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50213a-히9장19절(죄사함) - 이 근호 목사
안양20150213a-히9장19절(죄사함)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6.154)
안양20150213a-히9장19절(죄사함)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9장19절입니다. 항상 강의 초반에 중요한 게 나오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려주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분명히 여기서는 염소 피와 송아지 피가 동원되지 않습니까. 그렇잖아요. 이 본문대로 한다면 옛날에. 그런데 그것이 왜 사람의 죄를 씻어주지요? 염소가 죽고 송아지가 죽는데 왜 사람이 사느냐 이 말이죠. 대신하려면 동일한 동질이 대신 되어야 되잖아요. 사람을 살리려면 누구를 대신 잡아야 되지요? 사람을 잡아야 되는데, 사람을 잡아서 사람을 살리는데 왜 송아지 염소만, 그 당시 송아지 염소가 죄 지은 적 있습니까? 그 송아지 염소 죄지으려고 송아지 염소 바쳐야 되는 것이 같은 레벨에서 동질로서 합당해 보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모세의 율법은 왜 송아지와 염소의 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가 씻어지느냐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자, 이거 알려면 인간의 죄가 어디서부터 생겼느냐를 알면 돼요. 인간의 죄가 선악과 따먹으면 죄가 되지요. 선악과 따먹으면.
자, 에덴동산을 한 번 이리 보면, 여기가 에덴동산입니다. 나무 과일이 이리 있는데 선악과나무입니다. 선악과나무가 있다 합시다. 그러면 선악과나무가 있고 생명나무가 있는데 선악과 따먹게 되면 죄가 되고 죄를 지으면 죽음이 오지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죽잖아요. 그러면 요 나무 밑에다가 염소나 양이나 송아지나 즐비하게 돼있습니까? 요거 내가 따먹고 후딱 송아지 피 바르면 어떻게 용서가 되겠어요? 그러면 니가 따먹고 후딱 염소 피 바쳤어요? 그러면 내가 너 안 죽일게. 너 안 죽도록 해줄게. 이런 조치가 있었습니까? 그 당시 에덴동산에.
에덴동산 선악과 밑에 염소 몇 댓 마리 놓여있어요? 혹시 선악과 따먹고 싶거든 따먹으시고 요거 염소 잡으시면 됩니다. 이런 장치가 있었느냐 말이죠. 그런 장치가 없었지요. 그냥 나무 밑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송아지 염소 하는 것도 없었단 말이죠. 피 뿌리면 용서받는다는 그런 것도 없었단 말이죠. 그런 것이 없었다는 말은 아담만 괜히 손해 본 느낌이 드네요.
아담도 죄를 지었고 이스라엘도 죄를 지었는데 이스라엘이 죄지를 때는 송아지 염소 바쳐서 씻어주는 그런 배려가 있었는데 아담이 범죄 할 때는 그런 배려 없이 정녕 죽으리라, 끝! 이리 되어버리면 아담만 손해 보는 거예요. 여기에 보니까 다 이루었다, 해놓고 끝이라 했지요. 이 끝은 상당히 좋은 기분의 끝인데 에덴동산에 선악과 따먹었을 때에 그 때 끝은 완전히 절망적인 끝이다 말이죠.
방금 제가 한 말 중에서 정답이 벌써 나왔습니다. 절망적인 것. 절망을 맛보게 하는 거예요. 이 죽음이란 것이 단순히 이 목숨 죽는 것이 아니고 백번 죽어도 다시 선악과 과일을 본드로 다시 못 붙인다는 사실, 한 번 위반했으면 그걸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죄 죽음의의미라 하는 것은 끝났다는 겁니다. 더 이상 니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모든 것이 끝이 난 거죠.
그러면 이 제물들, 송아지 염소 이러한 양, 이 제물들이 보여주는 것은 방금 제 이론에 의한다면 이 제물들이 피 흘려 죽는다는 말은 그 피라는 말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방금 제 이론으로 한다면 절망과 끝을 보여주는 거죠. 그냥 죽음이라 하니까 이게 의미가 와 닿지를 않는 거예요. 왜냐 하면, “에이, 죽고 난 뒤에 또 부활이 있잖아.” 드라마 내용 벌써 눈치 다 채버리 고. 감이 영 오지를 않는 거예요. “에이, 죽어도 살려줄 건데 뭐.” 전혀 의미가 하나님의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한 그 죽음의 의미가 전혀 와 닿지를 않는 겁니다.
염소의 피를 가지고 우리의 죄를 씻는다. 이게 앞뒤가 맞지를 않아요. 염소의 피로 자기 염소를 못 살릴뿐더러 염소의 피로 죽었는데 왜 인간이 사느냐, 이게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송아지의 피, 염소의 피 또는 양의 피를 가지고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은 끝을 보여주는 겁니다. 끝을.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 중앙에 있지요. 여기서 네 개의 강물이 나옵니다. 네 개의 강물이 있으면서 네 개의 강물이 에덴동산의 생명을 유지하는 에너지원이 되는 겁니다. 물이 흐르는 곳곳마다 생명이 유지가 돼요. 그런데 여기서 선악과가 따먹지 않은 상태가 될 때 이 에덴동산은 모든 게 사는데, 만약에 선악과에서 훼손된다면 결국 이 에덴동산은 뭘 보여주느냐, 끝을 보여주는 겁니다. 끝!
