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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도행전 70강(쇠사슬), 마태복음 61강(어린아이 마음) 150224강의전도서

사도행전 70강(쇠사슬), 마태복음 61강(어린아이 마음) 150224

이름 : 이근호(IP:119.18.83.91)

주향(IP:222.♡.177.93)

15-04-01 09:40

대전-행28장16절-22절(쇠사슬)70강 -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 28 :16-22

사도 바울이 지금 하는 일이 사도 바울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 되겠지요. 하나님의 일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두 가지로 생각해 봅시다. 하나는 뭐냐 하면 자연운행 하는 것. 대 자연을 관리 하는 것. 이 대자연에는 누구도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도 포함,

인간도 포함된 자연운행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자연운행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겠지요. 그러면 감사는 어떻게 하지요? 감사하는 방법은요? 그렇다면 “감사”하면 하나님께 감사가 되는 겁니까? 방법이..

하나님 고맙습니다. 불교신자도 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모든 사람들이 신에게 감사하고 있는데 이렇게 해가지고는 하나님과 교류가 안되거든요. 간혹 미끄러질때도 “아이고! 감사합니다. 지켜주셔서..” 이럴 때도 영광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두 번째는 뭐냐하면 지금 사도 바울이 하고 있는 일이에요. 두번째는 인간이 도대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무엇을 하게 될 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모든 산천초목을 운행하시니까 새도 날게 하시고 들풀도 키우시고 이게 하나님의 일이잖아요.

상당히 보편적인거죠. 너무 보편적이기 때문에 구체적이지 안지요! 그런데 두번째 이것 말고 또 있겠는가? 이것 말고 또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보여 줍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 있을 때, 물론 그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시키신 것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일을 시켜 하게 했을 때, 무슨 일을 하느냐? 바로 복음 전파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전파의 일을 누가 하느냐? 그것은 바로 성령 받은 사람만이 하게 되어 있어요. 만약 성령 받은 사람이 안하면 어떻게 되느냐? 만약 몸살났다고 “나! 못합니다!”하고 안하게 되면 어떻게 되나? 성령께선 반드시 하게 하시죠.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은, 잠시 룻기2장을 보겠습니다. 지금 룻기2장을 보면서 여기서의 주제 테마가 뭐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구약 (룻기 2장8절)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룻2장2-3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찌어다 하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느데..

이삭을 줍는 것. 우리 가 아는 바에 의하면 이게 노동입니다. 노동인데 이 노동이 성경 안에선 룻이 이야기할 때 11-12절에 보면 보아스가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룻이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시켰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강의 주제가 뭐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룻기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모압 여인인데도 불구하고 이 땅에 왔습니다. 모압이 어디쯤이냐 하면 만약 모압이 예루살렘이 대구라고 하면 포항정도 쯤되요.. 그 쯤 보면 되는데 그 쯤의 모압 여인인데요. 모압의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아니예요. 약속된 땅이 아니기 때문에,

구약을 하면서 사실은 정리를 해야 하는데 약속의 땅하고 그냥 일반 땅하고의 차이점이 뭡니까? 뭐 흙이 약속의 땅은 파랗고 저쪽은 누렇고 그런 차이겠습니까? 어떤 차이가 있기에 약속의 땅이라 할 수 있느냐 하면은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약속의 땅이 아닌 곳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에요.

그러면 안 계신 것과 계신 것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네 마음데로 살아도 아무 탓하지 않는게 바로 하나님이 안 계신 땅의 특징입니다. 네가 어떻게 살아도 징조나 징후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그것을 (롬 1장28절)에서는 “내어 버려두사”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그냥 방치 하는 거예요

지옥에 가든지 말든지 마음데로 해라. 하지만 약속의 땅의 경계를 넘어서서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대로 시행치 않으면 분명히 그것에 대한 저주의 징후가 나타나느 곳. 그게 약속의 땅입니다. 힘들지요!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깐깐한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처럼 힘들지요.

조금만 잘못하면 잔소리가 나오니까. 그런데 잔소리고 뭐고 아무것도 안나오면 사는게 편하지요. 애들이 엄마하고 사는 거 하고 기숙사에서 혼자나 친구하고 사는 거 하고 완전 다르잖아요. 엄마와 안 살면 신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말씀대로 살 경우에는 복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못 사는 경우에는 저주가 오는 거지요. 저주가 온다는 점에서 굉장히 손해 보는 것. 하나님 없는 것이 손해 보는 느낌이 드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되지 않겠느냐! 살 수 없어요. 인간은 말씀대로 못 삽니다. 그러면 복을 못 받는다는 말인가? 아니 복은 와요. 말씀대로 안 살아도 복은 온다고요. 어떤 경우에 오느냐! 말씀대로 안 살았다고 인정하면 복이 와요. 그걸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거든요.

이번 수련회에서 민수기 강의 할 때 레위지파의 존재, 의미가 거기 있잖아요. 네가 잘못을 알게 되면 그냥 잘못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네가 제물을 가지고 우리 지파에게 가져오면 우리가 잘못을 회개 하게 되면 이 땅 자체에 복을 줄 것이다. 그때 회개 했다고 복이 온다고 생각지 말고 그 희생의 피 때문에 복이 온다고 네가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실 때 우리를 선택해서 구원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를 선택해서 구원하는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는 용도로 선택하는 겁니다.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 구원은 없어요.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는 용도로써 참여 시키면 그게 구원이지요.

그런데 사람은 피를 위하여 구원되야 되는데 피로 구원됬다고 해서 또 구원을 목적으로 삼아버려요. “아! 내가 구원 못받은거 같은데 어떻게 하면 구원받지? 그래! 피로 구원받아야지! ”이렇게 되면 이것은 제대로된 구원이 아니고 잘못된 구원이에요.

자기 자신의 이득만, 구원 받고자하는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잘못된 구원입니다. 피 흘리심에 그것을 증거할 자 누구뇨? 그래서 구원 받게 되는 거예요. 자! 하나님이 피를 흘렸다. 예수님이 피를 흘린거예요. 자! 피를 흘린것이 절대 기준이라는 것을 증거할 자가 누구지?

“내가 찾아가 선택해서 뽑아 내리라! ” 그러면 그게 바로 구원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엘리야시대에 비가 안와요.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왔지요. 비가 안 오니 사람들은 무얼 기다리겠습니까? 비 오는 것을 기다리겠지요? 하나님께선 비 안줍니다. 뭘 보고 비를 줍니까?

하다못해 저축은행에서도 담보없이는 돈 안빌려 주듯이 “우리의 사정이 힘듭니다!” 해도 ”뭘보고 빌려줘야 하는데?” 뭔가 있어야 빌려 주잖아요. “저희 사는 게 참 힙듭니다!” 라고 해도 안도와 줍니다. “저희 가정이 불우하니까 도와주세요!” 안도와 줍니다. “몸이 아프니까 도와주세요!” 안도와 줍니다. 뭐 잘했다고 도와줍니까?

