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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50206b 울산강의-출애굽기 33장 : 어디로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150206b 울산강의-출애굽기 33장 : 어디로

이름 : 한윤범(IP:14.39.134.30)

20150206b 울산강의-출애굽기 33장 : 어디로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첫 번째 시간에 산에 네 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럴 때마다 새로운 정보가 네 개 생기고 그 네 개를 이으면 구원의 여정이 돼요. 과정이 되죠. 그러면 구원은 어떤 순서로 됩니까? 그 어떤 순서로 되느냐고 묻는 차원이 우리가 사는 세상 차원이에요. 이렇게 시작했다고 이렇게 해서 이렇게 간다. 그게 바로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조직신학이라는 거예요. 처음에 소명, 믿음, 순서 있지요.

그게 순서가 아닌데 사람들은 나는 어디 쯤 가고 있을까? 이만큼 남았구나. 3단계, 4단계, 단계 올리면 그 다음부터는 골치 아파요. 단계 올리면 도 닦는 게 되니까. 구원에 단계가 없어요. 왜 단계가 없느냐 하면, 내가 구원받는 식으로 주께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덮치니까. 그냥 광주 대화동에 아파트 옹벽 덮치듯이 그냥 덮치면 나는 찌그러들잖아요. 찌그러지면 자아는 부드러워져요. 걱정, 근심이 날아가 버리니까. 성도의 특징이 부드러워져요. 꽃을 든 남자에요. 아주 부드러운 남자가 돼요. 옴팍 찌그러졌으니까.

첫 번째 올라갈 때 그냥 외워서 이야기하던 것을 두 번째에 돌판 만들라는 이유가, 증거궤 안에 아카시아로 만든 상자가 있는데 상자 안에 내용을 돌판으로 채우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순서로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덮치는데 덮칠 때 삼겹살, 시루떡처럼 어떤 것이 차곡차곡 쌓여서 죄가 의로 바뀌는 메커니즘이 되느냐 하는 거예요. 도대체 어떤 장치이기에 죄로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의로 나오느냐 하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가 뭔가 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만든 장치 안에 죄를 의로 바꾸는 장치가 들어있어요. 그 장치가 어떤 장치인지 궁금하지요.

그게 뭐냐 하면 증거궤라는 아카시아 상자가 있고 그 상자 안에 돌판이 들어있습니다. 돌판은 언약을 압축한 거예요. 이걸 지켰다 하면 복이 나오고 못 지켰다 하면 저주가 나오지요. 돌판에서 저주가 나올 때 7월 10일에 피를 발라요. 염소의 피나 소의 피를 바르면 저주가 피 안에서 걸러져요. 그러면 피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의가 돼버려요. 그러니까 피와 율법의 만남이죠.

그러면 율법은 누가 준비한다? 하나님이 준비해요. 피는 누가 준비한다? 하나님이 준비해요. 이걸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하거든요. 죄인이 의인 되는데 우리가 손댈 것도 없어요. 하나님이 율법 주고 그 율법의 저주를 하나님이 나서서 막아버려요. 율법의 저주가 하나님의 품속에 들어오게 되면 그 저주받은 하나님은 대속의 십자가 죽음으로 피 흘립니다. 그 피를 새 언약이라 해요. 이게 바로 약속이라는 겁니다.

언약궤가 먼저 있고 언약궤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뜻에서 언약궤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생물, 피조물이 있어요. 그게 두 그룹이라 해요. 두 천사가 무지개다리처럼 쌍으로 얼굴을 맞대서 마치 우리의 할 일은 이걸 지키는 일이라 해서 아래쪽을 보면서 언약궤를 지키는 겁니다.

그 언약궤 만들고 천사 만들라고 이야기하면 돌판 만들라는 거예요. 이게 두 번째 올라갔을 때에요. 첫 번째는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이것 안 지키면 삼사 대 저주받는다. 지키면 천 대까지 복을 받는다. 저주와 축복의 차원을 이야기했고, 율법이 만약에 안 왔다면 그들은 축복, 저주 차원이 있는 것도 모르고 살다가 흙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면 되지. 이게 바로 불교잖아요. 살다가 힘 빠지면 흙이 되는, 불교에서는 화장해서 뿌리잖아요.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요 인간은 자연이고. 자연으로 돌아가면 그게 저들이 아는 2차원 차원의 전부에요.

