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0-칸트
201502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0-칸트
이름 : 한윤범(IP:14.39.134.30)
201502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0-칸트
(강의:이근호 목사)
-해석하는 자아가 따로 있습니까?
있어요. 왜냐하면 단편적인 것이 아니고 연속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럼 두 개뿐만 아니고 세 개, 네 개도 될 수 있잖아요, 자아는?
아니에요. 이어짐과, 단편, 둘밖에 없어요. 개념이 둘로 대조되니까. 어디까지 이어지느냐하면 죽어서 천국 가는 데까지 이어지니까. 신체는 죽어도 영혼이 남아서 계속 간다는 그런 자아가 또 있다는.
-영혼까지 관계하는 자아
그렇지요.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칸트가. 교회나 성당, 성경을 배제하고 아프리카 사람이나 아시아 사람이나 보편적이고 누구나 신이 내려주신 그 빛, 계몽적인 진리를 칸트가 설명해가는 거예요. 성경과 관계없이.
-그걸 도덕이라고 말하는
도덕이라고 하는 거죠. 도덕이라고 할 때 윤리와 도덕을 여러 번 했지만 분리하는 게 좋습니다. 당연히 분리해야 돼요. 윤리는 타인과의 관계입니다. 타인이나 공동체나 국가와의 관계가 윤리에요. 시민윤리, 국가윤리 있잖아요. 도덕이라 하는 것은 자기 안에 신과 양심과 관련된 것이에요. 지금 칸트는 그동안 도덕이 없고 윤리로 유행이 됐다는 겁니다. 타인을 이용해서 내가 잘되겠다는 그런 쪽이죠.
그러면 내가 잘된다 하면, 여기 봅시다. 인식적 자아가 있고, 칸트의 의식적 자아. 인식적 자아는 과거가 만들어낸 자아, 이건 너무 일방적 자아인 동시에 자기만의 자아가 되겠지요. 왜냐하면 그 색깔이 과거가 만든 자아니까 과거에 자기가 경험했던 것에 의해서만 나오는 자아. 보편적 자아가 아니에요.
지금 의식되는 자아는, 도덕이 되려면 모든 사람이 공통감각, 공통적인 자아를 칸트가 지금 이야기합니다. 나만의 자아가 아니고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통하는 자아가 있고, 자기만의 과거의 경험으로 된 자아는 인식되는 자아라고 하는데 이 자아는 윤리고 도덕이 성립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저 남이 좋다 싶으면 빼먹는 거죠. 아까 이야기한 프로그램이 괜찮다는 이런 것.
목사들이 설교할 때는 십자가를 언급해야 되기 때문에 인간의 자아를 해체할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코끼리 모습도 아니고 코스모스로 온 게 아니잖아요. 인간의 모습으로 왔잖아요. 혼자 십자가 지고 혼자 자살했어요? 아니잖아요. 누구와 부딪쳤지요. 예수님의 자아가 인간들의 자아와 부딪쳤잖아요. 그래야 인간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십자가에 기준해서만 제대로 들춰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인이 십자가 듣기 싫다. 십자가 치우라고 하면 남는 건 어떤 자아가 남겠어요? 자기를 해체하고 해부하는 자아가 없겠지요. 그래서 의식되는 자아를 경험되지 않는 자아라고 했지요. 흄 같으면 경험되지 않는데 당신은 어떻게 아느냐? 딱 이거에요. 반성입니다. 반성적 자아에요. 반성함으로써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이걸 아무도 이야기해주는 사람 없어요. 타인적인 윤리나 타율적인 법은 이걸 하라 하죠. 대표적으로 십계명 같은 경우에요. 하라, 하지 말라. 그 법을 마중 나가기 위해서 인식된 자아로 구축을 해야 되지요. 그런데 인식된 자아는 과거가 만들어낸 자아지요.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여러분, 회개하세요. 하면 교인들이 회개한다고요. 회개하면서 뭘 생각하겠어요? 오년 전에 어떤 죄를 지었고, 칠년 전에 어떤 죄를 지었고. 자꾸 과거 이야기를 끄집어내겠지요. 과거의 경험 중에서 내가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회개할 필요 없으니까 놔두고, 못했다고 생각한 것만 뽑아내는 겁니다. 물론 잘했다는 것도 끄집어내야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착한 일 많이 했잖아요. 이런 것으로 자기 내부적으로 보정이 되기 때문에 위로를 받겠지만.
