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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하나님의 성전 150211우리교회전도서

하나님의 성전 150211

이름 : 이근호(IP:119.18.83.91)

하나님의 성전(에스겔 43:1-5)

이근호

15-02-11 21:14

하나님의 성전

2015년 2월 11일 본문 말씀: 에스겔 43:1-5

(43:1)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43:2)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43:3)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43:4)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43:5)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성전이라는 과연 꼭 필요한 것일까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영원히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성전을 지었지만 그 성전은 붙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는 정녕 성전이라는 것이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까? 성전이 불이 탔다는 말은, 아예 하나님께서 특정 조건 안에서 사람과 만날 마음이 없다는 뜻일까요?

오늘 본문에 보니 그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성전을 만드시고 그 성전에 하나님께서 친히 내왕하십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인데 왜 전번 성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불태워 없애고 말았던 것입니까? 여기에 이스라엘의 오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조건이 충족된 환경 안에서 성사됩니다. 그 환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분이시기에 죄가 유지되는 한 인간과는 만남은 성사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입장에서는 죄가 자체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기에 사실상 성전이란 성사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성사되려면 이는 하나님쪽에서 인간과의 만남을 원했을 경우뿐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의 조건은 죄가 의로 바꿔주는 장치의 동반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인간이 생각하는 성전과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성전이 같이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신 조치입니다.

즉 인간들은 기껏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영원히 함께 했으면 하고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이방민족들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과 권위와 권한도 갖추고 있는 복된 나라의 정형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는 죄라고 규정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왜 죄냐 하는 것은 신약시대에 오게 되면 알게 됩니다. 신약 시대는 ‘새언약’ 시대입니다. ‘새 언약’은 새로운 개념, 새로운 용어를 이 땅에 제공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육’과 ‘몸’의 구분하는 겁니다. 육이란 신약시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의미과 확정되는 용어입니다.

‘육’이란 신체를 자아 외에 다른 용어로 사용하지 않는 관계를 두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신체를 가꾸고, 관리하고, 칠하고, 입히고 하지만 그 모든 행위는 오직 자아를 위해서입니다. 즉 자신을 착하고 경건되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모든 행위가 육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체는 어떻게 다루어지는 겁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 다루어지는 신체와의 관계를 ‘몸’, 혹은 ‘영’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 손으로 만져지는 이 신체는 결코 우리 자아를 위해 창조된 신체가 아니라 그 이유와 목적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을 위하여 등장된 신체입니다.

따라서 언약의 실현이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쪽이라면 결국 인간은 육이라는 말입니다. 결코 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을 몸이라고 여기고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은 직접 자기에게 적용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3:16-17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즉 하나님의 언약의 개입으로 성취될 말씀을 인간들의 자신의 노력으로 이 말씀을 성취, 유지해서 기어이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천국에 이르고자 시도합니다. 이게 바로 전형적인 ‘육’의 모습입니다. 전에 이스라엘이 여호와 이름을 섬긴다고 성전 중심으로 생활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육’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냥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불타버린 겁니다. 성전의 기계로 가득한 공장입니다. 죄로 의로 바꾸는 공장입니다. 이 공장에 활동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천사들입니다. 에스겔 10장에 보면, 숱한 천사들과 그 활동이 소개되어 있고 이들 천사들이, 하나님께서 성전을 철수할 때 같이 동편으로 철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세계, 곧 영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곧 물질 세계의 접선은 성전이며 그 성전의 동쪽이 경계선이 됩니다. 이 ‘동쪽’이 성사되려면 만남의 장소가 지상에 구제적인 건축구조물의 형태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새성전의 모양이 실재하는 건축구조물 형태요 아울러 동쪽 문도 있고 그 동쪽 문으로 하나님께서 왕림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성전 자체를 포함해서 범죄한, 그 죄를 의로 바꿔주기 위해서는 성전 자체를 다시 거론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언약적 몸이 아니라 죄악된 육에 의해서 저질러진 오해임을 밝히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죄있는 육의 몸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즉 죄된 육의 안목에서는 성전마저 육적이고 비-언약적인 대상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전을 불태워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도 다시 동편을 통해서 들어오실 때는, 영의 세계에서 문턱을 지나 물질 세계로 넘어올 때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성전 속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그 원리가 바로 죄있는 육신의 몸으로 들어오셔서 성전을 완료시키는 방식입니다. 죄를 의로 바꾸는 공장 내에서 예수님은 죄의 막장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저주받으셔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상황입니다. 육의 최종 상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성전의 영광을 발산하십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육은 신체당 하나씩이지만 언약적의 완성태인 그리스도의 몸은 많은 육체를 지체로 보유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안’입니다. ‘예수 안’은 십자가 피로 인하여 소속된 지체들의 죄가 늘 의로 바꿔지는 작용이 일어납니다. 성전에서 각양 제물이 바쳐서 죄를 의로 바꾸지만 새언약 시대에서 예수님의 한 몸이 제물이 되시므로서 죄가 의로 바꿔집니다.

