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50119b-히9장11절(장막 뒤에) - 이 근호 목사
안양20150119b-히9장11절(장막 뒤에)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6.154)
안양20150119b-히9장11절(장막 뒤에) - 이 근호 목사
자, 지난시간에 장막 커튼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전에 있던 모든 제사제도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로 이어지거든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리스도에게 이어진 그 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올라갑니다.
순서가 이렇게 돼요. 여기 율법이 있잖아요. 율법 같으면 율법을 어디에 줬는가, 이스라엘 내부에 율법을 줬습니다. 그러면 율법의 본 장래일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해서 어디에 가느냐 하면, 아버지께로 가요.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은 아직 이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어요. 다만 그들은 하나님과 주신 율법과 만났지요. 율법과 만났고 그들에게 율법을 준 동시에 율법을 이루실 하나님도 함께 동승, 동행하게 되는 겁니다. 어쨌거나 저렇거나 그들은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어요.
이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난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아무도 아버지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만나요. 원래 하늘나라의 법칙이에요. 법칙. 중보자 없이는 만날 수 없습니다. 중보자 없이는 만날 수 없다는 말은 중보자가 안 오면 인간은 영원히 하나님과 대척관계에 있지요. 그게 바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의 취지입니다. “나가!” 끝났어요. 하나님께서는 늘 인간이 못 만난다는 것을 분명히 확정지었습니다. 짓고 난 뒤에 만나는 경우는 생기는데 어떤 경우냐 하면 조건이 있어요.
중보 자에 의해서 받아진 사람만 그것도 니 이름이 아니고 나 착함의 이름이 아니고 중보자를 중보자라고 인정하는 조건하에서만 아버지와 함께 살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그 때는 너희가 나와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의 내용은 뭐냐, 사람에 대해서 기록한 게 아니고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시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겁니다. 이걸 개인이 하나님 만나기 위해서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다는 것도 우리가 알아서 아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알려주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그것은 아버지하고 예수님 사이만 아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라는 조건에서만 찾아가고 다른 사람은 안 찾아갑니다.
항상 우리가 주님을 알겠다. 또는 주님을 믿는다. 할 때는 안 믿게 해주심을 항상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이걸 놓쳐버리면 자신이 얼마나 특혜를 받았고 얼마나 큰 배려와 사랑을 받았는지를 우리가 놓치게 돼버려요. 내가 주님을 알았다는 말은 분명히 모르게 하신 분이 모르게 하는 대상이 따로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이야기해야 돼요. 내가 부지런을 떨어서 알게 되고 저 사람은 게을러서 모르고, 그게 아니고 아무리 부지런 떨어도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절대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지런해도.
자꾸 어긋난 길로 가요. 자꾸 노력해봐야 어긋난 길로 가요. 바리새인만큼 부지런한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요. 없어요. 최고로 율법대로 살았던 사람들이 바리새인이지요. 그런데 그 바리새인마저 전교1등이 탈락인데.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하니까 천국이라 하는 것은 피라밋 제일 꼭대기에 있는 사람도 천국에 못 간다면 그 밑에 있는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세리와 창기를 구원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그 세리와 창기를 구원한 것은 세리와 창기 때문에 구원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들이 필요해서, 창기라는 세리라는 그 직업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로 해서 한 겁니다. 그래서 백날 창녀질 해봐야 주께서 찾아오지 않으면 창녀도 해봐야 구원 못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율법을 통해서 뭘 알아야 되는가 하면, 율법 안에 택한 백성만 따로 건지고 나머지는 배제된다는 그 내용도 율법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같이 찾아내야 율법 해석이 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 15절에 나옵니다. 점점 이렇게 세상을 배척하고 히브리서9장만 들어가니까 어렵지요? 어렵지만, 우리가 좀 냉철하게 차갑게 세상을 볼 필요가 있어요. 너무 감정 넣지 마시고요, 자기 눈물, 콧물 의미 두지 마시고요, 좀 차갑게 얼음장처럼 차갑게 “내가 없더라도, 내가 죽더라도 주께서 하실 일이 뭐지?” 이렇게 되어야 되지 “내가 여기 있나이다. 어떻게 저를 사용하실지” 그렇게 하지 말고 “너 같은 거 필요 없어.” 해도 주의 일은 차질 없을 정도로 뭔가 차갑게 진행되는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 새 언약의 중보,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의 중보니,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 ‘새’라는 말이 영어로 하면 NEW가 됩니다. 새로운 언약이거든요. 새로운 언약이라는 것은 올드(old), 옛날 언약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요. 여기서 여러분한테 물어봅시다. 왜 언약이 하나면 하나지 통일되지 않고 왜 구와 신, old와 new로 나눠질 이유가 뭐지요? 성경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 안 들었던가요? 옛날에. 왜 둘로 나눠져 있지요? 깔끔하게 약 하나 먹고 회충, 십이지장충 다 떨어지면 되는데 이거 뭐 해야 되고 뭐하다 보면 우리는 짜증나서 안 하잖아요. 한 알만 딱 주고 먹고 나면 쫙 모든 게 마무리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따로 주시느냐 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한테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한테 이유가 있어요. 이럴 때는 결론부터 내리는 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철저하게 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저주받아야 돼요. 그럼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죠. 그럼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저주 받을 때 가장 하나님다워요. 이거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저주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은 완성이 돼요.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 줄 알아요? 저주라는 말을 제일 싫어해요. 우리는 저주받는다고 하면 제일 싫어하잖아요. 반대로 은근히 축복을 기대하기 때문에 저주라 하면 마치 나한테는 해당사항 안 되는 것으로 하는데. 이 저주가 없는 사람은 저주를 모르면 안 되게 돼있어요. 왜냐 하면, 하나님 본인이 저주를 없애는 게 아니고 오히려 저주를 살리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저주를 살렸어요. 우리가 싫어하는 저주를 하나님 쪽에서는 확대시켜버린 겁니다.
