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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성전뜰 치수 150204우리교회에스겔

성전뜰 치수 150204

이름 : 이근호(IP:119.18.93.36)

성전 뜰 치수(에스겔 42:1)

이근호

15-02-04 21:15

뜰 치수

2015년 2월 4일 본문 말씀: 에스겔 42:1

(42:1) 그가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북편 뜰로 가서 두 방에 이르니 그 두 방의 하나는 골방 앞 뜰을 향하였고 하나는 북편 건물을 향하였는데

성전에 들어선다는 말은 성전 밖에 우리가 가졌던 시선을 유지해서는 아니된다 는 말입니다. 성전 밖에서의 인간들은 자기 얼굴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대상이 됩니다. 쳐다보는 목표물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저것을 본다”가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헤롯 성전을 볼 때에 그렇게 보았습니다.

“저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단다.” 바로 이러한 관점이 성전 밖에서 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성전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이 시선은 사라져야 합니다.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전에 의해서 보여지는 그 관점에 우리 자신이 동의해야 하고 합류되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것을 ‘예수 안’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 안’에 들어오게 되면 ‘예수 밖’의 안목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안목은 죽어 사라져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나를 보고 “누구세요?”할 정도가 되어야 됩니다. 내가 나를 보면서 이웃을 보듯이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주장, 자기 기대, 자기 희망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늘 새롭게 창조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에 기억되어 있는 자아상은 오늘이 되면 잊어야 합니다. 그리고 버려야 합니다. 버리는 방식은 자신이 한 모든 것이 말씀에 비쳐볼 때, 실패자라는 것을 자각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답이고 성경이 문제라고 여깁니다.

곧 성경 말씀은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주어졌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닙니다. 답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문제거리, 골칫거리입니다. 도대체 인간들이 얼마나 말썽을 피웠으면 예수님께서 저토록 수모를 당해야했느냐를 보라고 성경이 있는 겁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렸듯이, 에스겔에게 보여진 새성선 조감도는 이스라엘에 전에 있었던 성전이 불타고 난 뒤입니다. 따라서 왜 전의 성전이 불탈 수밖에 없는가를 이스라엘이 깨달아야 함과 동시에 진정한 말씀 완성으로서의 새성전은 친히 하나님에 의해서만 건립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로 하여금 영원히 실패한 민족이라는 점을 굳히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새성전은 반드시 언약적으로 인간이 실패한 그 지점에서만 세워집니다. 그 실패한 이유는 바로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이 살 궁리를 챙겼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한 성전을 늘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규정하시고 참된 성전의 존재이유와 맞지 않으신다는 차원에서 불태워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새성전이 들어섰습니다. 성전이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말은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성전이 특정 장소에 고정되었다는 말은 더 이상 완성될 율법은 없다는 말입니다.

새성전 안에 모든 율법은 완성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전이 신약에 와서는 그림자요 모형으로 드러납니다. 이는 성전이 가현체로 유지되는 한 인간은 자신이 기대한 시선에 따라 생전을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보고 싶은 성전이 저렇게 하나님께서 세워주셨구나. 이제 우리는 저 성전에서 예배드리며 살면 영생이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기존에 유지된 자신들의 안목이 그대로 적용한 결과일 뿐입니다. 성전 밖의 안목이어서는 아니됩니다. 성전의 안목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성전 안의 안목은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이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저 성전 할라 내가 사흘만이 짓겠다”(요 2:19)