주님은 손해 보는 장사 안해요. 뭐 있다고 도와 줍니까? 안도와 줘요..도와 줄것 같았으면 애초에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 않았어요. 추방시킨 이유가 “너하고는 안 논다!”이말입니다. “난 예수하고만 상대 할꺼야!” 그래서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일하시거든요. 예수님하고만 상대하시는 이 원리가 우리의 존재 바닥을,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 공로의 은혜,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하신 기막힌 상상도 못할, 인간의 상상을 능가하는 기발한 작업. 그 엄청난 용서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 거기에 참여당한 자들이 구원된 자들 입니다.

피 증거 하라고 구원된 거예요. 엘리야 시대 때에 비가 안 왔지요. 비 그냥 주시지 않습니다. 엘리야에게 제단을 쌓게 하고 제단에 12통이나 물을 붓게 하고 거기에 불을 내리시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3년6개월 동안 비오지 않는 것이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불은 항상 심판을 의미하거든요. 물이건 불이건 다 심판이에요. 옛날 노아 때는 물로써 심판하고 장차는 불로써 심판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의 강의가 간단한 거예요. “주님! 저희가 하나님을 위해서 뭘 이야기 할까요? 불 심판을 이야기하면 되요. 끝. 나를 위해서, 하나님! 지금 저의 형편이 회복되기 위해서 어떤 걸 하면 됩니까?

그건 애초부터 출발 자체가, 물음 자체가 허용 안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거예요. “네가 뭔데? 내가 너를 도와줄 이유가 없어!” 하나님은 자기 작업에 일관되지요. 거기다가 우리를 집어 넣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운행 하신다. 그런데 자연을 운행하는 이것이 중요한게 아니에요. “하나님!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이건 지워져야 되요. 살려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은 다시말해 아프다든지 안 살려 주게 되면 감사 안하겠다는 것 밖에 안 되니까 그 감사는 자기 위주의 감사지요. 그래서 이것을 자연종교라고 해요. 자기종교의 출발점은 자기 이익입니다. 자기 이득이에요. 자기 잘되기 위해서 하는, 자연종교의 출발점은 뭐냐하면 정령숭배라고 있는데 세상의 모든 것이 신의 능력이 들어 있다.

자연숭배에요. “목사님! 그 말 맞잖아요?” 맞지요. 맞는데 제가 방금 이야기 했지요? 이것은 무엇을 위해서 아이디어를 끄집어 냈냐?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신을 거론 할 때 그 신이 누굴 위하여 그랬나? 신을 거론한 나의 이익과 행운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것은 그 인간 지체도 귀신이며 괴물이지요! 자연숭배로 부터해서 다신교로 해서 일신교로 종교가 이렇게 발달 되었다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신교도 수상하고 다신교도 수상하고 다 엉터리라 보면 되요. 지금은 무슨 시대냐 하면 종교시대가 아니고 과학 시대거든요.

그런데 과학시대 밑바탕의 정수이기 때문에 과학이 뭐냐하면 과학이 미신이에요.카이스트에 있는 교수보고 “과학이 미신이다!”라고 하면 기절할거예요. 과학이 왜 미신이냐 하면 전부다 자기를 위해여,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이기에 하여튼 인간을 위하여 있기에 전부다 미신이 되는거예요.

정령숭배에서 다신교로 옮겨 가면서 나오는게 뭐냐하면 주술인데 즉, 공감주술이예요. 공통된 감각으로 주술하는 거예요. 공감주술에는 두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하면 유사주술이 있고 다른 하나는 감염주술이 있어요.

유사주술이라 하는 것은 비슷한 것끼리 하면 효과 본다는 거예요. 황달이 났을 때 금을 사용한다든지 왜? 색깔이 비슷하기 때문에 감염주술이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어떤 사람이 상대방의 머리카락이나 손톱으로 뭔가 행동을 가하게 되면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상대방한테 반응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극 같은데 보면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그것을 활로 쏘면 인현왕후가 윽!윽! 하잖아요. 무당이 그림을 그리고, 가수 방주연이 불렀던 “당신의 마음” 이게 일종의 감염주술이예요. 이렇게 그리면 나를 그리워하지 않을까? 이런걸 누굴 위해서 하는 겁니까? 내가 우선이고, 그게 존재에요.

신은 나를 위해줄때 그리고 비가 오지 않을 때 그럴 때 왕이 설치는 것 이게 유사주술이에요. 또는 애기를 못 낳는 여자가 애기 낳는 흉내를 막 내면 애기가 생긴다는 것, 유사주술이지요. 대구에 안지랭이라는 동네가 있거든요. 안지랭이라고 대구에 팔공산 말고 앞에 있는 산 계곡을 보면 여자의 하체 같이 되어 있어요.

그곳은 옛날 부터 아들 낳는 사람이 갈라진 곳에서 촛불을 켜고 지금도 무당들이 빌고 받친다해요. 그게 다 유사주술이에요. 애기 못 낳을 때 낳는 시늉을 하면 애가 생길것이다.그러면 신이란게 결국, 누가 창작하고 만든겁니까? 인간이 자기의 기대, 희망, 욕구, 욕망, 아픔, 슬픔, 이런 감정들을 모아서 추상적인 관념적인 존재, 있지도 않는,

“천지를 만드신 신 신이시여! 나에게 이러한 어려움이 있고 또 이러한 희망이 있는데 내가 이렇게 간절히 비오니 신이시여! 천지를 만드시고 나무와 돌을 만드시고 그것을 만드실 때 거기에 정기를 넣으신 신이시여! 나의 아픔도 주께서 친히 굽어 살피고 보고 계시오니 나의 소망을 들어 주소서!

지금도 새벽 제단마다 또한 금요 철야를 하면서 수요기도회에 모일 때 주일 낮 설교와 오후 예배 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없어 질수가 없어요. 계속 내려온 무당집들이기 때문에. 상가에 있는 무당집들이에요.

교회 자체가 무당집이에요. 대나무만 안 꽂았다 뿐이지 대문에 십자가 꽂은 거에요. 대나무는 바람불면 흔들리지만 십자가는 안 흔들리는 거에요. 그 차이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까 처음에 강의 할 때 사도 바울은 무얼 한다고요? 무엇을 전파한다? 복음을 전파하지요.

