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강-에스겔 41장 1절(성소측량)150128-이 근호목사
123강-에스겔 41장 1절(성소측량)150128-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7.51)
123강-에스겔 41장 1절(성소측량)15012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1장 1절입니다. 구약성경 1218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1: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에 이르러 그 문벽을 척량하니 이편 두께도 육척이요 저편 두께도 육척이라 두께가 이와 같으며.”
“그가” 하는 것은 천사고요, “나를” 하는 것은 에스겔, 인자입니다. 에스겔을 에스겔이라 하지 않고 인자라고 하는 것은 지금 성전의 구조라든지 이 모든 일어나는 새 성전의 모습에 누가 여기에 가까이 갈 수 있느냐 하면, 인자 되시는 분뿐입니다. 이 성전과 천사와 동행해서 인자에게만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성전 자체가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어야 될 기본 설계도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 건축물을 이야기할 때 이 대목을 보는 사람, 에스겔 끝부분의 새 성전 측량하는 이 대목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장차 하나님의 건축물 하나 만드는구나.’라고 할 거예요. 건물 하나 짓는다고 생각하지요. 왜? 실제로 측량을 하니까요. 그런데 이 건축물이라는 것이 꼭 우리한테 필요한가, 하는데 있어서 우리 맘에 와 닿지를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거주지가 있고 우리는 그 안에 있으면 만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데 또 성전이라고 크게 지어놓으면 우리는 또 그걸 섬겨야 한다는 심적인 부담을 느끼거든요. 그래서 딱 깨놓고 말해서 “하나님께서 성전을 짓는 이유가 뭡니까? 그냥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면 될 텐데 성전을 구태여 이렇게 지어야 할 이유가 뭡니까?” 그게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 거예요.
성경 전체를 다 꿰뚫어 보게 되면 비로소 성전이 있어야 될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거주지에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의 우리 생각이고요. 창세기 4장에서 그걸 도시라고 합니다. 성을 짓습니다. 거기 사람이거주합니다. 그런데 거기 거주하는 인간들이 거기서 나중에 나이 많으면 늙어 죽어요. 처음에 인간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의 거주지가 에덴동산이었지 도시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시로서 족하다고 생각해버리면 도시에서 에덴동산으로 또는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어떤 다리 같은 게 없어요. 도시가 허물어져야 되지요.
그러나 도시가 허물어지게 되면, 그걸 심판이라고 하고 멸망이라 하는데, 우리는 그걸 애타합니다. 안타까워합니다. 평소에 도시에서, 우리 집에서 살던 버릇이 남아가지고 이런 식이 아니면 우리는 안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아파트, 단독주택, 빌라, 그렇게 사는 그것, 그것만 우리가 태어나면서 줄곧 익숙해지다 보니까 주님이 만든 거주지에 산다는 것이 감이 잘 오지 않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에덴동산을 기억 속에서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잊어버린 에덴동산을 회복해서 너희들의 영원한 거주지가 되는 조건들이 이미 에덴동산에 새겨져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생명과 죽음에 관한 나무입니다. 생명에 관한 나무는 생명나무고 죽음에 관한 나무는 선악과나무입니다. 생명과 죽음이 다 같이 있는 그곳에 너희들은 살아야 된다는 거지요. 죽음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선악과, 그리고 영생을 주는 생명나무, 바로 그곳이 처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살라고 한 거주지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의 거주지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입니다. 그러면 생명과 죽음을 다 같이 공유하고 있는 거주지가 어디에 있느냐, 실제로 그런 것이 있기는 있느냐, 하고 물으실 때에 제가 성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 새 성전이 오늘날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먼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이 새 성전의 건축을 보면서 우리가 눈으로 보기는 측량된 건물, 단독건물, 그것을 자꾸 보는 거예요. 솔로몬 성전이라든지 헤롯성전, 그런 것이 번듯하게 있으면 그것이 에스겔에 나오는 성전의 측량과 유사한지, 같은지, 그걸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전체를 보게 되면 전혀 그렇지 않아요.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1장 13절에 보면,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여기 촛대가 나오거든요. 이 촛대가 뭐냐 하면, 바로 성전 안에 있던 그 촛대입니다.
그 다음에 향로는 요한계시록 8장에 나와요. 8장 3절에 보면,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성전이 요한계시록에서는 흩어져 있고, 깨져 있고, 모자이크처럼 부분부분, 한곳의 특정 건축구조물이 아니고 이 세상 전체가 성전 화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결정적인 증거가 뭐냐?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여기 측량 나옵니다.