이는 그들이 기대한 성전을 사흘만이 짓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을 두고 말합니다. 즉 처음부터 예수님만이 성전이었고 건축구조물의 성전은 예수님의 긴 그림자였고 모형이었습니다. 모든 율법의 완성체는 성전이라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입니다. 성전이라는 건물이 어떤 식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로 일치될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천사가 선지자를 북쪽 뜰로 나아가 두 방 있는 곳으로 데려갑니다. 방 하나는 안쪽을 바라보는 방이요 다른 한 방은 바깥 쪽을 바라보고 그 두 방 사이에는 통로가 나있습니다. 이는 제사장이 아닌 자는 얼씬도 말아라 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6:65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즉 아무나 성전 안에서 일할 수 없다 는 말입니다. 거룩한 제사장과 일반인을 구분하는 방이 바로 두 방입니다. 성전은 모습은 일견, 사냥하는 엽사들이 탄창을 넣어다니는 조끼를 따로 껴입은 형세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성소와 지성소이며 그것을 키 큰 나무들을 심어서 그 귀한 것을 보호하는 듯이 감싸는 것처럼 3층 높이의 부속건물들이 성소와 지성소를 이중으로 보호합니다. 동일한 건물로서 한 번 보호하고 제사장 뜰 주위에서 3층으로 또다시 보호하는 형국입니다.

그 보호벽같은 방들에는 제사장들의 숙소와 옷과 식량과 제물의 보관창고 같은 것들이 줄이어 있습니다. 왜 그리 중앙부가 중요합니까?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성소와 지성소가 그토록 중요하단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5:22에서는 언약궤 위에서만 만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신약 시대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남의 장소를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외면한 바로 그 ‘예수 안’에서만 만나십니다. 그 장소는 인간들이 실패한 장소입니다. 자기 시선과 안목을 버리지 않고 세상과 천국을 봤던 그 우상숭배적 힘이 죄로 들통난 그 지점에서 만나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전이란 곧 예수님이 찾아든 성도의 몸입니다. 비록 지금은 좁아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육신이 제거되는 날, 천국은 무척이나 넓은 곳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광에 합당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물이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와 새로운 생명들을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자신이 실패자임을 미리 인정하는 자기 안목을 버린 자들만 갈 수있는 곳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답이 아니라 예수님이 답이고 우리는 그 답을 위한 문제로 출생했음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2-05 19:58

124강-에스겔 42장 1절(성전 뜰 치수)15020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2장 1절입니다. 구약성경 1218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2:1

“그가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북편 뜰로 가서 두 방에 이르니 그 두 방의 하나는 골방 앞뜰을 향하였고 하나는 북편 건물을 향하였는데.”

성전 구조에 대해서 계속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집 안에 우리가 지금 들어가 있습니다. 집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다면, 신약적으로 이야기해서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거든요. 예수 안에 들어 있을 때에 우리가 예수님 바깥에 있을 때의 그 평소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던 그 시선은 우리가 포기를 해줘야 됩니다. 예수님 바깥에 있을 때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견주어서 ‘나는 이것밖에 안 돼. 나는 이만큼 잘났어.’ 그런 것이 우리 마음속에 습관화 되어 있고 우리의 정신세계를 형성했거든요.

그런데 주님 안에, 오늘 본문대로 하면 성전 안에 들어가게 되면 내가 나를 보는 것이 아니고 나 바깥에 어떤 분이 나를 주시하고 있고 주목하고 있습니다. 다른 시선이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도 이렇게 봐야 돼요. 내가 나를 볼 때 남 보듯이 봐야 되는 겁니다. “반갑다, 친구야!” 가 아니라 “누구야, 너?” 날마다 우리는 그렇게 봐야 돼요. 어제가 지나고 오늘이 되었잖아요. 그러면 오늘에 보는 시선은 어제까지 생각했던 어제의 나를 ‘누구지 너?’ 이렇게 봐야 됩니다. 오늘은 내 작품이 아니고 주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새롭게 미래에 부합되도록 새로운 요소를 가미해서 거기에 주를 만날 때 적합하도록 또 한걸음 하루를 더 새롭게 창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시선을 우리가 성전에서 알아야 되는 겁니다. 성전에서 알아야 되는데, 40장, 41장, 그리고 42장을 죽 보게 되면 알기는 알아야 되겠는데, 치수만 나와 있고 측량만 나와 있는데, 여기서 뭘 배우겠어요? 여기에 율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시와 명령도 없고 건물 구조만 딱 있는데 그거 가지고 뭘 어떻게 배우겠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우리 자신을 하나의 바이러스, 병균이라고 생각합시다. 병균이 되어서 피부가 찢어진 그 틈새를 통해서 우리가 인간의 어떤 몸속에 들어왔는데, 거기는 늑골이 있고 간이 있고 심장이 있고 위가 있는데, 거기서 배울 것이 뭐가 있습니까? 조그만 벌레인데. 창자도 있고.

