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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하나님의 개입 150213강의디모데전서

하나님의 개입 150213

이름 : 이근호(IP:119.18.83.91)

김창길(IP:180.♡.194.146)

15-02-20 22:04

서울 의존교회150213a (하나님의 개입)―이 근호 목사

딤전 6:1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찌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성경에 나와 있는 이런 교훈들을 흔히 요즘 사회에 통하는 윤리나 도덕으로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바르게 살아야지 라고 큰 일로 생각하는데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바르게 산다는 것은 누구와 누구만 있을 때 가능하냐 하면 사람과 사람만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여기 1절 중간에 보면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과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또 누가 있어요? 누가 있는데? 신곡시장에 가면 사람들 쭉 있는데 사람 말고 뭐 있어요? 아, 사람이 개를 끌고 가는 게 있더라, 그러면 사람하고 짐승하고 다잖아요? 그 이상 더 뭐가 있어요?

여러분들이 TV 뉴스 시간에 오늘은 세 번째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세 번째 천사가 나타나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런 이야기해요? 여러분 뉴스를 틀면 주로 누구 이야기 나옵니까? 국내뉴스, 해외뉴스죠.

오늘은 하늘나라 뉴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이야기 안하죠. 그러니까 성경 말씀 속에서 하여튼 성경 말씀을 떠나서 기본은 뭐냐 하면 사람과 사람 밖에 없다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밖에 없으니까 그 가운데 통하는 것이 윤리와 도덕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누가 있어요? 사람과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 누가 있어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잖아요.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을 때는 윤리 도덕이라는 것이 통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이 말이 종이죠. 누워 있잖아요. 이것은 성경은 관련이 없는 것이지만 그냥 들기만 하세요. 유럽이 에너지가 새롭게 발견되고 난 뒤부터는 유럽이 국가영토를 식민지 정책에 나가요.

식민지 정책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바다를 개척하고 서로 경쟁적으로 전쟁기술을 발달시켜서 많은 미개인들을 개화시킵니다. 계몽 시킨다는 빌미 하에 그 콜럼버스 이후에 전 세계가 유럽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이 제일 수지맞은 장사가 노예장사를 하는 거예요. 노예장사를 하면서 노예해방을 부르짖는 사람들, 대표적인 사람이 링컨대통령이죠. 그런 사람들이 뭐라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인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노예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종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것이 미국의 링컨대통령 이야기라 말이죠. 왜 그전에는 기독교 국가가 아니었어요? 왜 기독교 국가인데 노예해방이 일어나지 않죠? 여기 디모데전서 6장을 보게 되면 무릇 멍에 안에 있는 종, 노예들은 해방하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주인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주인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하라는 쪽이지 그래 노예들도 같은 인간이야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서 학대해서는 안 돼! 그런 쪽은 아니에요. 오히려 교회나 신학자들은 함의 족속들은 마땅히 샘의 족속들에게 저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그들을 학대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 그것이 그들의 자리니까 하나님이 지정해 준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종으로 살라고 한 것을 우리가 뭔데 우리가 나서서 종의 노예해방 이룰 수가 없다는 그런 분위기가 강렬한 겁니다.

그러면 본문을 두고 지금 우리 사회에 노예가 있다면 1번 해방해야 된다. 아니면 2번 종으로 부려먹어야 된다. 몇 번입니까? 디모데전서 6장 1절 놓고 한번 물어보자 이 말이에요. 어느 쪽이에요?

노예를 해방하자는 쪽이나 노예를 만들자는 쪽이나 둘 다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 인격적인 인권적인 문제에서 윤리가 어떻고 도덕이 어떻고 하는 그런 것을 근거로 대면 안돼요.

그것을 근거로 대면 그것은 안 되는 겁니다. 항상 오늘 나온 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 받지 않도록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무시당하지 않는 쪽으로 노예를 부리던 노예를 해방하던 그 근거가 확보돼야 됩니다.

이 말은 곧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상에는 사람과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이 세상은 사람과 사람만 있는 게 아니죠.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거야 하나님이 있죠.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죠? 그렇죠?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데? 사람이 여기 있다, 사람이 또 여기 있다, 하나님은 여기 어디다 넣어 드릴까요? 여기 빈자리에 넣어 드릴까요? 사람 A, 사람 B, 사람 C 그러면 하나님은 여기 오시면서 뭐가 돼요? 사람 D가 되어 버리는데 하나님이 여기 사람으로 오시면 사람 D가 되어 버리는데 하나님이 여기 사람으로 오시면 사람 D가 되잖아요.

그러면 A, B, C에서 기존에 통용하는 그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하나님 앞에 그대로 적용을 시키면 이게 소통이 될까요? 안될까요? 안 되지요.

십자가 사건이 왜 일어났습니까? 인간 대 인간의 모든 이야기가 사람들한테는 다 먹히는데 누구한테는 안 먹혀요? 예수님한테는 먹혔었어요? 안 먹혔어요? 안 먹혔어요. 안 먹혔으니까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심지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한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하고 있는 것보다 어느 쪽이 자기 몸의 관습에 맞는 겁니까? 예수님을 버리는 것이 자기 사는데 유리하죠.

사는데 유리하다는 것이 무슨 뜻이죠? 날 버리지 말라는 거예요. 나를 밀치지 마세요. 나는 당신하고 생각이 같습니다. 그런 뜻이잖아요. 나는 이 세상 사람이 될래!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왜 어린 소녀 앞에서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왜 그런 이야기를 해야만 되는 겁니까?

나는 권력자를 인정합니다. 나는 보통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저를 건드리지 마세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될 문제를 왜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까?

예를 들면 시장에 가는데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데 ‘아, 아저씨 좀 이상해 보인다!’ ‘아니에요. 저 이 동네 살아요! 뭐가 이상해요! 이거 내가 배가 고프니까 돈 줄 테니까 맛있는 음식 주세요! 나, 정상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해도 될 문제를 “나, 예수 저주합니다. 예수 싫어했어요. 됐죠?”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해야 될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그것이 이미 기존 모든 세상에 누구를 싫어한다? 예수님을 싫어하죠. 자, 제가 분명히 처음에 힌트 드렸습니다. 처음에 여기 나오는 예수님의 교훈이라 하는 것이 윤리 도덕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죠.

