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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 5장29(예수 스캔들)141218b-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 5장29(예수 스캔들)141218b-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요한복음 5장29(예수 스캔들)141218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야 구원받습니까? 예수님을 알아야 구원받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안다는 것은 알아서 평가해서 믿을 만하면 믿고 안 맞으면 안 믿겠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나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이거는 혈육관계 같아서 우리가 아버지를 안다는 것이 딱 보면 알지, 아버지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아버지를 아는 게 아니잖아요? 새삼스럽게 아버지 관계가 수립된 게 아니죠? 예수님을 아는 것은 그거는 똑같이 아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알아서 어떤 사람은 많이 알고 조금 알게 하거든요.

로마서 12장에 보면 믿음에 뭐가 있다? 분량이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분량이 있지만 전부 다 예수님하고 아는 사이죠. 동일하게 안다고 생각해 버리면 이건 지적인 차별이, 신앙적 차이로 이어지게 되면 이건 큰일 날 소리 나옵니다. 자칫하면 상금이 없니, 겨우 부끄러운 구원 받니, 이런 양적 논리가 나오면 안 되거든요.

여러분, 겨자씨만한 믿음을 더 키워야 구원받습니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구원받습니까?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구원받죠. 질의 문제에 있어서는 동일한 질이 되면 되는 거예요. 떡가래 이만큼 먹었다고 떡을 아는 게 아니고 요 하나를 먹어도 떡 맛을 알잖아요. 피자 한 조각 먹어도 피자 맛을 알듯이.

자, 여기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말씀을 보다 안다고 해서 더 예수님을 아는 게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을 알고 있는 사이라는 것은 말씀을 내가 얼마나 깊이 아느냐 하고 상관없습니다. 그냥 주체로 주님의 조치가 되는 거죠.

그런데 여기 부활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이사야 26장 1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이 좀 난해하기 때문에 그때는 5분 동안 참으셔야 됩니다. 이사야 26장 19절에 보면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이렇게 되잖아요.

만약에 이게 이사야 26장이 아니고 이게 불교에서 사용하는 불경이라고 봅시다. 불경에 만약 이런 게 나온다면 우리는 뭘 생각하겠습니까? ‘야, 부처 믿으면 우리는 나중에 영생 얻겠다.’ 이렇게 되겠죠. 아! 바로 그런 것 때문에 제가 항상 ’어렵습니다. 힘듭니다.‘란 말을 먼저 전제로 미리 깔고 하는 거예요.

성경은 요한복음 5장 39절 말씀처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 누구에 대해서“ ”내게 대해서 증거“ 하죠.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줄 아는 거예요. 성경에서 영생을 어떻게 하면 얻을까 하고 성경을 볼 때 그 심보 자체가 이건 예수님의 성경 뜻하고는 이게 안 맞다는 이야깁니다. 이거는 마치 성경을 불경 보듯이 성경에서, 불경에서 나한테 유리한 건 어떤 게 있을까? 어떤 걸 믿으면 내가 영생 얻을 수 있을까? 이렇게 오는 것은 그건 부자 청년이 주님 찾아오는 그 심보와 똑같은 심보에요.

성경은 죽은 자들이 부활했잖아요. 이 부활은 우리가 부활한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니고 장차 메시야기 부활한다는 거예요. 항성 초점은 예수님한테 가 있어야 돼요. 예수님을 경유해야 돼요. 예수님이 반환점입니다. 갈 때 우리 힘으로 가더라도, 우리 힘으로 갈 수도 없지만, 올 때는 갔던 마음은 사라져야 돼요. ‘예수 이용해서 내가 죄 지었지만 주님이 피를 이용해서 내가 용서 받아서 내가 죄 없이 깨끗하면 내가 구원받아야지.‘라는 식으로 예수를 믿더라도 정말 믿게 되게 되면 주님의 뜻으로 죄를 지었지, 내가 주님을 이용할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죠.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는데 이 섬뜩함. 하나 유치한 예인데요. 오죽했으면 제가 유치한 예를 들겠습니다. 중국집에 자장면 먹고 싶어서 들어갔는데 들어갈 때는 자기가 자장면 먹겠다고 갔는데 거기서 누굴 봤냐 하면 40년 만에 목포에 있는 엄마를 만났을 때 ‘아, 엄마’ 하고 40년 만에 엄마를 만나고 난 뒤에 엄마를 만나면서 주머니에서 ‘엄마, 자장면 값 얼마에요?’ 돈 내겠어요? 안 내겠어요? 안 내잖아요. 자장면 먹으러 갈 때 40년 만에 헤어진 엄마를 만날 줄 생각했습니까? 못했습니까? 못했잖아요.

교회 나와서 ‘교회 나오면 목사님이 예수 믿으면 구원해준다. 나도 이제부터 예수 믿어야지.’ 항상 내가 주인공이고 예수님은 나의 시다발이, 내 영생을 채워주기 위해서 뭔가 시다발이 짓을 했던 그런 분으로 알고 왔는데 와보니까 교회 오게 하신 분이 누구다? 내가 아니고, 내가 알아서 판단해서 갔던 말았던 간에, 그렇게 하도록 사전에 스케줄에 짜여 진 대로 움직이게 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죠. 그러니 모든 성경은 내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사적 구원이 아니고, 주님에 관한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다시 이사야 26장을 보게 되면 거기에 보면 분명히 주의 죽은 자들이 살아나죠. 어려운 것을 5분 내에 한다 했으니까 5분 다 돼 가니까 빨리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신약에 오시잖아요? 구약은 뭐냐, 구약에서 방금 이사야 26장 19절 죽은 자들이 부활하잖아요. 이 부활은 ‘야, 우리가 이사야 보고 부활하자.’ 이러지 말고 이 부활은 누구의 긴 그림자가 돼야 되죠? 예수님의 부활을 보여주기 위해서 긴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부활된 자들이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 죄인이잖아요? 특히 이사야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의 이야깁니다. 멸망한 이유가 뭔지 알아요?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라 하는 것은 그들이 주신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우상 숭배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어요. 죄 짓고 죽은 자들이 부활했다 이 말이죠. 주의 덕분에.