‘두뇌 쪽으로 가볼까?’ 갔다가 ‘이제는 심장 쪽으로 가볼까?’ 가 봤다가 ‘이제는 발바닥으로 가 볼까?’ 가 봤다. 뭘 배우는 겁니까? 갈빗대도 지나갔다. 몸통 안에 들어 있으면 몸은 보지 못하는 거지요. 그래서 성전 안에 들어와도 성전을 이해 못하는 겁니다. 천사가 성전을 측량할 때는 성전 전체의 모양새를 알고 거기에 맞추어서 측량을 하는데 우리가 여기 40장, 41장, 42장에 나오는 측량은 이 측량만 보이지 우리가 포함되어 있는 그 덩치 전체를 볼 줄을 모르지요. 그래서 우리가 40장, 41장, 42장을 하면서 이 건물 구조에 대해서는 제가 별로 언급을 안 했습니다.

해봤자, ‘아, 그런 건물이 있었네. 그런 건물 나도 한 번 지어볼까?’ 이것밖에 안돼요. 그러면 자기가 건물 바깥의 여전한 자기시선을 갖고 있는 셈이 되어버려요. 건물 안에 들어가서 웅장한 건물 그 덩치 속에서 ‘내가 누구시죠?’ 하고 자기 자신을 지워버려야 되는데 자기 시선을 가지고 어떤 바깥의 건물을 보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대상이 되고 ‘저 건물 참한데? 나도 지어봐야지.’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에스겔 40장, 41장, 42장의 치수대로 기껏 지은 성전이 헤롯성전인데 크기는 이것보다 작아요. 부동산구입비가 적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이 모양새는 얼추 비슷하게 지었습니다.

그래서 뭐? 뭐 없어, 그래봤자 나중에는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서 다 불타버렸는데요. 이미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성전 불탄다, 성전 불탄다, 계속해서 예수님이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네 시선 불탄다. 네 시선 불탄다. 네가 보고 있는 그 성전이 그게 성전인줄 아나? 그거 불타버린다.” 그게 불타버린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고생 좀 한다는 그 말입니다. 성전이 있음으로서 나의 시선이 함께 있다는 그 말은 주님의 예언에 의해만 그 시선도 홀라당 불에 타버려야 돼요.

이렇습니다. 말씀만 남고 우리는 사라져야 된다는 그런 이야기에요. 말씀만 남고 우리는 사라져야 된다. 에스겔 40장, 41장, 42장이 말씀이라면, 이 말씀대로 된다면 내가 사라져도 그것만 턱하니 있다면 우리는 자족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 된다는 그런 식으로 성경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없는데, 만족할 수 있는 주체도 없는데 내가 없는 사이에, 내가 빠진 상태에서 성전이 지어져버리면 그게 무슨 즐거움인가, 하는데 하나님께서 새 성전을 지을 때는 반드시 우리의 시선이 주님의 시선 안에 포함되도록 그런 조치를 해놓고 주님의 안목에 함께 있어서 예수님이 만든 새 성전을 같이 즐거워하도록 조치를 해주십니다. 걱정 안 해도 돼요. 그걸 가지고 그리스도 몸의 지체라 합니다.

