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10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0-칸트
20150210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0-칸트
이름 : 한윤범(IP:14.39.134.30)
20150210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0-칸트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칸트, 1724~1804 산 사람인데 이 사람보다 백이십 년 전에 유명한 사람이 있지요. 데카르트란 사람이 있습니다. 데카르트에서 칸트로 넘어오는 주장들의 변천사항을 먼저 언급해드리겠습니다. 데카르트는 1596~1650, 칸트는 1724~1804, 한 백이십 년 정도 차이인데 데카르트와 칸트가 본격적인 철학으로 들어가요.
신학과 철학이 갈라지는데 왜 갈라져야 되느냐는 거죠. 철학하는 것도 진리, 그리고 신학하는 것도 그건 당연히 진리. 예수님이 진리니까. 둘 다 진리를 한다면 진리를 알면 마음이 하나가 돼야 되잖아요. 뭔가 “내 식이 진리야.” “아니야. 내 식이 진리야.” 진리가 둘로 파트 나눠졌다는 것은 오늘날 21세기 살고 있는 시대상을 그대로 잘 반영해주고 있어요.
진리를 나눠졌다는 말은 진리를 구축하는 출발점이 안 같다는 거죠. 신학하는 사람은 어쨌든 간에 성경을 진리로 보는 거예요. 사실은 성경을 진리로 본다기보다도 교회가 가르치는 성경, 또는 교회 전통을 진리로 보는 거예요. 하여튼 교회 쪽이에요. 성경, 교회 쪽에서 출발해야 된다.
그런데 데카르트부터는 뭐냐? 과연 그럴까? 진리라는 것이 성경, 교회에서 꼭 출발해야 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 또는 성경에서 진리하지 않는다면 진리는 어디서 출발하느냐 했을 때 데카르트 시대에 이미 갈라진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옛날 기독교 들어오기 전에 로마, 그리스에 있던 철학이 있었습니다. 그 철학은 여기 있다는 것, 뭔가 있다는 거예요. 진리란 뭐냐? 여기 있잖아. 옥수수수염차가 여기 있잖아. 옥수수수염차가 뭐지? 있잖아. 봐. 끝났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이 뭐냐? 나, 여기 있잖아.
그러면 신은? 내가 여기 있게 하신 분이 신이지. 그러니까 꼭 신을 찾을 필요 없지. 내가 여기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뭔가 자기 증거물을 남겼으니까 수사관이 증거물 찾아서 범인 색출하듯이 내가 여기 있잖아.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진리니까 신이 있다는 것은 있음으로 출발해서 거기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구태여 교회나 성경 이해할 필요 없이 내가 여기 있음으로 새롭게 진리를 생각해보자고 된 겁니다.
처음에는 신학과 철학이란 게 없었기 때문에 신학의 한 분파가 되겠지요. 신학 중에서 일반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학자들이 기여하는 그런 논리가 나오다가 이제는 일반사람들이 교회나 성경에 너무 얽매이니까 이제는 그것 없이도 우리가 있다는 것, 그 당시에 그리스, 로마의 철학이 들어왔으니까. 기독교 이전에 들어왔던 인간들의 생각이 일리가 있다는 거죠.
그 있음에서 기능이 나오고, 기능이 나옴으로써 교회와 성경 기능을 대체하는 하나님이 존재케 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도 하나님의 일이다. 이게 바로 진리에 출발점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지난 시간에 했기 때문에 답변할 필요 없는데, 진리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진리죠.
그래서 데카르트 같은 경우에는 있음을 둘로 나눠요. 세상이 있다고 본 겁니다. 이게 진리냐? 데카르트 경우는 ‘세상이 있다’와 ‘내가 있다’로 분리시켜놨어요. 이게 쪼개져야 된다는 거죠. 왜냐하면 이 세상에 대해서 내가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세상에 대해서 이해하고 이용하는 입장에서 세상에 있다는 자체에서 진리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 진리가 질서에요.
