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단의 의미 150225
제단의 의미 150225
이름 : 이근호(IP:119.18.83.91)
제단의 의미(에스겔 43:13-17)
이근호
15-02-25 22:17
제단의 의미
2015년 2월 25일 본문 말씀: 에스겔 43:13-17
(43:13) 제단의 척수는 이러하니라 (한 자는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넓이가 더한 것이라) 제단 밑받침의 고가 일 척이요 그 사면 가장자리의 광이 일 척이며 그 가으로 둘린 턱의 광이 한 뼘이니 이는 제단 밑받침이요
(43:14) 이 땅에 닿은 밑받침 면에서 아랫층의 고가 이 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광이 일 척이며 이 아랫층 면에서 이층의 고가 사 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광이 일 척이며
(43:15) 그 번제단 윗층의 고가 사 척이며 그 번제하는 바닥에서 솟은 뿔이 넷이며
(43:16) 그 번제하는 바닥의 장이 십이 척이요 광이 십이 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43:17) 그 아랫층의 장이 십사 척이요 광이 십사 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그 밑받침에 둘린 턱의 광이 반 척이며 그 가장자리의 광이 일 척이니라 그 층계는 동을 향하게 할지니라
제단은 곧 번제단을 의미합니다. 번제단은 단순한 제단이 아니라 용도가 확실하게 있습니다. 아침, 저녁 쉬지도 않고 매일같이 그곳에서 제물들이 불태워집니다. 측량적 의미가 가미된 제단의 등장은 모세 때부터입니다. 정확한 치수와 규격에 맞추어야 제작되어야 될 제단은 이미 그 원형이 하나님쪽에 있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본 번제단의 규격은 시내산을 내려와서 지상에서 그대로 만들어집니다. 이로서 제단의 규격화란 곧 인간들의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단은 모세의 번제단의 최종 완성된 상태를 뜻합니다. 천사에 의해서 측량이 진행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더 이상의 제단이나 성전을 기대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의 일환으로 제단도 나타나고 성전을 세워지는 겁니다. 따라서 제단의 치수에는 확정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치수 측량이 가능하다는 말은 곧 제단이 물체이며 사물이다 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물체성으로 인하여 그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에 오해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사람들이기에 얼마든지 사물이나 물체를 기계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루짐에 의해서 본인들이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도 가능하고 그리고 죄용서받았다고 여긴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곡해요 오해였던 것입니다. 과연 동물 제물이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재료가 되느냐 하는 겁니다.
동물을 잡는다고 해서 인간이 죄용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물 드림’이 원인이 되어 ‘인간의 죄 용서받음’이라는 결과로 이어지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동물 드리는 행위’마저 죄로 드러나서 죄를 증가시키고 죄들 속에 포함이 사항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제단이나 성전을 기계적으로 다룰 위치나 자격이 있지 아니합니다. 예를 들면 제단의 경우, 제 기능을 하려면 7일 동안 그 제단에 기름이나 피를 뿌려야 합니다. 출애굽기 29:36-37에 보면, “ 매일 수송아지 하나로 속죄하기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며 또 단을 위하여 깨끗케 하고 그것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라 네가 칠 일 동안 단을 위하여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라 그리하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리니 무릇 단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제단이 제단으로서 제 기능이 가능하려면, 그래서 실제적으로 죄용서의 효력을 내려면 7일 동안 기름과 피가 제단에 뿌려져야 한다는 겁니다. 에스겔 43:18로 이와 같은 취지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가 이러하니라”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규례대로 그들은 제단에다 기름과 피를 뿌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이 말씀에 의해서 멸망하고 맙니다. 어디서 잘못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율법의 완성’, 혹은 ‘말씀의 완성’에 대해서 자신들의 제사 드리는 죄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도 율법으로 시킨대로 그대로 했다고 자부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지만 그들의 손으로 행해진 것이 결코 율법의 완성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제단에 관한 완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11:51에 보면,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제단에서 피흘리는 일들을 대해서 예수님이 언급하십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선지자도 이 제단에서 피를 흘렸다는 겁니다. 당연히 ‘억울한 피’인 동시에 그 억울한 피만이 참된 말씀 완성과 관련된 피입니다. 곧 제단을 제단답게 만들어 유일하게 뿌려진 피는 ‘최종적으로 억울한 피’ 곧 예수님 피밖에 없습니다.
