요. 예수님은 죽음 속으로 들어가고 모든 인간은 죽음에서 다시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게 만들어버려요. 그리고 예수님만 죽음에 들어갔다가 그 죽음 너머에서 다시 이쪽으로 와버려요. 지금 성전과 제사방법을 주시는데 이스라엘나라를 완전히 죽여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죽였는데 그러면 그 전에 하나님께서 성전 주시고 제사법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함이었나? 이것이 이스라엘을 구원코자 했다면 이스라엘을 아예 죽이지 말고 살려 놓고 “잘해라. 제대로 해라. 잘해야 한다.” 격려하는 것이 옳은데 하나님께서는 그 전에 줬던 성전이나 제사법은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했던 그 구원을 달성하면서도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거든요. 이스라엘은 그게 자기보고 하는 소리인줄 알고 오해했지요.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동행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분이에요. 이스라엘을 해체시켜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자기 아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에게 줬던 모든 제사와 성전을 완성시키는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네 안에 예수님이 있다고 자꾸 지적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네가 뭘 해서 네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나는 너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네 속에 계신 분과 상대하는 거예요. 이 방법이 신약도 마찬가지고 구약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하면서 마치 바나나껍질을 까고 바나나 알맹이를 먹듯이 이스라엘이라는 껍질은 해체되어 버리지요. 로켓 쏴 올릴 때 캡슐만 궤도에 안착해서 궤도를 돌고 그 나머지는 밑으로 해체되어서 떨어지는 것처럼 주님의 모든 말씀은 오늘 본문에 인자라고 하는 그 분을 겨냥해서 일을 시작한 겁니다. 인자.
그러면 인자는 성전을 완성하면서 무엇을 포함시키느냐 하면, 옛날 이스라엘백성이 저질렀던 죄를 인자되시는 분이 자신의 임무, 책임으로 인수받게 돼요. 인수받아놓고 그 인수받아진 죄와 더불어서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아버지로부터 부활의 혜택을 받아서 그 부활의 혜택과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미리 줬던 제사법과 성전법을 다 이루어내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에요.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인간하고 상대하는 것은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에요. 교회라는 이름의 종교단체가 돼요.
“교회 만들어라. 그러면 구원하겠다.”가 아닙니다. 교회를 벗어나서도 구원하지 않아요. 교회에서 구원해요. ‘교회에서.’ 교회에서 구원하되 교회를 벗겨버리고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되게 하시지요. 이스라엘 밖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안에서 구원하되 이스라엘은 구원하지 않아요. 이스라엘같이 하나님의 아들 대우받는 그 예수님을 구원함으로써 줄줄이 알사탕처럼 딸려 나오도록……, 독일에서 만드는 줄줄이 모양의 소시지가 있잖아요. 하나 당기면 다 달려 나오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셔서 나오시면 사지도 같이 죽 따라 나오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건져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하고 구원받은 사람을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은 자라고 언급하는 겁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개인의 역량이나 개인의 솜씨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머리 되시는 분을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어떤 자랑을 하느냐 하면, “교회 다니면서도 지옥 안 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독교란 종교를 가지면서도 지옥 안 가게 된 것을 천만 다행으로 여깁니다.” 자칫하면 큰일 날 뻔 했어요. 교회가 구원하는 줄 알고, 기독교가 구원하는 줄 알고 착각할 뻔했어요.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지옥 안하고 신학을 벗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학으로부터 탈출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리로부터의 탈출이에요. 대중들의 종교문화에서부터의 탈출, 드럼치고 기타 치는데서 탈출, 기독교가정이라는 데서 탈출, 모태신앙에서부터의 탈출입니다. 그것은 뭐냐? 정말 우리의 탈출은 나의 죽음으로부터의 탈출이지요. 내가 살아서 했던 모든 것, 살아서 의미를 줬던 모든 것, 나는 모태신앙, 나는 기독교가정, 살아 있기에 덮여지는 모든 문화, 기독교문화, 종교문화, 교회문화, 이런 것들이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자꾸 덧입혀지고, 덮이고, 추가적으로 내가 갖고 있으면 능력이 되는 줄로 알고 힘이 되는 줄로 알고서 갖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속아 넘어가지 않게 해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요.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육을 극단으로 밀어붙입니다. 그 중에 한 예가 19절에 나와요.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를 가까이 하여 내게 수종드는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너는 어린 수송아지 하나를 주어 속죄 제물을 삼되.” 여기 나오는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 어린 수송아지 하나, 제물, 다 눈에 보이는 겁니다. 살아 있는 인간에게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이미 모든 것이 멸망되고 난 뒤에 그것을 또 사용한다는 말은 영의 세계가 못 믿는 사람에게는 철저하게 육의 극단으로만, ‘아, 저거는 되겠네. 저거만 하면 되겠네. 사독제사장이 있으니까 사독제사장 데리고 제사 드리면 구원 받겠네.’라고 생각하게끔 오해하게 하는 식으로 영은 설명됩니다. 거기에 뭐가 빠졌는가? 인자가 빠져버렸어요. 예수님이 빠져버린 거예요.
