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41212b-히9장1절(애매함) - 이 근호 목사
안양20141212b-히9장1절(애매함)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6.154)
안양20141212b-히9장1절(애매함) - 이 근호 목사
복음은 굉장히 간단하고 단순한 거예요. 뭐냐 하면, 뭐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부터 뒤틀리기 시작해요. 뭔가 등장한 거예요. 교회가 등장했다면 전혀 뒤틀리지 않습니다. 나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죽을 때 죽고 죽더라도 죽게 되면 죽고 반성하면 되지. 나를 근본적으로 뒤틀리게 하는 게 아니거든요. 나이 많아서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자연스럽지 못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거룩하신 주님이 참혹하신 모습으로 등장했다. 원래 우리가 거룩하다 하는 것은 착하고 위대하고 이래야 거룩하잖아요.
그런데 사람 손에 의해서 당한 사형수, 사형수가 메시아였다고 한다면 이건 당혹스러운 겁니다. 당혹스러운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온 복음은 늘 그런 거예요. 성령 없이 그냥 복음 와버리면 주께서 우리에게 참 착하신 분이다. 우리를 살리려고 희생하셨구나. 고맙다. 이리 되는데 성령을 통해서 이렇게 십자가 복음이 와버리면 우리 자신이 더 이상 내 가치에 대해서 손쓸 수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야말로 “뭐지?” “뭐야?”
우리가 항상 예상하거든요. 뭔가 예상해요. 기대치. 아까 한 거 다시 복습해 봅시다. 예상 치라 하는 것은 내가 잘났기 때문에 나를 건드리면 내가 싫어한다. 그거잖아요. 왜 남은 나를 건드려서는 안 되는가. 내 입장에서 내가 잘났기 때문에 이 잘난 입장에서 거룩이 와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나보다 더 잘난 분이 오시니까 우리는 잘 영접하고 모시면 되겠지요. 모셔버리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덩달아서 지금도 착하지만, 더욱 더 훌륭한 사람이 되겠지요. 그게 바리새인이잖아요.
제가 첫 시간에 첫 강의할 때 뭐라고 했지요? 어떤 장소가 있는 곳에 거룩한 성소가 와버릴 때, 기존 장소도 괜찮고 거기다가 성소까지 추가했으니까 훨씬 더 훌륭한 성소로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뭐냐 하면, 그게 바로 거룩하지 않는 인간의 본래의 죄악된 모습으로 들통 내는 방법입니다. 그게. 이게 허물어져야 됩니다.
소유하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고 반기면 반기는 내가 허물어져야 된다니까요. 만약에 바구니에 수박을 담으면 바구니도 멀쩡하고 수박도 멀쩡하잖아요. 그렇잖아요. 바구니에 수박 담아보세요. 수박 없던 바구니가 수박이 있는 바구니가 되어가지고 빛이 나겠지요. 그런데 바구니에 수박을 담지 말고 뜨거운 태양을 담아보세요. 바구니가 어떻게 됩니까? 홀라당 타버리지요. 그런 격이라니까요. 그게.
성령께서 오시는 것은 홀라당 타버리게 한다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는 잘났다. 그러니까 나를 건드리지 말라. 이러한 폼이 주님 앞에서는 저주거리가 진짜 저주받아야 될 이유가 된다니까요. 이게. 잘난 내가 교회 가서 구원까지 챙겼으니까 얼마나 잘난 사람 되겠습니까. 그것을 주님께서 일소에 죄의 괴수로서 처리해버린다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아까 했던 낫싱 Nothing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이죠. 꿈을 어떻게 꾸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현재 내가 본 십자가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겁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 같으면 이 땅에 오셔가지고 사람에게 밉상 받고 그러면서도 세우기 위해서 12명의 제자, 다시 말해서 기존의 이스라엘 말고 새로운 이스라엘 만들기 위해서 12명의 제자를 뽑고 뽑으면서도 그들에게도 비난받고 그러면서 제자한테도 오해받고 심지어 팔릴 때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배신해서 자기를 팔고 예수님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를 사랑했던 자에게 미움 받고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고 이렇게 분명해지는데, 이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율법의 제사를 통해서는 이게 상당히 또렷하게 안 보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또 미워하고 또 미워해놓고도 미운자 중에서 택한 백성을 건져주고 이 작업이 율법의 제사법과는 잘 안 드러나지요. 드러나지 않더라도 이미 그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그게 1차인데, 7절에 봅시다.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첫 째 장막이 있고 둘째 장막이 있는데, 방위표 이리 있고요. 동서 북남 이리 되어있고 성막이 있는데. 동쪽으로 출입구가 되어있고 요기 앞에 뜰이 나있어요. 뜰에 제단이 있어요. 놋 제단이 있고 제단에서 항상 제사가 잡으니까 연기가 피어오르지요. 그리고 피가 흘려져있고. 요기에 텐트가 있는데, 텐트가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있다 말이죠.
