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강-에스겔 43장 6-9절(왕들의 시체)150218-이 근호목사
126강-에스겔 43장 6-9절(왕들의 시체)150218-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15.23.137.195)
126강-에스겔 43장 6-9절(왕들의 시체)15021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3장 6절-9절입니다. 구약성경 1220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3:6-9
“들은즉 누구인지 전에서 내게 말하더니 사람이 내 곁에 서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 왕들이 음란히 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 문지방을 내 문지방 곁에 두며 그 문설주를 내 문설주 곁에 두어서 그들과 나 사이에 겨우 한 담이 막히게 하였고 또 그 행하는 가증한 일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노하여 말하였거니와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거하리라.”
하나님의 모든 일의 목적은 하나님이 계실만한 자리를 하나님 스스로 다듬어가고 만들어 가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실만한 곳이 어디냐? 평수가 몇 평이고 면적은 어느 정도 돼야 되고 그 장식은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있는 장소를 이스라엘 속에 있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 속에 있겠다고 하는 그 이유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처소를 만들 수 있는 그런 형편이 못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자기 처소를 자기가 만들어요. 그 만들어진 처소가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목적이 있지요.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곳. 나중에 알게 되지만 하나님은 함께 있을 때 그냥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왕의 자격으로 왕의 위상을 가지고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 말을 줄여버리면 이스라엘은 없다. 없는데 하나님이 있게 하셨다. 있게 했는데 이스라엘보다 먼저 이스라엘 왕이 있고 그 왕이 자기 자리를 잡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 상식에는 나라가 있고 그 다음에 왕이 있어야 되는데 성경은 왕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왕이 자기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생긴 나라가 있는데 그게 이스라엘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보기에는 뭔가 반대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게 성경적 사실입니다. 성경에 또 그런 것이 있어요. 원래 부모가 있고 그 부모가 자식을 낳게 되어 있지요. 인간세계에서는. 그런데 성경은 자식이 먼저 있고 부모가 나중에 있어요. 반대가 되어버렸어요. 부모한테 효도한다는 그 개념이 이상하게 되어 버렸어요. 아브라함의 자식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아브라함이 있고, 다윗의 자손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다윗이 생겨나는 거예요. 선조가 나중에 생기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이스라엘이 없다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나라는 인간들이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아야 될 것은 ‘내 나라가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나라가 있다.’ 이렇게 하지 말아야 됩니다. 이스라엘을 언급할 때는 그냥 언급하지 말고 ‘내 나라 여기 있다. 그리고 내 나라의 왕이 있는데 그 다음에 그러면 이 세상에는 각자의 민족이 있고 각자의 왕이 있다. 끝. 그런데 웬 왕이 등장하지? 저 왕이 만든 나라는 어디일까? 어? 이스라엘이네.’ 이렇게 돼야 돼요. 왕을 경유해서 이스라엘을 언급을 해야 됩니다.
이 사실은 신약시대에 비로소 성립되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 왕이에요.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왕을 찾으러 왔다.” 자신이 먼저 왕으로 오셔서 그 다음에 예수 믿는 사람만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의 이스라엘은 뭐냐? 이스라엘 아니지요. 왜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하고 묻는다면? 그들은 이스라엘이 먼저 있고, 자기가 사는 나라가 먼저 있고 자기 사는 형편 좋으라고 왕을 뽑은 거예요. 순서가 이스라엘을 위한 왕, 이스라엘을 존속케 한 왕, 그런 왕을 뽑아 세웠으니까 그들은 가짜 이스라엘이 되어서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에스란 느헤미야 이후에 이스라엘이 망합니다. 그 후에 이들이 다시 유다나라를 세우지요. 마카비전쟁을 통해서 자칭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여기고 또 사독제사장계열이라고 우기는 식으로 어설프게 뭘 만드는데 그것은 연출한 것이고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 살 궁리 챙기기 위해서 우리도 나라가 있어야 된다고 만든 가짜입니다. 