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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5. 1. 23) 1강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 강의(2015. 1. 23) 1강

이름 : 서경수(IP:118.35.139.86)

광주 강의(2015. 1. 23) 11-1

마가복음 3장 29-30절에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하신 이 말(29절)이 무슨 뜻인데,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반발(30절)했을까요? 그들이 반발하는 태도를 통해서 주님 말씀하신 뜻을 역으로 추적해 볼 수가 있겠지요.

사람들은 언제 저항하고 반발합니까? 그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부정적으로 지적할 때입니다. 그 때 강하게 반발합니다. ‘네가 나한테 이런 소리하니까 정녕 너는 더러운 귀신이 들렀구나.’라고 예수님께 달려들었지요. 지적을 해도 ‘행동 똑바로 해!’ 이런 것이라면 ‘그래,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부족한 면이 있었으니까 앞으로 조심할 게.’ 이렇게 되는데,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지적할 때는 강력한 반발이 나오겠지요? 이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짓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훼방한다.’고 하셨을 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여기 지우개가 있는데 “지우개를 반듯하게 놓으세요. 지우개를 반듯이 놓지 아니하면 귀신 들린 자입니다.”라고 한다면, 지우개를 반듯하게 놓으면 되잖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기침이 나오면 다른 사람에게 침이 튀지 않게 손으로 입을 막고 기침해라.”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단 말이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못했을 때는 기적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수긍을 할 수 있지만, 아예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기적할 때는 반발할 수밖에 없어요. ‘성령을 훼방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평소에 성령에 대해 별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는데 ‘성령 훼방하면 사함을 얻지 못한다’고 하니 미칠 노릇입니다.

평소에 딸기를 먹어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딸기를 먹을 때는 맛있게 먹어라.’고 하면, ‘나는 딸기 먹은 적도 없다.’ 이렇게 나오지요. 뭔가 일을 했는데 그것에 대해 지적하면 변명하거나 반성할 여지가 있지만 내가 한 적도 없는 것에 대해 지적하면 이건 일방적 공격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고소하는 당시 유대인을 향해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다른 본문에 보면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마12:32).’고 했어요. 이럴 경우에 사람 눈에 누가 보입니까? 인자는 보이지만 성령은 보이지 않아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우리는 당신이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거야.”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나를 지적하는 것은 용서 받을 수 있는데 성령을 훼방하면 용서 받지 못한다.”고 하시니까 사람들 입장에서는 황당한 거예요. 예수님과 사람들이 대화를 하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성령을 개입시키니까 대화가 안 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디어를 하나 제시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하면서 성령을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먼저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22절에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어요.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보는가? 귀신의 권세로 만들어진 박스가 있다고 합시다. 이 박스에 예수님이 포함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사단의 권세를 힘입어 하는 짓이다.’라고 나온 거예요. 그들 생각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면 율법적인 모양새가 나와야 되는 거예요.

율법을 지키면 선이 되겠지요. 그 선을 행하는 혜택으로 병이 낫는 겁니다. 이것이 서기관들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나쁜 짓 안 하시고,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착한 일을 했다는 보상으로 그런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을 보면 율법에 어긋납니다. 서기관들이 보기에.

율법에 저촉되는데 병은 나았어요. 그러면 이것을 합리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귀신의 대장이 자기 졸병을 나가라고 명령해서 나갔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이런 생각을 한 겁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귀신이 능력이 아니야. 하나님의 뜻에 의해 병을 낫게 했어.’ 라고 하겠지요.

이렇게 말하면, 지적한 사람이 마귀에 속했다는 것이 안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야, 저들의 병이 나았는데 너희들이 오해했구나. 성령의 능력으로 병이 나은 거야. 앞으로는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라고 하셨다면 유야무야 상황이 종료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노렸는가 하면, ‘너희들이 귀신에 속했다.’는 것을 고발하는 것까지 내다보면서 귀신을 쫓아 낸 거예요.

6. 25전쟁 때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지요. 그러면 미군은 그들을 다시 북한으로 돌려보내고 휴전하는 것이 미군의 뜻이에요.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번 기회에 백두산까지 공격해서 모두 우리 땅으로 만들자는 주장을 했습니다. 사실은 맥아더 장군도 그런 주장을 했고. 그래서 중공군이 쳐들어 올 때 핵폭탄을 사용하면 인해전술도 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의 뜻은 뭔가 하면 이 참에 끝까지 밀이붙이는 거예요.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그들의 정체를 밝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강의에서 난해한 점이 나옵니다. 무엇이 난해한가 하면, ‘국가의 권력과 성령의 관계’가 언급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유대교를 바탕으로 국가를 만들었잖아요.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이 악마에게 속했다는 것은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이들 뿐만 아니라 역사가 끝날 때까지 이뤄지는 모든 국가가 악마에 의해서 조종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싶은 거예요. 예수께서 처음 이 땅에 태어났을 때 아기 예수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요. 아기니까. 그런데 헤롯왕이 발작을 합니다.

