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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5장23(순간)150101b-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5장23(순간)150101b-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요한복음5장23(순간)150101b-이 근호 목사

시간이 먼저 있었을까요? 순간이 먼저 있었을까요? 시간은 나중 이예요. 순간이 먼저 있었어요.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7일이라 하는 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고 기간, 고 기간은 어디에 맞춰졌냐 하면 장차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생활한 생활의 리듬에 맞춰서 천지창조가 만들어졌어요.

제가 어제 수요일 날 할 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의 소리에 대해서 했죠? 많은 물소리라 했죠. 모든 총합, 창세기에 나왔던 모든 소리의 총합이 주의 입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은 창조주의 본래 모습을 회복했다. 또는 갖추었다.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창조의 회복을 할 때 그 때의 시간도 있을 건데, 그 시간은 순간에서 시간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순간이란 말을 하는 이유가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할 때 얻는 시간이 몇 분이십니까? 몇 분 만에 됩니까? 라든지 몇 시간에 됩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리해 봅시다. 순간은 뭐의 부정이냐? 시간의 부정입니다. 시간을 거부하는 거예요. 이게 순간입니다. 순간이 몇 초입니까? 묻는 것은 불교에서 물어요. 불교에서 찰나, 불교에서 ‘찰나’ 라는 용어를 하잖아요. 그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바보 같아. ‘찰나’의 간격이 얼마냐고 묻는 자체가 그 사람들은 순간의 의미를 몰라서 그래요.

시간을 없애버리는 게 순간인데, 시간이 없다는 게 순간이거든요. 어떻게 됐지? 순간에 되었어. 이거는 시간 차원은 묻지 마라 그런 뜻이다 말이죠. 그러면 순간이란 말은 시간으로 묻지 못하기 때문에 뭐로 대답해야 되느냐, 순간 전과 순간 후, 이전과 이후로서 대비되어서 설명하는 거죠. 경계선입니다. 순간은 시간이 아니고 그냥 서로 이질적인 게 두 개 마주할 때 나타나는 주름, 마주침, 그 찌그러진 면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보통 찌그러지게 되면 한 쪽이 한 쪽을 흡수해버리면 한 쪽이 사라지고 날라 가야 되는데 이제부터 두 번째 시간이 어려운 게 그거에요.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하게 되면 흡수 통합되는 게 아니에요. 물고구마 알죠? 밤고구마 말고, 물고구마 이렇게 해버리면 이게 두 개가 아니고 하나가 돼요. 어릴 때 집안에 식구들이 많으니까, 열 세 식구가 살았으니까 그 할머니나 부모님들이 애들이나 삼촌들을 키우기 힘드니까 어디서 물고구마를 사서 여름방학 때 쪄주니까 이게 완전히 진짜 물이 90%라 물고구마라. 그래서 내 기억에 삼촌들이 먹기 싫다고 벽에다 물고구마를 막 던지는 거예요. 짜증난다고 밤고구마도 아니고 물고구마라고. 가만히 보니까 두 개 던졌는데 보니 하나가 돼 있어요. 그러면 형체가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게 아니에요. 전과 후가 살아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물고구마처럼 생각해서 ‘너 십자가 믿나? 그러면 잊어라’ 그러거든요. 교회에서. ‘이제는 부활의 새 생명이기 때문에 십자가 잊어야 돼.‘ 이러는데 그거는 성경을 오해해도 보통 오해한 게 아니에요.

기차 지나갈 때 대전역에 가기 전에 신탄진역 있죠. 신탄진 그 다음에 대전역이잖아요. 그러면 신탄진역을 지나면 대전이 나오니까 신탄진역은 잊어도 상관없겠죠. 그렇죠? 초등학교 4학년 되면 3학년은 잊어도 괜찮죠? 3학년 때 봤던 어떤 교복이나 교과서 줘도 괜찮잖아요? 이제 4학년이니까. 포함이 돼 있으니까. 그 안에 내포돼 있으니까.

그런데 성경은 뭐냐 하면 오히려 부활이 십자가를 포함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이미 부활이 포함돼 있는 거예요. 부활되고 난 뒤에 도로 어디로 가느냐? 십자가로 가버려요. 대전역에 와서 도리어 신탄진역을 바라보고 있는다 말이죠.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순간이 지상에서 진행되게 되면 이게 무슨 현상? 시간의 역전 현상이 일어나게 돼 있습니다. 순간이 시간을 없애는 건 맞는데 순간 안에는 없어요. 하지만 지상에서는 시간이 있어요.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남아있는데 그 시간을 ‘아,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으로 흘러가는구나.’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되고 거꾸로 해석해야 돼요.

십자가를 향하여 창세기가 있고 요한계시록도 그 전의 사건 십자가를 향하여 이것이 십자가를 말하고 계속 전개돼야 될 남아있는 시간이구나. 이렇게 해야 됩니다. 이만희씨는 이걸 몰라요. 딴 것도 알 리가 없지만. 이걸 몰라요.