에덴동산에 있어서 처음은 시작이 되면서 시작과 뭣과 함께 있느냐 하면, 시작과 끝이 같이 있는 거예요.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시작과 끝이 같이 있는 거예요. 제가 강의하는 취지를 지금 길게 논리로 따지려 하면 복잡하니까 제가 성질 급해서 미리 알려드린다면 우리 성도가 이리 앉아 있잖아요. 그럼 우리 안에 뭐가 있느냐, 시작도 있고 끝도 있고 뭐는 없어요? 나는 없어요. 시작을 보여주는 나, 끝을 보여주는 나지 나 잘되기 위해서 주님이여, 그런 계산하지 마세요.
시작과 끝을 보여준다면 우리의 역할 다한 겁니다. “니 교회 가서 복음 듣고 뭘 알았나?” “내가 끝인 걸 알았어.” “또 뭘 알았나?” “내가 시작인 것을 알았어.” 그걸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의 할 증거는 다 한 거예요. 알파요, 오메가 되신 분이 함께 있기 때문에 시작이고 끝이고 내가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데 같이 거기에 참여되고 거기에 종으로 쓰여 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과 시작과 끝을.
더 쉽게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옛날 심청전도 그렇고 춘향전도 그렇고 옛날 모든 동화나 재미난 드라마 이 모든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드라마 중 <압구정동 백야>지요. <압구정동 백야>를 들어봅시다. 압구정동 백야를 하는데 시청률이 15%가 아니고 100%라 봅시다. 온 국민이 그걸 본다고 칩시다. 그러면 압구정동 백야에서 일어나는 그 이야기가 그 나라의 중심이 되겠지요. 드라마 끝나고 길거리에 나가면 그 이야기하겠지요. 옛날에 TV이 없을 때 여로 같은 거 할 때는 시청률이 70%나왔어요. 다 봤잖아요. 여로 할 때는 전부 다 길거리에 나오고. 여로의 못된 형 나오면 그 사람 욕하고 이랬다 말이죠. 장 보리도 마찬가지고 그렇거든요.
그렇다면 우리가 시작이고 끝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마다 다 사적인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서는 특별히 자기 성도를 가지고 세상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우리를.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왜? 다른 사람은 거기에 없으니까. 다른 사람은 사적인 인생이에요. 그런데 성도는 사적인 인생은 날아가 버렸어요.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을 시작했고 예수님이 세상을 어떻게 끝장내느냐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걸 성경에서 ‘언약의 사람’ ‘언약 맨’이 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노아입니다. 노아 당시에 사람이 노아밖에 없었습니까? 아니지요.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집가고 먹고 장가가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그 때 노아는 뭐했지요? 물론 시집가고 장가가고 다 했지요. 했는데 노아가 보여주는 게 뭘 보여주는가 하면, 시작과 끝을 보여준다니까요. 시작과 끝을 보여주면서 그냥 보여주지 않고 뚝딱 뚝딱 뭘 만들지요. 뭘 만듭니까? 방주를 만들지요.
강의 다시 해드리겠습니다. 강의 다시 해도 먼저들은 사람들 몰라요.(중간에 오신 분을 위하여) 지금 히브리서9장19절을 하거든요. 거기에 보면 모세의 율법이 나온다 말이죠. 모세의 율법이 나올 때, 우리는 생각합니다. ‘어? 모세의 율법이 나왔구나. 지키면 되겠지.’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건 모세율법이 누구 좋아라고 지키는 거예요? 내 좋아라고 지키는 게 되잖아요. 내 구원받으려고. 율법을 내 좋아라고 구원받으면 이게 내가 천국에 합격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왜냐 하면, 율법을 주게 되면 율법을 주신 그 안에 정답이 있게 돼있고 그 정답은 누가 지킬 수 있느냐 하면, 율법을 만드신 분만이 그걸 지키게 돼요. 다른 사람에게 율법을 준 이유가 율법을 지킨 분과 너의 간격과 그 차이가 어느 정도 멀어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유대인들은 그걸 오해해가지고 내가 애써서 지키면 구원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는 걸 가지고 만약에 예를 들게 되면 어떤 쉐프가 요리사가 음식을 내어놓고 하는 말이 “이 음식을 맛있게 드시면 내가 이 요리 값을 받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나의 내기를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맛있는 요리를 먹고 난 뒤에 사람들이 다 뭐라고 하겠어요? 어떤 사람은 아! 진짜 맛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너무 맛있다. 어떤 사람은 맛이 죽인다. 이런 표현할 거고 그렇게 표현하게 되면 요리사가 뭐라고 하겠어요? “어떻습니까?” “맛있습니다.” 그럼 합격해줍니까? 안 해줍니까? 합격 아무도 안 해주지요. “내가 원했던 정답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한마디만 하면 끝나는 거예요. 돈 다 내야 돼요. 이런 장사법도 괜찮겠다.