질서를 끄집어내는 방법이 바로 수학입니다. 수학이 질서로 돼있지요. 수학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명백하단 말이죠. 데카르트가 머리가 좋아서 따지는 거예요. 수학이 왜 명백하지? 삼각형 같으면 직각삼각형은 직각이다. 이건 너무나 명확하다. 누가 봐도 명확하단 말이죠. 그런데 이게 왜 명확해야 되느냐 말이죠. 이것이 진리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어째서 진리가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신이 우리에게 세상 진리를 알도록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보는 겁니다. 굉장히 믿음이 좋지요. 하나님이 먼저 계시고 그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 원인이 된다는 겁니다. 굉장히 믿음이 좋잖아요.
믿음이 좋아 보이는데 사실은 뭐냐 하면, 수학을 내가 확실하다고 생각할 때,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만약에 아이큐 낮은 사람은 수학시험 치면 별로 성적 안 나오잖아요. 영어, 수학, 공부 못하는 얘들 있지요. 그런 사람들은 왜 확실하지 않지요?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구나. 능력이 다르다는 말은, 예를 들어서 시골에서 1등하니까 걔는 시골학교에서 제일 진리를 많이 알잖아요. 그래서 자기는 다른 얘들보다 진리를 많이 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시골 얘가 서울에 유학 와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끼리 모이면 성적이 나옵니까? 성적 안 나오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상대적으로 안다는 이것은 뭔가 미흡해요. 확실한 진리가 아니에요. 그래서 데카르트는 세상에서 질서 뽑아내는 건 명확하지만 내가 인생을 다 살아본 것도 아니고, 내가 이 세상 모든 곳을 여행한 것도 아니고, 내가 시골에 있다면 시골의 그것밖에 모르죠. 시골에서 민들레는 어떻게 자라고 냉이는 언제 나오는지 그건 잘 아는데 서울의 얘들처럼 컴퓨터게임은 모르잖아요. 이건 서울의 얘들도 마찬가지에요. 서울 얘들은 컴퓨터게임은 잘 아는데 냉이는 어디서 나오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잖아요.
그러면 진리를 모른다는 말은, 내가 진리대로 못 살았다는 게 되고, 진리대로 못 살게 되면 그 책임은 본인이 감당해야 돼요. 그래서 인생을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게 뭐냐 하면, 확실한 걸 잡는 게 제일 중요하겠지요. 확실한 걸 잡으면 목숨 걸어도 괜찮아요. 그 확실한 것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데카르트가.
끄집어내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세상과 나를 대조를 시켜버려요. 비교시킨다고. 비교시키면 세상은 모호하지만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신을 생각하는 생각한다는 이것은 내가 생각하니까 아무리 세상은 신이 아니고 마귀라고 해도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생각한다는 것, 생각하니까 그 다음에 내가 여기 있는 거예요.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해볼게요.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나는 진리 같은 것에 관심 없습니다. 카뮈의 부조리 사상에 그런 게 나오는데 카뮈가 그것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지요. 도대체 진리가 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뭐가 진리인지 뭐가 참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어머니 죽은 것이 자기가 죽은 것은 아니잖아요. 가만있으니까 주위 사람들이 왜 엄마가 죽었는데 안 우느냐고 욕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카뮈의 <이방인>에 보면, “엄마가 죽었는데 내가 왜 꼭 울어야 되지?”
도대체 세상은 진리가 뭐냔 말이죠. 누가 가르쳤어요? 엄마 죽었으니까 울어야 된다고 누가 가르쳤는데? 가르친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진리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따라한 거예요. 이 세상에 대해서. 자기가 세운 기준이 아니고 남이 세운 기준에 무조건 따라 간 거죠. 엄마 죽었다. 그래서? 내가 울어야 되는데.
카뮈의 <이방인>에서 나중에 뫼르쇠란 주인공이 죽게 돼요. 사형 당한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한테 권총이 있고 해변에 있는데 날씨가 더워요. 날씨 더우니까 짜증 날 것 아닙니까. 풀어야 된다고 권총을 발사했는데 아라비아 사람이 맞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체포됐어요. 여기서 카뮈가 이야기하는 게 짜증나서 총 쏴서 죽었는데 내가 왜 갇혀야 되느냐? 누가 좀 설명 해달라는 거예요. 아무도 설명 못하지요. 판사가 말하기를 그게 법이라는 거예요. 법을 누가 만들었는데? 카뮈를 실존주의라고 합니다. 법을 내가 따라야 될 이유를 대봐라.