사람이 구원에 집착하게 되고 구원을 꼬여서 사람이 어떤 교주를 만들어버리면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사건을 주의해서 그게 마귀가 하는 짓에 미혹에 들지 않아야 여러분들은 환란 때 여러분 살아남게 되고 살아남으면 전 천년 환란 때 여러분 휴거 당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유대인 여러분 고생 되게 합니다. 여러분 고생하기 싫죠? 그러니까 빨리 일찌감치 수시 모집에 합격하시고 정시 되면 힘듭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구원에 환장한 사람들, 구원받겠다는데 자기들에게 이익이 온다는데, 시키는 대로 다 하죠. 돈 바치라면 돈 바치고 몸 바치라면 몸 바치고 시간 바치라면 다 바치고 다 바쳐서 ‘몸 바쳐서’ 그게 논개에요. 논개. 모든 걸 바쳐서 결국 구원 따내려 하는데 그것은 바로 마귀가 준 미끼입니다. 그런데 그 신천지는 어디서 나왔는가? 한국교회서 나왔거든요. 개혁주의 신학에서 나온 거예요. 모태가 그래요. 신천지의 모태신앙은 한국교회입니다. 한국교회가 구원론을 미끼 상품으로 내세워야 교회가 돈이 들어오게 돼 있어요.

그래서 맨날 길에서 ‘도를 아십니까?’ 하는 식으로 ‘혹시 구원받았습니까?’ 이거 가지고 구원 파들이 자꾸 시비 거는 거예요. 구원 파는 ‘마지막에 멸망당하니까 구원받으세요.’

성경 오늘 분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영생을 얻었고” 에요. “얻었고” 하니까 또 구원 파에서는 이야기합니다. ‘몇 월 몇 일 날 얻었는데?’ 몇 월 몇 일은 그 긴 시간 중에 포함된, 또 시간 차원 이예요. 순간에서 얻은 거예요. 순간에서 얻은 것을 시간으로 환원하게 되면 ‘주께서 시간과 상관없이 구원을 해주셨구나.‘를 아는 그 순간을 우리 내부에서 반복을 시키게 하는 겁니다.

어렵게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주여 이런 실수를 해도 이미 구원받은 거 맞죠?’라고 믿어지게 돼 있어요. ‘환란을 당해도 이것이 주의 사랑 맞죠? 핍박을 당하고 기근이 돼도 이것도 주의 사랑의 다양면의 어떤 일부죠?’라고 믿게 되는 거예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내가 봐도, 내가 비판해도 남이 비판해도 욕 얻어먹을 짓을 해버려요. 그러면 남이 비판한 정도가 아니고 당사자 내가 미워,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이 바보야, 바보.’ 이러면 주님이 뭐라 합니까? ‘때리지 마, 때리지 마. 십년 후에도 때리지 마. 애 때리지 마. 너는 너 때릴 자격이 없어. 꽃으로도 너를 때리지 마.’ 김 혜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꽃으로도 때리지 마. 너는 네가 때릴 자격이 없어. 때려도 내가 때려. 네가 때리면 너는 착한 사람 돼 버려.’ 왜, 스스로 반성하는 착한 사람 돼. ‘때리지 마.’ 그리고 ‘네가 나쁜 짓하면 때려? 그러면 그 외 너는 나쁜 짓 안하는 줄 알아? 네가 생각하는 나쁜 짓이 아니고 그 외도 나쁜 짓인데 너는 유독 그걸 나쁜 짓으로 지정하는 이유가 이런 실수만 안 했으면 내 인생은 괜찮은 인생인데’라고 네 인생을 네가 일방적으로 조립하고 있다 이 말이죠. 지금 네가 네 인생을 만들어 가고 있죠.

전에도 했지만 총각 뗀다고 군에 가기 전에 ‘그때 그 실수 없었으면’ 하면 그때 제가 뭐라 했던가요? ‘지금 네가 하는 짓이 총각 때 하는 짓보다 더 나쁘다는 걸 너는 모르지?’

정죄함이 없다. 너를 위해서 죽었다는 말은 이미 너의 평생에 지은 죄를 다 해소했다는 뜻이거든요. 네가 자살한다고 네 죄가 사라질 것 같으면 우리는 자살해서라도 구원받아야 돼요. 왜 자살해서는 안 되는가? 자살해도 일이 해결 안 되니까 자살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자살하라고 누가 시키던가요? 주님이 시키던가요? 주님께서 ‘너 자살하면 구원 받을 거야.’ 그렇게 시키던가요? 주께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놓고 그걸 왜 자신에게 미화되는 것처럼 그렇게 느끼느냐. 그거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자신을 믿는다는 증거 밖에 안 돼요.

‘보라, 나는 이렇게 자살해도 나는 신자야.‘ 그걸 티내기 위해서 목사가 자살해 버리면 결국 누굴 증거 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증거 하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 있던 사람들은 뭐가 같은 느낌으로 공유되겠어요? ’저래도, 소위 막 살아도 구원받는구나.‘ 그게 오히려 기쁜 소식이 되지 않을까요? 그건 기쁜 소식이 아니고 막 살아도 구원받는다. 이건 기쁜 소식이 아니거든요. ’주께서 날 만들었습니다.’가 기쁜 소식이 돼야지, 내 쪽에서 내가 어떻게 산다고 하는 그게 기쁜 소식이 아니다 이 말이죠.

‘주께서 날 만들었다.’ 언제? 만들었어요? 순간에 만들은 거예요. 순간에 만들었는데 우리는 어디에 시달리는가, 시간에 시달린다고요. 보다 더 나은 삶, 지금보다 보다 더 착하게, 성화 되게 . 산이 있는데 지금은 내가 이 정도 가는데 더 착한 일 많이 해서 저 높은 경지까지, 도 닦는 경지까지, 테레사 수녀 정도, 울지 마 톰즈처럼, 그렇게 순수한 자기를 헌신하고 모든 걸 하는 그 착함에 절정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자기 자신은 할 일이 남았다. 이렇게 나온다면 이 사람은 “영생을 얻었고”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해당되지 않아요.