떡볶이 만들어 놓고 맛있게 드셨으면 돈 안 받겠습니다. 해놓고 “아이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니요, 제 성에 안 찹니다. 그거 정답 아닙니다.” 이러면 결국은 맛있게 먹었다는 게 누구 입장이에요? 자기가 지킨 입장에서는 자기는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그걸 지켰지만, 그건 실패지요. 정답이 아니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율법을 줄 때는 뭐도 포함되어있다? 정답도 포함되어있다. 율법을 지키신 분이 바로 율법을 주시는 겁니다. 그럼 왜 주시느냐, 율법을 너희들이 받았고 지키게 되면 그 정답에 미치지 못하고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정답에 미치지 못하면 어떻게 돼요? 복 받습니까, 저주받습니까? 율법 안이 뭐냐 하면,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저주받는다는 내용이 그 안에 포함돼 있어요. 그것도 백 개를 지켜도 하나를 못 지키면 하나도 못 지킨 게 돼요.
그런 입장에서 히브리서9장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로 이렇게 제사를 드려봤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받겠어요, 안 받겠어요? 구원 못 받습니다. 결국은 로마서 말씀 그대로 그들에게 율법을 준 것은 구원을 받게 함이 아니고 구원을 못 받게 하기 위해서다. 못 받는 존재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 이리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히브리서9장을 보면서 뭘 알아야 돼요? 왜 우리는 율법을 못 지키는가를 그걸 아는 거예요. 성경 펴놓은 이유가 그거예요. 왜 우리는 송아지 염소 피를 해도 왜 안 되느냐, 그것은 송아지 염소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한다는 그 중간 과정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구는 압니까? 하나님은 알지요. “송아지 잡아라.” “예” “양 잡아라.” “예” “염소 잡아라.” “예” “피를 뿌려라.” “예”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구원해줍니까? 아니.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왜 구원이 안 되지요? 떡볶이 맛있게 먹었다고 주장해도 그건 맛있게 먹은 게 아니듯이 시킨 대로 했다고 해서 그게 시킨 대로 한 게 아니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그 율법 속에는 뭐가 들어있는가, 시작과 끝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덴동산에 선악나무와 생명나무 두 개의 나무가 중앙에 있지요. 중앙에 있다는 말은 중앙에서 물이 나오고 강물이 나오고 그 강물이 에덴동산을 살리지요. 그것은 어떤 조건인가 하면, 선악나무도 생명나무도 그게 그대로 흠 없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조건하에는 살잖아요. 만약에 선악과가 다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다치게 되면 생명은 날아가 버린 거예요. 날아갔지요.
그러면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에 정녕 죽으리라, 되어있다 말이죠. 정녕 죽으리라 되어 있잖아요. 뱀이 꼬셔가지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어버렸습니다. 만약에 유대인이 생각하는 율법 같으면 고 선악과 따먹은 밑에 뭐가 있어야 하느냐 하면, 소나 양이나 음메~~하고 돌아다녀야 돼요. 따먹자마자 어이쿠 죄 지었구나! 양 잡아라.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아담 시절에 그게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어요. 이 선악과 따먹어라, 하는 이야기는 모세 때 주어진 겁니다. 모세 때. BC1400년경에. 모세 때 주어진 거거든요. 모세 때 율법을 줬다 말이죠. 제 이야기는 이거에요. 왜 아담 때 안 줬느냐 이 말입니다. 제 이야기가.
자, 율법이 인간을 살리기 위한 용도라면 아담이 죄 지을 때 그 죄에 대한 처방책도 에덴동산에 뭔가 한 구석에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니가 죄 지었나? 그럼 빨리 처방해야지. 후시딘연고 바르고 빨리 테이프가지고 빨리 선악과 과실에다가 꼭지에다가 달아놓으면 그러면 되는 거야.” 이렇게 되는데 거기에는 어떤 처방할 수 있는 조치할 수 있는 그 방법이 에덴동산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어요. 이건 사람 죽이겠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에 있어서 송아지 염소 받으니까 ‘아, 죄를 지었다고 조치하셨구나!’ 이렇게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모세만 인간이고 아담은 인간 아닙니까? 왜, 모세한테 모세시대에 율법을 줘가지고 죄를 용서할 방법이 있다면, 애초에 처음부터 아담한테는 왜 그걸 안 줬어요? 줘야지. 아담한테도. 같은 인간인데 심지어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아담은 인간의 조상입니다. 인간의 조상한테는 주지도 않고 왜 뒤에 와서 줄 리가 있느냐 이 말이죠.