측량이 나오면서 그 측량한 그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 뭐냐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계 11:8)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지명이 다 달라요. 소돔, 애굽(이집트),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예루살렘의 골고다언덕입니다. 이게 다 같은 장소가 아닌데 요한계시록은 똑같은 장소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에 말하는 편재화된, 퍼져버린 성전을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붕 떠 있는 성전이라고 보는 거예요.
붕 떠 있는 성전. 붕 떠 있는데 눈에 안 보이잖아요. 붕 떠 있는 것이 지상에 있는 우리 일상생활에 결합이 되어 있습니다. 겹쳐져 있지요. 겹쳐져 있는데 그러면 어디가 성전이냐고 물어서는 안 되고 “새 성전다운 사건이 어디서 벌어집니까?” 이렇게 물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슬슬 어렵기 시작하네요. 어떤 특정장소에 건물이 있으면 거기 가면 새 성전이고 우리 집에 오면 그건 우리 아파트고, 딱딱 구분되어서 섬기려면 그 건물에 가서 섬기면 되잖아요. 이게 오늘날 예배당이라는 거잖아요. 예배당, 또는 교회 건물, 고딕건물, 그걸 예배당이라 하거든요.
교인들이 교회 가면 예배드리러 가고 집에 오면 예배 끝난 거예요.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예배사건이 집에 있으나 교회 있으나 그것은 전혀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와도 자기 집이 될 수 있고 집에 가도 그것이 교회가 될 수 있고, 그것은 주님이 새 성전 사건이 일어날 때 그것은 주님과 함께 거하는 거주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있어서의 새 성전이라는 것은 성전다운 사건이 유발되는 겁니다. 그 성전사건이 뭐냐? 생명과 죽음, 에덴동산에 있었던 그 생명과 죽음이 재현되고 반복되는 사건입니다.
그냥 살인사건 아닙니다. 그 죽음 사건이 살인 사건 아니거든요. 에덴동산은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선악과 따먹은 사건으로 해서 죽음이 초래되었다는 말이지요. 뱀이 칼 가지고 아담과 하와를 찌른 것이 아니에요. 칼이나 지뢰밭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가볍게 열매하나 따먹었을 뿐인데 죽음이 초래된 거예요.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에덴동산에 있었던 죽음사건과 생명사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이제는 생명나무는 못 따먹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았습니다. “네가 거주할 곳은 죽음과 생명이 다 같이 있는 곳뿐이다.” 그러면 그것을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요. 못 만들지요. 사건을 어떻게 만듭니까?
사건은 내가 소유라고 알고 있는 그러한 판 외에서 벌어지고 낯설게 벌어지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나의 현실 속에서는 사건 화되지 않습니다. 그것과는 전혀 예상 못한 다른 일이 벌어졌을 때 “야, 사건이다.” 그걸 가지고 대박사건이다, 그렇게 하지요. 갑자기 일이 벌어져버린 거예요. 기적이다, 표적이다, 다른 말로는 그렇게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건을 일으키는가? 다시 이야기할게요. 살인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통사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통사고야 우리 입장에서는 깜짝 놀랄 사건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이 깜짝 놀랄 사건은 처음 거주지, 너희가 거할 거주지는 이런 곳이라는 그것과 관련된 죽음 사건이어야 합니다. 교통사고, 그 사건이 아니고, 살인사건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아들을 바쳐야 되는 그 사건이지요.
“네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바쳐라.” 그런 예는 굉장히 많아요.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내리는 것. 그리고 출애굽 때 대표적인 것은 어린양의 피를 바르니까 바르지 않은 옆집은 죽고 바른 집은 생명이 되고.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아주 집요하게 이 땅에 설치하고자 하는 새 성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툭, 툭, 던지는 사건들로 이루어지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완전히 폭죽놀이 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밝아지면서 폭죽이 올라가는 식으로 사건이 온다면 우리는 종잡을 수가 없겠지요. 왜냐하면 사건자체가 우발적이기 때문에. 내가 예상하거나 미리 준비할 수도 없는 사건인데.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와 선악과 사건을 유발할 때, 가인의 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벨이 제사 드리면서 “하나님, 이 제사드릴 테니까 빨리 형에게 시켜서 날 죽이게 하옵소서.” 아벨이 그런 식으로 미리 예상해서 제사 드린 것은 아닌 거예요. 아벨이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이 받았고 그 다음에 아벨이 죽는 것은 아벨 자신이 예상한 바가 아니고 가인을 통해서 아벨을 죽게 했을 때 아벨은 그냥 죽었어요. 그 죽음 사건은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특별한 어떤 암호, 어떤 특별한 비밀, 정보를 품고서 죽는 죽음이 되는 겁니다. 그 아벨의 죽음이라는 것이.