그런데 교회가 복음을 전파 할 수 있어요? 교회가 복음을 전파해버리면 안되지요! 그러면 무얼 전파해야 되요? 정령숭배를 전파해야 되고 다신교, 일신교를 전파해야 되요. 그리고 약간의 과학적인것도 가미해서 “이렇게 기도 하시면 되고 이 자리에 있어야 은혜 받습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것을 가미해서 정령숭배자가 되지 않으면 또 무당이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교회에다 돈을 내지도 않을 뿐더러 찾아오지도 않지요.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무얼 해야 됩니까?라는 말을 할 때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성령이 와서 하게 되면 하나님이 먼저 계시고 나는 나중에 있기 때문에 주께서 무슨 일을 하시지?라고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성령이 아니고 ‘육’ 같으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얼 하게 되면 결국 나에게 이익이 돌아올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남들하고 똑같은 말로 들리더라도 하나는 무당이고 하나는 참 성도고 그런겁니다. 이 이야기를 왜 해야하냐하면 바로 사도행전에서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이 똑같은 경험과 체험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거에요. 그냥 자기의 팬들처럼 자기의 말을 잘 알아듣고 성령 받아서 ‘아멘’하는 사람들한테 전하는 게 아니고

사도 바울은 아예 그런 기대도 안 했어요. 그리고 본인이 누가 성령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그걸 가려낼 권한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는 일이 뭐라고요? 복음 전파지요?그냥 복음 전파이지 몇명 교인 만드느냐! 그거 아닙니다.

오로지 복음 전파이지 교회가 복음 전할 때 복음만 전하면 되지 몇명 남아 있느냐? 그건 정령숭배에요. “요렇게 복음 전하면 몇명 오겠지!” 이 대전 모임에도 목사 님 한 두명 온게 아니잖아요? 많이 왔지요? 또 더 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주께서 보내시면 또 안오고 듣기만 할 수도 있어요.

주께서 하시는건 복음 전파다 이것만 생각하면 되는데 “복음 전파해서 교회 크게 만들어야지!” 이거는 벌써 복음에서 떠난 거예요. “복음 전파해서 내가 목사인 것을 자각해야지!” 이렇게 되버리면 이건 복음이 아니고 이미 복음을 떠나 버린거예요. “목사님!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렇게 물으면 제가 강의 했어요.

바로 피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 증거하기 위해서라고 “피 흘렸습니까? 남의 죄를 위해서? 아니지요? 그럼 본인을 위해서 피 흘리면 되겠어요? 아니지요 저도 마찬가지고 제가 제 피 흘리면 다른 사람이 용서받습니까? 아니지요?

사도 바울 이야기 하면 십자가 진 적 없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을 믿고 이것 주세요! 라고 하는 권한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잘 되라고 하나님이 피 흘리신 것이 아니고 그 피 자체를 증거 할 자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에요

왜냐하면 피에서 뭐가 나오냐 하면 물과 불이 나오기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세상은 심판 받기 위해 만들어졌거든요. 예수님의 피를 위해서 만들어 졌다고요. 이게 에베소서 1장에 나옵니다.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창세전에 너희를 택하였다. 예수 안에서, 그냥 택하신게 아니에요. 하나님 안이 아니에요. 예수 안이에요.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피 흘린 분이잖아요! 예수님의피 흘림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만드신 겁니다! 이것을 아는 신학자를 본 적이 없어요. 칼 바르트도 이건 몰라요. 언약이야기 했지 피 이야긴 할 줄 몰라요! 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있게 하시면 제가 뭔데 없다고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좀 만나 봤으면 좋겠어요! 그런 신학자를,

신학자라고 하는 것도 인간들이 만든거고 어째든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일 하실 때 복음만 전파 했다는 것. 요것만 아시면 되는 겁니다.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우리가 신학교 가야 되는거 아닙니까?” 라며 바빠져요.

그래서 아까 룻기2장을 언급 했잖아요. 룻은 나오미가 “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주 죽을 만큼 힘들게 하시는구나!” 남편 죽고 아들들 다 죽고 기가 막히지요! 가뭄이 들어 못 먹게 됬다는 이유 때문에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갔다고요.

갈 때는 그냥 간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땅 다 팔고 갔어요. 이민 갈 때는 밑천이 있어야 그 쪽 가서도 농사지어야 하니까 그건 당연한거죠. 땅 다 팔고 갔다는 거예요. 자기 땅 없어요. 대대로 물려 받은 하나님이 주신 땅 있잖아요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땅이건 내 땅이건 굶어 죽을 판인데 엘리멜렉이란 사람이 땅 팔고 해서 갔다 이말이죠. 모압 땅으로 , 경계선이니까 이민 간거에요. 갔는데 가보니까 농사가 잘되는 거에요. 그런데 농사는 잘 됬지만 하나님이 남편 죽이고 그 다음에 아들 둘도 다 죽여 버렸어요. 아들들도 결혼 하기전에 죽은 것도 아니고 결혼 한 후에 죽은 거예요.

그러니 그 모압의 며느리 둘을 보고 나오미가 말하는데 나오미의 믿음이참! 좋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아주 죽을 만큼 힘들게 하시는구나!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시다는 것이 “이런면에서 살아계시구나! 네가 있는 그 영역은 약속의 땅이 아니야! 네가 죽든 살든 이쪽으로 와야해!”그런데 하나님께선 그 영역으로 떠난 자에게도 약속의 땅에 있는 동일한 효과를 모압땅에서도 내려주신 거예요.

그래서 나오미가 이름을 바꿔요. 기쁨의 여인에서 슬픔의 여인으로 바뀐거에요.. 마라(슬픔)인데 누가 그렇게 했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인간 망가지고 그제야 전능하심을 아는 거예요. 나오미가 미안하잖아요. 며느리들한테 그래서 둘 보고 “너희들 살길로 가거라! 너희가 우리 집안으로 잘못 들어 왔구나!

하나님께서 치시는 집안에 들어 왔기 때문에 너희가 무슨 죄가 있나! 너희가 왜 매를 같이 맞아야 되나? 가거라!” 이렇게 말하니까 한 며느리인 오르바는 떠나지요. 룻은 말하길 “어머니의 나라가 나의 나라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다시말해 “어머니를 통해서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을 내가 보았는데 내가 어머니의 하나님을 버리면 내겐 사냐 죽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저주 받는 게 분명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내가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 라며 “죽어도 같이 죽겠습니다.”하고 안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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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룻이 이삭을 줍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정리 합시다! 성도가 일 하는 것, 잠자는 것, 휴식 하는 것, 등 성도가 하는 모든 것은 뭐냐하면 이게 복음전파와 관련성이 있습니다. 본인이 한다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하게 만드시는 것.

몸살라서 아픈 것도 복음전파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럼 복음전파하게 어느 신학교에 가야 합니까? 몇 년을 공부해야 합니까? 등록금은? 그런 걸 따지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어떤 마음으로? 룻과 같은 마음으로,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시는건 오직 하나님의 약속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작업이기에 내가 정신 차린다고 그런 인격을 갖출 입장이 못 됩니다.