헤롯왕은 국가의 수장으로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데 그것이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한 겁니까? 신비로운 거예요? 아니면 영적인 것입니까? 아니잖아요. 너무나 자연스럽지요. 그런데 자연스럽게 보이는 그것이 마귀에 의한 자연스러움이라고 끝까지 주님이 추궁해 나가시는 거예요.

그럴 때 성령의 활동이 세상은 그냥 두고 영적인 문제만 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우리가 자연스럽다는 것, 당연하다는 것, 국가의 모든 조직, 심지어 축구 경기를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악마의 권한 속의 일인 것을 주께서는 끝까지 추궁하시는 겁니다. “말씀 들으러 가겠습니다.” 이 말은 참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러나 주께서 원하는 것은 “말씀 속에 살고 싶습니다.” 이것입니다.

“말씀 들으러 가겠습니다.”라는 말은, 내 시간 따로 있고 말씀 듣는 시간 따로 있어서 적당히 시간 안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돈도 가지고, 영생도 가지려 했는데 그것이 되었나요? 안 되지요. 돈을 버리고 예수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돈을 선택하는 순간 예수님과는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는 것이 들통이 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것이 단순히 치료현상에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셨지만 서기관들은 누가 봐도 건강한 정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그 사람도 마귀 들렸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성경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설계 도면입니다.

대구에서 광주로 올 때 처음 오는 사람은 지도를 보겠지요. 대구 사람이 지도 없이도 살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지도 없어도 살 수 있어요. 그런데 광주로 여행을 간다면 지도가 없어도 되지만 지도를 한 번 보고 오는 것도 괜찮지요. 그러면 지도가 다급하고 시급한 문제입니까? 그건 아니죠. 지도 없어도 지도에 그려져 있는 현실은 내가 확보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도면, 예수님의 계획 없이는 우리가 살아도 현실 속에 산 것이 아니고 가짜 현실 속에 사는 것입니다. 저는 현실을 말할 때 이런 예를 듭니다. 지금까지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확실하게 현실을 느낀 것이 뭔가 하면, 아이가 태어난 후에 밤에 울어서 내가 잠을 못 이룰 때, 이것은 기도와 말씀으로도 안 되는 진짜 현실 그 자체에요.

이것은 나의 윤리, 도덕적 삶과 아무 관계가 없어요. 내가 선을 행했다고 아이 울음이 그칩니까? 아니죠. 나는 잠이 와요. 그런데 아이가 밤새 울어요. 이건 생생한 현실이에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가 하면, 이 세상에서 내가 ‘현실은 이것이다.’ 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 내가 말하는 그것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이가 아파도 재미나는 드라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를 본다고 이가 아픈 것이 사라집니까? 여전히 아프지요. 치과에 가서 문제를 해결해야겠지요. 이게 팩트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현실을 안다는 말을 할 자격이 못되고 현실이 시키는 대로, 현실이 부여하는 대로, 현실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는 현실의 노예가 되어 살아갈 뿐입니다.

‘어머니 건강 회복하셔야지요.’ 라고 말한다고 해서 아픈 어머니가 건강해 집니까? 아닙니다. 왜 자꾸 현실을 쥐려고 합니까? 현실이 우리를 쥐고 있는데 우리는 자기 현실을 쥐고 요리하려고 덤벼요. 현실을 당할 수 없는 열등의식 때문인가?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억울함? 여기에 대한 반발?

안산에서 자기 가족을 죽인 그 사람도 세상에 대한 반발심 때문입니다. 왜 세상에 반발하지요?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왜 내가 생각하는 현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나는 따로 내 현실을 소유하고 있는데 세상 현실은 내가 소유한 현실과 왜 다른지? 욥이 이런 일을 경험했지요. “하나님이여,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욥의 이런 소리를 듣고 같잖아서 말이 안 나왔을 것 같아요. “왜 제 몸이 아픕니까?”라는 그 반응에 대해 하나님은 뭐라고 하겠어요? “어휴, 기가 찬다.” 아마 이랬을 것 같아요. 답변할 말이 없지요. 여기 딸기가 있는데, 딸기는 말을 못하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딸기 하나가 입이 생겨 “나는 왜 바나나가 아니고 딸기입니까?”라고 했다면, 제가 딸기에게 뭐라고 답해야 합니까?