윤리 도덕이 아니라고 이야기한 이유가 뭐냐 하면 윤리 도덕은 인간과 인간들끼리만 통하는 그런 양심적인 도덕 범위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양심적인 도덕법에서 예수님은 거기에 포함이 될까요? 아니면 밉상 받을까요? 밉상 받죠.

그러면 인간의 윤리와 도덕에 무슨 문제가 있다? 무슨 하자가 있다? 인간의 모든 윤리와 도덕은 필히 예수님을 공격하게 되어 있는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이 이미 정리 됐잖아요. 그렇죠.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죠? 죄 사함 받았죠? 이제는 인간답게 바르게 사세요! 이게 안 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인간답게 바르게 사는 것이 어디서 납득이 돼요? 우리 인간들끼리 납득이 되는 이야기라 말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세요. 부모를 공경해야 되고 형제를 사랑하고 부부간에 화목하고 그렇게 삽시다. 왜? 우리는 예수 믿기 때문에 바르게 살아야죠. 나쁜 짓하지 말고 착한 일 많이 합시다. 이게 하나님의 교훈에 일치되는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교훈에 훼방꺼리입니까?

훼방꺼리이죠. 이것을 모른다니까요. 이것을 빼 먹으면 안 된다 말이죠. 삼강오륜? 부모 공경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부모 공경하고 국가에 충성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나중에 지옥가고 뭐 이런 게 다 있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여러분, 지옥 간 부자 있죠. 거지 나사로 이야기 있죠. 그 부자가 나쁜 짓을 해서 지옥간 거예요?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간 거예요?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갔지 나쁜 짓 한 게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 사람은 호화로이 날마다 파티를 열었잖아요.

파티라는 것이 혼자서 엽니까? 아니면 여러 사람이 서로 의견이 맞아서 여는 거예요? 다른 사람과 의견이 일치가 되니까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파티를 여는 것이 그것도 매일같이 파티를 여는 게 가능하잖아요.

그러면 그 지옥 간 부자는 상식적인 사람이에요? 비상식적 사람이에요? 극히 상식에 부합되는 사람이라는 말이에요.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사람 좋다는 소리 듣고 지옥가고 그게 무슨 이런 난리가 다 있습니까?

교회에서도 그런 게 있어요. 참 저 사람, 사람 하나 참 좋아! 믿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하나는 참 좋아 하는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오늘 본문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게 쉬운 게 아니에요.

아, 여기 멍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을 섬기는구나! 아, 그래 회사 사장님도 교회 다니고 나도 교회 다니니까 이제 교회가서 다른 사람은 사장님 하는데 아, 형님! 이렇게 막먹고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뭐 그 정도 소리에요? 지금 이 이야기가?

같은 믿는 형제라고 만만하게 보고 그냥 일도 안하고 실컷 놀다가 월급은 다 달라고 하고 이렇게 하지 마라 뭐 그런 쪼의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교훈입니까? 드라마에 보면 아버지가 회장님이고 딸이 상무쯤 되면 자기가 회사가도 다른 사람 보는데 회장님 해야 될 것을 아버지, 아버지 이렇게 하면 안 되잖아요. 그 사람들 회사니까요.

딸은 부사장이고 아버지는 회장이고 땅콩 때문에 그런 회사에서 회장이라 하고 집에서는 아버지이라고 해야 되지만 회사에서는 안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현재 노는 동네하고 집하고 구분 좀 하라고 그런 식으로 윤리를 그냥 때우고 넘어갈까요?

이 본문이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천사가 있는 것, 그리고 여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여기 보면 절대로 노예 해방하라는 이야기가 여기 없습니다.

종은 같은 형제이기 때문에 노예로 대하지 말고 수갑을 채우지 말고 풀어줘야지 성경말씀 6장 1절에 보면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주인이 나서서 멍에를 풀어줘라 뭐 그런 교훈입니까? 멍에를 풀어줘야 그게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이다. 뭐 그런 내용이에요? 아니죠.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주인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보고 이야기해요? 네가 노예야? 그럼 노예답게 굴어야지 뭐, 주인하고 너하고 같은 교회 다닌다고? 그래도 너는 노예야! 이런 이야기라 말입니다.

뭐 회사 가니까 너하고 같은 교회 다니는 장로님이 너희회사 사장님인데 이번 승진에서 너를 탈락시키고 절에 다니는 애를 승진시켜서 삐졌어! 그래서 네가 왜, 같은 형제인데 승진 안 시켜 줍니까? 하고 따질 권한이 있습니까?

같은 교인이고 같은 성도이기 때문에 세상에 나가서 자기 이익을 많이 챙길 권한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권한 챙기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뒤에서 호응하고 옹호해 주는 겁니까? 안되죠.

같은 교회 집사님이 경찰관인데 그 교회 같은 집사님인데 차타고 가는데 신호 위반 걸렸습니다. 수고하십니다. 하고 보니까 아이고 같은 교회 집사에요. 오, 김집사! 오, 박집사! 박집사가 경찰관이고 김집사가 신호위반 한 사람이에요.

아이고, 지난 주일에 보고 여기서 보니 더 반갑네! 아이고 추운데 고생합니다. 아이고, 예, 과속했네, 미안합니다. 그냥 갈께요. 그냥 가지 마시고 뗄 것은 떼고 갑시다. 이렇게 해야 된다 말입니다.

자,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출애굽기 20장을 보겠습니다. 거기를 왜 보느냐 거기에 십계명이 나옵니다. 십계명에 제 3계명부터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대목에서 우리가 난해 한 게 있어요. 뭐가 난해 하느냐 하면 십계명 1계명에 보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죠. 그러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분이 누구입니까? 여호와죠. 맞죠? 제 말이 틀렸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맞죠.

자, 묻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여호와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따로 있다는 겁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겁니까?

제가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거예요? 목사님, 여호와의 이름이 하나님이고 하나님 이름이 여호와 인데 그 질문은 똑같은 질문 같은데 이렇게 되겠죠. 이게 같은 질문이 아니에요.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여호와의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 그게 전부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방법은 굉장히 쉽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는 방법 중에 하나인데 여호와 하던지 요즘은 야훼하는데 야훼던 여호와던지 하고요 야훼이고 여호와고 불러서는 안된다 자칫하면 앞에 망령되이 부르지말라 했기 때문에 아예 주로 부르자 뭐 하여튼 주를 부르던지 여호와를 부르던지 야훼를 부르던지 관계없어요.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여호와 부를 때는 정신 바짝 차리고 부르면 그것은 망령되이 일컬은 것이 아니잖아요. 왜? 정신 바짝 차리고 불렀기 때문에요. 쉽게 예를 듭시다.