다른 피, 곧 동물의 피나 인간의 피는 아니됩니다. 제단이라는 이름의 사물과 물체는 피와 결합해서 점차 그 최종적 의미로 이끌림을 당하게 됩니다. 중간에는 억울한 선지자들의 피가 적셔지고 최종적으로 예수님의 피로서 제단은 그 완성형을 나타냅니다. 제단은 단순히 인간들이 바쳐진 동물의 제물을 태우는 곳이 아니라 왜 세상이 필히 심판받아야 하는지 그 원인을 밝혀내는 그런 제단이요 피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곧 제단으로서 죽으시고 제단으로서 부활하시므로서 모든 말씀을 다 이루신 분으로서 단면을 드러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고 있는 중에 구름을 타시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곧 ‘말씀 완성태’의 승천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올라가신 구름을 쳐다보니 천사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왜 쳐다보느냐”라고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제자들이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승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모든 말씀을 완성하셨기에 이제는 온 지구상, 곧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수님이 이루어놓으신 그 말씀 완성상태가 어떤 것인지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작업장으로 돌변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제단화’입니다.
이로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제단은 없습니다. 도리어 제단의 완성을 말하고, 완성을 보여주기 위해 인간들이 생겨나고 세상이 이어져온 것입니다. 즉 세상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대상이 되기 위해 꾸준히 죄를 짓는 존재들이 등장해야 하고 그래야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이 튀기는 불붙는 제단의 표면화가 되는 겁니다.
에스겔 6:5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제단으로부터 온 세상으로 추방시키신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이 흩어진 바로 그 ‘온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제단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6:9에 보면, “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음으로 밉상 받은 억울한 자의 피가 ‘제단의 완성화’의 일환으로 발생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생겨나는 모든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색출하여 마치 포도주에서 포도즙을 끝까지 짜내듯이 저주해 버리십니다.(계 14:17-20) 이러한 범죄와 저주는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이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인간으로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진 물체가 되고 사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유일하게 말씀을 준수한 인간은 예수님 뿐임을 증거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제단으로 다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2-27 07:08
127강-에스겔 43장 13-17절(제단의 의미)15022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3장 13절-17절입니다. 구약성경 1221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3:13-17
“제단의 척수는 이러하니라 (한 자는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넓이가 더한 것이라) 제단 밑받침의 고가 일 척이요 그 사면 가장자리의 광이 일 척이며 그 가으로 둘린 턱의 광이 한 뼘이니 이는 제단 밑받침이요이 땅에 닿은 밑받침 면에서 아랫층의 고가 이 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광이 일 척이며 이 아랫층 면에서 이층의 고가 사 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광이 일 척이며 그 번제단 윗층의 고가 사 척이며 그 번제하는 바닥에서 솟은 뿔이 넷이며 그 번제하는 바닥의 장이 십이 척이요 광이 십이 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그 아랫층의 장이 십사 척이요 광이 십사 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그 밑받침에 둘린 턱의 광이 반 척이며 그 가장자리의 광이 일 척이니라 그 층계는 동을 향하게 할지니라.”