그리고 그 저주에 본인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옛 언약은 어떤 언약인가 하면, 저주가 있는 언약이에요.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저주가 있을지어다. 신명기28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지키면 복 받고, 못 지키면 저주 받는다.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가 출제위원이거든요. 자기가 문제 내놓고 틀린 답을 할 리가 없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결코 저주받을 이유가 없지요. 정답이니까. 하나님 자신이 정답이니까 저주받을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왜 예수님이 저주받지요? 본인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히브리서1장부터 나오는 게 그 분은 죄가 없다고 되어 있잖아요. 죄가 없는데 저주가 있다? 이거 뭐가 이상하잖아요. 죄가 없는 상태에서 저주가 온다? 인간으로서는 제일 납득하기 힘든 신비에 속합니다. 죄 없는데 저주 때려보세요. 숙제를 해왔는데 숙제 안 한 사람과 똑같이 때려보세요. 학교 안 가려고 하지.
사람이 뭔가 행동을 제대로 하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고 행동한 만큼 저주가 삭감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재수 없음이 사라지기 때문에 희망품고 바르게 행동합니다. 만약에 행동 하나 안 하나 상관없이 똑같이 저주가 온다면 아무도 행동 반듯하게 할 생각 없어요. 그래서 제가 막 사세요, 라고 한 거예요. 인간이 그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막 사세요, 라고 할 때 예상대로 울끈불끈 나오잖아요.
이 문제를 다시 해봅시다. 죄가 없는데 저주받는다. 그렇게 함으로서 뭐가 성립되는가 하면, 저주를 받음으로서 비로소 뭐가 만들어지느냐, 죄가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이 자진해서 저주받음으로서 하나님의 저주를 이해 못하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죄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죄가 나왔지요. 죄가 나왔으면 하나님이 갖고 있는 모든 개념은 다 나온 게 돼요.
여기 키위가 있고, 사과 있고, 식혜가 있고, 도넛이 있다고 봅시다. 제가 이걸 가방에 안 보이게 놔뒀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제 딸이 있다가 “아빠, 키위 먹고 싶다. 키위 줘” 라고 할 때 내가 키위를 준 게 아니고 사과를 내놓은 거예요. “아니, 아빠, 그거 말고. 내가 먹고 싶은 키위 줘” 내가 찹쌀모찌를 줬어요. “아니, 그거 말고 왜 자꾸 아빠는 달라는 것은 주지 않고 아빠 가방 속에 있는 것은 왜 자꾸 끄집어내는데?” 이게 창조라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만들 수 있는 건 다 끄집어내는 게 창조에요. 뭐도 만든다? 의도, 어둠도, 빛도, 죄도, 지옥도, 천국도, 여러분 하나님이 지옥도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 인자하다고 유명한 하나님이.
지옥 만들면 그 지옥에 누가 가겠습니까? 직사리 고생하겠지요. 그걸 보고 주님께서는 에스겔에서 뭐라고 하시는지 알아요? 아이고, 이제 내 속이 시원하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변태 같아요. 마음이. 아니 자기가 만든 피조물이 그렇게 영원토록 빠져나오지 못하고 불에 고생하는 거 보고 “앗다, 내 속이 시원하네. 칠성사이다 먹는 것 같네.” 캔 맥주 새로 따는 것처럼 속이 시원하다는 거예요.
자신이 구상한 모든 것을 끄집어놓고 펼쳐놓는 것. 마치 세 살짜리 애가 새롭게 엄마한테 인형 받아가지고 인형 옷 입히기 하면서 온 방에 다 펴놔가지고 지가 재미있게 노는 것은 다 늘어놓는 거 있잖아요. 애들 키즈 보면 오만 것 다 있어요. 병원놀이 있고 학교놀이, 심지어 포크레인도 있고 기차도 있고 다 있듯이 비행기, 총, 다 펼쳐놓을 때, 엄마가 뭐라고 합니까? 니 방은 정신 사납다고 하잖아요. 그거에요. 하나님은 다 펼쳐놔요. 뭐까지? 저주까지 펼쳐놔요.
