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150206
어디로 150206
이름 : 이근호(IP:119.18.93.36)
한윤범(IP:14.♡.134.30)
15-02-10 11:35
20150206a 울산강의-출애굽기 33장 : 어디로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33장, 상당히 난해한 대목인데요. 어떤 점에서 난해한 대목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놓고는 전부를 안 보여줘요. 왜 전부를 안 보여줬을까? 그런 점이 난해하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렀을 때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다고 불러준 줄로 여겼는데 막상 불러놓고는 너는 내 얼굴을 봐서는 안 된다. 나는 너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나왔단 말이죠. 그러니까 불러놓고 빼시는 거예요. 보류시키는 게 있단 말이죠. 그러면 부르기는 왜 불렀을까요? 다 보여줄 것도 아니면서.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서 있어. 내가 지나갈 테니까. 못 보게 만들었고 부르기는 불렀고.
이것이 전체 성경에서 어떤 중요한 모티브, 어떤 주제를 제공하는데 그 주제가 뭐냐 하면, 정착이냐, 떠남이냐? 보통 교회에서 구원이라 함은 죽어서 천국 가는 걸 구원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출애굽기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건 뭐냐 하면, 정착된 상태에서 죽으면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자꾸 떠나야 된다는 겁니다. 현재 자리에서 떠나는 게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출애굽기 33장 12절부터 시작할 텐데 모세가 하는 말이, “하나님, 이 백성을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제가 인도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여기서 정리합시다. 구원이란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다. 있는 자리에 대해서 연연하지 말고 미련 두지 말라는 겁니다. 구원이 되면 될 수록 구원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어떤 감을 느껴야 되느냐 하면, “우리는 여기서 정착해야 될 그런 존재가 아니구나. 빨리 벗어나야 되는구나.” 그렇게 느껴져야 돼요.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가겠지.” 그런 식이 아니고 자꾸 이동시키는 겁니다.
모세도 마찬가지고 요즘 우리도 마찬가지고 간다면 어디로 갈 건지, 도대체 가는 방향을 누가 나서서 우리에게 이야기할 것인지, 그게 굉장히 난감해요. 우리 보고 찾아가라 한다면 하늘로 가는 길을 압니까? 버스 몇 번 타야 돼요? 5002번? 어떤 버스 타면 천국 갑니까?
모세가 난감하기 짝이 없는 것이 어떤 길을 알려주면 가겠는데 그 길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요. 모세와 같이 애굽에서 나오기는 나왔는데 그 집단 가운데서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시내 산에서 만났기 때문에 시내 산에 올라가면 되잖아요.” 오지 말래요, 또. 여기 시내 산이 있는데 여기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데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든요. 그러면 어디로 갈 것이냐 하면 뻔하잖아요. 시내 산에 올라가면 되잖아요. 그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시내 산에 계신 게 아니고 너희들이 모르는 곳에 내가 내려와서 합류해서 미지의 곳으로 간다는 겁니다. 적어볼게요. 미지의 곳으로 간다. 아까 떠난다고 했지요. 미지의 곳으로 떠난다. 이걸 두 자로 하면, 이게 바로 ‘구원’이지요. 정리해보면 구원이란 내가 미리 예상이 안 되는 곳으로 우리는 가야 된다는 운명, 그게 바로 성도의 팔자입니다. 성도의 운명이에요.
그런데 요즘 교회나 요즘 사람들의 구원의 개념은 성경에 나와 있는 출애굽 개념이 아니고, 이렇게 살다가 단독주택이나 아파트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가겠지. 이런 개념이잖아요. 죽을 때까지 울산 살다가 안 그러면 청도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가겠지. 그런 개념이지 뭔가 떠난다는 개념은 사실은 잘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는 방향을 알고 있을 때 떠난다는 게 성립되는데 갈 방향도 모르고 동서남북 어느 쪽도 모르는데 어디로 갈까요? 유럽으로 갈까요? 거기 가면 천국입니까?
그래서 출애굽기를 보면서 우리가 안일하게 생각하는 구원 개념이 전혀 먹히지를 않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곳에 그곳으로 조금씩, 조금씩 이동해가는 과정 모습이 구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나오지요. 아브라함이 어떻게 갔습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지요. 지금 교인들은 갈 바를 너무 알아서 문제에요. 가기는 천국 가지요. 그 천국 아니거든요. 그건 우리가 이미 아는 곳이잖아요. 아는 곳은 우리가 갈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곳이어야 돼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지상에서 이 땅에 살면서 구축된 개념이기 때문에 거의 백 프로 가짜지요. 거의가 아니고 완전히 가짜입니다. 여기 살다가 딴 데 살겠지. 이건 가짜지요. 천국이 그런 곳이 아닙니다. 이곳과 다른 곳일 거야. 그래서 뭐? 의미 없어요. 이곳과 다른 곳이면 다 천국입니까? 예수 믿고 천국 간다고 하는데 천국이 어떻게 생겼으며 천국이 어디 있으면 그것이 어느 방향인지 어디 있는지 물으면 사람들은 난감해요.
왜 난감하냐 하면,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개입해서 뭔가 조금씩 움직임이 있는데 오늘날 천국은 늙어 죽으면 천당 가겠지. 자기 자체의 움직임의 낌새가 없어요. 여기서 돈만 벌고 얘들 시집, 장가보내고, 늙어 죽으면 가겠지. 자기 자신은 꿈쩍도 안 해. 자기한테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데.
요즘 용어로 제가 이걸 정리해보겠습니다. 천국은 뭐냐 하면, 차원이 다르다. 이게 일치 되게 맞는 건 아니지만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참 마지못해서 표현하는 겁니다. 차원이 다르다는 겁니다. 차원이 다른 예를 들어볼게요. 개미가 있는데 개미의 감옥은 평지에 동그라미를 그으면 돼요. 2차원이기 때문에. 기어가기 때문에. 여기서 “돌아가.” 돌아가요. 이리로 가면, “돌아가라니까. 네 자리에.”
인간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다리가 있어서 경계선을 넘으면 되지요. 우리는 2차원이 아니고 3차원이기 때문에. 선을 그어서 선을 넘어설 여지가 있잖아요. 2차원에 있는 어떤 존재는 선이 전부지만 2차원에 사는 3차원은 그게 무슨 감옥이야. 금 넘어가면 나는 구원이죠?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만약에 우리가 있는 3차원이 있거든요. 3차원은 시간, 공간, 가로, 세로, 높이, 3차원이잖아요. x, y 좌표로 표시하는데 만약에 천국이 4차원내지 5차원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개미 꼴 나지요. 개미는 2차원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으면 저 선을 넘어갈 거야. 개미가 생각하는 천국이란 선 바깥의 세계를 천국이라 생각하는 거예요. 그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본인들이 기껏 2차원밖에 안 되기 때문에 저 선만 넘어가면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개미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 이야기해봅시다. 우리가 천국 간다면 3차원만 넘어간다면 천국 일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삼층천 바라본 것처럼. 3차원 넘어가면 4차원 되고 5차원 되거든요. 사실은 4차원은 물리학에서 이야기하고 있지요. 가로, 세로, 높이에다 시간을 집어넣습니다. 제가 언제 가야산 수련회에서 식빵으로 이야기했는데 식빵을 칼로 슬라이스, 자르는 거예요. 잘라진 면마다 식빵 조각 하나씩 생기겠지요.