방금 읽은 것은 제단의 척수에 대해서 이야기한 겁니다. 제단이라 했을 때 앞에 글자를 하나 붙이면 쉽게 됩니다. 번제단이라 하면 더 쉽습니다. 제단이라 하는 것은 그냥 절에 가면 있는 탑돌이하는 탑이 아니에요. 그 용도가 있어요. 탑돌이는 보라고 있는 것이고 사리 탑 같은 경우는 그 안에 사리가 들어 있는 것이지만 번제단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제물을 하늘을 향하여 태우는 장소가 번제단입니다. 이 번제단에 대해서 천사가 와서 측량을 해서 마지막 최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은 이런 식으로 확정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새성전 측량에 대해서 여러 번 설교를 했습니다만 이 제단이나 성전의 모든 측량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두고 이야기한다고 분명히 언급을 했습니다. 오늘 자세히 말씀드리면 그 말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제단이 측량이 된다는 것은 이것이 물체, 사물이라는 뜻이지요. 물체와 사물인데 이 물체와 사물이 장차 예수님이라는 인물과 연결이 되게 되어 있어요. 제단, 성전이라는 물체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보통 사람인데 그 사람하고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의 그 연결고리를 우리가 알아야 돼요. 안 그러면 굉장히 심한 오해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지금 이스라엘에서 새성전 짓겠다고 나서는 그것도 오해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스겔 새성전은 분명히 물체입니다. 사물, 건물이 있어요. 그러니까 측량이 가능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신약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었을 때 ‘물체덩어리가 어떻게 사람이 되지?’ 이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납득이 안 되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만 납득이 안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이 에스겔 43장을 죽 보면서도 우리도 납득이 안 된다면 우리 앞에 예수님 나타나면 우리도 예수님을 또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버려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 성전과 예수님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이 돼야 되는 겁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18절에 보면, “인자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가 이러하니라.”라고 피를 뿌리라고 되어 있어요. 제단을 설치해놓고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피를 사전에 뿌려야 되는 겁니다. 7일 동안 뿌리게 되어 있어요. 출애굽기 29장 36절에 보면, “매일 수송아지 하나로 속죄하기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며 또 단을 위하여 속죄하여 깨끗케 하고 그것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라 네가 칠 일 동안 단을 위하여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라 그리하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리니 무릇 단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이렇게 거룩한 단이 되었을 경우에 비로소 거기서 제물을 바치는 것이 응답이 되는, 제대로 가동이 되는 제단이 되는 겁니다.
벌써 여기서부터 조짐을 보세요. 제단이라 하는 것은 분명히 조각목에 놋을 입혀서 놋 제단이거든요. 출애굽기에서는 그 놋제단에 기름과 피가 뿌려지는 겁니다. 본문의 경우에는 피가 뿌려지는데 피가 뿌려진다는 말은, 그 피는 살아 있는 생명체에서 나오는 피에요. 그리고 피뿌림을 받는 그것은 물체입니다. 사물이에요. 기름이나 피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죽여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을 만남으로서 비로소 하나님의 가동허가가 난다는 말이지요. “이제 그 위에서 드리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물체가 사람으로 변한다는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탁자로 사람 만들라고 하면 못 만들잖아요. 이 탁자를 사람으로 만들지도 못하고 사람을 이 탁자로 만들지도 못하고. 물체와 사람과의 그러한 전환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그 내력,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신약성경을 언급해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1장 51절에 보면,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구약에서 번제단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사람 피가 아닙니다. 사람은 용서받는 대상이지 사람의 피가 거룩한 제물에 합류할 입장,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인간도 죄인이고 죄가 있기에 잡아야 될 제물은 흠 없는 짐승을 인간대신 잡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제단 만들고 그것을 성전에 세우고 동물의 피를 거기에 태워서 “하나님이여,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줄곧 그렇게 해 오는 와중에 뭔가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뭔가 이상해요. 어떤 점이 이상한가 하면, 예를 들어 사울의 경우에 전쟁을 할 때 제사를 먼저 드리고 블레셋과 전쟁을 하거든요. 그런데 제사를 드리려 하는데 제사장 사무엘이 오지를 않는 겁니다. ‘에이 모르겠다. 내가 그냥 하자.’ 그래서 본인이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나서려고 하자마자 ……, 그렇게 나선 이유는 있어요. 지금 백성들이 전쟁 앞두고 다 흩어지고 민심이 흉흉해서 전쟁이고 뭐고 되지를 않아요. 적들은 코앞에 왔는데 사람들은 단결도 안 되고 급한 맘에 전쟁개시를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지요.