그러면 이 죄를 지은 이 사람들은 ‘내가 죄를 지었다.’가 아니고 누구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를 지어야만 했던 사람들 이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죄를 지고 가는, 십자가 지고 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앞당겨서 이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하는 민족입니다. 성경 해석 그렇게 해야 돼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야 돼요. 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한다 하니까 사람들은 또 오해해서 ‘그래, 나는 내가 잘나서 구원받는 건 주님 덕분이야.’ 또 자기 구원을 먼저 전제로 깔아놓고 ‘나는 부처 안 믿어. 공자 안 믿어, 나 예수 믿을 거야.’ 자기 구원을 전제로 깔고 예수 끄집어 당겨서 하는 거예요.

인간은 어떤 식이냐 하면 인간은 신과 인간을 자기가 신을 끌고 오고 자기가 인간을 끌고 와서 둘이 만나게 해주는 이런 수법으로 종교생활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주 건방지죠. 신은 하나님 삼위일체 가져오고 인간은 자기 자신이라든지 가족들 끌고 와서 이 둘이 만나게 해서 자기가 감독이라. 자기가 창세전에 있지도 않은 인간이 자기가 감독인 거예요.

이 논리는 간단한 논리지만 여러분들이 아는 이야기라고 욕해도 할 수 없지만 욕하더라고 하겠습니다. 피조가 되었다는 이 말은 피조 되기 전에 사랑을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그러면 피조 된, 만들어진 인간은 인간이 구원되고자 하는 구원의 의식은 자기가 만들어지기 전의 의식이 아니고 만들어진 상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 앞에 안 먹혀요. 이게 논리적으로 맞아요. 이 논리가 미국에 뉴욕 교회 마지막 날 설교 할 때 사마리아 할 때 이 이야기를 했었어요. 만들어진 자는 만들어지기 전의 상태를 모르고 만들어진 후에야 기껏 살피면서 어떻게 하면 고진감래(苦盡甘來), 또는 생로병사, 이 어려운 인생살이를 벗어나서 편안한 해탈과 안식을 누릴까, 어떤 좋은 수가 없을까, 라고 성경 보고, 불경 보고, 이런 식으로 종교생활 해가는 겁니다. 그 아이디어 자체가 반칙 이예요.

이건 어디까지나 피조물에서 유발된 것이지, 그러니까 그런 쪽의 교회가 클 수밖에 없는 게 똑같은 또래니까 같은 상황이니까 소통이 되면서 ‘그래, 그래’ 고개 끄덕이면서 교회라는 이름을 대한 예수교 장로회 갖다 붙여 놓고 끝나는 거예요.

하지만 실제는 그게 아니에요. ‘주여, 그렇게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것이 나는 죄인 줄 몰랐습니다. 정말 이게 죄군요. 이게 바로 죄군요.’ 내가 설친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구원은 주님의 조치로서 이미 거기에 가담이 되게 돼 있어요.

로마서 9장 한번 봅시다. 로마서 9장 16절에 보면 이게 언젠가 어디서, 대구 강의에서 한 것 같은데,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구원이 원하는 자라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릇은 누가 만든다? 진노의 그릇과 구원의 그릇은 누가 만든다? 이것은 네 소관 아니야. 이건 그릇 만드는 토기장이 소관이지, 그릇 보고 닦달내지는 않아요. 그릇보고 ‘너는 나쁜 인간이니까 너는 천히 쓰는 그릇으로 만들 거야.’ 이런 것을 그릇 보고 의논하거나 상담하거나 협상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협상의 대상이 아니에요.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그 다음에 뭡니까?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달음박질로 흔히 교회서 통하는 용어 두자로 그걸 특심이라 해요. 열심도 아니고 특심. 특심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뭡니까?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죠.

그러면 구원받는 사람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주여 어찌 저 같은 인간을 불쌍히 여겨줬습니까?” 이런 공통된 특징을 나타내줘야 그것이 진정 구원받은 사람 이예요. 그러니까 이게 영어로 하면 nothing인데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구원받고 난 뒤에 터져 나온 고백이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아, 아닌데. 뭐 성가대 봉사하고 한 주일에 10에 3조 하고 아무것도 아닌데, 아, 개척교회 10군데하고, 아무것도 아닌데. 성경 한 100독 하고 요한계시록 10000독 읽고,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돼야 돼요. ‘전도 한 2000명 했고 아! 그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돼야 되거든요. ‘애 셋 잘 키웠고, 아, 아무것도 아닌데.’ ‘암 걸려서 기도해서 나았고, 아, 그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항상 nothing,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주께서 왜 암에서 낫게 하셨나? 나아야 했기 때문에 나았고, 구원받아야 했기에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내용이 긍휼을 담는 긍휼의 그릇이랍니다. 어렵지 않죠? 긍휼을 담는 그릇은 무슨 그릇? 긍휼의 그릇, 오늘 제일 쉽다. 그게 긍휼의 그릇이죠. 저는 긍휼의 그릇을 볼 때마다 영화관에 갈 때 젊은 애들 먹는 팝콘 그릇 있잖아요. 그게 자꾸 생각나요. 영화관에 가면서 세상에 이만큼 양도 많아. 이만큼 그릇이 있는데 훅 불면 다 날라 가겠어. 그걸 들고 영화관에 가서 앞에 광고 나올 때 계속 먹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긍휼의 팝콘 그릇이 아니고 긍휼의 그릇 이예요.

