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5장43(아버지의 이름으로)150115b-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5장43(아버지의 이름으로)150115b-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요한복음5장43(아버지의 이름으로)150115b-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자본주의 이야기를 왜 갑자기 했느냐 할 때, 예수님 당시나 이스라엘 당시나 그들이 거기에 미혹될 수밖에 없던 여건이 있었어요. 상황이라는 게. 여러분 상황이 우리가 지배하는 상황이 아니고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인간이 놓여져 있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어쩔 수 없다. 그 이스라엘 이런 사람들이 어쩔 수 없었던 거예요. 여기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교회라는 것도 자본주의 분위기속에서 교회가 자본주의화 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이름이 필요한 거예요. “하나님 반듯하게 해가지고 좋은 교회 만들어서 갖다 바치겠습니다.” 이거는 상황을 몰라서 그래요. 이 상황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헛소리하는 거예요. 마치 베드로가 “주님, 제가 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하는 것과 똑같은, 철딱서니 없는 거예요. 베드로가 그런 소리 할 때 갑자기 소녀가, 베드로가 자기 권력자를 생각했거든요. 예수님을 뭐하는 최고 권력자를 생각했지만. 막상 지적질 한 것은 누구냐, 연약하고 연약한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것은 없지만. 그 연약한 여학생이 “아저씨 나 봤는데. 한패잖아?” “고 입 안 다물어!”
평소에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그걸 통해서 이만기라는 거대한 천하장사가 넘어져요. 천하장사가. 골리앗이 다윗 앞에 넘어지듯이. “나는 수제자다. 나는 된 사람이다. 내가 얼마나 큰일을 많이 했는데. 내가 물위를 걸었고, 오병이어에 참석했고, 내가 귀신을 쫓아냈고.” 하는 그 거목이 예수도 안 믿은 그 착한 애한테 넘어진 거예요. 그래서 좀 안다고, 제가 민수기 끝에 그 이야기 했잖아요. 좀 안다고 목사가 갑질하지 말라고. 남들 보기에는 존경받죠. 마귀는 웃고 있습니다. “백날 니가 위대한 목사? 어린애 하나한테 니가 넘어질 거야.” 항상 빨리 되돌아가야 돼요. 우리 자리는 죄인의 자리지, 뭔가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자의 자리, 그런 자리는 없습니다.
그런 자리는 없어요. 남들이 그렇게 씌어주더라도 본인은 빨리 그 자리를, 그 가면을 벗어 던져야 돼요. “내가 뭐 했나? 뭐 했는데?” 이래 되어야 되죠. 그것이 바로 주의 영광이야기, 너희들이 나의 영광보다도 무슨 영광? 너의 영광만 하니까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이 영광 문제를 계속해서 거론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45절, 46절, 47절, 거기에 모세이야기 나오는데, 거기 모세 율법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방금 한 것과 관련되어 있는데요. 아까 2호선 이야기했었습니다. 2호선은 누가 깔았다? 주님이 깔았다. 깔아놓고 거기에 이스라엘을 달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탈선해버렸죠. 그래서 이방 사람이 수시로 들어가서 한 거죠.
그럼 그 이방사람,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가서 운전사가 되는 겁니다.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님이 그것을 몰고 하늘로 올라갔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간 것은 이스라엘도 함께 하늘로 올라간 거예요. 그렇다면 남아있는 율법의 기능이 뭔가 하는 거죠. 율법의 기능이 뭐냐 하는 겁니다. 제가 수련회 할 때 이게 상당히 난해했을 건데, 설명을 친절하게 충분히 못해드렸습니다. 율법은 한 예를 들었죠. 율법은 속죄제가 있잖아요. 속죄제가 있다는 말은, 속죄제가 죄를 씻어주는 제사를 위하여, 죄가 무엇인가를 만들어질 필요가 있어서 여기에 필요한 법이 만들어져요.
우리는 생각하잖아요. 법 만들어 놓고 못 지킬 때는 제사 동원하면 되잖아. 이래 하잖아요. 그걸 순서를 바꿔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갈 어린양, 예수님 중심이기 때문에. 모든 율법은 예수님을 겨냥해서 하잖아요. 예수님이 이미 제사제로 확정된 이상은, 죄는 우리가 짓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서 나와야 그게 죄가 돼요. 우리가 백날 지어도 우리는 죄 못 지어요. 말이 이상하죠. 우리가 아무리 해도 내가 느끼는 죄와 주님이 느끼는 죄가 달라요. 아직도 멀었어. 그거는 죄 근처도 못 갔어. 계속 더 지어야 돼. 이래 된다 말이죠. 아무리 따라 바쳐도 죄의 궁극성은 우리는 몰라요.
왜? 유일하게 저주받으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그 분만이 죄를 알아요. 우리는 그 죄에 접근해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죄가 뭐냐, 예수님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해달라는, 지난 수요일에 한 건데, 주님이 말씀을 지켰으니까 의인이잖아요. 그게 자기 뜻이에요. 근데, 의인인데 그 의인을 저주받게 만드는 그 것이 누구 뜻이냐, 아버지의 뜻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의가 저주를 받습니까? 그래서 자기는 안 하려고 한 거예요. 하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 의가 저주를 받겠나이다. 이렇게 한 겁니다.
의가 저주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저주 속에서 비로소 의가 나와요. 의는 어디서 나온다? 십자가에서 나오거든요. 십자가는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저주받는 거예요. 저주에 가담되지 않으면 의를 구현할 수가 없어요. 이 저주에서 나온 게 뭐냐, 율법이에요. 모세는, 율법은, 제발 좀 저주받으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뭐냐, 율법을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하니까, 제발 저주를 피하고 복 쪽으로 달려가는 겁니다. 복이 있는 쪽으로. 그러면 뭘 놓치느냐 하면, 자기 존재만 생각했지 중보자를 놓치는 셈이 돼요.