영생을 얻었다고 순간을 하는 것은 우리 몸에는 순간이 없어요. 우리는 시간이 있어요. 순간은 누구한테 있는가? 예수님 몸에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는 생명을 얻었고” 그에 대한 혜택이 이제는 너희 혜택으로 가도록 내가 조치를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몸 안의 지체가 돼 버리면 우리는 아직도 살 길이 남아있어요. 그런데 그 살 길이 몇 년이 남아있어도 괜찮아요. 왜, 이미 순간적으로 구원을 받은 몸으로 몇 년 아직도 살 길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러면 남아있는 살 길은 뭐냐, 왜 시간이 아니고 순간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악착같이, 돈을 밝혀서라고 살아가야 돼요. 왜, 돈 밝히는 그것이 돈 사랑하지 말라는 주의 말씀을 증명해 주기 때문에. 갑자기 이게 기쁜 소식이 돼 버렸어요. 악착같이 내 새끼만 돌보고 내 식구만 돌봐야 돼요. 왜,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마지막 때에 자기만 사랑하고“ 그걸 증명해 줘야 되니까. ‘제가 바로 이런 인간입니다. 시간만 나면 그 시간은 나의 영광과 나의 자존심을 위해서 소모하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그게 바로 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를 도저히 내 힘으로 행하는 나를 이 ”영생을 얻었고”가 덮쳐 버리니까 내 몸은 사실은 주의 몸이죠.’라고 우리가 물을 수가 있는 겁니다.

지난 낮 설교 때 굉장히 어려운 대목을 했어요. 뭐냐 하면 십자가 지는 장소가 부활 장소와 다르다고 이야기했죠.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그게 무슨 의미냐 하면 그 세 명의 여인이 왔어요. 살로메하고 야고보 어머니하고 막달라 마리아, 세 명의 마리아가 무덤에 왔는데 그 무덤이 빈 무덤 됐잖아요. 그 빈 무덤 할 때 제가 설교시간에 물었잖아요. 그들이 실망했습니까? 기뻐했습니까? 물었잖아요. 실망했죠. 왜 실망하죠? 주께서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을 때 우리 같으면 우리 생각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딱 빈 무덤 보고 난 뒤에 ‘할렐루야’ 하고 우리는 감사해야 될 일인데, 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울었어요. 실망 정도가 아니고 울었습니다. 그야말로 사랑하는 여인을 잃어버린 것처럼 ‘아이고, 우리 주님 어디 갔노. 나쁜 도둑놈아 우리 주님 돌려다오.’ 이런 식으로 울었겠죠. ‘시체를 누가 훔쳐 갔노. 주님 팔자도 참 더러운 팔자지, 시체 하나도 간수 못하는 팔자, 이런 팔자가, 어디서 독수리한테 물려 뜯기나.‘ 걱정 했을 때 옆에 떡하니 누가 걸쳐 앉아 있는 거예요. 걸터 앉아있는 것이 재밌는 것은 그 걸터앉아 있는 그분의 얼굴이 평소에 만났던 예수님 얼굴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 했어요? 예수님 얼굴이 아니라는 것은 뭔 뜻이냐? 어렵게 이야기해서 온 천지가 빈 무덤이 돼요. 온 천지가 빈 무덤 이예요. ‘목사님 어디 가서 은혜 받습니까?’ 묻지 마세요. 온 천지가, 화장실 가도 은혜 받아요. 온 천지가 빈 무덤 이예요. 실망할래? 기뻐할래? 묻습니다. 실망할래? 기뻐할래? 또 온 천지가 빈 무덤이라 해서 수련회도 참석 안 하는 거 아닌가..^^ 수련회 이 코너 끝나는 거 아닙니까? 이 소리 듣고 교회 안 나오는 거 아닌지...

온 천지가 빈 무덤이란 말은 주께서는 오늘 날 빈 무덤을 소개하는 게 아니고 그 전에 있어야 되던 분이 사라졌다는 그것이 이 우주를 운행하는 원리, 부재자가 원리에요. 피조물들은 그냥 눈에 보이는 게 전부에요. 하지만 피조물의 운명은 보이는 같은 피조물이 결정하는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분, 창조자가 결정하는데 그 창조자가 어디 있느냐고 묻지 마, 빈 무덤이 바로 창조자가 왔다 다녀갔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흔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죽으신 분이 살아났다고 이야기하죠.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바울이 도대체 사도바울은 전도하면서 무슨 소리 했는가 한번 찾아보세요. 보게 되면 핵심이 있어요. 죄 사함을 위해서 주께서 택하신 자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이야깁니다.