내 몸은 사라져요. 내 몸은 사라지지만 내 몸이 안 사라지면 이 몸 가지고 천국 가지도 못할뿐더러 달랑 이 몸 가지고는 천국에 넣어주지도 않아요. 내 몸은 사라지고 그리스도 몸으로 이전해서 그리스도 몸에 붙어 있는 돌출부, 지체가 돼야 돼요. 지체가 될 때 비로소 이 성경의 의미를 같이 감상하면서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성전이 있다는 것은 결국 우리한테 ‘우리 자신을 제거해도 괜찮아. 너는 없어져도 괜찮아.’ 하는 든든함을 우리에게 먼저 주는 겁니다.

성전측량이 글자로 되어 있으니까, 이 성전이 치수만 죽 나오니까 “어떤 식으로든 성전이 단박에 한 눈에 팍 들어오도록 설명할 수는 없습니까?”라고 하면 왜 없겠어요? 알려 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사냥꾼, 엽사라고 하지요. 엽사들이 겨울에 사냥철의 복장을 보면 장총을 들고 옷 위에 탄약이 꽂힌 조끼를 하나 더 입고 있지요. 성전의 구조가 뭐냐? 탄약이 꽂힌 자켓을 하나 더 껴입는 형식이 성전의 구조입니다. 물론 성전에는 탄약이 서른 개 꽂혀 있고요.

30개의 방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안쪽을 보호하는 형식이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안쪽의 조그마한 방, 5미터와 10미터, 합이 15미터, 10미터는 성소, 그 옆에 붙어 있는 지성소는 5미터, 성소의 반 밖에 안돼요. 합쳐서 15미터 되는 그것이 제일 중요한 대목이거든요. 그 중요한 대목을 양쪽에 엽사들이 자기 탄약이 든 조끼를 입는 것처럼 여기에 거대한 전나무나 소나무나 넝쿨나무, 그런 나무가 우뚝 서서 내려다보는 식으로 그걸 지키는 거예요. 마치 요람에 애기 하나 누워 있으면 늙수그레한 동네 노인들이 다 나와 가지고 “아이고, 애가 예쁘다.” 하고 들여다보는 그러한 정경, “이렇게 예쁜 애가 다 있나?” 하고 들여다 볼 때, “좀 비켜라. 나도 좀 보자.” 하면서 조그마한 그것을 양쪽에서 죽 지켜보는 거예요.

지켜 볼 때 방이 30개짜리 3층 건물이 지켜본다고 하는 겁니다. 성전은 중요한 것이 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3층짜리 건물이 지켜보고 있고 건물 그 옆을 제사장 뜰이라고 하고 제사장 뜰에 또 3층짜리 건물이 있어서 또 지켜보는 거예요. 여기에 아주 중요한 것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저는 40장을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기억나십니까? 이 성전의 정답은 뭐냐? 예수님의 공생애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헤롯대왕은 에스겔에 나오는 이 성전을 그대로 흉내 내서 성전을 지었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천사가 측량해야 될 이 성전을 인간이 지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해답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해답은 예수님이 해답이고 우리는 해답이 아니고 문제꺼리에요. 학교에 문제꺼리 있잖아요. 맨날 담배피우고 결석하는 문제꺼리들이 있잖아요. 우리는 문제꺼리고 답이 예수님인데 우리가 답이라고 생각하고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에스겔 40장, 41장, 42장, 이 성전이 나오니까 “옳다구나. 내가 잘되기 위해서 이 성전 주셨구나.”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성전 보면서 “자, 치수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넘어갑시다.” 뭘 넘어가? 백날 넘어가도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데 뭘 넘어가요? 뭘 알았다고? 안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반대로 안 거지요. 성경은 요한복음 5장에 있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이 성전에 나오는 모든 치수는 예수님의 공생애,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다음문제. 성전이라는 것이 건물인데 이것이 인간의 생애와 어떻게 매치가 되고 연결이 되느냐 하는 그 문제가 남겠지요.