어쨌든 간에 인식된 자아는 과거가 만들어낸 자아란 말이죠. 과거의 자아기 때문에 하라, 하지 말라는 어떤 법에 따라 타율적으로 하는 겁니다. 그것은 자아가 하나밖에 없을 때는 그게 통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자아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제한된, 제약된 상황에서 나온 자아에 불과합니다. 칸트는 제약된 것을 극복해야 그게 도덕이라고 본 거예요. 이 말은 남이 본다고 해서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고 남이 본다는 것이 제약이잖아요. 지켜볼 거야. 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오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도덕이겠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켜보니까 똑바로 해. 이건 타율적이에요, 자율적이에요? 타율적이죠. 이웃이 되던 하나님이 되던.
그런데 내 스스로 해야만 한다는 것, 이 도덕을 의무라 해요. 인식이 되는 자아는 도덕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하기 때문에 도덕이 수단이 돼요. 이것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거예요. 의무로. 해야만 될 때 칸트는 최고의 쾌락, 행복이 거기서 주어지는 겁니다. 이런 행복이 주어지는 세계가 예지계, 현상계와 차이 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 하나님 나라에요. 칸트의 철학은 리츨로부터 계속해서 칸트적 기독교가 새롭게 등장하게 돼요. 시켜서 하지 말고 자율적으로 하세요. 그게 하나님 나라고, 그러면 놀라운 생각지도 못한 기쁨이 주어진다는 새로운 신학이 20세기 초반에 등장하는 겁니다.
이야기 계속 해봅시다. 좀더 자세히 나가보겠습니다. 아까 칸트 이야기하면서 자아를 왜 둘로 나눴느냐고 했는데 정말 좋은 질문이에요. 왜 한 개 자아가 둘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시대의 경향성이라고 하지요. 경향성이라는 말 들어봤지요. 경향이란 말은 뭡니까? 그 시대에 흐르고 있는 사상을 말하지요. 신문도 경향신문이 있잖아요. 칸트는 그 경향성에 휘둘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경향성을 극복할 수 있는 도덕이 돼야 된다. 경향성을 극복하려면 인식된 자아를 일단 인정해줘야 돼요. 이것은 나는 나의 이익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내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아기 때문에 진리란 것이 결국 그냥 진리가 아니고 나의 이익을 위한 진리로 추가했다는 것도 같이 인정해줘야 됩니다.
아까 툴링(?) 이야기했잖아요. 그 점을 좀 이야기해볼게요. 라이프니치라는 철학자는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질을 대립시켰잖아요. 물질은 애매하고 정신은 확실하다. 그런데 라이프니치는 신 앞에서 이게 과연 따로 이겠느냐? 물질을 쪼개고, 쪼개 보면 물질에서 정신으로 넘어가는, 물질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넘어가는 경계선(문턱)이 있을 거란 말이죠. 그걸 라이프니치는 단자라고 해요. 경계선에서 단자는 하나님이 창조했던 정보가 들어있어요. 정보, 뜻, 섭리가 들어있어요. 이것이 물질과 더불어 펼쳐지게 되면 살아가면 물질이 나오는데 물질 속에서 정신이 한 꺼풀, 두 꺼풀 접혀진 접힘이 펼쳐지면서 매듭이 풀리고 주름이 풀리면서 각자각자 화려하고 다채로운 다양성이 나오는 거죠. 그 다양성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온 곳곳에 찬양 받을 수 있다는 게 라이프니치의 생각입니다.
라이프니치의 생각에서 뭔가 찝찝하게 느끼는 것은 없을까요? 물질을 쪼개면 영으로 넘어간다는 그 대목이겠지요. 왜냐하면 물질은 눈에 보이는 건데 영은 안 보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넘어가는가? 아주 쪼개면 눈에 안 보이죠. 이것은 오늘날 20세기, 21세기 양자물리학을 앞당겨서 이야기한 셈이 되지요. 나노도 보여요. 그것보다 더 쪼개요.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점이 있어요. 그렇게 되면 자아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 안에 들어있는 자아가 펼쳐지는 건데 라이프니치에 의해서 이 자아는 내 자아가 아니고 신의 다양성 속에 일부로 자리 잡은 자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짜장면을 안 먹고 밥을 먹느냐? 이건 어디에 포함된 겁니까? 이미 신의 예정된 겁니다.