그런데 사무엘이 오지를 않는다는 말이에요. 나중에야 사무엘이 나타났어요. 나타나서 하는 말이, “왜 제가 오지도 않았는데 제사를 드렸습니까?” 하니까 “급해서 그랬다.” 하거든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라고 사무엘이 지적을 해요. 그걸 봐서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번제단이라는 물체에 양이라는 짐승을 바치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을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라고 나서는 특정인물, 하나님의 신이 임한 특정인물이 있어요. 그게 사울 당시에는 사무엘이지요.
사무엘이 이렇게 했을 때에 사울 왕이 사무엘의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말씀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너희들이 생각한 율법 지키는 것, 그것이 장차 오실 때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제대로 된 율법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체로 되어있는, 사물로 되어 있는 번제단에 시키는 대로 짐승을 바치는 그것이 죄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기계적으로 하는 그것이. 거기에 관한 내용은 히브리서에 가득 들어 있어요. ‘반복적으로 제사장이 제물을 바쳤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허물도 있었고 그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반복적인 제사가 인간의 죄를 씻을 수가 없다.’라고 히브리서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약이고, 짐승 바치는 제사의 내용은 출애굽기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거기에 등장한 사람들이 바로 사가랴같은 선지자들입니다.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어린양이 피를 흘리는데 어린양의 피가 제단에 뿌려져서 태워짐으로서 하나님의 용서가 된다는데 어린양의 그 피의 내막이 선지자를 통해서 점점 더 신약적으로 마지막 최종 정답이 나올 때까지, 최종적으로 그 분이 나올 때까지 이끄는 작업을 해요. 그 이끄는 작업을 하면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제사하는 죄. 요새 말로 하면 예배드리는 죄죠.
그래서 예배드려서, 제사 드려서는 구원 받지를 못합니다. “바른 예배드립시다.” 이래서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바른 예배드리고, 바른 전도를 하고, 바른 헌금하고, 바른 기도를 해서 구원받지를 못합니다. 인간에게는 어떤 바른 것도 구원의 능력은 아닙니다. 구원의 능력은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건져줄 때 구원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건져줄 때 구원되지 예수 믿는다고 백날 돌아다녀 봐야 주님은 그것마저 죄라고 지적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밀쳐버리지요.
선지자 사가랴의 피를 어디서 흘렸는가? 제단 옆에서 피를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제단이 거룩해지는 것은 피를 뿌려야 된다고 했고 그 피는 처음에 번제단 만들 때는 짐승의 피와 기름이 뿌려져야 제단이 제단구실을 한다고 알고 있는데 갈수록 점점 제단 옆에서 흘리는 피가 짐승의 피가 아니고 사람의 피가 점점 더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죽어가는 선지자가 한 둘이 아니에요. 요한계시록 6장 9절에 보면,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요한계시록은 신약시대입니다. 신약시대에 제단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거지요. 신약시대의 제단이 어디에 있느냐? 제단이 물체고 사물이라면 신약시대의 제단이 이 지구상의 특정 한 지점에 있어야 돼요. 제단이 두 개가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 장소가 로마냐? 파리냐? 모스크바? 베이징이에요? 샌프란시스코입니까? 예루살렘이에요? 베들레헴이에요?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이라 하는 것은 이 지상 자체를 이 지상에서 주어졌던 모든 말씀이 완성을 봐서 위로 올라가요. 말씀이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어디에 나오는가, 사도행전 1장에 나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위로 올라가지요. 구름타고 올라가신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말씀완성이 들어 있어요. 말씀의 완성이 들어 있으면서 구름타고 승천을 하십니다.