여기서 귀한 것이라고 아까 제가 힌트를 드렸지요. 귀한 것을 누가 지키느냐 하면 제사장이 지킵니다. 문지기방도 있는데 문지기 방은 레위지파겠지요. 어쨌든 제일 중앙에 지성소, 제일 귀한 것이 있고 그 다음에 24시간 돌아가면서 철야근무를 하는데 근무하는 사람이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들은 그게 자기의 직장이에요. 크기가 250규빗이니까 백 이십에서 백삼십미터 정도의 방, 그게 자기 직장입니다. 거기 많은 방, 방이 180개가 있는데 그 많은 방에다가 제사장이 갈아입을 옷, 그리고 제사장 뜰에 커다란 3층 제단이 있어요. 42장 중간에 보면 나옵니다.

3층 제단에서 매일같이 바쳐야 될, 상번제죠, 일상적으로 매일 바치고 다 바치는 제사를 아침저녁으로 계속해서 드려야 됩니다. 그걸 하려면 제물을 보관하고, 그걸 처리하고 제물을 잡는 기구들이 있어요. 또 제단 뜰에 보면 3층 제단만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물솥이 있어요. 솔로몬 성전에서는 물을 담는 물두멍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어요. 황소 열 마리가 받치고 서 있는 그게 있는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런 모든 장치가 고정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거든요. 이것은 움직이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예수님은 돌아다니셨잖아요. 몸이 움직인다는 그 말이지요. 그러면 이게 어떻게 매치되느냐 하면, 모든 말씀이 완성이 될 때는 이게 매치가 돼요. 죽은 문자가 산 인물로, 특정 인격자로 전환되고 변해버리는 겁니다. 말씀 적은 카드가 열 개가 죽 있다면 뿅, 하는 동시에 이게 사람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깔아놓은 카드의 열 개의 말씀을 몽땅 다 이룬 셈이 돼버려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걸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제자들은 건물 짓는 줄 알았지요. 성전이 건축구조물로 딱 그 지점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완료되었다, 완성되었다, 드디어 더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하나의 건물이 그 자리에서 마지막 건물, 마지막 성전으로서 터를 잡았다는 말은 모든 말씀, 율법의 완성체가 하나님 쪽에서 제공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인자는 새성전 오기를 기다렸지요.

왜? 새성전이 오게 되면 그게 완성이고 그 완성된 건축구조물에서 물이 나오고 그 흘러나온 물로서 주변의 성읍을 이루고 그 성읍이 제 2의 에덴동산으로 다시 소생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모든 말씀은 완성이 되는 거지요. 그렇게 건물의 구조가 그렇고 물이 흐른다, 그리고 새로운 읍성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할 때의 이 시선은 뭐냐 하면, 우리 인간들이 평소에 마을에서 살면서 일상생활을 하던 그 시선으로 표현된 말씀의 완성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 처음에 시선을 바꾼다고 했잖아요. 시선을 바꾸는 거예요. 시선을 바꾸어버리면 그 모든 새성전 이야기, 건물, 물 나오는 것, 성읍, 이 모든 것이 그림자요 모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림자라 하는 것은 잃어버린 실체가 따로 있다는 거예요. 따라서 그러한 이미지는 내가 그런 이미지가 있어야 우리가 마음속에 그려보는 당사자가 예수님과 교체가 되면서 사라져줘야 되는 겁니다. 논리가 보통 복잡하고 어려운 논리가 아니에요. 우리는, 인간은 뭔가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회복하기를 기대해서 에덴동산에서 사는 것처럼 우리도 살기를 원하고 있지요. 그게 우리 시선이고 우리의 희망이고 우리의 소망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대와 소망에 부응해서 “너희들이 이런 세계를 원했잖아.” 하고 보여주시면서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그림체이거든.” 하고 찢어버리고 그 찢는 그 분이 바로 모든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분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이 오신 게 아니고 먼저 석양의 긴 그림자처럼 그림자부터 깔고 가는 것은 인간들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어떤 점에서 실패했고 어떤 점에서 실수했고 어떤 점에서 범죄 했는가를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충분히 드러내 줄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인간은 실수하고 실패할 때, ‘그래. 지금이 아니고 나중이야.’라는 어떤 희망을 품게 될 겁니다. 그 희망의 끝자락에 주께서 말씀의 완성인 새성전의 조감도를 배치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지난 시간에 설교한 것처럼 그걸 보고 ‘그래, 우리가 참 좋은 성전이 있었는데 우리의 우상숭배 때문에, 우리의 죄 때문에 그게 불타버렸구나. 역시 우리는 안 돼. 그런데 에스겔을 통해서 진짜 성전이 오신대. 그래? 그러면 우리가 희망이 있는 거야. 어서 그 성전이 왔으면…….’ 하는데 에스겔을 통해서 완성된 새 성전을……, 완성이기 때문에 측량하거든요. 이미 준공허가가 났기에 측량한다 그 말이지요. 준공허가, 하나님의 허가가 난 그 성전을 이렇게 둘러보면서 “야, 좋다, 좋아! 그런데 여기서 물까지 나와.” 45장에 보면 물이 나오지요. 물이 나오고 거기서 제사가 드려지고 돌아가신 다윗 임금님이 살아서 거기로 들어와요.