마지막 날 사형 집행되던 날 창가에 별이 하나 떠오릅니다. 바로 진리란 뭐냐? 진리란 그냥 있음이에요. 별이 있듯이 있는 거예요. 따라서 있음이 먼저지 내가 먼저가 아니거든요.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또 하나 있음의 일부가 나란 말이죠. 별이 있다가 지게 되지요. 없어지지요. 그럼 내가 이 땅에 살다가 없어지잖아요. 이게 바로 진리 아닙니까? 그게 진리잖아요.
그동안 사람들은 진리를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내가 우선 있고 내가 알아야 될 진리인데 진리에 내 존재가 포함되게 되면 만사가 해결될 걸 아무 문제가 없는 걸 가지고 진리대로 살아야 된다고 하다보니까 정작 자기가 안고 있는 진리를 제대로 대우를 못 해준 거죠.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있음을 티내는 게 나란 말이죠. 그래서 이걸 제가 쉽게 한다고 있음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실존이라고 하는 겁니다. 실존이란 지금 현재 있는 상태, 그게 즉자존재인데 그건 끝나고 그 다음에 곁따라 붙는 것들은 다 떼어내도 상관없는 거란 말이죠.
강의 다시 해봅시다.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진리가 뭐냐? 뭐가 진리냐? 그런데 교회에선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면, 하나님이 진리고, 예수님이 진리고, 성경이 진리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데카르트부터 근대에 들어와서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교회 네가, 또는 신부 네가 너도 진리 맞느냐고 물어본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서 뭐라고 말하겠어요? 그 당시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게 했으니까 전리를 전했으니까 우리는 진리 맞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철학자들이 너희들이 진리 같으면 나도 진리다. 너희들에 의하면 신이 우리를 만들었으니까 신이 만들어서 있는 우리도 진리다. 그런데 왜 너희들만 진리여야 되고, 왜 내가 너희들 말을 들어야 되고 너희들 시키는 대로 따라야 되는데 진리는 우리 안에 있는데 우리가 따로 진리를 캐내면 되잖아. 이게 철학의 시작이에요. 철학이 본격적으로 갈라지는 겁니다. 구태여 그들 말을 들을 필요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하다보니까 좀더 나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데카르트 본인이 똑똑한 사람 말 들으라고 하겠지요. 그러면 데카르트가 갑질하겠지요. 나, 공부 많이 했다. 나한테 배워. 그렇게 하지 말고 배웠던 못 배웠던 간에 모든 인간이 알 수 있는 진리가 있을까? 그러면 진리의 논쟁은 끝이야. 드디어 모든 깨끗하게 해서 끝난 거잖아요.
그게 뭐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당신이 생각하나? 당신이 생각한다는 자체가 당신이 있다는 거고 그 있음 자체가 진리의 출발점이다. 이미 진리를 먹고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철학에서 말하는 진리란 말이죠. 철학이 해야 할 본분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성경 버려라. 본인이 생각한다면 그게 진리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그렇게 이야기하면 뭔가 찝찝해. 뭐가 찝찝하냐 하면, 내가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존재한다. 내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렇게 알게 된 원인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쓸데없는 것까지 고민을 다하죠. 바닥을 다 파는 거예요. 찝찝한 것 남겨두면 안 돼. 그러면 온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그걸 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진리를 가르쳤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냐? 인간으로서 자기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밖에 없으니까 이게 보편적 진리라고 생각한 거예요. 데카르트를 정리하게 되면, 세상은 모호하다. 확실한 것은, 나라는 정신이다. 정신세계다.
그런데 그 뒤에 흄이란 사람이 데카르트를 공격합니다. 내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게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오산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나라는 없다는 거예요. 나는 없고 울고불고 뜨겁고 차갑다고 느끼는 감정, 다시 말해서 경험된 감정일 뿐이지 뜨겁다. 누가 뜨겁지? 내가. 뜨거운 게 먼저고 뜨겁다고 느끼는 본인이 자기가 되는 거예요. 내가 우선이 아니고.