예정과 예정조화론의 차이점을 말씀드릴게요. 내가 오늘 짜장면 안 먹고 밥 먹는 것은 신의 예정된 건데 마침 중국집이 문 닫고 그 옆에 한식집이 보일 때 마침 그렇게 되죠. 그게 조화로운 거예요. 그래서 예정조화설이 된 겁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 거예요. 예정조화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것이 자아가 손댈 요소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아는 원인이 아니고 결과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인은 따로 있어요. 그런데 라이프니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어떻습니까? 뭔가 이상하게 빠진 느낌이 안 들어요?
어떤 것이 빠졌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어놓고 손놓으면 끝났지요. 우리 인간이 더 이상 할 게 없지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해봅시다. 내가 해변에서 날씨가 더워서 짜증나서 총 쏘았는데 죽었다. 그러면 그 사람 죽음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필요 있습니까? 없지요. 예정조화기 때문에. 걔는 태어날 때부터 내 총에 맞도록 돼있고, 그리고 내가 구입한 총알은 절대로 빗나가서는 안 되고, 나는 총 쏘게 돼있고. 누가 누구한테 책임을 묻습니까? 신이 하신 일인데 인간에게 책임을 묻지요?
그렇게 될 때 여기에 대해서 칸트는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인식되는 자아나 의식되는 자아가 아예 없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제 골치 아파요.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라이프니치 이야기대로라면 자아라는 인식이 생겨나지 말아야 했단 말이죠. 그런데 자아라는 그러한 매듭이 생겼다는 말은 자아에게 뭘 요구한다? “똑바로 살아.” 이걸 요구하는 거죠. 지금 연결이 되십니까? 우리 같으면 자아가 있으나 없으나 그만인 것 같은데 칸트 입장에서는 자아를 하나님이 만든 이유는 똑바로 살아. 만약에 똑바로 못 살면 너한테 벌을 내린다는 자아를 만들어주실 때는 자아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라이프니치는 그렇게 되면 이건 인식되는 자아가 된다. 라이프니치 말이 맞아요. 세상에 모든 게 우연은 없고 전부 다 필연이며 현상적으로 우연처럼 보인단 말이죠. 그 말이 맞아요. 당신을 만난 건 우연히 만났고 모든 우연인데 따지고 보면 필연이다. 다 맞는데 그렇다면 자아가 사라져야 되는데 자아가 생긴 이유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야 되지 않느냐? 왜 있어야 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 도덕 때문에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칸트는 목적의 왕국이라 하거든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의 나라.
다시 정리해봅시다. 인식이 되는 자아만 있어서 문제가 된다고 했어요. 인식이 되는 자아는 나를 목적으로 보지 않고 수단으로 보는 겁니다. 수단으로 보는 명령을 가언명령이라고 해요. 가언명령은 조건부 명령이라는 겁니다. 네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준다는 겁니다. 네가 예수 믿을 경우에만 구원을 얻으리라. 뭐뭐 하면 준다는 거예요. “네가 공부 잘하면 스마트폰 사줄게.” 이게 전부 다 그거에요.
“목사님, 우리가 예수 믿으면 하나님이 뭐 해줄 겁니까?” 전부 다 가언명령이에요. 그것은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보는 거예요. 정작 내가 챙기고 싶은 것을 챙기고 싶은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버릇이 어디서 나왔는가? 과거에서 해왔던 것이라는 겁니다.
과거에 내가 사업을 했다 실패했잖아요. 그러면 뭘 노리겠어요? 미래는 어떻게 하겠다? 빨리 원상복귀 시키겠다는 게 있지요. 원상복귀 시키겠다는 자아는 어디서 만들어진 겁니까? 과거에 이미 사업이 실패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거거든요. 열일곱, 열여덟 살 소녀들이 꿈속에서 예쁜 공주가 되어서 훌륭한 남자 만나서 결혼하겠다. 다들 그렇게 사춘기 소녀들이 생각해요. 그런데 대학입학부터 해서 취직, 군에 가서 성추행, 성폭행 당하고 이런 냉혹한 시대에서 나이 서른 넘었는데 지 좋아하는 남자 하나도 없고, 마음 달래기 위해서 배낭여행 다녀왔는데 나이 더 많아졌고 노처녀라고 놀리고.