“우리는 실패했는데 진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스스로 완료시키는구나.”하고 기뻐하면서 나중에 예수님 오시게 되면 그 기뻐하는 그것이 하나의 연극무대였다는 거예요. “자, 세트 치웁니다. 연극은 이제 끝났어요.”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연극이 끝난 후”라는 노래에요. 조명은 꺼지고. 연극이 끝난 후에 객석에 앉아서 ‘무슨 일이 있었지?’ 에스겔 40장, 41장, 42장, 예언이 있었지요. 주께서 말합니다. “헐어버려라.” 연극은 끝났어요. 이제는. 그것은 예수님 발밑에 늘어난 하나의 그림자였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성전입니다. 이 땅에 성전이라 하는 것은 거룩한 곳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수님 자체가 초라하고 밉상 받았기 때문에. 밉상 받는 자가 성전입니다. 주님 복음 때문에 욕 얻어먹는 사람이 성전입니다. 아직도 유대인들은 인간의 예술, 건축술과 인간의 재능을 다 동원해서 그들의 시선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거룩해 보이는 어떤 건축구조물을 성전이라고 여깁니다. 지금도 그들은 서쪽 벽을 두고 벽에 고개를 묻으면서 통곡의 벽이라고 해서 “어서 메시아가 오셔서 이 팔레스타인을 쫒아내시고 IS는 다 죽어버리게 하시고……” 이런 식으로 아직도 기도하고 있어요. 미국의 유대인들은 돈 벌어서 헌금하고 있고.

이 모든 것은 나를 남 보듯이 보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서 하나님이 성경말씀대로 달성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7년대 환란도 마찬가지고. 이런 엉터리 같은 해석이 나오는 이유가 나 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답이고 주님께서는 이 답을 답답게 만들어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네가 답이냐? 그래 답으로 해서 한번 살아봐라. 성경말씀과 맞는지.” 그래서 유대인들이 자기가 답이라고 여기고 성경말씀을 지켰는데 그 지킨 유대인들이 누굴 살해했습니까? 예수님을 살해한 거예요.

예수님이 답이고 우리는 골칫덩어리지요. 답이 답인 줄도 모르고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 상을 만든 우상 숭배자였던 겁니다. 성전의 귀한 것, 제사장들이 그 많은 방에서 옷 갈아 입고 교대하면서 근무하고 이방인들을 전부 다 모으도록 하는 거거든요. 42장 1절에 보면, “그가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북편 뜰로 가서 두 방에 이르니” 해서 방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안쪽을 보고 있고 또 하나는 바깥쪽을 보고 있어요. 이 말은 들어오지 말라는 말이지요. “어딜! 제사장외에는 들어오지 마세요.”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제사장외에는. 더러움과 거룩함을 딱 구분하는 겁니다. “여기는 제사장외에는 못 들어옵니다.” 하는 거예요.