성경 여호수아에 보면 그리심산과 에발산이 나와요. 둘 다 900M 가까이 되는데, 여기에 에발산이 있는데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법궤가 있어요. 여기서 서로 마주보면서 6:6, 6지파, 6지파, 12지파를 나누어서 6대 6으로 나눠가지고 서로 뭐냐, 여기 그리심산에서는 축복을 앞에 보고 외치고 이쪽 에발산에서는 앞을 보고 저주를 외치는 겁니다. 그렇게 외칠 때, 저주를 외치는 지파에서는 거의 90퍼세트가 종의 자녀들이에요. 잡종이죠. 종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족보에서는 구원받지 못할 족보가 종이죠. 하갈 출신들. 그리고 이쪽에서는 정실부인, 라헬과 레아 출신들은 축복을 선포합니다.
자, 이렇게 할 때, 그들은 상대방이 저주한다는 말은, “이런 거 하면 저주받습니다.” 하면 상대방이 화답을 해야 해요. “아멘. 그러합니다.” “이런 거 하면 복 받습니다.” 하면 상대방이 “아멘. 그러합니다.” 화답을 해줘야 돼요. 근데, 이것이 민수기에 가면 온통 저주만 이야기하고 아멘을 해야 해요. 또 화답을. 자, 그렇다면 사람들은 율법을 봅니다. 율법은 뭡니까?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할 때에, 방향이 복을 받아야 돼야 겨우겨우 이스라엘이 유지된다는 인식이 들겠어요? 안 들겠어요? 당연히 들겠죠. 심방 가서 신명기 28장 펴놓고 할 때, 대심방 할 때,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할 때 그 뒷부분 이야기 안 해요.
1절부터 15절까지만 지켜야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했지. 나머지기, 무려 세 배, 네 배 되는 분량이 뭐냐 하면, 빌어먹는 거거든요. 심지어 레위기 같은 경우에는 니가 빌어먹으려고 작심을 했어. 백날해도 빌어먹게 되어 있어. 이게 레위기나 신명기나 마지막 대목이 그리 되어 있어요. 니가 하나님을 알아? 아이구 진짜 웃는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저주받게 돼있어. 너희들이 딴 나라에 팔려 갈 때에, 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몰랐구나. 그렇게 후회하면서, 팔을 치면서, 다리를 치면서 가거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독수리 날개 업어서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나오니까 사람들은 일이 끝난 줄 알고 “고맙습니다.”를 한 거예요. 집어넣어 놓고 빼내간다는 생각을 못하고. 집어넣어 놓고 빼내가야 제 2의 출애굽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지금 인간들은 연극배우들이거든요. 연극배우가 연극을 너무 하다보니까 이게 실제인줄 알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최불암 하고 김혜자 하고 너무 전원일기에 부부로 나오니까 사람들은 뭐로 봅니까? 전부다 부부인줄 알고 있어요. 부부 아니거든요. 둘이 잘 맞아서 부부 같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연극배우로 한 거예요. 요렇게 은혜로 왔다가 은혜로 온 것을 잊어버리고 까불거든, 까불게 되기 마련이고, 그래서 왔던 걸 그대로 다시 없애버린다. 그것은 뭐냐, 주께서 이 땅에서 구원할 때 오라고 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나를 부정하고 죽이고 그래서 아무도 자력으로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주께서 부활의 영으로, 성령으로 오셔서, 다시 부활의 능력으로 건져간다는 고걸 미리 보여주시기 위해서 구약에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구약에서.
이게 창조에 있어요.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땅하고 바다하고 동시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가 먼저 있고 바다가 물러가니까 땅 됐잖아요. 그렇잖아요? 바다는 2일이고 땅은 3일이니까. 바다가 주도권을 쥐고 있어요. 그게 예레미야에 나옵니다. 예레미야 31장에 보면 “바다야 땅을 침범하지 마!” 이게 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어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게 왜 언약 안에 포함 돼요? 기류에 의해서 바다는 땅을 침범하지 않는데, 이걸 왜, 약속 때문에 침범 안 하지 약속만 없으면 얼른 침범 했다는 뉘앙스를 준다 이 말이죠.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다니엘에 보면 바다에서 짐승이 나와요. 바다가 땅을 지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다에 사는 짐승이 땅에 모든 권세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통제력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동안 주님께서 바다야, 침범하지 마라는 말은 “바다야, 내가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와 있데이. 그러니 니가 어디를 쳐. 내가 있는데.” 주님이 떠나가 난 뒤에는 “바다야 니 맘대로 해!” 요한계시록에 짐승이 완전히 땅을 난도질을 해버려요. 온 천지에 완전히 인을 박아가지고 지 사람 다 만들어놨어요. 자기 사람 다 만들어놨어요.
그러면 바다가 땅을 침범한다는 것은 창세기 1장에 대한 부정이죠. 이게 혼돈이에요. 혼돈. 혼돈입니다. 창조의 의미는 창조 그대로 유지한다고 창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창조가 다시 원위치, 혼돈으로 가야 비로소 그때에 이 땅이 누구를 위하여 창조했는가를, 주인공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걸 제가 지난 설교에, 며칠 전에 주일 낮 설교 했잖아요. 창조로부터 출발하지 말고 창조에서 어디를 거친다? 창조에서 다시 혼돈으로 가서, 그러니까 살았다고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해야 누가 나를 살려주시죠? 주님. 천지를 창조하신 그 분이 우리를 살려주는 거예요.