예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교훈이 있다면 예수님을 부를 때는 그 때 정신을 바짝 차리면 돼요. 예수님, 예수님은 참 좋은 분입니다. 할 때 예수님할 때는 좀 조심스럽게 발음도 명확하게 그리고 그때는 속도를 늦추어서 천천히 예 수 님 이러면 마치 망령되이 안 잃은 것 같이 보이죠.

신직수씨 집에 개 이름이 뭡니까? “누룽지하고 늘이” “누룽지 이리 오너라”, 이거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에이 누룽지” 이것은 망령되이 일컬은 겁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에 망령되이 일컬었다는 말은 함부로 호칭할 때에 성의 없이 대충 그냥 후딱 지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부른 것이 망령되이 부른 거잖아요.

우리가 평소에 사람 대 사람이 있을 때 야, 너 함부로 놀리듯이 부르지 마! 그래, 정신 차려 부를게 우리 이름을 정신 차리고 진정성 있게 부르고 진중성 있게 불러요. 그러면 우리는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십계명에 나오는 세 번째 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마라가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조심스럽게 부르지않고 그냥 자다가 막 부르는 것이 망령되이 일컫는 겁니까? 그런 거예요?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할 때는 반드시 기능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기능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그 기능은 사람은 못합니다. 누가 할 수 있어요?

하나님도 못해요. 누가 하느냐? 하나님 이름이 해요.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다른 거예요. 하나님이라는 것은 어떤 용어를 붙이던 간에 그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입니다. 왜? 초월자애니까 이 세상을 창조 하신분이고 인간이 아닌 어떤 분이고 천지를 관리하시고 운영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신은 히브리뿐만 아니고 인간들이 다 알고 있어요. 로마서 1장에 뭐라 되어 있습니까? 저희가 하나님을 알게 하잖아요. 그런데 저희들이 하나님을 아는데 뭐는 몰라요? 이스라엘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모르잖아요.

그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여호와가 됐던 야훼가 됐던 주가 됐던 그것은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그것은 이름이 문제가 아니고 그 기능이 문제라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하나님 이름이 개입을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애굽에서 지금도 노예생활을 할뻔 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할 때에 그게 바로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애쓰고 노력하면 우리가 애굽땅에서 탈출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거예요.

아주 점잖게 이야기를 해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거예요. 또 망령되이 일컫는 이야기 해 볼까요? 우리 집에 가정부가 있었지만 가정부가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우리 둘이 협의해서 그래 가정부 불쌍하니까 가정부를 해방시켜 줬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겁니다.

또 해 볼까요? 당신은 나하고 결혼했기 때문에 내 아내이기 때문에 내가 시키는 대로 물 떠와! 이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거예요. 뭐가 빠졌어요? 제가 방금 망령되이 일컫는 가운데 뭐가 빠지고 뭐가 들어 간 거죠?

하나님의 이름의 특성은 빠지고 그 자리에 누가 들어간 겁니까? 내가 하면 할 수 있다가 이미 들어가 버렸죠. 그게 바로 하나님이 있으나 마나한 존재, 하나님의 개입이 있으나 마나한 존재에요.

제가 지금 구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거라니까요.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이 일하셨다 해야 망령되이 일컫지 않은 것이라 이 말이죠. 지금 한국 교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구분 못해요.

교인들이 교회에서 물어보면 ‘누구를 믿습니까?’ ‘하나님 믿죠.’ 그러니까 그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거라니까요. 왜냐 하면 그 이유가 뭔가 하면 바로 십계명 1계명입니다. 다같이 1계명이 뭡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겁니까? 뭡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러면 ‘나’ 라는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히브리인들 애굽에서 건져낸 어떤 기능, 어떤 일을 일으킨 분이죠. 그러면 다른 신은 뭐에요? 다른 신은 그런 일이 있으나 마나 관계없이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전능하신 어떤 분, 그게 다른 신이잖아요.

교인이 월요일부터 회사를 나갔습니다. 나갔는데 일이 잘 안돼요. 안되니까 하는 말이 ‘하나님, 왜 자꾸 일이 꼬이고 내 일이 잘 안됩니까?’ 무심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말을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그 순간, 하나님의 이름이 쏙 들어왔다,

하나님의 이름이 쏙 들어왔을 때 어떤 내면의 소리가 들릴 때 “네가 지금 회사 일 잘 안 된다고 원망하고 탓하는데 나, 하나님 이름은 너 보다 이 땅에 와서 고생을 더 했거든”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면 처음에 하나님이여 일이 잘 안됩니다. 라고 했을 때 응답이 뭐라고요? 나는 너 보다 이 땅에서 고생을 더했다고 할 때 그 이 땅에서 고생한 하나님이 누구시죠? 나사렛 예수님이 잖아요.

그러면 어느 쪽이 하나님이에요?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누구나 알고 있는 하나님이 하나님입니까?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이죠. 사도 바울을 만나신 분이 누구에요? 하나님이에요? 누구에요? 나사렛 예수님이죠. 주여 누구십니까? 할 때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했죠.

바로 그분이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이름이고 그게 신약에 오면 주예수가 되는 거예요. 지금 주 예수를 믿지 않으면 저주 받는 거예요. 하나님은 쥐나 개나 다 알고 있어요. 불교도 하나님을 알고 있어요.

하나님은 누구나 태어나면 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구원 시켜 줄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 이름의 기능으로 발휘해서 그 기능의 결과물이 너라는 겁니다. 네가 지금 살아가는 네가 하나님의 결과물이 아니고 네가 아는 하나님의 결과물이 아니고 누구의 결과이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 히브리인들 애굽에서 건져낸 그 하나님의 결과물이 너라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을 못 받고 누구를 믿어야 돼요?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받는 거예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이 임하게 되면 성령은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은 누구를 증거합니까?