저는 그걸 해프닝이라고 보거든요.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인생 자체가 다 하나님 보시기에 해프닝이에요. 나라가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하나의 연극처럼 왔다가 연극이 끝나면 홀연히 없어져 가는 것, 그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러면 해프닝이 아니려면 어떻게 하느냐?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를 해야 돼요.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의 말씀처럼 세상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만든 겁니다. 내 존재의미를 알려면 그리스도를 경유해야 돼요. 그리스도를 경유하지 않고 혼자 자기 존재를 붙드니까 왜 사는지, 왜 죽는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왜 꼭 이래야만 되는지,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가야만 하는지, 전혀 해답이 없습니다. 그냥 열심히 살지요. 떡국 준비하고 강정 준비하고 그저 열심히 살지요. 설날이라고. 그런데 설날도 해프닝입니다. 일시적인 기분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날 지나면 배나 나오지요. 너무 많이 먹어서. 또 다이어트 한다고 하고. 치과에 많이 가요. 당분을 너무 많이 섭취해서 이가 상해서. 이게 바로 보통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이 되시기 때문에 왕을 경유해서 이스라엘임을 자부해야 되는데 그렇지를 못했던 거예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거주하지만 특별히 그 안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거주하는 장소를 성전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나라한테, 그리고 이방나라한테 시비 거는 것은 심판, 세상을 물로써 또 불로써 멸망시키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내 자리 새로 만들겠다는 그것 때문에 하는 거예요. 저는 이걸 가지고 택지조성이라고 합니다. 택지조성. 서울에 가면, 사당동이나 봉천동가면 오래된 건물들이 있어요. 불도우자 와가지고 다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새로 세우지요. 그 미는 작업이 심판 작업입니다. “여기에 내 거할 아파트 세우련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하나님의 자신이 세운 계획을 어떤 경우라도 양보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냥 무조건 불도우자로 밀어붙여요. 심판으로 밀어붙입니다. 하나님이 거할 만한 곳이 아니라면 도저히 용서 못하겠다. 하나님은 딱 하나만 생각해요. 내가 거할 자리를 나는 반드시 친히 만들어낸다. 그것 하나만 생각합니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융통성이라고 하는 것은 털끝만큼도 없어요. 딱 자기가 거할 처소인 성전 만들기, 그것 하나뿐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설교 시작할 때, 목사가 설교 시작할 때 구원론부터 시작하는가, 혹은 예수님 중심으로 시작하느냐, 그것부터 먼저 파악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면 구원 받습니다.” 그것은 해프닝이에요. 기독교 자체가 해프닝이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은 자기 구원받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에게 구원론 이야기해버리면 전부 다 가짜로 만들어버려요. 집단적인 가짜가 돼버려요. “목사님,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주님께서는 “그 입 다물라.” “통촉하옵소서.” “그 입 다물라.” “주여, 윤허하여 주옵소서.” “그 입 다물라. 어디서 네 계획을 가지고 나한테 들이대느냐?” 인간의 계획은 여기서 살고 또 살고, 그것이 인간의 계획이에요. 하여간에 죽기는 싫은 모양이에요. 베드로가 자기 구원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대단하냐 하면, 자기 죽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거래에 나섰습니다. 흥정에 나섰어요. “제가 목숨 바칠 테니까 넣어주세요.” 주님께서 “그 입 다물라. 네가 목숨을 내 놓는다 할지라도 네가 들어갈 장소는 없다. 네 구원의 장소가 아니고 내 처소다.” 주님의 처소입니다. 주님의 처소에 합류하는 것은 되지만 내 처소 따로 갖는 것은 인간에게는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두 번 다시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처소 없습니다.
단팥빵이 한국에만 있지 외국에는 없어요. 참 감사한데 단팥빵에 보면 앙금이 들어 있지요. 그 앙금을 보게 되면 색깔이 새까맣잖아요. 그런데 어떤 앙금 보니까 회색이 나요. 그 말이 뭐냐 하면, 모든 팥은 그 앙금 속에서 으깨져서 사라져버렸다는 겁니다. 주님의 처소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구원적인 욕구는 다 으깨져버려요. 심지어 우리의 목숨까지 내 놓겠다면서 흥정하겠다는 우리의 구원욕구는 주님의 십자가를 경유하면서, 주님과 합류되면서 우리 구원은 사라지고 주님 자신의 구원, 주님의 자기처소 만들기에 우리가 하나의 재료로서 휩쓸려 들어가 버리는 겁니다. 아예 갈아버렸어요. 갈아서 주님의 성전 만들기에 우리가 영광 돌리게 됩니다.