펼쳐놓은 저주에 일대일 대응으로 만나야 될 피조물이 있습니다. 그게 지옥 갈 사람들이에요. 사람이 잘못했다고 지옥 보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저주와 죄에 부합되도록 어떤 사람에다가 거기다가 붙여놓는 겁니다. 이마에다가 테이프를 딱 붙여놓는 겁니다. 지옥을 보여줘라. 딱 붙여놓는 거예요. 그러면 염소가 되는 거죠. 니는 천국을 보여줘라. 이마에 붙여놓으면 그게 바로 양이 되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마에 도장 찍어서 하듯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마귀도 그런 짓하고. 너는 내 편이야. 하고 마귀가 손목에다가 인을 찍지요. 그렇게 하듯이.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분류 작업하는 거예요. 분류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마귀하고 갈라먹기 하는 것 같고. “마귀야, 니 지옥 간다며 이 사람을 부탁해! 지옥 갈 사람을 니가 알아서 다 끌고 가! 하지만, 요 베드로는 안 돼. 니가 베드로까지 청구하는데 베드로는 내 사람이다.” 간절히 기도하면서 베드로는 지옥가지 않도록 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다 가져가고. 택한 백성은 따로 건지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본래의 언약을 갖춰놓은 거예요.
옛 언약을 주신 것은 창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잖아요. 창조한 세계에 하나님 창조자가 들어오는 그것이 옛 언약을 만든 이유입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창조세계에 본인이 스스로 적용시키는 거예요. 어떤 할머니가 이불을 만들었잖아요. 이불을 만들어놓고 이불에 본인이 뒤집어쓰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율법이 주는 저주를 그대로 다 받는 겁니다. 죄도 없으면서 율법이 준 저주를 받는 거예요. 그 이불을 주님께서 받으면서 그 이불을 너도 한 번 이불을 덮어써보지. 이불을 덮은 사람은, 모든 인간은 다, 아담에 속한 인간은 전부 다, 저주를 받아요.
그 저주를 받을 때, 예수님의 저주도 같이 받아요. 온 세상이 저주의 바다에요. 몽땅 다 저주의 세계에요. 하나님 아버지 빼놓고 저주의 세계에요. 천사와 성령 빼놓고 예수님마저 저주에 들어가요. 다 저주의 세계입니다. 그걸 가지고 주일 낮에 이렇게 했어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혼돈’입니다. 혼돈에서 그 다음에 뭐가 오느냐, 어떻게 보면 난해한 거예요. 창조에서 혼돈으로 도로 돌아가서 혼돈에서 오면서 여기에 뭐가 끼어드느냐 하면, 이 창조는 누구를 위해서 만들었다? 예수님의 주되심, 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하여 만들었다는 것을 새겨놓고 창조가 만들어졌거든요.
이 숨겨진 것을 끄집어내는데 예수님께서 이 율법의 죄를 받음으로서 저주마저도 쉽게 말해서 지옥마저도 누구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누구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예수님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지옥이 있는 거예요. 내가 가면 아프다.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가족이 가면 얼마나 고생하겠노. 자기 가족이 들어가면 고생하고 남의 가족이 들어가면 괜찮고 그렇습니까?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었어요.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늘 켕기는 게 뭐냐 하면, 사랑하는 딸이 복음을 안 받아 지옥 간다. 얼마나 가슴 아파요. 그러면 가슴 아프다는 말은 은연중에 감사가 삭제된 거잖아요. 감사가 가슴 아픈 것까지는 점령을 못한 거죠. 미진한 그 부분은 결국 누구 부분이냐 하면, “지옥도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지옥이 있어야 되는데 나는 다른 딸은 몰라도 내 딸 만큼은 지옥에서 빠져야 나는 마음이 기쁠 텐데, 왜 하나님께서 내 딸은 지옥 보내가지고 내가 모든 게 다 감사, 감사인데, 그 대목만 걸리면 감사가 안 돼.” 이렇게 한다고 했을 때, 그 여자 분의 잘못은 뭡니까? 지옥이 자기 기쁨이 아니고 누구 기쁨?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지옥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놓쳐버린 거예요.
그러면 그 여자 분은 어떻게 해야 그게 바꿔지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주님의 저주에 합류가 되어야 되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와 못 박혔나니,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가 주는 저주에 예수님도 저주 받았고 그 장에 누가 있었다? 나도 같이 저주 받았고. 따라서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산다면 내 딸을 지옥 보내는 것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필요한 조치라면 감사할 일이지. 아~ 너무나 말을 해놓고도 너무 차가워. 꼭 기계 같아. 꼭 스텐레스 같아. 알루미늄 같아. 너무 차가워. 피도 눈물도 없는 거 같아.
주님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 그냥 흘릴 피만 있지, 피도 눈물도 없이 웃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은 피도 눈물도 없이 묵묵히 자기 일을 다 하시는 겁니다. 그걸 냉철하게 히브리서에서 하는 겁니다. 옛 언약에 의해서 본인이 죽는 거예요. 예수님 하나님 본인이 옛 언약이 있음으로서 죽는 거예요. 그럼 새 언약은 뭡니까? 그 저주 받았던 저주를 해소시키고 그걸 영생으로 바꾸는 유일한 책임자로서 등장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구원해달라고 구원해주는 그런 법은 사이비들이 하는 짓이고요, 그런 생각은 성경에 없어요. 오직 구원 받는 자만이 저주에서 빠져나온 사흘 만에 빠져나온 그 분만이 누구를 저주하고 누구를 구원하고 하는 그 선택은 그 분 소관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지요. 로마서5장에. 나도 내 택할 백성을 건질 자격이 있다. 그런 자격이 있는 것은 나를 공경해야 만이 아버지를 공경한 것이다. 이리 되어있어요. 요한복음5장23절에.