지금도 이스라엘은 제 3성전 짓고 사독제사장계열을 모집하기 위해서 DNA조사해서 후보감 해놓고 네게브사막에서 훈련시킨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육의 극단이에요. 살아 있기에 잘 해서 한 번 살아보자는 겁니다. 살아 있는 내게 어떤 작용을 해서 내 힘으로 천국으로 살려내겠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종교잖아요. 이게 흔히 말하는 전도고 이게 선교라는 겁니다. 전도나 선교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만이 할 수 있어요. 죽은 자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운전사가 되어서 올라타서 죽은 자로 하여금 죽었다는 고백을 내뱉게 하면서 죽은 자를 살려내는 방식은 주님만 하실 수 있지 사람은 전도고 선교고 못합니다.
그러면 전도 못하고 선교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안하면 되는 거예요. 간단해요. 안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선교 안하고 전도 안하면 뭐합니까? 그냥 살면 돼요 살려줄 때까지. 선교한다고 하지 말고 ‘그냥 살았네.’ 하면, 그것이 선교입니다. 전도하지 마시고 ‘오늘도 살았구나.’ 이게 전도에요. 선교나 전도에 대해서 오늘로 끝이에요. 더 이상 묻지 마세요.
왜 사독인가? 이게 어려워요. 사독이라 하는 것은 다윗과 관련된 제사장이 사독입니다. 제사장을 사독으로 했다는 그것은 배후에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생생하게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실천에 옮긴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독은 다윗과 관련되어 있어요. 옛날 처음에 모든 제사는 아론 계통인 레위지파에서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레위지파에서 유다지파로 바뀌게 되었어요. 이것을 원천적으로 하면 육에서 영으로 바뀌는 것과 같아요.
육에서 영으로 바뀌면서 육은 폐기처분 되듯이 레위지파에서 다윗으로 바뀌면서, 유다지파로 바뀌면서 레위지파는 폐기됩니다. 폐기되는데 폐기되는 그 방식이 뭐냐? 옛날 레위지파에는 왕이 없었어요. 왕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왕을 주셔서 왕 밑에 종속된 제사장을 두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제사장의 모든 운명과 선과 악은 왕에 의해서 결정돼요. 아무리 제사장이 제사를 잘 드려도 이미 그것은 소용없습니다. 왕이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면 그 나라는 사는 나라가 되고 왕이 제대로 못하면 저주받는 나라가 됩니다. 이스라엘에 국한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다윗이 등장하고 난 뒤에 이미 엘리제사장을 통해서 아론 계통의 레위지파는 자기 할 도리를 다 했어요. ‘아하, 인간의 힘으로 제사해서 될 문제가 아니구나.’ 인간이 소 드리고 양 드리고 염소 드리는 이것으로 죄 용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다 들통 난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을 줬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의견이나 모든 인간의 행위를 일체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제사 드리는 그것도 죄 사함에 적절치 않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확정짓기 위해서 왕을 준 거예요.
“방금 목사님이 하신 말씀대로 왕 하나 잘되면 나라가 잘된다면서요? 그러면 왕이 잘 돼야 된다는 그것은 있을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물으신다면 그 다윗에게 왕을 줬던 그 다윗의 자리가 뻥 뚫는 자리에요. 구멍 난 자리가 돼요. 그것은 심연이라고, 깊은 어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자리가 그냥 구멍이 뚫린 것이 아니고 그 깊이를 가지고 저쪽이 뭔지를 모르는 어두운 곳으로 통과하는 구멍이 뻥, 하고 뚫린 거예요. 그쪽에서 막 바람이 불어요.