그러면 우리는 하루하루 뭘 소비합니까? 주님이 주신 긍휼을 소비하는데 소비하면 돌아서면 또 긍휼이 차 있어요. 오병이어에요. 긍휼의 화수분. 빼내면 또 있어요. 이게 바로 주의 말씀, 우리가 죽고 난 뒤에 부활하신 주님한테 듣는 말씀이 “예전부터 내가 다 그래왔잖아.” 방금 이 이야기를 듣는 거예요. 별난 이야기 듣는 게 아니고 우리는 다 아는 이야기 듣고 불신자들은 전혀 성경에 나와 있는데 안 믿던 이야기를 다 듣고, “아들을 공경하는 자가 아버지를 공경하기 때문에 아들을 공경하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과거형) 옮겼느니라” 그러니까 네가 출발 지점에서 생각하지 말고 이미 도착 지점에서 주님을 경유해서 다시 네 집에 와봐라. 그러면 네가 네 매니저가 아닌 것을. 네 매니저는 따로 있어요. 우리 매니저는 따로 있습니다. 따로 있어서 그분께서 관리해 가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러면 목사님 낼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내일 일은 야고보서에 보면 내일 일은 네가 모른다 했어요. 왜, 인생은 안개니까. 네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모른다고 했느냐 하면 내일 일을 알아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미래에서 땅기는 것이 내일에 미리 알아버리면 이것이 긍정이 돼요. 오늘서부터 미래 내일로 가는 요걸 미리 눈치 채버리면 요 부분만큼은 주님의 손길이 이게 무의미하게 돼 버려요. ’아는데 뭐, 아는데 뭐, 주님 이 정도 알았으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내가 알아서 어디를 가겠다. 하는 여기서 나온 교리가 뭐냐 하면, 환란 전 재림 설이예요. 환란 전 환란 후 논리입니다. 소설 ‘휴거’라는 소설에 나오는 내용들 이예요. 이거 바코드 받으면 안 되고, 이런 논리 있잖아요. 지금 프리메이션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이런 이야기, 지금 세계은행이 어떻게 돼 있으며 북한의 핵문제는 요한계시록이 어떤 내용으로 돼 있으며, 이런 거, 많이들 들었죠? 그것이 바로 대비해야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원리와 정 반대에요.

대비해야 살 수 있다는 그 의식은 뭐냐 하면 바로 사적 개인 구원에 빠져 있는 거예요. 완전히 구원 파에요. 어떻게 하면 내가 나 혼자라도 살아남는가. 나 혼자 살아남는 그런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왜냐 아무도 구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주님만 구원하고 거기에 파리 붙이는 걸 뭐라 합니까? 찍찍이라 합니까? 주님 부활에 같이 솟구쳐 올라갈 때 들러붙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오직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몸만 구원받습니다.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몸은 죽어야 돼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 외에는 구원의 방법이 없어요. 사적인, 개인적인 독자적인 몸의 구원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몸은 하나에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에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만 구원받습니다. 다른 몸은 없어요.

여러분 몸도 이걸 내 몸이라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음행하지 마라 하는 거예요. 네 몸은 네 몸이 아니고 주님 몸이기 때문에 주님이 음행하고 싶다 할 때는 하고 안 그러면 하지 마라. 주님이 그런 마음 들겠어요? 주님의 지체인데.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오잖아요. 네가 왜 창기와 한 몸이 되느냐? 또 그 대목 보고 군에 가기 전에 15년 전에 창녀촌에 갔다는 그것 때문에 가슴 치고 하는 청년들이 있어요. 웃기지도 안 해. 갔어야 해요. 갔어야 구원받아. 그렇게 이야기해도, 했어야 한다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닙니다.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조심해서 그거 안 했더라면 죄인 안 돼요. 그 사람 의인 돼 버려요. 우리가 해야 될 역량입니다.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너는 네 죄 지을 죄 종류 따로 있고 나는 내 죄 지을 종류 따로 있어요. 수첩 가지고 손목 때리고 ‘나가’ 하는 죄 따로 있지만 그거 아무 돌 던질 이유 없습니다. 그 사람은 키 큰 여자는 그거 하지만 다른 사람은 다른 죄 있어요.