천지를 창조하신 모든 프로그램, 원리가 우리를 살리는데 이것이 적용이 돼요. 우리를 살리는데. 그럴 때, 죽었다가 사는 거예요. 탕자가 그러하듯이. 탕자이야기 아시죠? 항상 맏아들과 대비해야 돼요. 맏아들은 뭘 기억하느냐 하면, 창조의 과거를 기억해요. 그러나 아버지는 탕자를 맞이하면서 뭣에 입을 다뭅니까? 자신의 아들에, 탕자의 과거에 입을 다물죠. 근데 누가 지껄입니까? 큰아들은 자꾸 말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지금 내 앞에 있다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왜? 이게 과정은, 아들이 탕자된 것은 하나의 오기 위한 과정이란 말이죠. 근데 니가 그게 누락된 거예요. 잃어버린 경험이 없으니까.
이거는 천국백성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경험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이 없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거든요. 뭐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들어가지 않으면 천국에서는 안 받아 줍니다. 안 받아 줘요. 거지나사로와 부자이야기에서 부자가 죽은 나사로의 존재를 보여준다는 데, 존재가 아니고 그 나사로는 연극배우에요. 실제 존재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아내지 못하면 동생들 다 지옥 갑니다. 성경에서 예수님 어떻게 찾아냅니까? 니가 죽지. 왜 죽을까? 늙어죽겠죠. 늙어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여서 죽는 거다. 주님이 죽여서 죽는 거예요. 왜, 주님이 먼저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내가 죽은즉, 예수님이 죽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는 거예요. 장신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성경에서는 복음을 찾는데 장신에서는 뭘 찾는 줄 알아요. 인권문제 찾아냅니다. 이게 옛날에는 안 그랬어요. 근데 십 수 년 전부터 바람이 불었어요. 인권문제, 그리고 통일문제. 미쳤어. 미쳤어. 이거는 미쳤어. 문재인, 뭐 박근혜 문제. 이게 성경에 왜 나옵니까? 좀 젊은 사람은 생태학문제. 환경문제. 세상에 지금 말아먹으려고 하는데 환경 따져서 뭐하는데. 유기농법. 여러분 유기농법이 환경 망치는 거 몰라요? 환경 망치는 거예요.
유기농법은 환경은 망치고 인간은 살겠다는 수법이에요. 놀랍게도 유기농법이. 땅과 더불어 산다? 인류는 땅을 살릴 수가 없어요. 인류는 가만히 놔둬도 땅이 썩게 되어 있어요. 거기다가 뭔가 농사라도 짓는다 하면 더 썩어버려요. 소금기가 계속 있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한다는 자체가 죄입니다. 존재하면 죄에요. 바르게살기, 바르게 살고 말고 내가 여기 있다는 자체가 주변에게 피해를 줘요. 주변에. 집에 화장실이 하나인데 식구 네 명이 있으면 피해줘요. 아버지가 들어가서 신문 보죠. 마누라하고 딸은 나오라고 쿵쿵거리죠.
내가 여기 있는 게 왜 피해를 주느냐 하면 이 세상은 경쟁사회거든요. 내가 이 회사에 취직했다. 다른 사람이 울고 있어요. 뭐, 바르게 산다구요? 니 때문에 밟힌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뭐, 무역회사에 미생 되어서 슬프다고요? 장그래가 어떻고? 거기 못 들어 간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지만 생각해요. 이 율법이, 모세 율법은요, 오실 그리스도를 위해서 한 것이지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주신 율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니가 율법을 도용해서 나를 막고 있다.” 이게 바로 본문이에요.
예수님 증거 하라고 준, 니가 죄인이란 것을 알려주는 율법을 가지고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살리는 하나의 개념으로서 그걸 도용한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 자리를 바꾸지 아니하면 자기밖에 모르죠. 어떻게 바뀌어야 되는가. 죄인으로 바뀌어야 되죠. 죄인으로 바뀌는 방법은 뭡니까? 유일하게 죄를 알고, 유일하게 의를 갖고 계신 그 분이 이 땅에서 죽음으로서, 나도 죽어야 되는구나! 를 알 때 비로소 알죠. 그렇게 아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사도바울이죠. 어떻게 알았습니까? “사울아, 니가 나를 핍박하는구나.” 자기는 단독으로 행동하는 줄 알았는데 나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게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이 논리가요, 사도바울은 그걸 알았지만 논리가 성립되지 않아요. 싸가지 없는 인간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제가 언제 예수님 힘들게 했어요? 나는 예수님 만나보지도 못했는데.” 이래 나올 거란 말이죠. 그런데 주의 말씀이 특징이 뭐냐 하면, 주의 말씀과 동시에 믿음도 같이 오기 때문에 이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멘이에요. “제가 핍박한 거 맞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는 알고 보니까 예수님의 껍데기로, 예수님의 역할로 살아있는 것이고 진짜 그들 속에 살아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것으로 그걸 알고 로마서, 갈라디아서 쓴 거예요.
십자가는 과거일이 아니고 성도 안에 십자가가 박혀있다는 사실을 전하잖아요. 율법 외에 한 의가 그겁니다. 십자가 화목제물이 들어 온 거예요. 그러면 그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면서 남 욕할 것 없어요. 누가 죄인입니까? 내가 죄인이죠. 아까 그 키드이야기 했죠. 애들 장난감 샀는데 부속품이 뭐 남아. 보니까 십자가라. 이거 쓸데없는 것 왜 있지? 이거 없어도 교회 잘되는데 이거 왜 있지? 그거 있으면 교회 안 되죠. 갖다버리죠. 갖다버리는 것은 그 교회가 지금 통째로 지옥으로 버스 모는 거예요. 버스 몰고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십자가 들어있지 않는데 교회부흥 되죠. 왜?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부흥될 수밖에 없죠. 그거 당연한 거죠. 당연한 거.