정리해 봅시다. 왜 언약이 두 개이냐 하면, 그 둘 다 예수님 소관이다. 예수님의 자신의 일대기를 두 언약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가 율법아래 저주받기 위해서 사람이 된 거예요.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도 신기하지만, 죄 없는 분이 율법 아래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 제가 율법에서 저주받는다고 하니까 어떤 분들은 성경에는 그런 게 없다고 이단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옛날에 저보고 욕한 사람이 있는데, 아마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많을 거예요.
그런데 갈라디아서3장1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리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도 저주를 받았어요. 저주 받은 자 곧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저주받았다는 말은 우리가 저주를 안 받겠다고 버티는 것이 우리의 주제를 모르고 하는 소리에요. 예수님이 저주 받았으면 예수님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저주아래 있는 거예요. 이것은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려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것이 사실이냐가 더 중요하지 않겠어요? 사실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돼요.
흔히 기도할 때 상투적인 말, 우리는 저주 받아야 마땅하고 그런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그런 말을 하면서도 당신 저주 받았지? 하면 듣는 우리도 기분 나쁘다 하니까 본인이 이야기해놓고 남이 이야기하면 또 싫어하잖아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저주를 받음으로서 우리가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든지 구원해달라는 그러한 요구사항은 애초부터 우리한테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확정되었습니다.
모든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막는다고 했습니까? 입을 막지요. 입을 막는다는 말은 니가 말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다른 쪽에서 말해가지고 그 말만 이 땅에 이루어진 결과물이 너라는 거죠. 한쪽은 양이고, 다른 쪽은 염소고, 하나는 지옥가고 한쪽은 천국 가는 거예요. 울고불고 느낌에 너무 매이지 마시고 냉철하게 보세요. 세상 모든 것은 주님이 깔아놓은 퀼트 또는 타일이에요. 자기의 타일이에요.
우리는 인천, 안양 땅을 밟잖아요. 내 땅 아니에요. 주님의 땅을 밟고 있는 거예요. 아침에 거울보고 있지요. 주님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머리카락을. 내 심장이 아니고 주님의 심장이라니까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그래서 우리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옮긴다는 이유가 명령하는 자나 또는 뽑히는 나무나 산이나 바다나 다 주님의 소관이니까 본인이 알아서 하는 이걸 못해. 본인이 본인 걸 가르치는데. 이걸 내가 끼어들어서 내가 한다하니까 이게 “아이고, 나 믿음 없어서 안돼예.” 안된고 뭐고 주께서 하게 하시는데 안되는 게 뭐가 있어요.
어떤 목사님이 그런 질문했어요. 그 질문이 어디에 나오는 질문이냐 하면, 평소에 여러분들이 궁금했지만,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했어요. 평소에 궁금했지만,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 마가복음16장에 나오는 질문.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질문. “저는 이런 자신 없는데요. 그러면 안 믿는 사람입니까?” 이러다가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요 질문. 성경에 나와 있는 데로 믿는 사람은 뭐가 있다?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고 독사에 물려도 죽지도 않을 것이고 손을 얹은즉 병이 낫고.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할 자신이 없다면 또 해도 안 된다면 시험적으로 해봐도 안 되잖아요. 이거 되면 병원에 갈 일이 없잖아요. 이거 되면 치매 걸린 우리 어머니 손을 얹어 나을 것 같으면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병이 낫는 거예요. 심지어 죽는 자도 기도하면 낫지요. 그러면 장례사들 다 굶어죽게 생겼어요. “아이고, 비켜! 비켜! 아이고 집어치워라. 관의 뚜껑을 열어라.” 이리 묶여있으면 “아저씨, 일어나세요.” 이러면 벌떡 일어나가지고 “풀어줘.” 그럼 “주여, 할렐루야!” “이제 교회가야지. 이제 예수 믿어야지.” 얼마나 일이 잘 풀리겠습니까?
또 그런 일을 해야 신자라면 아니 그것보다도 그것도 하겠지만, 베드로 같은 경우는 물위를 걸었잖아요. 집에 가서 욕조 놓고 해보세요. 물론 조심스럽게 해보세요.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봤잖아요. 그럼 사진하나 찍어가지고 그림 하나 걸어놓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물 위를 걸어보세요. 물 위로 뜨는지. 욕조 물이 얼음 되었을 때는 뜨고 그렇지 않으면 빠지겠지요.