나사렛 주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성령이에요. 여러분 다 아는 뻔 한 이야기인데 이것을 제가 다시 한번 강조하는 이유가 자꾸 예수님한테는 정이 안가고 기존에 있는 하나님한테 정이 가는 게 문제가 되거든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인상에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고생만 하다 가신분이잖아요.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널널한 하늘나라에서 의자에 앉아서 내려다보고 계신분이기 때문에 뭔가 최종적이고 중간은 아니고 마지막 마무리로 치우시는 분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중간과정 빼놓고 마무리 되시는 그 상황이 내 상황이고 싶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숨어계시는 분이거든요. 애가 있는 곳에 아버지가 있지 예수님 없는 곳에는 아버지도 없어요. 그 말은 주님 앞에서 끽소리 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자꾸 하나님 앞에서 자기 신세한탄을 하는데 막상 십자가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한탄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있는데 ‘예수님, 내 돈 5만원 빌려간 거 안 갚았습니다.’ 그랬습니까? 지금 피 흘리고 있는 당사자 앞에서 우리 애가 공부를 못해요, 사업이 안돼요. 그런 탓을 할 수 있어요? 없어요? 탓을 못하죠. 탓을 못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을 훼방 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 노예가 하나님을 믿는 노예가 아니고 진짜 네가 하나님을 믿는 노예라면 이런 소리 안한다. 누구를 믿기 때문에? 그 노예가 주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노예라면 주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서 주인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강의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여기 나오는 교훈은 그냥 인간들만 있는 윤리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라고 한 거예요. 인간들끼리 서로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윤리와 도덕이 아닌 거예요.

누구를 모독해서는 안 된다? 누구의 기능? 예수님의 십자가 기능을 모독하는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착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르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성 회복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남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러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 받고 모독 안받고가 아니라는 겁니다. 뭐를 놓치면 안됩니까? 바로 예수님의 그 행하셨던 그 십자가 죽으신 의미가 없이 이 땅에 행동하고 생각하고 살아가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것이고 교훈에 대해서 모독하는 행동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을 보게 되니까 우리는 다시 이 정도는 지킨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해 보니까 우리가 성경구절 하나 못 지키죠. 여러분, 방금 이 구절 나오고 난 뒤에 7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우리는 생각하기를 이 7절 8절의 먹는 것 입는 것 있은 즉 족한 줄로 알라는 이 구절만 못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앞에 있는 구절도 똑같은 평지에 있는 거예요. 같이 바로 옆에 있는 거예요.

우리는 7절 8절은 못 지키지만 1절 2절은 지킨다고 자부하잖아요. 그게 바로 오독, 잘못되게 해석한 겁니다. 우리는 어떤 성경구절도 못 지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먼저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 뭐하십니까? 저 안 도와주고’ 이것부터 먼저 생각하지 ‘주여, 제가 입은 100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아, 거의 못 봤는데요. 욥이 처음에 자기가 고난이 왔을 때 뭐라 했습니까? 열린 입으로 뭐라 했어요?

“하나님,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나를 태어나게 하지 말지 태어나게 해서 왜 고생 시킵니까?” 이렇게 나왔잖아요. 그런데 그 욥이 마지막에 어떻게 됩니까? 끝까지 욥이 하나님, 정말 제가 무슨 죄가 있다고 고생시킵니까? 이렇게 나왔어요?

마지막에 욥이 머리에 뭘 뒤집어썼죠. 연탄제를 뒤집어썼죠. 연탄제가 있는지 모르지만 뒤집어쓰고 제가 유구무언, 제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욥이 왜 그렇게 달라졌죠? 욥에게 무슨 일이 벌어져 그랬습니까?

욥에게 십자가 고난이 닥쳤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금 까지 강의 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잊어버린다던지 놓쳐 버린 상태에서 대인관계에 나서버리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고 훼방하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주의 말씀을 훼방 하지 않고 살아간 적이 없어요. 훼방 안하고 그냥 지나간 법이 없어요. 나도 예수 믿어! 나는 너한테 굴릴게 없어! 우리가 기껏 하는 짓꺼리가 그런 짓꺼리에요. 나도 복음알아! 어디 함부로 나를 대해! 나도 복음 안단 말이야! 주님이 나와 함께 있어!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하면서 주님을 훼방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여! 나한테 딱 붙으세요, 그리고 나의 후원자가 되시고 나의 도움이 되세요, 내가 주와 동업자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주의 일이라 할 테니까 주께서 뒤에서 팍팍 밀어주세요! 이런 식으로 주의 이름을 모독하고 훼방하죠.

그러면 주님이 뭐라 합니까?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그러면 우리는 그건 좀 심하고 뭐 저축 좀 해야 하고 보험은 좀 들어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 협상 적으로 나갑시다. 이런 식으로 핑계를 대지요.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나님은 기존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어떤 특별한 사건을 유발시킨 당사자이죠. 그래서 십계명 제일 앞에 보면 전문이 나오죠. 전문이 뭡니까? 신명기의 십계명을 보면 너희를 애굽에서 종 되었던 나 여호와라고 해놓고 그 다음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왜? 나는 계속해서 애굽의 종 되었던 너희를 건져낼 의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내 하는 기능을 놓치면 너는 기존의 이방신을 섬길 수밖에 없는 그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신약에 와 있는데 구약을 보게 되면 항상 우리가 알고 있던 이방 민족이 알고 있던 인간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그것에 펑크를 내고 그것에 낯선 사건들을 유발시킨 그러한 하나님의 이름, 주죠.

하나님의 이름이 부른 새로운 사건을 유발시킨 하나님과 기존에 알고 있던 하나님과의 그 싸움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일어나는 장소가 구약에서 이스라엘 내부라면 신약에서는 바로 성도 안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어요. 지금도 일어나고 있어요. 아까 일어나는 예를 제가 언급을 해 드렸습니다.

이렇게 언급을 해 놨죠. 내가 예수를 잘 믿고 잘 섬기는데 왜 저한테 이런 어려운 일이 생깁니까? 바로 이것이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을 좀 더 심도 있게 한번 해 봅시다.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이 세상은 인간과 인간들끼리 사느냐고 질문을 던졌죠. 여러분들은 물론 인간들끼리 사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또 질문합니다. 그러면 인간과 인간들이 살지 않으면 누가 살죠? 하나님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누가 살지요? 하나님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이방 종교인이에요. 그러면 누가 살죠? 신이 있다고 하면 이방 종교인이고 철학자이고 불교신자이고 불교는 공의라 하니까 그러면 누가 있는 겁니까?