이게 뭐냐 하면, 지금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미국 가수가 죽었지요. 그런데 물리학에서는 식빵 조각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는 죽었어요. 그런데 옆 동네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기타치고 공연하고 있다니까. 하와이 공연. 이게 4차원 세계에요. 4차원 세계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식빵 안에 또는 한 건물 안에 같이 있는 우주가 4차원 세계가 되는 겁니다. 천국이 4차원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차원의 다름을 예를 들어서 하는 겁니다. 천국이 4차원이라 하면, 인간의 이성으론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물리학으로 설명해선 안 돼요. 지금 쉬운 예를 드는 거예요.
그러면 천국은 4차원이냐? 4차원도 안 되는 게 뭐냐 하면, 방금 4차원 설명했잖아요. 이건 현대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미국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란 가수가 이미 죽었지만 저쪽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기 때문에 이쪽은 현재 무대지만 저쪽에선 과거 무대기 때문에 지금 엘비스 프레슬리가 구레나룻하고 기타치고 있다니까. 그리고 저쪽 이순신 장군이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다고 그 이야기하고 있다니까.
이걸 다중우주론이라 합니다. 시간에 따라서 우주가 슬라이스가 되어 여러 우주가 겹치고 있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증명하느냐 하면, 높은데 중력이 희박한 데서 비행기 타면 시간이 늦게 가요. 지구를 만약에 수조 회 돌면 10분 늦어요. 거기다가 우주를 약간 넓게 돌면 한두 시간 늦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태양에서 지구에 빛이 오는데 8분 걸립니다. 그런데 2분 전에 태양이 폭발해서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러면 지구에 있는 사람에게 태양은 아직 있어요. 6분 동안 있어요. 빛이 오는 시간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시간이 절대가 아니고 빛의 속도가 절대기 때문에 나머지 세월, 시간, 현재, 미래 등 모든 시간 요소가 상대적이 되어야 우주가 모든 게 설명이 맞아 떨어지는 거예요. 실제로 우주인의 시계는 늦게 가거든요. 왜 늦게 가는가? 빛이 휘어지거든요. 왜 휘어지는가? 이 세상이 4차원 세계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3차원은 그걸 전혀 못 느끼죠.
그래서 <인터스텔라>에 보면 책장 너머에 5차원 세계가 있잖아요. 주인공이 책장 밀려고 내가 지금 보고 있다는 것,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고, 네가 커서 나는 죽는 게 아니고 다른 차원에서 살아있고. 그래서 현대물리학에서는 죽음은 없고 모든 우주는 너, 나 없이 하나다. 전부 안 죽고 살아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17장에서 변화산에서 모세 나타나고 예수님 나타나고 또 엘리야 나타나지요. 그런데 우리가 알기에 모세, 아브라함, 엘리야는 이미 돌아가신 분으로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 그 말도 어려워요. 주께서 살려준다는 말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있다면 주님에 의해서 예약된 사람,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은 주님과의 관계성, 관련성 때문에 그들은 죽으려야 죽을 수 없고 예수 안에서 살아있게 되는 겁니다. 그걸 언약 안에서 살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회당장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죽은 것이 아니고 내 틈에서 자고 있는 거예요.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가 죽었을 때에 오빠가 죽은 게 아니고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아있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까 마르다는 위로의 빈말이라도 그렇지. 위로의 빈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오빠 무덤에 가서 “야, 나와. 네 여동생 때문에 안 되겠다. 빨리 나와.” 얼마나 빨리 나왔는데 칭칭 감고 풀 새도 없이 묶여져 나와.
죽음이란 것은 3차원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지 차원이 다른 곳에서는 죽음이 없어요. 모든 자가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심지어 바다도 죽은 자를 내주고 강도 산도. 어떤 경우에도 백상아리에 물려서 조각 조각나도 그건 사건에 안에 포함되기 때문에 죽음이 없단 말이죠. 성경에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목숨 끊어지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저주, 심판 받는 걸 죽음이라고 해요. 네가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것은 숨이 끊어진다는 말이 아니고 새로운 차원, 저주가 있는 차원에 들어가는 겁니다.
정리해봅시다.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1차원, 2차원, 3차원, 4차원, 플러스 1하면 5차원 되잖아요. 평행우주론에서는 11차원을 이야기해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1234567 계속 나오는 차원이 아니고 왜냐하면 6차원 돼 봐야 7차원 여지가 있잖아요. 그러면 어디까지가 천국인지 감이 안 잡히는 거예요. 천국은 1234 숫자로 점점 늘어가는 게 아니고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저주의 세계냐, 영생의 축복의 세계냐? 그걸로 차원은 끝나요.
그래서 이 땅에 울산바닥에 살면서 예수 믿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는 말은, 저주라는 어항 속에, 새장 속에, 저주라는 아우라 속에 이미 포함이 되어서 저주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한 사람입니다. 마치 야곱과 에서의 차이처럼. 야곱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받기 위해서 이 땅에 출생해야 되고, 에서는 그가 태어나서 무슨 착한 일이나 나쁜 일이나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된 혜택을 입는 차원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출애굽은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이 다른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나그네,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가는 나그네의 길을 가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게 출애굽이에요. 저주냐, 축복이냐? 하는 차원을 출애굽에서는 편평한 어떤 지역을 택해서 애굽에서 가나안 땅이라는 지리적인 요건으로 저주와 축복을 설명해주는 겁니다.
이번에 수련회 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해안선 가져오라고 하면 가져올 수 있습니까? 해안선 가져오려면 골치 아파요. 모래 떠와야 되지요 철썩이는 파도 가져와야 되지요. 둘이 잘 맞잡아야 돼요. 그런데 해안선 그려놓은 지도는 가져오지요. 지도는 그림이니까. 그런데 그 지도가 진짜 해안선 맞아요? 아니지요. 지도를 아무리 봐도 파도소리 안 들리지요. 바로 출애굽은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일종에 지도에요. 그 지도를 그리는 작업에 이 사람들은 나그네 인생을 살면서 어디서 나오기는 나왔는데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그래서 “하나님이여,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야 됩니까?” 맨날 이러한 연극무대를 펼치면서 다른 차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출애굽기 있는 겁니다.