그 전에는 “나 구원시켜 주면 영광 돌릴게.” 이렇게 나오다가 “주여, 거룩한 주님이 계시는 곳이라면 저는 감지덕지 합니다.” 이렇게 바뀌어야 되는 거예요. 내 구원론에서 예수님 론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어야 돼요. 성경은 그겁니다. 어떤 인간이든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왔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설교를 통해서 바꾸어주는 기능을 해줘야 돼요. “구원 받으려고 왔지요? 그거 버리세요. 예수님께서 여러분이 구원 받기 이전부터 여러분을 태어나게 했습니다. 주님의 목적으로 소급해서 다시 생각하세요.” 이렇게 나와 줘야 돼요. 모든 성경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처소 만드는 일관된 작업에서 자기의 예외규정을 만들지 마세요.
오늘 본문에 보면 7절에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라고 나와 있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처소 만들면 되지 않느냐? 그런데 그 처소 만드는 작업에 있어서 여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7절에 보면,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 왕들이 음란히 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상당히 난해한데 하나님께서 처소를 만들 때 이 죄 많은 세상과 무관하게 하늘나라 따로 만들면 이런 이야기는 필요가 없어요. “애들아, 내가 처소 만들었다. 따라 올라오너라.” 이렇게 되는데 하나님이 처소를 어디에 만들었느냐 하면 이 죄 많은 지상에, 이 죄 많은 죄 속에서 처소를 만들기 때문에 주님이 처소 만드는 작업에서 반드시 장애물, 또는 방해물을 주께서 발췌하는 작업이 필요해요. 발췌하는 작업.
하나님이 어떤 업무를 하는데 있어서 그냥 아무 탈 없이 하시는 것이 아니고 일부러 어떤 장애요소를 품고, 그 장애요소를 딛고, 품고, 딛고 거기서 성전 세워요. 너 같은 저주받은 인간도 내 성전이 될 수 있다, 를 보여줘서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작업의 성사를 그렇게 만들어 내는 겁니다. 여기 뭐가 없는데 만들었다, 이러면 ‘참 하나님이 솜씨 좋으니 박수나 쳐주자.’ 이렇게 끝나는데 죄인으로 오셔서 죽고 그리고 성전 만들었다고 해버리면 ‘만들 때 그냥 수월하게 만들 수 있는데 왜 죄인한테 얻어맞지?’ 그것이 인간들은 납득이 안돼요. 인간들은 뭐 만들 때 그냥 뚝딱뚝딱 만들어내지 일부러 부서지라고 만들지는 않아요. 부서지고 그 부서진 것을 긁어모아서 다시 만드는, 이렇게 두 번 일하는 귀찮은 짓은 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두 단계를 가지고 일하신다는 말이지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이유는 물론 악마의 존재 때문에 그런데요. 인간은 그냥 인간이 아니고 이미 악마에 장악된 상태에서, 악마를 잡기 위해서 인간을 사용하는 그런 작업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의 주되심이 아버지와는 다르게 죄인 속에서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창세전의 계획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성전 만들기는 반드시 장애요소를 거쳐서 성전 만든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장애요소로 등장하는 것이 누구냐 하면, 여기 7절에 보니 이스라엘 왕들이에요.
이스라엘 왕. 이걸 좀 설명할 필요가 있는데 호세아 13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내가 분노함으로 네게 대통령을 주고 진노함으로 대통령을 폐하겠다.” 뭐 이런 이야기에요. “내가 분노함으로 김일성을 주고 진노함으로 김정일을 폐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세상 모든 민족들은 왕이 있고 지도자가 있는데 그 지도자는 없음에서 있음의 나라가 아니라 이미 있는 우리들의 존재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왕을 따로 뽑는 거예요. 그래서 “옛다. 그게 천국이냐? 그게 천국이라고 생각하지? 그래, 내가 너에게 왕 줄게.” 해서 각 민족에게 왕을 줘 버리는 겁니다.