자,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하여튼 사도바울은 못 됐어. 말을 너무 어렵게 해. 내가 한번 연결시켜 볼게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죄 사함) 일단 괄호 치고요. 그 다음에 죽으심, 그냥 죽으신 게 아니고 사도행전 17장에 택하신 자, 택하신 자 죽으심, 세 번째 뭐냐 하면 사흘 만에 부활하심, 요거 세 항이 있습니다. 수능 문제 냅니다. 이 세 문장 연결하시오. 자, 이게 연결이 가능하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바깥에서는 연결이 안 돼요. 죄 사함 속에 먼저 들어가야 이게 연결 되거든요. 죄 사함 속에 들어가려면 뭐해야 됩니까? 내 죄는 내가 아무리 뒤에 착한 일해도 해소가 안 되는 그런 존재인 것을 이미 인정하는 사람만이 ‘죄 사함은 제 힘으로는 안 되거든요.‘ 라고 죄 사함과 관련되어서 어떤 메시야를 고대하는 사람, 그 사람만이 이 문제를 풀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여인이 수로보니게 여인입니까? 주님이 오니까 ‘어디 개.. 여인이 오느냐?’ 그렇게 하니까 다른 사람은 자기보고 개라고 하면 자기의 전부 내가 평소에 나의 전부를 가치 있게 보기 때문에 그렇게 욕하면 삐질 건데 그 여인은 뭐냐 하면 자기가 본인이 개라고 인정을 한 상태기 때문에 개가 주님 앞에 어슬렁거리고 꼬리 흔들고 찾아온 것은 혹시 사람들이 먹다 남은 부스러기 혹시 있는가 싶어서 그거 주워 먹으러 왔던 거예요. 그러니까 노숙 개에요. 노숙 견. 노숙자도 안 돼. 노숙 견.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이만한 믿음은 나는 유대인 중에 본 적이 없다. 최고의 믿음이다.” 왜, 미래의 어떤 자기가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다 삭제해 버리고 자기의 시간을 주 앞에 양도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 시간을. 내 시간을 양도해 버리면 주어지는 것은 순간이 주어지죠. 너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그 순간을 우리는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시간 버리고 순간 받고. 장사 남는 장사에요. 괜찮은 장사 아닙니까? 죄 드리고 영생 얻고, 뭐 이런 장사가 다 있어요? 못난 인간 드리고 잘난 사람 데려가는 천국에 가고, 그래서 주께서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간다 하잖아요.

주님께서의 모든 것은 일관성이 있어요. 다 일관성이 있어요. 하여튼 잘난 척하는 인간들은 상종을 안 합니다. 잘난 척하는 인간. ‘십일조 했습니다. 구제 했습니다. 뭐 봉사 했습니다.’ 이런 자는 상종을 안 해요. 그것은 뭐냐 고 안에는 자기 시간이 들어있기 때문에 시간은 천국에 못 옵니다. 시간에서 순간으로 응축이 돼야 돼요. 바뀌어져야 돼요. 바꾸는 방법은 없어요. 왜냐 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요 대목이 어려운데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못난 자아가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잘난 자아가 되죠. 하지만 여기 연속성이 있어 문제입니다. 뭐냐, 이 자아와 이 자아가 연속성이 있어서 이게 땡 탈락 이예요. 이러면 안 돼요.

구원 파 하는 말이 ‘실례하지만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몇 일 날 구원받았습니까?’ 이거는 뭐냐 그때 자아와 당신 자아가 연속적인 자아인데 당신은 언제 개과천선했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거는 바로 인간들이 구원 파 위주기 때문에 이거는 성립이 안 됩니다.

뭐라고 되느냐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이러거든요. 요거는 사망은 뭐냐, 요 쪽 바구니에서 요 쪽 바구니로 옮긴 거예요. 바구니를 옮긴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한 부대, 부대를 옮긴 거예요.

그 백설 공주에서 마녀가 백설 공주가 숲속에 있을 때 같이 따라왔잖아요. 찐드기, 거기까지 따라와서 사과를 먹이잖아요. 늙은 노파로 변해서 모자 하나 뒤집어쓰고 ‘사과 먹어봐라.’ 하잖아요. 그때 사과를 어디 담아옵니까? 바구니에 담죠. 마귀가 사망을 담고 온 거예요. 그걸 먹고 백설 공주가 독을 먹고 쓰러지죠. 그 백설 공주 독일의 영주는 전부 다 각자 나라들 이예요. 그래서 왕자가 그렇게 많아요. 왕도 많고. 조금한 나라니까. 그래서 그 가운데서 동화들이 있는데 그런데 이 백설 공주가 어떤 프로포필을 맞고 나은 것도 아니고 링거를 맞고 나은 것도 아니고 뭡니까? 사랑으로 낫죠. 이미 백설 공주는 죽어있고 다른 어떤 백설 공주를 책임질 어떤 백마 탄 이웃 집 왕자가 와서 뽀뽀하니까 낫잖아요. 무슨 독이 뽀뽀한다고, 뽀뽀가 강하게 독을 빨아들이는 뽀뽀인가? 사랑으로 낫죠.

그러니 이게 뭐냐 하면 나는 없고 나를 포함시키는 어떤 영역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겼느니라. 너는 그냥 그 안에서 덤이었어. 네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너와 같은 사람이 구원받는 그 실체가 너를 덮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너 혼자 구원받는 게 아니고 너하고 여러 명 돼. 너만 구원받은 게 아니야. 여러 명 구원받았어요. 집단 구원받은 거죠.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순간이라 하는 것은 어떤 지점이 아니고 이렇게 두 개의 대비되는 두 영역을 같이 모아오면 그 경계선이라. 경계선이라 하는 것은 같은 것을 경계선이 생기지 않잖아요. 서로 다를 때 생기네요. 엉덩이도 언덕이 두 개라 경계선이 생기잖아요. 다른 덩어리 두 개가 있을 때 경계선이 생기듯이 그 경계선을 만들기 위해서 전과 후의 두 개의 차이라는 환경을 하나님께서는 의도하신 거예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러분 이거 가지고 대충 이해했다고 하는데 저는 이해했다고 생각이 안 들고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서 확실하게 해봅시다. 자, 물어봅시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쳤죠. 그러면 아버지가 이삭을 바쳤으니까 아들은 어떻게 된 거예요. 살아난 거예요? 죽은 거예요? 죽을 뻔했죠. 죽을 뻔했는데 스톱해서 옆의 숲속에 있는 수양 데려다가 했다 이 말이죠. 아들은 ‘아따, 참 혼났네. 아이쿠, 진짜 스톱 할 때 속도가 15센티 놔두고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러겠죠.