흄은 말하기를 나는 허구다. 왜 허구냐 하면, 감정들, 뜨거움이 식으면 따뜻하잖아요. 따뜻함과 따뜻함이 25분, 그 다음이 끄니까 약간 춥다. 추운 게 7분. 따뜻함과 추움의 끊어진 감정들, 단편적인 경험들을 대충 이어서 나라고 하는 거예요. 나라는 게 왜 허구냐 하면, 끊어지고 단편적이고 이어지기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감정들의 다발, 꽃다발이라고 보시면 돼요. 흄은 그렇게 보는 겁니다. 흄은 말하기를 세상이 있고 인간이 생각하는 정신이란 사실은 정신은 없고 감각일 뿐이고 세상이 주는 감각을 경험해서 생겨난 인상, 그 인상으로 좀 더 오래 끌어볼까 하는 것이 바로 개념 또는 관념으로 본 겁니다.
데카르트는 뭐라고 합니까? 데카르트는 확실한 걸 찾기 위해서 세상은 확실하지 않다고 했지요. 왜냐하면 인간이 경험한 게 좁기 때문에. 이런 겁니다. 구두수선공이 있다. 구두수선공이 앉아서 거리를 볼 때 뭘 보겠어요? 여행하면 이 동네에서 구두가 몇 개 있는가? 사람들을 볼 때 구두 뒤축 다는 걸 보겠지요. 이게 얼마나 제한적이에요. 마치 교회 예배당 볼 때 몇 명 모이는지 그것 보듯이. 그러니까 제한적이죠.
두세 사람 모여서 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핵심 포인트가 달라요. 다 상대방을 끌어당기려고 애쓰는 그런 수단의 모임이라니까요. 카페베네에 모여서 뭘 먹어도 전부 다 내용들이 다르다니까요. 나이 육십 넘은 사람이 정치 이야기하면 그만해라. 듣기 싫다 하고 자기 손자 이야기하고. 아가씨들 모이면 배낭여행 간 이야기하고, 그 아가씨들이 3년 후에는 얘 키우는 이야기하고, 남편 늦게 들어온다고 불만 이야기하고.
이게 얼마나 일방적입니까? 보편적 진리가 아니죠. 이건 나만의 진리죠. 나만의 진리란 말은,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고 데카르트는 정신이라 했는데 정신이 아니고 그 사람이 태어난 시골이면 시골, 도시라면 도시, 그 사람이 살던 누적된 감각이라니까요. 감각에서 인상이 생기고.
19세기에 인상주의가 있어요. 분명하게 선을 하지 않고 빛을 표현하기 위해서 덧칠을 해서 명확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인상주의의 그림은 그전에는 보통 서너 달 걸리던 것이 인상주의는 빛이 반짝이는 것을 뽑아내기 위해서 그림을 빨리 그려요. 그래서 노동시간이 짧으니까 그 당시 평론가들은 가치 없는 걸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인상주의는 후딱 해치워야 돼요. 안 그러면 빛을 놓치니까. 모호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게 우리가 패턴이라 하는데 멀리서 보면 그림이지만 사진을 가까이 보면 굵기에 차이 나는 점박이에 불과하고 멀리서 보면 패턴이 나오지요. 멀리서 볼 때 나오는 그 패턴은 쪼개보면 전부 하나에 붓질에 불과한 거예요. 이게 흄이에요. 흄은 인간이 살다가 인상들을 회상하니까 내가 멋있게 보이고 10대에 잘 나가고, 20대도 잘 나가고, 30대는 고생하고, 40대는 더 고생하고, 지금 50대는 ~~ 하는 것 같지만 하루하루 쪼개서 보면 뭐, 없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쪼개서 보면 오늘 비 왔다, 눈 왔다. 그리고 그것도 과거잖아요. 어디 남아있습니까? 남아있지 않잖아요.