그렇게 해서 바꿔서 새로 생진 자기 백성들 속에 하나님은 영원히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죄를 의로 바꾸는 기계 작동 소리를 늘 듣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2-12 22:38

125강-에스겔 43장 1-5절(하나님의 성전)15021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3장 1절-5절입니다. 구약성경 1220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3:1-5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 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네요.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이 21세기의 지구에 퍼지고 있는데 여기 보니까 정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있네요. 그 만난 인자 에스겔이 이런 태도입니다.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그런 태도입니다. 여기에 무슨 신학적인 이론, 삼위일체교리,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몇 명이 모이고, 헌금이 얼마나, 나오고 예배당 면적이 얼마고, 교인수가 얼마고, 그것이 아무 의미 없지요. 성경을 이렇게 펼칠 때에 성경에 나오는 이 상황을 우리가 자꾸 과거에 한 번 있었던 일회적인 사건으로 자꾸 치우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 성경에 이렇게 기록한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나타날 때 그 원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 원리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한, 하나님이 죽을 리는 없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한 이 찾아오는 원리는 지금도 계속 지속된다는 겁니다. 특히 목격했던 인자, 그 에스겔이 봤던 하나님의 모습과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내용과 동일할 때 우리는 같은 천국에서 사는 같은 백성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했으니까 천국 간다, 그렇게 하지 마시고 먼저 하나님을 만난 그 사람이 알았던 그 하나님을 이해하는 원리와 하나님의 어떤 원칙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을 펼치면서 그 원리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느냐, 하는 이것을 뽑아내는데 본문뿐만 아니고 앞뒤로 많이 연관되어 있거든요. 이 43장을 가지고 이야기하면서 성경 앞과 그 후를 다 언급을 해줘야 돼요. 잡아당기면 칡뿌리처럼 연결되어서 다 그 원리가 뽑혀져 나오기에 그렇게 뽑아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서의 원리가 나오는데 그 원리의 힌트를 줘요. 뭐냐 하면, 43장 3절에,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게 아주 중요한 힌트가 됩니다.

예루살렘 성읍을 멸망하러 오신 그 모습대로 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지요. “주님 찾아올 때 무엇 때문에 오십니까?” 심판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오시는 거예요. 왜 내가 너희를 멸망시킬 수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둘이 잘해보자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세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다? 심판하시면서 찾아오시는 하나님. 왜 심판해야 되는가? 옛날 심판 당했던 그 행세, 그 태도를 그 후손들이 계속 되풀이하고 있기에, 그리고 주님께서는 동일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동일하게 심판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심판을 할 때 하나님께서 뭔가 철거하시고 이런 것은 소용없다고 하는데 그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의 그 노림수가 뭐냐, 뭘 노리고 심판하시는가?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섬기면서 망할 때 그들이 여호와를 섬겼거든요. 이제부터 중요한 거예요. 그 여호와를 공격하는 거예요. 여호와가 여호와를 공격하는 겁니다. 공격하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너희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게 지저분하다는 겁니다.