주의 이름이 있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불교는 뭐냐, 기존 종교에서는 신이라는 용어, 또는 공의라는 용어가 인간 속에 있어서 인간과 인간을 묶는다고 본겁니다. 그런데 복음은 신이 아니고 누가 왔죠?

여러분, 들어봤죠? 성육신이죠. 성육신인데 이분이 인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십니까? 참, 신학자도 답변 못할 질문을 한 거예요. 이분이 인간이에요? 신이에요? 하나님입니까? 인간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에요. 왜 아니냐? 인간이라고 할 때는 우리가 쓰는 단어, 인간이라는 단어를 주님한테 붙일 수가 없어요.

이게 어제 제가 올린 글 있죠. “영혼들의 여행”이라는 평에 비트겐슈타인 이론을 올려놨잖아요. 인간의 언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세계는 인간이 아는 단어와 언어 밖을 못 벗어납니다.

어떤 꿈을 이야기할 때 그 꿈에 일어난 현상을 설명할 때는 자기가 아는 언어 세계 안에서만 그게 설명이 될 뿐이에요. 따라서 인간이라는 말을 주님한테 못 붙이는 이유가 평소에 인간이라는 말을 누구한테 썼습니까? 지금 우리끼리 썼잖아요.

이 세상 우리 사이에 누가 있습니까? 주님이 계시잖아요. 주님과 인간, 우리 사이에 언어가 통했어요? 안 통했어요? 안 통했죠. 안 통했으니까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잖아요. 베드로는 아예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고 왜 그랬어요? 이쪽 인간들 세계에 붙는 게 좋지 예수님 말은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듣는 거예요.

예수님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나는 누구지? 인간, 주님은 우리한테 인간, 이러면 땡 틀린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까? 이것도 틀렸죠. 왜냐 하나님이란 단어를 평소에 먼저 누가 쓰고 있었어요? 인간들 끼리 쓰고 있었죠. 천지를 창조하신 분, 그런데 신이라는 것을 예수님께 갖다 붙일 때에 네가 신이냐? 불으니까 주님은 그렇다고 이야기했죠.

그렇다고 이야기하면서 뭐라 이야기합니까? 내가 나보고 싫어하는 것 보니까 너희 애비는 마귀다!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요한복음 8장에서 그랬습니다. 앞뒤가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그로다 해놓고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하나님은 아니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봅시다. 인간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어 있고 신도 개념이 형성되어 있는 그 사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개념을 가지고 들어오고 있죠. 그 새로운 개념이 뭐냐 하면 인간의 세계에는 없는 거예요. 있었으면 단어를 붙였죠. 없는 겁니다.

없으니까 無(무)죠. 무에서 예수님이 있음이 되는 겁니다. 없는데서 예수님이 분명히 계시거든요. 그럴 때 나오는 이름이 무슨 이름이냐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그것을 人子(인자)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자기를 인자라고 부른 겁니다. 최초로 부른 겁니다. 아니 구약에 다니엘보고도 인자라 했고 다윗에 시편 8편에도 인자라는 말이 나오고 에스겔 보고도 하나님께서 인자야라고 부르는데 왜 목사님은 최초라고 합니까?

이게 성경을 볼 때는 시간을 역으로 거슬러서 봐야 돼요. 최초에 부활된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부활의 첫 열매이죠. 사도 바울이 부활의 첫 열매이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모든 처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역사적인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는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거예요.

첫 번째 아담은 아담이죠. 두 번째 아담은 예수님이죠. 그러면서도 첫 번째 아담이 두 번째 아담에게 뭐가 합니까? 두 번째 아담의 모형이 되잖아요. 그러면 모형이라 하는 것은 실체가 따로 있죠. 먼저 있죠.

실체가 먼저 있고 제를 표현한 것이 모형이잖아요. 그러면 아담이 먼저 있었어요? 예수님이 먼저 있었어요? 창세전에 예수님이 먼저 있었던 거예요. 그렇다면 아담을 만든 것은 예수님이 장차 아담 같은 그러한 분으로 오실 것을 예상해서 미리 당겨서 아담이라는 인형을 만든 겁니다. 바비 인형

예수님의 몸에는 최초가 들어있고 마지막이 들어 있는 몸입니다. 우리 인간의 몸은 그 최초와 마지막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 뒤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거예요. 그게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데 모든 우리의 피조물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했어요.

그 그리스도 이야기를 가지고 골로새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거든요. 이렇게 되어 보면 성육신이라는 말이 그러니까 불교나 다른 종교에서도 신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하는데 신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인자가 함께 있는 거죠.

인자가 함께 있어 버리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 함께 있음이라는 것이 성사가 안 됩니다. 함께 있게 해 줄 때만 함께 있지 옆에 예수님하고 같이 한 방에 자도 함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할 때에 그 때 우리가 먼저 있고 그 속에 주님이 뛰어 들어서 임마누엘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단독으로 오셔서 그때부터 새삼스럽게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

임마누엘 되기 위해서 우리의 해당되는 사람을 주님이 무에서 유로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어디 까지나 예수님은 혼자 일해요. 협력자, 동력 자가 필요 없습니다. 혼자 일 하십니다. 혼자 일해도 실패라는 것이 없습니다.

혼자 일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의 일을 한다는 그러한 생각은 애당초 버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한 적도 없고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어요. 따라서 주의 일을 했다는 핑계로 복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면 고맙고 안 줘도 그만입니다. 그런 겁니다. 이 세상에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일은 주님 혼자 했어요. 송재원 성도 머리 노란 것도 주께서 그렇게 염색하게 하신 거예요. 염색이 잘 나왔네요.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발걸음도 세시고 머릿 카락도 세시고 머리카락에 물들이게 하시고모든 것을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것을 고백을 함으로서 우리는 뭐를 집어넣지 못하느냐 하면 저도 쫌 했잖아요? 라는 말을 함부로 집어넣을 수가 없어요.