성경이야 사람이 태어나서 죽은 것은 정해졌고 마지막 심판이 있다고 돼있지만 이미 철학에 들어서면 그런 법에 메일 필요 없다고 하잖아요. 내가 찾아내는데 데카르트는 세상이란 모호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원인이 되어서 사고에 능력을 주게 되면 그게 진리다. 그런데 흄은 그것마저 진리가 아니고 나라는 것은 없어. 그냥 느낌의 다발이다. 다 조각조각난다. 그래서 흄은 인간은 신체밖에 없어요. 인간이 죽으면 그동안 있던 감각들, 인상들 다 날아가죠.
국 끊어놓고 나중에 저녁 되면 다 식잖아요. 인간의 신체 그동안 화려했던 것, 아름다웠던 것, 좋아했던 것, 웃음소리, 울음소리, 인간의 신체가 죽는 순간 내 속에 누적돼있는 웃음소리, 울음소리, 그리고 좋았던 것, 기뻤던 것, 사랑했던 것, 미워했던 것, 질투했던 것, 남 폭행한 것, 얻어맞은 것, 이것도 죽는 순간 홀라당 수증기처럼 공중으로 흩어져버려요. 흄은 이게 진리라는 거예요. 하여튼 이 사람 말 들으면 이 사람이 맞는 것 같고, 저 사람 말 들으면 저 사람이 맞는 것 같고.
그 다음에 등장하는 사람이 오늘 하려고 하는 칸트입니다. 칸트는 데카르트도 잘못됐다고 하고 흄도 잘못됐다고 이야기합니다. 흄은 어떤 점에서 잘못됐느냐 하면, 인간을 자아를 경험으로 생각하는데 자아는 경험이 아니고 경험 이전의 문제라 하는 거예요. 이걸 선험이라 하는 겁니다. 아까 흄은 감각의 인상이라고 했지요. 칸트는 인상이 아니고 현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현상은 절대로 본질이 아니에요.
현상이라 하는 것은 다른 게 따로 있는 거예요. 데카르트도 칸트가 보기에 문제가 있는데 내가 생각한다고 인식하는 것, 인식하는 걸 아무리 해도 인식하는 것은 다 단편적이 되는 겁니다. 이건 흄이 말이 맞아요. 모든 것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을 조립한 것이다. 그런데 흄은 인식만 알았지 의식을 몰랐던 거예요. 의식이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겁니다. 오년 전의 나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흄에 의하면 분명히 달라요. 다르지만 그걸 하나로 이어지게 하는 게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의식이라는 겁니다. 의식은 모든 것을 동일하게 만드는 것, 끊어지게 만드는 게 아니고 동일하게 만드는 게 있다.
동일하게 만드는 게 뭐냐 하면, 주어진 경험 이전, 그걸 선험이라 하는데 경험 이전에 그런 경험들을 모아서 의식 체제 안에서 하나로 묶어내는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자아에게. 그걸 초월적 자아라고 해요. 그러면 그 이전에 단편적인 것, 흄이 이야기하는 것을 현상적 자아라고 합니다. 현상적 자아에서는 도덕이 성립이 안 돼요. 아까 카뮈 소설 <이방인>에 나오는 것처럼 성난다. 총으로 쏜다. 성질난다. 죽인다. 화난다. 시끄럽게 한다. 이게 짐승이지 인간이냔 말이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만든다는 것은 칸트가 보기에 상당히 신비로운 것이고,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고 할 때 반드시 뭘 염두에 둬야 하느냐 하면, 내가 여기 없을 수 있는데 왜 있느냐? 그렇다고 해서 교회나 성당, 성경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중요한 바탕은 있음이지 교회가 아니거든요.
생각해보세요. 교회가 진리라면 교회 없는 미개인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사람 아닙니까? 그 사람들은 교회도 모르고 예수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데 그럼 사람 아니에요? 그 사람들 없는 거예요? 있잖아요. 있다면 신이라는 것은 교회 아는 우리만 신이 아니고 신의 활동은 우리보다 더 넓은 게 분명하단 말이죠. 우리는 예수 믿기 때문에 예수님이 했다고 인정하더라도 저쪽을 빠트리면 안 되거든요. 아프리카인들, 미개한 사람들이 왜 있느냐에 대해서 뭔가 납득이 돼야 되고 설명이 돼야 된단 말이죠.