요한복음 5장 38절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이것은 누가 믿게 한다는 말이죠? 네가 믿는 게 아니고 네 속에 있는 말씀이 네게 말씀을 주신 분과 연결시킨다. 코드를 꽂아버린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신 말씀은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가 없게 만드는 능력이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말씀은 아는데 믿기지 않아.’ 이건 지금 말씀이 들어온 게 아니고 성경을 외운 거죠. 성경 구절 암송대회 한 거죠. 그건 성경을 본 거지 말씀이 들어온 게 아닙니다. 말씀이 들어왔으면 말씀 주신 분과의 한 통속이 됐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를 연구한다고 아버지 압니까? 아버지를 많이 알면 아버지를 많이 사랑하게 돼요? 아니에요. 왜냐, 자식이 아버지를 많이 안다고 아버지가 많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식이 무슨 짓을 해도 아버지는 재산 있으면 자식한테 줄줄 압니다. 항상 우리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 대상이지, 내가 한만큼 성과급 받는 그런 우리 사장님이 아니에요. 우리 대표 이사님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저한테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아버지가 예수님 다루듯이 다루십니다. 끝. 아버지가 우리를 어떻게 다루십니까? 궁금해요? 궁금해요? 궁금하면 500원. 아버지 예수님 다루듯이 다루시는 겁니다. 어떤 방법으로? 아버지께서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뭘 줬습니까? 비둘기 같이 성령을 줬죠. 그 성령이 그 다음에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에게 오게 되면 예수님은 일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 왔지만 이미 예수님이 다 이루었던 것, 그러니까 네가 너한테 손 댈 필요 없다. 모든 걸 다 이루었다는 그것을 보증금으로. 아파트 사봤죠? 보증금으로 이미 우리한테 온 거예요. 중도금도 없어요. 보증금이 끝 이예요. 보증금으로 이미 그 보증금을 성령의 인, 도장이라 하는데, 보증금이 와 버리면 이미 우리는 소유권이 등기가 돼요. 등기가 내 등기에서 주님 등기로 바뀌어버립니다.

그러면 이 속에 말씀이 작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저 사람하고 나하고는 다르지만 나만의 다른 죄를 지어야 돼요. 죄를 지어야 용서가 의미가 있잖아요? 죄 없는 곳에 무슨 용서가 있습니까?

어떤 분은 저한테 요새는 그런 분 없는데 옛날에는 그런 질문 많이 했어요. 목사님, 이런 죄를 지어놓고 용서를 구하는데 용서해 줄까요? 말까요? 이런 질문을 해요. 제 답변은 한결 같아요. 용서하지 마세요. 왜, 우리는 남을 용서할 입장이 못 됩니다. 우리가 용서를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의 갑 질이 돼요. 그 사람은 을이 되고. 안 돼요. 용서는 주님이 해야죠. 주님이 용서한 것을 확인해야 되지, 우리가 용서 하면 안 돼요.

우리라는 것은 주님이 시킬 일의 도구기 때문에 주님이 하신 일에 우리는 목격자일 뿐이지, 내가 단독자로 용서한다는 게 없어요.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는 말씀이 나오잖아요. 에베소서 5장에. 주께서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게 되면 우리는 술 먹고 싶어도 술이 안 먹혀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거는 내가 착해서가 아니라 내가 단단히 결심해서가 아니라 내 속에 말씀이 술 먹지 말라는 말씀이 나를,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놔 버렸어요.

네가 화내되 해지도록 화를 품지 말라. 라고 에베소서 4장인가에 나오죠. 요새 다 잊어버렸어요.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에베소서 4장 26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했잖아요? 이 명령을 가지고 많은 신학자들은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네가 해야지. 전에는 성령을 안 받았을 때는 율법을 못 지켰지만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말씀을 지켜서 점점 더 성화하게 되면 영광도 돌리고 너도 보너스도 받고 상급도 많이 타고’ 이런 식으로 가는 거예요.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고 이 말씀은 “분을 품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뭘 믿느냐 하면 ‘내가 이걸 할 수 있습니다.‘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알아요. ’예수님께서 하셨죠?‘ 이렇게, 경상도 말로 하면 ’예수님이 하셨지에?‘ 고 서울말로 하면 ’예수님이 하셨어요? 저는 절대로 이럴 위인이 아닙니다.‘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리게 돼 있어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주님과 콘센트로 연결됐다는 말 이예요. 예수님과. 십자가로 연결됐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경상도 말로 ‘어데에? 언제에? 절대로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를 고백하는 거. 왜, ‘저는 죄인이기 때문에, 육이기 때문에, 절대로 저는 이런 일 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면 옆의 사람이 ’아니 당신은 화내지 않았잖아.‘ ’그거는 주께서 그렇게 하셨지, 저는 아닙니다.‘

사도행전 3장에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 할 때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켜 세웠잖아요. 일으켜 세웠다고 사람들이 이해하잖아요. 할 때 ‘왜 저를 쳐다봅니까? 왜, 제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입니까? 왜 저를 쳐다봐요?’ 개콘에 보면 10년후‘라는 게 나오잖아요. 빚 갚으라고 나오니까 10년 동안 빚을 안 갚았어요. 그 여자도 아주 모진 여자야. 10년 동안 빚을 안 갚으니까 나중에 10년 동안 빚 갚으라고 오는데 오다 보니까 정이 들었어. 빚쟁이가 아니고 완전히 아버지라. ’애 때리지 마.‘ 그러니까 뭐가 없으면 모자간에 쓱 봐요. 그러면 남자 하는 말이 ’왜 저를 봐요? 제가 산타요?‘ 이런다고요. 그러면서도 준비된 거 딱 주고 가지만.

뭔가 일을 보실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가죠. 베드로가 일을 하니까 사람들은 ‘야, 베드로가 하셨습니다.’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저는 원하지 않았어요. 저는 원치 않는 일을 주께서 하셨습니다. 제가 뭐요? 저는 피로 씻은 구원밖에 없는데. 왜 저를 쳐다봐요?’ 그러면서도 할 거 다 하잖아요. 그러면서도 할 거 다 하죠. 베드로는 베드로 식으로, 요한은 요한 식으로, 사도바울은 사도바울 식으로, 믿음의 분량대로 은사 받은 대로, 각각 다른데 공통점이 있어요. ‘제가 뭐요?’ 이런 거.