설교를 들어보면 지저분한 설교들이 있어요. 뭐냐 하면, 교인들의 속은 건드리지 않고 종교적인 모양새로 겉을 꾸미라고 주장하는 설교를 들어보게 되면 딱 느낌이 지저분합니다. 참 지저분해요. 동방교회, 동방정교회라는 것이 있어요. 기독교가 서방과 동방교회로 나누어졌잖아요. 지금의 그리스정교회, 러시아정교회가 동방교회인데 그 동방교회에 예수 기도라는 것이 있어요. 예수 기도가 뭐냐 하면, 하루에 1만 2천 번을 기도하면 은혜 받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뭐냐? “주 그리스도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걸 하루에 1만 2천 번을 하는 거예요. 만보기를 가져다 놓고 카운트 하면서 하든지 해야 돼요. 만 2천 번을 하게 되면 필히 은혜를 받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방법은 한국에서도 쓰고 있지요. 주기도문 3천 번 외우면 방언 터진다는 그런 것. 이것은 우리나라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3천배를 하게 되면 부처가 자비를 베푼다는 거예요. 갓 바위에 올라가면 세가지중에 한 가지는 응답받고 내려온다는 거예요. 이러한 것에 종교적인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 자기 것은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온갖 치장은 다 할 테니까, 경건의 치장은 다 해줄 테니까 제발 나의 죄는 건드리지 마라. 내 속에 있는 희망, 이것 손대면 자기는 아프다는 거지요.

“좋은 게 좋다고 시키는 것은 다 할 테니 내 아픈 것은 건드리지 마시고 어떻게 포장을 하게 되면 응답을 받습니까?” 그런 조로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열심내고, 철야하고, 커피 마셔가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한마디로 말해서 지저분해요. 추접합니다. 설교는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 속에 파고 들어가야 돼요. 그래서 거기서 구멍을 만들어서 뻥 뚫려야 돼요. 골키퍼 있다고 골인 안 들어가는 것 아니잖아요. 골키퍼가 서 있어도 그 사이로 골이 다 들어가야 돼요. 자기 나름대로는 막 방어하는 거예요. 기도를 이만큼 하고, 성경은 어떻게 보고, ‘이렇게 저렇게 하겠습니다.’ 하는데 슛 골인, 다 들어가는 거예요.

주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가 협상하고 있는 그 모든 것, 그 틈새를 다 비켜가면서 쳐들어오시는 겁니다. “네가 하겠다고?” “예” “그 하겠다는 것이 바로 내가 심판해야 될 이유가 된다. 너희가 ‘이렇게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겠습니다. 중보기도 하겠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심판받아야 될 이유”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그렇게 우리가 정리를 해도 어떤 점이 자꾸 의식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 이미 하나님의 손으로 성전을 부셔놓고 찾아오는 그 지점이 바로 까페베네가 아니고 성전이라는 거예요.

다방도 아니고 은행도 아니고 성전에 온다는 거예요. 그게 어디 있느냐 하면, 1절에 나옵니다.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했습니다. 동쪽으로 난 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스며듭니다. 마치 햇살 비취는 정도가 아니고 햇살을 비추던 그 태양이 동쪽 창문을 열고 태양 자체가 집안에 들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들어 버리지요.

그러면 이 동쪽 문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 하면, 19년 전에 하나님께서 성전의 동쪽 문을 통해서 빠져나갔습니다. 에스겔 10장 18절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이렇게 하고 그들이 떠나면서 “동문에 머물고” 떠났습니다. 동쪽이 어떤 문이냐 하면, 하나님 세계와 지상세계, 지상세계는 물질세계지요, 왜냐하면 성전은 건축구조물이니까, 구조물과 그리고 하나님이 철수해나가는 하나님의 세계가 어떤 지점에서 분리가 되느냐 하면, 동쪽을 통해서 이렇게 분리가 돼요.