우리교회 오시면 부자 됩니다. 우리교회 오시면 병 낫습니다. 나라도 그 교회 가겠다. 안 믿지만. 안 믿지만 해보는 거예요. 혹시나 세 가지 중에 한 가지 될까 싶어서. 갓바위처럼. 그 교회가면 뻔하죠. “목사님 어떻게 하면 복 받습니까?” “열심히 하면 됩니다.” “열심히 해도 안 되네요.”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어떻게 믿어야 됩니까?” “어린아이처럼 믿어보세요. 되지요.” 하나님은 어린아이의 믿음을 좋아합니다. 이 수법이 이 수법이거든요. 그러면 결국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처럼 됩니다.” 어떤 목사? 좋은 차타고 다니는 목사. 나처럼 복 받지 뭐. 대우 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안 보이니까 저러잖아요. 성도는 안 보이는 분 때문에 사는데, 성도 아닌 사람은 안 보이는 것은 제쳐놔 버리고 보이는 사람을 찾아요.
돈 많은 장로. 아주 대학교수 총장 같은, 그런 유명인사가 우리교회 나오는 거. 작가 있잖아요. 이어령 같은 사람 좀 우리교회 오고. 그 다음에 노래 잘하는 알리가 우리교회 오고. 알리 참 모르죠? 권투선수 알리 아닙니다. 노래 잘 부르는 여가수, 가스펠송도 잘 부르고 하는. 또 기독교 신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 그 사람도 오고. 또 그런 사람들 오라고 붙들어서 돈 주고 간증하고. 개그우면 신보라 또 부르고. 요새 차범근이 부르는지 모르겠다. 때려 죽여도 복음을 아는 사람 안 부릅니다. 복음 아는 사람은 안 불러요. 복음만 말하는 사람은 절대 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결국 교회가 아니고 친목단체입니다 하는 것을 까발리는 게 돼요. 친목단체. 환상에 빠진 사람들.
요한복음 6장 해봅시다. 5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고소한다고 했죠. 결국은 너희들이 고소한다는 말은, 내가 너희를 고소한다는 말이 되죠. 그러면 고소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이 먼저 고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먼저 고소해야 되죠. 완전히 예수님의 세계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주님의 계획대로 척척 잘 되어 가요. 알아서 자기를 죽여주니까. 주님께서 또 자극을 줘요. 또 약을 올려. 예수님의 공생애 보면 그 유대인들이 굉장히 점잖은 사람이에요. 얼마나 점잖은가 하면 많은 악당들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 하나님께서 처리하겠지. 이 정도로 대범하고 대승불교적인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 정도 돼야 또 존경받고. 그냥 촐랑대는 성직자면 존경 안 받잖아요. 자도자급 되려면 어지간한 일에 눈 깜짝 안 하고 점잖은 평화를 유지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언제 그걸 가만두지 않고 언제 작업을 했냐면은 성전 뒤집을 때, 그들의 속 뒤집어졌습니다. 왜, 성전이라는 것은 일 년 대목이라니까요. 그리고 성전세를 거둘 수 있는 근거가 성전이 있기 때문이에요. 너희들이 돈 안 주면 성전 날라가고, 하나님이 떠나버리시면 너희들이 무슨 수로 구원받을래? 우주선 가버렸는데, 무슨 수로 비행기 타고 갑니까? 우주선 가버렸는데. 따라서 그들은 죽으나 사나 붙들어야 성전 타고 천국 가는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이 죽으나 사나, 누가 오든 무조건 교회만이니까. 목사님은 하나님이 다루겠지. 우리가 다루겠나. 이래가지고 그저 교회만 등록하면 구원받겠다는 단순한 생각. 교회 어른들은 하나님이 뭐 알아서 조치하고 우리는 그런 것 안 해도 그냥 교회만 있으면 돼. 교회만 유지되면 고마워하며 오는 사람들.
그 교회를 건드렸잖아요. 그 성전을 건드렸다고요. 기도하는 집은 나다. 성전은 고정되어 있고 예수님은 움직이죠. 그러면 기도하는 집은 어떻게 돼요? 장소 개념이 날아가 버리면 건물 개념도 동시에 날아가 버리고. 동시에 이거는 기도할 곳이 소유할 수 없어요. 그래야 돼요. 기도할 곳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 말이죠. 주님이 우리를 소유해줘야 주 안에서 기도가 되지, 내가 주님을 소유해서 하게 되면 이거는 주님을 완전 인질로 삼는 거 밖에 안 돼요. 그래서 제가 어느 설교에 했잖아요. 오늘날 교회는 인형 목 조르는 것이라고. 인형하고 나 안 놀래. 인형 목 조르는 것처럼. 인형은 자기 소유고 강압할 수 있다고 본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일조로 달래가지고 십일조는 내 거 만들어 놓고. 주님 내 거 만들어 놓고. 십일조 했으니까 자기도 양심 있으면 외면하지 않겠죠. 돈 안 좋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돈 줬으니까. 예수님은 꼭두각시라. 막 돈 값을 하는 거예요. 갑질해요. 돈 먹었는데 응답해달라고. 갑질하는 거예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안 하기만 해봐라. 저 사람 두 시간 했는데 나는 세 시간 해서 복 더 받고. 저 사람 아들 연세대 갔으면 내 아들은 서울대 가고. 이게 경쟁의식이 되어 가지고 돈 막 하는 거예요. 이거 뭐 자기가 불붙었어. 처음에는 목사가 번개탄에 불 피워놓고. 저그끼리 알아서 불나게 한 거예요.
그렇게 하도록 주께서 일부러 자극을 주죠. 성전을 뒤집어버리니까. 이게 무슨 성전이야? 그러면 주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은 어떡해하란 말입니까? 그럼 “메시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깨끗이 해놓겠습니다.” 이러면 성전 됩니까? 그거는 존재거든요. 지금 성전 뒤집는 것은 기능이다 말이죠. 이 기능을 하시는 분이 누군가를 봐야 될 건데. 그들은 누가 왔든 이 성전만큼은 사수하려고 하니까 이게 더욱더 자기의 구원을 훼방하는 겁니다. 놓아버리면 되는데. 사마리아 여인이 이래 물었어요. “그리심산입니까? 예루살렘입니까?” 물을 때에 주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 했죠. 그 말은 뭐냐 하면 니가 뭘 한다는 것은 내 존재를 확인하는 것으로는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안 돼요.