제사장이 입구에 들어갑니다.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어요. 들어가게 되면 요 위에 뭐냐 하면, 테이블이 놓여있고 요 맞은편에 뭐가 있느냐 하면, 조명시설이 되어있어요. 등잔으로 조명시설이 되어있고. 요 중간에 뭐냐 하면, 향 피우는 향로가 있어요. 테이블위에 떡이 6개씩 6개 12개의 떡이 놓여있습니다. 어두컴컴한 요 실내를 밝히도록 되어있습니다. 향로는 늘 불이 켜져야 되고요.
요 안에 들어가면 지성소가 되어있어, 요기에 상자가 있고 그 상자위에 천사 조각품이 날개 짓하며 마주보며 있어요. 요 앞의 커튼은 여러 가지 장식되어있는 커튼이 있어요. 들어가는 순서에 따라서 1구역, 2구역이 있습니다. 자, 요렇게 성막이 이런 구조로 되어있는데, 요 구조가 뭐냐 하면, 하늘나라 하나님나라의 청사진이에요. 설계도에요. 설계도인데,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어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는 겁니까? 아니면 명령입니까? 명령이죠.
사람은 왜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면 안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다는 말은 그게 하나의 모델이 되어버리죠. 모델이 되면 그게 우상이 되고 시간이 정지가 되어버려요. 그건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누구를 쳐다본다 할 때에, 여기 스탠드가 있는데 스탠드를 쳐다보잖아요. 스탠드를 쳐다보는데 만약에 제가 이 스탠드의 모양을 봤습니다. 보고 난 뒤에 나도 갖기 위해서 가게에 가서 “스탠드 주세요." 라고 할 때 이 스탠드 말고 다른 모양의 스탠드가 오면 “이건 스탠드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신제품 스탠드 아주 희한한 스탠드 나오잖아요. 왔을 때, 왜 나는 그것이 스탠드 아닌 것같이 봅니까? 이미 나는 스탠드를 봤고 그 본 것을 ‘저게 스탠드야.’라고 이미 인증이 돼있지요. 머리 기억 속에.
이미 모델이 된 거예요. 과거의 한 모델이 되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것들은 모델에 기준해서 진위가 판단이 돼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형이 서울대학 나오고 누나도 서울대학 나왔는데 본인은 광운대학교 나왔다. 이러면 졸지에 그 사람은 공부 잘하는 측이 아니고 못하는 측에 들어가지요. 이 이야기는 서 경수 목사님이 자기 사적인 이야기하면서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한 거예요.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설교시간에 한 것이기에 내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항상 자기 집에서 공부 못하는 학생으로 분리됐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시골에서 광운대학 보세요. 광운대가 얼마나 셉니까. 광운대가 얼마나 일류에요. 공부 잘하는데 가는 겁니까. 옛날 광운대보다 지금 광운대가 더 좋거든요. 지금은 일류대학이라 말이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공부를 잘하지만, 본인의 모델이 뭐냐, 아버지 엄마가 형, 누나가 서울대학 갔으니까 당연히 서울대학 가야 되고 당연히 그 집안은 서울대학 가야만 되는 집안이 되어서 그런 거예요. 이게 모델이 되어버리니까 아버지 입장에서는 서울대학 안 가면 공부 못하는 측이 되어버렸는데. 이게 하나의 우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나의 고정이 되어버리니까. 변화의 여지가 없어요.
인간은 뭔가 특정의 모델이 되어버리면 모델이 된 그 순간 그건 하나의 신이 되어버려요. 우상이 되어버리니까 시간이 거기서 정지되어버립니다. 그런 경우가 있고, 자기가 지금 30살인데, 7살 때 자기가 몸이 굉장히 아플 때 엄마가 자기를 업고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그 추운 날 병원에 갔는데 나중에 깨어서 보니까 자기 엄마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신발도 한 쪽 슬리퍼만 신고 벗어버리고 맨발로 병원까지 왔을 때, 그 어린 마음에 엄마가 이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알았을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 엄마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자기를 훔쳐간 가짜 엄마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청담동 스캔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엄마는 저 정도로 나를 사랑해. 사랑하는 순간에 진짜 엄마를 만나는 순간에 그 여자는 도둑년이 되어버리지요. 도둑이 되어버린 거예요. 자기를 사랑한 그 여자를 자기 힘으로 처단해야 돼요. 여기서 주인공이 갈등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상의 모델이에요.
사람이 뭔가 본 게 있으면 그것이 세상을 만들어버려요. 세상이 이렇다고 정해버려요. 자기가. 그래서 사람마다 세상이 다 달라요. 놀라운 사실은 똑같이 해 뜨고 해지고 다해도 사람마다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하늘이 파랗지만, 어떤 사람은 하늘이 뇌랗다, 에요. 노란 것도 뇌랗다고 했어요. 이게 누구냐 하면, 송창식이 부른 노래가 있어요. 담배 가게 아가씨 혼자 좋아하다가 깡패한테 얻어맞아서 하늘이 뇌랗다 했거든요. 얻어맞아가지고 하늘이 노래. 오직 그 담배 가게 아가씨만 차지하는 그 생각만 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도 북한 핵문제도 중요하지 않아요. 담배 가게 아가씨만 중요해. 꼭 애들이 그래요. 애들을 보게 되면 애들이 소원이 있답니다. 뭐냐 하면, 어떤 가정에 소원이 있는데 그 아들 소원이 딱 두 가지에요.