사람들은 그 예수님만 쳐다보지 예수님이 갖고 있던 말씀완성을 예수님의 열두 제자부터 모든 사람들이 이해를 못했어요. ‘휴, 나도 예수님 따라가면 구원 받을 텐데.’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 오신 것이 말씀을 완성하러 왔는데 그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 덕분에 자기가 구원받기를 시도한 거예요. 이게 틀려먹은 거예요. 천사들이 나무랍니다. “뭘 쳐다봐? 주께서 다시 오시는데.” 왜 다시 오시는가 하면, 주님께서 말씀의 완성을 가지고 다시 오시기 때문에 위에서 비춰버리면 모든 것을 말씀의 완성상태로 좍 비춰버려요.
그러면 오늘 본문의 에스겔 새성전부터 해서 모든 것이 이 지상 자제가 스크린이 되고 환등기가 비추는 것처럼 스크린에 주님의 완성이 막 뿌려지는 거예요. 얼룩이 지는 거예요, 얼룩, 완성의 영상이 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복음 믿고 고난 받는 모든 자들이 구약의 사가랴에요. 제단 옆에서 피 흘리는 선지자들이 되는 겁니다. 이걸 묵시라고 해요. 요한계시록은 나 구원받기위해서 본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겁니다. 요한계시록의 글자, 숫자 다 잘못본 겁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어떤 두 할머니가 차를 타고 가는데 국도 20번 도로인데 잘못 봐서 시속 20킬로로 가라는 줄 알고 있어요. 뒤에 있는 할머니가 벌벌 떨었지요. 조금 전에 210번 국도로 왔기 때문에 차가 날아 왔어요. 성경을 잘못 본 거예요. 이게 속도를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확인하라는 겁니다. “지금 당신이 달리고 있는 길은 20번 국도입니다.”라는 확인차원이에요. 성경은 우리가 지킬 것이 하나도 없어요. ‘분을 품되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엡 4:26) 하는 그 구절은 네가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주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길로 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좋은 질문을 했어요. ‘누군가를 대접하려 할 때 부한 자들에게 대접하지 마라. 그리 되면 대접받았다고 도로 대접할 것이니까.’ 누가누가 경우가 바른지를 시합하는 거예요. 대접하고 대접받고. ‘어? 이거 봐라. 이래도 내가 착하지 않나? 어? 나보다 더 착하네. 오기 나네. 에이, 이래도 내가 더 안착하나?’ 이러면 큰일 나거든요. 주님께서는 “대접을 하려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에게 해서 두 번 다시 3도로 대접받을 일이 없게 하라. 그래야 하늘의 상이 있다. 만약에 대접한 대로 다시 대접받으면 하늘나라 상이 없지 않느냐?”(눅 14:12) 했는데 그 대목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대접해야 됩니까?”라고 질문하신 분이 계셔요.
모든 성경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해도 구원 안 됩니다. 어떻게 해도 구원 자체가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이 성경책은 우리를 구원하는 책이 아니고 예수님이 무슨 일을 벌이셨는가, 거기에 관한 책이에요. 우리가 구원하는 책이 아니고. 에스겔 6장 5절을 잠시 보고 요한계시록 이야기를 계속 할게요. “이스라엘 자손의 시체를 그 우상 앞에 두며 너희 해골을 너희 제단 사방에 흩으리라.” 이 말이 뭐냐 하면, 에스겔시대가 되면 제단이 사라져요. 불타서 없어집니다. 제단이 불태워져버리면 사람들은 제단이 없다, 성전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성전 만들고 제단 만들라고 한 그 약속은 인간 네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이 와서 이 말씀을 지키기 때문에 너희들이 오해하는 그 제단을 불태워버리는 겁니다.