피를 부어버리면 여자 안에서 생수가 되게 돼있습니다. 십자가 피게 오게 되면 여자 안에서 생수가 되면서 여자가 우물이 돼요. 우물에 물 길러 갔던 여인이, 본인이 우물 됐다니까요. 그러니까 본인이 우물 되었으니까, 거기서 뭐가 나오죠? 생수가 나오죠. 그럼 그 여인은 뭡니까? 그 여인은 더 이상 자기 소유가 아니고 주님께 소유된 사람이죠. 그게 바로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성전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주께서 찾아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자, 요한복음 6장 봅시다. 요한복음 6장에서 여러분들이 예상하듯이 재미있는 게 참 많아요. 많은데, 이거 6장보기전에 이번 수련회에서 했지만 민수기 잠시 봅시다. 제가 은혜를 받았어요. 민수기 16장 41장. 제가 강의할 때 읽으면서도 얼마나 은혜 받았는지요. 41절.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 하고.” 지금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달려드는 이유는 31절에 보면 땅이 갈라져가지고 고라자손이 죽었죠. 그러면 뭐 한 사람 같으면 저 사람이 왜 죽었을까? 하나님이 왜 죽였을까? 이걸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백성들은 뭐라 하느냐 하면, 왜 죽었는지 이유는 안 따지고 “왜 죽였어? 왜 죽였어?” 이래 나온 거예요. 그리고 “니들의 임무는 우리를 계속 살리고, 살리고 이게 임무지, 니가 무슨 자격으로 사람을 죽이느냐? 하는 그 문제고. 그리고 달려든 사람이 누구한데 달려들었습니까? 모세와 아론에게 달려들었죠. 근데, 땅이 갈라졌는데 모세가 삽질했습니까? 모세가 조폭이었습니까? 땅파가지고 사람 묻었습니까? 누가 생매장 시켰습니까? 누가 땅이 갈라지게 하고 생매장 시켰습니까? 하나님이지 모세가 아니다 말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하나님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저 모세 니가 책임지라는 겁니다.
근데, 제가 이 본문을 언급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요한복음 6장하고 똑같아요. 떡을 주니까, 예수님이 이게 겹쳐있으니까, 예수님은 이 땅의 사람과 하나님과 겹쳐 있잖아요. 겹쳐있는데 뭐로 보느냐 하면 사람으로 보는 거예요. 위대한 지도자로 보는 거예요. 위대한 리더쉽으로. 여러분 리더라는 없어요. 성경에 리더라는 것은 없어요. 사사기에 리더라는 것은 없어요. 지도자는 없습니다. 이거는 제 말이 아니고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너희 지도자는 누굽니까? 너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고 너희 지도자는 누굽니까? 그리스도시죠.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앞에 뭐라고 해요? 땅에 있는 사람을 너희 아비라 하지 말라고 했죠. 또는 지도자라 칭하지 말라고 했죠. 그냥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앞에 뭘 강조했죠.
땅에 있는 사람을 지도자라, 땅에 있는 사람을 아비라 하지 말라고 해놓고 누굴 댑니까? 바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지요. 이게 뭐냐 하면, 1+1+1...다수성이 있을 때, 다수성은 반드시 자기들 닮은 추상적인 1을 자기들이 끄집어내버려요. 그러니까 이 1은 뭐냐, 자기 일부가 돼버려요. 이게 바로 인간 모든 조직체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들면 그들은 빼내고 또 다른 사람 끼워놓고. 교회 지도자가 누구십니까? 이건 내가 묻는 게 나쁘지만. 교회 지도자 누구십니까? 그리스도죠. 그리스도가 안 보이니까 지도자 바꾸면 교회 된다는 거예요. 교회는 되는 게 아닙니다. 이미 교회는 확정되었어요. 그리스도가 머리로 확정된 동시에 교회가 확정되었어요.
그러면 지상의 교회는 뭐냐, 확정된 교회를 나타내기 위해서 기존의 교회를 삭제 시켜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교회 불나는 것은 뭐냐, 지옥 좀 보내줘야 불나지만. 교회 불태운다는 말이 아니고 교회 다니더라도 교회로서 다니라 이 말입니다. 교회되려고 다니지 말고, 이 교회 만들기 위해서 다니지 말고, 그리스도인으로 다니라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성도는 뭘 느끼겠습니까? 교회 가서 이거 교회 아니네. 그걸 느낀다는 것은, 그걸 배운다는 것은, 진정 그 사람이 하나밖에 없는 그 교회 소속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제직회 장로, 집사 할 때 3분의 1로 합시다.” “목사님. 그거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그러면 목사가 하는 말이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교회법입니다.” “교회법이 하나님의 계시는 아니잖아요?” “계시는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목사님. 전통을 지키는 것은 천주교인데 왜 개신교가 천주교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좀 있다 이야기합시다. 당회실에서 만납시다.” 그 다음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누가 가르쳐 주더냐?” 이래 나와요. 이거는 니 지혜가 아닌 것 같고 뒤에서 가르쳐 준 것 같다고 이래 이야기해요. 그거 말하면 나만 욕 얻어먹어요.
인간의 전통은 죄의 전통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섞일 수가 없어요. 근데 제직회 3분의 1을 하겠다? 2분의 1을 하겠다? 그게, 그것이 바로 교회법이에요. 교회법이 있어야 그리스도가 또 죽어요. 법 만드세요. 또 죽이세요. 분명히 성경에 의해서 천국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돼요. 법도 모르고 예수님만 찾아온 사람이, 법 많이 아는 60년 근속근무한 사람보다 천국을 가요. 세리, 창기가 바리새인보다 천국에 먼저 간다고 했잖아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런 교회를 많이 만들어 놓은 것은 진짜 성도와 가짜 성도를 가려내기 위해서 꼭 마귀가 필요했던 겁니다. 꼭 마귀가 필요한 거예요.