주께서 직접 손을 대야 우리는 거덜납니다. 그래서 지난주일 오후 설교에 제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했지요? 그 만큼 살려고 애쓴다는 것은 추락중입니다. 추락중인 것을 룻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본 거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러다 나 죽는 거 아닌가?” 이러는데 룻은 차라리 고마운거예요.

자! 추락했습니다. 그녀들이 돌아 왔습니다. 왔는데 땅도 없습니다. 떠나기전에 남에게 땅을 다 팔고 왔기 때문에 땅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오미는 일 할 수 있는 나이도 지났습니다. 그래서 며느리 룻이 땅도 없고 아무것도 살 길이 없으니까 남의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습니다. 이걸 누가 봤는가? 멀찌기서 보아스가 본거예요.

보고난 후에 “너는 이삭을 주으러 다른 밭으로 가지말며..보호해 주고 땅도 내가 너희 시아버지가 팔은 땅을 사서 다시 너에게 돌려줄께! 그리고 대를 잇는 것도 네가 나에게서 낳은 자식의 호적을 죽은 시아버지의 호적으로 올려 줄께!”이게 바로 하나님의 율법의 적용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적용 한다는것이 어떤 경우냐 하면 적용되는 혜택을 입는 모든 인간들은 망가진 인간들인 거예요. 자신들이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고 다만 주님께서 하시고져 한 일 만 증거 해야 될 역활과 임무를 맡은 자들만 하는 거예요.그게 바로 창세전에 택한 사람입니다.

창세전에 택했다는 말은 전부다 끄집어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 끄집어내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만 나오는 거지요. 룻이 이삭을 줍는 것도 피의 능력의 표현이예요. 왜냐하면 피는 신약에 있고 신약 이전엔 율법이 있고 그 율법에 따라 룻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되었고, 참여하게 되었고 거기서 살게 되었고 율법에 보면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밭의 이삭을 다 줍지 마라” 하거든요.

그 혜택을 룻과 나오미의 가정에 받게 하잖아요. 온 천지가 율법을 그냥 깔아 놓은 거예요. 율법이라는 장판을 다 깔아 놓은거예요. 그게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에 율법을 깔아 놓았지만 혜택은 모두 다 받는게 아니예요. 혜택은 누가 받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것은 주께서 친히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주께서 미리 장만하신, 미리 깔아 놓은 은혜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아까전에 첫번째와 두번째로 나눴지요? 첫번째는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잘 되면 감사하고 잘 안되면 짜증내는 것 있지요. 그것은 모든 정령숭배, 모든 종교, 모든 인간들은 다 그렇고,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지 않아요.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주셔서 악인이나 선인이나 다 햇빛과 공기를 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햇빛 많이 받았다고 천국가는 것도 아니고 단비를 많이 맞았다고 해서 천국가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가는 것은 그게 아니에요. 첫번째가 아니고 두번째에요.

즉,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자기가 받은 은혜와 연결점을 아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구원받는 거예요. 햇빛주고 공기주는 걸 복음이라고 하지 않아요. 복음은 예수님의 피, 즉 내살과 내 피가 복음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말에 동의하고 따랐겠네요? 성령으로 전했기 때문에 그랬겠어요?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죽을 때 까지 영적 싸움을 벌여야 해요. 말을 전하면서 이 세상 전체가 싸움터라는 것을, 그 속살을 노출시키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얘기 했지요. 배가 가는데 바다가 갈라지면서 그 밑에 물이 나오지요 다 노출되듯이 이스라엘이 가는 곳에,

복음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전하게 되면 이 세상의 정체가 다 들어납니다. 그럼 이 세상이 바다이고 사도 바울이 복음이라면 그럼 무슨 정체를 드러낸다는 말인가? 꿈과 환상의 바다에요. 사람은 하루라도 꿈과 환상을 안 만드는 순간이 없어요. 그런데 기차를 타게 되면 창 밖 풍경이 그때 그때 지나 가잖아요? 막 지나 가잖아요? 마찬가지로 꿈과 환상이 자꾸만 지나가요. 만들어진 것도 자꾸 뒤로 밀려가고, 뒤로 밀리고..

출근하는 차안에서 온갖 과거 일을 생각하다가 막상 회사에 들어가게 되면 당장 회사에 일이 일이 터져 있고 갑자기 환상이 깨지고 또 멀리 있는 자식 생각하다가도 “선생님!” 부르며 레슨 받으러 오면 금방 잊고 어디까지 진도 나갔더라? 하고 환상이 다 깨져 버려요.

꿈과 환상은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바로 현재 내가 굳어진 공간과 시간을 가지고 만들어요. 명절 설에 만든 음식하고 다음 날 음식하고의 차이점은 뭐냐하면 설에 만든 음식은 막 익혔을 때는 맛있잖아요.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면 굳어져 맛이 덜하죠.

꿈과 환상은 현실처럼 막 쪄놓은 찐빵처럼 진짜 실감나요. 그런데 하루만 지나면 딱딱하게 굳어져 버려요. 이처럼 인간은 꿈과 환상에 속아 넘어 가면서 계속해서 매일 매일을 맞이 하고 있습니다. 꿈과 환상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내가 여기서 어떻게 잘될까? 또 꿈꾸다가 다음에 일이 생기고 또 내일되면 여기서 어떻게 잘될까?

그게 공간과 시간이 이미 굳어져 버린 딱딱하게 공간과 시간을 가지고 누구를?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위한 환상과 꿈, 이것의 주인공은 항상 누구냐 하면 본인이예요. 따라서 복음전파는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계속해서 본인 뜻대로 안되야 되요. 안 될 수 밖에 없어요.

사도행전28장에 보면

(행28: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 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 준바 되었으니

(행28: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행28:19) 유대인들이 반대 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 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바울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요 하는 말이 내가 예루살렘에서 잡혔는데 로마인들은 나를 풀어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누가 반대했어요? 19절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이렇게 했지요! 이게 뭡니까? 사도 바울도 인간인지라 어떤 일이 잘 풀리게 된다든지 거기서 어떤 기대를 갖겠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선 복음전파를 위해서 그의 환상과 꿈은 날마다 사도 바울의 뜻대로 안되게 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안되야 하는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복음만 전해요.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 현실, 자기 세계가 있는게 아니고 날마다 뭉개지는거지요. 안 뭉개지면 그게 꿈과 환상이 되요.

“이제 내가 몸 건강해지면 목포쪽으로 여행가야지!” 하는데 손님이 계속 와서 못가고 “이번 설 만 세면 내가 일본으로 온천여행 가야지!” 설 세고 나니 몸이 아파서 못가고... 사람들은 꿈과 환상을 고난가운데서도 안 놓칩니다.