왕을 줘 놓고 그 왕에게 시달리게 만들고 적당히 시달리게 한 뒤에 또 다른 왕 줘서 또 시달리게 만들어요. 남쪽 유다는 왕들이 굉장히 많아요. 르호보암 - 아비야 - 아사 - 여호사밧 - 여호람 - 아하시야 - 아달야 - 요아스 - 아마샤 - 웃시야 - 요담 - 아하스 - 히스기야 - 므낫세 - 아몬 -요시야 - 여호아하스 - 여호와김 - 여호와긴 - 시드기야, 휴~! 그런데 줄줄이 다 시체가 되었어요. 왜 시체가 되었는가? 좀 다윗처럼 훌륭하지 왜 그렇게 우상을 섬겨서 시체가 되었는가? 다윗이 훌륭해요? 사도행전 2장 29절에 보니까 “형제들이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다윗도 죽었다는 겁니다. 다윗도 죽었어요. 하나님의 메시아를 예언한 다윗도 죽었어요. 그 착한 다윗을 왜 죽입니까? 그것은 다윗의 자손이 먼저 있고 다윗의 자손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윗의 선조가 있는 거예요.
선조는 계속 죽어줘야 돼요. 왜? 메시아가 아니라는 이유로. 선조가 부활되는 경우는 그 선조 후손이 부활되는 경우에 맞추어서 부활이 돼요. 그래서 자기 인생은 없어요. 자기 인생이란 해프닝입니다. 그 해프닝을 의미 있고 제대로 된 의미를 갖추려면 자손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자손에 의해서 “선배님! 일어나세요.” 하면 일어나고 아니면 그냥 끝났어요. 엘리야도 모세도 주님께서 일으켜 주지 않으면 끝났어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이 “자, 이제 부활 하세요.” 하면 부활하고 “이제 용서 받았어요.” 하면 용서받는 거예요. 예수님만이 의인이고 아무도 의인이 없어요.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해서 의인이 없으니까.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고 죄인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죄인 되어야 되고 성도도 죄인 되어야 된다고 하니까 여기에 대해서 불만들이 많아요. 이 복음에 대해서. 뭐 죄인을 찬양한다고 해 쌌고 되도 않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데. 20세기 초반의 유명한 작가 카프카가 쓴 단편소설에 <유형지에서>라는 것이 있어요. 그게 단편소설인데 그 내용에 보면, 보통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벌을 받잖아요. 감옥에 간다든지 해서 노역을 하고 인간되는 교육도 받잖아요. 그런데 그 소설을 보면 형벌기계가 있어요. 인간의 몸을 하나의 용지로 보는 거예요. 그 죄인의 피가 잉크가 되고 그 사람이 지었던 죄가 그 죄의 몸을 용지로 삼아서 그 죄의 내용을 거기에 박아버려요. 글씨로 박아버립니다.
카프카의 아이디어가 멋진 아이디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왜 죽는가? 내 몸에 박혀 있는 나의 전력, 그 경력 때문에 죽는 거예요. 박아 넣으면 아프지요. 형벌기계라고 하는데 미싱 가지고 드르륵 박아버리는 거예요. 7살 때 오줌 쌌고, 9살 때 지각했고, 12살 때 패싸움하고 왕따 시키고, 17살 때 담배 피웠고, 드르르르륵 박아버리는 거예요. 24살 때 라면 끓이다가 어쩌고, 42살 때 교회 와서 감사치 아니하고, 52살에 돈 만 밝혀서 돈 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인 것도 모르고 살았다는 그 내용도 박아버려요. 온 몸에 글자가 박히는 거예요. 마치 요한복음 8장에서 주님께서 바리새인 몸에다가 글자를 새기지는 않았지만 땅에다가 글자를 쓰지요. 땅에 글자를 쓰고 난 뒤에 그들이 화들짝 놀래서 걸리면 죽겠다 싶으니까 자존심 챙기기 위해서 다 도망가잖아요.