그들에서 목사인데도 불구하고 유언이 뭐냐 하면, 절대로 죽으면 화장하지 말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뜨겁다고. 두 번째는 왜 하지 말라고 하느냐 하면,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니까 무덤을 열고 나와야 되는데 내려 뿌리져 버리면 무덤을 열 손이 없잖아요. 뼈가 있어야 뼈에 힘줄이 생기는 건데 뼈가 흩어져 있으면 뼈 모으는데 하늘나라 행정체계에서 너무 일거리가 많아서 아르바이트생 써야 돼. 어떤 사람은 뼈다구 어디 있습니까? 백상어가 물어서 태평양 사모아 섬에 가 있습니다. 빨리 택배 보내서 하라. 보내서 다시 하려면 시간이 차이가 좀 나잖아요.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자기 생각만, 자기중심의 차원만 생각하는 거예요. 나만 살면 그만이다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자기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천국은 누구의 세상이에요? 지가 큰소리치는 세상이에요. 따라서 천국에 지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 오게 되면 삐져서 지옥으로 도망갈 거예요. “저 인간이 왔다? 괜히 왔다. 지옥 가서 살래. 너하고 안 산다.” 특히 이혼한 전처 만나면 가자마자 부부 싸움할 거예요. 바로 이런 차원에 몰두하는 우리를 그 차원을 바꿔주지 아니하면 주의 차원에 갈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올라갔을 때가 뭐냐 하면, 32장 31절에 보면,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니까 이미 애굽에서 올라온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우상을 섬겼잖아요. 우상을 섬긴 데 대해서 32장 9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다 죽여 버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상 섬겼기 때문에 다 죽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아쉽지 않다는 뜻이에요. 사람이 아쉬운 것이 아니고 내가 함께 살 사람이 필요하지 사람 많다고 살려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큰 교회 숫자 아까워서 살려주는 게 아니에요. 큰 교회고 작은 교회고 작은 교회라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사람만 구원받는 것이지 숫자와 구원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설마 다 죽일까? 다 죽입니다. 왜냐하면 32장 9절에 보면, 내가 다 죽여 버린다.

그때 모세가 나서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 다 죽여 버리면 애굽 사람들이 놀리기를 꼴좋다. 자기 하나님한테 몰살당했다는 소리 들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이야기하면서 “친히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면 안 되겠습니까?” 중요한 제안 했지요.

그 전에 뭐가 있느냐 하면, “제가 하나님과 함께 있잖아요. 저처럼 조치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 내용을 아니까 저들도 하나님을 나처럼 알게 만들면 그들이 멸망하지 않고 구원될 것 같은데 이건 제 아이디어인데 하나님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여, 누굴 보내주옵소서.” 모세는 시내 산에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답변은 뭐냐? 내가 시내 산에 오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너희들 밑으로 따라 내려올게 하는 거예요.

33장 봅시다. 12절,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함께 보낼 자를 보낼 자를 주시옵소서. 천사라도 보내달라는 거죠. 하니까 14절에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친히 가리라. 하나님이 시내 산에 계시다, 안 계시다? 이제는 시내 산 철수합니다. 하나님이 철수하니까 누구 속에 항상 동행합니까? 산 밑에 내려오지요. 산 밑에 있는 백성들이 이미 죄 지었지요. 그 모습을 언약궤 안에 담는 거예요. 어떻게? 깨어진 돌판을 대신한 돌판이 들어가는 겁니다. 이 말은 너희들한테 구원은 이미 끝났어요. 너희를 위한 구원은 없어요. 뭐만 있는가? 너희를 대신하는 조건 하에 그들과 동행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범죄 했는데 그 범죄를 대신 담당할 자를 보고 그 조건 하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죠.