설에 며느리들이 힘들게 음식 준비하면서 꿈과 환상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설만 지나면 백화점가서 옷 사야지!” 그 보람으로 힘든 일을 견뎌내는 거예요. “내가 옷 봐놓은게 있어! 이번에 내가 사고 만다! 250만원짜리 살거야! 그러니 힘들어도 참아야지! 이것만 끝나면 살 수 있으니까 참아야 돼!”

그전에 이미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당신! 아무소리 하지마라! 잔소리 하지 말아야 돼! 내가 옷을 사도 아무 소리 하지마라! 힘들지만 아무소리 안하고 다한다. 그러니 가만 있어! 설 음식 다 할테니까! 가만 있어라! 뒤에서 다른 소리 하지마라!” 그러면 남편들이 그러지요 “ 그래! 마음대로 해라! 니 하고 싶은대로 해라!” 사람들은 어떤 꿈꾸는 기대가 있을 때는 역경을 이겨내지요.

힘든 일도 견뎌 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옷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게 일주일이 안가요. 그 옷 입고 동창회 가서 보여주려 하는데 얘들이 일이 있다고 안모이네! 자랑할 때가 없네! 다음번에 만나면 철이 지나서 못 입고 가네! 옷 산거 자랑하려 했는데, 또 등산복 샀는데 비가 와서 못가고..

인간의 꿈과 환상은 굳어져 버리는데 이 세상은 누가 경영하냐! 하나님이 경영하시면서 복음 위주로 다 계속가기 때문에 꿈과 환상은 우리에게 허탈과 허무를 줍니다. 분명히 좋았던 옷도 몇 번 입어 버리면 다른 옷을 또 찾게 되어 있고 보석도 마찬가지고..

(행28:20) 이러 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

보세요! 내가 어디에 매어 있다고요 ? 쇠사슬에 사도 바울의 소망이 여기에 있어요. 옷 한 벌 사는 게 아니고 쇠사슬이에요. 이 일만 끝나면 내가 이 복음만 전하면 “내가 백화점가서 옷 마음대로 산다!” 이게 아니고 쇠사슬이라니까요!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기적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한번 느끼는 거예요. 그리스도계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를 만난 게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주께서 기뻐하시겠지!” 아닙니다. “열심히 힘들게 하면 칭찬 받겠지!” 그게 아니고 처음부터 모든 계획과 모든 힘과 그 사연이 생기는 모든 정황과 상황이 주께서 그렇게 몰아세우시고, 몰아넣게 한 적합한 사건, 사건이 터지는 거예요.

그 사건을 세 자로 이야기하면 “쇠사슬” 이고 다섯 자로 하면 “쇠사슬 상황” “쇠사슬 사건”이 쇠사슬이 룻이 이삭을 줍는 것과 동일한게 사도 바울에겐 이삭 줍는 게 주의 일이 아니고 쇠사슬에 매이는 것이 주의 일이예요. 왜? 뭐가 관련되어 있기에? 복음전파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 첫 강의 제목도 쇠사슬이에요.

(행28: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서는 어디서든 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행28: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서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 로 권하더라

지금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이야기 하지요? 그리고 유명한 귀절입니다. 23절에 이렇게 되어 있지요? 어떻게 되어 있다고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그 다음에 무엇과 연관시켜요? 예수의 일. 여기서 뭐가 빠져요? 뭐가 빠졌습니까?

자신의 행함이 여기에 들어갔습니까? 안 들어갔지요? 왜 안들어 가냐 하면 모세의 율법을 누가 주신 겁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 선지자를 보낸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 하나님의 일은 일관성 있는 일. 사도 바울은 그것만 증거 하면서.. 사도행전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만약에 유대인들이 참석 했으면 그들의 평이 어떻습니까? 평이 안좋아요. 25절 마지막 세자 이야기해보세요. “옳도다”뭐가 옳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옳도다! 선지자의 말이 옳습니다. 그 내용이 뭐지요?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는 말이 이게 반드시 성취되야 하는 말이에요.

이렇게 되지 말라는 경고성 발언이 아닙니다. “내가 미리 경고 했지?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사도 바울이 전할 때 잘 들어!” 이 말이 아니고 반드시 이렇게 되야 되고 사도 바울은 거기에 복음전파만 했을 뿐이고,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에 이사야에서 했던 예언들은 그대로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사야6장으로 끝나겠어요? 오늘 날 복음전파 하는데 같이 가겠어요? 같이 가야 되는 거예요! 지금도 복음 전파되면 이사야 6장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복음 전파되는 자리에 같이 가게 되는 거예요. 심지어 놀라운 것은 복음을 전한다는 본인이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복음전합니다.

그 복음을 듣고 구원 받는 사람이 있어요. 있지만 정작 전하는 사람은 구원 못 받아요. 이렇게 아주 희안한 일들이 있어요. 전하는 사람이 구원 못 받아요. 성경에 이런 게 있습니다. 라고 해도 본인은 안 믿어요! 왜 그럴까요? 정령숭배 왜 그럴까요? 누구를 위하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자기 목사 짓하기 위해서..지금 사도 바울은 목사 짓 하는게 아닙니다. 교회 만드는 것과 아무 관계없어요.

쇠사슬이라니까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마치 룻이 이삭을 줍는 것처럼, 이삭을 줍는 게 아니고 사실은 말씀을 줍는 겁니다. 복음을 줍는 거예요. 우리가 살기 위해선 이삭을 줍는게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현재 우리를 있게 하신 거예요. 나오미의 남편 죽게 만들고 아들들 죽게 만들고 다 죽게 만드신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거예요.

되어진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냥 비 온다! 눈 온다! 다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이렇게 생각지 마시고 반드시 피와 관련성을 가지고 생각해야 되요. 피 때문에 비도 오고 눈이 온다고 관련성이 되려면 중간에 복음이 들어가야 되고 복음과 더불어 율법과 선지자서 들어가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옳도다” 맞네, 맞아! 그래서 이번 강의의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확인 하면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성령받은 성도로써 매 순간 복음을 확인 하면서 세상을 불로써 심판받아야 마땅한 세상, 지옥같은 세상에서 오늘도 우리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중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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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마18장 1-4 절 (어린아이의 마음) 61강 - 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18 :1-4

(마: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제자들이 물었어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있는데요. 이것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뭡니까? 물으신다면 이렇게 답하면 좋아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합니다라고 하면 좋아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얘기 해주는 적이 없어요.

반드시 인간들이 생각하는 인간들의 발상과 주님의 생각이 있는데 이 두개를 다 이야기해야 되요. 인간의 발상, 생각하는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장소” 입니다. 어느 장소냐 하면 ‘위’의 나라에요. 위에서 온다는 겁니다. 구약 때 하나님께서 음식을 받아먹는데 하나님께서 받으신 음식이 뭐냐 하면 ‘연기’에요. 주께서 ‘연기’를 좋아하십니다.