따라서 이 말은 뭐냐, 어느 쪽이 잘못이다? 율법을 준 것은 죄에 대한 처리하라고 준 게 아니다, 라는 말이 확실하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율법을 왜 줬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담에게 허락한 것과 동일한 것을 준 거예요. 왜? 모세는 아담의 자손이니까. 아담에게 허락한 상황과 모세에게 한 상황이 똑같은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한 이유가 뭐냐, 그것은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시작과 끝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시작과 끝이.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 사적인 일밖에 모르는데 하나님의 성도한테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성도한테는 시작이 들어있고 끝이 들어있어요. 이게 성도가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냥 자기의 과거, 기억이 들어있는 반면에 성도는 일어서서 걸으면 뛰면 시작과 끝이 둘 다 출렁이고 있어요. 시작과 끝이 다 들어있어요. 뭐냐 하면, 시작은 이렇게 해서 시작됐고 끝은 이렇게 끝난다가 들어있어요.
그걸 우리한테 오기 전에 먼저 주신 분이 있다고 했지요. 아까 강의 처음부터 들으신 분은 들었지요. 이게 집안이 노씨 집안입니다. 노아. 노아 당시에 노아만 살았습니까, 다른 사람도 살았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살았잖아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는데 유독 다른 사람이 없는 것. 노아에게만 있는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난다는 것을 노아는 그게 있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안 만든 걸 노아는 만들죠. 뚝딱 뚝딱 만들었습니다. 뭘 만드는가,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이게 어디에 쓰는 물건이고? 방주를 어디에 쓰는 물건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의아해할 수밖에 없어요.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그거 왜 믿어요? 십자가 믿는다고 월급 더 오릅니까? 십자가 안다고 몸이 낫고 그런 거 있어요?
어떤 교회는 그런 교회도 있습니다만. 제가 수요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예수여 불쌍히 여기소서.’를 하루에 12000번을 하게 되면 기적이 일어난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일은 언약 외에 벗어난 일은 우리에게 기적이라고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게 아니고 우리가 원치 않는 걸 줬어요. 그게 뭐냐, 세상은 이렇게 시작되고 세상은 이렇게 끝장난다는 그 정보를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끝, 그것뿐이에요.
여러분, 사극 보게 되면 귀부인이나 고관대작들이 뭐를 타고 다닙니까? 가마타지요. 가마 탈 때, 그 가마꾼들이 네 명이 쥐잖아요. 그런데 그 가마꾼이 자가용의 주인 되시는 그 부인이나 고관대작을 태우지 않고 가마꾼이 자기 아들 태우고 자기 동생 태우고 이러면 돼요? 안돼요? 즉시 실직당하지요. 쫓겨나겠지요. 주께서 주시는 모든 말씀은 내 욕구와 내 욕망과 내 소원을 실으려고 우리로 하여금 가마꾼 되게 한 게 아닙니다.
주께서 실으려고 하는 것은 언약입니다. 시작과 끝입니다. 시작도 언약으로 시작했고 끝도 언약으로 끝장낸다는 겁니다. 기준이 언약이라는 것,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 그걸 실으라고 우리를 가마꾼으로 삼은 거예요. 내 소원과 내 포부와 내 희망과 그런 것을 달라고 말씀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 강의에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모든 말씀은 성경 말씀과 모든 율법은 지금 우리가 히브리서9장하니까 모든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 속에 있는 은근히 내가 노리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끄집어내는 역할을 해요.
첫 번째, 역할은 내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 거죠. 욕망이죠. 왜냐 하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으니까. 내 욕심 내 죄를 끄집어내는 역할을 하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그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게 아니다 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약 올리기 작전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세 히브리서9장19절에 보면, 모세의 율법대로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 취하여 잡잖아요. 잡으면서 사람들이 그냥 잡는 게 아니에요. 이걸 잡으면 누구 죄가 사해진다? 우리 죄가 사해질 거라 했잖아요. 그게 땡 탈락이라니까요. 그게 바로 속에 들어있는 잘못된 생각, 자신도 미처 몰랐던 자신의 탐욕이었습니다.
제가 죄 용서 받는 것도 탐욕이라 하니까 여러분이 의아해하실 거예요. 그런데 의아해 하시면 제가 또 섭섭해요. 지금까지 제가 강의한 게 중요한 걸 이야기했는데 금방 몇 초 만에 다 잊어버렸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주신 것은 뭐를 끄집어내려했습니까? 시작과 끝을 심어달라는데 우리는 갑자기 내 죄를 용서받겠습니까, 이게 나왔으니까 이게 안 맞다 말이죠. 우리가 은근히 내 죄 용서받아서 죄는 지어놓고 헤헤 거리면서 나 죄 없다, 라는 것을 은근히 고대했던 욕망이 우리 속에 있었던 거예요.
