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사랑의 충돌
법 위에 있는 사랑 (죽음보다 강한 사랑)법과 사랑의 충돌지난 주에 부자가 거시나사로를 자기 다섯 형제에게 가서 여기 오지 말라고 안티 지옥 운동을 펼쳐 줄 것을 요청함을 배웠습니다. 안티 지옥 운동을 펼친다고 자동적으로 천국 메시지인가요? 절대 그렇지가 않지요. 마귀가 오히려 천국을 증거합니다. 그 내막은 마귀의 선물에 잘 나와 있습니다.(마 4장). 부자가 그 마귀의 사고방식과 똑같이 안티 지옥 운동을 펼칩니다. 유대인의 모든 사고방식이 이 부자의 생각입니다. 선지자를 자꾸 보내면 언젠가는 돌아온다는 구약에 나타난 돌아옴 사상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을 채우기 위해서 지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지옥을 만드신 분입니다. 어떤 자를 채우냐를 이 천국 비유를 통해서도 언급하시는 겁니다.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여전히 땅에서 보던 시각으로 봅니다. 그래서 감히 나사로님에게 오라가라 요청합니다. 종교성에 눈 뜬지는 몰라도 믿음은 아닙니다. 나사로를 보는 눈이 변하지 않았거든요. 나사로를 볼 생각 조차 없습니다. 또 볼 수도 없습니다. 아브라함 곧 믿음의 조상 품에 쏘옥 안겨져 숨어있고, 은폐 되어 있습니다. 감추인 보화처럼 말이죠. 그러니 지옥 속에서 회개합니다. 제발 지옥 오지 말라고 외쳐 주세요. 여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 가능성 가치성 속에서 인간의 믿음은 생성(만들어) 되어 집니다 아주 의아한 것은 아브라함이 부자를 놀리는 듯. 안될걸 아마 안되는뎅. 안되지. 라고 소망의 말 한마디 조차 건내주질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마귀에게 욥 아무리 건드려도 안될걸 이라고 놀리듯 시비걸 듯 말이지요). 그러니까 지옥이겠죠. 그 지옥을 미리 앞당겨 안 자가 거지 나사로 였습니다. 그는 고난 받았다는 겁니다. 즉 인생이란 심판 속에서 그는 모든 것을 손 놓고 고난 속에서 주를 바랬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일방적인 변증입니다.(욥이 알 수 없는 고난 속에서 미래에 올 그리스도를 고난 속에 심판 속에 처함으로 그리스도를 소망하듯 말이지요. 허무 속에서 무지함 속에서 지혜를 바라보는 겁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래의 예수님(변증자)을 붙이시는 방식입니다.)그러나 아브라함은 너 부자는 심판을 미리 앞당겨 고난 속에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변증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유일한 것은 자기 지키기(믿음)를 지옥의 불 속에서 시도합니다. 자기 형제 지키기. 왜? 건져낼 자가, 변증할 자가 아무도 없기에 자기가 나서고픈 겁니다. 보호자에게서 결정된다는 것이겠죠. 변증자에게서 결정될 사항임을 여전히 무시하는 거지요.이것은 곧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자기부인을 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당연합니다 부자가 지금 자기 창고 늘릴 생각 뿐이지 미쳤다고 십자가를 집니까? 오늘날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 받기 바쁘고 성화 되기 바쁘고 새생명의 삶을 살기 바쁜데 미쳤다고 십자가를 져요? 그러니까 지옥에 온 게 당연하다는 겁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원리가 있다니 우리는 특히 교인들은 절대 용납 못할 해석이지요. 그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법을 발전 시킵니다. 완벽한 법(교리, 신학)이 만들어지면 그것이 유일한 지옥 안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완성 되었다고 신약에서 배웠으니 거기에 견줄만한 또 다른 법적인 것을 찾아냅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성화와, 새 생명의 삶 입니다. 이것이 그만 법이 되어 자기 지키기와(믿음), 발전을 시도하는 겁니다. 부자의 메시지가 바로 그겁니다. 선지자를 보내면 된다는 겁니다. 선지자 말 듣는 길이 유일한 방법이겠지요. 그래서 실로암 댐 폭파 사건 때에 사람들은 소경의 메시지 보다, 소경의 메시지 기쁜 소식을 여전히 무시하듯, 모세(율법의 대표)의 제자들과 같이 법을 절대로 떠나지 않는 겁니다. 선민인데 떠날 수 없지요.오늘 이 부자의 사고방식이 이 땅의 우리들에게 어떻게 깔려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참고로 부자와 거지나사로 비유도 마찬가지이지만, 여기 간음한 여인 소송 사건 또한 욥기의 내용과 연관해서 보시면 됩니다. 