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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도행전 69강(자연의 폭력성), 마태복음 60강(고소) 150127강의전도서

사도행전 69강(자연의 폭력성), 마태복음 60강(고소) 150127

이름 : 이근호(IP:119.18.93.36)

주향(IP:222.♡.177.93)

15-02-10 13:01

대전-행28장1-10절(자연의 폭력성)69강 -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 28 :1-10

본문 사도행전 28장 1절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에서 그 섬은 길이가 한 백리가 안 되는 29Km, 폭이 13Km쯤 되는 (이탈리아 남부 시실리섬 남쪽에서 약 100Km 떨어진 지점의 작은 섬) 섬 입니다. 예전에 그 섬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성경에서 이것을 기록한 것은 폭력성에 관한 문제예요. 근래 어린이집의 폭력성은 교사가 애를 때리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옛날부터 그것 보다 더 우선적으로 심오하고 깊이 있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자연의 폭력성”이에요.

사도행전 27장에서 보면 14일 동안 풍랑에 시달리지요? 풍랑에 시달리면서 위신이고 체면이고 다 내버립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폭력을 가할 때 우리는 자연에게 보복합니까? 순응합니까? 어떻게 하지요? 순응해야지요? 자연을 어떻게 이깁니까?

그런데 중요 한 것은 자연에 순응 했잖아요? 순응 했으면 우리 마음이 정말 순응 했냐는 것입니다. 반드시 순응 했다면 그 만큼 우리의 마음은 폭력성이 그 만큼 증가 됐다는 것입니다. 큰 힘한테는 고개 숙였잖아요? 그러면 거기에서 오는 굴욕감은 없어지는게 아니고 다른 걸로 풉니다.

그래서 자연의 폭력성 앞에 이것을 뭐라고 하냐 하면 어려운 말로 “순치”라고 해요. (順治순하게 통치한다) 즉, 자연 앞에서 순하게 통치한다. 이것은 동양사상입니다. 동양사상은 그냥 물은 물이고 산은 산 이예요. 흘러가듯 하는 겁니다.

동양사상이라고 하니까 동양화도 마찬가지고 난치는 것도 마찬가지고 서예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한의학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동양사상이 밑에 깔려 있어요. 여기서 자연은 폭력성을 갖고 있으니까 “우리가 참아야지!”하는 식으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서양에선 좀 달라요. 서양은 어떻게 다르냐 하면 자연이 폭력성을 갖고 있다면 서양은 무얼 끄집어 내냐 하면 여기서 법을 끌어냅니다. (자! 신이 노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 하면 신이 노했으니까 그 노한 신 안에 대한 무슨 법이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이러게 이러하게 하면 너! 혼난다! 너! 벌 받는다! 라는 <신호>로 이해하는 거예요. 몸이 아프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내가 분명히 죄 지은 게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징벌하는 차원에서 “몸이 아프게 했겠지!” 그러면 내 쪽에서의 해결책은 뭐냐 하면 그냥 “예” 하면 안 되고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자연의 법에 대해서 어떤 게 위반입니까?”라며 왜 그것을 알고 싶어 하냐하면 그것을 알아야 다음에는 그런 벌을 안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관심을 두느냐 하면 이것이 무엇으로 이어 지느냐 하면 “가계의 저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동양에서도 이런게 있어요. 동양에선 깊이 있게 안 나가지만

가계의 저주, 이것은 하나의 <법이 있다> 라는 말은 이것은

<지키면: 복> 이 와요. <못 지키면: 벌> 이 오거든요.

그러면 벌 받는다 하면 부정적인거 같지만 아니예요. 못 지키면 벌 받지만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지키기만 하면 복을 받는다는 희망을 주는 거예요. 그래서 동양에도 그런게 있지요. 이번 혼사는 삼대가 업을 쌓아야 잘된다는 말, 삼대가 선을 쌓아야 마일리지 누적되어 오는 행운처럼..

동양사상이나 서양사상이나 비슷하지요? 모든 자연에는 법이 있다. 뭐가 있다?<법이 있다>

법을 지키기만 하면 행운과 행복이 찾아오고 법을 어겼을 경우에는 징벌이 온다든지 몸이 아프다든지, 사업이 안 된다든지, 얘가 아프다든지, 가정에 우환이 있다든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고 그래서 누군가가 똑똑한 사람이 나타나 가지고 이러한 대 자연이고 법이고 알아냈으면 좋겠다! 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종교입니다.