그것이 죄의 자체로서 들추어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말씀을 주시고 그 다음에 그게 아니다, 라는 거예요. 그게 아닌 거예요. 그럼 그게 아닌 게 뭐냐, 그게 아닌 것을 로마서1장에서는 이걸 가지고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관계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쉬는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소유의 대상이 안 된다고. 만약에 하나님의 의가 소유의 대상이 돼버리면 이리 돼요. “내가 하나님의 의를 알았는데 염치불구하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 이걸 가지고 마음껏 찬양하고 영광 돌리고 감사해야 내가 성도된 마땅한 도리이지.” 요런 오해를 하는 거예요. 이런 오해를.
그러면 처음에 강의할 때부터 뭐했습니까? 시작과 끝이 날아가 버리고 나는 이렇게 구원받았습니다. 가 튀어나와버렸다 말이죠. “나는 이렇게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것은 사실은 처음부터 우리는 뭐를 무시하느냐 하면, 죄 지을 당시의 아담의 속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거와 똑같은 거예요. 아담이 선악과 따 먹기 직전의 사고방식이 뭡니까? 이걸 먹으면 어떻게 된다? 내가 뭐가 된다? 신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아담이 선악과 따 먹을 때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나만 잘되면 되는 거예요. 나만 잘되면.
그런데 제가 강의 처음부터 할 때 뭐라고 했던가요?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을 이야기하지 내가 잘되는 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시편105편16~19절 보겠습니다.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 하였도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19절입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그 다음에 뭡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 까지죠. 그러면 요셉이 자기가 감옥소 내려가고 꿈을 꾸고 남의 총무 대신하는 것 자기 뜻입니까? 누구 뜻이에요? 자기 뜻 아니지요. 자기 뜻 아니거든요.
요셉은 수시로 이야기했어요. “주여, 제가 왜 이런 팔자입니까? 내가 이렇게 억울한 일 당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너무 억울합니다.” 수시로 이야기했어요. 요셉도 나중에 알았어요. 지금 나는 억울합니다, 를 풀어주려고 하나님께서 일을 벌인 게 아닌 거예요. 니가 억울한 건 관심 밖이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이 요셉보다 더 세요. 말씀이 먼저 있고 말씀에 맞추라고 요셉이 이 땅에 출생하고 꿈을 꾸게 된 거예요. 요셉이 꿈꾸고 싶어서 연습하고 그런 게 아닙니다. 요셉이 꿈 되도록 하기 위해서 꿈을 연습하면 되겠네요. 낮에 이렇게 해서 밤에 안자고 그대로 해서 자게 되면 그게 영상이 되어서 떠올라 꿈이다! 이렇게 우길 수도 있는 문제고. 그게 최면술인데.
말씀에 응하게 되기 위해서 요셉은 본인은 원치 않는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요셉에게 주어진 것이 야곱언약이거든요. 자, 언약을 설명합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언약에 담겨있는 시작과 끝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을, 언약을 주신 사람을 활용하겠다는 것이 언약의 취지입니다.
노아한테 무엇이 주어졌습니까? 언약이 주어졌지요. 언약을 주시니까 언약에는 무엇이 들어있다? 시작과 끝이 있지요. 시작과 끝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아를 선택했고 노아는 그로 말미암아 말씀이 응하기 위해서 노아는 남이 안하는 짓을 해요. 뭐냐 하면, 아무 쓰잘데기 없는 방주를 만든다니까요. 방주를. 배를 만들어요. 훤한데 배를 만들고 있다 말이죠. 미쳤어요. 미쳤어.
그런데 노아만 미치면 안돼요. 노아랑 우리가 같이 미쳐야 돼요. 노아라는 나라에 합류가 됩니다. 안 미치면 합류가 안돼요.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이런 일을 했지. 니는 뭐했노 이 말이죠.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나그네 길을 갔지. 그 뒤에 추임새를 다세요. 니는 뭐했나?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임을 거절하고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즐거워했다. 그 뒤에다가 추임새를 붙여야 돼요. 얼~쑤 이런 거 말고 지금 나는 뭐하고 있지?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톱에 켜는, 돌아 맞는 고난을 당했다. 그 뒤 추임새가 뭡니까? 나는 뭐지? 나에게 준 말씀은 뭐냐 이 말이죠. 그럼 말씀은 뭐겠어요? 시작과 끝이지요.
먹든지 마시던지 우리는 뭘 보여주면 됩니까? 시작과 끝을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남편인데 아내가 라면을 끓인다면 우리 집은 반대가 됐지만, 라면은 내가 끓여요. 만약에 남편이 언약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런데 아내가 라면 끓이다가 연속극 보다가 그만 라면이 퍼졌다. 그러면 어지간한 남편 같으면 라면도 제대로 못 끓인다고 하다가 울컥 나오려고 하다가 “그래, 세상 끝 날에 라면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괜찮아 여보.” 이렇게 될 때 그 남편은 시작과 끝을 보이는 겁니다. 그럴 때 내 훌륭한 게 아니고 말씀이 응하게 하는 거예요. 그게. 그게 언약대로 사는 거예요.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지만, 우리는 라면 불었다고 탓하지 않는 구박하지 않는 그런 식으로 나름대로 방주를 만드는 거예요. 그럼 아내가 “별나다. 평소 살면서 그런 소리 한 적이 없는데. 잔소리꾼이 그런 소리를 왜 하지?” 하고 물으면 “내가 곧 시작과 끝이거든.” 그러면 아내가 “교회 갔다가 미쳤구먼.”하지요. 걸어 다닐 때 그냥 다니는 것이 아니고 시작과 끝이 걸어 다니는 거예요.