이번 수련회 첫 번째 강의이니까 꼭 들어보세요.)요 8장에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어떤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그들(바리새인)에게서의 간음한 여인은 노리개입니다. 돌로 쳐죽여 마땅한데 더 재미있는 꺼리가 생긴 겁니다. 마침 눈 앞에 아른 거리는 예수의 무리들 앞에 이 노리개를 예수님은 어떻게 다룰까 라는 호기심이 빗발치니 올무를 아니 던질수 없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지요? 기가막힌 예수 이단 만들기 방법이 여기에 숨어 있는 겁니다. 마치 마귀가 하나님에게 욥도 별수 없을 껄요 라고 하나님의 변증을 무가치, 무효화 시키듯 말이지요.(욥 1:7) 『그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물었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땅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욥 1:8)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처럼 진실하고 정직하며 나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욥 1:9) 『`욥이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데는 어찌 이유가 없겠습니까?』(욥 1:10) 『주께서는 항상 그와 그 가정과 그의 재산을 보호하고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축복해 주셔서 그의 가축이 온 땅을 덮을 만큼 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욥 1:11) 『그러나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한번 빼앗아 보십시오. 그러면 당장 그가 정면으로 주를 저주할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편에 서서 저 바알 신이 씌여진 (마 12:24) 예수라는 사탄을 간음한 여인이라는 노리개를 통해서 시비를 걸어 옵니다. 그들의 당당함(믿음)은 모세의 제자라는 의식처럼 법 곧 율법을 쥐고 있기에(하만) 눈에 비이는 것이 없는 겁니다.그러나 주님은 그 간음한 여인을 구원의 조건을 이러함을 말하는 도구로써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지자로 삼아 버립니다. 어떤 선지자요? 예수님이 몰고온 세계와 저들 율법을 쥐고 있는 자들의 세계가 다름을 보여주는 선지자 말이죠. 즉 구약의 참선지자들의 맥락과 같은 계열로 삼는 겁니다. 에이 설마요? 증거를 대세요? 율법의 송사 앞에 어떤 누구도 설 자 없습니다. 율법의 가입은 모든 자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지금 죄인 주제에 서로 도토리 키 재듯 이 간음한 여자 보다는 낫다는 식으로 바리새인이 간음한 여인을 들이내미는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죄성을 들추어 내고자 간음한 여인을 선지자로 삼아서 그들의 모든 죄상을 들추어 냅니다. 선지자란 이스라엘의 심판을 미리 자기가 앞당겨 받음으로 불 속 곧 저주의 심판 속에서 외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간음한 여인은 언제 외쳤나요? 지금 예수님의 도구 로써 말 한마디 뻥긋 안함으로 외칩니다. 마치 거지 나사로가 부자의 모든 죄성을 들추어 내듯 말이지요. 사랑을 받게 되면 주위의 시샘을 발전하면 미움을 독차지 하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 누가 더 사랑 받나, 사랑받기 싸움이 일어나지요. 거지 나사로가 사랑받아 아브라함 품에 있는 것을 보니, 난 실패 했지만 다섯 동생들은 사랑받도록 성화 새생명의 삶 회개 믿음 소망 사랑 하면 된다고 부자는 보고 있듯 말입니다. 주체자가 빠져있고 자기들끼리 사랑받기 작전을 펼치면 된다고 보는 거지요. 그래서 성화론자들이 불쌍해 보입니다 새 생명의 삶을 주장하는 자들이 불쌍합니다. 왜냐 과거의 우리 모습이거든요. 자 예수님은 선지자 곧 간음한 여인을 앞장 세워 세상을 두 조각 냅니다.(실로암 댐의 소경이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말이지요). 간음한 여인도 선지자 실로암 소경도 선지자 거지 나사로도 선지자. 그들에게 붙이는 이 선지자라는 말이 신학도들에게 무지 거슬리게 들리실껍니다. 신학적으로 맞을 리가 없거든요 성경적이 아니니깐요. 적 적 적. 제가 증인이라고 고치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싫네요.자 지금 두 세계가 다름을 밝혀 버립니다. 