그 종교가 본문 28장 4절에 나옵니다.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하더니“ 불을 피우려 하는데 독사가 나와서 사도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딱! 무는 순간 토인들, 원주민들이 뭐라고 하냐 하면 “야! 이 사람은 진짜 살인한 자가 맞다”고 하는 거예요.

오늘의 강의 테마는 분명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복음에 의해서 움직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이것만 알면 안 되고 복음이 전해지는 주변 종교적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복음 주면에 있는 어두움의 세계가 지금 우리 안에 들어 있어요.

우리 자체가 어두움이에요. 어두움인데 복음이 들어 왔을 때, 사람들이 저에게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가 있어요. “목사님! 복음이 들어 왔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라고 해요.

복음이 들어 왔다는 특징이 뭐냐 하면 옛날에 내가 이건 당연하다, 이건 옳다고 여겼던 것이 돌연 어두움으로 변합니다. “내가 알던 복음도 복음이 아니구나! 내가 종교를 갖고 있었구나! 내가 복음을 아는 게 아니였구나!” 하는 그 순간은 복음이 들어 왔기 때문에 그 차이점을 통해서 확연하게 눈이 열리는 겁니다.

복음과 아닌 것이 나의 내부에서 식별이 되요. 그러면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고 복음을 아는 사람이요. 교회 나와서 복음을 이야기 하게 되면 그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아니고 강력하게 저항합니다. 그런데 강력하게 저항하는 것을 끄집어 내 보면 어둠에 속한 종교 교리에요.

그 종교 교리가 성경에서는 친절하게도 (행:28:4)절에 나온 겁니다. “네가 나쁜 짓 했지? 네가 나쁜 짓 했으니깐 벌 받았잖아!” 이게 바로 복음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이 복음이 아닌 것을 우리가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니고 이미 타고 난 거예요.

아담의 죄 때문에 태어나면서 부터 마귀의 권세의 있기 때문에 마귀의 힘이 우리의 속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나름대로의 대자연과 적응하면서 “신이시여! 이게 신의 뜻 맞지요? 앞으론 제가 더 잘 할게요! 신이시여 제가 삼대 째 이런 업을 쌓으니까 이런 복이 온 거 맞지요? 앞으론 더 업을 쌓을게요!

자기가 스스로 납득이 되는 교리들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런데 복음이 와 버리면 자기가 살아 온 거랑 너무 다르니깐 강력하게 저항하는 겁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철학이나 공부를 전문적으로 안했다고는 하지만 성경의 복음을 듣고 나게 되면 이미 세상 철학에 대해서 살 만큼 살게 되면 몸에 익히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철학이라는 것이..

그리고 철학은 공부 한다고 안게 되는 것이 아니고 내 몸에서 스스로 설득이 되요.나쁜 짓 하면 벌 받고 착한 짓 하면 어떤 식으로든 행운이 나에게 온다는 원칙을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이 갸릇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본문에 토인들이 어떤 근거에 의해서 사도 바울이 독사에 물린 것을 가지고 이런 교리를, 이렇게 밖에 생각 할 수 없었는가를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자연에는 뭐가 있다? 폭력성이 있다. 이 폭력성 앞에선 사람들이 주눅 들여 있어요. 심지어 이게 알 수 없는 불안인데 제가 오늘 강의에서 강조 하고 싶은 것은자연에 의해서 불안하고 순치 하지요 스스로 기죽지요.

하지만 이것이 무엇으로 돌아오냐 울분과 분노로 우리에게 채워진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분노를 안에 품고 있습니다. 0 살부터 해서 살면 살수록 분노가 있어요. 그게 보통 사춘기 때 터지지만, 이유도 묻지 않고 분노를 폭발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인간의 모든 행동 밑바닥에는 분노 없는 행동은 하나도 없어요. 일단 일을 저질러 보고, 상대가 세면 스스로 순치하고 “예! 아이고! 형님! 제가 너무 심했지요?”하고 고개 숙이고, 만약에 상대가 약하면 요건 “밥”으로 생각해요.

홉스라는 사람은 “세상은 투쟁이다”라고 이야기 했잖아요. 서로 서로 싸워 보는 거예요. 싸워서 순서(서열) 정하는 겁니다. 대장될 인간과 그 밑에 될 인간, 즉 밟아도 될 인간. 그것을 호모사피에르 (희생자)라고 하는 아주 어려운 말인데요.

그건 뭐냐 하면 죽여도 책임지지 않는 대상을 만들어야 나라의 꼴이 되요. 이것이 정치의 출발입니다. 골고루 인간 대우 받는 것, 그런 건 꿈 깨세요. 그런 단체, 학교, 군대, 교회, 가정, 그런 건 없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그런 건 없습니다.