그러면 동쪽에는 북쪽이나 서쪽과 남쪽과 달리 특이한 것이 있는가? 특이한 점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서쪽이나 북쪽이나 남쪽으로 빠져나오지 않고 동쪽인가? 주께서 다시 그 지점, 동쪽으로 오시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왜 서쪽이나 북쪽으로 오시지 않고 동쪽으로 오시는가? 창세기 3장 21절에 보면 거기 방향이 나와요. 에덴의 동쪽이 나옵니다. 유명한 영화제목이기도 한데요. 제임스 딘이 주연한 영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을 배치했습니다. 이 말은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 아무리 육의 세계에서 과학이 발달하고 양자역학을 해도 영의 세계가 포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의 세계가 왔을 때 육의 세계와 접촉하는 지점이 서쪽이나 다른 방향이 아니고 에덴의 동쪽이에요. 에덴의 동쪽이라고 하나님께서 창세기를 통해서 언급해주는 것은 결국은 이 물질세계, 인간세계도 하나님이 하시는 영의 세계에 포함이 된 상태에서 이것이 변화를 겪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시작점 중의 하나에요.

뭐냐 하면, “에이 하나님은 안 보여. 우리끼리 살자.” 우리끼리 살고 싶지요. 그런데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걸 허락을 안 해요. “너희끼리 사는 것도 내가 알아서 너희끼리 살게 했다. 따라서 너희끼리 살지 못하는 그날이 올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걸 이미 하나님께서 두 가지 징후로 줬어요. 첫째는 노아 방주를 통해서 인간끼리 사는 동네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할 때 갑자기 비가 많이 와서 다 싹쓸이 했습니다. 원래 비라는 것은 우기에 오고 다시 건기가 되면 비가 안 오는 것이지 다 쓸어버릴 정도로 비가 온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게 이미 하나님께서 관여한다는 뜻이고 또 소돔과 고모라 때인데 그 때는 인간들끼리 싸웠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져서 멸망했습니다. 물과 불이지요. 그러면 그런 징후를 보낼 때 하나님께서 어떤 개념 하나를 언급하면서 심판하시거든요. 그걸 가지고 언약이라 합니다. 노아 언약에 의해서 심판하는 겁니다. 장차는 새언약에 의해서 마지막 불심판이 오게 돼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인간은 자기들끼리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들끼리 사는 것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십니다. 인간은 말합니다. “찾아올 것을 가기는 왜 가는가?” 이렇게 나오지요.

주께서 계시고 다시 떠나시고 다시 오시는 것은 언약 안에 품어 있는 그 원리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자기약속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서 인간들로 하여금 죄 짓도록 허용한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이 있으면서 여호와를 섬겼는데 그 섬기는 것이 지저분하게 섬겼지요. 그들은 시키는 대로 다 했다는 거예요. 제사 드리라고 하면 드리고 속죄제 하라고 하면 그대로 하고 번제도 드리고 다 했는데 망했거든요. 뭔가 여호와를 섬기는데 망했다는 것은 그 후손들도 맨 마찬가지에요.

이 에스겔 43장 이후에 신약이 나오는데 신약에 나오는 그 유대인들과 교회라고 하는 교인들이 다 마찬가지에요. 그 때 망했던 그 방식대로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고, 하나님께 회개한다고 하고 섬긴다고 하고, 예배드리고 다 해요. 소용없습니다. 그게 심판받아야 될 이유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성전이 갖고 있는 그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결론에 해당되는 신약부터 먼저 언급하고 본문으로 넘어갑시다. 그냥 하게 되면 본문이 너무 난해하고 새언약, 신약이 결론이기 때문에 결론부터 먼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사람을 두 가지 관점으로 봐요. 하나는 육으로 보고 또 다르게는 몸으로 보는데 몸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육과 인간의 몸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나, 자아외의 이 신체가 달리 활용도가 없을 때 그걸 육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여자들 보면 손톱 가꾸잖아요. 남자들이 여자들 손톱 가꾸는 게 이해가 안돼요. 손톱이 길면 깎으면 되는데 거기에 왜 그림을 그리느냐는 거예요. 반짝반짝. 어느 때는 누드 톤으로, 어떤 때는 색깔을 넣어서. 그걸 왜 하는지?