그러면 그쪽을 설명하려면 교회, 성경이 아니고 그쪽 사람들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도록 해야 된다. 그 사람들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왜 그들이 있는데 그건 당연히 신이 있게 해서 있는 거죠. 그러면 그들 속에 신의 요소가 있겠지요. 그 신의 요소가 바로 인간들이 모든 경험과 인상과 관념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이 있는 거예요. 그걸 칸트는 도덕으로 본 거예요.
칸트는 도덕을 둘로 나눴어요. 타율적이냐? 아니면 자율적이냐? 칸트는 타율적인 도덕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게 갑질하기 때문에 그래요. 누가 시킨다는 말은, 본인이 그걸 해낼 수 있기 때문에 자기한테는 저촉이 안 되기 때문에 자신만만하게 하잖아요. 그런데 시킴을 받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어요? 그 사람은 못 하기 때문에 이 법을 어떻게 지키는지 저한테 가르쳐주시겠습니까? 한 수 배우는 순간 계급이 형성되잖아요.
칸트는 도덕 이야기하기 전에 자아를 먼저 언급하거든요. 자아는 둘로 나눠요. 관찰된 자아와 관찰하는 자아. 상당히 대단히 중요한 구분이에요. 사실은 칸트철학에 들어가는 입구 노릇하는 거예요. 칸트철학이 왜 대단하냐? 자아를 둘로 나눌 수 있다는 겁니다. 관찰된 자아와 관찰하는 자아. 자아가 두 종류가 되겠지요. 관찰하는 자아를 빛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계몽주의라 해요. 계몽이란 어두움을 향하여 빛을 비추는 거예요.
그동안 사람들이 자아를 하나로 봤기 때문에 너나 나나 이렇게 된 거예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 공통성이 형성되는 듯하지만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어떤 뜻을 같이 하고 마음을 같이 해도 사실은 그 안에 자아가 들어 있잖아요. 자아에 대해서 만약에 불이익이 온다, 삐졌다, 그러면 언제든지 그 모임에서 뛰쳐나가는 겁니다. 하여튼 교회 하다 보면, 삐져서 나가는 사람들 있어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백날 찬송 불러도 소용없어요. 뛰쳐나가버리잖아요.
말씀을 잘못 가르칩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교회가 주님 뜻에 어긋납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왜 나가시려고 하십니까? 저 집사 보기 싫어서. 이렇게 되면 누구 말이 맞아요? 흄인 거예요. 미워하다, 싫어하다, 화낸다, 부끄럽다, 짜증난다, 즐겁다, 행복하다, 이런 인상들 순간순간 감정들이 모아진 게 자아가 되는 거죠. 자아란 없는 거죠. 흄의 입장에서.
칸트는 말합니다. 그렇게 자아가 없다고 하는 자아는 어디서 나왔지? 자아가 있니, 없니 하는 다른 자아, 판정내리는 너는 뭐냐? 이 말이에요. 그래서 현상적 자아란 흄이 맞아요. 혼자서 울고불고 하는 것 맞아요. 씨스타의 <나 혼자>처럼 혼자 책을 읽고, 길을 걷고, 울다 웃다 우울증 걸렸다고 하는 것 맞습니다. 하지만 그걸 해석하고 의미를 제공하는 것은 초월적 자아가 되는 거예요.
현상적 자아와 초월적 자아로 분리를 시킴으로 말미암아 신과 접촉하는 것은 현상적 자아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초월적 자아가 그때마다 새롭게 해석한 것뿐이니까. 난 너무 잘났어. 좀 가다가 내가 왜 실수했지? 역시 나는 살면 안 돼. 바닷가에서 죽을까, 말까? 하고. 그러다가 아니야. 더 살아야지. 복수하기 위해서. 이렇게 나올 수도 있고.
현상적 자아를 더 설명해야 돼요. 현상적 자아는 미래를 모릅니다. 현재에서 승부 나는 거예요. 이래 살면 뭐 하노? 이럴 수도 있고, 장사 잘 되네. 두 군데 가게 더 내봐? 가게를 더 내겠다는 이유가 손님이 더 왔기 때문이죠. 인기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만약에 인기가 없고 손님이 안 온다면 있는 가게도 접고 싶지요. 그래서 이 자아는 그야말로 변덕이에요. 그래서 그 자아를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부부 싸움할 때 그러잖아요. 당신 왜 그랬어?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돼. 이게 현상적 자아입니다.