가정에서 엄마를 무시해 줘야 집 안이 편한 가정이 있고 아빠를 무시해 줘야 되는 가정이 있고 동생을 무시해야 되는 가정이 있고 큰 아들을 무시해야 되는 가정이 있어요. 반드시 그 식구가 네 명이든 다섯 명이든 누구 하나는 밟혀줘야 제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원활하게,

옛날에는 그 대상이 뻔하지요. 옛날에는 고추, 당초 맵다 하되 시집살이 보다 맵다 할까 하듯 옛날에는 엄마가 밟혀야 되는 인물이지요. 엄마가 죽어야 되지요. 며느리 잡는 거예요. 며느리를 잡아야 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 보세요.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그냥 눈물만 흘리고..

이게 어디서 나온 거냐 하면 사람은 그 이유를 몰라요. 그게 어디서 나오냐 하면 인간이 잘못한 것도 있지만 그 이전의 자연의 폭력성 때문에 나온 겁니다. 보세요. 자연의 폭력성. 자연은 멱살 쥐고 흔들 인물이 없어요. 그렇잖아요? 구름 쥐고 멱살 흔들 겁니까?

그래서 자연을 멱살 쥐고 못 흔드니깐 흔들 수 있도록 대상을 만든 게 뭐냐 하면 인간이 신을 만든 겁니다. 신은 자연의 인격체에요. 자연에서 구름이 낀다는 것은 신이 인상을 쓰는, 인상이 별로 안 좋아요. 그러나 활짝 개어 있을 때는 신이 기분 좋다는 거예요.

농사가 잘 된다. 이건 신이 많이 베푼 거 같은 그래서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신은 자연에 대한 인격체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에 대해 이야기 못 하는 것을 신에게 이야기해요. 그러면 자연을 달래야 되요. 자연은 폭력성이니까, 자연을 달랠 때에는 뇌물이 최고예요.

기원 전 6세기~서기 4세기경 잉카와 마야 문명에서 신을 달래는 방법은 처음에는 포로를 잡아서 그의 심장을 꺼내 받치다가 전쟁이 없을 때 는 처녀의 심장을 받쳤습니다. 자연의 폭력성에 가뭄, 홍수 등 자연이 화를 내면 그 다음 부터는 제단을 더 많이 쌓아서 처녀를 더 받치는 거지요. 인신 공양을 하는 거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처녀 받치고 한다니까 지금 21세기의 우리는 너무 끔찍하다 생각 하지요? 하지만 항상 현장을 조명해 봐야 돼요. 그 현장에서의 사람들은 최고의 희열이 뭐냐 하면 바로 자신으로 해서 인신공양하는 것이 보람으로 여겨요.

요새 “IS”라는 이스라엘 테러 집단이 그것을 보여 주잖아요. 전 세계의 처녀, 총각들을 불러 모아 가지고 순교자 만드는 자살 테러범으로 죽게 만들고서 사는 의미를 주는 겁니다. 바로 “죽는 것이 네가 사는 의미이다”라고 하는 거지요.

IS 테러 집단은 자연의 폭력성을 인위적으로 변환시켰다 이렇게 보면 되는 겁니다. 촘스키계층의 사람들은 테러 집단을 폭격하는 서구에 대해서 “서구가 더 테러 적이다.” 라고 이야기 하거든요. 워낙 촘스키라는 언어학자는 예전부터 서구에 대한 불만이 많아요.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사람이 뭘 주장하냐 하면 이 사회에 ‘밥’이 되는 게 있어야 되요.

못된 잔소리나 온갖 싫은 소리를 몽땅 쏟아 붓는, 쓰레기 같은 단체가 있어 줘야 다른 쪽이 원활하게 잘 돌아 가는 거예요. 온 세계가 참 나쁘다, 쓰레기 같다. 라는 욕설을 하는 어떤 특수한 단체가 있어줘야 다른 자국(自國)내에 불만 요소가 해소가 되면서 그 나라의 질서가 평화롭게 되고 ‘바퀴에 기름 친 것’처럼 잘 돌아 간다니까요.

연예인들의 역활이 그런 거예요. 연예인들이 이혼해 줘야 돼요. 그래야 다른 가정이 싸우더라도 평안해 져요. 연예인들이 매번 이혼 할 수 없으니까 이혼하는 내용으로 드라마를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드라마를 아침부터 보고 씹어대면 그 다음 부터 주부의 마음은 힐링이 되요. 치유가 된다니까요.