주께서 혼자 하셔서 혼자 하신 결실물 가운데 비로소 ‘우리’라는 것이 생기고 ‘함께’라는 말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우리, 함께는 전부 다 100% 주께서 혼자 일하신 결실물이지 우리하고 협동해서 우리 만들고 함께가 성사된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래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라는 말은 우리가 애쓰고 노력하고 늘 기도 하고 늘 함께 있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만날 도망가고 내 빼고 주님 싫다고 외면해 버릴 때도 주의 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는 그런 고백으로 함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의 문제, 그러면 함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 함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우리가 말씀을 위배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위배했음을 느낄 때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위배 했다는 것을 알 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말씀을 지킬 때는 함께 있는 것을 못 느낍니까? 라고 하신다면 우리는 말씀을 지킨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말씀을 지킨 적은 없는데 말씀을 지키지 못 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따로 있어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주님이 언제 함께 있음을 압니까? 우리가 말씀을 위배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을 때 주와 함께 있음도 같이 알아채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함께 있음으로서 우리는 말씀의 실패자가 되고 위반자가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고 우리를 집어넣게 하는 그 모든 공로는 오직 주님 자신의 업적이고 자신의 노력이고 자신의 활동의 결과라는 것을 우리한테 깨우치게 만드는 거예요.

어떤 행실 나쁜 소문난 여인이 향수병을 깨고 모든 것을 다 바쳤죠. 그거 누가 했습니까? 성경에 누가하게 되어 있죠? 어떤 여인이 하게 되어 있죠.

여인이 하는 것을 봐서 옆에 있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상당히 똑똑한 분으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모르는 게 많네!” “왜?” “예수님한테 향수 뿌리고 울고 불고 하는 저 여자가 이 동네에서 얼마나 나쁜 소문이 도는 여자인데 아니 그런 더러운 죄인한테 어떻게 저런 대우를 좋다고 받지? 놀라면 우리 거룩한 바리새인하고 같이 놀아야지!”라고 바리새인이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나와 함께 있어도, ‘함께’ 나옵니다. 함께 있어도 발 씻으라고 발 씻을 물을 준적이 있느냐? 그런데 저 여인은 귀한 향수를 뿌려서 내 발을 눈물로서 씻겼다.

어느 것이 사랑을 많이 받은 자냐? 이 말은 나의 인자됨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홀로 일하게 된다는 그 사실을 바리새인 너희들을 통해서 더 많이 보여 주겠느냐? 아니면 울면서 자기 머리카락으로 향수를 뿌리는 저 여인을 통해서 내가 더욱더 나답게 비추이겠느냐? 어느 쪽이냐 이 말입니다.

어느 쪽이겠어요? 행색이 나쁜 여자가 울면서 할 때 더 많이 비추겠죠. 그렇다면 성경 전체는 누구만 뽐내는 내용이에요? 울었던 그 여인에게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탕자의 자리를 높이는 그게 성경 주제입니까?

누구만 보라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나름대로 세워 만들어 가는 세상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뭐를 교체하고? 기존의 인간들과 인간들의 윤리 도덕을 만든 세상을 뒤엎는 식입니다.

그러니까 성육신이라는 것은 세상 바꾸기, 세상 뒤집기입니다. 기존 세상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환상으로 보는 거예요. 환상 또는 환영 차이가 나는데 같은 의미로 봅시다. 이 세상을 환상으로 보는 겁니다.

이 세상은 너를 반추하는 너를 비춰보는 너를 부각시키는 너를 높이는 너의 영광을 나타내는 너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세상, 그래서 인간과 인간들 끼리 서로 소통도 잘되고 의논도 잘 되는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전 잡혔을 때에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한 것은 ‘나는 당신들 편이에요. 나는 예수편이 아닙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베드로의 속마음은 뭡니까? 예수님을 3년동안 따라 다녀도 속 마음은 뭐에요? 이 세상을 내가 부정하기에는 아직 까지 그 정도는 안된다 이 말이죠.

내가 이 세상을 포기 못하겠다, 그런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제 말이 맞잖아요. 베드로는 자력으로 구원이 된다? 안 된다? 자력으로 구원이 안 되죠. 그러니까 이게 말씀을 실패자에요? 성공자에요? 말씀의 실패자 맞잖아요? 그래서 죄인이에요? 죄인이 아니에요? 죄인 맞잖아요.

뭐가 문제에요? 우리는 죄인입니다. 한 순간도 말씀을 지킨 적인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어떻게 구원합니까? 아이고 착했다, 수고했다! 네가 전에 내가 잡혔을 때에 딱 쳐다보니까 3번 부인하던데 그때 아주 수고했어요. 이렇게 공로를 치하하면서 부르십니까?

다시 처음으로 고기 잡을 때로 가죠.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하면서 찾아내죠. 그 말은 뭐냐, 베드로야! 네가 살아온 네 인생은 그것이 네 것이 아니고 누구 거다? 나, 인자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너를 바닥에다 깔아놓은 그거다 말입니다.

그것을 돌돌 감아 버리면 베드로는 주님과 다시 만나게 된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께서 저를 사랑하십니다. 그게 독생자의 사랑입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50213b (하나님의 개입)―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상전이 있어야 내가 얼마나 나만 위해서 산다는 것이 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높은 사람이 없으면 다시 말해서 자기한테 지시와 명령과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타인의 의사에 의해서 굴복당하는 상황이 없으면 인간은 자기가 최고 인줄 알고 살아가요.

누구한테 눌려보고 일방적으로 지시를 당해보고 잔소리를 들어봐야 내가 그것을 얼마나 그 잔소리를 싫어하고 너 한번 두고 보자 나중에 다른 데서 보자! 가만두지 않는다! 이러한 질투와 분쟁과 악한 생각이 절로 나게 되어 있어요.

자영업 하는 것 말고 어떤 회사 들어가서 상전이 있고 상전이니까 그 사람은 자기와 같을 리가 없죠. 그 사람은 그 사람이 보는 세계가 다르니까요 밑에 직원하고 위에 직원하고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지시를 하게 되면 어떤 입장의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 아래쪽에 있는 그런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한테는 상당히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쓸데없는 지시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죠.

그만큼 정보의 분량이 낮기 때문에 넓지 않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일을 왜 따지지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따지는 일이 벌어져야 됩니다. 왜냐 하면 여기 4절에 보게 되면

딤전 6: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딤전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가 남한테 뭔가 당하는 처지에서는 누구나 불쑥불쑥 이러한 반발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생각해 봅시다.