그렇게 되려면 그들이 범죄 했다는 것이 드러나야 돼요. 계속해서 앞으로 줄곧 범죄 했음이 안에 증거물로 담겨있어야 돼요. 그래서 그 상자를 증거궤, 죄진 증거궤에요. 그 증거궤는 뭐냐? 인간이 하나님 아니면 그들은 벌써 멸망당했음에 합당한 증거들이에요. 그 증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그리고 민수기에 나오는 아론은 이미 죽었지만 지팡이에 아론 이름을 쓰니까 살구 싹이 낳고 더 놀라운 사실은 살구 열매까지 맺혔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을 이토록 동행하면서 내 차원을 이해 못하고 너희들 차원, 그걸 애굽이라 합니다. 애굽에서 살던 사고방식을 계속 고집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그렇다면 갭 있잖아요. 너희들의 애굽 사고방식과 그리고 그들이 가야 될 하나님 천국, 약속의 땅과의 갭을 누가 메워준 거예요. 그 역할을 모세가 하게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이 증거는 뭐냐? 이제는 모세가 네 번째 올라갈 때는 모세가 판만 다듬었어요. 글자는 누가 쓰겠습니까? 그 판에 첫 번째처럼 친히 하나님이 십계명을 쓰고 모세가 그걸 다시 들고 옵니다. 모세가 두 번째 들고 온 돌판을 깰까요, 안 깰까요? 안 깹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 백성은 우상숭배한 자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이번 계약은 죄진 사람과 상대한 계약이 아니고 그들을 대신할 중보자 역할하는 모세와 하나님과의 계약이기 때문에 그 돌 판을 깨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건이 붙어요. 앞으로 백성들이 모세 말 듣지 아니하면 저주받는 조건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모세가 자연적으로 그 당시에 예수님이 되겠지요. 그래서 모세는 장차오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사람인데 히브리서 3장에서는 모세 역할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장 5절에 보면,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이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란 말이 아니에요. 집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되고 싶다고 집 되는 게 아니고 우리 말고 제2, 제3의 요소가 우리를 장악해야 집이 된다는 겁니다. 나는 천국 가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고 천국의 요건이 우리를 덮쳐야 돼요. 우리를 찾아 와야 돼요. 찾아와서 모세와 예수님과의 차이를 알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집이 되는 겁니다. 그 모세와 그리스도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출애굽기에 다시 와서 모세는 그 당시의 중보자에요. 히브리서 3장에 의하면 사실은 중보자가 아니고 중보자의 긴 그림자에요. 이걸 저는 예수님의 석양의 그림자라고 하는데 노을 지게 되면 그림자가 길어지잖아요. 예수님의 그림자가 길어지게 되면 그건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의 그림자인데 그림자 역할이 모세가 되는 겁니다. 실체가 있고 그림자로 모세가 있는 거예요. 실체가 움직이면 그에 따라서 그림자도 움직이겠지요.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모세가 움직였다고 보는 거예요. 신약의 우리들은 모세의 움직임이 아니고 장차오실 예수님의 움직임이 그 당시 식으로 그 당시 모션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모세라면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의 석양의 그림자거든요. 그러면 제가 귤을 까먹을 때는 내가 귤을 까먹은 게 아니라 주께서 귤을 까먹게 하셨다는 겁니다. 모세처럼. 그걸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요. 당신은 귤 까먹었는데 당신이 배 부르려고 까먹었어. 자세히 이야기해줘. 먹고 싶었는데 주께서 귤을 주셔서 감사함으로 먹는다. 그때 감사함이 들어가요. 그걸 완료라 해요. 우리는 예수님이 감사함으로 귤 까먹게 해서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신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증거케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이빨이 아프다. 왜 아프냐? 주께서 아프게 하셔서 이빨이 아픈 거예요. 내 뜻 같으면 이빨 안 아프고 싶어. 얼마 전엔 제가 스케일링하는데 간호사가 사랑니 뽑을 때 굉장히 아플 겁니다. 주님의 이빨 주님이 뽑는데 내가 아파야 할 역할이라면 아파야지요. 아파서 울 정도 같으면 눈물이 나야지요. 내 눈물이 아니고 주님의 눈물이기 때문에 눈물이 나야지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연극무대에 올라간 역할들이에요. 자기 인생에 대해서 걱정한다는 것은 자기 분수를 모르는 태도입니다. 주제 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소원이 뭐냐 하면, 빨리 시체를 만나는 거예요. 그림자니까. 그냥 만나면 안 돼요. 옷을 벗어야 돼요. 아담에 속한 형상을 벗어버리고. 아담 형상 벗을 때 방금 보톡스하고 찝었는데 아까워도 할 수 없어요. 보톡스 했더라도 부르면 아담은 벗어버리고 하늘의 형상 주님의 형상을 입어야 됩니다.