요한복음 6장은 그들을 1로, 다수성으로 봤어요. 남자만 해도 오 천 명이죠. 1+1+1+,,.오 천 명이죠. 뭘 봤습니까? 예수님을 봤죠. 예수님은 뭐냐, 재료로 안 보이고 1로 보이는 거예요. 왜, 소문났으니까. 기적 일으켰다고 소문나고 말씀 좋다고 소문났으니까. 1이 되는 나를 살리기 위한 1인 거예요. 인간은 항상 자기 우선이에요. 내가 1이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1이 되는 거예요. 왜, 내가 의미 없으면 그리스도도 의미 없다고 보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으매 그리스도도 여기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 끝에 가면 아무도 이 사람들, 아무도 주님과 같이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걸 우리가 미리 땡겨서 그걸 염두에 두고 처음을 봐야 돼요. 떡을 먹고 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먹었습니까? 그냥 맛만 봤습니까? 배부를 정도가 아니라 배터지게 먹었죠. 왜? 배터지게 먹은 이유가 뭐냐, 남았다는 것은, 어지간한 남자 같으면요. 남기는 거 싫어하거든요. 남기지 않을 텐데, 도저히 들어갈....아마 주님께서는 남은 것 까지 다 먹었다면 계속해서 고기를 또 했을 거예요. 결국 이것은 뭐냐, 홍해에서 그런 것처럼 그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26절에 나와요.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결국엔 인간의 한계는 뭐냐, 배만 부르면 돼요. 배만 부르고 그 다음에 나온 게 뭐냐, 이럴 것 같으면 우리의 1, 초월자 1, 절대자, 지도자. 임금. 여기 본문에 임금이라고 되어 있죠. 우리 임금 삼겠다고 쫓아 온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필요했다 이 말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필요하오. 이런 뜻이에요. 우리는 악착같이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을 붙잡고 싶어서 나온 것입니다. 붙잡고 싶다. 그러면 주께서 목회할 의사가 있으면 “이참에 개척교회 한번 해봐?” 오자마자 오천 명 개척교인이 어딨어요? 그것도 남자만. 가족들도 다 나올 거고. 해 볼 텐데, 오히려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들이 따라오는 뜻이 수상하다는 겁니다. 순수하지 못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은 너무 가혹한 말이에요. 왜냐하면 배부른 것이 인간의 한계거든요. 배부름과 그 다음에는 배부름을 채워줄 지도자, 그걸로 끝났어요. 그 분만 있으면 계속 배부르니까. 배부름이란 납작 차원에서 인간은 벗어나고 싶지 않아요. 배부르면 됐지. 뭐. 그리고 그 배부름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본 겁니다. 근데 주님은 한계에 도달시켜 놓고 그 한계를 완전히 망쳐버리죠. 너희가 순수하지 않다는 거예요. 근데 그 말이 그 사람들에게 가혹한 이유가 순수한 것을, 뭐 맛을 봐야 이야기 할 건데, 끄집어 낸 것 다 한계까지 끄집어냈는데, 끄집어낸 것이 배부름인데 무슨 순수함이 있어요. 무슨 순수함이.....,
그러니까 주님께서 억지를 쓰신 거죠. “배부른 까닭이라” 그들도 할 말이 있죠. 분명히 배부르라고 준 거잖아요. 왜냐하면 처음에 보세요. 처음에 배부른데 떡과 고기를 줬습니까? 주님의 하신 말씀은 논리가, 모든 말씀이 앞뒤가 안 맞아요. 완전히 약을 올리는 겁니다. 사무엘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약속시간 자기가 어겨놓고 사울이 제사먼저 드리니까 내가 오기 전에 왜 제사먼저 드렸습니까? 세상에 이런 억지가. 너무 심한 억지에요. 진작 이야기하지. 그럼 기다리지. 미리 사전에, 제사 드리기 전에 스마트 폰 가지고 늦는다고 하면 기다리지. 죄 짓는 거 기다렸다가 달려드는 그런 비겁한 것이 어딨어요?
주님은 그것보다 더 비겁해요. 니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문제가 ‘가’ 있고 ‘나’ 있으면 ‘가’ 아니면 ‘나’ 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가’라고 해놓고 왜 ‘가’를 정답이라고 따진다면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모르는 상태에서. 가라 이 말입니다. 배불렀지? 좋지? 좋거든 가! 다시 가! 가버려! 바로 이 세상이 좋아하는 임금하고는 전혀 다른 타입으로 옵니다. 배부른 것의 반대말이 뭡니까? 배부름이 아니고 그거는 아까 no, non 같은 거, 살지 않는다는. 배부름과 배고픔의 근거가 뭐냐 하면 일단 사는데 도움 되느냐, 보탬 되느냐. 그럼 배고픔의 반대말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거. 살지 않는 거.
니가 떡을 먹고 배부를 생각하지 말고 내 피와 살을 먹어라. 다시 말해서 내 죽음에 같이 참여해라. 그러면 산다. 그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아멘”한 것이 아니고 “어렵다.” 어렵다는 말 앞에, 참 말을 잘 했어요. 어려운 게 아니고 받아들이기에 참 곤란하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어려웠으면 그 다음 무슨 말이든 다가와야 되잖아요. 어려우면, 1단계했으면 2단계 가야되잖아요. 쌤요! 하고 쉬는 시간에 물어봐야 돼요. 그게 아니고 받아들이기에 어렵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더 가관입니다. 그들이 어려워서 간 게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제자들은 어떤 장단에 맞춰야 할지 제자들은 헷갈리는 거예요.