왕들의 몸에다가 주께서는 형벌을 새겨서 그걸 계시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 많은 왕들. 오늘 본문에 나온 죄가 뭐냐 하면, 왜 성전근처에서 우상을 섬기느냐 하는 겁니다. 현대에 와서 성경, 특히 구약을 보면서 제일 납득이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뭐냐? 우상을 섬겼다고 그렇게 벌주는 것 있잖아요. 도대체 우상이 뭔데? 우상? 우산(UMBRELLA)인가? 우상이 뭐지? 현대인들은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에요. 무슨 우상을 섬겨요. 이 땅의 모든 종교는 존중해야 되는데 무슨 우상이 따로 있습니까? 우상이라고 지적 질 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독선적이지 않습니까? 자기 종교만 옳다는 거예요. 요즘사회에서는 우상이라고 잘 안하고 이단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단이라고 안하고 우상을 이야기하거든요.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로마서 1장에 보게 되면 …… 참,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이야기할 때 굉장히 억지가 많이 들어갔다는 느낌을 받는 게 하나님을 너희가 아는데 왜 우상을 섬기는가, 라고 나와요. 로마서 1장에. 그러면 그 소리 듣고 인간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하나님을 아니까 형상을 만들었잖아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 안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게 인간들이에요. 누구 말이 맞습니까? 각자 인간이니까 인간 말이 맞는 것 같지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라고 하거든요. 여기에 대해서 반박하는 거예요. 모든 종교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께 감화 감사하고 영광 돌리기 위해서 어떤 상징물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을 알되.”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한다면 “하나님을 알되.” 끝이에요. 결국 하나님을 알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어떻게 아는 티를 내게 되면 그 티내는 모든 것이 형상화됩니다. 상징화되고 형상화돼요. 예를 들어 길에서 우연히 동창생을 만났습니다. “야! 오랜 만이다. 너 하나님 아나?” “알아. 너도 아나?” “알아.” 마치 둘이 공통점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다는 인간이 금요일이 되니까 엉덩이를 쳐들고 절을 하는 거예요. 알라신을 향하여. 그러니 하나님을 안다는 게 뭐였냐? 알라신을 아는 거예요. 알라신인지 어르신인지 모르지만 하여간 아는 거예요. 알라신보고 어르신이라고 했다고 자기네 신 모독했다고 IS한테 테러 당할지도 모르겠어요. 하나님을 안다고 한 그 나머지 한쪽은 또 교회를 가네. 또 다른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회관으로 들어가네. 하나님을 안다는 그 인간은 또 여호와의 증인이네. 저쪽을 보니 또 하나님을 안다는데 참기름을 팔고 있어요. 기장이라는 곳에서. 박태선의 비둘기교회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네가 우상의 제조기라는 겁니다. 인간의 몸에 박혀 있는 모든 벌칙조항이 집결해서 만들어낸 것이 우상이 되는 겁니다. 왕들이 왜 이렇게 우상을 섬기느냐 하면, 인간의 몸이라 하는 것은 그냥 인간의 몸이 있는 것이 아니고 권력을 빨아들여서 자기를 주체화하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라고 내세우게 되어 있어요.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 땅이 가나안 땅인데 그 땅에 이미 신들이 있어요. 땅의 소유주를 가지고 바알이라고 하고 그 소유주의 아버지가 엘이고 그 소유주의 마누라가 아스다롯, 이쉬타르, 다 같은 말이고 저녁별의 여신이라는 뜻인데 이 바알 신을 섬기는 가나안땅의 방식이 뭐냐? 봄, 이른 여름, 그리고 가을, 이 세 차례에 대해서 토지소유주가 스스로 자기생산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그때마다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축제를 벌이는 거예요.