그런데 변덕스럽다, 나는 괜찮다, 못났다고 그것을 관찰하는 자아가 있는데 그 자아는 크게 쓸게요. 경험되지 않습니다. 이게 칸트의 주장이에요. 그래서 칸트를 관념적이라고 해요. 경험을 충분히 끌어당겨요. 경험을 다 받아들입니다. 칸트도 흄 책을 보고 철학을 했으니까 흄의 말에 대해서 전적 동의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경험되지 않는 게 있다. 경험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게 있어요. 흄은 말하기를 세상의 모든 것은 외부에 의해서 나온 인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도 자연의 일부다. 같이 뒹굴고, 날씨 추우면, 아이 추워라. 이게 인간이잖아요. 꽃이 시들면 죽듯이 인간도 늙으면 죽더라. 바로 이게 진리야, 이게 전부야. 인간 별 것 없어. 인간이나 나비나 코끼리나 똑같아.
특히 흄은 믿음을 연구했어요. 하도 교회에서 믿음, 믿음 하잖아요. 흄에 의하면 믿음은 감각에서 나온 인상을 일방적으로 개념화시킨 거예요. 따라서 이 믿음은 본인 믿음이지 본인이 느낀 것, 본인이 감각한 것의 덩어리, 뭉치지 이건 제대로 믿음이 아니란 거예요. 따라서 믿음이란 그때그때의 감각이기 때문에 만약에 교회 출석할 때 믿음은 뭐겠어요? 하나님이여,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이 믿음이겠지요. 그런데 교회 오다가 벼락을 맞았는데 양쪽 두 명은 죽었는데 본인은 살았다. 그러면 그 다음에 뭐가 추가 됩니까? 주께서 나를 살게 하셨다는 내용이 추가되겠지요. 그게 본인의 믿음이에요. 그것도 기적이란 이름으로.
그래놓고 뭘 보느냐? 흄에 의하면 성경을 보는 거죠.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이해하고 해석할 때 자기 정당성을 옹호하는 자기 처지를 변호하는 식으로 성경을 보겠지요.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흄의 이러한 인상론은 20세기 신학까지 계속 이어져요. 칸트도 계속 이어지요. 끊임없이 계속 나갑니다. 그래서 이런 공부가 헛발질하는 게 아니에요. 중요한 공부를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신학이 튀어나온 게 아닙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 경험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느냐? 흄과 칸트가 논쟁한다고 봅시다. 초월적 자아는 경험되지 않는다. 흄이 하는 말이, 경험되지 않았는데 있다, 없다는 말을 못한다는 거죠. 제삼자 입장에서 누가 맞는지 헷갈릴 정도에요. 경험되지 않는 게 있다. 그래서 지속적이다. 흄이 있다가 경험되지 않는 게 왜 있어야 되는데? 인간이 있다고 할 때는 경험될 때만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칸트는, 너는 그러한 경험된 것만 있다는 자아를 그것도 경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나옵니다. 네가 말하는 자아라는 것도 경험 중에 일부라고 생각해본 적 있느냐? 그러면 흄이 거기서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경험 없이 뭐가 있다는 것도 네가 특별한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소리하는 게 아니냐고 나오겠지요.
이게 전부 헛소리 논쟁이 아니에요. 성경해석이나 신학논쟁에서 계속 이어진 겁니다. 불트만과 바르트 논쟁할 때도 마찬가지거든요.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에 속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상의 사건이 아니고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니까 칼 바르트가 하는 말이, 있지도 않았는데 의미가 등장하느냐? 생겼으니까 뭔가 뒤에 의미를 붙이든지 말든지 하지 생기지도 않았는데 일이 일어났겠느냐 하는 거예요. 실제로 부활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다음에 의미를 붙이는 게 순서에 맞지 않느냐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트만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부활 경험을 누가 했는데? 부활 경험 해본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 나에게 나타났고 열두 제자에 나타났고 500명에게 나타났다. 그 중에 살아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부활사건이 맞지. 그러면 불트만이 하는 말이, 그 사람들 다 불러와서 이야기 맞춰봐라. 부활했다는데 그 사건이 하나로 모아질까요? 같을까요? 다르지요. 왜? 흄의 인상이기 때문에.