인간이 말씀에 실패했다고 해서 말씀 자체가 실패하는 적은 없어요. 지금껏 없습니다. 주의 말씀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일점일획이라도 미완성의 여지가 없어요. 에스겔 6장 5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범죄 했기에 제단에서 사방으로 흩어버려요. 흩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흩어지는 사방 동서남북 모든 지구상 전 세계 모든 곳이 제단 위가 돼요. 제단 위. 그 제단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요한계시록 14장에 잘 나와 있는데 제가 그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14장 18절에 보면,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불과 제단, 연관성 있지요? 제단은 불 지르는 곳이니까.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일천육백 스다디온, 400곱하기 400, 전지구상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방금 읽은 요한계시록 14장의 그 대목을 이렇게 보면 됩니다. 농부가 추수 때에 포도 알에 들어 있는 액체, 어떤 즙이라도 하나도 남김없이 기어이 짜내기 위해서 포도 틀에 집어넣어서 짜낼 대로 다 짜내는 거예요. 이것이 불붙은 제단표면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따라서 세상은 죄를 지어줘야 돼요. 불신의 죄를 짓고 예수도 안 믿고 하나님께 욕도 하고 그래야 돼요. 그래서 그들이 꿈에서 무심코 했던, 길가면서 어떻게 했든지, 담배피우고 술 퍼먹으면서 하나님을 욕했던 간에 그런 욕까지 기어이 다 뽑아냅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2014년도 7월 6일 오후 3시 43분경에 네가 술집에서 이런 소리 했지?” 다 뽑아내요. 주님을 훼방하고 주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을 불신했던 죄들을 죄다 뽑아냅니다. 왜? 본래 주님의 성질이 그래요. 주님의 성질이 죄에 대해서 저주 안하고 그냥 넘어가는 성격이 아닙니다. 주님의 성격은 죄라는 죄는 다 찾아내서 그걸 저주로 다 갚아줌으로써 주님께서 마음을 시원하게 하시겠다고 에스겔에 나옵니다. 저주를 함으로써 주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을 시원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죄를 좀 지어줘야 돼요. 무심코 툭툭 예수님에 대해서 욕을 해줘야 돼요.
이 주님의 철저하심 앞에서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 보고 “주님, 억울합니다.” 소리 하지 마세요. 그것은 주님의 솜씨를 무시하는 거예요. 마치 주님이 설거지 하는데 “설거지 하면서 접시 하나를 남겨놓았네요. 억울합니다.” 그런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거든요. 주님의 설거지는 철저합니다. 죄요?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냐? 이걸 묘사하기 위해서 탱탱한 포도를 으깨버려요. 그러면 붉은 즙이 나오지요. 짤 수 있을 때까지 짜는 거예요. 하나도 남김없이 짤 때까지 짜요. 그래야 이것이 말씀의 완성이에요. 그 완성하신 담당자가 누구냐?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가신 분입니다. 구름타고. 뭘 쳐다봐요? 지금 실시하는데. 위를 볼 것 없어요. 주위를 보세요. 세상 산다는 것은 제단에 펄펄 끓는, 그것을 철판구이라고 하는데, 부글부글 끓는 뜨거운 제단 표면입니다. 진노의 불에 제물이 막 타올라요. 무서운 심판의 불에 타오르는 그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세상은 지옥의 단면이에요. 돌출부가 세상입니다. 우리는 철판구이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세상 전체가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제단의 기능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성도의 눈으로는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나오는 제단의 치수, 이것은 출애굽에 나오는 치수의 아홉 배가 됩니다. 이 제단을 보면 3층으로 되어 있어요. 높이가 5.4미터, 가로와 세로가 각각 8미터 가까이 돼요. 그 제단에는 뿔이 있는데 네 개의 뿔이 달려 있어요. 제단과 네 개의 뿔, 그 뿔은 희생을 매달아놓는 뿔이에요.