이게 차원이 두 개가 동행하다보니까, 숨어있는 차원과 보이는 차원이 동행하다보니까, 주님께서 왔다 갔다 이야기하니까, 제자들은 보이는 차원밖에 모르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이해가. 이해가 안 된다고 하니까 주께서 하는 말이 이런 말이에요. “때가 되면 이해될 때가 올 것이다.” 그럼 그때 가서 정답하고 한꺼번에 해주지 미리 땡겨서 하느냐. 너도 나를 배반하기 때문에. 왜? 배반해야 해요? 배반해야 잃어버린 양을 찾지. 왜 그래야 하는데? 그래야 니 공로로 구원 못 받지. 이게 궁극적인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게 주의 뜻이에요. 인간은 들러리고 주님이 혼자 밀고 땡기고. 북 치고 장구 치고. 주님이 혼자 다 했다는 것. 그게 바로 천국이고. 주님의 공로만 드러나는 나라가 영원한 영생의 나라입니다.
인간의 행함은 이미 행할 대로 다 행했어요. 뭐냐, 선악과 따먹을 때 인간의 지 행함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행함은 이미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인이기에 죄인 티를 내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행함은. 죄 티를 내는 거지 새삼스럽게 죄를 지었다고 더 죄인 되는 건 아닙니다. 다윗이 말하기를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거예요. 그리고 다윗은 더 놀라운 이야기합니다. 내가 사람한테 죄 짓지 않았다. 내가 죄 지은 것은 하나님께 죄 지었다. 아!!이 뻔뻔함. 싸다구 날려도 시원찮은데, 이런 뻔뻔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뻔뻔함이. 사기치고 니한테 죄지은 게 아니고 나는 주님한테 했으니까 주님한테 갚으면 된다. 이런 소리하고 똑같은 것이거든요.
근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운명하고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처럼 고백하지 않으면 내 백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겁니다. 왕이 그렇게 고백했다면 이제부터 남은 일은 주께서 그 왕처럼 고백하는 백성들 만들기. 그거는 주님의 소관입니다. 어떻게 만드느냐. 다윗의 고백을 유도하는 식으로. 그러면 우리는 살인하고 간음하고 다 할까요? 아니에요. 모든 죄의 특징은 뭐냐, 모든 죄의 특징은요, 경계선이 없어요. 여러분, 살인죄하고 간음죄하고 따로따로 노는 것 같죠? 따로따로 노는 게 아닙니다. 경계선이 없습니다. 마치 아침에 갓 만들어낸 식빵 같아요. 기다란 식빵, 칼 가지고 봉우리 세 개면 세 개 잘 잘라야 돼요. 그런데 자른 면이 이쪽 봉우리 면인지 이쪽 봉우리인지 저쪽 봉우리인지, 참, 그게 고민거리는 아니지만 깔끔하지는 않죠.
차라리 식빵이 봉우리 하나로 나오면 좋겠는데, 세 개 나온 것을 자르라 하니까 내가 이 옆에 봉우리 섭섭하게 잘라 먹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모든 죄는 볼록이 종기고 그 밑바닥은 우리 신체입니다. 볼록 볼록 나온 종기에 불과해요. 발전된 거예요. 간음죄 한 인간이 살인하고, 살인한 인간이 간음하고, 맨 그 인간에게서 나온 거예요. 혓바닥 붉으면 등허리 붉고 거기서 다 나온 거란 말이죠. 그걸 통합해서 ‘육’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육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도 ‘육’이라고 하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게 얼마나 주님의 넉살입니까? 한번 짤라봐. 짤라봐. 오른손, 왼손 잘라봐. 이게 됩니까? 안 되지.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이게 된다? 안 된다? 이게 불가능하다.
사실은 니 몸의 정체가 뭐냐를 이 산상설교로 다시 파헤쳐져야 한다는 거예요. 니 몸이. 그리고 산상설교 끝나고 난 뒤에 온 몸에 문둥병 걸린 자가 졸지에 뭐가 됩니까? 갑자기 온 몸이 깨끗하게 되죠. 문둥병자가 간음죄만 용서받고 살인죄는 용서 안 받고 그런 게 어딨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용서할 때는, 베드로에게 발 씻어 준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발 말고 여기도 씻어야 되는데. 이거만 씻기면 전신을 씻긴 게 돼요. 전신을. 왜냐하면 주님의 몸이 우리 몸 안에 전신에 다 담겨있기 때문에. 그걸 우리는 추후적으로, 차후에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비로소 알죠. 죄 지어서 죄인 된 게 아니고, 죄인으로 태어났고, 죄 지었고.
죄인으로 태어난 것을 미리 아시고 창세전에 우리를, 그 죄인이란 재료가 주님의 은혜에 필요한 재료로서 사용하게 하시려고 잠시잠간 이 땅에 출생케 하셨군요. 라는 고백을 하게 되죠. 성경 본문 가지고 항상, 창세전부터 창세후까지 전체를 다 볼 수 있어야 돼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2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참, 이 말 억수로 오해하죠. 믿으면 됩니까? 란 말이 나온다는 건, 그거는 오해해도 보통 오해한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은 기능이기 때문에 니를 존재로 취급을 하지 않아요. 니라는 존재는 기능 속에 포함된 존재지, 단독 존재가 아니에요. 니가 믿게 되는 날이 오는데, 그거는 내가 믿게 한 예언의 말씀이, 아들의 일로 말미암아 아들의, 나의 작업 속에 포함이 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 말은요, 우리가 지키라고 한 것이 아니고 주님 본인이 알아서 지켜요. 나를 믿으라는 말도 주께서 그 말씀대로 믿게 하실 때에, 우리는 차후에, 사후에, “주께서 믿게 하신 게 맞군요. 말씀이 예언대로 됐군요.” 고백할 때 그게 믿음이라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겨자씨만한 믿음 있어도 예수님의 큰 믿음과 마찬가지로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라하면 빠지죠.