또 에스더 4장 16절에 보면 나오지요. 에스더 4장 16절에 에스더가 왕궁에서 왕비로 있습니다. 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지더니만 에스더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가 왕궁 들어갈 때 ‘내가 들어가 봤자 분명히 나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질 거야. 하지만 나는 죽으면 죽으리라.’ 미리 예상하고 예측한 것이 아니에요. 그냥 편안하게 잘 지냈는데 모르드개가 와서 그런 소리를 하니까 ‘아, 이 자리가 나의 거주지가 아니구나. 평안과 영생을 위한 나의 거주지가 아니구나.’ 영생이라는 거주지는 반드시 선악과와 같은 맥락의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지칭하기 위해서 일으킨 죽음사건과 더불어서 생명나무가 있는 거예요. 영생은 거기에 있는 겁니다. 죽음 없는 영생은 없다는 그 말이지요.
어쨌든 간에 설교하면서 지금 제가 이런 예를 드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종잡을 수 없다는 겁니다.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전체의 맥락을 놓친 것이 되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이 거주지는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 에덴동산이 처음부터 인간의 거주지라고 했는데 사실은 인간의 거주지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거주지로 만든 겁니다. 더 이상 사적인 인간의 거주지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위한 천국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없어요. 나를 위한 천국 같으면 에덴동산에 선악과 같은 것은 없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 여자애들 같으면 천국에 바비인형만 좍 있는 거예요. 쓸데없이 생명나무 열매 같은 것도 필요 없어요. 피자나무나 햄버거열매, 잡채열매, 돈가스열매, 그런 것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축구, 아시안컵 축구, 류현진이 공 던지는 것, 그런 것만 있으면 돼요.
주님께서는 그 거주지를 밀어붙입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이 대목은 오늘 성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그냥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 6장 26절에,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둘째아들)를 잃으리라.” 여리고성 무너뜨리고 난 뒤에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는 말이 이 여리고성은 두 번 다시 건축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건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담고 있는 그러한 장소가 여리고성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리고성은 일반적인 사람의 거주지가 아무런 거지주가 없고 떠도는 나그네집단 같은 이스라엘에 의해서 완전히 짓밟힌 사건이 여리고성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여리고성을 이스라엘의 거주지로 삼는 게 아니에요. 거기는 아무도 살지 못해요. 여리고성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침략하기 이전까지는 우리가 살만한 괜찮은 동네라고 그 성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를 듬뿍 품고 있는 이스라엘과 맞닥뜨리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 나만을 위한 거주지라는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들이 여리고성 다 뭉개지고 다른 곳에 가서 살아도 마지막 불 심판 내리면 그것도 사라져요. 어쨌든 간에 인간 홀로 사는 거주지는 이 세상천지에 하나님께서 인정해준 적이 없습니다. 아파트 네 채, 다섯 채, 열채 있는 사람들 주의해야 돼요. 이 땅에 어떤 거주지도……, 마이클 잭슨의 집이 몇 천 평이고 그 집값이 얼마이고 맨해튼의 아파트 값이 4십 몇 억이라고 죽 나오지만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거주지가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주지가 없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왜 없어야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거주지는 오직 내가 죽어야 될 그 자리, 죽어야 될 자리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건에 편입되어야 돼요. 아파트 팔고 전세로 옮겨가고 남은 돈 교회 바치라고 하는데 여러분은 절대로 그런 것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교회라는 이름의 거주지도 없어요. 우리는 아파트라는 거주지가 꼭 있어야 돼요. 여유만 된다면 한 열채라도 갖고 있으면 좋아요. 좋은데 그 곳이 뭐냐, 어떻게 우리가 살아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사건에 의해서 내가 죄인으로서 죽어야 될 이 자리를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돼야 돼요.