이걸 그 목사님이 질문을 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답변을 했어요. “표적과 이적을 구분해야 됩니다.” 이적은 내가 하는 게 되고 표적은 주님이 하십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다는 것과 내가 요청한다고 해주는 주님은 아니거든요. 왜냐, 내가 요청했기 때문에. 내가 요청할 때 무슨 규정이 생기느냐 하면, 나는 이거 해야 비로소 나는 믿는 사람이라고 자체적으로 믿음을 규정을 했지요. 규정을 하려면 말씀을 주님께 속한 말씀을 가위로 뚝 떼어서 내 관리하기 위해서 내 신자 만들기 위해서 그 말씀을 안 맞는 나에게 적용을 시킨 거예요. 그렇게 놓고 기적만 일어나기를 바라는 거죠. 벌써 말씀을 떼어가지고 내 구원용으로 삼았다는 자체가 이미 말씀의 원천지, 원 본류를 이미 떠난 거예요. 떠난 겁니다.
어떤 특정의 문장이나 단어를 내가 해가지고 내가 효과를 본다는 그것을 가지고 뭐냐, 그게 신명기에서는 돌로 쳐 죽여라, 라고 하는 박수무당들이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수련회 때 그게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들어가기 직전에 그 모압이라는 나라를 만나지요. 요번 수련회에 나옵니다. 거기에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나오잖아요. 그 발람선지자가 평소에 발락 왕하고 어떤 관계에 있었느냐 하면, 돈 받고 복 빌어주는 사람이에요. 동시에 적에게 저주해주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모압의 종교는 어떤 종교냐 하면, 바로 신의 신탁이라는 것이 신의 계시라는 것은 누구한테 유용하다? 바로 신의 계시를 요구하는 본인의 이익이 되도록 신탁이 온다는 거죠. 이것은 발람뿐 아니고 역사에 나오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서에 보면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에 보면 나와요. 거기에 있는 신탁들이 그 여신들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 마약피우는 가운데 벌벌 떨면서 돈 좀 꽤나 있는 사람이 “저 여신님, 내년의 운세 어떻게 되겠습니까?” 벌벌 떨면서 계시 온다~ 계시 온다~ 온다, 온다, 온다~~ 하면서 게거품을 물면서 마약을 했으니 게거품 물지요. 혼미한 상태에서 “신의 뜻입니다.” 하면 “예” 하고 가면 그게 맞겠어요? 안 맞겠어요? 우이 그리 잘 맞는지. 잘 맞을 수밖에 없지요. 왜? 자기가 맞도록 응답되는 걸로 편집을 자체적으로 해내기 때문에 안 맞을래야 안 맞을 수가 없어요. 바로 그게 점쟁이잖아요.
신명기에 보면 점쟁이나 사주팔자, 궁합보는 사람을 어떻게 하라고 하느냐 하면, 돌로 쳐 죽여라, 하거든요. 쳐 죽여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 사람만 때려죽이지 말고 그 사람에게 어떤 가능성과 어떤 신기함을 기대한 니 자신을 돌로 쳐 죽일 용의가 돼있는 사람만 돌로 쳐 죽여라, 이리 되는 거예요. 가족들 가운데서 직업이 박수무당인 가족을 돌로 쳐 죽일 사람이 있겠어요? 남이 하면 화내지만 본인의 아들이 박수무당이라면 아~~ 힘들어요. 그저 내 새끼는 뭘 해도 다 이쁘지요. 돌로 쳐 죽일 일이 없습니다. 아무도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가 없어요. 왜? 나 주체 때문에. 나 때문에. 내가 율법의 방해자에요. 내가.
내가 율법의 방해자는 내가 예수님의 적이 돼요. 주님은 율법을 이루려고 애를 쓰는데 방해자가 누굽니까? 내가 애애애~ 으으으~ 내가 해방을 놓는 거예요. 내가. 에~~ 그건 응답이 아니지. 그건 축복이 아니지. 내가 주신 은혜에 대해서, 은혜의 축복된 결과에 대해서, 내가 그걸 찢어버리지요. “나는 이런 걸달라는 게 아니고 다른 걸달라. 내가 원하는 걸 줘야지. 이걸 왜 주는데?” 하고 찢어버리지요.
바로 새 언약의 중보라는 말은 우리가 그런 인간이라 할지라도 새 언약의 앞에서 우리는 사라져주는 게 좋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결론내리면 히브리서9장이야기는 뭐냐, 우리보고 ‘사라져라’ 니는 사라지는 게 너한테 제일 좋다. 그럼 어떻게 사라집니까? 그냥 막 살다가 늙어 죽는 게 사라져주는 거예요. 사라진다고 해서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고 주께서 우리를 사라지게 하시는 겁니다.
자식걱정, 남편걱정 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걱정할 때도 지금 이 순간이 최고라 생각하시고 조금 연세 많아서 한 30년 후 부터는요, 아저씨 누구세요? 걱정조차도 안 되는 세상에서 오뉴월의 개 팔자처럼 그런 좋은 팔자. 자식들이 다 뜨시게 해주지 먹고 싶다하면 다해주지 그냥 잠만 자면 24시간 가운데 22시간 잠만 주무시면 돼요. 사라져주는 모습이 그 모습입니다.