그 형상을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까 34장 29절,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얼굴에 광채가 나지요. 그런데 본인을 몰랐어요. 본인을 몰랐는데 광채가 나왔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설교할 때 얼굴이 천사 같이 됐잖아요. 그런데 그때 셀카봉 없었거든요. 본인도 몰랐어요. 남들이 천사 얼굴이라고 사도행전 7장에 나와 있어요.

모세도 몰랐어요. 남들이 가까이 하기가 겁나는 거예요. 여기에 보면 가까이 하기에 두려워한다고 돼있어요. 이게 뭐냐? 다른 차원인데 영생의 차원, 복의 차원, 천국의 차원이 모세라는 육체적인 물질성과 합체가 되니까 인간의 차원에서는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도대체 저 화장발은? 화장발, 메이크업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예수님께서 변화 산에서 변화 될 때 베드로가 놀랬습니다. 놀래서 여기서 삽시다. 또 정착을 이야기했어요. 지금 정착이 문제가 뭐냐 하면, 본인들이 죄를 짓고 나는 절대로 구원되어서는 안 될 존재인 것이 확인되는 절차가 필요해요. 내가 죄 지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죄 지으면 끝났어요. 끝난 인간을 내 뒤에 다른 분이 오셔서 끝난 것을 쓰레기를 모아서 자기가 주 되심에 올리는 재료로 활용했다는 게 중요하거든요.

죽은 자를 끌어 모아서, “니는 죽었지?” “죽었습니다.” “지옥 가야 되지?” “지옥 가야 됩니다.” “만약에 너를 천국 보낸다면 누구 공로지?” “그거야 주님 공로지요.” “니가 기도했나?” “아닙니다.” “니가 헌금했나?”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지?” “주께서 긍휼히 여겨서 그렇지요.” 바로 긍휼히 여기는 것, 달음박질해도 안 되고 구원 원해도 탈락이고 오직 긍휼히 여겼다는 로마서 9장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절대로 너는 구원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걸 상자 속에 주님의 십자가 속에 묻어버린 거예요. 묻어버리고 그 위에 뭐가 결합된다? 짜고 치는 고스톱, 율법으로 죽여 놓고 예수님의 자기 피를 얹으면 이게 새로운 햄버거 세트에요. 고기 넣고 양배추 얹으면 맛있는 주님의 식사거리가 됩니다. 주께 영광이 돼요. 주께 영광은 찬양한다고 영광이 아니고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고 할 때 주께서 제일 맛있어 해요. 이걸 누가복음에서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느니라.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우리는 죽었다 깨나도 구원될 수 없고, 더 심하게 나가야 돼요. 우리는 죽었다 깨나도 절대로 구원 안 돼야 될 사람입니다. 내가 천국 넣어달라고 해도 넣어주지 말아야 돼요. 그게 하나님다워요. 그런데 그 하나님 속에 다른 면이 있어요. 그게 출애굽기 33장 19절 누가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을 준다는 말이 이게 누구 일입니까? 우리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숙제에요. 자기 과업이고 본인이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는데 있어서 걱정하거나 애쓸 필요가 없는 이유가, 주님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구원해주는 거예요. 그걸 주님의 이름이거든요. 이걸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집에 만약에 강아지를 사올 때는 이름이 없잖아요. 이름을 뽀삐라고 합시다. 뽀삐라는 이름을 부여할 때 그건 주인이 자기 좋아서 이름 붙인 거예요. 그런데 뽀삐 컸다고 말을 하면서 “주인님, 뽀삐는 싫어요. 헤라클레스라고 해주세요.” 그것은 개가 자기 이름을 정한 셈이 되잖아요. 그건 일체 이름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막대기로 세 번이나 때려버립니다. 발람처럼. 이게 어디 주인을 몰라보고. 그걸 징계라 하는데 우리가 징계 받는 이유가, 주의 뜻보다도 자기 야욕과 탐욕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늘 매 맞아요.