제가 주일 낮인가 서산 감리교 이야기해드렸죠? 제사 제도한다고 염소 잡는 거. 그래서 내가 빈정댔잖아요. 왜 헐은 염소 잡지 말고 자기 아들 잡지, 아브라함처럼 자기 아들 죽이면 확실할 건데. 자기 아들이 비쌌던 모양이죠.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저 숲속에 양 있어. 양을 부탁해.’ 해서 양을 잡아서 잡으면 같은 믿음이니까 ‘네가 양 잡았어? 아이쿠, 믿음 좋아라.’ 이러면 될 텐데 왜 아들 잡으라 했죠? 인간들의 해석에 의하면 염소는 헐하고 아들은 하나밖에 없는 귀한 것이기 때문에 귀한 것을 잡을 정도 같으면 보통 의지가 강해야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험하기 위해서 네 의가 얼마나 놀라운지 시험하기 위해서 아들 잡으라 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아들 나중에 아브라함이 믿음 없었을 때 그 아들 또 잡아야 돼요. ‘네가 이제는 전에 아들 잡았다고 좀 해이해졌구나. 또 잡아라.’ 해서 아들까지 손자까지 잡아야 돼요. 그 뜻은 그런 뜻이 아니고 들판, 평지가 달라요. 완전히 구조가 달라졌어요. 어떤 구조냐? 그때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주체가 되는 구조라면, 이제는 부재자, 죽은 자가 아브라함에게 구원해주는 구조로 바뀌어요. 산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하는 구조, 천국은 없어요. 내 대신 죽은 자가 살았다고 우기는 나를 되살리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살아있는 겁니까? 죽어있는 겁니까? 나는 죽어있는 것이고, 내가 살았다고 우기는 것 때문에 나한테 핍박받는 그분이 진정 하나님 앞에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비인간이거든요. 그런데 비인간들이 인간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예수님은 비인간 취급 받아서 ‘에이, 너 같은 인간은 죽어도 괜찮아.’ 해서 ‘바라바 살려줄까? 예수 살려줄까?’ ‘바라바 살려주세요.’ 해서 모두 집단적으로 비인간 취급받아서 ‘너 같은 인간은 없어도 돼’ 해서 죽었잖아요. 그게 십자가 사건. 그 사건이 우리한테 성령을 통해서 왔다는 말은 ‘너 지금 인간이야? 비인간이야?’ 그걸 묻는 거예요. 인간이라 하면 안 되고 ‘제가 바로 비인간, 인간도 아닙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그게 구원에 합류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저 북한의 김 정은이가 북한 매체에서 시도 때도 없이 주로 하는 게 뭐냐 하면 존엄성을 훼손하지 말라 소리 하죠. 맨날 그 이야기가 얼마나 어렵게 들리는지 몰라요. 북한에서 무슨 소리 한다고요? 뭘 훼손하지 말라? 존엄성. 손이 ..만들 때 우리 김일성 계열의 백두 계열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말라 하잖아요. 존엄성. 북한은 존엄성이 신이거든요. 그렇잖아요. 김일성이 신 아닙니까? 존엄성. 존엄성을 훼손하지 말라고 했을 때 북한 주민들이 이 존엄성에 대해서 신경을 쓴다는 말은 자기도 이 존엄성만 챙기면 자기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겠죠.

그런데 이 존엄성 때문에 죽은 분이 계십니다.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럼 이 말은 우리에게 존엄성이 있어요? 없어요? 존엄성이 없죠. 그런데 왜 교회가 인권을 부르짖습니까? 자유 신학의 인권. 감리교, 통합 측, 기장 측 이런데서 왜 인권을 주장해요? 천주교 정의 실현, 왜 인권을 주장합니까?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불교에서 교리가 뭐냐, 모든 걸 비워라 했죠. 모든 걸 비워야 된다. 욕심이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한 그 성철 스님인가 법정 스님인가. 이름도 왜 두 자인지 몰라. 머리를 왜 깎죠? 머리 왜 깎습니까? 그게 바로 자기 나름대로 경계선을 형성하는 거예요. 경계선. 너희와 내가 부딪힐 때. 머리 깎은 자와 깎지 않은 자의 차이를 두고 깎지 않은 자는 속세에 속하고 깎은 자는 거룩에 속하죠. 그게 비운 겁니까? 그게 마음 비운 거예요? 신부들은 유니폼 왜 입어요? 목사들은 이상한 넥타이 왜 맸습니까? 그게 자기를 비운 거예요?