번제를 드리면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받을 음식이다. 양식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복 주신다라고 생각할 만한 율법적인 내용이 굉장히 많거든요. 연기가 어디로 갑니까? 밑에서 위로 올라가지요?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어요? 위에 있는 거지요? 구약에선 세 곳이 있어서 ‘위’가 있고 지상이 있고 땅 밑이 있어요. 죽으면 땅 밑으로 가고, 그것을 지하 또는 음부라고 하고 하나님께신 곳은 위에 있어서 천사들이 사는 동네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이 모든 게 뭐냐하면 ‘장소’적인 거지요?

장소적이니까 제물을 태우면 위로 올라가잖아요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특정 장소를 하나님께서 지정했다고 생각하는 거잖아요! 그게 뭐냐하면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에 솔로몬 성전이 있고 헤롯 성전이 있고 헤롯 성전보다도 스룹바벨 성전을 제2성전이라고 해요.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 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들, 스룹바벨과 예수아, 에스라, 느헤미야가 나옵니다.

성전을 세우는데 성전 규모가 솔로몬 성전의 사분의 일 밖에 안되요. 아주 초라하지요! 그래서 에스라에 보면 울잖아요! 첫 성전에 비해서 이거 밖에 안되는구나! 에돔. 대구가 예루살렘이라면 에돔은 어디쯤이냐 하면 청도, 밀양쯤 되는 곳이 에돔이에요. 야곱의 형 에서가 세운나라를 에돔, 이두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70년 동안 바벨론으로 잡혀가게 하셨잖아요! 그러면 그 땅은 빈 땅이 되어 버리잖아요! 빈 땅에 누가 오냐 하면 베두인(아랍 유목민)들이 “와~아! 빈 땅이다”하고 온거예요. 그 땅에 와서 사는 거예요. 땅 주인이 없으니까 살았고 물론 바벨론에 가지 않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건 소수니까 유다 나라 사람, 가난한 사람들귀족 아닌 사람들 몇 안되는 사람 남겨두고 또한 전쟁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그래서 유목민들이 들어 와 살았다는 거예요.

70년 후에 포로로 갔던 자들이 몇 명이 왔잖아요.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갈 때 쯤 어떤 사람은 바벨론으로 간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이집트로 간 사람이 있고 온 천지로 다 퍼졌어요. 퍼지면서 기다린 사람도 있고 그 자리에 눌러 앉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오면서 유대인들이 돌아와서 나라를 다시 만들어요.

그때 이방인 이두메 출신 헤롯이 왕이 되려고 하니까 그 동네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거든요. 그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게 되면 환대를 받을 수 있고 통치하기에 수월해 질 수 있기에 세우게 된 성전이 헤롯 성전입니다. 헤롯 성전의 구조가 에스겔에 나오는 40장 이후에 나오는 그 구조와 비슷하게 해서 만들어요. 그게 헤롯 성전이에요. 그런데 헤롯 성전을 누가 세웠나? 헤롯이 세웠기 때문에 유대인들, 즉 정통 유대인들은 그것을 성전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예언을 보면 메시야가 오기 전에 성전이 만들어지고 성전에 메시야가 임하게 되어 있어요. 감람산에, 감람산은 어디 있냐하면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산이에요. 현재 예루살렘은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유대인 구역, 아르메니아 구역, 이슬람 구역, 이방인 구역인데 (638년) 이슬람이 예루살렘을 점령했다가 (1074-1270년)년대는 십자군 전쟁때는 도로 뺏았았다가 뺏겼다 아주난리 났어요!

그러다 보니 잡족들이 있게 됬다 말이죠. 어째든 유대인들이 성전을 세워야 메시야가 오기 때문에 성전을 세우고 기다리죠! 그것을 제 3성전이라고 해요. 왜 그렇게 성전을 세워야 하냐 하면 하나님은 지정된 장소에서 만나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장소적의미의 하나님나라에요.

자! 이렇게 방금이야기 했습니다. 정리해보면 유대인들은 해석하면서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면 메시야가 거기 임해서 천국이, 하늘나라가 된다라고 했을 때 이게 바로 전부 장소적의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 할 수밖에 없지요!” 전부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존의 바르세인과 사두개인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성전은 성전만 세워지면 되는 게 아니에요. 성전이 세워지면 거기서 제사를 드려야 되잖아요! 아까 뭐라 했지요? 제사가 드려지면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하나님이 받으시잖아요! 제사장이 필요하겠지요?

아무나 제사장이 되면 안되요. 아론의 직계 후손이 제사장이 되야 되요. 제사장을 어떻게 뽑냐 하면 D.N.A 조사해서 뽑아요. 다윗 때는 사독계열의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사독계열의 임무는 성전을 관리합니다. 왜 해야하나 그래야 메시야가 오기 때문에

지금 까지 이야기한 것은 하늘나라는 무슨 장소? 바로 여기, 이 장소에요. (마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 제자들이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은 지정된 장소에 드디어 메시야가 왔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온 메시야는 누굽니까?

“예수님! 당신이 메시야입니다”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이해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이해한 것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을리가 있겠어요? 맞았으면 이런 질문이 나왔겠습니까? “누가 크니이까?” 라는 말을 했겠어요? 안 맞지요!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예수님이 메시야란 말이 맞아요? 틀려요? 틀렸지요!

예수님과 인간들이 사용하는 개념이 같이 붙을 수가 없어요. 튕기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메시야가 아니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되신 분이 아니에요. 그들이 말하는, 예수님은 성육신 되신 분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그럼 그들은 그냥 따와서 말하나 그들은 성경책에 나오는 용어를 그냥 따와서 살아계신 주님과 그냥 일치시켜 버립니다.

그런데 그 중간 과정에 누가 끼어들어요? 본인의 개념, 단어를 사용하는 인생관, 세계관, 구원관, 하나님관이 포함되겠지요? 언어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세계관이라는 국물 속에 하나의 떡국이라든지 아니면 팥죽 속에 넣는 새알처럼 둥둥 단어가 떠 있어요. 거기서 하나를 끄집어 낼 때 신 개념, 언약 개념, 그냥 끄집어 낼 때 팥죽 속에서 벌겋게 묻어 나온다고요.

묻어나오는게 뭐냐 기존에 인간들의 통영되는 세계관과 현실관이 묻어 나오는 겁니다. 끄집어 내면 전부다 거짓말을 해요. 끄집어내는 쪽에서 거짓말 아닌 게 없어요. 예수님은 메시야다! 이것도 거짓말,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도 거짓말, 구원도 거짓말이고 전부다 인간이 갖고 있는 본인들이 속해있는 이 세계관에 흠뻑 젖어 있어요.