그래서 아버지가 되어서 자식한테 자기 아파트를 물려줄 때는 ‘이 아파트에서 이 아버지는 내 지은 죄 값을 한다고 이 자리에서 죽었다.’는 그 역사를 담고 물려주면서 “너도 여기서, 이 아파트에서 죽어라.” 그렇게 물려줘야 되는 거예요. 상속 안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해주세요. 해주시되 나를 죽였던 아파고 이제 너를 죽이는 아파트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거주지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은 따로 너 혼자 살지 말고 나하고 같이 살자는 그 거주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시편 84편에 보면 나와요. “참새도 보금자리를 얻고자 성전 처마에 찾아드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과 함께 산다면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차라리 내가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어요. 역대상 28장에 보면 거기 다윗의 통치에 대한 조직체가 나옵니다. 역대상 28장도 그렇고 역대상 22장도 그렇고. 여기서 다윗이 신경 쓰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만 살아서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곳이 되니까 우리 이스라엘 내에 하나님이 살만한 곳을 제가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하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게 최초의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맙구나. 아이고, 이런 효자를 봤나.” 하고 받아주시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을 만들 때 무늬가 있는데 그 무늬가 종려나무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본문 41장 18절에 보면 “널판에는 그룹들과 종려나무를 새겼는데.” 여기 그룹들이라 하는 것은 천사들이지요. 천사와 종려나무가 같이 새겨져 있어요. 천사와 종려나무가 같이 새겨져 있고 그 다음 20절에 보면, “하나는 사람의 얼굴이라 이편 종려나무를 향하였고.” 사람과 천사가 함께 있어요.
종려나무가 성전에 새겨졌다는 말은 종려나무가 최종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겁니다. 평정을 의미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평정된 그 끝 지점을 보여주는 것이 종려나무에요. 그 증거가 요한복음 12장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에 거기 모인 군중들이 무슨 나무를 들었느냐? 종려나무를 들었어요. 종려나무를 들면서 그들이 외치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제야 오셨군요.” 아, 우리가 하나 놓치는 것이 있어요. 예수님이 오실 때 ‘메시아가 오셨군요.’라고만 생각해요.
어떤 분이 저에게……, 그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교인들끼리 예배마치고 이야기를 하면서 집사님 한 분이 “그분이 오셨습니다.”라고 할 때 제가 말을 바꿨어요. 그 분이 오신 것이 아니고 그 날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시간대에 집어넣으려고 해요. 이것은 자기 시간이라는 자기 거주지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합세해서 좋다고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시간이 꾸겨져야 돼요. 그분이 오신 것은 맞는데 그 분이 오셔서 우리의 시간을 철거하고 찢어버립니다. 그러면 주어진 것은 그분의 시간이 와요.
우리는 내 시간 따로 있고 그 분이 숟가락 하나 얹는 것처럼 “내 세계에 주님 오시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 같이 삽시다.” 하고 악수 먹을 생각을 하는데 우리가 하는 악수는 쥐고 한 두 번 흔들면 그만이지만 주님이 만약 우리에게 악수를 청하면 손을 안 놓아서 영원히 계속 흔들고 있어요. 주님께서 올 때는 우리의 세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거주지를 용납하지 않아요. 찢어버립니다. 그것은 죽음판이기에 그렇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 우리와 함께 살아요.” 주님께서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러면 “주님은 우리와 안살 거예요?” “아니. 너하고 살아.” “그러면 저하고 산다고요?” “아니.” “방금 저하고 산다면서요.” “아니, 너를 내가 만들어서 살게.” 다윗이 “제가 여기 있는데 뭘 만듭니까?” “너는 죽은 다윗이고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윗과 함께 영원한 약속을 맺겠다.” 하는 겁니다. 그것이 다윗의 자손이에요. 다윗의 자손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다윗은 진짜 다윗의 그림자고 다윗을 따라가다 보면 이스라엘 왕 진짜 다윗이 등장해요.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다윗의 자손에서 다윗이 쏙 나오는 거예요.
여자가 임신했을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자가 임신했을 때 누구나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팁인데요, 여러분만 알려드립니다. 방송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자가 아기를 낳았잖아요. 그러면 임신한 동안 두 명의 인물이 같이 있지요.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둘 중에 누가 주인공입니까? 우리 시간대는 엄마가 아기를 낳으니까 엄마가 주인공이고 그 애는 엄마의 자식으로 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거든요. 왜냐하면, 우리의 시간은 계속 삭제당하니까.