그게 바로 말씀이 너희 속에 있다는 걸 주님이 이미 예언한 겁니다. 어렵다는 대목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미리 이사야 26장 19절에 죽은 자가 부활했다 했잖아요. 그것이 예수님한테 해버리면 예수님이 완성을 한다고요. 완성을 해버리면 예수님이 전에 그림자 할 때 이스라엘을 죽은 자를 살렸잖아요. 고 내용으로 예수님이 하실 내용에 포함이 돼 버려요. 포함이 되면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요 내용대로 그대로 부활시켜요. 그러니까 언약 백성만, 이스라엘만 구원받는 겁니다. 어렵죠?

예수님의 그림자가 이쪽만 있는 게 아니고 이쪽에도 있거든요. 이게 구약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구약은 하나의 모형이고 그 모형대로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부활의 적용대상이 구약에 나왔던 그들에게만 그대로 적용시켜서 부활합니다.

그렇다면 구약 때 예언된 사람들이 신약의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구약의 이사야 26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누구 이야깁니까? 오늘날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요거 기본 정석 수학1에 나오는 이야기죠. 그러면 여기서 응용문제 나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겼잖아요. 그 이야기 누구 이야깁니까? 그게 바로 우리 이야기에요. 왜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할 수 있다. 재물이 오늘날 우상이 되잖아요. 우리는 백날 성경공부해도 조금 있다가 끝나고 나면 그다음부터 눈 벌게서 돈만 생각하죠. 그게 우리 이야기라니까요. 그걸 우리하게 할 때 불신자들은 말씀이 없어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이구, 내가 정신 차려서 돈 사랑하지 말고 주님 사랑해야지.’ 이건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불신자들이고, 신앙인은 뭡니까? ‘내 이럴 줄 알았어, 나는 한 짓이 이것 밖에 못해.’라고 해서 다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로 보는 거예요. 바라본다고 돈 더 주는 게 아닙니다. ‘뭐, 내가 산타야?’ 더 주는 건 아닌데 주께서 내가 또 돈 좋아하게끔 이렇게 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죠. 다시 한 번 나의 의를 인정하지 않게 해주신 조치가 이게 우리를 끌고 가시는 주님의 조치인 것을 감사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29절에 보면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선한 일은 뭡니까? 예수님의 일이 말씀으로 삽입된 모든 자가 선한 일에 해당되어서 선한 예수님이 부활했잖아요? 따라서 선한 일이 있는 사람 그들도 예수님과 같이 영생의 부활을 얻습니다. 간단하죠.

그런데 이렇게 안 듣고 그냥 29절 봐버리면 뭐합니까? ‘그래, 이제는 예수 믿고 바르게 살아야지.’ 한번 살아보시죠? 신명기에 이런 말씀 나오잖아요? 너희 중에 자식이 있어서 말 안 듣거든 교회 어른, 이장한테 가서 이야기해서 마을사람들이 돌로 쳐죽이라,는 게 있어요. 그거 한번 지켜보렵니까? 그거 지켜볼 수 있겠어요? 뭐 평소에 착하게 살고, 착한 게 자식 위하는데 착한 게, 이런 거 따질 수가 없어요. 자식이라면 내 새끼라면 어떤 누가 욕해도 내 새끼는 내가 보호해요. 이거는 짐승도, 새도 마찬가지고, 자기 자식을 버리는 건 짐승만도 못하다 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아브라함처럼 자기 자식을 칼로 쳐 죽이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대로 착하게 10년 동안 살다가 11년에 만약에 삐끗해서 나쁜 짓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것이 다 무효로 돌아가죠.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겁니다. 그 원리가 왜 그 원리냐 하면 무서운 잠자는 거인이 있다고 합시다. 거인을 피해서 조심해서 거인이 잠 깨지 않도록 하는데 거인에서 나오는 그 터럭, 머리카락 하나를 우연히 지나가다가 밟았다. 그러면 누가 깹니까? 거인이 깨겠죠. 그 일부를 밟았는데 일부가 몸통과 연관된 일부가 돼요. 모든 말씀은 예수님처럼 완전하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여러분,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변화 산에서 나타날 때 엘리야하고 모세가 어떻게 해서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까? 아유, 이거 수능에 내고 싶다. 정말. 엘리야하고 모세가 어떻게 변화 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게 되었습니까? 그 엘리야 모세가 하는 이야기 하는 식대로 답변을 해보세요. ‘주여 언제 돌아가십니까?’ 그거에요. ‘언제 별세하십니까?’ 요새 말로 ‘주님 언제 어떻게 내 죄 위해서 언제 해결하려고 십자가 지십니까?’ 그 이야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오직 너희가 알기는 십자가밖에, 예수님이 죽은 것만 알기를 원한다. 이거는 엘리야와 모세도 마찬가지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성경들이 있지만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죄인으로 확인케 하는 말씀들이고, 그리고 죄인케 확인하면서 그 말씀을 말씀대로 지키는 것은 누구 몫이고? 바로 주님과 한 지체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 말씀들을 죄인인 우리를 오히려 죄인을 가지고 말씀을 드러내게 하면서 모든 공로는 누가 가져갑니까? 우리 공로로 돌리지 않고 주님이 친히 다 몽땅 다 가져가시는 방식으로 이 말씀을 활용하시는 겁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하니까 ‘그럼 목사님 우리가 말씀을 부지런히 읽어야 되겠네요?’ 읽는데서 출제 안 나옵니다. 주께서는 먼저 말씀으로 주신 말씀만 기억나게 돼 있지, 우리가 읽은 데서만 나오는 게 아니에요. 범위 밖에서 출제를 냅니다. 왜냐 하면 읽을 걸 해버리면 우리가, 내가 지켰다가 되니까.