하나는 개그맨 되는 것이고 하나는 딱지 왕 되는 거고. 유자식상팔자에 나오는 거. 둘 중에 어떤 게 될 건지 걱정이라. 그 딱지 왕이 어른이 보기에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과거에 본 게 있기 때문에 그게 고정돼 버린 거예요. 나는 딱지 왕 되어가지고 친구한테 자랑질해야지. 재벌이 되어도 안 넣어줘요. 천국은 들어갈 수 없는 어떤 걸림돌이 있어요. 걸림돌이.
천국은 모양으로 눈에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뭔가 그 안에 걸림돌이 있어요. 걸림돌은 지시와 관련되어 있지요. 명령과 관련되어 있지. 아름답다. 아름다운 걸 누가 싫어해요. 다 좋아하지. 천국에 가면 샘이 터진다. 샘 터질 것 같으면 롯데월드에 가면 샘이 터지지. 기껏 천국이 롯데월드 그 정도입니까. 천국이 그 정도밖에 안돼요? 천국은 걸림돌을 간파해야 되고 걸림돌을 넘어서야 된다는 걸 알아야 천국 제대로 가는 사람이에요.
그 걸림돌은 왜 필요한가 하면, 바로 내가 나밖에 모른다. 어떤 진리든 관계없이 나를 건드리면 나는 화난다. 그러한 나 중심, 절대적인 나 중심이 나를 천국으로 못 가게 만드는 겁니다. 그런 내가 그런 육이 나를 못 가게 만들어요. 기적이라 하는 것은 내 힘으로 구원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경계선 넘어 도달시켰다는 것. 내 이 자리가 내가 만든 자리가 아니고 내가 노력해서 얻은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이기 때문에 비로소 십자가 바깥에서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가를 눈에 훤히 보일 때 그게 진정한 기적입니다. 이건 축복 중에 그런 축복이 없어요.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게.
그러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1구역(등잔,향로,떡)과 2구역(지성소)을 나눈 겁니다. 그런데 여기 히브리서 1구역, 2구역으로 나눴다는 이유가 뭐냐, 이것은 허물과 관련되어 있어요. 우리 죄와 관련되어서. 그러니까 히브리서의 내용은 이겁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인간 탓이 아니고 인간 자체 속에 허물과 죄 때문에 그렇다고 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폼 나게 오실 수도 있어요. 멋있게 아랑드롱보다 더 이쁜 미남으로 오고 키 185Cm에다가 식스팩하고 탄탄한 목근해가지고 원빈과 현빈처럼 멋있게 와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욘사마처럼 올 수 있습니다. 천사도 그렇게 미남이었는데 천사를 만드신 주님은 더욱 더 미남이겠지요. 할 수 있는데, 오히려 반대로 흠모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 힘으로 처리할 수 없는 게 있어요. 우리 속에. 그게 박혀있어요. 그게 뭐냐,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처리 못하는 이유가 죄 자체가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래요. 가짜 우리를. 우리를 우리 자신이 만들면요, 우리가 그렇게 안 만들지요. 하지만, 죄가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몸부림치는 것도 죄에요. 구원 받으려고 애쓰는 것도 죄고 금식하는 것도 죄고 전도하는 것도 죄고 다 죄에요. 죄. 죄.
마치 갇혀있는 것. 마치 냉장고 안에 갇혀 있는 것과 같아요. 냉장고 안에 있는 김치도 시원하고 냉장고 안에 있는 팥죽도 시원하고 냉장고 안에 있는 사과와 포도도 시원하고 콜라도 시원하고. 왜 그렇습니까? 냉장고 적당하지 않고 냉동고. 냉동고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다 꽁꽁 얼어있는 이유가 그 안에 들어있는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생태도 동태 되어 벌벌 떨고 있고. 죄로부터 꼼짝을 하지를 못해요. 건드리기만 해봐라. 화낸다. 이건 분명한 겁니다. 이건 언제나 육이에요. 죄로 인하여 푹 젖어있는.
평소에 다윗은 사람 죽이는 게 취미고 평소에 사람이 다윗이 간통하는 게 취미고 그런 보사노바나 카사노바 아니에요. 왜 이쁘냐 말이에요. 예쁜 게 죄에요. 뒤태를 보자 이리 오너라. 이도령이도 마찬가지에요. 춘향이가 뒤태가 안 좋았으면 절대로 사또 자녀가 그런 짓하면 안돼요. 이쁜 것도 죄냐. 이뻐서 죄송합니다. 왜 이쁘냐 일만의 책임을 져야 돼. 100:0 아니에요. 80:20 져야 돼. 차 박아놓고 이쁜 거 20, 박는 거 80 줘야 돼. 100% 사고 없어. 그래서 여자들은 안 그럽니까. 여자가 살랑 살랑 꼬리를 치니까 그렇지. 백년 묵은 여우인가 꼬리는 왜 쳐. 인간의 모든 살랑 살랑 꼬리를 잘라버려요. 잘라버리는 게 뭐냐 하면, 제단입니다. 죽여 버려요. 죽이고 죽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무빙이 일어나지를 않아요. 행동이 없지요. 죽은 사람이 행동이 있겠습니까? 어떤 움직임이 없지요.