그래서 복음 아는 사람은 그걸 익히 알기 때문에 기도해놓고, “주여, 내가 기도했지만 안 될 줄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붙인 이름이 내 소망이 아니라는 뜻에서 주의 소망이 주의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란 뜻에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끝에 예수 이름을 붙이는 것은 헤라클레스 이름이 아니고 뽀삐란 이름 붙인 뽀삐의 운명대로 해주세요. 주께서 정해준 운명대로 가게 하옵소서. 주의 이름의 운명대로 가게 하옵소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의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은 율법대로 해서 지옥과 천국을 만드시고 주의 이름은 어떤 기능이 있다? 지옥 가야 되는데 무슨 요소를 가미합니까? 내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불쌍히 여길 자에게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이름에 합당한 자기 권한이에요. 구약에는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이 분류되잖아요. 이게 요한복음 5장에 보면 그렇게 분류되는 게 아닙니다.

제가 5장 21절 할게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리라” 이렇게 분류됩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이 분류되는데 신약에 요한복음 5장 21절에서 아버지와 아들로 분류된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려주는 것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려낼 수 있단 말이죠. 그런데 아버지 살리는 것과 아들 살리는 것이 명단이 틀리면 어떻게 되느냐? 명단이 다르지 않아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넘겨준 자를 살려준다고 돼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돼요.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정해놓은 천국을 채울 인원수를 아버지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들이 주가 돼야 되니까 아들에게 자기 업무를 인수인계해요. 아들은 아버지한테 인계받은 아버지의 원하는 자를 이제는 아들 차원에서 그 죄 값을 예수님이 값을 대신 치러주시고 죄 없다 해서 그들을 데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은 뭐냐? 구원은 이미 완료된 상황을 성경을 통해서 차후에 우리가 덮치듯이 받아버리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열심히 해서 구원받고자 교회 가서 십일조하고 예배 참석하고 성경공부하고 이런 식으로 꾸역꾸역 열심히 히말라야 산 등정하듯이 그러다가 나쁜 짓해서 2미터 미끄러지고, 그래서 길 가다가 오천 원 적선하니까 3미터 올라가고, 또 올라가다가 남편과 부부 싸움해서 15층에 내려가고, 성가대 일찍 와서 연습하다보니까 한 20층 올라가고. 맨날 이런 식으로 하다가 나중에 덮쳐버리니까 쓸데없는 짓을, 그런 짓을 하면 할수록 불쌍히 여김이 자꾸 퇴색돼버리고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도 닦는 것밖에 안 되는 그런 식의 구원이 돼버리는 거죠.

그 차이를 그 차이가 바로 우리가 느껴야 될 죄의 차이에요. 우리 죄라는 게 다른 게 아니고 구원받고자 나름대로 열심히 애쓰는 그 자체가 그게 바로 애굽적인 사고방식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내가 날 사랑해서 남은 죽든 말든 나만 천당 가겠다는 욕구가 소위 기독교식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했다는 그것이 우리가 마지막 토해내야 할 죄에요.

그래서 로마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내 형제를 위해서라면 제가 저주받아도 괜찮습니다. 무슨 배짱이 이런 배짱이 다 있는지. 주님 사랑에서 떨어져도 괜찮아요. 얼마나 대범해요. 주께서 긍휼히 여기심을 도중에 나쁜 짓한다고 그것이 폐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쓰일 때 마치 끊어진 것처럼 쓰인다면 언제든지 제 한 몸 드리겠다는 마음으로 가는 거예요.

방금 이걸 가지고 ‘효과’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효과로 구원받아요. 그 효과가 우리 속에 도달될 때 그게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 믿는 건 행함이라고 합니다. 왜? 우리가 주체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이 주체가 되어서 효과로 온 믿음은 주체가 우리가 아니고 주님께서 이 땅에 왔던 그 믿음을 우리가 선물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항상 자기 속에는 믿음은 선물입니다, 선물입니다, 계속 내놓게 되지요. 이 말은 제가 행해서 이런 믿음 나올 리가 없다는 뜻이에요. 제가 교회 나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주께서 교회 나오게 하셨습니다. 항상 선물의 선물됨을 증거하게 돼요.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온 겁니다.