지금 제 나름대로 설명했다고 설명했는데 저도 영 자신이 없어요. 내용이 자신이 없는 게 아니고 설명하는데 자신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연극배우 역할을 할 뿐이에요. 울산에 갔다가 사우디 갔다가 중국 갔다가 서울 갔다가 그건 뭐냐? 하나에 역할이에요. 어디 가나 울산 가나 사우디 가나 스위스 가나 사는 건 똑같다고 사모님이 이야기해요. 맞아요. 어디 가나 사는 건 똑같아요. 정착이에요. 이 나이에 이민 가봐야 지도상 위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는 그런 입장이 아니라니까요. “주여, 우리가 애굽 살았는데 딴 데 삽시다.” 그 입장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그 입장을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어디 사는지, 어디가 살기 좋은지를 말하는 게 아니고 모세는, “주여, 도대체 우리를 어디로 몰고 가십니까?” 지금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도 모르고 살기 힘드니 애굽으로 돌아가서 살자는 거예요. 광야 생활이 힘드니까. 모세는, “이 사람들아. 그게 아니라 어디 가서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어디로 몰아가느냐?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몰아세우는 동네가 있을 거야.” 그 동네가 어떤 동네인지 그리로 가자는 거죠.
그 동네는 가나안 땅도 아니고 열 족속 있는 땅도 아니에요. 그 땅은 약속의 땅이라니까요. 약속의 땅과 가나안 땅은 달라요. 가나안 땅은 가봤자 또 연극무대에요. 여기 사나 미국 이민 가나 캐나다 이민 가나 세끼 먹는 건 똑같아요.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 어디인지,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서 살라고 하는 그곳이 어디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곳이 어디입니까?” 질문 잘못 됐지요. 그곳이 어디냐고 질문하는 게 아니고 출애굽은, “네가 어떤 인간으로 달라져야 갈 수 있다.” 그걸 이야기합니다. 네가 어느 곳이라고 하면 갈 수 있는 줄 아느냐?
아까 시내 산 이야기해봅시다. 시내 산에 하나님이 계셨고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지요. 모세가 시내 산에 네 번 올라갑니다. 출애굽기 19장에 여호수아 데리고 올라가는 거예요. 19장 3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이게 첫 번째 올라가는 거예요. 물론 모세도 올라가고 나중에 아론도 올라가지만 끝까지 올라가지는 않았고요.
두 번째 올라가는 것이 바로 십계명 만들기 위해서 올라갑니다. 24장 1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 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이게 두 번째 올라가는 겁니다.
세 번째 올라가는 게 32장 30절에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이게 세 번째 올라가는 겁니다. 네 번째 올라가는 게 34장 2절에 보면, “아침 전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이게 네 번째 올라가는 거예요.
올라갈 때마다 취지가 다 달라요. 한 번 올라가고 내려올 때마다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지요. 올라갈 때마다 받는 과정을 이으면 그게 구원이에요. 모세가 괜히 어지럽게 왔다갔다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괜히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아닙니다.
첫 번째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올리지요.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을 알려줍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이렇게 시작해서 십계명 이야기하지요. 처음에서 다 외웁니다. 모세가 머리 좋은 게 아니고 시내 산에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기억하도록 조치를 하시는 모양이에요. 그 많은 계명을 모세가 다 외워서 내려옵니다. 손에 돌판 없어요. 외워서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올라갈 때 24장 2절에 그때는 하나님께서 돌판 만들라고 했어요. 처음에 올라갈 때 돌판 만들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지 올라갔다, 내려갔다. 처음에는 말씀 이야기하고 두 번째에 돌판 만들게 해요. 왜 돌판을 만드느냐 하면, 그 뒤에 돌판에 넣을 장소가 새롭게 생성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계명을 줘요. 십계명 중심으로 계명을 줍니다. 이것 지켜라.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강의 잘 들었는지 테스트 할게요. 123456, 11차원은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차원은 1차원, 2차원, 3차원을 말하는 게 아니고 차원은 차원인데 어떤 차원이라고 했습니까? 저주 차원과 복 차원이 다르지요. 십계명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이 말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고 못 지키는 자는 저주받지요.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두 개로 분리된 천국이냐, 지옥이냐? 가름하는 그 기준을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고 나는 착하게 살았으니까 천국 갈걸? 너는 나쁘게 살았으니까 지옥 간다. 이게 아니라 그 기준마저도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첫 번째 부를 때 이미 하나님의 일방적인 확정된 기준을 모세에게 주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면 축복 받고 율법을 못 지키면 저주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애굽에 사는 건 연극무대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제가 압축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반복, 반복 들어갑니다. 반복해도 모르는데 계속 반복해야지요.
이 땅은 연극무대란 말이죠. 연극무대에는 뭐가 필요하냐 하면, 바로 정착이거든요. 처음에 강의할 때 정착이냐, 떠남이냐 했지요. 정착에서 떠나는 데 이스라엘은 오해하기를 여기서 살다가 딴 데 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거는 똑같은 정착의 차원이에요. 왜냐하면 여기서 살다가 딴 데 산다는 것은 개미 이야기 또 하겠습니다. 나 여기서 살다가 나중에 죽으면 천국 가서 산다. 내가 여기서 사는 것처럼 오늘밤 죽으면 낙원 가서 산다. 이 산다와 이쪽 산다를 똑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거예요. 누가? 인간들이. 그건 땡 탈락이라니까요. 그런 건 없어요. 차원이 다르면 산다는 개념도 달라져요.
여기서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래 사는, 길게 사는 걸 영생이라 하거든요. 그런데 이쪽 차원에서 영생은 길게 사는 게 영생이 아닙니다. 길게 살 것 같으면 지옥 가서도 길게 살아요. 지옥에서 한 십 년 고생하다 죽어 없어지면 좋겠는데 안 죽어요. 지옥 간 사람들의 희망이 죽는 게 희망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런데 그 희망마저 주께서 허락지 않습니다. 안 죽어요. 살아있을 동안에 계속 저주받아야 돼요. 왜냐하면 그 일이 그 차원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천국 간 사람은 지겹다고 죽어달라고 해도 안 죽이십니다. 천국 가서 영원히 즐겨야 돼요. 그 차원이에요.
그런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산다는 건 목숨이 붙어있는 걸 산다고 하고 목숨 끊어지면 죽는다 하잖아요. 그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목숨 끊어지니까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죽은 게 아니고 자고 있다. “너는 자는 사람에게 죽었다고 하느냐? 자고 있는 거야. 안 되겠다. 그만 자고 일어나.” 손잡으니까 잘 잤다고 깨어나네. 일어나서 뭐했겠어요? “아버지, 엄마. 무슨 일 있었어? 왜 울고불고 난리야. 분위기가 왜 장례식 분위기야. 난 잘 잤는데.” 오히려 이상히 여기겠지요.