이 현실에서 청소년 때는 나 같이 예쁘고 착한 소녀를 데려가는 남자는 땡 잡았어. 이렇게 생각했다가 막상 사회에 나가보니까 본의 아니고 본인을 수단으로 삼았어요, 목적으로 삼았어요? 과거에 내가 나 같이 공주, 나 같이 착한 것, 나 같이 예쁜 것을 데려가면 땡 잡았다는 과거의 계획과 프로젝트 때문에 사회에서 하는 모든 움직임이 컴퓨터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경찰에 합격하고 이 모든 게 과거에 형성된 자아의 내용을 채우는 식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착하기는 개뿔이 착해. 칸트는 말합니다. 그걸 착하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자꾸 속이느냐 말입니다. 안 착한데. 세상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남을 수단으로 삼는 게 무슨 착함입니까? 그럼 그 착하다는 것, 어질다는 것, 참는 것, 인내가 선이에요? 왜 참는데? 왜 착한데? 무엇 때문에 착한데? 과거의 꿈에 대한 보충하기 위해서 자기의 실패를 회복해서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한, 유지, 유지, 의식은 끊어지지 않는 것. 왜 그래야 되는지.
그래서 칸트는 이야기합니다. 과거가 만든 인식이 되는 자아, 자아라고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것, 그걸 충분히 인식하세요. 그리고 경험되지 않는 것 어디 있는가? 숨어있는 거예요. 인식되는 자아를 그래야 되겠나, 하고 회개케 하고 그걸 부정하고 반성하는 초월적 자아가 있다는 겁니다. 의식되는 자아는 반성이라는 상황 속에서만 피어나는 겁니다. 내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미쳤지, 미쳤지. 이게 사는 목적이 아닌데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데 기껏 이것 얻으려고 살았나? 이런 것이 초월적 자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칸트는 말합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행복하냐고 묻습니다. 돈, 명예, 권력 가지면 될까요? 돈, 명예, 권력 가져봤다 경험에서 나온 인식이기 때문에 자기가 성공했다는 경험 말고 만약에 실패했다는 경험이 왔을 때 이것이 다 깨져버릴 때는 과거에 잘 나갔던 것이 기억이 나서 자살해요. 내가 이 정도로 망할 놈은 아닌데.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 차라리 물에 풍덩 뛰어드는 게 낫겠다. 죽고 싶은 겁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살려고 했는데 갑자기 깡패와 싸워서 자빠져서 죽었다. [압구정 백야]에서 그런 게 있었어요. 그런데 색시가 너무 충격 받아서 말을 못해. 그 충격 받은 자아는 어떤 자아입니까? 과거가 만들어낸 인식된 자아죠. 충격 받은 거예요. 그리고 그 자아밖에 없다고 생각하죠. 왜? 그게 나니까. 자이가 뭡니까? 나잖아요. 자아가 둘이 아니잖아요. 나는 하나밖에 없잖아요. 그 자아란 말이죠. 이건 내가 옛날에 그 남자와 행복했던 경험이 누적된 자아에요. “그때 너무 좋았어.” 사진 보면서 그렇게 좋았는데.
그러니까 흄은 이야기했잖아요. 자아는 허구라고. 흄의 말이 맞는 거예요. 인간의 자아는 너무 독자적이고 자폐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사람 사는 게 그렇지. 칸트는 말합니다. 그게 맞는데 그것이 어떤 바탕 위에서 조립되느냐? 우리가 반성을 통해서 다른 자아가 있음을 알게 하는 계기가 된다고 보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진짜 쉽게 이야기한 거예요. 이것보다 쉬울 수 없어요.
충분히 실패하세요. 그리고 당하시고 깨지세요. 하지만 신은 인간을 그렇게 허무하게 만들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깨짐으로써 비로소 아는 다른 준비된 자아를 주께서 드러내는 방법이 인식된 자아의 한계를 느끼는 겁니다. 그것이 칸트 이후에 주체라고 합니다. 주체는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한계다.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입니다. 칸트와 똑같은 이야기에요.
주체는 세상 안에 있는 게 아니고 세상이란 경계선상에 있는 게 주체에요. 주체 안으로 들어가면 이건 세상과 분리됩니다. 그 안에 세상이 없어요. 그거는 세상에서 경험되지 못하고 세상에서 조립하지 못한 다른 게 있어요. 그걸 주체self라고 해요. 그러면 세상에 있는 것은 에고ego라 합니다. 이건 자아. 이걸 제가 맨해튼 첫 강의에서 했어요.