그 다음에 이제 어려운 문제 남았는데 주님께서 함께 동행하게 되면 어떤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요. 모두가 하나가 돼요.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다시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산을 내려와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하나가 됩니다. 숫자 1, 하나가 돼요. 그러나 모두가 하나는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하나가 되는데 모두가 하나는 아니에요.

그러면 그 차이가 뭐냐 하면 여기서 삭제 현상이 일어납니다. 천국에 안 갈 사람, 주께서 알아서 삭제하는 거예요. 삭제하게 되면 처음에 나는 이스라엘이라고 까불다가 삭제 당하면 이스라엘입니까, 아닙니까? 그것 빼놓고 이스라엘이라. 그러니까 항상 이스라엘은 하나에요. 눈에 보이는 모두는 결코 하나가 아닙니다.

이 원칙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와요. 거기에 예수님께서 오른손에 교회를 일곱 개를 쥐고 있지요. 이 세상에 교회는 일곱 교회밖에 없어요. 일곱 교회도 사실은 한 교회에요. 일곱 교회인데 요한계시록에서는 한 교회라 하지 않고 한 성전이라고 합니다. 촛대 있지요, 향로 있지요. 전부 다 지역이 일곱이라고 성전은 언약궤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언약궤가 요한계시록에는 하늘에 있거든요. 하늘에 있는 성전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간에 일곱 교회 있는데 일곱 교회가 촛대가 일곱 개에요. 촛대를 옮긴다고 돼있지요. 그러면 숫자가 일곱 개에서 여덟 개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돼요. 아홉 개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그러면 숫자가 여섯 개 됩니까? 안 돼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일곱 교회, 한 군데밖에 없어요. 일곱이 다양성의 끝이에요. 다양성은 하나로 모아지고. 수천 개 있더라도 숫자 헤아리면 일곱 개밖에 없어요. 일곱 교회에 소속돼야 구원받는데 우리 교회는 일곱 교회냐는 질문 자체가 잘못됐습니다. 일곱 교회 안에 포함되게 되면 일곱 교회가 되지 우리 교회는 일곱 교회라고 하면서 우리라는 존재를 들고 나가면 안 됩니다. 왜? 모두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이걸 이해하셔야 돼요. 모두가 하나가 아니니까 모두 속에 개인이 들어있어요. 이런 질문은 안 됩니다. “목사님, 저는 구원되었어요, 안 됐어요?” 이런 질문이 안 돼요. 왜냐? ‘저’라고 하면 개인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개인 구원은 없어요. 구원은 이스라엘 구원이지 개인 구원이 아닙니다. 생명책 이야기 나오면 꼭 이런 질문, 이런 궁금증 있어요. “목사님, 생명책 명단에 제 이름 있습니까, 없습니까?” 진짜 정말 궁금한데 묻기는 그렇고 안 물으려고 하니까 찝찝하고.

그런데 그런 질문을 제가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질문한다고 돈 드는 것 아니거든요. 약간 시간 투자해서 글 쓰면 되잖아요. 글 쓰면 자기만 보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까지 다 보고. 어떤 사람은 그 질문이 부끄럽다고 메일로 보내는데 메일 보내지 말고 공개적으로 하세요. 본인만 궁금한 게 아니고 다 궁금하거든요. 세례식 받고 성만찬 참석하는데 어떤 목사님들은 그렇게 하면 생명책 명단에 있다고 하는데 진짜 명단이 있기는 있어요.

책은 요한계시록에서 앞에 뭐가 붙어요. 내 책도 네 책도 아니고 어린 양의 생명책이기 때문에 생명책의 명단은 어린양의 몸의 지체가 들어가요. 지체는 이렇게 생각하시면 쉬워요. 돌출부. 만약에 손이 있다면 손의 지체를 만들려면 쉬워요. 망치로 때려보세요. 5초 후에 부풀어 오를 거예요. 그게 지체입니다. 지체가 아무리 부풀어 올라도 지체를 따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죠. 지체를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몸을 경유해서 이야기해야 돼요.