비가 온다. 비가와도 끝나면 의미 없는 걸. 바람 분다. 바람 불면 날려 죽겠지. 죽으면 죽는 거지. 이런 식으로. 별 의미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거예요. 그걸 제가 어느 설교할 때 사도바울의 여유 또는 자신감이라고 했습니다. 지지난주 설교였는데. 사도바울은 어떤 자신감이 있었는데 얼마나 자신감이 있었으면 너희는 잘됐고 나는 쓰레기가 되었다고 하겠어요. 그래, 너희는 잘되고 우리는 쓰레기 될게. 잡초 될게 너희는 잘돼라, 잡초 될게. 기꺼이. 도대체 이러한 배포 이러한 여유만만, 이런 당당함, 그거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시작과 끝을 품고 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비전 품지 마시고 시작과 끝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비전 품고 실망하지 마시고.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속에 그런 과정을 할 때 일단은 내 속에 있는 나의 은근히 노리는 것, 은근한 맛을 들추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시키는 대로 해보면 그 시킨 대로 했다고 우리는 값을 해요. “주여, 이거하는데 시키는 대로 하는데 힘들어죽겠습니다.” 전도 좀 했다고 “아이고, 오늘 전도 했으니까 큰일 주의 일 했으니까 오늘 고스톱 쳐도 되겠지” 10원뱅이 한 번 쳐도 되겠지. 이런 식으로. 꼭 이렇게 착한 일한 게 우리한테 막대한 피곤함을 줘요.
우리는 나쁜 짓하면 피곤함을 모르지만, 되지도 않는 착한 일을 하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그야말로 상스런 말이지만, 경상도 말로 주둥이가 한 다발 나와요. 딸한테 명절날 지짐이 하라고 시켜보세요. 그 지짐 다 궂고 난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입이 한 다발 나오지요. 했다. 씨~ 이러고 있지요. 그것처럼 우리가 꼭 그런 식이에요. 무익한 종이 할 바를 했습니다.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고. 자, 내가 이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이제는 내 원하는 것을 줘야지요. 꼭 이렇게 당당하게 손 내밀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뭔가 열심히 한다는 것은 꿍꿍이속이 따로 있어요. 열심히 하게 되면 진작 내가 노리는 것을 하나님이 설마 양심이 있겠지. 설마 내 일을 수월하게 도와주겠지. 흥정하는 심리가 있어요. 그게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20절에 봅시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언약의 피. 언약의 그 다음 뭡니까? 피지요. 노아는 언약의 방주 만들었지요. 그런데 마지막 때에 율법의 완성에 보면, 언약을 짜면 방주가 나오겠어요? 방주는 노아 때고. 뭐가 나오겠습니까? 찍 짜면? 낯선 피. 그냥 피가 아니고 낯선 피지요. 하나님의 피 입니다. 하나님이 피를 줄 생각은 하지도 못했지요. 하나님의 피가 아니면 우리의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자살 100번 해도 소용없습니다. 천 번해도 구원 못 받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있어야 돼요.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죄를 끄집어내는 그 작업을 하나님이 해내지 우리가 스스로 반성한다고 내 죄가 나오지를 않아요.