다만, 그 죽은 것을 통째로 가져가는 움직임은 누구 몫이냐, 하나님 몫이지 사람 몫이 아닙니다. 지성소에 어떻게 들어가느냐, 천국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우리가 못 들어가요. 죽여 놓고 들어가잖아요. 누가? 우리의 목숨을 쟁반에 담아가지고 사발에 담아서 가면서 피를 뿌려야 돼요. “이 자리가 합당한 자리네요.” 하고 뿌리는 거예요. 지성소가 합당한 자리에요. 지성소에 뭐가 있다? 양쪽에 천사가 서로 마주보면서 “얘가 사는 동네는 천사라는 동네에 부합됩니다.” 하고 피를 뿌리는 겁니다.
물론 자기 피는 더러워서 안돼요. 그 제사장이 안수하고 어린양의 피기 때문에 거룩한 어린양의 죽음에 합류했다는 것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린양은 두 가지 애매성이 함께 있어요. 뭐냐 하면, 허물이 없어야 되고 또 하나는 뭐냐, 흠이 있어서 드렸던 흠이 있는 자의 소유의 양이 되어야 돼요. 상당히 설명하기 난해하지요. 흠이 있어? 없어? 둘 중에 하나도 안돼요. 흠이 없어요. 흠이 없는데 흠이 있어요. 왜? 죄인이 용서해 달라고 바친 죄이기 때문에. 아니 성도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둘 다 맞는 이야기라니까요. 예수님이 의인이에요? 죄인이에요? 둘 다 맞는 이야기라니까요. 둘 다.
우리는 애매한 성문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는 거예요. 죽여 놓고, 죽을 때는 죽을죄를 지어놨기 때문에 죽여 놓고 살 때는 죽을죄가 아니고 살아야 될 분이기 때문에 살고. 그래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죄로 인하여 죽고 의를 위하여 살아났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 예수님이 누구냐고 하지 말고 죄에 대해서는 어떤 분이냐, 의에 대해서는 어떤 분이냐, 이렇게 설명되어야 됩니다. 보는 방향이 두 개의 방향으로 설명이 되어야 돼요. 이건 우리 성도한테도 마찬가지에요. 죄인의 입장에서 우리는 죄인이고, 의인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의인이고. 이게 애매한 그리스도 안에서는 둘 다 맞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 애매한 것이 한 공간에 한 시간대에 신약에서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우리 몸이 성전이니까 그렇게 되어있지요. 그렇게 되어있는데 반해서 구약에는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어요. 더러운 공간 따로 있고, 거룩한 공간 따로 있고. 여기에서는 일절 못 들어오고. 피를 뿌려야 될 그 날은 1년에 한 차례 되어있어요. 7절 보세요. 대제사장이 일 년 일차씩 그 다음에 ‘홀로’지요. 온리 유에요. only you. 홀로.
홀로. 대표자지요. 이 말은 12제자가 있더라도 결국 예수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분은 홀로, 다른 말로 해서 아버지를 아시는 분은 이 세상에 예수님밖에 없지요. 예수님 이외에는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입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모르는데, 창조주를 모르는데, 자기가 사람이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예수님만이 아버지라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되어 있고요. 로마서8장과 갈라디아서4장에 보게 되면 성령을 받은 자만이 아바 아버지라고 하는데 이건 양자의 영을 받아서 그래요. 원래 맏아들 따로 있고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아서 그런 거예요.
아들의 영을 받지 아니하면 아무도 아버지라 할 수 없고 아버지를 안다면 우리는 항상 ‘홀로’라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나를 포함한 홀로가 아니고 나를 뺀 ‘홀로’ 나 아닌 다른 홀로. 그러니까 나는 예수님 홀로에 소속되면서 더 이상 나는 나한테는 소속이 안 되어야 되는 거예요.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내 운명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들이어야 돼요. 개꿈을 꾸던 무슨 일이 벌어지던 그것이 내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일들이에요. 마귀를 만나던 귀신을 만나던 전혀 나의 구원과 상관이 없는 거예요.
내가 뭘 봤다는 것은 결국 내가 본 기억으로 하게 되면 나를 내 본 기억을 내 스스로 포기를 못하지요. 스탠드를 본 이상은 다른데 가가지고 “이거 스탠드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하지요. 그럼 주인이 “아이고, 아저씨가 뭘 안다고. 이거 스탠드 맞아요.” “아, 내가 옛날에 딴 데서 본 적이 있는데.” 이리 이야기한다고요. “광운대학 나왔는데 공부 못하네.” “니가 뭘 공부를 못해. 좋은 대학인데.” “그래도 우리 집안은 우리 형들은 다 서울대학 나왔어.” 이미 본 게 있기 때문에 나는 공부 못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옛날에는 시골에서 동서기만 해도요, 플래카드 붙였습니다. 일제시대 때 파출소장만 해도 한 고을의 유지에요. 파출소장 되어 말 타고 옆에 긴 장검을 들고 가게 되면 울던 애도 뚝 그쳤다 하잖아요. 호랑이 온다 해도 안 울다가 순사가 오면 울다가 다 그쳤다 하잖아요. 일제시대 때.