결국 우리의 자손이 주인공이고 나는 우리의 주인공을 잠시 보관하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아요. 이런 말 하면서도 참 끔찍하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품어서 임신하지 않으면요 우리는 그리스도 사람이 아닙니다. 내 안에 들어와서 주인노릇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어야 해요. 그래서 우리는 바깥에 그리스도를 뽑아내야 돼요. 힘써서 그리스도를 출산시켜야 돼요. 예수님을 출산시켜야 돼요. 그럴 때 “내가 살아온 것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하는 이 말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고도 왜 죽는지를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선악과 죽음 안에 주님이 풍덩 뛰어 들어온 겁니다. 뛰어 들어와서 우리 안에서 선악과 죽음을 유일하게 제대로 맛을 보시고 저주받으시고 그 저주받은 주님을 사흘 만에 하나님께서 부활시키니까 저주도 느끼고 부활이라는 생명도 느끼면서 예수님 가는 그곳에 우리가 갈 때에 “주여,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하는 고백을 하면서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거주지에서 살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그 천국은 나의 거주지가 될 수가 없어요.
다윗 이야기를 다시 해 봅시다. “다윗이 말하기를 하나님 제가 주님과 함께 거주할 성전을 지어드리겠습니다.” 하니까 하나님께서 “너 말고 네 자식”이라고 했거든요. 너 말고 네 자식. 그러면 솔로몬이 성전 짓겠네요. 솔로몬이 성전 지었는데 그 성전 말고 솔로몬에서 또 나오는 다른 어떤 무엇. 그래서 에스겔 40장, 41장, 42장에 나온 이 구조가요, 누굴 닮았느냐 하면, 솔로몬 성전을 그대로 빼다 박았어요. 물론 차이 나는 것이 많아요. 하지만 여기 나오는 그 구조에 이런 게 있어요. 물론 치수도 달라요. 제일 다른 것이 뭐냐? 솔로몬 성전에는 물이 안 나왔다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미완성이라는 뜻이지요. 성전이 미생이라, 완성이 아니고. 미완성이에요. 그런데 여기 에스겔 47장이 되면 드디어 거기서 물이 나오지요.
거기서 물이 나와서 그 물이 사방으로 흐르면 이게 완전히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에덴동산하고 똑같아요. 성전은 중앙에 있고 그 주위에 생명수를 먹고 생겨난 마을이 있는데 그걸 성읍이라고 하고 그 성읍에 보면 열 두 지파가 옹기종기 모여 삽니다. 물론 그 중심에 성전이 있고 그 성전 바로 곁에는 제사장의 토지가 있고.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여기 나오는 모든 구조, 제가 아까 요한계시록 이야기는 짧게 했지만 에스겔 까지 같이 보게 되면 이것은 마치 옛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못 이룬 한을 풀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일단 요한계시록은 뺍시다. 시간이 겹쳤다는 것, 시간과 시간이 겹치는 것, 묵시적시간과 역사적 시간이 겹치는 것, 요한계시록의 성경해석, 처음에 이야기한 그것은 잠시만 접어두고 에스겔까지만 보게 되면 마치 한 맺힌 것처럼, “너희들이 이런 식으로 살다가 실패했지만 나는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 두 번째 다윗을 보내서 다윗으로 하여금 너희들이 어디서 실패했는지 어떤 것을 너희가 상실하고 그것을 빠트렸는지,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해서 너희들이 어떤 잘못으로 인해서 함께 살 수 없는 백성이 되어서 지금도 유배되어 있는가?”를 지금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새 성전에 들어올 임금, 왕은 유배지를 거쳐서 들어와야 돼요. 왜? 유배지를 거쳐서 들어와야 거기에 합류하는 백성들, 이 성전에 들어올 백성들도 자기가 자유를 잃었다는 아픔과 더불어서 자유를 얻었다는 기쁨을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예 12년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면 원래 흑인인데 자유인이거든요. 바이올린 켜는 사람이죠. 그 영화를 비행기 안에서 봤어요. 그 흑인이 납치를 당해서 12년 동안 비참한 노예생활을 했어요.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이 자유라는 것이 자유를 빼앗겨 보니까 이토록 자유라는 것이 고귀하구나.” 하는 것을 아는 거지요.