지금 제가 칸트 강의를 하면서 이것이 과연 성경적이냐는 것은 나중에 정리해야 돼요. 칸트 이야기만 계속 해봅시다.
그렇다면 칸트가 여기서 더 나갑니다. 놀라운 이야기를 해요. 반성을 할 때 반성하게 한 계기가 인식이라 했지요. 그러면 사람이 깨질 때 누굴 수단으로 삼는다? 남을 자기 잘 되기 위해서 수단으로 삼는 거지요. 특히 교회에서 하나님, 성령을 자기 잘 되라고 인식된 자아 잘 되기 위해서 교회 왔는데 여긴 프로그램 없으니까 프로그램 좋은데 가겠다는 이 말이에요. 자기 자신을 수단, 자기 이익, 그 이익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과거에 자기가 기대했던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 하나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기거다 집어넣는 자아를 사는 거예요. 그런데 남이 등장해요. 자기 빼놓고 다 남이에요. 성령, 요정, 귀신도 마찬가지고. 자기 빼놓다 다 타인이에요.
그런데 칸트는 말합니다. 타인이 왜 있느냐? 반성시키기 위해서 있다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율법을 요약하면,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그걸 지금 칸트가 언급하는 거예요. 타인이 있다는 것은 나를 지적질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내가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그럼 어떻게 반성되느냐? 저 사람과 나와 어떤 점에서 동일한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지금 동일하다는 말이 인식된 자아, 현상적 자아, 경험이 만들어낸 과거가 만들어낸 자아끼리 모이면 공통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동창회 한두 번 가면 실망하는 이유가 거기 있지요. 정수기 팔러 오고, 보험 넣으라 하고, 돈 빌려 달라 하고 짜증나서 못 가요. 잘 되면 자랑질한다고 보내고 심지어 차 자랑하고. 특히 신학교 동창생 만나면 교인 몇 명이고, 어느 교회 다니느냐 묻고.
전부 다 인식된 자아에서는 서로 공통점이 없어요. 자기 과거가 구축된 자아기 때문에 안 돼요. 그런데 만약에 반성하면 어떻게 되느냐? 여기서 초월적 자아로 반성하게 되면 뭐가 공통점이 되겠습니까? 난 이래서 깨졌다. 난 이래서 깨졌다. 그러면 깨졌다가 동일하겠지요. 반성함이 동일하겠지요.
그렇다면 내 안에 그동안 저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했는데 타인을 목적으로 하면 어떻겠느냐? 내가 미처 몰랐던 내가 경험하지 않았던 다른 요소를 끄집어내는 계기로써 타인과의 만남이 주선되었다면 나는 그것을 통해서 내가 남한테 누가 지시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그런 반성을 유발한 것이 나의 자율적으로 반성한다면 자율적 반성에서 나와서 자율적 반성으로 끝나지 말고 거기서 정신 차렸으니까 전에는 수단으로 이웃을 사랑하던 그것이 이제는 반성하는 입장에서 자율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목적의 나라, 예지계란 말입니다.
예지계. 현상계와 대비되는 세상에서 경험되지 않는 것, 예지계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천국 보내기 위해서 우리 안에 반성하는 계기를 줬을 것이고 그걸 통해서 이미 경험해서 모아진 게 아니고 우리가 경험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진짜 준비된 자아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지요. 그러면 이 자아에서는 타율이 아니고 자율적이라 합니다.
자율적 명령을 정언명령. 나는 할 수밖에 없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나는 해야만 하기에 한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고 할 때 살인을 하게 될 때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지, 손해가 되는지 따지지 말고 무조건 살인하지 않아야 되기 때문에 살인하지 않는다. 거짓말하지 않아야 하기에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될 때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행복과 정신적인 쾌락이 주어진다. 그렇게 보는 거죠. 칸트 입장에서. 도저히 예상도 못한 즐거움입니다. 기쁨이 있고. 칸트의 실천윤리, 도덕.