질문을 “목사님, 저 생명책에 있어요, 없어요?” 질문하면 안 되고, “주여, 제가 지체인데 예수의 몸에 붙어있거든요. 몸에 붙어있는데 구원받았습니까, 구원 안 받았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돼요. 몸에 붙어있으면 무조건 구원받고 명단에 있어요. 그런데 지체가 따로 떼어서 구원받았느냐고 하면, 저는 그걸 왜 뗍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 개인 구원은 없어요. 이스라엘 구원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떼면 독자적인 존재가 되지 지체가 아니거든요. 누구누구의 지체로서 구원받는 것이지 단독, 내 몸으로 내가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게 상당히 위험한 거예요.

지체가 있을 때 몸을 머리라고 합니다. 머리에서 나온 피가 지체까지 흘러갔기 때문에 지체의 피가 자기 피가 아니에요. 머리에서 나온 생명의 피기 때문에 자기 쪼개서 머리에서 나온 피 있으면 자기 피 아니고 주님의 피니까 구원받은 거고 째보니까 내 피가 흐르면 구원 못 받는 거예요. 지가 열심 낸 것, 경건한 것, 착한 일한 것, 헌금한 것, 기도해서 구원 못 받습니다. 그건 지 피니까. 구원받을 필요 없어요. 성경대로 “니, 어디서 왔노?” 이렇게 합니다. 가지도 못할뿐더러 온다면, “니, 어디서 왔는데?”

그러면 요한계시록대로 답변할게요. 천사가, “니, 어디서 왔노?” 이렇게 물으면, “제가 예수 믿거든요.” 유다지파만 믿는데? 이 문은 유다지파의 후손만 열게 돼있어요. 자동문 아니에요. 유다지파가 눌러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빵집에서 바게트 팔지요. 앞으로 바게트를 보실 때 요한계시록 두루마리로 보시기 바랍니다. 이 바게트에다 선이 있고 파라핀으로 봉인을 해요. 봉인1, 봉인2, 봉인3, 봉인4, 완전히 눈사람 단추 다는 것 같아. 일곱 개 있어요. 이것 하나 뗄 때마다 이게 유다지파, 이 세상을 이기신 분이 여기서 저주가 나와요. 일단 저주가 나오면서 이 세 개 빼놓고 나머진 저주에요. 저주받은 사람 가운데서 유다지파의 자손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에게만 영생이 주어지거든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은 저주와 축복이란 차원이 세상에 있는 차원을 교체하고 대체한다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축복이냐, 저주냐? 그게 중요하지 어느 동네에 어떻게 살아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주께서 심판하면 미국이든 호주든 다 멸망당합니다. 지금 미국이나 호주나 선진국에선 마지막 때 핵폭탄 대비하기 위해서 지하 벙커를 만들어서 3년 동안 버틸 수 있는 양식, 생수, 자기 가족 살겠다고 계 들어요. 돈 모아서 마지막 핵폭탄과 유성이 날아올 때 3년은 버틸 수 있도록 해놓고 혹시 자기가 마련해놓은 비상식량을 노리고 이웃들이 공격할까봐 기관총까지 준비해놓고 오면 쏴 죽이려고.

마지막 날 대피한다고 기독교 교파 가운데 있습니다. 안산홍도 그래요. 안산홍이 그 준비하고 있어요. 돈 빼내서 그것 만드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멸망당하는데 지금 몇 년 안 남았다는 거예요. 안산홍에 돈 보태서 같이 벙커 만들고 식량 준비해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핵폭탄이 몇 개 터지고 그때 온도가 몇 도 올라가고 며칠 동안 흑암이 있고 다 나오니까 그때를 준비해서 우주복 같은 걸 만들고 그 비용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게 만화 같고 이상하다 싶어요? 사람들은 거기에 엄청 빠집니다. 신천지보다 숫자가 더 많을 걸요. 얼마나 납득이 되는지 아세요. “여러분, 살고 싶습니까? 그럼 날 따라하세요.” 이거거든요. “마지막 때에 살고 싶습니까? 주께서는 요한계시록 말씀대로 임합니다. 천년 전 환란 동안 살려면 여러분들이 우리 스케줄대로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 풀어서 핵폭탄이 어디에 떨어지며 감람산에 떨어지게 되면 그때 미국은 이스라엘과 합치게 되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게 될 때 그게 아마겟돈 전쟁이고 그때 안산홍 성도는 벙커에 들어가서 버티게 되면 다시 주께서 재림하실 때 천국왕국에서 왕 노릇하고. 이게 그들에게 납득이 된다니까.