예수님 옷은 뭐였습니까? 예수님 옷은 특정 옷을 입었어요? 가운 걸쳤습니까? 수염은 길렀어요? 그거는 후대에 예수님을 교회가 조작해서 그린 그림이고 실제 예수님은 그냥 평범해요. 그냥 노숙자라니까요.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 없어져도 그만인 그런 존재에요. 예수님은 철저하게 인간이 존엄성을 찾는 사회에서 자진해서 비인간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란 말은 비인간임을 믿어라. 비인간임을 믿어라.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 딴아 크게 마음을 낮췄어요. 부자 청년인데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 얻습니까? 할 때 모든 걸 다 버려두고 날 따르라 할 때 근심해서 돌아가잖아요. 왜냐 하면 돈이 있어야 된다는 이유가 뭡니까? 돈이 있어야 자신의 선했다는 것이 자기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기 때문에 그 대가로 챙긴 게 뭐다? 부자 된 거예요. 그러니까 돈이 아까운 게 아니고 이거 날라 가 버리면 나는 애초부터 선하지 않은 게 들통 나는 이것이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뭐냐 하면 자기 존엄성에서 못 벗어난 거예요. 나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선한 사마리아인 보세요. 어느 강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다 지나갔어요. ‘너만 강도 만났고 나는 강도 안 만났어.‘ 다 바빠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뭡니까? 강도 만난 사람과 자신을 일체화 시켰죠. 그 일체화 시킨 것을 예수님이 이웃이라 했어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할 때 네가 이웃을 사랑하란 말이 아니고 너는 누구의 이웃이냐, 고 그 묻는 질문이 우리 안에 있어야 돼요. ’주여 저는 누구 이웃인데요?‘ 이거부터 물을 수 있는 사람만이 이웃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요. ’자, 내가 존엄성을 키우기 위해서 내가 주의 사람인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 한번 이웃 사랑을 슬슬 해볼까? 가난한 사람한테 동량 한번 해봐.‘ 이것은 전혀 이웃 사랑 아닙니다. 자기 존엄성의 극대화에요.

아까 우리 동욱이 군에 간다 하니까 군대 생각이 나는데 군대에 여군이 생겨났습니다. 다 짐작했죠. 조폭 세계에, 군대는 조폭이거든요. 까라면 까는 세계에요. 조폭이 뭐냐, 하면 된다죠. 하면 된다보다 해야 된다죠. 거기에 연약한 도살할 양 같은 여자가 거기 들어갔다. 여자들이 군대 가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고 공기업이기 때문에 가는 거예요. 그걸 무슨 수로 보호해 줍니까? 도살할 양인데. 늑대 판인데. 이거는 나이 어린놈이고 된 놈이고 관계없어요. 지위고하도 관계없어요. 다 달려드는데. 이걸 무슨 수로 지켜냅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그래도 군에 가서 출세한 여군 있잖아요? 그들이 출세하기 위해서 어떤 것까지 감수해야 되는지 생각 안 해봤어요? 그러면 여군이 그동안 없다는 것이 군대가 자긍심을 가졌던 이유가 됐죠. 없다는 것 때문에. 그러니까 여군 잘 만들은 거예요. 왜, 군대란 것이 자랑스러운 동네가 아닌 것을 여군이 들어와야 비로소 알듯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마귀를 역사하시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마귀 퇴치해 버리면 우리는 잘난 사람 돼 버려요. 날마다 주께서는 마귀로 하여금 시달리게 만듭니다. 욥처럼 시달리게 만들어서 자기 인생에 대해서 본인이 분개하고 분노하고 울분을 야기 시키는 사태가 일어나게 해서 우리의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작업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거예요.

그 부자 청년 이야기나 선한 사마리아 이야기나 모든 예수님의 이야기가 요한복음에서는 간단하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는 것이 그들은 안 믿어지죠. 왜냐 하면 그들은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순간을 집어넣습니다. 어떻게 시간이 순간을 이해합니까? 나중에 시간을 살았던 그것들이 죄로 발각될 때 ‘아!’ 주께서는 내 시간 거부하고 자기가 집어넣은 순간만 고집한다는 것을 알죠.

그 순간을 성경에서는 한 자로 뭐라 하느냐, 때, 때인데 앞에 뭐가 붙어요. 내 때! 내 때에요. 내 때가 되매. 내 때인데 앞에 붙는 게 있어요. 말씀에 응한다. 그래서 요걸 합쳐 버리면 성도란 말씀대로 구원돼야 될 존재로 이미 창세전에 정해놓았기 때문에 주께서는 자기 때를 성취하기 위해서 찾아올 때 찾아오셔서 그리고 선언합니다. “이미 네 인생은 끝,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게 너란 말이 아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오게 하신 분이 나란 말 이예요. 결국은 우리한테 안 와요. ‘너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내가 너를 구원시켰다.”

성경 전체의 내용은 우리가 구원받은 게 아니고 “내가 너를 구원시켰다.”가 초점이지, ‘그래서 나 구원받았다.’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또 구원받았다는 시간 계산 또 나가요. 또 시간 체크 합니다. 구원 받은 지 6개월 됐다. 또. 그렇게 돼 버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나중에 침해 걸리면 구원받은 게 취소가 돼 버려요. 침해 걸려서 예수가 누군지 모르고 아파서 헛소리 하게 되면 ‘에이 구원받은 줄 알았는데 구원 안 받았네.’ 이렇게 하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자꾸 계속해서 침해 안 걸리고 구원받았다 소리 하고 싶어서 그런 식으로 구원받고 싶은 이유가 어디 있느냐,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타인의 시선 때문 이예요. 타인의 시선 때문에. ‘너 구원받았어? 안 받았어?’ 교회 가면 자꾸 묻는 거 같아요. ‘요새 집사님 기도 잘 안 되죠?’ 이런 말 하는데 들리기는 ‘요새는 집사님 믿음 없죠?’ 이런 식으로 지금 들리는 것 같아요. ‘집사님 보니까 봉투에 돈이 천 원짜리밖에 안 들었는데 헌금 적게 하시는 모양이죠?’ 이 말은 처음보다 믿음이 떨어진 것 같은 느낌으로 이렇게 느끼는 것 같아. 주님은 다 이뤘다고 했는데 사람이 가만두지 않네요. 사람이 마귀입니다.