이게 제 2의 출애굽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온 뒤에 자기 텃밭이나 가꾸고 살면 그것이 사는 것인 줄로 알았어요. 뭔가를 잃어버린 것을 몰라요. 자유를 잃어버린 거예요, 자유를. 그래서 어디에 매였다? 죄에 매여 있고, 율법에 매여 있고, 저주에 매여 있고, 죽음에 매여 있고 마귀에 매인 거예요. 그걸 유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몽땅 경험케 하기 위해서 애굽에서 살게 만듭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거주지라고 여겼지요? 본인들도 안 나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네가 살 곳은 그쪽 애굽이 아니고 나랑 같이 살자.” 해서 등장한 그 분이 바로 어린양이고 그 어린양이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신 그 분이에요. 따라서 “너희들은 그 쪽에 살면 안 되고 나랑 살아야 돼.” 이게 하나님의 숨겨진 질서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어린양인데 그게 신기한 게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면 살고 자기 죽음을 안 받아들이면 저주받아 죽는 것, 이 말은 곧 이미 산자로서 죽음을 이해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이해?
늙어 죽는 것 말고 하나님 앞에서는 나는 죽은 자라는 것을 미리 아는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어요. 그것이 선악과의 죽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서 생명나무 있는 곳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다윗이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완성된 성전인줄 알았어요. 물이 안 나오는데도, 옛날의 그 에덴동산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한 겁니다. 주께서는 성전 지어놓고 성전을 하나님 손으로 불 질러 버립니다. 바벨론이 들어와서 불 질러 버려요.
불만 질렀습니까? 백성들은 다 쫓겨 갑니다. 이제는 애굽나라의 포로 되었던 그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서 포로가 되어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에스겔인자에게 “인자야, 너에게 보여줄게 있다.” 뭐냐? 성소까지 데려갑니다. 성소까지 데려가면서 거기에 나오는 출입구부터 시작해서 다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서 측량한다는 말은 이 땅은 이제는 거덜 나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새 성전을 위하여 측량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완성된 쪽과 완성되지 않은 쪽, 완성된 쪽은 측량하고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것은 측량하지 않아요.
이미 완성된 성전에 들어온다는 것은 그만큼 이 땅에서 온갖 나그네 생활을 네가 해야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자유라는 것, 이 땅에서는 자유가 없음을 절감해야 돼요. “지금은 우리가 노예가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인간은요, 돈이라는 것의 노예, 이것도 힘들지만 더 큰 것은 알 수 없는 공포로부터의 노예, 두려움,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 그리고 육신이 주는 연약함, 류머티스, 관절염, 이런 거요. 편두통. 이 땅에서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자기 생존본능 자체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그게 노예거든요.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주님과 함께 살도록 만들어 진건데 우리는 나만 살면 된다는 식으로 억지를 부리니까 그 억지가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합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게 배우라는 말이지요. 주님께 “한 수 가르쳐 주세요.”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그냥 죽으면 돼.” “그냥 죽으면 자살해야 됩니까?” 그러지 말고 내가 너를 부르는 사건에 의해서, 살았다 하지만 사실은 이미 죽은 자로서 살면서 그게 바로 자유가 되는 겁니다. 어떤 율법이라도, 모든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로부터도 자유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뭐냐? 주님과 함께 사는 삶입니다. 그게 자유입니다. “그럼 목사님,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면 됩니까?” 그거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시달린 만큼 이 땅에서 시달리세요. 산 위에 올라가서 주님 기다리지 말고, 높은 산에 가서 두레박 기다리지 말고. 두레박 안 내려옵니다. 그런 것 없어요. 천사 안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갔던 그 길이 바로 유일하게 탈출로입니다. 어린양의 용서받은 입장에서 남에게 구애받지 말고 ‘아, 주님께서 이런 수모를 당했구나. 이렇게 억울함을 당했구나. 이런 시련 당했구나.’라는 조로 살아가야 되기에 우리는 취직해야 됩니다. 우리는 편투통을 앓아야 돼요.
히브리서에 보면 “이 세상 온갖 어려움을 다 겪어라.” 그리고 직장생활 하면서 내가 한 것을 상사가 빼앗아가는 그것도 당하고. 분명히 월급을 제대로 받아야 하는데 적게 받는 것도 경험하고. 사기도 당해보고. 하여튼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것은 다 당해보라.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면 선악과가 주는 저주를 감내해야 바로 그것이 생명나무 따먹을 유일한 자격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마에 땀을 흘려서 저주받으라는 주님의 지시가 우리로부터 예외가 되지 않고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이 새로운 거주지를 만들어내기에 고생하라는 그 말씀조차도 기쁨으로 받아들여서 실컷 고생하다가 주님과 함께 있는 생명의 나라에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23강-에스겔 41장 1절(성소측량)150128-이 근호목사.hwp (64.0K), Dow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