그래서 이 제단의 모습은 항상 무엇을 요청하고 요구하느냐 하면, 이 제단의 표면, 불태우는 표면이 그냥 쉬고 노는 일이 없게 만들어요. ‘요새 죄를 안 지어서 심심하다.’ 이런 일이 없게 만들어요. 반드시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 제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제단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죄 짓는 제품들이 만들어져야 돼요. 왜?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제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제단의 기능을 위해서 인간이 있기 때문에.
이 제단은 신약성경의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세요.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가 있다. 주님께서 말씀을 지킨 것은 안 지킨 자에게 상응하는 저주를 퍼붓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 모든 말씀을 지킨 거예요. 그냥 자랑이나 하려고 지킨 것이 아닙니다. ‘안 지키는지 두고 봐라.’ 이렇게 해서 다 지킨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에 나오는 제단은 요한계시록에서 전체, 모든 인류가 제단 위에서 지금 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8장 3절에 보면,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어떤 지역에 있든지 간에 성도가 그 지역에서 주님이 복음에 의해서, 주님이 말씀을 다 이루었다는 것 때문에 밉상을 받는다든지 모독을 받고 욕설을 얻을 때 그들 속에서 기도가 나오고 그 기도가 제단을 통해서 올라옵니다. 그러면 그 제단은 가만있지 않고 거기에 상응하는 저주를 이 세상에 퍼붓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지옥은 꼭 필요한 거예요. 지옥이 없이는 천국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구원을 설명할 길이 없어요. 지옥이 있기에 천국이 있는 겁니다. 다 한꺼번에 하면 예수님이 계시기에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는 겁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있어요. 그러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구원은 애초부터 없어요. 왜 없는가 하면, 사람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지 않고 물체를 구원해요. 물체, 사물을 구원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봤던 것, 성소나 제단이랄지 이게 다 물체거든요. 시내산 위에서 봤던 그 물체가 시내산 아래로 내려옵니다. 내려와서 지상에 성소라는 것이 만들어져요. 그러면 성소라는 물체가 성소 바깥에 포진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게 돼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용서 물체가 어떻게 인격,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가의 그 중간과정, 그 논리를 이해할 능력이 없어지고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남은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제단만 남아요. 그 제단이 예수님으로 변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제단이 돼요. 물체가 사람이 돼요. 물체가 사람이 된다니까 오해할 수 있는데 그 물체는 말씀에 입각해서 된 것이고 말씀이 육신이 된 겁니다. 말씀이 물체로 변했고 물체가 사람이 된 거예요.
따라서 물체가 사람이 된 것은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만 구원받아요.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은 뭐냐? 예수님에 의해서 제단이라는 물체로 변하고 그 물체가 예수님의 기능을 발휘할 때 그 사람은 예수님 몸의 지체 입장에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갈 수가 있는 겁니다. 복잡해요. 제 말은 뭐냐? 이 땅에서 사람이라고 하지 마세요. 사람은 없습니다. 물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적인 기능인만 있어요. 그 기능인만. 그 기능인은 내가 했다 하면 안돼요. 제단 옆에 있는 향 같은 기능이 있고 또 제단 같은 기능이 있고, 전부 다 제단과 관련된 그 기능인들이에요. 신약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한다면 우린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놓았잖아요. 만들어놓았으면 책임져야죠. 저 구원해주세요.” 이렇게 돼요. 그것은 종교입니다. 일반종교에요. ‘나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이 계시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겨야 된다.’ 이러면 하나의 종교가 돼버리잖아요. ‘사람 같은 신이 있고 사람이 그 신을 믿는다.’ 그러면 그것은 더 이상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될 필요가 없지요. “똑바로 하란 말이야. 잘해야 너는 구원 받아.” 이렇게 되는 것은 무엇의 반복이냐 하면, 구약의 이스라엘의 반복밖에 안돼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그거예요. 본인들이 사람인줄 알고 있어요. 자기들이 인간인줄 알고 있어요. 인간이 아닙니다. 뼈에요. 흙입니다. 그렇게 만들어버려요.
