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5. 1. 23) 2강
광주 강의(2015. 1. 23) 2강
이름 : 서경수(IP:118.35.139.86)
광주 강의(2015. 1. 23) 11-2
인간은 생존이 우선입니다. 밤에 아이가 운다면 제발 울음은 그쳐 편안히 잠자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이가 아프면 뽑든지 약을 먹든지 해서 통증을 그치게 해야 합니다. 세계 평화를 외치고, 남녀평등을 부르짖다가도 치질이 걸려 통증이 심하면 그 모든 것은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인간의 이상이 아무리 높고 고결해도 자기 몸 하나 감당 못합니다. 그런데 감당하는 척하는 자들이 서기관,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마치 신인 것처럼, 하나님의 대변자인 것처럼, 하나님과 직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낼 수 있는 것처럼, 자기가 기도하면 즉각 응답이 오는 것처럼 행세를 하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인정했고.
성령께서는 이것을 따지거나 묻지를 않아요. 왜? 인간을 아니까. 우리가 세상을 감당 못하고, 바꾸지 못한다는 것은 뻔히 아시기에. 다만 우리로 하여금 ‘네가 죄인임을, 즉 선악과 따먹은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가?’를 묻는 거예요.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에 인자가 먼저 와요. 예수님이 먼저 오신 거예요.
하나님께 영광, 찬양을 외치던 인간들이 예수님을 보는 순간 “당신은 꺼져!”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죄는 반드시 예수님과 관련 되어야 해요.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서 죄가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아멘’하고 받지를 못하고 우리는 서기관, 바리새인처럼 대들게 되어 있어요. 왜냐? 예수님이 그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유발시켜요.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을 주님은 비켜가요. 예를 들면, 여기 딸기가 있는데 “딸기에 관해서 시험 칩니다.”고 하니까, “아, 딸기가 몇 개 남았는지 묻겠구나.”하고 정답을 말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 딸기의 원산지는?” 이렇게 문제가 나옵니다. 이건 우리가 예상 못한 문제입니다.
딸기의 원산지, 이 대자연이 왜 있어야 되는지를 물으니까 우리는 답변을 못해요. 우리는 내가 밥 먹고 사는 것에 관해서만 정답을 모아 놓았기에 내가 원천적으로 왜 죄인인가에 관한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죽어도 마땅한 죄인이란 생각을 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제가 수련회에서 민수기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강도가 와서 죽이려고 하면 아마 신고할 걸요? 아무리 죽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강도가 와서 죽이는 것은 원치 않아요. 왜 그런가?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가 문을 열지 아니하면 그것을 문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비로소 ‘나는 내 힘으로 문 열고 이곳에 왔다.’가 됩니다. 천국의 문을 남이 열어주면 안 돼요. 기분 나빠서 그런 천국에는 안 가요. 값없이 주는 것은 싫어요. 내 힘으로 천국 문을 열어젖힐 때 우리는 천국에서 살면 살수록 내가 열었다는 자긍심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게 얼마나 보람된 일입니까?
선악과 따먹은 인간에게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한 이유를 하시겠지요? 생명나무는 값없이 주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따먹을 수 없는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의 가치, 값없이 주신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하시고, 생명나무는 못 따먹게 하신 후, 생명나무를 값없이 주심으로 말미암아 ‘네가 들어갈 천국은 네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들어 너를 넣어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천국이 있어도 못 들어가고, 안 들어갑니다. 자존심이 있기에 값을 지불하지 않고는 안 들어갑니다.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는 사사기를 강의할 작정인데 사사기 말씀이 참 재미가 있어요. 그들이 배부를 때는 하나님을 안 찾아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주변에 있는 개(이방나라)들을 풀어 이스라엘을 물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찾습니까? 아닙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역량을 총동원합니다. 그래도 안 될 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부르짖고 난 후 하나님께로 돌아옵니까? 그러면 사사기가 아니지요. 사사가 여러 명이라는 것은 각자의 사사가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몰랐어요. 사사를 통해서 메시아를 발견하지 못한 겁니다. 다만 자기들 생존에 도움 되는 자로 사사를 하나님이 사용했다는 정도로 알지요. 따라서 그들은 아무리 도움을 받아도 원천과 접촉하지를 못했어요. 성경 사사기 다음에 나오는 룻기를 보면, 사사기는 이스라엘 내부 이야기인데 룻기는 이스라엘 내부에 구멍이 뚫렸어요. 구멍이 뚫려 모압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면 이 자리는 비어있는 자리지요?