여자들에게 “이거 왜 합니까?” 하면 남자들이 술 먹는 비용보다 싸게 먹힌다는 거예요. 스트레스 푸는데 최고라는 겁니다. 육을 가꾸는데 자기는 몸을 가꾼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몸을 가꾸는 게 아닙니다. 몸이라는 게 인간에게는 없어요. 육을 가꾸고, 육을 다듬고, 육을 째고, 육을 붙이고, 육을 높이고. 육이라는 것은 사도바울을 통해서 새언약에 처음으로 주어진 용어입니다. 육. 이것은 네가 생각하는 너, 자아를 위해서 네 신체를 마음대로 굴리고 네 자아가 만족하고 쾌락을 느끼고 네 욕심에 충족되도록 이 신체를 활용하는 그런 관계를 육이라고 해요.

이게 신약에 와서 결론 부분입니다. 지금 왜 결론부분을 하느냐 하면, 구약에서 유대인들도 그렇게 했어요. 하지만 해답은 신약에 나타납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섬긴다고 섬겼는데 왜 성전이 불탔는지 그 이유를 몰라요. 그 이유가 신약에 나온다 이 말이지요. 인간은 몸으로 한 것이 아니고 육으로 했기 때문에 육인 신체를 자기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여호와를 섬겼기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육이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의 몸은 뭐냐? 몸은 언약을 보여주는 신체를 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는 것을 몸이라고 해요.

그래서 인간에게는 몸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육밖에 없어요. 자기 자신의 욕심만 드러내는 거예요. 그런데 그 육을 죽고 새언약에 의해서 몸으로 바뀌어버리면 그 몸은 내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 몸에 붙어 있는 지체가 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육으로 오셔서 몸으로 바뀐 거예요. 육은 키 얼마, 몸무게 얼마, 이것으로 한정되지만 몸은 수천의 몸을 아우를 수 있고 다 지체로서 포함을 할 수 있는 것이 몸이에요. 머리는 하나요 지체는 여럿이라고 할 때 그것이 하나의 몸이 될 수 있어요.

‘설마 그럴 리가? 그것이 괴물이지.’ 자아중심의 육으로 보니까 괴물로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몸입니다. 음성은? 음성은 여기 나오지요. 2절에.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다고. 이 물소리 같다는 것은 요한계시록 1장 15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야기한 거지요.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의 육으로서는 상상이 안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은 편재성이 있어서 우리가 안방에 있든지 혹은 바다 끝에, 심지어 물속에 있더라도 주님이 함께 할 수 있어요.

그것을 미리 다니엘서에서 예고편을 보여준 겁니다. 불 속에 들어갈 때 분명히 세 명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까 네 명이 되었어요. 거기 하나님의 아들같이 생긴 분이 강강술래 하면서 함께 있었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왜 세 명인데 네 명이 되었는가? 그 불속의 세 명은 세 명이 아니고 그 한 명 되시는 한 몸의 지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네가 보기에는 네 명으로 보여도 사실은 한 사람이에요. 그리스도와 그 일행, 그리스도와 그의 밴드에요.

이미 성전에 들어왔던 일단의 천사집단이 바로 그런 집단이었습니다. 에스겔 10장 18절에 동쪽으로 빠져 나간다고 했지요. 철수 할 때 누가 철수하느냐 하면, 19절에,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목전에 땅에서 올라가는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에스겔 10장에 보면 성전에 그룹들, 천사들이 있어요. 천사들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의 수행원들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이 빠져나오면서……, 구약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에 오면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가 돼요.

그 이름에 대해서 나사렛 예수라는 목수의 아들로 구체화될 때 그 분이 바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고 주님이고, 그래서 예수 앞에 뭘 붙이는가? 그냥 예수가 아니고 ‘주’ 예수, “주 예수를 믿습니다.” 하지요. “구약 때 그렇게 설쳤던 그 분이 바로 당신, 나사렛 예수 맞잖아요!” 그런 고백이라 이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날 때, “주여, 누구십니까?” 하니까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그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어줘야 핍박이 가능해요.