그리고 그들은 말씀 지키는데 어떤 기여라도 했거나 말씀 한마디도 지킨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지킨 적이 없다는 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지요? 아닙니다. 제단 위에서 그런 자들은 저주받아야 돼요. 불태워져야 됩니다. 제단의 심판자체, 저주자체가 완성입니다. 포도에서 포도주 틀을 가지고 즙액을 빠짐없이 다 끄집어내는 것처럼 주님은 자기를 향한 죄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따라서 로마서 말씀처럼 진짜 신앙인은 ‘모든 심판을 네가 행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께 넘겨라.’(롬 14:10, 히 10:30)
우리는 나 심판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입장도 못돼요. 우리는 우리의 기능만 하면 돼요. 우리는 제단의 기능만 할 뿐이고 향단의 기능만 하면 되지 내가 뭔데 남들이 나 욕했다고 저주해 달라고 요청할 입장이 못 됩니다. 왜냐하면 개인적 입장이 아니거든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돌출부라는 말이지요. 그리스도께 속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마치 사물로 보면 큰 덩치가 그리스도라면 우리는 거기에서 돌출된 하나의 부속품이라는 말이지요. 부속품이 왜 주인 놓아두고 사적인 요구사항을 주님 앞에 이야기합니까? 자기가 단독주인공처럼 행세하면 안 되지요.
따라서 우리는 내 원수를 갚아달라는 입장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란 내 원수갚아주는 것이 아니에요. 따지고 보면 우리는 날마다 돌아서면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 간주해서 “하나님, 내 인생을 어떻게 할 거예요? 이렇게 방치할 겁니까? 아니면 살려주시겠습니까? 어떻게 조치 좀 해주세요.”라고 매일 자기 자신을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가만 따지고 보면 우리의 구원을 누가 방해하는가? 내가 방해해요. 왜 방해하는가? 내가 그런 소리 할 때는 말씀 자체를 덮고 난 뒤에 이야기하거든요. 말씀은 주님이 가져갑니다. 주님이 가져갔기 때문에 이 말씀 가지고 “주여, 이 말씀에 의하면 이렇게 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이 말씀은 주님이 먼저 압수해서 세무서에서 장부 압수해 가듯이 다 가져갔어요. 이 모든 장부를 다 가져갔기 때문에 내가 뭘 요청할 장부가 없다니까요? 우리가 살아온 것은 주께서 그렇게 살도록 만들었어요. 그렇게 살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주여, 내 인생 꼬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꼬이는 뭘 꼬여. 내가 보기에는 잘 풀렸는데 뭘 꼬였어?” 어떤 경우에도 자꾸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니까 내 가치, 내 의미를 생각하니까 그 때부터는 성경 없이 바로 주님께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식의 기도가 돼버려요.
흔히 기독교에서 하는 말, 답답하고, 또 컬컬하고, 컬컬하다고 하니 막걸 리가 생각나네, 컬컬하고 답답하고……. 주신 은혜도 모르고 뭐가 그렇게 답답해요. 이것만 하면 돼요. “주여, 우리가 주께서 하나의 물체로서 쓰이기만 하면 되는데 자꾸만 내가 단독적인 인간이라고 내 가치를 우기는데 이것 좀 틀어막게 하옵소서.” 그 기도만 하면 돼요. “제발 나를 사람으로 간주하지 마시고 주께서 쓰시는 도구로만 사용해 주옵소서. 내가 사람이라고 여기니까 자꾸 내 나름대로의 분량 찾고, 소유 찾고, 내 영광 찾고, 내 명예회복 찾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의 성전입니다. 따라서 주께서 말씀대로만 우리 속에 이루어지게 할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단이라는 물체가 신약의 예수님이 되었습니다. 어느 인간도 말씀대로 육신이 된 자가 아무도 없기에 어느 인간도 자기 권리를 주 앞에 요구할 수가 없고 주장할 수 없음을 다시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