저는 이걸 한번 상상해 봐요.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는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했잖아요. 그런데 그 세 명 제자들이 왜 잠잤을까? 하는 거예요. 왜 잠을 잤을까? 언젠가 제가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자기 일이 아니거든요. 자기 관심사가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사망에서 옮겼다는 것이 우리 관심사가 아니에요. 예수님 본인의 관심사에요.

그래서 잤던 베드로가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시도 때도 없이 잠잤습니까? 그렇지 않죠. 그들은 깨어있죠. 왜냐 하면 자기 관심사가 사라졌어요. 본인이 사라져버린 거예요. 이제는 누구의 관심사가 자기를 쳐들어왔다? 주님의 관심사가 전에는 주님만 주님의 관심사인 줄 알았는데 성령이 옴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관심사가 나의 관심사로 바뀐 그런 바구니, 그런 상황 속에 놓이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진짜 성도는 이렇게 해야 돼요. ‘주님이여, 왜 내 인생이 내 맘대로 안 됩니까? 왜 내 뜻대로 내 기도대로 인생이 왜 이렇게 뒤틀려지는 겁니까?’ 그럼 주님께서 ‘네가 갈 바를 알지 못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우리는 시간대가 있기 때문에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꾸 예상을 하고 싶어 해요. 신년이 되면 회사도 올해 목표가 있을 거예요. 자꾸 예상하는 거예요. 시험 치는 것도 시험이 없으면 애들이 공부를 안 하잖아요. 목표가 없으면 일을 안 합니다.

그런데 자연산 개, 훈련한 개가 아니고, 자연산 개는 어떻습니까? 목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오죽하면 오뉴월에 개 팔자라 합니까? 그 오뉴월의 개 팔자를 성경대로 이야기하면 주께서 친히 기르시나니, 가 되죠. 그런데 친히 길러줘야 되는 우리가 마귀가 시키는 대로 목표를 정하는 순간 그 다음에는 누가 누굴 길러야 돼요? 내가 나를 길러야 돼요.

그러니까 이제는 관심사가 뭐냐 하면 주님 철야해도 철야 안 해. 왜, 우리는 철야할 때 따로 있어요. 내 일이 뒤틀어질 때 그때 철야해요. 그게 주님 방식 이예요. 하도 관심을 안 두니까 내 뜻대로 안 되게 만들어서 관심 두게 ‘주여’ 그제사 ‘주여’라고 외치게 만들어요. 사사기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좀 편하면 뛰어놀다가 또 갑자기 주변에 있던 경계선 바깥에 있던 적들이 쳐들어오게 되면 그제사 ‘주여’ 처음에는 다 퍼줘요. 인간적으로 해보고 다 퍼주고 다 떨어지면 그제사 ‘주여 살려주옵소서.’ 할 때 그걸 사사기는 출애굽의 반복이라 합니다. 그 반복이 오늘날 우리 인생의 반복 이예요.

내 힘으로 느긋하고 잘 될 것 같으면 뭐가 문제냐, 주님한테 관심이 없어요. “사망에서 옮겼느니라.“ 뭐 성경에 그런 게 있대. 끝나요. 관심 없어요. 이게 실감 나려면 내 하는 일이 뒤틀어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이미 바구니에 담겨서 사망이란 바구니에서 생명이란 바구니에 옮겼느니라. 옮겼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받으려고 생각한다면 사망은 하지 말아야 되는데 십자가를 잊어라. 부활만 생각해라. 이래야 되는데 구원이 문제가 아니고 주님이 구원했다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항상 전에 있던 것과 지금의 변화를 그 경계선을 우리가 항상 우리 인생에 새겨야 된다.

십자가 믿고 부활됐기 때문에 십자가 잊어버려. 언제까지 십자가 찾을래? 이제는 부활해 새 생명 가운데서 교회 봉사해야지. 십자가. 십자가. 맨날 바닥만 닦을래? 이런 식으로 목사가 막 나무래요. 교인들에게. 그 사람은 부활의 새 생명이 뭐가 새 생명이냐, 십자가만 생각하는 게 새 생명이란 걸 몰라요. 십자가만 생각한다는 말은 나한테 관심이 끝났다는 거거든요. 나한테 관심이 없다면 ‘이러다 내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그것조차도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는 뜻 이예요.

여러분 지금 사시는 것이 주님의 뜻에 의해서 사시는 거예요. 이미 하나의 경계선입니다. 여러분 사시는 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는데 누가 이렇게 옮겼지? 거기에 대한 관심 두라고 오늘도 이렇게 살게 하신 거예요. 서울에 눈 온다고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가다가 길에 미끄러져서 못 오면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데 마침 또 이렇게 눈이 별로 안 왔네요.