모압으로 갔다가 되돌아 올 때, 되돌아 온 나오미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룻이라는 이방 여인을 데리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드디어 이방 요소가 퍼집니다. 그런데 이방 요소에서 누가 나오는가 하면, 다윗이 나와요. 룻은 다윗의 고조 할머니입니다(마 1장 족보 참조). 그렇다면 이곳이 다윗과 연결되었다면 이곳만 진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칭 이스라엘은 무슨 역할을 합니까? 진짜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핍박했습니까, 아니면 못살겠다고 나온 겁니까? 그들은 못살겠다고 나온 거예요. 그래서 어려워요. 사람은 주님을 안 찾습니다. 살기 힘들 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고, 그 행동을 한다고 해서 진리를 안다든지 주님께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못살겠다고 떠났던 그들을 하나님이 대동하고 나옵니다. 롯을 대동하고 나오면서 이 전체 이스라엘을 살려냅니다. 이전까지는 어떻게 살려냈습니까? 사사기를 다시 해봅시다. 이전까지는 적들이 공격해 오니까 그들이 자기 살겠다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요. 왜냐하면 자기들은 택한 백성이니까.
그런데 택한 백성과 하나님 사이가 끊어졌지요. 나중에는 중보자적인 기능이 있지만 처음에는 중보자적 기능이 없지요. 깨져 버렸지요. 그냥 부르짖는 거죠. 중보자 의식 없이 그냥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어요. 이것을 출애굽 사건의 반복이라고 합니다. 사건이란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틈을 사건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적은 남한이고 남한의 적은 북한이죠. 둘 다에 다른 적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예를 들어, 북한 주민이 IS에 참여하면 어떻게 됩니까? IS가 사건화 되지요. 이전에는 남북 대결인데, 제 3의 요소가 들어오면 나선 요소가 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사건입니다. 사건은 기존 토대로는 해석 불가입니다. 구원이 바로 그런 사건입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백화점 옷을 보고 또 탐을 내고 말았습니다. 이제 탐내지 않을 게요.”하면서 자책하지요. 특히 부모가 자식을 키우면서 “자식을 사랑으로 키우겠습니다.” 해놓고, 사춘기 자식을 보면서 화가 나서 욕을 하고 미워했는데, 그리고 돌아서서는 “자식에게 내가 모범을 보이지 못해서 자식들이 날 무시하는데 이 모든 것은 다 내 탓이다.” 이게 뭡니까? 하루 종일 선과 악, 악과 선을 왔다 갔다 합니다.
“내가 다시는 자식을 미워하며 때리지 말라야지.” 하고 있는데, 주님이 나타나셔서 “손대지 마. 너는 손댈 자격도 없어. 때려도 내가 때려. 내가 너의 죄를 사한다.” 이것이 사건이고, 복음입니다. 이 때 우리는 놀라운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발견하게 되지요.
십자가 복음을 깨닫기 위해 강의 듣고, 녹취록 읽으면서 “주여, 오늘도 강의 들었습니다. 제가 잘 했지요?”할 때도 있고, “또 오늘 강의 듣는 것을 못했구나. 이 나태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 식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주님이 나타나서 이어폰을 뽑으면서 “강의 듣지 마. 내가 구원하지 강의 듣는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야.” 이게 복음적 사건입니다.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선악과의 틈새에서 나옵니다. 그러니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언급한 성령에 대해 반발할 수밖에 없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선과 악의 대립되는 개념으로 둘 중 어느 쪽에 설까 궁리하는데, 그 틈새에 성령이 오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슨 짓을 해도 죄인입니다.
그래서 “인자를 비방해도 너는 용서 받는다. 하지만 마지막 때에 성령이 오시는데 이 성령을 거역하면 사함을 받지 못한다.” 이 말은, 성령을 믿으란 말도 아니고 성경 말씀을 지키라는 말도 아니고 성령은 하나의 사건이 되어 우리에게 덮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열지도 않은 문, 내가 행한 것도 없는 나라에 성령을 통해서 도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마가복음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남학생 전체가 머리카락을 잘라 빡빡머리였습니다. 그 때 고등학생의 소망은 빨리 학교 졸업해서 머리카락을 기르는 거예요. 그런데 성질 급한 녀석들은 학생시절에도 선생님 눈을 피해 머리카락을 기르려고 안간힘을 섰습니다. 그러다가 선생님께 적발되어 바리깡으로 머리에 고속도로처럼 길을 냅니다.