이 간음한 여인을 통해서 마치 욥처럼 마귀와 하나님의 내기에 중간에 끼인 마귀도 욥을 미끼로 삼아 하나님께 대적하고, 하나님도 욥을 미끼로 삼아 자신의 지혜(욥의 의인 됨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거 오해 말기를)를 펼치십니다. 욥이 겪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자신의 지혜 곧 예수님의 지혜를 감추어 둡니다.저번에 말한 솔로몬의 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재판관이 가짜 어미의 말대로 진짜로 아이를 두 조각 내라고 합니다. 가짜 어미는 좋아라 박수를 쳤지요 쳤지요. 쳤어. 짝짝짝. 이상하지요 도대체 누구 편인가요? 두 조각 날 아이처럼 욥도 여기서도 차이는 공, 저기서도 차이는 공, 욥은 그야말로 죽음 속에, 알 수 없는 고난 속에 놓입니다. 철저하게 잃어버림을 무가치한 무시의 대상이 됩니다. 수에 칠 가치가 없는 인생처럼. 그 모습처럼 간음한 여인이 하나님의 지혜에 딱 포착이 된 겁니다. 우리는 간음한 여인을 윤리적 시각에서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너머의 시각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늘 걸림이 되는 지혜인 겁니다. 분명 마귀는 욥을 하나님께 대한 도전장으로 (그거 뭐라고 하지요 서양 카드 할때 돈 걸 때 플라스틱 그거) 하여튼 그거 걸고, 하나님도 욥을 통해 마귀의 도전을 유도하는 마치 시비 걸 듯 하시지요. 즉 그러니까 지금 바리새인이 예수님에게 시비 걸려고 간음한 여인을 미끼로 삼은 듯이 보이나, 실상은 바리새인이 예수님에게 딱 걸려 든겁니다. 푸하하하. 그것두 모르는 바보들. 함 이겨볼려구 용쓰는 거지요 용쓰는 것. 여기서 누가 이기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뭔가를 돌출 시킵니다.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큰, 아니 아니 아니 실수 실수 했네요. 수정합니다 더 어리석은 지혜를 예수님은 이 여인을 통해서 자신의 지혜를 만방에 떨치는 겁니다. 이긴 편에 달려 붙는 것은 우리의 본능이지만 이 예수님이 나타내시고자 하는 뜻을 알지 못하면 늘 예수 이용하기 밖에 안 될 껍니다. 평생 ~~~~~~~바리새인은 법이라는 그물망으로 예수님을 잡을려고 간음한 여인을 미끼로 사용합니다. 법은 최종적으로 선악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기에 행동으로 결정됩니다. 행위는 모든 법망을 빠져 못나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라는 사단을 잡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선함을 이 때에 유감없이 믿음으로 발휘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열심히 말이지요. 자 여기서 바리새인은 고수들이라서 악으로만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법을 제시합니다. 이래해도 악이되고 저래해도 악이되는 것이 무엇인가? 간음한 여인을 율법대로 돌로 치면 로마 법에 위배되고, 돌로 안치면 율법에 위배 되는 기가막힌 행위의 결과로 법망에 사로잡기 위함입니다. 참으로 기가막힌 법 적용 아닙니까? 이 모습 자체가 하나님 앞에선 얼마나 선한 모습 아닙니까? 다름 아닌 하나님의 법에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여서 거룩한 이스라엘 속에서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 썩은 가지 치기를 하듯 짤라내어야 한다는 겁니다. 제거를 해야지요 제거. 그래서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는 율법이라는 법 그물(의문의 증서)을 믿음으로 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여태껏 사람들에게 해오던 식으로 합니다. 자 저는 여기서 바리새인이 마냥 나쁜 놈으로 볼 것이 아니라 얼마나 숭고한 일심으로 일관된 모습을 지녔는가에 탐복을 하게 됩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진짜 대단합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질 않으니 자기 믿음에 빠져 저렇게 되었지만 우짜겠습니까 대단한 것은 대단한 건데요. 저런 영웅들이 한국 교회에 쫘악 포진해 있으니 이거 부딧치기 싫어도 안 부딧칠 수 없는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싸워 이기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욥처럼 박살 내시는 구나 라는 말입니다. 박살 나면 구원인가요? ㅋㅋㅋ 이게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인간들의 대표성인 유대인은 율법을 내려준 하나님에게로부터 율법을 받았는데, 정작 그 율법으로 하나님을 잡겠다고 하니 이게 어리석다 못한 인간의 최고의 지혜라고 지금 저렇게 예수님을 잡을려고 안달해 합니다. 