그러니까 이것을 적절하게 표현한다면 이렇게 하면 되지요. 다윗의 자리는 다윗이 버티고 있는 자리가 아니고, 버티다가 혼났지요, 버티는 자리가 아니고 창을 내는 자리라는 표현이 적당해요. 하나의 창구, 또는 창문, 통풍구, 또는 배수구, 이렇게 보시면 적절합니다. 영의세계, 저쪽세계와 이쪽세계를 유일하게 서로 통할 수 있는 창구 같은 것, 그 창구를 누가 가로막으면 안돼요.
다윗은 그것도 모르고 ‘우리 이스라엘 이만큼 부흥 많이 되었지요.’ 하고 숫자 세다가 혼났지요. 비키라고 해도 안 비키고 ‘내가 왕이 되어서 이만큼 인구가 증가해서 복 받았으니까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이렇게 많구나.’ 하다고 혼났습니다. 자기가 자랑했던 그 인구 7만 명 죽였습니다. 다윗이 처음 왕이 될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말씀이 아니고 미래의 어떤 분이 지키는 것을 앞당겨서 다윗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그 당시의 법의 위반자로서 성취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위반했는데 위반한 그것이 성취가 되는 모습으로 미리 보여줘요.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막 도망칩니다. 헤브론이 사울이 있던 그 동네인데 사울에게 쫓겨서 남쪽으로 도망을 치는 거예요. 원래 성소의 떡은 제사장 외에는 못먹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다윗이 무슨 권리로 떡 내놓으라는 거예요. 거룩한 떡밖에 없다고 하지요. 성소에 매일 넣는 떡이 있어요. 그 떡을 달라고 하지요. 이것은 쫓겨다나는 장군이 먹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떡을 달라고 해서 먹습니다. 제사장이 입는 에봇도 본인이 입어버려요. 분명히 이것은 위반된 겁니다. 그 당시에 왕은 사울이었고 사울은 선지자 사무엘과 더불어서 뭔가 말씀대로 해보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지요. 그런데 다윗이 뜨고 난 뒤에는 사울이 다윗을 못 죽여서 환장을 했습니다. 악신이 들렸지요. 그 때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 제사장이 다윗이 달라고 하니까 에봇도 주고 떡도 먹게 합니다. 이것은 말씀에 위반되는 거예요.
그런데 장차의 말씀에 의하면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한 왕으로서 왕의 본질을 드러내는 거예요. 위반을 통해서 왕다움을 보여주는 겁니다. 왜 그게 위반처럼 보이느냐 하면, 남들은 법을 지키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법을 지키려는 자체가 육적이에요. 법을 아무리 지켜봐야 육으로서 법을 지키는 것밖에 안돼요.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이 되었기 때문에 선택의 위력이 있어서 그 사람은 법을 지키나 안지키나 본인이 하는 그것이 영적이라. 자기가 하는 행동이 곧 새로운 법을 창출하는 것이 돼요.
이것은 정말! 이것은 사무엘도 마찬가지에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아말렉전쟁에서 다 죽이라고 했는데도 사울 왕이 짐승들 좋은 것은 남겨두고 하찮은 것만 진멸했어요. “왜 그렇게 했습니까?” 하니까 “제사 드리려고 했다.”고 한 거예요. 사무엘이 하는 말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 전에는 사무엘이 늦는 바람에 기다리다 못해 본인이 제사를 드린 적도 있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과거에 어떤 법을 줄 때에 육적이 사람들이 거기에 몰려들면서 ‘이 법을 지켜서 내가 나를 살리겠다.’는 식으로 그 법을 활용해요. 주님께서는 발을 빼버립니다. “그게 바로 육적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시도의 끝이고 한계”라는 겁니다. 지켰다 하는 그것이 바로 못 지킨 것이 되게 하고 선택된 사람이 위반처럼 보이는 그 행동이 다른 사람은 낯설기 짝이 없는 새로운 법의 성취로서 그 현장에 돌출하게 만들어버려요.
왜 자꾸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을 피하는가? 그것은 오직 인자 외에는 구세주가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방식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목사님, 성경에 많은 명령이 나오고 사도바울의 권면도 나오는데 어느 것을 지켜야 합니다.” 제가 그러거든요. “다 못 지킵니다.” “못 지킬 것을 왜 줍니까?” “당신이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준 겁니다.” 이걸 지키면 뭔가 나에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자기가 지키면 지킨 내가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지 남은 지키고 내가 못 지키는데 그 남으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못해요. 왜? 양심이 고와서 그래요. 너무 착해서 그래요. 자기는 나쁜 짓만 했는데 어떤 좋은 분이 이 말씀을 다 지켜가지고 그분 덕분에 나를 구원하게 되면 우리는 미안해서 안 믿어요. 일종의 자존심이지요.