다시 정리하게 되면, 공동체라 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통해서 못난 것을 발견하고 마음을 낮추면서 그 다음에 마음을 낮추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회개만 하면 안 되고 십자가에 머물지 말고 더 나가야 돼요. 부활의 새 생명으로 나가야 돼요. 뭐냐? 이제는 정신 차렸으니까 이제는 시켜서가 아니라 내 자율성에 의해서 바르게 모든 내 속에 있는 법을 펼치게 되면 그게 목적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묻지요. 그러면 당신 속에 있는 법은 어떤 법을 이야기합니까? 그 법이 계명으로 나오면 안 돼요. 계명은 있는 자체가 타율적인 것을 요구하게 때문에 안 돼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나오다보면 그것이 기존의 문자적인 법과 일치됨을 확인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바로 살인하지 말라는 그 뜻이구나. 이것이 바로 거짓말하지 말라는 그거구나. 전에는 이걸 해서 내 수단을 사용해서 내가 생각하는 과거의 미흡한 것을 채우는 목적을 가지면 나는 기쁘겠다는 그 기쁨과 족히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기쁨. 그냥 무심코 나는 할 도리를 했을 뿐인데 그 자체가 주는 기쁨은 신이 천국에서나 맛볼 기쁨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구제하는 것, 몰래하는 봉사, 이런 것 여러분 많이 해봤지요. 해보니까 슬퍼요, 기뻐요? 이것은 세상에 마약을 먹어도 그렇게 기쁠 수 없을 거예요. 내가 어찌 그렇게, 대가 없이 줄 수 있다니 하늘을 날 것 같아. 이런 마약에 빠진 사람이 누구냐? 비행기에서 담배 피웠던 가수 김장훈, 몇 억씩 희사하는 션, 김혜자, 그 사람들은 봉사하고 구제하는 마약은 마약보다 더 심해요.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기쁨을 지울 길이 없어요. 어떤 것도 그 기쁨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주는데서 오는 기쁨 있잖아요. 뭘, 줘봐야 알지.
그렇게 고생해도 고생한 목적이 뭐냐? 내가 고생해서 그냥 주는 기쁨, 내가 줄 때 고생의 아픔이 줌으로써 다 보상이 돼요. 이게 칸트가 말한 선, 최고의 선, 진리라는 게 이거라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적으로 맞는지를 생각해봅시다. 칸트의 이런 철학에 대해서 시비 건 사람이 있어요. 지젝이에요. 지젝이 시비 걸기를 사드란 사람이 있어요. 사드는 남을 성적으로 학대함으로 말미암아 학대한 본인이 기쁨을 얻는 사람이 있어요. 그 기쁨과 봉사해서 얻는 기쁨이 똑같다는 거예요. 칸트의 말대로 하면 사드, 변태지요. 그 변태가 가장 칸트의 윤리에 합당한 사람이란 거예요. 최악의 저질이 순수한 칸트의 윤리의 최고봉이라는 겁니다. 본인이 멈출 수가 없어. 성적으로 학대하는 재미가 보통 재미가 아니기 때문에. 그걸 타율적으로 할까요, 자율적으로 할까요? 자율적으로 한다고요. 자율적으로 한 자체에서 기쁨을 얻는 겁니다.
그래서 칸트의 윤리를 한 마디로 말하면 뭐냐 하면, 자율적 활동성이 선이고 진리가 되는 거예요. 눈치 안 보고 하는 모든 것은 진리가 되고 선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니고데모가 예수님 찾아온 것도 하여튼 자기가 알아서 왔잖아요. 그리고 부자 청년이 자기가 알아서 왔지요. 그게 선입니까? 자기 딴엔 모든 걸 포기하고 온 거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걸 영생 줍니까? 아니지요.
칸트의 철학은 이미 철학이에요. 성경의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 없이 인간 내부에서 찾고자 해서는 특히 미개인들 계몽하는 나중에 계몽사상이 서구 열강들에 의해서 칸트 철학이 많이 들어가요. 우리가 착한 일하고 있다는 겁니다. 노예를 팔아먹고 하는 모든 것도 하나님이 시키신 착한 일 중에 하나가 되는 겁니다. 왜? 그들의 어둠 속에 빛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빛이 뭐예요? 빛이란 여러분이 짐승이 아니고 참된 인간으로 스스로 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그 착한 일을 전파하는 이것이 성도가 해야 될 먼저 복음을 알게 된 우리가 해야 될 일이라는 입장에서 칸트의 철학은 세상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고 칸트의 철학이 지금의 복지 사회를 건설하는 철학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거예요.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그러면 칸트철학에 대해서 우선 문제점보다도 현재 교회와의 유사점을 보세요. 현재 교회가 하는 아이디어가 칸트철학과 닮아도 너무 닮았지요. 십자가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그 다음에 성령 받아서 성령의 열매 맺으면 구원받는다. 그게 목적일까요? 아니면 그것이 수단일까요? 거기서 과연 자기가 자복하면 자아가 부인되는 겁니까? 이게 문제에요. 자기가 잘못했다고 반성하게 되면 반성하는 자아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거든요.