“성육신” 성육신이 인자라고 했습니다. 인자인데 예수님이 스스로 인자라고 했는데 이것을 구체화될 때 이게 뭐로 보이냐 이게 몸으로 나타납니다. 몸은 뭐가 있느냐 하면 그 몸은 뭐가 있느냐 하면 육이 아니고 신체가 아니고 몸은 언약을 드러내는 신체가 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 언약을 드러내는 첫 번째 시간에 이야기했기 때문에 여러분 아시겠죠. 언약은 뭐냐 하면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아는 하나님은 언약을 못 줘요.

이스라엘에 나타나신, 애굽에서 그들의 종 되었던 끄집어낸 그 하나님의 이름이 언약을 앞장 세워서 이 지상에 낯선 사건들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여러분, 구약에 이스라엘이 나오잖아요. 그 이스라엘이 나올 때 아, 옛날에 이런 나라 있었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주의 이름이 있는 곳에는 항상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주의 이름이 계시잖아요. 활동하잖아요. 사도행전에 보세요. 주님이 함께 일하죠. 그러면 그것이 이스라엘이에요. 에베소서에 보면 교회를 가지고 새 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리고 예수님도 뭐라 합니까?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이 말은 나 이스라엘을 찾아 온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버렸던 이스라엘이 핍박했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방인 백부장이에요.

이방인이라도 그 사람은 주님이 관여하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지역의 논리에서 어려운 것이 있어요. 예수님은 인자가 몸으로 오셨는데 이 몸은 무엇과 연관되어 있습니까? 언약과 연관되어 있죠.

우리의 몸은 언약과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뭐라 하느냐 하면 우리의 몸은 마귀와 연관되어 있죠. 그래서 이것을 육이라 하는 겁니다.

이제부터 제가 육과 영과 신체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겠는데 사도 바울이 육이라고 했을 때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육이라 하고요 예수님과의 관계가 연결되어 있을 경우를 가지고 그것을 영이라고 해요.

영이 또 나와요. 영 또는 영적 몸, 그런데 몸을 사도 바울은 영으로 사용한 거예요. 이게 고린도전서에 보면 나와요. 네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몸이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왜 그러느냐 하면 내 안에 주가 계시기 때문에 너 안에 주가 계시면 너의 몸은 영의 몸이 되는 겁니다.

안양에서 어떤 분이 질문을 했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라고 하기에 제가 부활했을 때 그 예수님의 모습으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라고 대답 했거든요.

이것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우리가 하늘의 형상을 입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을 입게 되면 천사가 부러워해요. 천사는 뭐가 없느냐 하면 신체가 없어요. 천사가 왜 신체가 없느냐 하면 주님이 천사를 구원하려고 몸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신체가 있는 인간을 위하여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신체를 가집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예수님만 부각시키기 위해서 주께서 미리 깔아놓은 모자이크들입니다. 주님이 미리 깔아놨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주께서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 말은 나의 신앙생활은 있다? 없다? 나의 신앙생활은 없는 겁니다.

목사님, 저 신앙생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없어요. 없는데 뭘 해요? 할것이 없는데 그러면 무슨 고백을 합니까? 주께서 저를 이렇게 했습니다. 고백을 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어떤 때 고백을 합니까? 위반했을 때, 어디에 위반을 했을 때? 헌법에 위반했을 때? 아니에요. 말씀에 위반했을 때입니다.

주님이 주신 교훈에 위반했을 때 자기가 신앙인인 것을 확인하게 되죠. 어떤 말씀에? 8절 말씀 봅시다.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여기서 실패자이고 합체되지 못하고 위반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계기요 기회가 찾아온 겁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 안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를 들면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하면 ‘너나 잘 하세요. 나는 불교신자이기 때문에 나는 기독교 경전 안봅니다.’ 이런 것, ‘그런 구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별로 생활에 도움이 안 되네요! 내가 사는 의욕을 유발시키지 않네요!’ 이렇게 나오는 거,

뭘 무시하는 거예요? 신앙생활은 결국은 뭘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주께서는 말씀대로 된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고 믿어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지키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바늘처럼, 바늘 찌른다고 하니까 어린이 집 같은데 어린이 집에 교사가 바늘을 찌르듯이 말씀을 찔러줄 때 우리가 고마운 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찔러줘야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내 힘이 아니라는 것을 알잖아요. 그런데 신앙생활을 전혀 못하는 사람,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찔러 줘도 뭐 찔렀나? 이렇게 돼요. 말씀과 상관이 없어요.

말씀이 활성화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키고 안 지키고의 문제를 떠나서 말씀이 자기한테는 의미가 없습니다. 말씀보다 중요한 게 더 많은데 말씀을 왜 자꾸 신경을 쓰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하면서 우리교인들도 그렇게 의존교회도 그렇고 다니면서 놀라는 것은 말씀에 관심이 있다는 세상에 이런 기적이 있겠나? 생각이 됩니다. 아니 말씀이 돈이 됩니까? 떡이 됩니까? 말씀 지킨다고 하늘에서 로또가 떨어집니까?

전혀 생활하는데 말씀이 보탬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다가 왜 신경을 쓰느냐 이 말입니다. 참 용감하게 남자답게 말씀? 저리가! 이렇게 좀 살면 안 됩니까?

말씀이 뭐 필요 있어? 그거 아무 보탬이 안 되는데 말씀이 뭐 성경책 안에 들어있겠지! 내가 편다고 안 편다고 뭐 말씀이 보고 안 보고 무슨 관계있어? 나는 말씀보다 다른 데 신경 쓰지 말씀은 관심도 없어! 하는 게 이게 정상이에요.

그렇게 되는 것이 정상인데 주께서는 그렇게 안 되도록 조치를 취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여기 5절을 보세요.

딤전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마음이 부패하여 지고라고 할 때 진짜 마음이 부패한 채로 지옥 갈 사람들은 뭡니까? “어쩌라고? 그래 내가 부패하니까 어쩌라고?” 이렇게 되어 버리죠. 그러면 정말 천국 갈 사람은 마음이 부패하여 하면 “아이고 세상에 제가 이렇게 사네요.”

말씀 자체의 권위를 나보다 더 인정 해 버린다니까요.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는 차후에 이 땅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순서를 그렇게 정하는 거예요.

정해진다는 그것이 보통 능력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은 어렵지 않습니다.