그분 덕분에 내가 천국가게 되면 나는 천국에서 내 자랑 못하잖아요. 나 잘났다는 소리 못하잖아요. 그러면 천국에서 영생토록 기죽고 살아야 되는데 그 슬픈 짓을 왜 하는데요? 되도 않는 자존심, 자기 의가 강렬해서 그래요. 세리와 창기가 구원받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 사람들은 아예 법 지킬 생각을 못합니다. 먹고 사는 게 바빠서.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나 자기구원 많이 하라고 하세요. 전부다 떼거지로 지옥 가 있어요. 성경에 보면 나라의 본 자손은 쫓겨난다고 했어요.(마 8:12) 통곡하고 있다고 해요.
사울 왕이 와서 왕에게 신고 안하면 죽인다고 엄포 놨거든요. 다윗이 제사장만 먹는 떡을 먹고 힘이 나서 그 장소가 놉이라는 곳인데 거기서 벗어나서 광야로 숨어들었다는 소리를 듣고서 “누가 허락도 없이 다윗을 도왔는가?” 하니까 도엑이라는 간신배가 하는 말이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이 도와줍디다.” 그래서 도엑이 나서서 선동해서 놉에 있던 제사장 85명을 다 죽여 버렸어요. 그 때 아히멜렉에게 아비아달이라는 아들이 있었어요. 제사장 아들이니 역시 제사장이지요. 또 다윗의 친척이 되는 사독이라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이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 속에서도 계속해서 협조했어요.
다윗의 아내가 여섯 명이에요. 남자들은 부러워도 하겠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면 돼요. 아내 여섯에서 애를 다 낳았지요. 네 번째 아내의 아들이 아도니야에요. 그 여섯에 포함이 안 된 아내가 밧세바입니다. 다윗에게 밧세바라는 여자의 의미가 마태복음 1장에 나와요. “우리아의 아내에게서.”라고. “세상에, 남자가 바람을 피우다니!” 하잖아요? 그 바람피운 것이 바로 통풍구에요. 영의 세계가 육의 세계와 유일하게 통하는 통풍구에요. 그런다고 바람피우면 안 되고. 보통은 바람피우면 쉬쉬 할 텐데 다윗은 모든 아내를 정리해버리고 밧세바를 최종 아내로 삼아버립니다. 왜? 하나님의 구원의 정신이 유일하게 밧세바라를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그 밧세바를 통해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밧세바와 다윗과의 관계에서 나온 아들은 죽고 그래서 다윗은 죄인의 괴수로 확정되고 난 뒤에 그러니까 다윗배후에 있는 통풍구, 구멍, 영의 세계가 다윗을 통해서 뚫려서 이제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겁니다. 너를 죄인으로 만들고 너의 아들을 죽이게 만들고 난 뒤에,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난 뒤에 다윗의 자리에 등장한 아들, 솔로몬입니다. 그 솔로몬에 반대했던 것이 네 번째 아들인 아도니야에요. 아비아달은 아도니야에게 붙어서 다윗의 다음 왕으로 등극시키려고 했고 하나님의 뜻은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 계열을 통해서 왕권을 이으려고 했습니다.
거기에 사독이라는 제사장은 다윗 편에 섰습니다. 밧세바 편에 섰어요. 오늘 본문에서 사독이라는 계열을 통해서 제사 드리라는 말은 옛날 제사는 그냥 양 잡으면 되고 소 잡으면 되지만 이 마지막 때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모든 인간이 다 죄인으로 들통 나고 난 뒤에 인자를 통해서 제사가 완료되는 그 제사는 죽음보다 더 센 고집으로 찾아온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거기에 사독제사장이 제사한다는 그 말은 다윗언약은 안 죽고 살아 있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 29절, 전에도 언급했습니다만,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다윗은 죽었습니다. 왜? 죄 값은 죽는 거니까. 다윗은 죽었는데 하필 다윗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왜 언급하느냐는 말이지요. “다윗 죽었대.” “옛날 사람들 다 죽었잖아. 다윗만 죽었어? 이순신장군도 죽고 세종대왕도 죽고 다 죽었지.” “아니야. 다윗이 죽었대.” “글쎄, 다윗이든 뭐든 옛날 사람들 다 죽은 것은 마찬가지지.” “아니야. 다윗이 죽었다는 말은 다윗이 죽은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면서 보여준 모든 언약적인 완성을, 다윗자리에서 태어난, 다윗의 말씀대로, 다윗의 약속대로 태어난 그 분이 진정한 우리의 구세주”라는 겁니다.