한 번 깎였잖아요. 그런데 여러 번 깎이면 돈도 안 드리고 이발이 된 셈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머리에 고속도로가 난 것을 부끄러워해요. ‘내가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세상에 이 말씀을 못 지키다니. 이것만 지켰으면 괜찮은 성도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텐데.’라고 할 때, 주님은 머리를 다 밀어버립니다. 아예 자랑치 못하게 만들어요.
머리를 다 깎으면 남는 게 뭡니까? “주여,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녀가 말썽을 부립니까? 그것도 은혜고, 부모가 치매에 걸려도 그것 역시 은혜고, 모든 것은 은혜요 감사가 됩니다.
어제 미국에서 어떤 분이 전화를 걸어왔어요. 국제통화를 30분 이상 했어요. 중국에 있는 선교사가 자기 여동생인데, 자기한테 전화해서 ‘한국에 이근호 목사님이 계시니까 그분 설교 들어봐라.’고 해서 언니가 제 설교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너무 공감이 된다는 거예요.
그분이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아서 자신이 맡은 사역이 번성하게 해달라는 마음으로.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직 잘 납득이 안 되고, 이렇게 자유롭게 신앙생활 해도 되는가 싶어서 저에게 전화를 했어요.
이분에 제일 먼저 질문한 것이 뭔가 하면, ‘어떻게 막 살아도 됩니까?’ 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어떻게 막 살 수 있는가?’ 물어서 제가 답변을 했어요. ‘처음부터 막사는 것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막사는 것이 나와야 됩니다.’ 처음부터 막살면 안 되고, 성령을 받고 보고 ‘예전에 성령 받았다고 했던 그것도 사실은 내가 막 산 것이었구나.’를 깨닫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자신이 죄인임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성령 받고 난 뒤에 성령을 훼방할 수 있습니까?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할 때, 이 말은 성령 받고 난 후에 죄를 짓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지옥에 간다는 말과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성령 받지 못해서 지옥 가는 일가친척을 보면 안타깝지요. 그 안타까운 소리를 그들한테 해보면 확 달려들어요. 그들은 말합니다. “미쳤구나!”라고.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선악 외에는 다 미친 거예요. 주류와 비주류 외에는 다 미친 거예요. 제 3의 지대는 우리한테는 나올 수가 없어요.
미국에서 저에게 전화하신 분이 이런 말도 했어요. “내가 십자가 복음을 알아서 ‘이제 선악을 헤매지 않고 복음과 더불어 살겠다’고 생했는데 이것이 드디어 죄인 줄 알았다.”는 말을 해요. 복음을 알게 된 것도 죄라는 거지요. 왜냐하면 복음을 알면 복음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복음 아는 나’가 우선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 죄지요.
즉 복음 잘 알 때는 선이 되고, 복음에 소홀하고 복음을 잊어버릴 때는 악이 되니까 이것 역시 선과 악이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반복되어야 해요. 매일 반복되어야 합니다. 또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그 사건은 누가 일으킨 사건이냐? 성령이 일으킨 사건입니다. 왜?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만드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29절에서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러면 성령은 잘 살고, 못사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뭘 생각했는가 하면,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에 ‘내가 성령을 알게 되면 복을 받아 잘 산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잘 사는 것이 성령 받은 증거가 됩니다.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이 축구를 하는데 한국이 먼저 한 골을 넣었어요. 그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했겠어요? “주여, 1점 지켜 이기게 하옵소서!” 하면서. 그런데 한 골을 또 넣어 2대 0이 되었습니다. 초반에는 1대 0으로 이기기를 원했는데 2대 0이 되니까 이것은 추가적인 은혜지요.
2대 0으로 경기가 끝 난 후에 기도한 사람은 뭐라고 할까요? 한국은 우즈베키스탄을 2대 0으로 이길 자격이 있다고 해요. 이게 바로 복음 뒤에 ‘나’가 붙은 거예요. 이걸 어떻게 뗍니까? 이제 여유 있게 일본과 이라크의 경기를 지켜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올라갔다는 거지요.