이 사실을 불교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불교에서는 자아를 없애려고 엄청 애를 써요. 아마 불교의 모든 노력이 자아를 없애는데 있어요. 왜냐하면 자아가 있는 이상은 해결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7의식을 이야기합니다. 5식 다음에 6식, 7식까지 가요. 6식, 7식은 자아를 없애는 것이 등장합니다. 의식은 경험과 관계없기 때문에 도 닦아야 돼요. 참선의 높은 경지에 올라가야 6식, 7식에 이릅니다. 단계설이이죠. 6식, 7식에 이르면 아까 칸트가 이야기한 뭐가 생깁니까? 계급이 생기지요. 너, 몇 식인데? 아이고, 4식이야. 난 5식이다. 난 7식이다. 또 계급이 생겼지요. 결국 자아가 자아를 간수하고 관리하고 보관을 해야 돼요.
칸트의 철학에서 제일 딜레마가 이겁니다. 자아를 관리하기 위해서 자아가 또 애써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칸트는 말하기를 그런 자아를 주신 이유가 바로 네 일을 네가 스스로 책임지라고 해서 신이 자아를 줬다는 거죠. 이 이야기 들으니까 신학체계에서 펠라기우스 이론이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거죠. 자유의지를 줬다는 말은 심판 받을 때 이유 있어서 심판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서가 태어나기 전부터 미운 게 아니고 에서는 태어나서 나쁜 짓할 경우에만 에서는 하나님께 미움 받고 지옥 가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에 합당하다는 거예요. 펠라기우기적이죠. 칸트적이고.
그리고 칸트철학을 신학에 적용시키면 좋은 점이 뭐냐 하면, 사람한테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겁니다. “똑바로 해. 바르게 하란 말이야.” 그러면 자아가 자율적으로 해도 자아가 있는 이상은 결과적으로 자율이 아니고 타율로 바뀌지요. 그래서 김장훈이나 이런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나는 하고 싶어서 한다.
김장훈 씨가 하고 싶어서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도와줬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고 내가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나옵니다. 그게 하늘나라입니까? 하늘나라가 그런 거예요? 성경적으로 복음적으로 하늘나라가 그런 나라입니까? 칸트가 뭐가 문제지요, 뭐가 빠졌지요? 중보자가 빠졌지요. 하늘나라는 무슨 나라입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목적의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면 다시 우리가 복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여러분 다 아시지만 복음과 관련돼야 돼요. 복음은 이렇습니다. 구원해주지 않는다. 구원받는 것을 거부하는 게 복음이잖아요. 모든 인간이 구원받는 걸 거부하는 게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나름대로 지혜와 똑똑함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천국에 가려고 시도한단 말이죠. 그런데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천국은 길이 막혀있지요. 그 말은 뭐냐? 십자가가 막혀 있잖아요. 십자가는 성령 받지 아니하면 아무도 모르게 돼있어요. 이게 뭔 뜻입니까? 올 수 없다, 에요. 다른 말로 하면 네가 달음박질해도 올 수 없고 부르짖어도 네가 원한다고 해도 구원시켜주지 않는다는 게 복음입니다. 이 말은 너희들끼리 작당해서 모든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봐라. 그게 신학이고 철학의 세계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너무 심한 용서를 한 거예요. 죄를 그냥 용서한 게 아니고 내가 생각도 못했는데 용서가 더 많아. 용서의 분량이 너무 많아요. 너무 넘쳐나요. 이렇게까지 안 나가셔도 되는데 칸트 말대로 바르게 살아라, 도덕적으로 살라고 해도 될 텐데 십자가에 왜 죽느냐, 피를 왜 흘려요? 너무 오버액션 아니에요?