참 기가막히는 노릇이지요.(우리가 여태껏 해왔던 신앙입니다.) 마귀가 욥의 무엇을 칩니까? 생명 빼놓고 다 칩니다. 그러면 당연히 원망한다는 거지요. 원망. 우리가 그 상황에 놓여져 있다고 생각 해 보세요. 누가 마귀 손에서 벗어납니까? 욥도 마찬가지 못 벗어납니다. 욥이 중요한게 아니라 하나님을 이겨 볼려고 지금 마귀는 욥을 잡는데 잡아 아예 죽일려고 잡습니다 잡아. 욥이 쥘 만한 것들 의지하고 기대고파 하는 것들 다 잡아버렸습니다. 바로 이 간음한 여인의 신세처럼 된 겁니다.지금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율법해석 저울에 자신이 놓여짐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래 마음껏 해봐라 (실컷 가지고 놀아라) 라는 식으로 저들의 도전에 말려 들어가 줍니다.(요 8:1) 『그러나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다.』(요 8:2)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이 다시 성전으로 오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앉아 그들을 가르치고 계시는데』(요 8: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하다가 잡힌 한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요 8:4) 『`선생님,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요 8:5) 『모세의 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다.』(요 8:6)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요 8:7) 『그래도 그들이 계속해서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일어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그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요 8:8) 『다시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엇인가 계속 쓰셨다.』바리새인은 어리석은 자들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를 잡을려면 둘 중에 다른 선택이 나 올 수 없도록 짜내고 짜낸 지혜 아닙니까? 부모 죄 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실로암 소경때의 버릇 어디 안갑니다.자 그런데 뭐 시시하게도 무슨 대단한 양사방으로 조여오는 쥐구멍 없는 튼튼하고 완벽한 그물망으로 포위가 될 줄 알았는데, 그물이 예수님을 잡기에는 너무나 작았습니다 손바닥 보다 작은 그물로 예수님을 잡을려고 했으니 말이지요.예수님은 간음한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우리 시각처럼 또는 바리새인의 시각처럼 보시질 않습니다. 오히려 오냐 잘 데리고 왔네 내가 새창조 하지 뭐 ! 허허허 이거 이거 얼마나 황당 합니까? 다시 말씀 드릴까요? 아무도 못고치는 소경 날 때부터 소경된 눈이 붙어버린 빛의 경험 전혀 없는 소경을 마치 바리새인은 "봐라 이 더러운 죄, 우리가 연구하고 기도하고, 중보기도하면 이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이런 죄인들 옆에 우리가 있기에 이들이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다. 괜히 사람들이 우리를 존경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며 나올때에, 예수님은 말리시면서, <뭘 연구하고, 기도하고, 중보기도, 회개하고, 선지자를 보내소서, 죽은자를 살려 믿게 하소서, 자꾸자꾸 선지자를 보내시면 언젠가는 돌아올 꺼다> 그런거 다 필요 없다. 다 때려 치워라. 내가 눈을 뜨게 해주지 뭐. 빛을 보도록 보여주지뭐. 왜? 내가 빛이니까. 라고 하시며 퉤퉤퉤 쭈물딱 쩍쩍 하니 실로암 못에서 쨘 하고 소경의 눈을 고치시니 ! 졸지에 누가 당황 스러우냐 하면 율법을 쥔 자들이 당황 스러워서 이 위기를 수습하고자 고작 내세우는 것이. 난 모세 제자다 어딜 까부노. 하고 소경을 쫏아내는 것입니다.예수님은 지금 과거를 물으러 온게 아니라 니 내 손에 죽었다 다시 살아나라 라고 하십니다. 내가 새로 창조 할게. 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과거의 행적을 쥐고 기준으로 삼아 저울질 하겠다고 빡빡 우깁니다. 그래 그래 과거가 아닌 소경처럼 과거가 아닌, 현장 바로 현재라면 지금 막 사고친 자는 과거일로 취급 못할걸? 지금 막 사고친 사고뭉치를 들이내밀면 예수님은 당황 할꺼야 !