엘의 뜻을 번역하면 그냥 신이에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여, 이 토지를 주셨사오니 이 토지 주인한테, 바알입니다, 토지 주인에게 말씀 잘 드려서 우리가 일한 노동대로 그때 그 때 적당한 비를 주셔서 농사 잘 지어서 풍요하게 해주시면 우리가 바알과 아스다롯, 그리고 엘에게 섭섭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가인의 제사입니다. 그게 추수감사절이에요. 받아 챙겼으니까 그냥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드려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스다롯 같은 경우에는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느냐 하면, 마지막 세 번째 축제 기간에는 생산을 많이 해야 되니까 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신의 기운을 많이 뽑아내야 돼요. 그 신의 기운을 많이 뽑아내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그 엘리야가 싸움 붙었던 바알과 아세라 있지요. 그 바알과 아세라에게 했던 것처럼 흥분이 되어야 됩니다. 흥분 중 최고의 흥분이 뭐냐 하면, 성적 흥분이 최고에요. 그래서 거룩한 창녀, 성창이라고 하는데 성창을 동원한 남녀관계를 통해서 신도 흥분시켜서 신의 발정을 일으켜서 자식을 많이 낳듯이 생산의 기운을 많이 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자기만 흥분하면 되지 하늘까지 흥분시키는 거예요. 웃기지도 않아요, 하여튼.
그래서 제가 말하는 것은, 우상이라 하는 것은, 나의 심리의 투영이 우상입니다. 나를 잘해주면 좋은 신이고 나한테 섭섭하게 하면 나쁜 신이에요. 내가 움직이는 신이에요. 내가 바로 움직이는 신이에요. 그 신들이 모인 곳이 나라가 되고 그런 나라의 지도자가 왕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왕은 백성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언제 쿠데타를 일으켜서 밤중에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몰라요. 그저 백성들의 기분을 들어줘야 됩니다. 담배 값을 올렸다가 사람들이 담배 값 비싸다고 불평해대니까 또 값싼 담배를 만들어내야 되는 거예요. 지금 담배한테 악한 감정이 있어. 술하고 담배하고. 그렇게 해야 그것이 지도자가 되고 오래도록 권세를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있다는 거예요. 내가 있고 나라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냐? 그것은 해프닝이다, 없애버리라는 겁니다. 없애버려라. 이스라엘을 없애버리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숨어 있는 진짜 이스라엘 왕이 등장하고 그 왕이 등장해서 “너희들이 이런 범죄를 했기 때문에 너희들은 멸망해야 마땅하다. 너희는 죽어야 마땅하다. 너희가 죽음 가지고 거래해도 나랑 안 통한다.”라고 통보해줄 때 그분이 바로 성전을 만드시는 이스라엘 왕이 되시는 겁니다.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7절에 보면,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족속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존재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에요. 교회를 존속시키려면 인간의 구원욕구를 들어주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구원론을 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에요. “여러분,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러분하고 거래하지 않습니다. 돈 바치고 정성 바치고 기도해도 그런 것은 여러분이 바알을 섬기는 것이고 결국 바알을 섬기는 것은 나 자신을 섬기는 하나의 흉내 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 예수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겁니다.” 조폭은 말하기를 “하면 된다.” 그거지요. 네 글자. “하면 된다.” 조폭 구호가 걸린 집이 있어요. 우리의 가훈은 “하면 된다.” I CAN DO,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망해야 산다.” 입니다. 망해야 산다. 우리 교회에 기둥이 없는데 만약 있다면 거기에 “망해야 산다.”
지난 주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살게 하는 동네가 아니고 죽게 하는 동네라는 것. 왜 현실 파악이 안 될까요? 우리가 바알에게, 우상에게 너무 분위기에 휩쓸려서 이 교회라는 바알제단에, 기독교라는 이 우상제단에 너무 길들여졌어요. 사람들 구미 맞춰주는 그런 단체.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주의 종이 아니라.”는 말이 헛소리로 취급당하는 그 동네. 이제는 정신 차려서 우리 자신이 무엇 때문에 여기 와 있는가? 망하는데 그 망하게 하시는 분이 누군지를 안다면 그 분이 바로 성소입니다. “주님께서 날 망하게 하신다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이었고 그 기도하고 난 뒤에 부활되었습니다.
망해도 좋을 정도로 우리는 나를 망하게 하신 주님을 사랑합시다. 그게 영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진리의 체계를 알지 못하고 내가 욕구하고 원하는 것만 앞세웠습니다. 이제 그것이 바뀌어서 이스라엘 망한 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인 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하나님의 법칙인 것을, 그래야 성전이 되고 성소가 된다는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26강-에스겔 43장 6-9절(왕들의 시체)150218-이 근호목사.hwp (64.0K), Dow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