스위스 음식중에 퐁듀라고 치즈에 빵을 찍어 먹는 게 있답니다. 그런식으로 항상 그렇게 묻혀 나와요. 목사가 설교 할 때 모든 성경용어가 무엇이 묻어 나오는가? “그래서 이 교회를 부흥시켜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요구 사항이 용어에 묻혀서 설교 단어 하나 하나에 묻어 있어요. 말씀은 어떻게 듣고 헌금은 어떻게 하고..항상 의도가 노림수가 있어요.

제가 책을 낼 때 사람들에게 맡기면 맞다고 하면서 안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맞지만 자기네 교회 크는데 무슨 도움되겠나 해요. 기독교 출판사도 마찬가지예요. 기독교 출판사의 모든 활자와 모든 책은 자기 출판사가 잘되는 것과 연관되어 있어요. 모든 게 그래요. 진리? 복음? 그건 핑계입니다. 자기가 잘되야 돼요.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게 마찬가지거든요.

죽 쒀서 개 줄일 없다는 겁니다. 죽은 누가 쑤었는데요? 자기가 쑨게 아니거든요! 주께서 쑤었거든요. 주께서 죽을 개를 주던 소를 주던 자기가 관여하지 말아야 해요. 아까 사도행전 봤잖아요. 사도 바울은 죽쒀서 개 줬어요. 실컷 고생 해놓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잖아요?

결국 그 사람들은 다 가버려요. 죽 쒀서 개 줬네! 그런데 그렇게 해 놓고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옳도다”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네가 어디 천국을 넘봐! 네가 천국이 감히 어딘데 넘보느냐?” 천국은 예수님에겐 장소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천국을 장소적 개념을 갖고 팥죽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끄집어내는 것처럼. 자!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고 했어요. 아니라면 뭡니까? 하늘나라의 개념은 어디서 나와야 되요? 이런 팥죽 장소적 개념이 섞여 있는 팥죽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천국은 어디서 나와야 됩니까? 그건 예수님에게서 나와야 되지요!

예수님에게서 나와야 되는데 예수님이 팥죽 그릇 끼고 나왔습니까? 예수님이 올 때 뭐가 왔습니까? 그냥 몸 하나 왔지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가지고, 그러면 육신이 가만히 있었습니까? 움직이고 행동하지요? 결국 천국은 어디서 나오는가? 주님의 몸짓, 말짓, 행위 그것을 전부 합쳐 장소가 아닌 ‘사건’ 주님의 사건에서 나오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요:4:49-50)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 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여기서 신하는 장소적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자기들이 하는 방법 있잖아요? 아까 신을 유사 주술과 감염 주술이라 했는데 누가 봐도 지금 신을 자기 아들 낫게 하는 몸짓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자신이 납득이 되는 몸짓, 그것을 다 합쳐서 유사와 감염되는 식으로 전체를 이야기할 때 그 전체의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묘사하는 방법으로 그것을 언어학에서는 환유와 은유라고 어려운 말을 해요.

쉽게 이야기하면 뭐냐 정령숭배사상, 그 시점에서 또는 다신교 사상에서 인간의 어떤 몸짓이 자연을 변화줄 수 있다는 겁니다. 예로 왕이 기우제 하면서 오줌을 누는 것은 하늘에서 비를 내리는 몸짓을 왕이 미리 하는 거예요. 왜? 왕이 그렇게 해서 비가 오지 않으면 죽여요.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지 못하면 이건 왕 답지 못한 게 되거든요. 옛날에는 제사장이 곧 왕이고 왕이 제사장이었어요.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왕이 뭔가 해야 되요. 신에게 자연을 움직일 만한 역량을 비춰야 되고 그 영향에 대해서 백성들에게 납득이 되야 되요.

비 안오는데 들어와 있으면 사람들이 납득을 안해요. 왕이 비가 오게 하려고 오줌을 눈다든지 물을 뒤집어 쓴다든지 하면 “그래! 지금 저 왕은 왕의 값을 하고 있구나!”하게 되요. 박근혜 대통령이 가만히 있으면 안되고 뭐라도 움직여야 “그래! 대통령이 지금 일 잘하고 있다”고 납득하듯이

장소적 의미에서 주님께서 그냥 있으면 안되고 아픈 아들이 여기 우리 집에 있으니 와서 아들에게 무슨 조치를 취하게 되면 우리가 납득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주님이 하는 게 납득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그것을 아시면서 뭐라 하나 “그냥 가!” 그냥 가봐! 가보면 네 아들이 나아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 말이 뭐냐하면 바로 주님의 표적은 주님이 하시는 기적은 인간에게 납득이 되는게 아니고 병 고쳐 달라고 하는 사람과 물이 포도주되게 해달라는 사람을 오히려 공박하고 그 언어 사용을 부정해 버리고 그 언어 사용을 부정한다는 것은 네가 속해 있는 세상 자체를 다 쓸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네가 어디서 아는 척을 해! ” 그런 뜻이에요. 네가 사용하는 단어, 똑같이 사용해도 출처가 망할 인간에게서 나온 개념을 가지고 사용하고 나는 나의 속한 아버지에게서 나온 개념을 사용하고 그게 다른 거예요. 그래서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 땅에 있습니까? 땅에도 없습니다. 아무데도 없습니다. 천국은 없습니다. 왜? 추방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은 전부다 꿈이고 환상입니다. 없는 천국, 주님의 몸짓을 통해 새롭게 나옵니다.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있다고 하는 천국을 다투면서 나오는 겁니다. 그 다투는 대상이 오늘 마태복음 18장에선 누구지요? 바로 사랑하는 제자들과 다투는 겁니다.

자! 설명하기전에 먼저 결론을 보는 입장에서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물을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가 있는 곳입니다. 그게 뭐냐 아까 첫 시간에 이야기 한 것처럼 룻이 이삭을 줍는 것도,

룻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삭을 줍잖아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의해서 쇠사슬에 매어 묶이고 하지요. 그게 바로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하나님나라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게 아니고 어떤 몸짓에서 나와요. 어떤 사건으로 나온다고요. 성도가 움직이고 일하고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금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겁니다.

“네가 그랬지?” 아니! 주의 능력이야! 이런 고백할 준비가 되있는 곳이에요. 그곳이.. “이번에 네 아들 사법고시 합격했다면서! 축하해! 아니야! 우리 아들 사법고시 합격 하지 않아! 우리 아들은 주께서 키우신다! 주의 피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거야! 이런 고백이 합격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나와줘야 되지요!