지금 예수님의 새창조 속에 관심은 추호도 없고 자기 육에서 나온 과거 현재 미래를 늘 의식하면서 자기가 자기를 창조하겠다고 우깁니다. 좀처럼 믿겨지지 않는 다는 겁니다.(사 53장 1절)앞으로 지을 죄를 마냥 다 염치 없이 주님께 다 해결해 달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염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철든 인간임을 주장하고파 성화도 하고 새생명의 삶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집니다. 때려 죽어도 못 사랑한다는 원수들이 더 많이 보입니다. 용서요? 용서는커녕 지금 돌로 쳐죽일려고 지금의 바리새인처럼 하나님 앞에 끌고 오는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 저 잘했지요 간음한 여인 현장검거하여 체포하여 잡아 왔습니다. 이쁘지요? 착하지요? 이런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좀먹는 자들입니다. 따끔하게 혼내세요.이게 우리 모습입니다. 입으로는 찬송하나 마음 속에는 악독이 가득한 우리 모습이다는 거지요.(눅 11: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마 15:8)(막 7: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약 3:10)자 이 현장에서 지금 막 따끈 따끈한 막쪄낸 죄인 우짜면 좋겠습니까? 참 하나님도 감사하시지 어떻게 우리 마음을 아시고 타이밍 죽이게끔 딱 맞도록 우리에게 들키도록 하셨노? 하나님도 역시 율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우리의 믿음으로 보시고 도와 주시는 구나.자 빼도박도 못하는 이 위기 아닌 위기에 주님은 말이 필요 없이 기냥 기냥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십니다. 무엇을 적었는지 우리는 무지 호기심이 발동합니다만 소경을 고칠 때에 그 진흙을 침으로 이겨서 덩어리 만든 것 기억하신다면 뭐 크게 기대 안하셔도 됩니다. 성경에서도 무슨 내용인지 안 알려 줬으면 알 필요 없는 겁니다.자 땅에 뭔가를 적으시고 예수님은 말씀 하십니다. (요 8:7) 『그래도 그들이 계속해서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일어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그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요 8:8) 『다시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엇인가 계속 쓰셨다.』죄없는 놈 먼저 돌을 던져라. 캬 ! 던져봐 던져 봐 던져보라니깐? 대려 대려봐? 쳐라 쳐 오히려 머리를 잘 맞도록 치라고 자꾸 들이댑니다. 쳐라 쳐? 왜 못 던지노? 던져보라니깐?그리고 또 바닥에 적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큼 맘 먹고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서 당당하게 사단의 무리를 잡을려고 하는데 이게 뭐가 잘못된 것인지 위기가 닥쳐서 당황하게 되었고, 당당한 쪽은 예수님입니다. 잡아봐 잡으라니깐 쳐라 쳐 쳐 보라니깐?이상하죠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다들 내뺍니까?(요 8:9)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둘씩 모두 가 버리고 예수님과 거기에 서 있는 여자만 남았다.』(요 8:10) 『예수님께서 일어나 그 여자에게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죄인 취급한 사람은 없느냐?' 하고 물으시자』(요 8:11) 『그녀는 `주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그렇다면 나도 너를 죄인 취급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요 8:12) 『후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받을 것이다.'』법을 들고온 자들 법 다 내팽개치고 뭡니까 이게? 도대체 무엇이 스쳐 지나갔길래? 보셨나요?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포착이 불가능 했는가요? 과거가 안통하던 소경 앞의 주님이, 지금 현장에서 잡혀온 간음한 여인 앞의 주님에게도 죄란 죽음이란 어두움이란 통하지 않는 겁니다. 유독 인간만이 자기 문제도 아니면서 심각하지요. 죄도 죽음도 어두움도 예수님의 숙제입니다.깔끔하게 숙제 하시고서 하는 말? 법 들고 온 자들 어디 갓노? 널 죄인 취급 한 자들 말이다. 어딧노? 여인이 고개를 들고 보니 어 ? 어디갔지? 아까 여기 다 있었는데? 어디있지예?니가 모르는데 내가 우찌 아노? 없는거 맞나? 네 없습니다.그럼 나도 너를 죄인 취급 안할란다. 