이것이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어떻게 되는가하면, “아버지가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더 나아가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이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여기 포인트가 뭐냐 하면, 과연 진짜 중요한 게 뭐냐 하는 거예요. 성전이 마지막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데 왜 성전이 율법의 완성인가, 라고 한다면 그 안에 중요한 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냥 중요하다, 중요하다, 할 것이 아니라 그게 뭐며 왜 중요하냐는 말입니다.

그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출애굽기 25장 22절에 보면,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만남의 장소에요. 고속도로 휴게소에 만남의 장소가 왜 그리 많은지. 톨게이트보다 많아요. 만남의 장소가. 이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가 단군의 자손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고 필리핀도 아니에요. 오직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 이스라엘도 그냥 이스라엘이 아니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이스라엘의 증거궤, 조그마한 그 상자, 30센티쯤 되는 그 상자위에서 만나자.

“하나님 만납시다.” “상자 위에서 만나자.” 그 말입니다. “카페베네에서?” “아니 카페베네 말고 상자 위에서. 상자 위에서 만나자.” “하나님, 왜요?” 그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너는 두 번 다시 만날 자격이 없다는 증거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너는 나와 만날 자격이 없다. 그래서 네가 나와 만나자고 요구할 입장이 못돼.” 하지만 아버지께서 내게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네게 올수 없었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만나라고 이 땅에 출생한 사람이 있어요. 그건 주민등록에 번호로 안 되어 있습니다. 주민등록 번호로서는 아버지가 보낸 사람과 마귀가보낸 사람이 구분이 안 되어 있어요.

만남이라는 것은 만나게 된 사람의 특징, 공통점이 있어요. 주께서 호출했다는 고백을 합니다. 주께서 호출했다. 기도했더니 만나고, 열심히 했더니 만나고, 헌금했더니 만나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열심히 달음박질해서 만나는 것도 없습니다. 달음박질해서도 못 만나고 원해도 안 만나져요. 다만 만날 기회는 뭐냐? 네가 네 쪽에서 어떤 시도와 행위를 했느냐가 아니라 오직 행위 없이 그냥 은혜로, 불쌍히 여겨서 만나주는 사람만 만나게 됩니다. 그걸 사도바울은 영생주기로 작정된 사람이라고 합니다(행 13:48). 영생주기로 작정한 사람.

그래서 만난 사람의 특징이 뭐냐? 그 만남의 장소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특징이 있어요. 어떤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은 내가 만든 조건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건이 되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우리교회 게시판에 어떤 분이 질문을 했지요. 야고보서의 행함 없는 믿음이 뭡니까, 라고 이야기했지요. 행함 없는 믿음에서 그 행함의 조건은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것이지 우리 쪽에서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만남의 장소가 자기 아들 죽는 장소가 만남이었고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 속에 움직이는 언약궤가 만남이에요. 자기 나라는 언약궤가 없으니까. 자기 나라는 언약궤가 없어요.

아무리 외국선수가 한국축구를 탐을 내도 그 나라에는 손흥민이가 없습니다. 박지성이가 없어요. 손흥민이 있는 곳은 대한민국축구팀이지요. 기생 라합은 여리고성 사람인데 그 쪽은 언약궤가 없어요. 만남의 장소가 없습니다. “만남의 장소가 어디입니까?” 물으면 네가 깨지면 돼요. 네가 실패자고, 죄인 중에 괴수이며, 나는 살 가치도 없는데 매일같이 주께서 살려낸다는 그런 고백을 한다면 그런 고백이 나오는 출처가 주님과 만났기 때문에 나오는 고백입니다. 다른 고백은 다 거짓말입니다. 교회요? 그것은 소유대상이에요. 교인 몇 명 나오는지 헌금이 얼마나 나오는지를 묻는 자체가 하나의 자산으로 측정을 했다는 거예요. 한 250억짜리쯤 되나?