자칫하면 예수님에게 기도해서 사법고시 합격한 셈이 되어 버립니다. 그건 정령숭배, 다신교 , 미신이고 감사 헌금 하려거든 매주 올 때마다 해야 되요. 예수님의 피는 끝나지 않으니까 그런데 감사 헌금을 띄엄 띄엄 한다하면 문제가 있어요. 왜 띄엄 띄엄해요? 무슨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지요?

그런데 이유가 없으면 자기가 망하는 겁니다. 아까 마라, 나오미이야기 했지요? 망했을 때 비로소 그녀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처음으로 접촉한거예요. 그러니까 오히려 소급해서 모압에 내려간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되지요. 남편 잃고 아들들 죽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되요. 이름이 슬픔의 여인으로 바뀌어진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그런 식으로 활용해서 하나님이 전능하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인으로 활용하고 사용했던 거지요. 물론 그 와중에 작은 일로 벌어졌지요. 남편이 죽는 작은 일, 자신의 아들들이 죽는 아주 사소한 일이 벌어진거예요. 그 가운데 내 몸이 아픈 아주 사소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할 때 누굴 생각하냐 하면 자기 잘 되는거 생각 하거든요!

자기 잘 될 생각하고 평소에 하나님나라를 생각했으니까 그 하나님나라는 가짜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셔서 우리의 정성을 받아 주옵소서. 이게 가짜이인 거예요. 제자들이 이 질문을 잘 했어요! 안 했으면 자기들이 가짜가 아니고 진짜인줄 알고 있을 거예요. 자기가 생각하는 예수님이 메시야의 개념이 주님도 받아들일수 있는 메시야가 동일한 개념인줄 알고 착각하고 아마 그렇게 생각 했을 거예요.

자기들이 생각하는 하나님나라 그 단어가 주님도 같은 입장에서 쓰는 줄 알고 오해 했을 거예요. 하지만 주께서는 그걸 바꿔 버립니다. 자!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되느냐? 가까이 왔다고 했어요. 누가 이야기 했지요? 세례요한이 했지요. 세례요한은 하나님나라를 표현할 때 가까이 왔다고 했어요. 가까이 왔다는 건 하늘나라가 왔다는거고 왔는데 어디 쯤 왔나?

멀찌기 온 게 아니고 가까이 온 거예요. 가까이 왔다는 건 하늘나라의 소식을 우리가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가까이 왔다 해놓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 빰빠라밤! 빰빠라밤! 드디어 가까이 왔어요. 나타나 버렸어요.

장소적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납득이 안가는 거지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사람들이 “저거 미쳤나! 하늘나라가 어디 가까이 와?” 라고 이야기 합니다. 너희들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너희가 도끼 맛을 못 봐서 그런거다!

내가 너희들의 뿌리를 쳐 버릴테니까! 너희들이 어딜 가? 하늘나라를 가? 에라! 차라리 저 돌멩이가 간다! 저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갈거다! 돌멩이는 알아 듣는데 너희는 왜 못 알아 듣는가? 도끼 맛을 못 봐서 그래요.

도대체 우리의 구원을 누가 방해합니까? 내 구원을 누가 방해해요? 스스로가 방해해요. 어떤 식으로 방해 합니까? 매일 같이 꿈과 환상을 꾸는 식으로, 내 첫 사랑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자기의 첫 사랑하고 천국 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보고싶다! 누구야~ 이런 식으로..

사람은 시간을 채우려고 하는데 시간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시간은 비워있는 시간을 채우는게 아니고 본인이 움직이면 시간이 만들어져요. 어떤 일에 몰두해 버리면 시간가는 줄 모르죠? 왜? 몰두한 그 일이 새로운 시간의 질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집에 혼자 지낼 때 개를 키운다. 그러면 개를 키우게 되면서 개에게 신경을 쓰다보면 혼자 못 채운 시간을 개와 더불어 새로운 시간이 만들어 지지요! 그래서 친구들과 만나면 “우리집 개가 있잖아!” 자기 시간을 이야기 하면서 개 이야길 하며 만들어진 시간을 이야기하는거예요. 아가씨 때는 개 이야길 하다가 결혼 하면서 애들 이야기 하는 것처럼, 전부다 자기 애가 생기면 애와 더불어 같이 시간을 만들어 가는 겁니다.

그럼 자기 인생이라 하는 것은 애가 없을 때는 상상도 못할 인생이죠! 애가 있고 난 후의 인생이란 애 있기 전 인생은 꿈에도 안 꾼 새로운 환상의 시간들이에요. 만약 애가 늦게 들어오면 걱정하고 잘 되면 기뻐하고 이게 내가 결혼하기 전에 생각했던 그러한 채워야 할 내 시간이 아니고 등장인물로 인하여 새롭게 만들어지는 인생인데 그게 환상이라는 거예요.

그것이 나를 위한 환상이고 꿈이예요. 결국 꿈에 울고 꿈에 웃고 환상에 울고 환상에 웃는, 여자들이 자기 남자에게 “당신! 내가 죽으면 따라 죽을 수 있냐고” 묻지요? 남자의 사랑을 테스트 하는데 여자가 죽으면 남자는 못 견디죠. 왜냐하면 내 인생에 그 여자가 차지하는 부분이 컷기 때문에 그런데 새로운 여자를 만나면 지난 여자는 환상이 되요.

왜 새로운 여자와 또 시간을 만들어 가기 때문에 지금 사귀는 여자도 새로운 사람 앞에선 또 환상이 되버려요. 이 말은 인간 자체가 좀비에요. 실체 없는 하나의 귀신, 인간 자체가 영물이에요. 인간 없어요. 영만 있고 영물이라고 자꾸이야기해줘요, 뒤에서 마귀가, 마귀가 만든 세상에 우리는 일시적으로 사람인양 살아가는 겁니다.

주께선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죄인’ 또는 ‘흙’으로 간주합니다. 그게 주님이 사용하시는 단어에 담겨 있는 주님의 세계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껏 죄를 져야 해요. 마음껏 헛소리와 되지고 않는 소리를 해야 되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 했던 것처럼 우린 주님 앞두고 자기가 알고 있는 환상의 세계를 주님 앞에서 쏟아내야 됩니다.

‘침’ 튀기며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요. 예수님 쟤가 높습니까? 내가 높습니까? 이런 헛소리를 지껄여야 되요. 지껄이면 그것을 가지고 주께서 네가 지금 귀신이라는 것을 정리해 주시는 친절한 해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우리가 그야말로 인간도 아닌 죄인 중 괴수이냐 하면 또 헛소리들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그걸 주께서 증명 하는지 봅시다.

2절 봅시다.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어린아이를 부르니깐 비교가 되요. 어른 12명과 어린아이1명, 숫자로는 1:12에요. 어른에게서 나온 소리가 뭐냐하면 누가 크냐고 이야기했어요. 어린아이의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누굴 바라보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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