하나님은 인간의 육으로, 육신의 몸으로 오신 거예요. 로마서 8장 3절에 의해서.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신 이유를 이제 설명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육신이 없어요. 그 때는 육신이 없고 천사들을 대동하고 옵니다. 우르르 왔다가 우르르 빠져나간 거예요. 그러면 그 전에 성전에 누가 계셨는가? 천사들이 있었던 겁니다. 천사들이 있었던 것을 수로 놓아서 태피스트리로 성전 벽에 걸어놓았어요. 그룹들이 언약궤를 보호하는 그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분들이 우르르 빠져 나간 거예요.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러면 평소에 그 성전에 천사들이 있었고 주의 이름이 있었거든요. 주의 이름이 어디 있느냐 하면, 언약궤 위에 주의 이름이 있어요. 출애굽기 20장 24절에 의해서. 제단 쌓으면 그 위에 내 이름이 함께 있을 것이라고 했으니까. 또 회막에서 주와 만나니까. 그러면 그 천사들이 왜 성전에 우르르 있느냐 하면, 성전 자체가 죄를 의로 바꾸는, 죄를 용서해주는 기계입니다. 성전 자체가 그 공장이에요.

어릴 때 방앗간에 가 보세요. 어릴 때 촌아이들이 제일 먼저 알게 되는 공장이 방앗간이었습니다. 명절 되면 시끄럽지요. 고추 넣으면 고춧가루 나오고 한쪽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나면서 떡이 나오고 있고 그 물컹한 떡이 너무 맛있어요. 그 공장, 기계. 굉장히 딱딱하고 냉혹하지요. 정이라고는 요만큼도 없고. 그게 기계거든요. 그 기계의 집단이 공장이잖아요. 그 공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죄를 의로 바꾸는 기계가 움직이는 공장이라는 말이지요. 장치거든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면, 하나님이 계시려면 죄에 필요한 자기 백성이 필요해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자기가 용서한 백성들 가운데 계실 때 그것을 성전이라고 합니다. 죄를 용서하려면, 죄를 의로 바꾸어주면서 주가 주되심을 드러내려면 반드시 죄인이 필요해요. 백성들이 필요하고. 백성들은 죄를 지어줘야 되고 거기 계시고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은 피 흘려 용서를 해야 되고. 그럴 때 그게 성전이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맨숭맨숭하게 계시는 것이 아니고 공장 속에, 그 기계 속에 있어요. 그 기계를 가동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처음부터 사람들을 성전에다가 기계장치를 해서 돌리지 뭐가 삐져가지고 청문회 하다가 국회의원들 삐져서 죽 나가는 것처럼 “나와, 나와.” 혹은 무슨 노사 간 회의하다가 “이래서는 회의 못한다.” 하듯이 죽 나와 버리느냐 하는 말이지요. 왜 성전에서 나갔느냐 그 말이지요. 나간 이유에 대해서 성경에서, 이사야, 예레미야에서 죽죽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들은 우상을 섬겼다는 겁니다. 성전에다 우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상을 만들어놓고 그들은 여호와를 섬기고 있었던 겁니다.

하여튼 좋은 것은 다 가져온 거예요. 괜찮은 것, 효과 있는 것, 효능 있는 것. 교회 다니고 사주팔자 보는 거예요. 궁합보고, 점치고, 굿하고, 다 하는 겁니다. 교회 나오면서도. 그렇다면 뭐가 문제냐 하면, 그들 본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섬긴다고 할 때 뭘 모르는가? 본인들이 몸으로 섬긴다고 생각한 거예요. 몸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고 육으로 섬긴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마지막 때 새 언약이 와야 육에서 벗어나지 그 전까지는 자기가 사람인 줄 알아요. 자기가 인간인줄 안다니까요?

인간이라는 게 없어요. 인간이라는 것은 사람이 지어낸 용어지 원래 인간이란 용어가 없습니다. 언약에 의해서 육이냐 아니면 새로운 몸이냐, 그거지 성경에 인간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사람이 아니므니다, 우리가!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 같으면 안 죽지요. 너는 흙인데 잠시 인간으로 만든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온 성전은 사람이 만든 성전이 아니고 주께서 이 기계를, 공장을 새로 세워요. 전에는 인간들이 손으로 성전을 세우고 하나님을 거기에 모시는 형식인데 에스겔 43장을 보면 아예 성전을 만드는 분이 하나님 본인이 성전을 만들어요. 이 말은 뭐냐? “인간들아, 이 성전에서 나가라.” 하는 거예요. 앞으로 이 성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사람하고 상대를 하지 않습니다. 상대해봐야 지가 성전 섬겼다고 잘난 체나 하니까.