북한의 핵무기도 걱정 없고 뉴스 봐도 의미도 모르고 걱정거리가 없어. 이 정재 임 세령 새겨도 아무 흥미도 없고 모든 게 없어. 그걸 가지고 동물적 차원이라고 해요. 처음부터 인간은 동물이었습니다. 동물인데 이게 악마가 오니까 이게 인간인 것처럼 했지요. 요 인간을 뭐로 바꿉니까? 다시 뭐로 원 위치? 동물로 원 위치. 이것을 인간일 때는 어려운 말로 해서 죄송합니다. 이걸 그냥 쉬운 말로 물질적이라고 한다면, 요걸 가지고 정신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요것도 설명이 필요한데.
내가 인간이잖아요. 인간은 어디 있어요? 인간은 우리의 몸밖에 없어요. 우리는 하나의 소품입니다. 이거 인간 아니거든요. 인간이라고 쓰였습니까? 아무것도 없네. 인간이라고 보는 것은 이미 우리가 이미 정신적 존재가 되어있다는 거예요. 정신적 존재라는 말은 뭐냐 하면, 환타지라고 해요. 환상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인간으로 만든다는 것은 니가 갖고 있는 환상하고 내가 갖고 있는 환상하고 둘이 커피숍에서 만나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무 의미 없어요.
아가씨하고 총각은 모텔에서 만나서 그냥 사랑을 나누지요. 82살 먹은 남편과 76먹은 할머니가 모텔에서 사랑을 나눈다 하면 그 돈 있으면 번데기나 사먹지. 왜냐 하면 환상이라는 것을 알거든요. 환상인 것을 알아요. 처음에 총각 처녀는 짜릿 짜릿해. 가까이 오는 것도 짜릿 짜릿해. 지금은 만져도 아무렇지도 않아. 이것은 완전히 스틸, 철만지는 거. 뭐야? 와 이카노? 찰싹! 평소에 왜 안하는 짓을 해. 무슨 켕기는 게 있는 모양이라. 찰싹! 아휴! 정대가리도 없지. 원래 없어. 없어. 갱년기 후에는 없어. 없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이 어떻게 정으로 사느냐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왜? 성경은 그리스도만 증거 하기 때문에. 너무 비정하게 들리더라도 이 시간만 참아주세요.
모든 성경은 우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중보자, 새 언약의 중보자한테 이야기하기 때문에 우리는 좀 제발 꺼져주세요. 자꾸 주님 이야기하는데 앞에서 얼쩡거리고 나오지 마세요. 주님 이야기할 때는 주님이야기만 해야 돼요. 그리고 평소에 우리 이야기하는 것은 환타지에 불과한 겁니다. 아무 의미 없는. 백날 해봐야 자기 과거이야기, 자기 잘남 이야기, 자기 자랑질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없으면서 있는 척. 모르면서 아는 척. 척, 척, 그 정신적 세계에서 하다가 집에 오면 피곤해가지고 아이고, 꿀물 타먹고, “여보! 나 등 좀 두들겨줘.” “왜?” “오늘 동생만나가지고 커피 마시면서 2시간동안 시부려놔가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좀 주물러줘.” “아이고, 니도 늙었다. 이제 동생 만나지 마” “아이고, 그래야 되겠다.” 그럼 또 만나면 또 환타지 내놓고. 인간은 원래 그런 거예요.
저주를 받아도 주님이 다 받았고, 구원을 받아도 주님이 받았고 주님이 받은 저주, 구원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냥 일방적으로 성령을 통해서 일방적으로 영생을 얻게 하신 그것뿐이에요. 교회 가는 것은 나중에 딸 치울 때 그동안 부조금 뿌렸던 거 회수하려고 교회 가는 거예요. 그냥 나오려고 하니까 부조 안 할까봐 걱정돼서.
그렇게 해놓고 해야 그 다음에 16절이 이해됩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이걸 MBC, KBS 뉴스에 나오면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요? 상속세 이야기한 게 아니고 이 세상은 이미 우리 선을 떠났다. 오늘 강의제목을 뭐라고 할까요? 우리 선을 떠났다고 할까요. 요게 핵심이에요. 세상 모든 움직이는 것이, 개미 움직이는 모든 것이 비가 오고 안개 끼는 것, 이미 우리 손을 떠나버렸어요. 욥이 그걸 알았어요. 황무지에 비가 오는 이유를 아느냐 할 때 깜짝 놀랐습니다. 황무지는 비가와도 안 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경작지가 아닌데도 비가 오는 이유를 놓친 거예요. 인간은 안다고 여기는 것보다 모르는 게 점점 더 증가해요.
자기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날이 가면 갈수록 내가 모르는 게 왜 이리 많은데. 점점 증가해요. 나중에 되면 모르는 것 때문에 안다고 여기는 것이 이게 오해할 가능성이 농후해요. 모르는 것 입장에서 봐야 아는 게 되는데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보니까 내가 지금 안다는 것도 일방적인 주장일 수가 있다는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거예요. 결국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아온 거예요.