이건 자기가 현실을 조작해 낸 거잖아요. “나는 바나나가 되고 싶어.”라는 일방적인 현실관을 조작해 낸 것이기에, 주님이 보시기에는 기가 찬 일입니다. “당신은 귀신에 들려 병을 고쳤지요?”라고 말하는 자들을 보면서 주님이 얼마나 기가 차겠습니까?

왜 인간이 마귀에 들려 이런 소리를 하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보면서 자연에 폭력성이 있는 것을 압니다. 폭력성이란, 가뭄, 태풍, 홍수, 지진, 질병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을 다루기 위해서 법칙을 만들어 내요. 법칙은 반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연을 다뤄야 돼요. 안 다루면 자연의 폭력에 당하기만 하잖아요. 7월에 장마가 오는데 아무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심각한 피해를 입습니다. 그래서 법칙을 찾습니다. 비가 언제 쯤 오는지 파악해서 그 때에 맞춰 대비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어요. 이게 법(법칙)이에요. 법은 자연에서 추출해 냅니다.

어떤 아이가 식사를 하면서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집어 먹어요. 그러면 부모는 아이를 꾸중하면서 숟가락으로 먹도록 강요하지요. 그래서 말을 안 들으면 회초리로 때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부모의 눈치를 보면서 어설프지만 숟가락을 사용합니다. 아이의 몸은 손으로 밥을 먹는 것의 반복입니다. 자연스럽잖아요. 그것을 바꾸기 위해 부모가 회초리로 때리니까 숟가락을 사용합니다. 그럼 숟가락으로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까, 법입니까? 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연 안에는 폭력성이 있고, 폭력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법을 만들고, 이 법을 어길 경우에는 효과적으로 법을 집행하기 위해서 국가가 필요한 거예요. 마귀의 나라가 왜 합리적인 법치국가가 된 것인지 이제 이해하시겠지요? 국가를 만들고 법을 만들어서 자연의 폭력성에 대해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하니까 잘 살지요?

그런데 그 중 어떤 사람이 피를 토한다든지 문둥병에 걸렸다든지 하면 이런 사람은 잘 살고 있는 공동체에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서 이들을 공동체에서 퇴출시키면서 법을 근거로 퇴출시킵니다. ‘미리암이 모세에게 대들다가 문둥병에 걸렸고, 그 문둥병은 저주의 상징이다.’라고 하면서 퇴출을 시킵니다.

즉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저주 받은 사람이고, 저주 받은 사람은 공동체에서 추방함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으로 확정되는 사례가 돼요. 어떻습니까?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마귀에 들린 것을 알겠어요? 모르지요. 자신들의 생각이 너무나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어서 잘 살고 있는데요.

서기관은 거품을 물고 떨고 있지 않습니다. 귀신 안 들렸어요. 이성이 아주 현명해서 냉철한 판단을 합니다. 이 사람이 구원 받습니까? 아니지요. 국가가 있으면 지도자, 엘리트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 그래야 명령 체계가 섭니다. 의사, 판사는 사회의 엘리트들입니다. 이들의 판단은 남들보다 더 현명하고 똑똑해요.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판사 역할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했어요. 병 고치는 것과 귀신 쫓아내는 것은 면허를 받은 사람들이 그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면허도 없이 그 일을 해서 제지를 당했지요. 여하간 그 당시에도 그들 나름대로의 법과 질서 속에서 잘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도 나름대로의 규칙으로 잘 사회가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현실 그 자체에요.