교회 나오면서 성경 보면서 근본부터 바뀌어져야 돼요. 살다 늙어죽으면 천당 가지. 이런 개념은 천국에서 용납 안 되는 개념이에요. 이 땅에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 이미 저주고 이 땅에서 저주 차원이 뒤집어쓰느냐, 아니면 영생 차원을 한 바가지 뒤집어쓰느냐? 그 문제입니다. 로마서 3장에서 의가 넘치느냐, 죄가 넘치느냐? 율법 외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가 넘치고 행함으로 하는 자는 저주가 넘치고. 행해서 구원받을래, 예수 믿어서 구원받을래? 그걸 로마서에서 이야기하잖아요.
저주, 천국, 지옥은 인간도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 있어요. 그러나 인간이 끄집어낼 수 없는 게 있어요. 지금 내 식은 안 된다는 것을 인간은 스스로 부정할 수 없어요. 기껏 아는 게 그게 전부기 때문에 이걸 부정하면 다른 게 있어야 되는데 이걸 부정해버리면 다른 것이 접근할 수 있는 접촉점이 사라져버려요. 나는 살아야 되겠다. 어떻게? 내가 예수 믿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야 되겠다는 바로 그 자체가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바탕입니다. 그건 믿음 아니에요. 그건 자기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고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지 그건 신앙 아닙니다.
그건 기존에 3차원 속에서 했던 습속 때문에, 습속이란 말 압니까? 관습, 관행, 버릇. 융이란 사람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모든 인간은 똑같은 인간이다. 왜? 이미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선배들이 했던 무의식 속에 우리가 헤엄치기 때문에 기껏 얼굴 다르고 행동 달라도 같은 상황에 집어넣으면 인간 똑같이 된다. 예비군 복 입으면 똑같이 되듯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별다른 인간 없다. 똑같다. 종교란 것도 따지고 보면 기독교고 불교고 똑같다. 인간이 전통적으로 알고 있던 것이 무의식에 담고 있다고 튀어나온 것밖에 안 되는데 그게 뭐 별다른 것이냐. 고만고만, 도찐개찐, 오십보백보 똑같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아저씨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것은 똑같은 게 아니에요. 이 세상 속에 죽었다고 사흘 만에 살아난 사람이 누가 있어요? 없어요. 예수님 빼놓고는 없습니다. 이 말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차원에 의해서 내가 죽임을 당했지만 너희들이 사는 그 세계 말고 다른 차원 때문에 내가 살아났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을 성령이라 합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틈이 생겨요. 같은 인간이라도 사고방식이 서로 맞지 않아요. 소통이 안 됩니다.
한쪽은 내가 어떻게 교회 가서 살아보려 하고 이쪽은 나는 이미 살았고. 이미 나는 살았다는 거예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산 속에, 살았다는 영생 차원 속에 알고 보니 내가 이미 창세전부터 포함돼있다는 겁니다. 하나의 구성원으로써, 멤버십으로써. 회비 낸 적도 없는 이미 회원이 돼있어요. 생전 회비 낸 적 없는데. 그러니까 성도는 미래에서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이고 성도 아닌 사람은 과거에서 어쨌든 간에 미래, 천국 가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고. 이게 같을 리가 없어요. 같을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모든 일은 아브라함이 과거에 계획된 일이 아닙니다. 미래가 마중 나와서 일으킨 일이에요. 그 미래에 마중 나온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천사angel이죠. 여러분, 아브라함 일에 천사가 개입 한 해서 된 일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부 다 천사가 개입해요.
모세 죽고 난 뒤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 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 여호수아 5장에 보면 거기에 누가 마중 나옵니까? 천사가 나오지요.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미래의 나라에 오셨습니다. 이번에 치르는 전쟁은 미래의 전쟁입니다. 완료의 전쟁이거든요. 완료의 전쟁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있는 모든 민족들은, 그들이 얼마나 힘이 세냐? 얼마나 키가 크냐? 장대하냐? 얼마나 무기 성능이 우수하냐? 그런 것들은 마치 아이스크림으로 만든 그리고 모래로 만든 모래성, 얼음으로 만든 게 좋겠다. 얼음으로 만든 것이 겨울에는 생생한 것 같지요. 여름에 40도 올라가면 다 없어져요.
작년 겨울에 했던 유명한 영화 있지요. <겨울왕국>에 보면 거기에 눈사람 나오잖아요. 눈사람은 겨울에는 싱싱하고 잘 나가는데 걱정이 있어요. 여름 되면 녹는다는 사실. 이걸 아는 사람이 성도에요. 지금 이 차원은 무대 연극용, 연극할 때 필요한 화장발입니다. 우리가 지금 꾸미고 있는 얼굴이 아담의 화장발이거든요. 장차 주의 나라에서는 우리 얼굴이 예수님 얼굴로 바뀌어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지금은 우리가 아담에 속해서 흙에 속한 형상을 입지만 그때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어요. 그때까지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모세한테 안 보여줍니다. 유보시킵니다. 그게 33장 20절 이야기에요. 내 형상 보지 말란 말이죠. 안 보여주는 거예요.
제가 중요한 걸 주저하면서 안 하고 있어요. 지금은 이야기하고 싶어요. 제일 중요한 게 본문도 중요하지만 여기 13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이렇게 돼있지요.
모세가 산을 지금까지 세 번이나 왔다갔다했기 때문에 알아요. 모세는 다른 차원을 알아요. 산 밑에 있는 백성들은 몰라요. 아는 모세가 하는 말이, 지금 애굽 동네, 주변 동네, 광야, 그리고 가나안 땅, 어느 쪽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야 될 곳은 주님이 가고자 하는 그 세계란 거죠. 그 세계기 때문에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면 우리가 못 갑니다. 이게 구원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의 고백이에요.
울산 살다가 죽으면 죽겠지. 이건 우리가 뭘 아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데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 계신 곳이 어딥니까? 매일같이 인도함을 받아야 돼요. 2월 5일에 인도함 받았습니까? 안 돼요. 2월 6일? 안 돼요. 내일 되면 내일 인도받아야 돼요. 매일같이 인도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하기를 넓은 길로 가서는 안 된다. 좁은 길로 가라. 찾는 이가 적지만 거기에 영생이 있지요.