꼭 ‘밥’이 있어 줘야 되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 속에는 쓰레기통이 있어요. 그런데 이게 있다는 게 좀 거북스럽잖아요. 내 속에 쓰레기통이 있다는 걸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것을 잊기 위해 나보다 더 더러운 하나의 대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죽어라 패고 욕설을 해가면서 자신은 비록 그런게 안에 있더라도 그 대상으로 인해 자신은 건전하고 착하고 우수한 존재인 것을 재차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종교라는게 뭐냐? 본문 사도행전 28장에서 14일 동안 사도바울 일행이 힘들었지요? 이 소문을 멜리데에 있던 토인들, 원주민들이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알았습니다. 알았으니깐 일행이 14일 동안 막강한 자연의 폭력성 속에서 살아남았으니깐 그 사람들은 사도바울 일행에게 맛있는 대접하면서 뭐라고 얘기 하겠어요?

“분명히 저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이다.” 왜? 자신들의 경험상 자연의 폭력성에서 그렇게 살아남을 수 없는데, 이건 행운 중에서도 굉장한 행운이에요. 얼마나 착했으면 삼대가 업을 쌓아야 되는, 그 무서운 폭풍 속에서 살아남았으니까. 그래서 그들이 살아있는 천사의 집단으로 토인들은 생각한 겁니다.

성경에서 이 얘기를 왜 하느냐? 성경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복음이라는 것은 낯설기에 그냥 이야기기해 버리면 이해를 잘 못해요. 하지만 복음과 대조되는 환경과 배경 속에서 복음이 들어와 버리면 성령 받은 사람은 이것과 저것의 근본적인 차이가 뚜렷하게 부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토인들의 종교와 교리를 언급 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불을 지피려는데 독사가 나왔다 말입니다. 독사가 나왔으니까 그들의 경험상 독사도 뭐냐 자연의 폭력성이에요. 인간에게 현실이라는 것은 굉장히 단순합니다. 아무리 자기가 고상하고 하늘의 별을 연구하고 달을 연구해도 집에 애를 키우면서 애가 밤에 잠 안 자게 되면 짜증나지요.

그게 현실이에요. 아무리 도 닦아도 애가 빽빽 우는데, 잠이 안 오는데, 이게 기도 한다고 도 닦는다고 해결 될 문제 아니잖아요.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 그 말이죠. 아무리 은혜스러우니 해도 사랑니 아프면 인상 찌푸리게 되어 있어요. 두통, 치통, 팔다리 아프게 되면..

도대체 인간이라는 것이 왜 이렇게 계속 이 땅에서 자연속의 일부로써 들러붙은 껌 딱지처럼 살아야 이유가, 이렇게 살 이유가 없다니까요. 인간이 아는 것은 자연한테 이토록 무참히 얻어맞기 위해 사는가? 이게 사람인가? 해답이 없어요.

동양 철학이나 서양 철학은 해답이 없습니다. 현대 철학에서 내린 해답은 이겁니다. 자연의 폭력성이 인간 내부에 있다. 이게 해답이에요. 이게 끝이에요. 자연의 폭력성이 자연에만 있고 우리는 그냥 당하기만 하는 연약한 불쌍한 피조물인줄 아는데 그게 아니고 자연의 폭력성이 나의 내부에 있더란 것이죠. 자연과 우리가 꼭 닮았어요.

그럼 종교란 뭐냐? 마치 폭력성이 없는 것처럼 자아를 계속해서 정당화 시키는 작업이 종교라는 겁니다. 어떻게 정당화 하냐 하면은 신 앞에 말씀 지켜서 정당화 하는 게 아니고 신의 말씀 가지고 따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되는 겁니다. 조목조목 따지는 겁니다.

주님! 제가 무얼 잘못 했습니까?

주님! 제가 잘못 한 겁니까? 아니면 나에 대한 주님의 처사가 잘못된 것입니까? 나의 인생을 이토록 힘들게 하는 것은 주님이 불의한 조치를 하신 겁니다. 나는 이 말씀 지키려고 이렇게 애 썼습니다. 주님! 저를 너무 힘들게 하게 되면 주님의 모든 조치는 합당치 못합니다.“ 이게 왜 중요 하냐 하면

헬라어에 디케라는 것이 있는데 ‘정의’ 정의는 인간의 본성, 아담의 본성에서 나온 건데 정의로움은 혼자 착하다고해서 정의로운 것이 아니고 정의로움은 반드시 불의한 것과 대비가 되면서 상대적 정의로 우리에게 비춰지요. 자연의 폭력성이 우리 내부에 있기 때문에 나의 내부에 있는 폭력성을 감추는 방법은 나보다 더 못된 인간을 씹고 짓밟고 함으로써 자연적으로 나는 이런 악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계속 선한 존재로 유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4절에 보면 진실로 당신은 바다에서 구원을 얻었다 그래서 존경한다 이 말입니다. 당신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천사 같은 존재인줄 알았는데 그러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니 토인들은 뭐냐 하면 자연은, 즉 신은 어떤 경우라도 불의 한게 없다라고 하는 겁니다.