예수라는 용어, 지저스라는 용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불러도 괜찮아요. 그 메시아가 언약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눈치 채야 비로소 그 사람은 메시아를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죽었다는 것은 우리도 죽어 마땅하다는 뜻이에요. 모든 인간, 하나님이 선택했던 사람 다 죽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죽고 이삭도 죽고 다 죽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지금 살아 있다는 말이지요. 그게 뭐냐? 특정 인간이 아니고 특정인간에게 주신 언약이, 노아가 아니라 노아방주가 노아를 살리듯이, 어떤 언약, 약속이, 그 약속이 살리는데 그 약속은 뭐냐?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고 오직 죽어 마땅하다고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은 영적 세계의 바람이 부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맞바람, 그냥 온 몸으로 맞바람을……, 오늘 날씨 춥고 바람 많이 불었지요? 그렇게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죽임으로서 살려주시는구나.’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지옥가고, 주의 언약으로서 우리를 죽이고 다시 살려내시는 겁니다. 언약으로.
그렇게 되면 우리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나는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약속의 힘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남에게 자랑하면서 그냥 살 때 그게 선교사요 그게 전도자입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그 사람도 죽게 돼요. 그러면 아무개가 죽어서 그 묘가 그냥 있다고 하겠지요. 그것이 다 의미가 있는 겁니다. 성도의 죽음은 언약 안에서 안식이라, 쉬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사독에 의해서 제사를 드리는데 그 제사가 24절에 나옵니다.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소금을 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민수기 18장 19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선택할 때 그 제사장은 영원하다는 표시로 소금언약이라고 했어요. 왜 소금언약인가? 모든 제사에는 소금을 치는데 소금을 칠 때 뭐는 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꿀과 누룩은 넣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장 11절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양식과 인간의 양식이 다르다는 겁니다. 인간의 양식은 맛있게 그저 허겁지겁 먹기만 하면 되지만 하나님의 음식, 그걸 응식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음식은 제사장을 통해서 완성된 그것만 받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 음식을 받으심으로서 복을 내리십니다. 그때 소금을 치는 거예요. 그 때 그 언약을 영원한 언약 또는 소금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음식에는 소금이 들어간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너희들이 먹을 용도가 아니고 제사장이 똑바로 했을 때, 제사장이 제사를 온전히 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만족해하신다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보고 이 성경말씀을 이해한다고 할 때 제일 걱정거리가 있어요. 내가 이걸 믿는데 이걸 믿는다는 믿음을 하나님도 인정해줄까 하는 걱정이에요. 나는 믿는데, 나는 믿고 구원받는다고 믿는데 하나님께서는 내 믿음을 믿음으로 인정해줄지 그걸 못 믿겠다는 거예요. 실제로 그런 질문 하는 분들이 여러분이 계셨어요. 이번 주일 낮에 이것을 자세히 설명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만.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나에게 적용시키면 그런 오류를 범하는데 나에게 적용시키지 마시고, “주여, 나한테 적용시키지 마세요. 저는 완성자가 아닙니다. 저를 비켜서 다른 분에게로 가시옵소서.” 이렇게 예수님께 보내면 돼요.
예수님께 보낸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게 되면 예수님을 통해서 다 이루었다, 하는 그 안에 방금 읽은 에스겔서 43장의 내용이 다 들어있다고 믿어지는 것은 여러분의 솜씨, 저의 솜씨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이해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수님께서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다. 그렇다면 내 걱정에서 저쪽으로 모든 게 넘어가요. 이제는 나로부터 어떻게 믿겠는가가 아니라 저분께서 왜 나를 이렇게 믿게 했는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나는 수동적이 되고 주님은 능동이 되니까 그 능동을 보여주는 수동으로 살면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인자를 통해서 완료되었음을 미리 에스겔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인자에게 해주신 말씀이 인자를 통해서 달성되었다는 것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확인되었사오니 이제는 주님 앞에 수동적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28강-에스겔 43장 18-24절(사독제사)150304-이 근호목사.hwp (64.0K), Down: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