뭐든지 계산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소유대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소유한다는 것은 뭐냐? 내 쪽에서 교회를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사라진 장소에서 내가 해답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그것이 성전인데 “괜찮은 내가 어느 교회 가면 구원 받습니까?” 이렇게 되면 이것은 바로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 하는 사고방식과 동일한 사고방식이 되는 겁니다.

그 만남의 장소에서 출애굽기 40장 마지막에 보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피어나지요. “너는 네 갈 길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알거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왜 주님은 압니까?” 내가, 주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 그 가는 길을 개척해요. 어떻게? 전쟁을 통해서. 주의 이름으로 하는 전쟁을 통해서 인간으로는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는 가시덤불,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홍해, 여리고성, 이런 것 다 헤칩니다. 다 헤쳐서 길을 만들어요.

그런데 베드로도 못 갔던, 베드로가 가고자 했던 마지막 것, “목숨 바치겠습니다. 주님 따라가게 해주세요.” “오지 마라. 너는 목숨 바쳐도 못 간다.” 이것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고. 목숨 바쳐도 못 갈 정도로 우리는 갇혀 있는데 그것을 주께서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내가 다시 올게.” 그 길이 뭐냐?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곧 길이에요.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와 버리면 이제는 안가도 돼요. 안가도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면 거기서 주님이 함께 만나십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너무 좁은데요?” 물론 좁지요. 평수가 몇 평 안 되잖아요. 너무 좁지요. 너무 좁은데, 분명히 좁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언제까지 좁으냐하면, 우리가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좁아요. 그런데 죽어버리면 너무 넓어요. 제 이야기가 아니고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야, 모세, 키도 몇 센티 안 되고 몸무게도 몇 킬로그램 안 되지요. 하지만 예수님 만나니까 엘리야와 모세가 아주 허물없이 무려 700년이라는 간격을 뛰어 넘어서 친구처럼 같이 만나네요. 아브라함, 이삭도 마찬가지고. 하늘나라가 너무 넓어요.

그것도 모르고 베드로는 “여기가 좋사오니 빌라 세 채 드리겠습니다.” 빌라 세 채 해봐야 평수 몇 평 나간다고. 우리 육신, 이것밖에 안 되는 나의 시선이 있기 때문에 천국이 좁아 보이지만 이 육신이 떠나버리고 이제는 천사와 같이 주님 만날 때는 널널하게 노셔도 됩니다. 마음껏 뛰놀아도 돼요. 생명수 강가에서. 지금은 이 육신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더 넓어 보이고 주님 계신 곳은 좁아 보이지만 생명수가 흐르는, 요한계시록 22장 이야기입니다, 생명수가 흐르는 그 장소가 어린양의 보좌고 그 보좌가 성전이고 성전에 흐르는 그 물로 천국에 있는 사람은 다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서 이런 말을 하거든요. “너희는 이미 죽었고.” 우리의 시선도 소용없고 네 시선 보지 말고, “너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하늘의 입장에서 너 자신을 다시 보라. 그러면 네가 볼 때 남같이 느껴질 것이다. 네 몸이 아니고 주께서 창조해나가는, 매일같이 주님의 자신의 몸을 닐 낚시처럼 자기 쪽으로 감아서 잡아당기는 모습으로 가게 된다면 그렇게 좋아 보이는 이 세상도 비좁아 보이고 별로 재미있는 일도 없을 거예요. 물론 맛있는 것은 맛있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맛있는 것이 있으니까. 이 이야기 듣고 상처 받았다니 내 마음이 참 아픈데. 제가 고맙다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참 고맙고 생기면 또 주세요. 하여튼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곳이 있다는 것, 주께서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고백,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는 고백을 통해서 자기 쪽으로 잡아당깁니다. 그것이 새 성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 전이라고 분명히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예배당이나 그냥 교회가 성전인지 알았습니다. 이제는 내 시선을 구겨버리시고 베드로처럼 집 세 채 짓는다는 철없는 이야기하지 말고 주께서 만드시는 인생인 것을 늘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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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7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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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