주의 교훈이 있다, 주의 교훈이 있는데 그 교훈은 무엇을 유발하느냐? 시기와 질투와 마음에 부패한 것과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평소에 네가 돈을 좋아했다는 그런 우리 속의 있는 모든 죄악된 것을 까발려 지고 그것을 노출시키는 그 작업에 대해서 너는 감사하라 이 말입니다.

3절에 보면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앞에 뭐가 붙어 있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죠. 제가 지금 두 번째 시간에 해야 할 이야기를 전혀 안 하고 있습니다. 그냥 서론만 이야기하고 있는데 제가 지금 성육신, 몸을 이야기하려고 해요.

상당히 너무 어렵기 때문에 제가 본문을 통해서 성육신을 접근하려고 합니다. 선배들을 생각 해 봅시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각종 선배들이 있죠.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노아가 메시야입니까? 아니죠. 왜 노아정도 되면 메시야로 충분히 자격이 있는 것 같은데 왜 메시야가 아니죠? 그것은 남들 보기에 노아! 노아! 노아 훌륭하다 하고 싶은데 노아가 술 먹고 벌거벗고 그래서 메시야가 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노아 당사자한테 물었다고 칩시다. 노아님, 우리의 메시야가 되게 해 주세요.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 보고 부탁하죠. 기드온님 우리의 왕이 되게 해 달라고 하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왜? 3백 명 가지고 엄청난 대군을 다 물리쳤으니까 충분하게 우리의 구원자가 될 만한 자격이 있지요.

노아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러면 당사자 노아에게 물어봅시다. 노아님, 우리의 메시야가 되게 해 달라! 또는 모세나 엘리야한테 엘리야 같은 경우 대단한 사람이죠. 물을 부었는데 그게 불이 홀라당 다 탈정도로 비까지 막 내리게 했으니까요

그럴 때 모세, 엘리야, 노아가 한결같이 어떤 소리 하겠습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면 그 소리만 딱 들으면 ‘에이 그러면 당신이 죄인이니까 천국 못 가겠네! 천국은 의인만 가는데 죄인이니까 천국 못가겠네!’ 이렇게 우리가 나온다면 우리가 뭘 놓친 거예요?

어떤 것을 놓친 거예요? 사도 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할 때 ‘에이 죄인이니 지옥 가겠네!’ 라고 함부로 말을 그렇게 할 때 우리가 뭘 놓쳤기 때문에 함부로 그런 철없는 말을 할까요?

성육신을 놓친 거예요. 노아는 몸이 있어요? 없어요? 노아는 몸이 있죠. 모세는 몸이 있죠. 그리고 엘리야는 몸이 있죠. 그 몸 메시야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시편을 썼던 다윗이 시편대로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고 다윗이 주라고 한 것은 다윗을 두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다윗 뒤에 오실 어떤 분, 메시야, 예수님을 이야기한다고 했죠.

그럼 다윗은 뭐냐, 다윗은 무덤이 있다 했죠. 그러면 다윗의 무덤에 가면 다윗 몸은 어떻게 되죠? 썩어있죠. 에스겔 37장에 보면 뼈다귀 있잖아요. 뼈들만 있을 때 엘리사 데려다가 이 뼈들이 어떻게 살겠느냐 하니까 엘리사가 하는 말이 주의 말씀대로 삽니다. 하니까 주의 말씀이 임하니까 그들이 군대가 되었죠.

다윗의 몸은 있지만 이게 어떤 몸이냐 하면 이게 썩는 몸입니다. 그러면 썩는 몸인데 썩는 몸 다윗이 뭐라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신을 받아서 하나님의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물어봅시다.

이 예언을 한 것은 다윗의 영혼이에요? 다윗의 몸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제가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윗의 영혼이 했다고 하죠.

성경은 영혼 같은 게 없어요. 육체와 분리된 영혼 같은 것은 성경에 안 나옵니다. 이것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인간들이 인간들끼리의 세계에서 나왔던 개념입니다.

몸은 죽어도 영혼은 다른 데 모인다는 개념은 없습니다. 그 개념이 되어 버리면 그것은 영혼들의 여행에 나온 책처럼 그것은 전생을 끄집어낸 윤회설이 맞아요. 그것은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그것을 주장할 수 있어요.

성경에서는 그런 주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영혼 같은 게 없습니다. 그러면 뭐만 있습니까? 몸만 있어요. 어떤 몸?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된 몸만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예수님을 기다린 것은 성육신에서 나온 언약이 다윗에게 도달되어서 다윗이 자기 썩어가는 몸을 품고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그게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된,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신이 돼서 신약대로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죽어가는 다윗의 신체위에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몸을 통해서 자기 목소리를 낸 거예요.

세례요한이 몸이 있죠. 세례요한이 쟁반에 죽어가면서 평소에 세례요한이 말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말을 한 겁니다. 말을 하면서 세례요한의 몸은 썩어가요. 그래서 예수님도 그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죽습니다.

그러면 그 전체가 뭐냐 하면 전체가 육이 아니고 몸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몸이 되는 겁니다. 정리해 보면 몸 앞에서 신체가 등장하고 신체는 썩습니다.

몸 앞에서 몸의 언약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육으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이라는 육, 육은 하나님의 관계가 끊어져서 사랑의 관계가 아니고 미움의 관계가 되어서 지옥 가는 육이 되는 겁니다.

이 육은 누가 지배하느냐? 악마가 지배하게 되어 있어요. 마귀가 지배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된다면 인간은 신체가 있는데 이것은 창세기 3장에 의해서 신체는 이마에 삐질 땀을 흘리면서 애쓰다가 결국 흙이니 어디로 가죠? 흙으로 돌아가죠.

그러면 이 신체가 마귀에 속하면 지옥가고 이 신체가 하나님의 성신과 관련되어 있으면 이것은 어디 갑니까? 천국 가죠.

보세요. 뭐가 문제이냐 하면 인간은 몸과 플러스 영혼으로 되어 있다. 이 사고방식은 뭐가 빠졌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빠져있죠. 언약이 없는 세계에서 소통되는 그런 개념으로 그동안 신학과 그동안 기독교 교회가 언약이 없는 빠져있는 상태에서 기존 철학, 인간은 몸과 영으로 되어 있다는 이것을 가지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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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7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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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