일제시대 때나 그 이후에 해방이후에 파출소장 정도는 너무 높고 파출소 경찰만 되어도 대단한 거예요. 워낙 무식하니까. 교육이 바탕이 안됐으니까 워낙 무식하니까 글깨나 써야 공직에 있을 수가 있어요. 옛날에는 공직하는 자체가 완전히 감투에요. 감투. 옛날에는 판사, 검사보고 ‘영감님’했어요. 여러분, 아시지요. 몰라요? 얼마 전만 해도 그랬어요. 젊은 30대 초반의 검사보고 나이 많은 서기관들이 “아이고, 영감님” 이리 이야기했어요.
요새 관복은 비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늘같은 존재에요. 뭐 안다는 거예요. 기존의 체제, 기존의 질서, 우리는 못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그 영감님한테 죽었는데.
기존의 체제, 질서에 죽었잖아요. 그럼 오늘날 뭘 의미합니까? 이것은 우리도 순교하면 구원받는다는 게 아니고 니 죄를 알렸다 입니다. 니 죄를 알렸다. 뭔가 예수 믿고 변화시키라는 게 아니고 가장 큰 변화는 뭐냐 하면, 내가 낫싱 Nothing 하는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아니 더 나아가서 나는 나를 건드리면 짜증난다. 따라서 “예수든 하나님이던 나를 건드리면 나는 가만 안 둬.” 라는 이 죄, 이 악마성이 바로 내가 현재 발휘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자, 7절에 보면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자, 여기서 봅시다. 이 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일차씩 들어가서 그 다음에 (뭐) 없이는 아니하나니. 뭐가 없이? ①피 ②물 ③돈 ④착함 다음 중 몇 번입니까? 1번. 이건 답이 두 개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 밖에 없어요. 피를 가지고 들어간다는 이 말은 피는 죽음을 의미하잖아요. 따라서 모든 인간은 예수님 빼놓고는 다 죽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이 복음이라 하는 게 기쁜 소식이라 하잖아요. 이게 왜 기쁜 소식이냐 하면, 더 이상 니 자신에게 미련 안 둬도 괜찮아. 라는 뜻이에요. 이걸 마지막 때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는 참혹한 때에요. 인간의 모든 것이 낫싱되는 무의미한 때가 마지막 때입니다. 그 마지막 때라고 알려주라고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거예요. 성도는 마지막 때를 유일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가치 있는 게 아닙니다. 국경없는 의사회 필요 없어요. 착함이고 성당이고 절이고 다 필요 없어요. 다 똑같아요. 인간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인간 자체가. 그게 마지막 때에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자랑할 게 없어요. 없어야 돼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피 없이 안 된다는 것은 이미 너희들 심판 내렸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심판 받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이미 게임오버! 끝났어요. 컴퓨터 꺼보세요. 소리 나잖아요. 비비비빙~ 소리 끝나지요. 화면이 까맣지요. 이게 어두움이에요. 세상은 어둡다니까요.
이 어두움에 빛이 왔으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 거죠. 이미 화면이 꺼졌는데 자기는 화면이 살아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반짝 반짝 예쁜 옷 입는다고 구원받은 거 아니거든요. 이 화면이 끝났으니까 이게 검은색이지만, 하나님이 이걸 뭐로 보는가 하면, 죄에 대한 피 색으로 피로 칠해버린 거예요. 피로서 이미 세상은 마지막 때가 된 겁니다.
그 마지막 때가 여기 이스라엘 내부에서 성소 내부에서는 미리 이미 시작이 되었어요. 미리 마지막 때가. 그래서 이스라엘 가는 곳마다 주변나라가 마지막으로 맞이합니다. 여리고성에서 여리고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만나는데 완전히 멸망당했잖아요. 그들은 완전히 멸망당했잖아요. 그 마지막이라는 것을 증거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거기서 구사일생 기어 나온 살아남은 기생라합 가족, 그들만 “앗다, 식겁했다.” 이리 나오는 거예요. “앗다, 하나님이 무섭긴 무섭더라.” 이리 나오는 겁니다.