우리 같으면 넓은 길, 좁은 길 말고 어디가 영생입니까? 우리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이게 우리의 성질 급함이에요. 우리가 알아서 가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곳이 중요한 게 아니고 가는 그 길, 날마다 좁은 길로 가야 돼요. 익히 아는 길이 아니고 우리가 모르는 길로 가요. 왜 모르는 길로 가야 되느냐 하면, 모르는 길을 우리에게 인도함으로 말미암아 그 모르는 길로 인하여 우리 자신이 바뀝니다. 우리가 바뀌지 아니하면 그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이게 바로 출애굽의 주의 뜻입니다. 네가 바뀌지 않으면 천국도 없다. 바뀐다는 말은 차원이 바뀌는 거예요.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살고 있습니다.” 땅이 있잖아요. “하나님이여, 이 땅에 두 발로 딛고 있습니다.”라고 여기 사는 것처럼 내가 죽어서도 내 두 발로 디딜 그곳에 가게 해달라고 생각하거든요. 주께서는 발 디딜 이걸 없애버려요. 없애면 모세가 이렇게 돼요.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갔지요. 시내 산에 하나님 계시지요. 여기에 모세가 왔잖아요. 그림을 이렇게 그리면 안 돼요. 모세가 발을 여기다 딛는 거예요. 모세가 거꾸로(얼굴 벌게지겠다) 이렇게 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발을 딛고 얼굴을 하나님 쪽으로 가지만 모세는 이미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거꾸로 이 세상을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거예요. “주여, 주께서 어디로 이동하십니까?” 왜? 주님 계신 곳에 자기 발이 있으니까. 주께서 어디로 가야 됩니까?
이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에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산다? 예수님이 함께 사는 거죠. 내가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이 땅에 있는 발은 떼고 주님 안에 우리 발을 집어넣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쪽으로 해야 된다는 겁니다. 완전히 거꾸로 사는 사람이죠. 그러니까 울산이고 브라질이고 미국이고 캐나다고 이민 가고 그게 별 의미가 없는 거예요. 어디 가든 내 주 모신 곳이 하늘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여, 살아야 되겠습니다. 주여, 어떻게 하든 밥 먹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사는 게 뭔데? 사는 줄 주님 모릅니까? 나는 아는데. 그게 바로 저주받은 거예요. 사는 것 자체가 안 바뀐 게 저주에요. 네 힘으로 안 되니까 교회 나와서 주의 힘으로 살아보려는 것, 이게 바로 저주받은 사고방식의 연장이고 연속이에요.
오늘 우리교회 질문에 답변을 했는데 그런 고객들 때문에 교회란 사기꾼들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살기 힘들지요. 교회 나오세요. 대신 기도해 줄 테니까 커미션 우리 교회에 내세요. 이게 바로 교회 유지하는 방법이에요. 여러분 살고 싶어도 힘들어 못 사니까 내가 살도록 해줄 테니까 거기서 나온 수입을 갈라 먹기 합시다. 목사가 대신 기도 잘 해줄 테니까 의인은 간구하는 힘이 대단하니까 나중에 성사되거든 섭섭하지 않게 감사헌금 많이 하고. 이런 식으로 커미션 챙겨먹을 때 이게 바로 교회라는 이름의 우상숭배 단체가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래서 망한 거예요.
그러나 차원은 뭐냐 하면 지금 죽어도 죽는 게 아니고 주 안에서 잠자는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거기에 우리의 발을 디뎌줘야 이게 제대로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모세가 본 하나님의 진짜 의중인 겁니다.
10분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
한윤범(IP:14.♡.134.30)
15-02-10 11:36
20150206b 울산강의-출애굽기 33장 : 어디로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첫 번째 시간에 산에 네 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럴 때마다 새로운 정보가 네 개 생기고 그 네 개를 이으면 구원의 여정이 돼요. 과정이 되죠. 그러면 구원은 어떤 순서로 됩니까? 그 어떤 순서로 되느냐고 묻는 차원이 우리가 사는 세상 차원이에요. 이렇게 시작했다고 이렇게 해서 이렇게 간다. 그게 바로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조직신학이라는 거예요. 처음에 소명, 믿음, 순서 있지요.
그게 순서가 아닌데 사람들은 나는 어디 쯤 가고 있을까? 이만큼 남았구나. 3단계, 4단계, 단계 올리면 그 다음부터는 골치 아파요. 단계 올리면 도 닦는 게 되니까. 구원에 단계가 없어요. 왜 단계가 없느냐 하면, 내가 구원받는 식으로 주께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덮치니까. 그냥 광주 대화동에 아파트 옹벽 덮치듯이 그냥 덮치면 나는 찌그러들잖아요. 찌그러지면 자아는 부드러워져요. 걱정, 근심이 날아가 버리니까. 성도의 특징이 부드러워져요. 꽃을 든 남자에요. 아주 부드러운 남자가 돼요. 옴팍 찌그러졌으니까.
첫 번째 올라갈 때 그냥 외워서 이야기하던 것을 두 번째에 돌판 만들라는 이유가, 증거궤 안에 아카시아로 만든 상자가 있는데 상자 안에 내용을 돌판으로 채우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순서로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덮치는데 덮칠 때 삼겹살, 시루떡처럼 어떤 것이 차곡차곡 쌓여서 죄가 의로 바뀌는 메커니즘이 되느냐 하는 거예요. 도대체 어떤 장치이기에 죄로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의로 나오느냐 하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가 뭔가 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만든 장치 안에 죄를 의로 바꾸는 장치가 들어있어요. 그 장치가 어떤 장치인지 궁금하지요.
그게 뭐냐 하면 증거궤라는 아카시아 상자가 있고 그 상자 안에 돌판이 들어있습니다. 돌판은 언약을 압축한 거예요. 이걸 지켰다 하면 복이 나오고 못 지켰다 하면 저주가 나오지요. 돌판에서 저주가 나올 때 7월 10일에 피를 발라요. 염소의 피나 소의 피를 바르면 저주가 피 안에서 걸러져요. 그러면 피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의가 돼버려요. 그러니까 피와 율법의 만남이죠.
그러면 율법은 누가 준비한다? 하나님이 준비해요. 피는 누가 준비한다? 하나님이 준비해요. 이걸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하거든요. 죄인이 의인 되는데 우리가 손댈 것도 없어요. 하나님이 율법 주고 그 율법의 저주를 하나님이 나서서 막아버려요. 율법의 저주가 하나님의 품속에 들어오게 되면 그 저주받은 하나님은 대속의 십자가 죽음으로 피 흘립니다. 그 피를 새 언약이라 해요. 이게 바로 약속이라는 겁니다.
언약궤가 먼저 있고 언약궤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뜻에서 언약궤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생물, 피조물이 있어요. 그게 두 그룹이라 해요. 두 천사가 무지개다리처럼 쌍으로 얼굴을 맞대서 마치 우리의 할 일은 이걸 지키는 일이라 해서 아래쪽을 보면서 언약궤를 지키는 겁니다.