자,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 가지고 산이 뽑혀서 바다에 빠졌다면, 그럼 겨자씨만한 것보다 좀 더 컸다면 지구 전체를 들었다 놨다 했겠네요. 그러니까 그 소리 듣고 얼마나 걱정했겠어요. 그러니까 나는 산을 못 옮기니까 내 믿음은 뭐 보다 작다? 겨자씨보다 작다. 그럼 겨자씨를 나누면 되겠네요. 둘로. 그럼 나는 겨자씨 반쪽만한 믿음이니까 산을 하나를 못 옮기고 반쪽만 옮기려니까 그것도 안 되니까 그럼 더 쪼개야 되겠네. 그러면 분자수준. 원자수준. 나중에 나노수준. 전자학까지. 앞으로는 양자역학까지 나올 참이에요. 기어이 고놈의 믿음 가지려고.
믿음이 있을 것 같으면 주님을 믿죠. 그러나 아무도 믿지 못하잖아요. 열 두 제자도 못 믿죠.
믿음을 갖지도 못하는, 믿는 구조가 못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안 되는 구조에 믿음 생기게 할 때 그건 니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약속을 내가 실현 방향으로 했다고 했을 때 주께서 하셨다는 말만 하라 말이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그 말만 하게 되면 천국에 이미 들어간 사람의 특징이 그거라 이 말이죠.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게 되면 성령이 임하면 누구의 증인? 나의 증인 아니고 누구의 증인? 그리스도의 증인. 증인되리라. “목사님. 저 어떻게 살면 됩니까?” 이거는 나보고 할 질문이 아니고 주님이 “니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리라”
그리스도만 증거 하는 증인이 된다면 이거는 내가 한 게 아니고 성령께서 그렇게, 주님께서, 주의 영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우리는 뭐 증인에 불과하고. 어쨌든 간에 큰 운동장 같은 곳에 오천 명이 있고 떡이 모자라고 한다 이 말이죠. 주님이 이 떡을 이렇게 사용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떡 준 것은 그 사람들을 놀리기 위해서 쓸데없는 떡을 줬구나, 하는데 쓸데없는 떡이 아닙니다. 그 떡을 주님께서 두 가지로 사용해요. 요한복음 같으면 떡을 만나와, 생명의 떡과 연관시키고 마태복음에서는 떡 속에 누룩이 들어있다는 것을 감안해서 만나를 이해 못하면 전부다 누룩이 된다는 거예요. 죄가 된다는 거죠. 그러면 예수님의 떡은 뭐냐, 배부르라고 준 게 아니고 내 사람과 내 사람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주의 이름의 기능입니다. 분류기능이죠.
받아먹기는 했는데 다 떠나 버리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니도 가지? 왜?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음에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 안 간다는 말을 했어요. 베드로가 그렇게 이야기 했죠. 안 간다고 해놓고 지는 닭 우니까 세 번씩 부인하고.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버지가 부르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고 내가 너희를 택했다. 근데 그 택한 중에 누구냐 하면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라고 했어요. 이게 바로 제가 민수기 수련회 하면서 그 이야기 했죠. 카드 쌓는 놀이. 분명히 카드 열장을 쌓게 되면 카드에 힘이 전부다 10분의 1로 골고루 간다고 생각을 하죠.
그게 바로 오산이었습니다. 카드 하나 빼버리니까 다 무너졌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카드 하나하나 마다 전부다 10분의 10, 10분의 10, 10분의 10....이 되는 거예요. 가룟 유다가 일을 다 망쳐놔요. 열 두 제자 한 사람이 주님도 팔아먹고 제자들을 다 흩어지게 만들었어요. 이것은 뭐냐 양적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고 질로 따지는 문제다. 요걸 바로 어제 수요일에 “성전측량”설교에서 했습니다. 치수 잴 때 왜 재냐 말이죠. 치수 잰다는 것은 실체가 있다는 말인데, 재는 주인공이 누가 재죠? 사람이 잽니까? 천사가 잽니까? 천사가 재니까 비-실체에요. 실체와 비실체가 겹치니까. 인자. 이걸 누구한테 이야기하느냐 하면, 인자. 인자가 누구냐, 장차오실 메시아에요. 그 당시에는 에스겔이지만. 인자의 기능이 바로 실체와 비-실체를 포함해서, 실체 가운데서, 실체를 두고 내 사람과 남의 사람을 분류할 수 있는 작업을 하는 분이 인자라고 하는 겁니다.
자,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우리는 본격적으로 시작을 안 했습니다. 전체 대략만 이야기했는데, 하나는 배고파서 어떻게 먹게 하겠습니까? 라고 했고 거기에 대해서 주님은 이 땅의 사람으로서 다 간섭했을 때 예수님이 처음부터 이런 낯선 이야기를 한 게 아니고 처음에는 떡 문제에 다 관여했어요. 떡 문제에 관여되어 있는 떡의 존재를 영생의 존재로 바꾸기 위해서는 주님이 먼저 떡 문제에 같이 의논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주님의 다가 아니죠. 그런 모습을 주님은 우리 편이야 하면 안 되고, 그걸 통해서 주님은 뭔가 다른 걸 준비했는데, 그 다른 것과 연속성이 아니고 단절된다는 거예요. 죽고 살아나야지, 잘 순종하면 구원받는다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 단절시키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복음이니까, 십자가복음으로만 성경을 보려면 우리가 항상 책망 받는 자세로 성경을 보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볼 때 내가 얼마나 잘나고 얼마나 훌륭할 수 있는가, 하는 의식을 가지고 보는 그것을 주의 성령으로 뜯어고쳐서, 주여, 얼마나 데이고 얻어맞아야 되는 것을, 마땅히 얻어맞아야 되고 죽어야 될 존재를 가지고 살려 주신 은혜를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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