그래서 이 성전에서 필요한 죄는 하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의해서 진짜 육의 궁극적인, 제대로 된 이 죄의 바닥, 바닥을 보여주는 어떤 인물이 이 성전에 들어오셔야 되는 거예요. 그 분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오신 거예요. 인간은 손 떼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가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로 오신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로 오신 거예요. 이스라엘로 오셔가지고 십자가에서 저주받음으로써 근원적인 저주, 죄의 끝장을 보신 겁니다. 죄가 뭐냐? 이게 죄다.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다 보여주신 거예요.

그리고 인간은 여기에 노터치, 절대로 터치하면 안돼요. 인간은 없습니다. 그리고 계약해야 될 진짜 죄인 예수님과 하나님 그 사이만 남고 다른 사람들은 구경꾼이고 너는 나가 놀아라, 하고 내 보내는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성전을 다시 만들겠다고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 되어버리면 이미 기계적인 공장 개념은 없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몸이 기계에서 몸으로 성전이 전환이 되는 겁니다. 물질에서 신체로 성전 자체가 변화돼요.

제가 신학교 다니면서 계속해서 안 풀리는 것이 있었어요. ‘네 몸이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할 때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인 세 명만 있으면 성전이 세 개가 되어버리니까. 그리고 “네가 이 성전에서 우상 섬기고 죄를 지으면 성전을 멸한다.”고 하니까 그러면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매일같이 착하게 살아야 되고 조금이라도 이 성전에 불티같은 죄라도 하나 들어왔다 싶으면 이것은 성전 날라 가버렸어요. 그러니까 백날 성전이라고 우겨도 마음속으로 미워하면 성전이 아닌 겁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성전에 미워하는 마음이 들어오면 하나의 불씨처럼 되어서 이게 폭발해 버려요.

그러면 한 순간도 내가 성전 된 적이 없습니다. 성전 된 적이 없다면 성전이 안 되면 멸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결국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이 코너 끝나버려요. 평생을 살아도 이게 성전이 안돼요. 이 성전이 그냥 성전이 아니고 거룩한 성전이거든요. 본인이 봐도 절대로 거룩하지 않거든요. 십계명 들여다보세요. 탐내지 마라, 남의 것을 부러워하지 말라, 이런 것이 나오니까 남의 것을 안 부러워할 수가 있습니까? 차라리 장님이 되면 좋겠는데 설사 장님이 되어도 시지각이 후두부에 있어서 장님이 되어서 상상을 하는데? 그리고 장님 되고 손발 다 묶어도 꿈은 어떻게 할 건데? 꿈에 죄짓는 것은 어떻게 할 건데? 꼴좋다. 성전에서 잠자고 있는데 꿈은 더러운 꿈이나 꾸고. 그게 무슨 성전입니까? 꿈도 깨끗해야지요. 꿈도 천사처럼 날라 다니는 이런 꿈을 꿔야지요.

도대체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네요. 이 문제 해결 안 되는데 무슨 강단에 서요? 그게 사기꾼이지요. 이게 사기꾼이잖아요. 주님은 좋겠다. 저 혼자 구원받아가지고 저 혼자 구름 타고 올라가서 턱 앉아서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뭘 어떻게 따라가요? 무슨 수로? 주님이야 하나님이니까 죄도 안 짓고 그렇게 올라가지 우리는 무슨 수로? 처나 자식이나 나 보다 더 사랑하지 말 것이면 결혼은 왜 시키는데? 결혼을 시켜놓고 처나 자식을 미워하라고 하면 미워하라고 결혼을 시켰어요? 주례를 그렇게 해 볼까요? “아내로 사랑하십니까?” “예” “이제부터 미워하세요.” “옆에 있는 남편으로 사랑하십니까?” “예” “이제부터 미워하세요. 사랑하지 말고.” 이게 주례가 돼요?