그런데 이렇게 정상적으로 잘 살고 있는 자들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귀신들렸다’고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법 바깥에 있는 존재가 된 거예요. 그래서 누구 죽여도 문책하지 않는 대상입니다. ‘너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야.’라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인물이 있지요. 북한을 찬양하는 이석기, 황선 이런 사람들.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비난과 욕을 해도 누구도 욕하는 사람을 탓하지 않습니다. 또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문제를 일으키면 추방해 버리지요. ‘네 나라에 가서 살아라.’ 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은 ‘당신은 우리나라 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당시 사람들이 “당신은 귀신들렸다.”는 것은, ‘우리가 당신을 죽인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한 내용을 요약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냈을 때 그들은 조직적으로 예수님을 대항했습니다. 조직이란 국가 조직이고, 국가 조직이 생겨난 것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생겼다고 했지요. 자연의 폭력성에 대해 사람들이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자연의 반복성을 통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은 겁니다. 그리고 반복성을 통해서 법이 만들어집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지요. 만약 아이를 돌보지 않고 방치해버리면 짐승처럼 살겠지요? 그래서 어린 아이를 규제하고 규격에 맞는 삶으로 교육해서 공동체 내에서 법을 지키며 살도록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 나름대로의 조직체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조직에 대해서 사람들이 호응을 합니까? 아니지요. 거부했어요. 왜냐? 자기들 끼리 잘 살고 있잖아요. 병자, 강도, 세리, 창기는 몰라도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이 필요 없어요. 자기는 정상적이니까. 아무 문제없는 사람이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성령이 오면 믿는데, 그것 말고 보통 사람이 예수를 믿으려는 것은 특이한 현상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니고데모인데, 이 사람은 예수님을 안 믿어도 되는데 괜히 따라다녀서 자기편 사람들에게 욕을 먹지요. 그래서 남들이 안 보는 밤에 몰래 와요. 그렇다고 해서 니고데모가 예수님 편에 전적으로 섰습니까? 그건 아니지요. 니고데모는 어중간한 태도를 보여요.

이건 니고데모뿐만 아니고 12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 자신은 예수님 편에 섰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었어요. 예수님 품에 있을 때는 바깥의 권세가 미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 정도로 예수님은 든든했습니다. 병을 고치고, 물 위를 걷고, 수많은 기적을 행했기에 예수님 품에 있는 자신들을 예수님이 지켜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예수님이 맥없이 체포되는 순간 제자들의 믿음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체포하는 사람이 셉니까, 예수님이 셉니까? 체포하는 사람이 세지요. 그러면 제자들은 살기 위해서 어느 쪽에 붙여야 합니까? 센 쪽에 붙어야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잖아요. 이게 오늘날 우리 모습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는 예수님 때문에 욕을 먹고 죽는다 할지라도 세상 편에 서지 않는 자라고 합니다.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나왔는지 다 알잖아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와서는 ‘죽도록 충성하라’고 해요. 이 말은, ‘너를 죽인도 할지라도 배신하지 말라.’는 것이고, 이것이 성도입니다.

계시록 20장에 ‘목 베인 영혼’들이 주님과 함께 왕노릇 한다고 나옵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 마세요. 지키려하는 순간 우리는 실패합니다. 절대 우리가 못 지킵니다. 제가 성령 이야기를 아직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국가를 거론했습니다. 왜냐? 이미 권세에 속한 사람은 그 권세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 권세에 속한 사람들이 아무 일 없이 잘 살아요. 예수님 안 오셔도 잘 살아요. 지금 예수 모르는 이슬람 나라가 잘 살고 있습니다. 기름이 펑펑 쏟아져서 잘 삽니다. 중동 지역에 앞으로 지을 빌딩 높이가 1,000m 된다고 합니다. 여하간 잘 살아요. 이게 현실입니다. 높고 화려한 빌딩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고급 호텔에서 숙박하는 것이 소원이고,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요? 믿을 이유가 없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자를 거부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부하면 용서받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인간의 한계를 일러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온다는 것은 ‘너 스스로 세상 권세에서 빠져나와 날 믿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너희들은 아무리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해도 너의 자리에서 도저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인자되신 예수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닦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배후의 권세와 싸웁니다. 그래서 ‘인자를 비방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비방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신 겁니다.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은 예수님 하신 말씀을 못 알아들어서 대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소에 본인들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니까 그들은 약이 올라서 ‘성령도 우리가 알아서 잘 순종할 수 있다’고 허풍을 떤 거예요.

아직은 본문의 핵심부분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열린 문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것이 카프카의 ‘법 앞에서’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열린 문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카프카가 지적한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문을 열 수 있는 문으로만 들어가요. 사람이 자기 힘으로 문을 열면서 그것을 문이라고 인식해요.

자기가 열지 않으면 인간은 문이 열렸다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아무 한 일 없이 천국에 갔다면 인간은 그 천국에서 버티지 못하고 벗어나고 싶어 해요. 왜? 그곳에서는 무능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천국에 가면 자기가 바보가 되니까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남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막강한 경쟁률을 뚫고 대학에 들어갔고, 회사에 입사했는데, 나는 아무 한 일 없이 들어갔다면, 그 회사는 자기 회사가 아닙니다. 그곳에서는 자기 정체성을 구성할 수가 없어요. 자기가 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의 문은 본인이 열어야 돼요.