여러분, 성경이 항상 기억나던가요? 항상 위반했을 때 기억나는 게 성경이 되겠어요. 성경은 지켰다고 기억나는 게 아니고 위반했을 때, 집에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와서 ‘야야, 내 아들아, 너를 양자로 했는데, 미안하다, 네 허락도 없이 양자로 해서 이제 내가 죽게 되었는데 나는 유산을 가져갈 수가 없어서 네가 한 75억을 다 가져라, 네가 양자였다. 미안하다. 사전에 말 안 해서.’ 이렇게 왔을 때 ‘아저씨, 이것은 가난한 자에게 주세요.’ 이런 사람 없어요. ‘주여 감사합니다. 드디어 지난 고생 했던 거 이제야 보상받는군요. 내가 그동안 새벽기도 한 거 드디어 응답되는군요.’ 받아오잖아요. 오는 순간 그 사람은 지금 어느 길로 갑니까? 좁은 길로 가겠어요? 넓은 길로 갈 가능성이 많습니까? 그 다음부터 골프에다 뭐 하고 차 바꾸고 아파트 넓히고 둘째 아들 집 사주고 첫째 아들 상가 사주고 이제는 난리 났어. 그게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길이죠. 그게 모든 사람이 찾는 길이죠. 그 찾는 길은 지금 좁을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은 사람들이 봐도 안 가는 길이 좁은 길이거든요. 그 사람은 주님의 뜻에 의해서 졸지에 자기가 넓은 길로 가고 있다는 섬뜩함이 느껴져야 돼요.

그래서 말을 정리해 보면 떼돈 벌어서 다시 한 번 좁을 길 느끼게 하시는 주님의 작전에 걸려든 거예요. 그런 작전 좀 걸려봤으면 좋겠어. 우리 딸이 사법고시 1등하고 말이죠. 아들은 의사 고시 1등하고, 이래서 넓은 길 흉내라도 봤으면 좋겠어. 좀 그것도 대한항공에 가서 하라 하고 이쪽으로 또 다른 길이 있어요. 어떤 가수는 고생하면서도 하나님 믿는 가수가 있어요. 알리라 하는 가수가 있어요. 요새는 찬송가도 부르고 돌아다니는 모양 이예요.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다고 해서 우리도 다 같이 그런 고생할 필요 없잖아요. 그쪽은 그렇게 하란 말이죠. 소양은 소양대로 하고 알리는 알리대로 하고 노래 못하는 우리는 또 다른 길 있고 이런 거죠. 하지만 공통점은 뭐다? 그거 전부 다 주님의 작품이고 주님의 다양한 솜씨, 은사다 말이죠.

그 다음에 30절 봅시다. 보면서 또 걱정되네. 29절 이제 알았죠?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자가 선한 일이고, 주님의 선한 일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주님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이제 딴소리하기 없기입니다. 우리가 착해야 예수 믿고 착해야 돼, 이러면 안 됩니다. 지옥 갑니다.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이렇게 돼 있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너희들이 아는 하나님 따로 있고 내가 아는 하나님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은 성경 해석을, 구약을, 당시 구약밖에 없었기 때문에, 해석을 전부 다 잘못하고 있었어요. 그 잘못한 해석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하나님의 신이라 한 대목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신이 된다는 거죠.

요한복음 10장 35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라 돼 있죠. 34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하나님의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말씀을 받는 사람들을 신이라 했죠? 그러면 지금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신들입니까?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상황 속에서 하신 말씀 이예요. 본인이 독백한 게 아닙니다. 산 속에서 혼자 한 게 아니고 ‘너희들이 이런 쪽으로 말씀을 지금 잘못하고 왔다.’ 그것을 고발하는 쪽으로 예수님이 말씀하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 말씀 속에 뭐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너희들 식으로 해석하면 이런 모순점이 발생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들이 사용하는 성경의 해석법이 그대로 예수님 해석법에 담긴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굉장히 많아요.

대표적인 것이 상 같은 거. 큰 상 받으리라 하는. 너희들이 그런 식으로 양적으로 상을 했다면 그렇다면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너희들 상 없어. 하지만 이 상이란 말은 너희들 옹호한 것이 아니고 너희들 식으로 하게 되면 결국은 너희들은 나를 믿지를 못하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 말씀이? 유대인들은 이런 거예요. 모세의 법을 지킨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이 어떻게 모세가 준 법을 지키면서 그 모세 속에서 왜 내가 메시야라는 것을 왜 발견하지 못하느냐,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면 그 이야기 듣고 바리새인들이 모세 율법을 다시 보겠죠. 백날 보세요. 백날 봐도 거긴 예수님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이사야 7장에 보면 크리스마스 때 자주 인용하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이 뭡니까? 임마누엘이죠. 이거는 누가 봐도 4자에요. 누가 봐도 4자죠. 임마누엘, 4자죠. 그런데 예수이름은 임마누엘입니까? 예수입니까? 예수, 누가 봐도 두 자죠.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어떻게 돼 있습니까? 이름을 예수라 해놓고 이사야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과 함께 계신 임마누엘이라. 이거 누가 장난칩니까? 예? 손가락 네 개가 어떻게 두 개가 돼요? 그 해석해 보세요. 임마누엘은 임씨고 예는 예수인데 성이 다른데 그게 어떻게 같은 말이 돼요?