여유가 있다는 말은, 이제 자만하고 나도 뭘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반드시 죄를 지적합니다. 인간은 구원 받은 자신이 지평이 되지요. 이 지평에 주님은 구멍을 냅니다. 구멍 내는 방법은 생존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키는 거지요. “복음은 믿는데 올 해는 수입이 왜 줄지요?” 이런 생각은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주께서 구멍을 내는 것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폭로하기 위함이고, 그 구멍에 다시 성령을 집어넣지요. 이렇게 되면 내가 노력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반복적인 희생덕분에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알지요. 그러면 복음만 감사하게 되지요. 3초 지나면 복음 뒤에 뭐가 붙습니까? “드디어 복음을 알게 된 나.” 여기서 ‘나’가 또 붙어요.
주님이 우리를 결과로 만들었지 내가 나 되는데 기여하고 보탬이 된 적이 없습니다. 나의 기도나 헌금, 봉사, 충성으로 오늘의 내가 된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언급한 것은 사사기의 룻의 기능과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모압 여인이 투입된 것, 이 기능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 받을 때는 외부적이다. 나를 지적하기 위해서 외부에서 오신 분이다. 그런데 돌아서면 그 성령도 내가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성령에게 소유 당하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내가 열지 않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주께서 채워주시는 겁니다.
제가 요즘 입맛이 없어서 뭘 먹어도 맛이 없는데 좀 전에 보니까 ‘허쉬 초콜릿’이 눈에 띄어 제가 한개 먹었어요. 그런데 도적질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먹었어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초콜릿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미리 생각했다는 이유 때문에 나의 열심과 노력으로 장악했다고 생각합니다.
내 자식도 내가 키웠고, 내 사업을 내가 성장시켰고 모든 것이 나의 노력과 땀으로 일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됩니다. 그 죄를 깨닫는 자가 영원히 구원 받는 사람입니다.
31-32절 봅시다.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고 하면 우리 같으면 “잠시만 기다리세요. 지금 강의 중인데 강의 끝나면 나가겠습니다.” 이렇게 할 텐데, 예수님은 아니에요.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33절)고 했어요. 이 말씀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예수님 자리에 누구 앉는가? 아버지를 아는 자만 예수님 자리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자리가 예수 안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안면이 있으면 예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것을 가위로 잘라버립니다. 그러면 모든 육적인 관계는 의미 없게 됩니다.
인간사회에서 모친과 동생이라면 아는 정도가 아니라 혈연관계입니다. 엄마를 엄마로 부르고 동생을 동생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모친과 동생이 예수님께 오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게 이어지는 이것을 주님은 가위로 잘라버리는 셈이 되지요.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자기 그림자는 있는데 예수님 그림자는 없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림자가 없고 자기 그림자는 있다면 지금 그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의 그림자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그 자리에만 있지 다른 곳에는 예수님의 그림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그림자가 없다는 말은 예수님이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들이 보고 있는 예수는 없는 겁니다. 이게 바로 스크린 현상입니다. 제 아내가 ‘민수기 교재(수련회 강의 안)’를 읽은 후 하는 이야기가 “왜 이렇게 어렵게 섰나?”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내용은 이해되나?”라고. 그 때 “내용은 이해하지만 어렵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당신이 이해한 내용을 설명해 봐라.”고 했어요.
그 교재에 스크린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요. 인간은 눈이 있어서 현실을 그대로 본다고 생각합니다. 안경을 통해서 보지요. 그런데 안경을 낀 것도 모르고 안경이 가까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스크린이 가까이 온다면? 스크린이 가까이 오면 인간은 자기가 본 것을 뒤받아 오잖아요. 그런데 이 사실을 인간은 모릅니다.
예수님이 저기 있으니까 동생들과 모친이 왔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예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있다, 없다’고 하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에 나처럼 있으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너처럼 있는 것은 ‘있다’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있어야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있음은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 있을 때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자리는 현재 비어있는 거예요. 모친과 동생이 있다는 것은 혈육적으로 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말하는 혈육은 혈육이 아니고 예수님이 말하는 아버지를 아는 자들이 혈육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자리를 새롭게 시작해야 돼요.
어떻게 시작하는가? 실패해야 됩니다. 인간은 절대 자기 일을 실패로 느끼지 않습니다. “네가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갔느냐?” “예, 들어왔습니다.” 이게 실패한 겁니다. 실패가 없으면 구원이 안 됩니다. 탕자가 되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실패를 해야 돼요.
그러면 실패한 인간은 유능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능한 자가 되지요. 오늘 강의 제목이 ‘무능한 자’입니다. 무능한 자가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이 보입니다. 누가 무능하게 만들었습니까? 주님이 날 구원하시려고 나를 무능한 자로 만드신 거예요. 결국 십자가의 랜즈에 의해서 예수님이 보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피 흘리는 예수가 보입니다.