우리는 우리의 죄의 끝장을 모릅니다. 끝까지 죄를 지어도 우리의 죄의 끝을 몰라요.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짧고요, 세상 경험이 적어서 그래요. 인생을 다 안 살아봐서 몰라요. 우리는 죄를 기껏 지어도 90년밖에 못 짓잖아요. 아, 아까워라. 100살까지 살면 100살까지 죄 지을 건데. 그 만큼 10년 동안 죄를 못 지은 게 돼서 죄를 몰라요. 죄를 유일하게 아시는 분은 주님이기 때문에 그 죄를 씻는 방법도 유일하게 아시는 분이 주님밖에 몰라요. 그래서 잔소리해서 죄를 씻어주는 게 아니고 니가 모르는 죄의 마지막을 내가 아니까 그 죄를 씻는 것은 어떤 방법이다? 니 피가 아니고 내 피 만이 너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피가 나도록 무릎 꿇고 앉아서 만약에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면 이건 우리가 힘들긴 하지만 할 수 있는 거예요. 꿇어앉아서 하면 되니까. 십일조해서 용서 받을 거 같으면 이것은 할 수 있어요. 십의 구는 내거니까 남는 거니까 십분의 일만 투자하면 되니까. 그런데 아무리 해도 우리의 죄가 용서가 안돼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게 언약입니다.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언약 안에 뭐가 들어있다고 했습니까? 시작과 끝이 있지요. 우리한테 주어진 끝이지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주어진 것은 절망이에요. 끝입니다. 선악과 밑에 양과 염소 없습니다. 따먹었다. 끝났어요. 정녕 죽으리라, 끝났어요.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나한테 조치는 없습니다. 끝났습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헌금하고 소용없어요. 그거해서 죄 용서 될 거 같으면 진작에 전도하고 선교하라 했을 거예요. 안돼요. 어떤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도 우리의 죄를 씻어낼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쪽에서는 끄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럼 뭐하면 됩니까? 우리는 안 된다는 것, 끝이라는 것, 그것만 보여주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칠 때, 항상 끝장에 있는 사람들을 고쳤지요. 누구냐 하면 바로 강도, 그리고 38년 된 병자, 날 때부터 소경된 자, 죽은 지 이미 나흘 된 사람, 그리고 회당자의 아들이나 과부의 아들 같으면 죽어서 이미 장례 치르고 있는 가운데 애는 죽는 게 아니고 잔다. 그리고 도저히 못 고친 중풍병자, 이런 사람들 주님의 그 모든 일을 하시면서 주께서 겸해서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뭐냐 하면 니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이 산을 들어서 바다에 빠져라하면 빠졌을 것이라는 것은 결국 이것은 뭡니까? 우리는 할 수 있다, 못한다? 우리는 못하지요.
그러니 못 함을 믿어라 이 말이죠. 니 끝을 믿고 니 절망을 믿어라 말이죠. 내가 나한테 할 수 있는 것은 일체 없음을 믿어라 말이죠. 그것 때문에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을 준 이유는 율법이 옴으로 말미암아 우리한테 모든 입을 막고 우리를 뭐하려 함이라? 저주아래 두게 하심이라. 저주아래 둘 때, 그 저주가 우리의 참다운 현실이에요. 다른 현실 찾지 마세요. 저주만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현실입니다. 저주만이.
이제 성도가 됐으면 그 저주를 우리는 자랑하지요. 저주 받음을 자랑하지요. 미장원에 가거든 저주 받음을 자랑하세요. 아, 머리 너무 잘 나왔네. 저주 받았어. 정말. 이렇게 이쁘게 저주받을 줄은 몰랐지. 식당에 가거든 맛있는 음식이 나왔을 때는 그 요리사 부르고 그 주인보고 마음껏 자랑하세요. 아, 오늘 음식 맛 너무 맛있어요. 오늘 두 그릇 먹었어요. 세상에 이런 저주가 다 있다니. 이렇게. 이 음식을 안 해줘도 괜찮고 머리를 다 태워도 괜찮은데 왜 이리 머리가 잘 나왔느냐 이 말이에요. 반드시 저주를 깔아놓고 왜 저주 받을 나에게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떡볶이를 해주셨습니까? 고맙습니다. 그런 말을 해야 된다 말이죠. 그게 우리가 해야 될 성도가 해야 될 일입니다. 항상 끝이 있어야 돼요. 끝을 두고 있을 때 그러면 끝인데 뭔가 생기잖아요.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 줄 알아요? 그것은 시작하시는 분의 은혜지요.
끝이라는 쟁반에다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굵은 후지, 맛있는 사과를 주는 거예요. 쟁반에다가 뿅하더니만 아무것도 없는 쟁반에 뿅하면서 거기서 사과가 생기면 그 사과는 은혜지요. 어제 죽어야 되는데 뿅하니까 오늘 살아 있잖아요. 지금 살아 보고 있잖아요. 그러니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은혜라는 거예요. 이게.
그렇다면 우리는 뭡니까? 우리 안에 어제 죽어야 되는데 오늘 살았으니까 끝과 시작을, 시작하신 분은 주님이니까 우리는 공유하면서 이 땅에서 특이한 존재로 신앙인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힘으로 능력으로 되지를 않고 바로 율법의 완성으로 되는 겁니다.
자, 오늘 여기까지 한 거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리면, 모세가 율법대로 송아지 염소의 피를 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율법은 지키라고 한 것이냐,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느냐, 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끝을 보는 겁니다.