요번 24일 날 저녁에 하필 수요일이 돼서 특별히 성탄절 의미를 담아서 예배한다 하거든요. 우리교회서 다과회 하려고, 다과회 한 적도 없어요. 없는데 우연히 24일 돼서 그냥 다과회 한다 하는데 이 내용을 고만 설교를 할까 갑자기 생각나는데 그 설명이 어떻게 되죠? 이것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설명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아무리 문자적으로 백번을 봐도 안 나오는 설명만 예수님께서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야 그들이 못 믿죠. 그래야 그들이 자기 능력으로, 자기 지식으로 못 믿는 거예요. 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믿어버리면 더 이상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아닙니다. 뭔가 가능성이 있는 세대에요. 끝까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려면 아무리 성경을 보고 해석을 해도 예수가 안 나오게 돼 있어요.

실제로 그런 현상들이 지금 신학교 교수들마다 다 있어요. 신학교 교수들이 예수를 안 믿습니다.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를 않아요. 그냥 자칭 메시야, 또는 유대인의 스승으로 알고 있어요. 구약도 마찬가지고 신약도 마찬가지고. 그들은 뭘 믿느냐? 신을 믿어요. 신을 믿는 게 예수 믿는 거잖아. 예수님은 재벌 2세고, 신은 재벌 총수고, 총수 믿으면 저희 집에 아들 있겠지 뭐. 마치 이쪽을 단계를 거쳐서 그 마지막을 믿으면 뒤 중간은 그냥 들어온 걸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은 신을 믿는 것과 예수 믿는 것은 정 반대거든요. 사도바울이 그걸 증언해줬잖아요. 하나님을 믿으면서 예수 핍박하게 된다고.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걸림돌, 아, 뭔가 응어리 진 거예요. 응어리 진 거. ‘하나님 믿나? 그러면 넌 날 못 믿게 돼 있어. 하나님을 버려? 그럼 날 믿어.’ 그러니까 예수님은 무슨 예수님이냐, 죽는 예수, 하나님 이예요. 죽는 하나님 이예요. 하나님이 죽어요. 그것도 피조물 손에. 세상에 이런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온 아이디어입니까? 사람에서 나올 수 있겠어요? 자식도 아버지를 함부로 못 죽이는데 아니 피조물이 자기 창조주를 때려 죽여요? 일부러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한 거예요. 일부러. 왜냐, 인간의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악마는 예수님이 주로 되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목적은 뭐냐, 중보자를 삭제하는 거예요. 중보자만 삭제하면 남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은 위대하다. 인간은 신이다. 인간은 신이고 인간은 가치 있다가 남아요. 가치 있는 나와 가치 있는 하나님 우리 1:1로 상대합시다. 이게 마귀가 설정한 구조에요. 거기에 신학 교수가 다 넘어간 거예요. 신학 교수들이. 신학 교수 있으면 복음 전하면 되지 않습니까? 복음 전하면 신학 교수 땡! 탈락 이예요. 복음 전하면 신학 교수 남아 있을 수가 없어요. 추방 된다니까요.

제가 아까 동영상 했지만 교목이 복음 전하면 교목 자리 못 있어요. 교목은 해야 될 게 뭐냐 하면 ‘우리 학교 애들 고3이 서울 대학에 많이 합격해서 일류 학교 되게 해주시옵소서.’ 이게 교목이 할 일이고 병원의 원목이 할 것은 뭐냐 하면 어떤 난치병도 어떤 불치병도 우리 병원에 와서 다 병이 낫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 병원이 날로 부흥되게 해줘야 그게 병원 원목이 기도할 제목 이예요. 의사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을 주셔서 남들이 수술 안 되는 수술 다 되게 하셔서 이 병원 크게 해 달라. 그래야 거기서 월급 받고 사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 목사는 뭡니까? ‘주여 이 교회 크게 부흥돼서 여기 있는 장로들 다 돈 잘 벌고 집사들 다 가정 화목해서 하나님의 살아있는 교회 되게 해주시옵소서.’ 갑자기 부흥회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게 교회 목사의 할 일 이예요. 거기서 복음을 전해버리면 ‘여러분 교회 믿지 맙시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이래 버리면 그건 다음 기회에 계약이 안 돼요.

군목은 뭐해야 되는지 알아요? ‘하나님 이 병사들에게 건강을 주셔서 이 대한민국 국토를 이들의 힘으로 지키게 하옵소서.’ 이래야 군목이지, ‘주여 예수 그리스도 믿게 하시옵소서’ 이러면 군목이 땡 탈락 이예요. ‘국가는 짐승의 모습이고’ 이러면 안 돼요.

사사기 때 미가 집에 사적인 목사가 들어왔죠. 그 목사 할 일은 뭡니까? 월급 대주는 대신 그 가정에 축복을 해주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 아주 타락한 사사기 모습이죠. 그 가정의 축복이 가정, 가정 모여서 커지면 오늘 날 교회입니다. 그게 교회에요. 지옥이 보고 싶습니까? 바로 그것이 지옥 이예요.

해석할 때 우리 해석은 항상 성경해석 중에서 내가 선악과 따먹고 신이 됐잖아요. 신인 것을 증명해 주고 그걸 긍정해 주고 그 가치와 자존심을, 영광을 보장해 주는 쪽으로 성경해석을 다하게 돼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너희들마저 신이라면, 왜 나는 신이 안 되는 이유가 없잖아.‘ 이렇게 이야기해요. 둘 중에,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너희들 아비는 뭐라 했습니까? 신이 아니고 너희 아비는 마귀다. 마귀자식이 신이 될 리가 없죠. “너희들 아비는 마귀다.” 라고 질책하는 그 사람이 유일하게 너희들이 알고 있는 신의 범주 바깥에 있는 신이겠죠. 그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와서 우리를 지적을 해줘야죠. 그래서 말합니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한다.” 따라서 날 미워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나는 너희들 눈치 보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요한복음 2장 24절 “23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그 다음에 뭐라고 돼 있죠?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예수여 당신이 예수인 것을 우리에게 증거로 보여주시옵소서.’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 이예요. ‘너희들이 눈치 채는 식으로 내가 너희에게 증거를 줄 의무는 나한테 없다. 오히려 나는 너희를 아는데 너희들은 날 몰라야 돼, 그래야 구원이 돼요. 그래야 주님만 의지하지, 예수 알아챈 나를 의지하지 않게 되잖아요.