그 언약궤 만들고 천사 만들라고 이야기하면 돌판 만들라는 거예요. 이게 두 번째 올라갔을 때에요. 첫 번째는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이것 안 지키면 삼사 대 저주받는다. 지키면 천 대까지 복을 받는다. 저주와 축복의 차원을 이야기했고, 율법이 만약에 안 왔다면 그들은 축복, 저주 차원이 있는 것도 모르고 살다가 흙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면 되지. 이게 바로 불교잖아요. 살다가 힘 빠지면 흙이 되는, 불교에서는 화장해서 뿌리잖아요.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요 인간은 자연이고. 자연으로 돌아가면 그게 저들이 아는 2차원 차원의 전부에요.
그들에서 목사인데도 불구하고 유언이 뭐냐 하면, 절대로 죽으면 화장하지 말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뜨겁다고. 두 번째는 왜 하지 말라고 하느냐 하면,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니까 무덤을 열고 나와야 되는데 내려 뿌리져 버리면 무덤을 열 손이 없잖아요. 뼈가 있어야 뼈에 힘줄이 생기는 건데 뼈가 흩어져 있으면 뼈 모으는데 하늘나라 행정체계에서 너무 일거리가 많아서 아르바이트생 써야 돼. 어떤 사람은 뼈다구 어디 있습니까? 백상어가 물어서 태평양 사모아 섬에 가 있습니다. 빨리 택배 보내서 하라. 보내서 다시 하려면 시간이 차이가 좀 나잖아요.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자기 생각만, 자기중심의 차원만 생각하는 거예요. 나만 살면 그만이다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자기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천국은 누구의 세상이에요? 지가 큰소리치는 세상이에요. 따라서 천국에 지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 오게 되면 삐져서 지옥으로 도망갈 거예요. “저 인간이 왔다? 괜히 왔다. 지옥 가서 살래. 너하고 안 산다.” 특히 이혼한 전처 만나면 가자마자 부부 싸움할 거예요. 바로 이런 차원에 몰두하는 우리를 그 차원을 바꿔주지 아니하면 주의 차원에 갈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올라갔을 때가 뭐냐 하면, 32장 31절에 보면,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니까 이미 애굽에서 올라온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우상을 섬겼잖아요. 우상을 섬긴 데 대해서 32장 9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다 죽여 버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상 섬겼기 때문에 다 죽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아쉽지 않다는 뜻이에요. 사람이 아쉬운 것이 아니고 내가 함께 살 사람이 필요하지 사람 많다고 살려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큰 교회 숫자 아까워서 살려주는 게 아니에요. 큰 교회고 작은 교회고 작은 교회라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사람만 구원받는 것이지 숫자와 구원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설마 다 죽일까? 다 죽입니다. 왜냐하면 32장 9절에 보면, 내가 다 죽여 버린다.
그때 모세가 나서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 다 죽여 버리면 애굽 사람들이 놀리기를 꼴좋다. 자기 하나님한테 몰살당했다는 소리 들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이야기하면서 “친히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면 안 되겠습니까?” 중요한 제안 했지요.
그 전에 뭐가 있느냐 하면, “제가 하나님과 함께 있잖아요. 저처럼 조치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 내용을 아니까 저들도 하나님을 나처럼 알게 만들면 그들이 멸망하지 않고 구원될 것 같은데 이건 제 아이디어인데 하나님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여, 누굴 보내주옵소서.” 모세는 시내 산에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답변은 뭐냐? 내가 시내 산에 오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너희들 밑으로 따라 내려올게 하는 거예요.
33장 봅시다. 12절,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함께 보낼 자를 보낼 자를 주시옵소서. 천사라도 보내달라는 거죠. 하니까 14절에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친히 가리라. 하나님이 시내 산에 계시다, 안 계시다? 이제는 시내 산 철수합니다. 하나님이 철수하니까 누구 속에 항상 동행합니까? 산 밑에 내려오지요. 산 밑에 있는 백성들이 이미 죄 지었지요. 그 모습을 언약궤 안에 담는 거예요. 어떻게? 깨어진 돌판을 대신한 돌판이 들어가는 겁니다. 이 말은 너희들한테 구원은 이미 끝났어요. 너희를 위한 구원은 없어요. 뭐만 있는가? 너희를 대신하는 조건 하에 그들과 동행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범죄 했는데 그 범죄를 대신 담당할 자를 보고 그 조건 하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죠.
그렇게 되려면 그들이 범죄 했다는 것이 드러나야 돼요. 계속해서 앞으로 줄곧 범죄 했음이 안에 증거물로 담겨있어야 돼요. 그래서 그 상자를 증거궤, 죄진 증거궤에요. 그 증거궤는 뭐냐? 인간이 하나님 아니면 그들은 벌써 멸망당했음에 합당한 증거들이에요. 그 증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그리고 민수기에 나오는 아론은 이미 죽었지만 지팡이에 아론 이름을 쓰니까 살구 싹이 낳고 더 놀라운 사실은 살구 열매까지 맺혔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을 이토록 동행하면서 내 차원을 이해 못하고 너희들 차원, 그걸 애굽이라 합니다. 애굽에서 살던 사고방식을 계속 고집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그렇다면 갭 있잖아요. 너희들의 애굽 사고방식과 그리고 그들이 가야 될 하나님 천국, 약속의 땅과의 갭을 누가 메워준 거예요. 그 역할을 모세가 하게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이 증거는 뭐냐? 이제는 모세가 네 번째 올라갈 때는 모세가 판만 다듬었어요. 글자는 누가 쓰겠습니까? 그 판에 첫 번째처럼 친히 하나님이 십계명을 쓰고 모세가 그걸 다시 들고 옵니다. 모세가 두 번째 들고 온 돌판을 깰까요, 안 깰까요? 안 깹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 백성은 우상숭배한 자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이번 계약은 죄진 사람과 상대한 계약이 아니고 그들을 대신할 중보자 역할하는 모세와 하나님과의 계약이기 때문에 그 돌 판을 깨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건이 붙어요. 앞으로 백성들이 모세 말 듣지 아니하면 저주받는 조건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모세가 자연적으로 그 당시에 예수님이 되겠지요. 그래서 모세는 장차오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사람인데 히브리서 3장에서는 모세 역할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장 5절에 보면,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이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란 말이 아니에요. 