그럼 그 다음 질문 뭡니까? “주여, 누가 저를 이렇게 살렸습니까?” “진작 그런 질문을 하지 그래. 그동안 니가 빡세게 니가 애써서 니가 취직해가지고 니가 공장 다니면서 니가 니 자식 살렸다고 했지? 왜 이제 와서 거짓말하느냐” “주님이여, 내 자식, 내 남편 이 식구를 누가 살리십니까?” “나다!” “내가 살렸다.” “주여, 감사합니다.” “왜 살립니까?” “언약 때문에.” 내가(예수님) 새 언약의 중보거든요.
새 언약의 중보가 뭐냐고 물으시면 한 마디로 하세요. 세상의 깔아놓은 모든 것이 새 언약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새 언약의 중보에요.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지요.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새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지옥도? 지옥도. 마귀도? 마귀도. 너도, 나도. 모든 것은 양과 염소 전부 다. 지옥이나 천국이나 예수님을 주되 심하기 위해서. 골로새서1장16절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깔아놓은 거예요. 땅 밟을 때 조심해서 밟으세요. 다 주의 것입니다.
그런데 유언이란 뭐냐, 좀 더 여기서 알았다 치고 좀 더 깊이 나아가 봅시다.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하여 있다. 이 말을 그 뒤에 성경대로 한다면 적을게요. 어려우니까. ①번 예수님을 위하여 ②번 예수님의 죽음을 위하여.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②번이 정답이에요. ‘예수님의 죽음을 위하여’ 이게 복음이 되고. ‘예수님을 위하여’ 되어버리면 이게 기독교가 되어버려요. 기독교 신학이 되어버려요.
기독교신학이 뭐냐 하면, 나 같은 부족한 존재지만, 주님의 존재가 와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거예요. 뭔가 빠졌지요? 뭐가 빠졌어요? 제일 중요한 복음이 빠져버렸어요. 복음이 빠졌어요.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있는 존재가 되어버렸지요. 이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이건 종교가 되어버렸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죽음을 이야기해요.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를 증거 한다니까요. 새 언약의 피를 증거 해요. 피. 히브리서13장20절 읽어보세요.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뭐로 건져요? 언약의 피지요. 피. 언약의 피라니까요.
요즘 목사들은 이제 십자가 피 그만 이야기하고 부활만 이야기하라 하는데, 부활의 새 생명, 성령 이것만 하라고 하는데, 아니에요. 사도는 그게 아니에요. 언약의 피. 하나 더 봅시다. 히브리서10장29절,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보세요. 율법을 어겼다고 부정하지 않습니다. 최종적인 부정은 뭐를 밟을 때? 언약의 피지요.
그런데 피라 하는 말, 피라는 책도 있습니다. 피 곧 죽음. 일반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거예요. 교회가도 이 말만큼은 제발 그만 입 다물어라. 죽은 피 이야기는 하지 말라. 너무 처참하다. 뉘앙스가 부정적 뉘앙스라는 겁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피와 죽음의 들어왔다는 것은 이건 나의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만 삼가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요청하는 바입니다. 하고.
여러분,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계산하면서 그들에게 기쁘게 하기 위해서 말씀 전했습니까? 아니지요. 꼭 반대로 이야기했지요. 반대로.
특히 살인죄 같은 경우에는 살인죄 같은 경우 해석이 어려운데, 살인이라 하는 것은 목숨이 붙어있는 사람을 목숨 없애는 것을 살인이라고 하잖아요. 그럼 그 사람의 목숨이 붙어있는 한 살인죄가 됩니까? 안 됩니까? 살인죄 성립이 안 되지요. 붙어 있잖아요. 안 죽었잖아요. 안 죽었으면 살인죄 안 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미워하게 되면 무슨 죄다? 살인죄라 했잖아요. 그러면 해석 다시 해봅시다. 그 사람이 살아있어도 미워하게 되면 내가 그 사람을 죽으라고 약을 쓰는 게, 죽으라고 소원을 비는 게 되지요.
그렇다면 미워하는 것이 살인죄가 된다면 그러면 진정한 살인죄를 범한 사람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셔요. 왜냐 하면, 왜 나로 하여금 미운사람을 앞을 지나가게 만들었느냐, 원인제공자가 있을 게 아닙니까? 미움이 취미는 아닐 거 아닙니까. 아! 취미생활 좀 하고 싶다. 좀 미운 놈이 나타났으면. 이런 이상한 변태는 없잖아요. 노래방에 가서 즐겁게 노래 부르고 있는데, 어찌합니까, 이거 불러가지고 분위기 깰 때, 어떤 사람은 죄 짐 맡은 찬송가 불러가지고 깰 때, 밉지요. 그런데 부르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잖아요.
결국 제 말은 뭐냐 하면,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실효성 있게 만드신 분이 누구다? 주께서 그렇게 실효성 있게 만들고 거기에 말려든 사람이 누구다? 사람이다. 주님이 저주를 받았으면 우리는 그 저주를 보여주기 위해서 합당한 죄를 지어야 돼요. 이 사실은 아는 게 얼마나 기쁜 줄 아세요. 아휴! 죄 안 지으려고 어떻게 버티는데. 왜 버티시는데? 저주 안 받기 위해서. 예수님도 저주 받았는데 당신은 무슨 똥배라고 당신이 왜 저주 안 받는데? 이거 보세요. 예수님도 저주 받았다는데, 우리는 저주 안 받는다 하는 이게 뭐예요?