카프카는 이것을 ‘문’이라고 하면서 ‘법’으로 고칩니다. 인간의 법은 자기가 지킬 수 있을 경우에만 법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함을 얻지 못한다.”고 할 때, 성령은 인자가 아니에요. 따라서 이것은 인간들의 무능함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령의 시대가 오면 모든 인간은 자기 구원에 대해서 무능자가 되는 거예요.

아무 한 것도 없는데 천국에 간다는 소리가 처음 들을 때는 기분 좋을 수 있어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런 소리가 반갑지 않습니다. 인간은 평소 습관을 마귀가 얼마나 질을 잘 들여놓았는지, 선악과 따먹으라고 누가 권했습니까? 마귀지요.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했어요. 이 사단의 유혹에 인간이 넘어갔어요. 즉 사기를 당한 거지요. 성경에 보면 원래 마귀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면서도 신이 되어야만 한다는 찢어짐이 있어요. 아기가 울어 잠을 이룰 수 없어서 짜증이 나고, 이가 아파 신경질이 나는데, 이처럼 현실도 제 마음대로 못하는 신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인간은 동물과는 달라요. 동물은 자연에 순응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순응하는 것이 아니고 대듭니다. 누가 미친 거예요? 바로 인간들이 미친 거예요.

그 미친 것 중에서 주님께서 하나 건져냈는데 그것도 모르고 귀신 들린 자들은 자기가 정상이라고 여깁니다. 감기 환자는 낫게 했지만 자기는 암에 걸려 못 고친다고 버티는 것과 같아요. 주께서 병은 고쳤는데 자기는 암에 걸린 것도 모르고 건강하다고 버팁니다. 아마 암 환자 중에 이런 사람이 많을 거예요.

본인이 고집을 부리면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요. 몸이 아플 때 아프다고 하고 순순히 병원에 가야됩니다. 괜히 오기를 부리면서 버티면 가족들이 힘들어요. 내 존재 때문에 다른 존재를 힘들게 하면 그것은 가해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병은 자랑하라고 하잖아요. 그게 좋아요.

29절에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을 본격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인간은 자연을 투영해서 자기 살 궁리를 해요. 그것이 법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연을 뚫고 들어옵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자연에 속합니까, 하나님께 속합니까? 이건 하나님께 속한 거지요. 자연은 인간에게 준 거예요.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인간에게 준 거니까 이것저것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에덴동산에서 추방하고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했어요. 이 말은 생명나무는 인간이 다스릴 대상이 아니란 뜻입니다. 생명나무, 선악과에서 물이 나옵니다. 이것이 원류입니다. 출원지. 생명나무의 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뚫고 들어올 때는 ‘죄냐, 의냐?’를 물어요.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했는데, ‘사하심’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용서하심이죠. 용서하고, 말고를 하나님 쪽에서 이야기한다는 말은 ‘네가 건강하냐, 귀신 들렸냐?’ 이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너는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묻지요.

하나님께서 자연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을 보면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본문의 근본적인 말씀은 ‘지금 잘 살고 있으니까 문제없다.’는 인간들에 대해서 ‘그 생각이 하나님 차원에서 죄인지 의인지를 생각해 봤냐?’고 묻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성령은 어느 쪽입니까?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잘 살게 됩니까? 부자 되는 거예요? 행복하고 건강해 집니까? 아니지요. 성령이 오면 최초로 죄와 의에 대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십자가와 죄에 대해 언급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2,000년 동안 성경의 내용을 언급했습니다. 칼 바르트 이전의 신학자들이 제일 중요한 것을 빠뜨렸어요. 하나님의 언약을 빠뜨렸습니다. 교회사에도 언약이 나오긴 하는데 그 언약은 ‘내가 어떻게 이 땅에서 잘 사느냐?’ 하는 것처럼, 죽어서 필요한 것이 언약이라고 본 겁니다. 그래서 구약은 ‘행위 언약’이고, 신약은 ‘은혜 언약’이라고 해요.

그런데 칼 바르트는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내가 살기 위해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 자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 이전 신학자들의 주장과 많이 드리지요? 칼빈과 다르지요? 칼빈은 교회를 어떻게 잘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가? 이것을 위해서 성경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바르트는 그것이 바로 칼빈의 잘못이라고 지적했어요.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가 있다는 겁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따로 교회가 필요 없습니다. 교회는 필요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단체가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교회가 필요 있다, 없다는 말을 할 입장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칼 바르트가 미흡한 점은 언약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겁니다. 다만 바르트는 언약이 곧 예수님이라고 본 거예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언약을 위하여 예수님이 계신 거예요.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언약을 위한 것입니다. 언약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예수님 보다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관계에서 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상은 예수님의 주 되심과 관련해서 갖춰지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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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7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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