여러분, 다른 데 가면 이런 이야기 안 하지요. 왜? 그들은 지혜를 못 받았기 때문에, 이건 신천지에요. 하지만 신천지에 오게 되면 성령 받은 이만희 선생님이 계셔서 다른 데서 못 푼 것 다 푸니까 돈 달라는 이야기에요. 우리한테 재산 바치면 여러분은 남은 자가 되어 십사만 사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건 여호와증인, 박태선도 다 써먹었던 것이고 기장에 신앙촌 만들었지요. 통일교도 써먹었고. 그걸 국가적으로 써먹은 데가 북한에 김일성이거든요. 종교단체거든요.

목회 크는 방법은 이겁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게 뭐냐? “살려주세요.” 그러면 목회자는, “살려드리겠습니다.” 성경 복음은 뭐라고 합니까? 빨리 죽으세요. 살려고 하니까 자꾸 그런 유혹을 받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뒤집어쓴 아담의 껍데기 지겹지도 않나. 뭘 찝고 늘이고 째고 하지 말고,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러란 말이죠. 사람 자체가 살고자 하니까 우상 신을 섬기게 되고.

우리는 어차피 천국 못 가요. 지옥 가야 됩니다. 가야 되는데 긍휼히 여기는 순간, 긍휼을 받았으니까 잘 살아보자. 이런 것은 건져놓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이니까 그러지 말고 이왕 죽었는데 주께서는 그냥 죽이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쪽으로 계속 하루하루 우리의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겁니다. 진즉 죽어야 되는데 주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살았습니다. 이렇게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지요. 뭐 살고자 해야 짐이 되는데 죽고자 하는데 무슨 짐이 됩니까? “엄마, 오늘도 공부 못했어.” “괜찮아. 공부 좀 못해도 괜찮아. 못한 것도 주께서 은혜 주셔서 못한 거니까 나중에 혹시 공부 잘하면 감사해라.” 이런 식으로. “엄마, 공부 못해도 걱정 안 돼. 원래 주께서 주신 아이큐대로 가는 건데 뭐.” 나중에 은혜 주시면, 공부가 제일 쉬워요 하면서 미친 듯이 공부하는데 그때는 말린다고 공부 그만하면 안 되겠냐. 공부가 제일 쉬워요. 책 들고 다니면 어쩌겠어요. 할 수 없이 더 살아서 판사, 검사 돼서 고생께나 해야지요. 공부 안 했으면 일찍 갈 건데 의사 되고, 반 총장처럼 나이 들어 취직해서 유엔에 취직하면 부모로서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빨리 죽어야 되는데.

사고의 발상을 성경 속으로 집어넣으세요. 거기에 가게 되면 우린 애굽 사람이에요. 우리 힘으로 인간 안 됩니다. 주께서 긍휼을 입혀줄 때 그게 십자가 예수님의 몸짓이에요. 모세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들락날락 시내 산 왔다갔다, 왔다갔다. 돌판 깨고 하는 모든 짓이 너희들은 진즉에 저주받을 인간인데 하나님 앞에 내가 나서서 이야기했더니만 살려준데.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죽였으니까 끝났는데 내가 원하는 자를 살린다 하니까 아버지께서 그래라 해서 그래서 주께서 성령을 주셔서 죽어야 될 죄인의 괴수가 주님의 은혜로 살았다는 그 모습이 이스라엘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어떤 심정이냐? 모세와 같은 심정으로 사시면 되는 겁니다. 주와 발맞추어서 장단 맞추어서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살아계시기에 자기도 살아있다는 감을 가지고. 내가 왜 살아있지? 주께서 부활해서 살아있으니깐 내가 살았구나. 나중에 돌아가시게 되거든 내가 왜 죽지? 주께서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내가 죽는구나.

이렇게 주님의 은혜로 머리카락도 세시고 발걸음도 세시고 주께서 은혜로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 그걸 친히 기르신다고 하거든요. 친히 기르시는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세가 만났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고 그 모세의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공연히 십자가 피 흘린 게 아니기에 그 피가 죽은 우리를 살리는 피인 것을 남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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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74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