니 세계 따로 있고 내 세계 따로 있다. 그러면 새 언약은 그것은 안 통합니다. 새 언약의 모든 세계가 예수님의 인형들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주님이 다 깔아놓은 거예요. 옷 갈아입히는 인형 있고, 뿌야 뿌야 총 쏘는 거 있고, 비행기 날고, 온 천지가 예수님의 장난감이에요. 주님의 자신의 놀이마당이에요.
여기서 그냥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 그럼 복습해 봅시다. 죽음 안에 뭐가 들어있다? 예수님의 저주가 들어있지요. 이제 저주를 다시 해석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저주 받았다. 죽었다고 해석하는 게 아니고 왜를 붙여요. Why. 왜 죽었지? 예수님이 왜 죽었지?
안 믿는 사람 같으면, 까불다가 죽었지. 지가 이석기도 아니고. 지가 정권 대들다가 지가 국가질서 문란 죄에 걸려가지고 죽었지. 이미 나라가 유대교로 하나로 통일되었으면 나라 질서를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분란을 일으키지 말아야지. 내가 메시아라 해가지고 다른 사람도 십자가에 죽었지만, 예수님도 예외가 없으니까 죽어야 되잖아요.
바로 예수님을 죽이는 그 확고한 정치체제. 예수님을 사형시키는 제도 있잖아요. 누가 만들었어요? 예수님 본인이 만들었거든요. 본인이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 말이죠. 그렇게 해서 소위 사람들이 고상하다고 여기는 것뿐만 아니고 사람들이 미처 발을 안 들여놓으려하는 그 지옥까지 이미 주께서는 미리 다 깔아놓습니다.
그래서 출발을 예수님부터 출발해야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주일 낮 설교 아닙니까. 창조로 시작해서는 안 되고 어디로 가야 된다? 다시 혼돈으로 가서 다시 창조로 와야 되는데 혼돈이 창조로 오는 그 사이에 누가 있다?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은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아브라함이 천국 갔지요. 그럼 아브라함이 천국 갔을 때 아브라함이 천국 가는 그것이 나중이겠습니까? 처음이겠습니까? 아, 질문 어렵다. 천국 간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의 최초의 본질이겠어요? 나중 본질이겠어요? 최초에요. 왜냐 하면, 예수 안이 창조보다 앞서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예수 안에서 구원받았어요.
언약이 먼저겠어요? 언약으로 만들어진 세상이 먼저겠어요? 언약이 먼저지요. 그래서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겼지요. 아브라함 언약 안에. 언약 안이 먼저고 언약대로 우리가 펼쳐진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은 고향을 찾아가는 겁니다. 고향을.
이 땅에서는 나그네고 우리는 교향을 찾아가고 우리의 원천을 우리의 본래의 내 모습으로 찾아가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기로 합당하게 작정되기 때문에 이 모습은 우리의 본래의 모습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땅의 초라한 모습이 본래의 모습, 영광입니까? 아니지요. 빌립보서2장에 보면, 모든 영광을 버리고 잠시 영광을 포기했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이 모습이 흙에 속한 게 다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입을 그 순간이 우리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아! 여러분 모습 보니까 그 본래의 모습을 생각하니까 제가 떨리네요. 아이 눈 부셔! 빨리 죽어서 말 이러면 안 되는데. 빨리 본래의 모습으로 되찾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면 이러한 복은 이미 있다는 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바로 성경에 동의하면 돼요. 예수님이 새 언약의 중보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세계다. 라고 이것을 논리가 아니고 그냥 “그렇잖아. 맞지 뭐. 이 땅에서 죽었다가 산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으니까 그 분이 창조주고 그 분이 죽음으로서 그 분이 깔아놓은 세상이 산이나 강, 전부가 주님의 거 맞지. 이걸 뭘 따져? 맞는 이야기인데.” 받아진다면 그 사람은 성도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그러니까 뭔가 하라는 이야기를 한 게 아니고 원래 있던 이야기를 히브리서9장에서 펼치고 있는 거예요. 이걸 해석한다는 것은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사람만 해석이 돼요. “아, 아, 이렇구나! 아, 아, 그렇구나!” 이지 “이거 지켜야지. 이거 안 지키면 나 지옥 갈 거야.” 이런 일은 없습니다. 이런 성경은 없어요. “아아, 주께서 이렇게 하시네. 해왔네. 옛날에 소 잡느라 애먹었는데 주께서 시킨 일이네. 그럼 오늘날 우리한테 이거 보라고 시켰네. 이거 공부하라고 시켰구나! 만나기 위해서.” 이게 다 모든 영광은 주님입니다. 이게 성경이 바로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 손에서 떠나있고 모든 것이 선물로 주어진 건데 이 이야기가 이 내용이 이 진리가 늘 유지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래서 주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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