25절 봅시다. 요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 동욱이 지금 인내하고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또 때가 나오죠.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듣는 자가 살아난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이 말은 살아나는 것이 우리 구원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강의 두 시간 가까이 강의해도 또 돌아서면 ‘내가 그럼 구원받았나?’ 또 자기 구원문제에 집착할 경우가 있어요. 다시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생명은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에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제일 편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 사람마다 다 다른데 다른 이유가 내가 이렇게 살아도 ‘나 구원받았다.’ 이거 자랑하라는 게 아니라 주께서 벌이신 일인데 생명은 주님이 생명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은 진실로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기 때문에, 그러면 인간의 목숨이 깁니까? 주의 음성이 깁니까? 주님의 사운드가 길죠. 음파가 길죠. 창조 만들어진 것보다 창조주의 음성이 더 깁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주님의 음성이 들어올 때 어떻게 들어오느냐? 말씀으로 들어와요. 끝으로 요거 어려우니까 요거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말씀으로 들어온다 할 때 한 가지 예를 듭시다. 십계명에 보면 “거짓증거하지 말라” 있잖아요. “거짓증거하지 마라” 가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말씀 이예요? 제가 묻는 의도를 알면 정답은 뻔 하죠. 거짓 증거가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이 말씀이죠.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거짓 증거 하는 말 하게 되면 우리는 평소에 우리 인간들 세계에서 말이라 하는 것은 문단으로 끊어져 있어요. “거짓 증거 하지 말라” 여덟 자로 끝났죠? 그러면 우리는 거짓말 안 하면 되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이 거짓말 안 하겠다는 것이 주의 말씀이 아니고 뭐냐 하면 내가 평소에 알고 있던 그 나한테 포함된 인간들의 말과 합치가 돼 버리죠. 그러면 거짓 증거 하지 말라. 가 내 속에 들어오면 이는 더 이상 주의 말씀의 기능을 사라져 버리고 내가 해석한 일방적인 해석이 돼 버려요. “살인하지 말라”가 오면 ‘나 사람 안 죽였어.’ 이렇게 나오고 “간음하지 말라”하면 ‘나는 바람피운 적 없어.’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주님은 뭐라 합니까? “마음속으로 간음해도 간음죄다. 미워해도 살인죄다.” 이렇게 조치를 하게 되면 그것은 누가 이야기했어요? 말씀 되시는 분이 그렇게 해석해 버리면 이 말씀은 예수님께 속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을 지킬 수가 없고 먼저 주님한테 가야 돼요. 우리가. 말씀을 바로 땅겨서 지키면 안 되고 주님한테 가야 돼요.

그러면 목사님 주님한테 가면 지킬 수 있습니까? 주님한테 가게 되면 먼저 우리가 사라져요. 사라지고 주께서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말을 주님이 말씀이니까 말씀대로 우리에게 지키도록 만들은 결과물이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나는 맨날 입에 거짓말을 달고 사는데 ‘주의 뜻에 의하면 그것이 거짓 증거가 아니래.‘라는 식의 해석이 돼요. 아주 위험한 해석이 돼 버립니다. 위험한 해석.

거짓말 해놓고 주님을 경외하는 게 뭐가 된다고요? 거짓말 안 한 게 되고 거짓말 지킨 게 돼 버리죠. 아, 이거 잘도 써먹을 수 있겠죠. 어떤 짓을 해놓고도 뇌물 받아놓고도 주님만 경외해버리면 ‘이건 뇌물이 아니고 돈을 사랑 안 한 게 돼.‘라는 해석이 나올 뻔 하죠. 그게 주님을 경유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비껴가서 경유한 척하면서 도로 받아내서 그래요. ’나는 이제 거짓말해도 구원받고 싶어.‘ 이런 자기 구원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경유하는 척하고 ’안녕하세요?‘ 인사만 하고 그냥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그냥 거쳐서 하는 거예요.

기생 라합 보세요. 기생 라합은 자기가 거짓말 하는데 목숨 걸어놨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정탐꾼 왔냐? 안 왔냐?’ 할 때 이거는 자기의 착함, 의로움, 전혀 고려대상이 안 돼요. 이거는 사느냐, 죽느냐,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움직이는 말씀, 움직이는 그 말씀에 나도 합류되고자 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기생 라합도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그런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그 마음이 아니고 드디어 남이 아니고 같은 편이예요. 같은 편에서는 거짓말이,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가 되는 겁니다. 우리끼리는. ‘집사님, 오늘 화장발 너무 잘 받았다.’ 우리끼리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남들 보기에는 ‘저 아부하고 있다.’ 우리는 아부가 아니에요. 그랬으면 좋겠다마는 이거는 하나 예니까.

‘아이구, 자매님 사랑합니다. 성도님 사랑합니다.’ 이 사랑은 기존의 사랑이고 경유한 사랑은 뭐냐, ‘아이쿠, 집사님 너무 사랑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집사님 죄인입니다.’ 뭘 해도 죄인이란 뜻 이예요.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나도 Me too. 나도 같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이 말씀대로 해서 다들 하나의 결과물이잖아요.‘라는 고백, 주님께서는 떡을 나눠주는 게 아니고 하나를 만들어요. 떡 하나를 해놓고, 한 개의 김밥 가지고 ’잡수세요‘ 나누어줘서 도로 자기 쪽으로 회수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열 두 명이라도 너희들은 열둘이 아니고 나에서 나온 하나라. 물론 가룟 유다는 예외가 되겠습니다만 예외가 되고 거기에 맛디아가 열 두 자리에 찾아갑니다. 열둘이라는 것은 12라고 보지 말고 1로 봐라. 144.000을 144.000으로 보지 말고 하나로 회수하기 위한 하나로 모이기 위한 다양성으로 보시면 돼요. 그래서 교회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순간이 저들을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시간성은 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돌아서면 다시 순간은 무관심해지고 나의 잘난 미래상은 떠오르게 되는 우리의 본성, 이 본성이 오히려 주님의 조치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가락-요한복음5장23(순간)150101b-이 근호 목사.hwp (41.0K), Down: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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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7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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