사마리아 여인한테 남자 다섯 명 있었고 그와 헤어지고 지금 사귀는 남자는 여섯 번째 남자라 하는 것을 사마리아 여인이 자진해서 신고했습니까? ‘주님, 사실은 제가 여섯 번째 …’ 이랬습니까? 누가 찾아냈어요? 주님이 찾아냈죠. 따라서 자신의 과거나 이런 것을 남편이나 아내한테 이야기하지 마세요. 쓸데없이. 제발 진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어디 신입니까? 자기가 메시야도 아닌데 왜 이야기해요? 그럼 신뢰가 안 되는데? 신뢰 필요 없어요. 언제 신뢰감 있었습니까? 앞으로도 신뢰가 없을 거예요. 절대 그러지 마세요. 과거는 남한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아시는 이미 아시는 주님께 의지하면 돼요. 주께서 아시면 그 과거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면 주한테 맡기고 내가 알아서 이실직고 하지 마세요. 바보 같은 짓입니다. 절대로 하지 마세요. 그리고 나도 기억하지 마세요. 나도 그 과거를 잊어버리세요. 왜 지나간 나의 세월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 사라졌어요.

김광석 가수가 실수한 것은 뭐냐, 서른을 기억했다는 게 문제에요. 서른 즈음을 뭐하는데 기억해요? 서른두 살 먹으면 서른 세 살 되면 되는데 왜 서른 즈음을 해서 맨날 서른 즈음하다가 나중에 자기가 우울증 걸려서… 서른 즈음 하는 노래 있죠? 김광석이 부른, 그거 왜 삼십을 좋아해서...점점 더 멀어져가네. 왜 점점 더 가까이 가네. 이렇게 봐야지, 왜 점점 더 멀어져가네. 왜 점점 더 멀어져가는 걸 왜 기억해요?

사람이 과거를 기억하게 되면 공황장애가 와요. 공황장애, 공황장애라 하는 것이 넓은 공항에 가면 언다. 그게 아니고 패닉 상태, 공황장애가 와요. 공황장애는 뭐냐 하면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강하게 지키다 보면 이런 패닉 상태가 오는 겁니다. 지킬 게 없으면 이게 안 와요. 아이큐 52은 절대로 안 옵니다. 아이큐 24는 절대로 공황장애 안 옵니다. 지킬 게 뭐 있어야지. 지킬 게 있으면 그것이 자기한테 화병이 된다는 거예요.

“놓으라.”고 주님이 그렇게 이야기해도 그는 너무 아까워서 자기 과거에 투자한 게 너무 많기 때문에, 찬란한 역사, 그 찬란한 역사가 너무 손 털기 너무 아까워서 그걸 쥐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걸 쥐고 있으면 하루하루 늙어가는 것이 너무 슬퍼요. 그럼 미쳐요. 김 구라처럼 공황장애로 갑자기 입원하는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시는 것은 지금 네 동네하고 내 동네하고 다르다 이 말이죠. 그리고 이것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때문에 지금 내 말이 안 먹힐 것이다. 하지만 이 성경이 있는 이상은 너희들이 믿던 안 믿던 간에 성경이 너희한테 침투해 들어갈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고야 말리라. 목자는 내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내 손에서 어떤 권세도 내 손에 있는 양을 뺏을 자가 없으리라.

더 기쁜 소식은 내가 찾는 양은 아버지가 찾는 양은 마지막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에 다 살려낸다. 그것이 네가 너에게 그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이거는 아멘 할 것도 없어요. 들어오게 되면 ‘아! 아! 그렇구나.’ 벌써 남들이 모르는 다른 세계에, 그러니까 다른 세계가 뭐냐 하면 내가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현상이 일어나요. 손 대고 있다는 사실, 누가? 나 말고 다른 분이 나 떼고 맨날 손 대고 있다는 겁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건강하게 또 눈 뜨게 되고 이거는 분명히 내가 어제 운동한 게 아니고 ‘주께서 은혜로 또 숨 쉬도록 햇빛을 줬구나.‘ 하는 것을 남들이 느끼지 못한 걸 보게 하는 거. 친히 기르신다는 사실을 느끼는 겁니다. 이것이 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왔다. 이런 소식을 먼저 세례요한부터 먼저 이야기했는데 너희들이 ’내 그럴 줄 알았어. 세례요한이 전한 걸 너희들이 안 믿었어. 그 다음에 내가 오면 세례요한처럼 안 믿을 거야. 하지만 안 믿더라도 죽어서 깨어나는 일이 있더라도 믿게 할게.‘라는 그 전략을 그 뒤에 27절-30절까지 쭉 적어놓은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피조물이란 자체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창조자 없는 피조물 없다는 요 짧은 간단한 사실마저 우리가 너무 잊어버렸습니다. 우리가 피조물이기에 창조자 뜻대로 하도록 맡기는 그런 믿음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가락-요한복음 5장29(예수 스캔들)141218b-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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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7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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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