끝이 뭐냐 피거든요. 피를 찍어 바르면 효과 보느냐, 아니에요. 피는 끝을 의미하기 때문에 피를 찍어 발라서 효과 보는 게 아니고 피라 하는 것은 그 끝이라는 사건에 참여된 사람은 주님과 더불어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피를 생각할 때는 나의 끝장을 십자가 피에서 확인해주시면 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살았건 인생이 어떻게 되었건 관계없이 나는 이미 내 인생은 끝났고 시작이 누구부터 시작했다? 주님이 시작했으니까 내가 날 때부터 주님의 인생으로 살아왔지 사실은 내 인생은 이미 주님의 인생 앞에서 끝났다, 라는 사실을 우리가 보여주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피라는 것의 의미에 담겨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다음 문제 봅시다. 그럼 염소의 피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염소의 피로 구원하면 되는데 왜 오늘 우리보고는 염소 잡으라고 왜 이야기를 안 하지요? 왜 소 잡으라고 이야기를 안 하지요? 여러분이 아는 상식에 의하면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시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염소의 피나 소의 피는 필요 없이 누구의 피면된다? 예수의 피면된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알고 있잖아요. 예수님의 피면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염소의 피나 예수님의 피나 일단 내 피는 아니잖아요. 내 피는 아니지요. 내 피가 아니면 타인의 피잖아요. 송아지도 마찬가지고 염소도 마찬가지고. 타인의 피가 어떻게 내 속에 들어오지요? 주님의 피가 들어오려면 그게 개울가가 되어가지고 밑바닥으로 해서 스며듭니까? 스폰지처럼. 어떻게 되지요?
여기 22절에 봅시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했지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할 때에 이 현장에 우리가 빠집시다. 그러면 해결돼요. 예수님이 피 흘리고 있습니다. 주여, 이 피를 받으소서. 할 때 우리가 근처에 이렇게 팔짱끼고 이리 앉아있으면 피 흘리기만 해봐라. 얼른 찍어서 몸에 발라야지. 이러면 내가 피 근처에 살아있는 존재가 되잖아요.
따라서 예수님의 피 흘리는 그 사함의 역사가 올 때는 아무도 그 근처 거기에 관찰하거나 그걸 지켜볼 수 있는 위인은 아무도 없어요.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만이 그 현장을 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아버지지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것은 아버지하고 예수님하고의 문제 돼요. 우리는 그 근처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도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그 권역에 포함이 안 된다 말이죠.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서 예수님이 지신 죄가 용서가 되어버려요. 누구한테? 아버지에게만. 하지만 그것을 적용하려고 우리가 그 근처 얼쩡거리지 마세요. 우리는 거기에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죄 용서 하고 안 하고는 우리의 요청에 따라 용서해 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본인 의사에 따라서 본인의 자기 권한이라니까요. 용서가. 자기 공로잖아요. 자기 공로.
예를 들면 밤나무에서 밤이 떨어졌는데 아침에 어떤 아주머니께서 일찍 와가지고 밤나무의 밤을 몽땅 땄어요. 따서 갖고 있어요. 뒤늦게 일어나가지고 다라 들고 대야 들고 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한 아주머니가 이미 다 따고 있거든요. 그러면 그 밤 좀 주세요. 라고는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주고 안 주고는 누구 마음입니까? 그것은 먼저 딴 사람 마음이지 그거 안 준다고 이 욕심 많은 것, 멱살 들고 할 수 없잖아요.
죄 사함은요, 죄 사함의 현장에 모든 인간은 나가 있어라. 왜? 끝이니까. 절망이니까. 죄 지어놓고 어느 뻔뻔스럽게 용서해 달라,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소리지요. 죄 지어놓고 죄 용서해 달라는 그게 죄입니다. 죄 지었으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가만히 꿇어 앉아있어야지 어디 뻔뻔스럽게 죄 지어놓고 “죄 지은 건 미안한데요, 용서해 주세요.” “니 언제 봤다고?” 성경에 보면 니가 원한다고 죄 용서해주는 것도 아니고 달음박질한다고 열심히 애쓴다고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만 긍휼을 입는다고 되어있어요.
그게 출애굽기33장19절에 나와요. 나는 은혜줄자에게만 은혜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만 긍휼히 여겨주고 밤 주고 싶은 사람만 밤 주고 대추 줄 사람에게만 대추주고 이건 오야 마음대로에요. 이건 달라고 해서 주는 게 아닙니다. 결과입니다. 그러니 회개의 반대말이 반성입니다. 반성은 하나님께 “이래도 안 줘” 라고 악을 쓰면서 자기 낮추는 걸 자기반성이라 해요. 그게 누가 전문인가 하면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 전문가였어요. 예수님이 죄인들하고 술 잡수러가고 밥먹으러갈 때 저희들은 뭐하는가 하면 “부족합니다.” 이거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고난주간에 잘 먹고 있었거든요. 왜 너희 선생은 왜 고난 안하느냐, 왜 금식 안하느냐 하니까 나는 의임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부족합니다. 이게 뭐에 속한다? 죄에요.
다시 하겠습니다. 요셉이 총무 되려고 꿈꿨습니까? 아니지요. 요셉이 요 코스로 가면 나중에 2인자 될까 해서 일부러 교도소 들어갔습니까? 아니지요. 그걸 가지고 뭐라 했어요. 말씀이 응하기까지. 우리가 구원 받는 것, 우리의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요청이 아니었고 말씀이 응해서 용서받은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양20150213a-히9장19절(죄사함) - 이 근호 목사.hwp (32.5K), Dow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