너에 대한 의문의 증서 다 찢으마 어떤 누구도 너를 송사 못하도록 말이다. 간음한 여인 선지자는 돌삐 앞에서 그저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기에 바리새인 손에 죽어 마땅한데도 그 돌삐 든자를, 법 법 법대로 하자, 법을 든 자를 다 법버리고 도망치고 씨끌벅쩍한 그 재판장터가 그만 썰렁하게 되어 예수님과 여인 만이 남아 독대를 하게 됩니다.빛인 분이 그 율법의 저주에서 건져 주는 유일한 분임을. 그 빛의 긍휼이 아니면 어떤 누구도 날라오는 돌삐를 피할 수 없음을 말이지요.이 간음한 여인 선지자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도구로 쓰임 받는 겁니다.나에게 날라오던 수 많은 율법의 돌덩어리를 예수님이 대신 다 받으셨다고 말 없이 외치는 겁니다.(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욥은 거지나사로는 선지자들은 완벽한 자도 아니요 잘난 자도 아닙니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고난이 놓이게 되니 수많은 저주의 돌삐들이 날라옴을 통해서 졸지에 욥과 나사로 앞에서 그 날라오는 돌삐들을 대신 맞는 분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겁니다. 방패막이 되어 수 많은 저주의 화살을 대신 맞는 저 분이 누구인가를 알고 그 분이 누구이신지 사귐을 가지며 그 품 속으로 들어가서 그가 이룬 법의 세상이 아닌 긍휼의 세계로 옮기움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나 대신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지셨소 라고 증거합니다. 이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부자는 여전히 못 믿어서 자꾸 선지자를 보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자의 믿음은 절대 지옥 오지말라고 교회를 세우고, 죽었다 살아난 부활의 체험 경험들을 모르고, 회개꺼리를 만들고, 수 많은 선지자를 배출해 내는데 열심을 다 한다 해도 주님의 비밀은 감추어져서 못알아보는 겁니다..이미 이 땅에 있는 선지자의 모습이 바로 예수 잘 믿는 자들에게 교회들에게 정죄 당하는 바로 저 간음한 여인의 모습처럼 늘 무가치한 모습, 무시해도 아무도 변호하지 않는 자가 이 땅에 포진해 있는 선지자인 줄 누가 알겠습니까? 누가 십자가의 강도의 말에 귀를 귀울일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가 선지자인줄 눈치 채는 자가 없는데......예수님! 왜 주님의 선지자들은 머리 둘곳 없는 지요? 왜 거짓 증거자들은 비기(보기) 싫어도 늘 눈에 따라 댕기는지요? 도대체 주님의 선지자는 코빽이도 안보이고, 부자가 깔아놓은 삯꾼들만 눈에 넘쳐나는지요? 주님의 세계가 이렇게 철저하게 감추어진 상태로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는 그 길로 그 곳에 그 모습으로 묵묵히 십자가 지고 가는 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다 간음한 여인과 같은데 왜 우리는 또 법을 쥐고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웅도 헛것이거늘 법을 쥐면 뭔가 안심이 되는 보호막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남을 죽이게 합니다. 목사가 되면 주님의 사랑을 널리널리 증거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목사가 되니 나의 편이 안되어주면 왠지 밉고 싫고 돌삐로 치고 싶어져 그 자를 교회에서 왕따 시켜 버립니다. 왜 우리의 목사들은 이렇게 변했는지요? 위선자요? 자존심만 내세울 뿐이요. 정치가로 전락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이 대신 돌삐를 맞지 않아서 그들에게는 아브라함 품 속의 나사로를 대신 변증하는 아브라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오히려 눈에 보이는 교회가 방패가 되었고, 그 속의 정치꾼들을 자기 방패로 삼았기에 그러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방패들이 있다면 다 버리도록 하시고, 오로지 이 눈에 아무증거 아니보여도, 눈에 안 보이는 주님만이 나의 방패가 되어 그 품 속에만 인도 받게 하소서. 사람들을 방패로 삼지 않도록 하소서. 그런 어리석은 목사가 너무 많이 있어서 안타깝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토록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단어 이제 생각 났네요 배팅 돈을 거는 것 배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