하나님 하신 말씀이, 너 좋으라고 구원한 게 아니야. 이거거든요. 너 즐거우라고 네 쾌락 얻으라고 구원한 게 아니고 이건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주님의 일에 대해서 우리가 침투할 수 없어요. 그 속에 뛰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놀고요 주님은 자기 일을 밀어붙일 뿐입니다. 그게 철학의 한계고 신학의 한계입니다. 요샌 신학도 철학 됐으니까. 신학, 철학, 삼위일체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인간이 알 수 있는 진리체계인데 진리체계로 해봐야 이것이 나중에 경험돼야 될 거거든요. 흄이나 데카르트 여기에 다 같아지는 겁니다.
뭘 알면 구원받습니까? 시작부터가 뭘 하면 구원받습니까, 하는 모든 신학은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목적이라고 해봐야 그 코너 끝납니다. 목적은 따로 갖고 있어요. 누가 갖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갖고 있어요. 예수님이 자기 목적을 자기가 스스로 이뤄나가는 것, 그 결과물로 생겨난 것이 구원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걸려든 사람들은, 이건 내 계획에 없던 건데요. 내가 십자가 피로 용서받는다는 것은 내 인생에 이런 계획이 없던 건데 왜 이게 침투했지요.
불트만은 그걸 사건의 침투라고 본 겁니다. 사건의 침투가 되면 과거-현재-미래가 찢어져버리죠. 시간 자체가 찢어지면 이건 내 시간이 아니고 그 자체가 부활의 사건이 나은 부활의 사건이라고 본 겁니다. 그래서 불트만이 생각한 묵시적 시간관이에요. 그래서 불트만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뭘 믿으면 됩니까? 이렇게 나오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뭘 믿으면 되느냐는 이것이 법이 돼버리죠. 예수 십자가 믿고 그 다음에 부활을 믿고. 이렇게 되면 하나에 역사상 이야기가 돼버려요. 역사적 사건이 아니고 놀라운 사건이 아니고 그냥 챙기면 되는, 이순신 장군은 1592년, 이렇게 외우면 되고 챙기면 되는 것, 정보니까. 그래서는 구원이 안 된다. 놀라운 사건, 그걸 부활의 사건인데 부활 사건 내에는 십자가 사건이 들어있는 십자가 사건이 곧 부활 사건이에요. 부활을 증거하는 게 부활 사건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이에요.
물론 불트만의 문제는 그것 하기 위해서 역사를 부정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 사람 신학의 한계에요. 역사를 부정해야만 자기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뭔가 신학이 조합이 잘못됐어요. 인간은 역사를 줄줄 흘리고 다닙니다. 역사를 만들어내요. 주께서 역사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주께서 만든 역사를 우리가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을 필요도 없고 부정할 필요도 없어요. 모든 역사는 주께서 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되거든요.
마지막으로 칸트가 당신 같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자아 필요 없겠네. 필요하죠. 주님의 자아에 의해서 내 자아라 마귀가 만든 자이인 것을 회개하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하죠. 마귀가 피조물이죠. 우리도 피조물이죠. 피조물이 왜 있습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 말씀처럼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되게 하기 위해서 피조물이 필요한 거예요. 자아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지금 칸트는 그리스도를 빼버린 겁니다. 여기 교재에 나온 칸트 이야기에서 그리스도는 뭐냐? 모범인 거예요. 바르게살기 모범, 도덕적으로 살기 모범인 것이지 결코 구원받지 마, 그런 주님이 아니에요. 아무도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다. 그걸 줄이면 아무도 올 수 없다. 이게 복음이란 말이죠. 아무도 못 온다는 거예요. 네가 아는 신, 네가 아는 예수는 네 자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초월적 자아라고 할지라도 그건 전부 다 인간에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올 수 없는 거예요. 주께서 아버지께서 보내게 할 때 우리는 주님을 발견하게 되고 그 주님을 발견하게 되면, “제가 뭔데 피까지 흘려주십니까?” 피 복음에 대한 고마움, 그게 자체가 십자가 사건화 되는 겁니다.
우리가 칸트를 공부하면서 처음에 시작할 때는 칸트가 성경적이라고 봤지요. 하지만 가장 도덕적인 것이 가장 마귀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쨌든 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치를 포기할 줄 모르는 그 죄인 됨을 이제는 도덕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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