칸트는 그걸 인정을 한다니까. 내 말이 그거라는 거예요. 그걸 인상이라고 하지 않고 표상이라고 했을 뿐인데 인간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갖고 있는 모든 감각을 받는데 흄은 감각 받은 그걸로 끝이라고 봤는데 자기는 그 감각을 재편집하고 조립하는 선언적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초월적 자아가 있다는 겁니다. 의미와 해석을 주는 자아가 따로 있다는 거예요. 사람은 그냥 주어진 대로 받은 게 아니고 주어진 그것을 짜 맞추는 구성하는 기능이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말은, 불트만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불트만의 생각이 그렇게 간단한 생각이 아니에요. 불트만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을 ‘했다’라고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부활했다고 해버리면 나는 부활했음에 동의한다면 구원이 돼버리거든요. 구원은 그런 식으로 안 된다는 거예요. 구원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았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구원은 추가적인 다른 요소가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 의미가 와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그 사건이 구원사건화 되어서 들어올 때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목사님들이니까 제가 이런 말하는데 사실을 이런 말해도 이해될지. 하나 예를 들어봅시다. 아들이 아버지와 평소에 늘 집에 살아요. 어느 날 아버지가 자는 아들 얼굴을 보니까 그렇게 예뻐. 자기 아들이라는 생각은 잊어버리고, “이렇게 예쁜 얘가 있나.” 할 때 예쁘다는 것은 그전에 안 예뻤어요? 그전에 다른 얘가 누워있었습니까? 똑같은 얘가 있었잖아요. 제가 주일 설교에 그랬잖아요. 디모데가 사도 바울의 믿음의 아들되기 전에 디모데 없었어요? 디모데 있었잖아요. 있었는데 언제부터 복음의 아들이 됐습니까? 무슨 사건이 와요? 바로 복음의 사건 때문에 복음이 들어왔기 때문에 믿음의 아들 됐잖아요.
불트만이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역사적 사항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흄적인 것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지식으로 들어온 것밖에 안 돼요. 지식으로 예수님 부활했다, 사도신경 외우고 그건 믿음이 아니고 믿음이란 자기 존재 판이 깨지는 겁니다. 전에는 내가 믿는다가 되는데 믿고 난 뒤에는 주께서 날 믿게 했다는 믿음 사건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게 불트만이에요. 그걸 위해서 기존에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다 부정하는 겁니다.
불트만 당신이 왜 그래야 되느냐고 물으면, 내가 그러는 게 아니고 사도 바울이 그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할 때 “여러분, 예수님 사랑하세요.”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거기에 의미를 붙여서 이야기한 거죠. 만약에 우리가 이해하는 역사에서 부활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 이후에 잠적하신 분이 아니에요. 어떻게 해요? “만져 봐. 마음껏 만져 봐.” “주님 맞네요.” “봐. 살아났잖아.”
그런데 실제로 성경에 보면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그 얼굴이 부활 전의 얼굴과 동일하지 않았지요. 제자들도 못 알아봤지요. 못 알아 볼 수도 있고 또 베드로에게 나타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때 베드로가 눈 뜨이면서 주님 반기고 바다 속에 들어가잖아요.
불트만은 왜 그런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은 어차피 역사적 지평 속에 있다. 이게 칸트에요. 칸트는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지평에 있기 때문에 거기서 인간은 초월적 자아가 아니고 현상적 자아를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현상적 자아를 만들어놓고 현상적 자아에 대해서 이것도 일시적인 자아일 뿐이라고 해석을 내리고 거기에 의미를 붙이고 더 중요한 것은 진짜 빛, 하늘이 주신 도덕적인 빛을 실천에 옮기는 초월적 자아가 현상적 자아를 어떻게 다루는가? 그게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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