집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되고 싶다고 집 되는 게 아니고 우리 말고 제2, 제3의 요소가 우리를 장악해야 집이 된다는 겁니다. 나는 천국 가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고 천국의 요건이 우리를 덮쳐야 돼요. 우리를 찾아 와야 돼요. 찾아와서 모세와 예수님과의 차이를 알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집이 되는 겁니다. 그 모세와 그리스도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출애굽기에 다시 와서 모세는 그 당시의 중보자에요. 히브리서 3장에 의하면 사실은 중보자가 아니고 중보자의 긴 그림자에요. 이걸 저는 예수님의 석양의 그림자라고 하는데 노을 지게 되면 그림자가 길어지잖아요. 예수님의 그림자가 길어지게 되면 그건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의 그림자인데 그림자 역할이 모세가 되는 겁니다. 실체가 있고 그림자로 모세가 있는 거예요. 실체가 움직이면 그에 따라서 그림자도 움직이겠지요.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모세가 움직였다고 보는 거예요. 신약의 우리들은 모세의 움직임이 아니고 장차오실 예수님의 움직임이 그 당시 식으로 그 당시 모션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모세라면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의 석양의 그림자거든요. 그러면 제가 귤을 까먹을 때는 내가 귤을 까먹은 게 아니라 주께서 귤을 까먹게 하셨다는 겁니다. 모세처럼. 그걸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요. 당신은 귤 까먹었는데 당신이 배 부르려고 까먹었어. 자세히 이야기해줘. 먹고 싶었는데 주께서 귤을 주셔서 감사함으로 먹는다. 그때 감사함이 들어가요. 그걸 완료라 해요. 우리는 예수님이 감사함으로 귤 까먹게 해서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신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증거케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이빨이 아프다. 왜 아프냐? 주께서 아프게 하셔서 이빨이 아픈 거예요. 내 뜻 같으면 이빨 안 아프고 싶어. 얼마 전엔 제가 스케일링하는데 간호사가 사랑니 뽑을 때 굉장히 아플 겁니다. 주님의 이빨 주님이 뽑는데 내가 아파야 할 역할이라면 아파야지요. 아파서 울 정도 같으면 눈물이 나야지요. 내 눈물이 아니고 주님의 눈물이기 때문에 눈물이 나야지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연극무대에 올라간 역할들이에요. 자기 인생에 대해서 걱정한다는 것은 자기 분수를 모르는 태도입니다. 주제 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소원이 뭐냐 하면, 빨리 시체를 만나는 거예요. 그림자니까. 그냥 만나면 안 돼요. 옷을 벗어야 돼요. 아담에 속한 형상을 벗어버리고. 아담 형상 벗을 때 방금 보톡스하고 찝었는데 아까워도 할 수 없어요. 보톡스 했더라도 부르면 아담은 벗어버리고 하늘의 형상 주님의 형상을 입어야 됩니다.
그 형상을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까 34장 29절,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얼굴에 광채가 나지요. 그런데 본인을 몰랐어요. 본인을 몰랐는데 광채가 나왔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설교할 때 얼굴이 천사 같이 됐잖아요. 그런데 그때 셀카봉 없었거든요. 본인도 몰랐어요. 남들이 천사 얼굴이라고 사도행전 7장에 나와 있어요.
모세도 몰랐어요. 남들이 가까이 하기가 겁나는 거예요. 여기에 보면 가까이 하기에 두려워한다고 돼있어요. 이게 뭐냐? 다른 차원인데 영생의 차원, 복의 차원, 천국의 차원이 모세라는 육체적인 물질성과 합체가 되니까 인간의 차원에서는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도대체 저 화장발은? 화장발, 메이크업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예수님께서 변화 산에서 변화 될 때 베드로가 놀랬습니다. 놀래서 여기서 삽시다. 또 정착을 이야기했어요. 지금 정착이 문제가 뭐냐 하면, 본인들이 죄를 짓고 나는 절대로 구원되어서는 안 될 존재인 것이 확인되는 절차가 필요해요. 내가 죄 지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죄 지으면 끝났어요. 끝난 인간을 내 뒤에 다른 분이 오셔서 끝난 것을 쓰레기를 모아서 자기가 주 되심에 올리는 재료로 활용했다는 게 중요하거든요.
죽은 자를 끌어 모아서, “니는 죽었지?” “죽었습니다.” “지옥 가야 되지?” “지옥 가야 됩니다.” “만약에 너를 천국 보낸다면 누구 공로지?” “그거야 주님 공로지요.” “니가 기도했나?” “아닙니다.” “니가 헌금했나?”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지?” “주께서 긍휼히 여겨서 그렇지요.” 바로 긍휼히 여기는 것, 달음박질해도 안 되고 구원 원해도 탈락이고 오직 긍휼히 여겼다는 로마서 9장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절대로 너는 구원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걸 상자 속에 주님의 십자가 속에 묻어버린 거예요. 묻어버리고 그 위에 뭐가 결합된다? 짜고 치는 고스톱, 율법으로 죽여 놓고 예수님의 자기 피를 얹으면 이게 새로운 햄버거 세트에요. 고기 넣고 양배추 얹으면 맛있는 주님의 식사거리가 됩니다. 주께 영광이 돼요. 주께 영광은 찬양한다고 영광이 아니고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고 할 때 주께서 제일 맛있어 해요. 이걸 누가복음에서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느니라.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우리는 죽었다 깨나도 구원될 수 없고, 더 심하게 나가야 돼요. 우리는 죽었다 깨나도 절대로 구원 안 돼야 될 사람입니다. 내가 천국 넣어달라고 해도 넣어주지 말아야 돼요. 그게 하나님다워요. 그런데 그 하나님 속에 다른 면이 있어요. 그게 출애굽기 33장 19절 누가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을 준다는 말이 이게 누구 일입니까? 우리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숙제에요. 자기 과업이고 본인이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는데 있어서 걱정하거나 애쓸 필요가 없는 이유가, 주님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구원해주는 거예요. 그걸 주님의 이름이거든요. 이걸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집에 만약에 강아지를 사올 때는 이름이 없잖아요. 이름을 뽀삐라고 합시다. 뽀삐라는 이름을 부여할 때 그건 주인이 자기 좋아서 이름 붙인 거예요. 그런데 뽀삐 컸다고 말을 하면서 “주인님, 뽀삐는 싫어요. 헤라클레스라고 해주세요.” 그것은 개가 자기 이름을 정한 셈이 되잖아요. 그건 일체 이름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막대기로 세 번이나 때려버립니다. 발람처럼. 이게 어디 주인을 몰라보고. 그걸 징계라 하는데 우리가 징계 받는 이유가, 주의 뜻보다도 자기 야욕과 탐욕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늘 매 맞아요.