뭔가 멸망을 해도 멸망한 이유를 알아야 되고 그 방식을 알아야 될 텐데 이 방식은 이스라엘도 모르고 망했던 나라도 몰라요. 홍해가 갈라졌으면 갈라진 이유가 있어야 될 텐데 지형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이건 이스라엘도 모르고 이건 애굽 군사도 몰라요. 빠져 죽어도 몰라요. 왜 빠져 죽었는지를 몰라요. 사람은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 죽어가고 있는지를 몰라요. 왜 죽는지? 왜 내 색깔이 탈색되어서 까맣게 되는지? 왜 죽으면 하얀색이나 까만색이나 색깔이 없는 무색으로 왜 돌돌 쌓아야 되는지? 내가 좋아하던 옷이 아니잖아요. 화려한 옷을 원하는데 검은색으로 꽁꽁 치고 왜 내가 그런 대우를 받아야 되는지? 평소에 살아야 될 때는 뭐라고 합니까? 나만 건드리기만 해봐라. 가만 안 둔다. 했는데 죽어서는 지근, 지근 밟아도 흙을 뿌려도 병신같이 가만히 앉아 있고. 뒤에서 쿵덕 쿵덕 밟아도 시끄럽다고도 못하고 가만히 누워 있고. 왜 내가 그런 대우를 받아야 돼요. 왜 내가 그런 대우를 받아야 됩니까? 거기다가 새들이 와서 1차 먹고 2차는 박테리아가 먹고.
8절에 봅시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이제 신약 때 신약의 십자가로서 다시 해석을 해보자 하는 그 뜻이에요. 구약의 있는 해석은 사람으로 못하고 십자가 지실 때 오신 성령만이 구약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라는 뜻에서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성령으로 해석한 것은’ 이런 뜻이에요.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뜻이 상당히 어려운 뜻이 되는 이유가요. 지금 구약의 여기서 두 번 째 2구역이 지성소인데, 지성소가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그들은 생각하겠어요? 생각 안하겠어요? 못하지요. 성막이 있다.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앞뜰의 연기밖에 없어요. “아, 연기가 올라가네. 오! 성소가 올라가네.” 이런 거 없잖아요. 땅에 끈으로 해서 딱 고정시켜 놨어요. 이동할 때 빼가지고 가도록. 고정을 시켜놨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가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나중이 되면 이것이 불타버리지요. 이 성소자체가 불타버립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옛날에는 성소, 성소가 완성되어서 하늘나라 되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가 먼저 있고 이 성소가 하나의 그림자가 되는 거예요.
8장 4절에 보면,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지요. 그림자가 있는 거예요. 그림자가 있다는 말은 진짜는 하늘에 붕 떠있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지성소가 따로 있다는 거죠. 그래서 하늘의 지성소가기 전에 이건 모형이고 그림자지요. 그림자로서 모든 것이 들통 나기 이전까지는 진짜 실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성령께서 그렇게 해석을 하시는 거예요.
일 년에 한차례 들어갔거든요. 일 년에 한차례 들어갔는데, 한차례 들어간 거 그거가지고 다음에 가면 그만 갑니까? 그 다음에 또 갑니까? 또 들어가야 되지요. 이게 온전하지 않다는 거죠. 한 번 들어갔으면 끝나야 될 텐데 2구역(지성소)이 끝이니까 끝나야 되는데 또 간다 말이죠. 또 간다는 말은 끝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또 가요. 또 끝이 아니라. 뭐야? 자꾸 반복하는 거예요. 언제 멈추지요? 모형이 모형으로서 이게 모형이네. 그림자네. 하고 들통 날 정도로 실체가 왔을 때는 이제는 이 짓을 이제는 안 해야 되지요.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만드는 거예요. 그만 해야 돼요.
그래서 9장에 보면 그 다음부터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이겁니다. 어떻게 모형과 실체가 만나는가, 그 이야기를 하는데 이거 참 너무나 난해해요. 왜냐 하면은, 모형과 실체는 유사성이 있어야 돼요. 유사성이 있어야 되잖아요. 유사성이 없어버리면 되지를 않지요. 건축사 설계도 책상에 보면 자기가 지을 아파트 모형을 해 놨다 말이죠. 그 모형 모습하고 실제로 건축하는 아파트하고 모형이 비슷합니까? 비슷하지 않습니까? 비슷하지요. 축소해 놓은 거죠. 1000/1로 축소한 것과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하고 성소하고 비슷합니까? 비슷하지 않습니까? 완전 비슷하지 않지요. 그러니까 연결이 어려운 거예요. 예수님의 주머니에서 어린 양의 목걸이가 나온다면 이해가 되겠는데, 예수님의 주머니에서 제단의 작은 모형 미니추어 같은 것이 나온다면 이해하기 쉬운데. 주님의 주머니 털어 봐도 성소에 관련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어려운가. 아까 제가 언급을 했어요. 인간 자체가 성전자체를 이미 우상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우상으로.
제가 출애굽기32장에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긴다고 뭘 만들었지요? 송아지를 만들었지요. 그 송아지가 왜 여호와지요? 애굽에서는 송아지가 신이거든요. 자기는 지금 신을 묘사한 거예요. 그러나 신은 묘사해서는 안 된다고 본 겁니다. 지시와 명령이지 묘사할 문제가 아니거든요. 실적과 업적을 남기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지시와 명령이에요.