멀쩡한 예수와 피 흘리는 예수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했어요. 피 흘리는 예수님 앞에서 그 예수님은 외면하고 멀쩡한 예수님, 혹은 피 흘린 후 영광스럽게 된 예수님을 보려고 합니다.
제가 박사교회에 있을 때 말썽꾸러기 꼬마가 있었어요. 지붕위에서 놀다 떨어져서 팔이 부러진 적도 있었는데, 그 아이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 때 아이가 묻기를 “할머니 어디 가셨는데?”라고 해서 사람들이 “할머니 천국 가셨다.”고 하니까, 병풍 뒤에 시신이 놓여있는 것을 알고는 병풍을 젖히면서 “여기가 천국이가?”라고 했어요.
왜 병풍을 쳤을까요? 인간은 죽지 않고는 죽음에 갈 수 없는데, 그 아이는 멀쩡하게 살아서 병풍 뒤를 들여다보니까 ---. 살아 있을 때의 천국은 천국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지요. 우리가 죽었다는 상표(부채표)가 있어야 돼요. 죽었다는 상표가 붙어야 비로소 아는데, 우리가 죽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죽으면 행함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유능한 자가 됩니까, 무능한 자가 됩니까? 무능한 자가 되지요.
축구 경기를 하는데 한쪽 팀은 11명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상대 팀은 11명 모두 힘이 빠져 운동장에 누워있어요. 그러면 활발하게 움직이는 팀이 공을 몰고 가서 골을 넣으면 되는데, 이상하게 공을 차면 튕겨져 나옵니다. 계속 그러다가 종료시간이 다 되어서 운동장에 누어있던 선수 1명이 일어나 골을 넣어 활발한 11명 팀이 졌는데 이것이 천국입니다.
이것이 시편 8편에 나옵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권능을 나타내셔서 승리케 하십니다. 젖먹이가 어떻게 승리했습니까? 엄마 젖 빨면서 응원해서 이겼습니까? 아니지요. 그냥 자신이 손대지 않은 결과(승리)에 초대받았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열지 않은 문을 주께서 열어놓고 우리에게 들어가라고 하실 때 자존심을 이겨내야 됩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높이 들고, 그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했는데 왜 사람들이 안 쳐다봤을까를 생각해 봤습니까? 본인이 유능하기 때문에 안 쳐다 본 겁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놋뱀을 쳐다 본 자는 낫는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그 말이 굉장히 기분 나쁜 거예요.
안 쳐다 본 사람이 정상입니다. 쳐다 본 놈이 이상한 거예요. 우리는 미칩시다. 미쳐야 됩니다. 늘 쳐다봅시다.
제가 문제 냅니다. 예수님이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이냐?’고 할 때, 모친과 동생은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1) 삐쳤다. 2) 예수님과 다시는 상종치 않는다. 3) 호적에서 제했다. 4) 사건이다. 몇 번이 해답입니까. 4번이죠. 평소에 예수님이 모친과 동생들에게 “어머니는 내 어머니가 아니고, 동생들도 내 동생이 아닙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까? 안 했겠지요.
평소에는 어머니와 동생을 인정하며 살았겠지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나오는 것은 타이밍이 사건을 만든 거예요. 평소에 서로 가족으로 지냈기 때문에 오래 집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어머니와 동생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잖아요. 예수님이 평소에 가족과 원수처럼 지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찾아온 가족을 이런 식으로 대했다는 말은, 사건이라고 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 해석을 어떻게 하는가? 예수님 모친은 모친이 아니고 동생은 동생이 아니란 말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이 말 속에는 ‘ ~이다, 아니다’를 넘어서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킵니다. ‘아, 주님은 내가 아는 주님이 아니구나.’
내가 아는 주님은 반드시 뒤에 ‘나’가 붙는데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내가 원인이 되고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간 천국이기를 원하는 우리. 하지만 주께서는 ‘네가 문을 연 것이 아니라 내가 열었고, 네가 미치지 않는 이상은 내가 연 문으로 들어갈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미치게 만들 게. 성령을 보내 줄 게.’
성령을 받으면 내가 하지 않은 것을 찾아다니는 미친놈이 됩니다. 이게 바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고백입니다. 미친 인간이 아니면 이런 고백이 안 나옵니다. 죽도록 공부해서 서울대학에 입학해서는 하는 소리가 “내가 서울대학에 입학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하는 거지요. 주위 사람들이 ‘믿음 좋은 척한다’고 얼마나 빈정대겠습니까?