그래서 복음 아는 사람은 그걸 익히 알기 때문에 기도해놓고, “주여, 내가 기도했지만 안 될 줄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붙인 이름이 내 소망이 아니라는 뜻에서 주의 소망이 주의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란 뜻에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끝에 예수 이름을 붙이는 것은 헤라클레스 이름이 아니고 뽀삐란 이름 붙인 뽀삐의 운명대로 해주세요. 주께서 정해준 운명대로 가게 하옵소서. 주의 이름의 운명대로 가게 하옵소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의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은 율법대로 해서 지옥과 천국을 만드시고 주의 이름은 어떤 기능이 있다? 지옥 가야 되는데 무슨 요소를 가미합니까? 내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불쌍히 여길 자에게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이름에 합당한 자기 권한이에요. 구약에는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이 분류되잖아요. 이게 요한복음 5장에 보면 그렇게 분류되는 게 아닙니다.
제가 5장 21절 할게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리라” 이렇게 분류됩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이 분류되는데 신약에 요한복음 5장 21절에서 아버지와 아들로 분류된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려주는 것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려낼 수 있단 말이죠. 그런데 아버지 살리는 것과 아들 살리는 것이 명단이 틀리면 어떻게 되느냐? 명단이 다르지 않아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넘겨준 자를 살려준다고 돼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돼요.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정해놓은 천국을 채울 인원수를 아버지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들이 주가 돼야 되니까 아들에게 자기 업무를 인수인계해요. 아들은 아버지한테 인계받은 아버지의 원하는 자를 이제는 아들 차원에서 그 죄 값을 예수님이 값을 대신 치러주시고 죄 없다 해서 그들을 데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은 뭐냐? 구원은 이미 완료된 상황을 성경을 통해서 차후에 우리가 덮치듯이 받아버리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열심히 해서 구원받고자 교회 가서 십일조하고 예배 참석하고 성경공부하고 이런 식으로 꾸역꾸역 열심히 히말라야 산 등정하듯이 그러다가 나쁜 짓해서 2미터 미끄러지고, 그래서 길 가다가 오천 원 적선하니까 3미터 올라가고, 또 올라가다가 남편과 부부 싸움해서 15층에 내려가고, 성가대 일찍 와서 연습하다보니까 한 20층 올라가고. 맨날 이런 식으로 하다가 나중에 덮쳐버리니까 쓸데없는 짓을, 그런 짓을 하면 할수록 불쌍히 여김이 자꾸 퇴색돼버리고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도 닦는 것밖에 안 되는 그런 식의 구원이 돼버리는 거죠.
그 차이를 그 차이가 바로 우리가 느껴야 될 죄의 차이에요. 우리 죄라는 게 다른 게 아니고 구원받고자 나름대로 열심히 애쓰는 그 자체가 그게 바로 애굽적인 사고방식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내가 날 사랑해서 남은 죽든 말든 나만 천당 가겠다는 욕구가 소위 기독교식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했다는 그것이 우리가 마지막 토해내야 할 죄에요.
그래서 로마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내 형제를 위해서라면 제가 저주받아도 괜찮습니다. 무슨 배짱이 이런 배짱이 다 있는지. 주님 사랑에서 떨어져도 괜찮아요. 얼마나 대범해요. 주께서 긍휼히 여기심을 도중에 나쁜 짓한다고 그것이 폐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쓰일 때 마치 끊어진 것처럼 쓰인다면 언제든지 제 한 몸 드리겠다는 마음으로 가는 거예요.
방금 이걸 가지고 ‘효과’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효과로 구원받아요. 그 효과가 우리 속에 도달될 때 그게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 믿는 건 행함이라고 합니다. 왜? 우리가 주체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이 주체가 되어서 효과로 온 믿음은 주체가 우리가 아니고 주님께서 이 땅에 왔던 그 믿음을 우리가 선물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항상 자기 속에는 믿음은 선물입니다, 선물입니다, 계속 내놓게 되지요. 이 말은 제가 행해서 이런 믿음 나올 리가 없다는 뜻이에요. 제가 교회 나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주께서 교회 나오게 하셨습니다. 항상 선물의 선물됨을 증거하게 돼요.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온 겁니다.
그 다음에 이제 어려운 문제 남았는데 주님께서 함께 동행하게 되면 어떤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요. 모두가 하나가 돼요.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다시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산을 내려와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하나가 됩니다. 숫자 1, 하나가 돼요. 그러나 모두가 하나는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하나가 되는데 모두가 하나는 아니에요.
그러면 그 차이가 뭐냐 하면 여기서 삭제 현상이 일어납니다. 천국에 안 갈 사람, 주께서 알아서 삭제하는 거예요. 삭제하게 되면 처음에 나는 이스라엘이라고 까불다가 삭제 당하면 이스라엘입니까, 아닙니까? 그것 빼놓고 이스라엘이라. 그러니까 항상 이스라엘은 하나에요. 눈에 보이는 모두는 결코 하나가 아닙니다.
이 원칙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와요. 거기에 예수님께서 오른손에 교회를 일곱 개를 쥐고 있지요. 이 세상에 교회는 일곱 교회밖에 없어요. 일곱 교회도 사실은 한 교회에요. 일곱 교회인데 요한계시록에서는 한 교회라 하지 않고 한 성전이라고 합니다. 촛대 있지요, 향로 있지요. 전부 다 지역이 일곱이라고 성전은 언약궤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언약궤가 요한계시록에는 하늘에 있거든요. 하늘에 있는 성전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간에 일곱 교회 있는데 일곱 교회가 촛대가 일곱 개에요. 촛대를 옮긴다고 돼있지요. 그러면 숫자가 일곱 개에서 여덟 개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돼요. 아홉 개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그러면 숫자가 여섯 개 됩니까? 안 돼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일곱 교회, 한 군데밖에 없어요. 일곱이 다양성의 끝이에요. 다양성은 하나로 모아지고. 수천 개 있더라도 숫자 헤아리면 일곱 개밖에 없어요. 일곱 교회에 소속돼야 구원받는데 우리 교회는 일곱 교회냐는 질문 자체가 잘못됐습니다. 일곱 교회 안에 포함되게 되면 일곱 교회가 되지 우리 교회는 일곱 교회라고 하면서 우리라는 존재를 들고 나가면 안 됩니다. 왜? 모두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이걸 이해하셔야 돼요. 모두가 하나가 아니니까 모두 속에 개인이 들어있어요. 이런 질문은 안 됩니다. “목사님, 저는 구원되었어요, 안 됐어요?” 이런 질문이 안 돼요. 왜냐? ‘저’라고 하면 개인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개인 구원은 없어요. 구원은 이스라엘 구원이지 개인 구원이 아닙니다. 생명책 이야기 나오면 꼭 이런 질문, 이런 궁금증 있어요. “목사님, 생명책 명단에 제 이름 있습니까, 없습니까?” 진짜 정말 궁금한데 묻기는 그렇고 안 물으려고 하니까 찝찝하고.
그런데 그런 질문을 제가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질문한다고 돈 드는 것 아니거든요. 약간 시간 투자해서 글 쓰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