예수님이 평소에 아버지 하늘나라라고 만든 게 있습니까? 예수님이. 예수님이 어릴 때 목수니까 “자, 이게 우리 아버지야.” 만들어놨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아버지와 어떤 관계였습니까? 지시와 명령을 따라서 순종했던 관계지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때가 되매, 매일 때가 되매. 말씀이 응하기까지. 매일 이런 이야기에요. 모든 스케줄 하나, 하나가 말씀대로, 약속한 대로 한 거예요.
약속대로 사는 거죠. 성도가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꼭 실적과 업적, 월급 올라가고 집안 잘되고 이게 문제가 아니고 주님의 약속 앞에서 약속 지시가 우리한테 늘 살아있으면 되겠지요. 약속이 뭐냐, 새 언약이고 그게 십자가인데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Nothing,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공짜로 희생으로 주신 것이지, 내가 힘들여서 얻은 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것, 이게 바로 지시에 따르는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들어보니까 굉장히 간단해요. 간단하잖아요. 간단한데, 또 어느 순복음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이번에 기도해서 드디어 응답받았어요. 아파트를 안 팔려고 했는데 5배 더 받고 팔았어요. 주의 응답이에요.” 이렇게 나올 때, 그럼 우리는 갑자기 그런 소리를 듣고 가가지고 “저 집에 정수기 얼음 나온다는데 엄마 우리 집은? 우리 집 정수기 얼음 왜 안 나와?” ‘기도가 잘못되었는가. 꿇어앉아 기도해야 되는가, 나는 꿇어앉아 금식하지도 않았어. 기도 하는 둥 마는 둥 해서 성의 없다고 아예 응답 안 해주나.’ 이리 또 생각한다니까. 이리 또.
신앙생활 잘 하다가 옆에서 긁어버리면 갑자기 화가 나가지고 “왜 나는 10년째 기도해서 응답이 없습니까?” 이리 또 나온다니까요. 그림자에서 실체로 연결하는 고리가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없어요. 우리는 온전치 못하거든요.
그럼 10절 봅시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율법에 의하면 먹고 마시고 씻고 하는 이 여러 가지 씻고 하는 이 모든 것, 이 모든 것을 우리가 하는 것을 이제는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결국은. 다른 분이 여기서의 합당한 모든 내용은 다른 분이 이미 다 해버렸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그 분이 누구십니까?
그 다음에 11절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 했지요. 자, 여기 개혁이라는 말을 했는데 개혁은 고친다는 말은 뭐예요? 지금 전해졌던 율법에서는 지시와 명령이 뭐냐 하면, 인간보고 뭐를 하라하는 거죠. 하라 했으니까 그들은 했을 것이고 했으니까 하기 전과 하고 난 뒤의 어떤 실적 같은 것이 나타났을 거예요. 성소를 만들라 하니까 성소가 생겼잖아요.
그러니까 전에 것의 법은 뭐냐 하면, 손으로 쪼물닥 쪼물닥하면 뭐가 나온 거예요. 양을 씻으면 씻는 거고 양을 죽이면 죄를 씻는구나, 라고 인간의 행함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반면에 새로운 법은 일체 인간의 모든 행위를 차단시키는 그런 새로운 법으로 개혁이 됐다는 겁니다. 이게 개혁이에요. 인간이 끼어들 수 없게 만든 법의 조항이에요. 예수님만 초점에 맞추어서 새로운 법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그걸 가지고 11절에 나오지요.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장차 좋은 일은 제사장으로 오사 그 다음에 뭡니까?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그리고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아! 손을 떼라, 이 말입니다. 니 운명에 대해서 니 장래에 대해서 손을 떼라. 손 떼면 네가 답답한 건 알겠는데 니가 초조한 건 알겠는데 내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안하면 결국 나는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우리는 맨 날 우리 인생의 고난밖에 생각을 안 해요. 항상 자기의 이익이잖아요. “이렇게 기름 값 내리면 주유소 하는 우리 가족 망하는 거 아닙니까?” 이리 나와요. 아무리 고상하게 하나님, 예수님 찾아도요, 그건 둘러서 둘러 가는 하나의 경로에 불과하지 결국은 골인지점은 어디입니까? 나 자신에게 돌아오지요.
“주여,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고마우신 분이군요.” 해놓고 실제로 나한테 이익이 있어야 주님을 섬길 요량과 의욕이 생기지요. 실패했는데 나에 대해서 아무런 무관심하고 나를 무시해버리면 우리가 무슨 재미로 주를 섬깁니까?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지금 교회에 나오는 것은 다른 더 재미있는 게 없기 때문에 나온다고. 그러다 교회 재미없으면 집에 있겠지요. 교회 재미있으면 못 가겠다.
마지막으로 이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지성소, 성소 다 사람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제비를 뽑으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제비를 안 뽑은 게 아니에요. 손을 다가가지고 접근해서 카메라로 찍으면 나타나요. 제비 뽑는 것이 나타난다고요. 성소를 뚝딱 뚝딱 만들고 제사장 옷을 장식하고 실제로 다 만들어요. 이것은 부정할 수 없어요. 진짜로 만드는데,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만들었다니까요. 그것을요.