이것은 그동안 우리의 몸과 주님의 몸을 같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오산이 생기는 겁니다. 심지어 오래전에 암으로 죽은, 간증했던 코미디언, 후라이보이 곽규석.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암에서 나았다고 간증하고 돌아다니면서 하는 소리가 “담배피우지 마세요.” 왜? “담배피우면 여러분의 몸이 성전인데 성전에 연기가 확 낀다는 거예요.” 담배 연기에 주님이 콜록콜록, 할 판이라 안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담배피우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발상이요, 진짜 후라이보이, 후라이, 거짓말인데 과연 그 생각을 후라이보이만 했겠는가? 2천년 교회가 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의 몸이 성전인 것은 우리를 육의 입장에서 죽이고 그리스도 부활의 몸으로 다시 바꾸는 작업을 하는 공장이고 기계로 우리의 신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성전이 되는 겁니다. 날마다 “너 이렇게 죽어도 마땅하지?” “예” 그거 하라고, 그거 하라고! “너 죽으면 주님 몸 되는 것 알지?” “예, 압니다.” “교체작업 기뻐하나?” “좋습니다.” 그거 하라고 주신 거예요. 우리교회에 단골로 질문하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질문을 늘 하니까 제 설교재료가 마르지를 않아요. 그 분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어떤 약속을 믿고 삽니까?”라는 질문을 했어요.

그쪽에서 배운 것은 뭐냐? 예수님께 기도하게 되면 이런 놀라운 기적을 맛보게 되고, 이런 소유를 갖게 되고, 이런 복을 받고, 가정이 화목하게 되고, 이런 것을 배웠을 건데, “우리는 어떤 약속을 믿어야 됩니까?” 했어요. 그래서 제가 답변하기를, “우리는 이미 죽었고 위엣 것만 쳐다보라.”고.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그 말씀은 우리는 성전이 아니기 때문에 성전이 되시는 주님의 자기 몫으로 그 말씀을 우리에게 이루어버리면 우리는 그냥 장소만 대여했을 뿐이고 장소만 빌려주고 작업은 주님께서 다 하시는 거지요. 왜? 새언약속에 주님만이 성전이기 때문에. 주님이 성전 되는 기능, 활동을 벌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에 의해서, 예수 안에서 우리는 성전인 겁니다. 내가 성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담배 안 피우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담배 피우지는 마세요. 술 안 먹는 그것이 아니고.

하루 24시간 따지고 보면 우리는 죄 안 짓는 순간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이미 예수님께서 죄의 막장을 보여줬기 때문에. 막장을 보여주신 분이 우리를 이미 죄인으로 규정했다는 말은 우리가 뭘 해도 죄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 설교를 듣고 십자가 마을이 죄를 찬양한다고 하는데 죄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찬양하지요. 새언약을 찬양하는 겁니다. 뒤에 나오는 이 성전의 모든 제사는요, 이제는 양 바치고 소 바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이미 다 했어요. 했는데 다 망했잖아요.

해도 망하는 것 말고 주님의 한 몸 가지고 주님의 공생애를 통해서 주님이 제물이 되고 주님이 제사장이 되어서 “내가 알아서 다 이루었다.” 다 이룬 거예요. 주님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예요. 십자가에서 고개를 떨궜어요. 그 때 거기서 이미 다 이룬 거예요. 거기서 발생된 것이 뭐냐? 원리입니다. 성전이 되는 원리. 이것은 한 번만 탁 입에 털어 넣으면 다 성전 돼요. 이게 효과에요. 주께서 자신의 죄인의 몸, 육신의 몸에서 부활의 몸으로 바뀐 것이 언약이기 때문에 그 언약 안에서 우리 죄도 하나님의 부활의 형상을 닮는 몸으로 바뀌는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으로서 우리 몸을 사용하시겠다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겁니다.

이것은 실상 대여도 아니고 그냥 전쟁할 때 일방적으로 압수하고 회수하듯이 우리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그냥 쳐들어와서 가져가셔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쓰이는 몸으로 바뀌는 것, 그게 바로 성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님이 활동하는 몸으로 바쳐진 몸인 것을 의심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기에 말씀에 입각해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죄 아닌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십자가 피로 용서받는 은혜가 늘 새롭게 나오도록 주께서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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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7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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