35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이게 엄청나게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서기관, 바리새인이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셨어요. 예수님이 이야기했다는 말은 결론부터 말하면, ‘내 가족이 되는 것은 너희들 소관이 아니고 내가 담당해야 될 나의 숙제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그 숙제를 하기 위해서는 오해의 소지가 있더라도 그런 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아는 식으로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모친이 되는데 본인이 기여하고 노력했던 것이 계속 기억에 남겠지요? 그렇게 되면 일이 파토가 납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네 기억을 지워라.” 이런 식으로 합니까? 이게 말이 돼요? “기억을 지워라.”는 말도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기억하는 그것도 죄다.”라고 마중 나와야지요. 왜? 우리는 잊지 못하니까. 만화영화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외계인이 와서 돌멩이를 던지니까 지구수비대 독수리 5형제는 방패를 들고 나가요. 그 다음에 외계인이 총을 쏘니까 독수리 5형제는 레이저 광선 폭탄을 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왜 처음부터 레이저 광선을 들고 나오지 않았을까요? 저는 여기에서 뭘 느꼈는가 하면 하나님은 인간 수준에 맞춰서 놀아요. “내가 술을 끊었으니까 착하지요?”라고 나오면, 주님은 “그것도 죄야. 아직 담배는 안 끊었잖아.” 그래서 담배도 끊으니까 주님은 또 다른 것을 거론하면서 “그것은 안 끊었잖아.” 이렇게 나와요.
항상 하나님은 보조를 맞춰줍니다. 이것이 구약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십자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죄를 숙성시키는 거예요. 죄를 계속 키워나가고 그 죄의 수준에 따른 용서를 해줘요. 계속 죄인과 보조를 맞춰 갑니다. 마지막에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이때는 죄를 다 보여줬으니까 더 이상은 없습니다. 이때는 예수님도 죽어지내고, 아버지가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끝났지요.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구원 받을 권리는 없지요.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지요. 로마서 7장에서 ‘살기 위해서 법을 봤건만 법이 나를 죽였다.’는 말씀이 있어요. 내가 선을 행하기 위해 법을 따랐습니다. 왜 선을 행하기 위해 법을 찾지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왜 선이 안 되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인간은 자기가 문을 열 때 결과를 눈으로 볼 수 있어요. 자기가 문을 열어야 그 문으로 들어갑니다. 가만히 있으면 선인지 아닌지 몰라요. 그런데 시킨 대로 하니까 되더란 말이지요. 사춘기 아들이 엄마를 약 올리는 방법은 엄마의 말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고 엄마가 시키는 것보다 더 과분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시킨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게 만들어서 자기가 승리하고 싶은 거예요.
시킨 것보다 더 많이 하면 자기가 승리한 것이 됩니다. 엄마는 1시간 공부하라고 했는데 2시간 공부하고 식식거리면서 나옵니다. “엄마, 나 2시간 공부했어.” “잘했다.” “엄마, 나 2시간 공부했다니까.” “그래, 잘했어.” “아니, 나 2시간 공부했다니까요.” 왜 아이가 자꾸 2시간을 강조하는 것입니까? 플러스 의로움이 내 죄를 씻는 것은 물론이고 그 플러스가 있으면 엄마는 더 이상 나에게 잔소리 하지 못한다는 것이 담겨 있어요. 이게 엄마와 아들의 암투입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즉각 식탁에 모여라.’ 이것이 엄마의 요구입니다. 그런데 늦게 온다고 잔소리를 들은 후, 다음에는 식사 시간 30분 전에 식탁에 앉아 있으면 이건 뭡니까? 이건 반항하는 겁니다. 왜 반항하지요? 엄마가 법을 만들었잖아요. 그 엄마의 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함으로 내가 당당하게 되고 승리를 맛보는 것입니다.
내가 문을 열 때 그 문은 나를 위한 천국이 되는 겁니다. 사울이 왜 법을 지키려고 했을까요? 그 힘든 법을 왜 지켰을까요? 내 천국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알고 ‘그 법이 바로 나를 죽였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내가 그동안 몰랐던 죄입니다. ‘의롭게 되려는 그것이 바로 죄였다. 내가 스스로 천국 문을 열려고 한 것이 죄였다.’
주님은 나를 무능자로 만들어서,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주께서 하신 것으로 넣어주시는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날마다 무능한 자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주님 희생의 결과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5. 2. 25. 09: 23.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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