성도가 밥을 먹어요. 하지만, 성도가 밥을 먹는데 성도 입장에서는 주님이 함께 있어서 주께서 먹이게 하셨다고 참새를 먹이듯이 주께서 오늘도 먹인다고 본인이 그렇게 믿어지는 걸 어떻게 합니까. 믿어지는 걸. 또 달리 이야기해서 본인이 또 그게 안 믿어지는 걸 어떻게 합니까. 본인이 안 믿는 걸 내가 어떻게 해. 본인이 안 믿는데. 내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이야기해야지. “목사님의 말은 맞는데요. 내가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걸 왜 나보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안 믿는 나를 목사님이 믿게 해 주셔야지요.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니 제가 하는 일은 뭐냐 하면, 본인 문제에 본인이 개입 못하듯이 목사도 당신 문제에 개입 못합니다. 라는 말을 내가 이야기 했잖아요. 그건 오직 성령이 한다고요. 제자도 제자 구원 받는데 어떻게 못하고, 사도바울도 사도바울 본인 구원받는데 자기가 어떻게 못했어요. 성령 받은 사람이라도 자기 구원에 손을 못 대요.
성령 받고 난 뒤에 자기가 손댄다. 그건 거짓말이에요. 그건 완전히 거짓말이에요. 그런 일 없어요. 성령 받고 난 뒤에 더욱 더 분명해진 것은 역시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손을 떼어야 된다는 사실이에요. 손 떼는 방법이 막 사는 거예요.
사람이 뭔가 자기한테 손을 댈라치면 거기서 실적을 기대하게 되고 그 기대된 것이 합치됐다고 여겼던 그것이 나의 모델이 되면서 나의 우상이 돼요. “나? 옛날에 기도해서 병 고친 사람이야. 그게 나야!” 하고 자기가 우상화되어 버려요. 우상화되어버리면 이것은 그리스도를 가리는 송아지형상이 되어가지고 우상숭배가 되어버린다니까요.
영화감독이 작품을 만들었다. 벤허를 만들면서 “주여, 내가 어찌 이런 작품을 만들다니!” 감탄했다는 거예요. 감독은 벤허를 만든 건 좋은데 잊어야 돼요. “언제? 내가 언제 했는데?” 잊어야 돼요. 목사가 “내가 어찌 그런 설교를?” 해놓고 잊어야 돼요. “내가 뭐? 뭐 없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설교해서 구원받는 거 아니야.” 이렇게 되어야 돼요. “아, 목사님 덕분에 5000명이 모였습니다.” “뭐? 내일되면 다 갈 사람인데 없어. 나는 그리스도만 자랑할 거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러분 같으면 “아이고, 자식을 왜 이렇게 예쁘게 잘 키우셨습니까?” “뭐? 지 DNA인데. 뭐 없어. 아무것도 아닌데 DNA 잘해봐야 육이지. DNA 잘한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고.”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른 법을 이야기했는데, 그 다른 법이 기존의 법을 잠식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기존의 율법을 지키지 말고 예수님을 믿자, 가 아니에요. 예수 믿자! 가 아니라 기존에 예수 믿기 때문에 율법을 다 이룬 게 돼버려요.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하는 모든 것이 율법을 다 이룬 것이 돼요. 그게 애매한 거예요. 왜냐 하면, 우린 다 이룬 의인이 되고 동시에 율법을 하나도 못 지킨 죄인이 되고. 그게 아까 이야기한 성도의 애매한 존재론적 실존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믿는 것은 이미 모든 율법을 다 지킨 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사랑이 오게 되면 용서가 되니까. 우리는 모든 죄가 없는 의인이 됐지요. 창녀라 할지라도 의인되어서 가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럼 율법을 왜 줬는가, 율법을 통해서 죄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수 없음을, 죄진 우리가 죄 문제 해결을 못하고 다른 분이 오셔야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율법을 줬고 언약을 옛 언약을 주신 겁니다. 이 언약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하지 못한 것을 늘 깨닫게 만들고 온전한 다른 분이 와야 된다는 겁니다.
왜 온전하지 못한가, 그 온전하지 못한 것이 우리가 가만히 있다가 예수님 오신 게 아니고 우리 손으로 예수님을 죽여 놓고 죽인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은 그 온전치 못한 것이 우리가 미흡한 정도가 아니고 근원적으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죄를 싫어하고 의를 선호하는 그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는 그게 온전치 못한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냥 이렇게 보면 돼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주되심을 위해서 그냥 이용당한 거예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Nothing에요. 낫싱이에요. 아무것도 아닌 자를 이용하셔서 주님의 자신의 명예와 영광만 드러내시는 작업을 성령을 통해서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는 우리의 본성,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는 우리의 육의 본성, 그것을 믿음이란 이름으로 그걸 누른다 할지라도 눌려지지 않음을 인정케 하여주시옵소서. 차라리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죄인으로 드러나는 그것이 주님의 의인되게 하는 작업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안양20141212b-히9장1절(애매함) - 이 근호 목사.hwp (33.0K), Down: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