얼른 들으면 신을 굉장히 높이는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겁니다. 신이시여! 자연이시여! 내 말을 잘 들으소서! 내가 이 정도로 신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높여 주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섭섭하게 하면 안되지요. 사도 바울은 누굴 만나냐 하면 토인을 만나요. 토인을 만나면서 여기서 복음이 전달되어 버립니다.

복음을 말로 하는 게 아니 예요. 사도 자체가 복음에 의해서 복음의 현실성을 자연의 폭력성속에 집어넣어 버려요.그러면 사도 바울은 뭐가 되냐 희생자가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처럼 오해 받는 희생자. 이것을 제가 얼마 전 설교 시간에 여러 번 이야기 했지요? 이게 뭐냐? 억울함. 억울함을 세자로 이야기하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아십니까? 라고 물으면 정답은 이겁니다. 의인이면서도 저주 받았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죄인이면서 저주 받는 건 당연한 디케(정의), 자연에 맞는데 이게 토인의 교리, 토인의 신학이에요. 토인의 종교에요. 신은 실수 하지 않아요. 정당합니다. 따라서 벌 받았다는 것은 나쁜 짓 했다는 거예요.

욥기 알지요? 욥의 세 친구들의 교리가 무엇입니까? 반드시 나쁜 짓 한 사람들은 거기에 합당한 조치로써 벌이 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말을 친구들이 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욥보다 “누가 착하다?” 자기들이 착한 거예요. 욥의 친구들은 신났어! 자기들이 씹을 수 있는 대상이 나타난 거예요.

그런대 욥은 뭡니까? 십자가. 욥은 엄청나게 억울한 거예요. 속상하고 억울하고 분통 터지고 그런데 분통터지니까 욥이 누구에게 대듭니까? 하나님께 대들잖아요. 그러니까 욥은 일반인들이 그려 낼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의 해부를, 하나님은 욥에게 일을 벌이시므로 욥을 통해서 인간의 속에 있는 암 조직을 쏙 빼내시는 겁니다. “아! 이런 게 들어 있었네!

평소에 우리가 점잖은 척 한다고 신에게 영광 돌리고 감사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울분과 분노를 그동안 자제하고 억압한 덕택이에요. 그런데 억압하고 있는데 인간은 행동할때는 반드시 발작을 일으켜서 어떤 분노가 작용이 될 때 행동이 되요.

원수가 없으면, 자기 원수라든지 자기 욕구가 없으면 인간이 행동하는 게 영혼 없는 투가 되어 버려요. 아무런 재미가 없게 되요. 그런데 누가 욕을 하고 누군가 작업을 해 줄 때 미친 듯이 그라운드를 뛰는 겁니다. 누가 무시를 할 때 스프링처럼 튕겨 나오게 돼있어요.

이것을 잘 이용하는 교육이 바로 군대 교육이고 물론 어린이집에서도 마찬가지고 말 안 듣는 어린애들 때려 가지고, 때리니까 바짝 얼어 가지고 벌떡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맞으면서 인간은 자기가 남을 교육 할 수 있는 재료를 하나 얻은 게 되요. 사기를 당함으로써 사기 치는 방법을 하나 더 습득 한 것처럼,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항상 자기중심의 현실의 폭을 넓혀 가는 겁니다. 만두 빚을 때 밀가루 반죽해서 밀어 넓히잖아요. 제가 어릴 때 해 보니까 홍두께로 밀면 밀수록 점점 더 늘어나요. 그것처럼 우리가 종교를 가졌다는 것은 내 주인공을 약간 더 넓혀 가는 거예요.

걸핏하면 신에게 항의하고 반발하고 따지고 “하나님! 저 한테 그렇게 하시면 안 되지요! 제가 얼마나 하나님을 좋아 하는데..” 이런 식으로 넓혀 가는 거예요. 자기가 계속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이거 복음 아닙니다. 복음은 아닌데 중요한 것은 버리지 마세요.

이걸 버리면 복음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걸 버릴 수가 없어요. 이걸 가지고 사도 바울을 만나야 됩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이 독사에 물렸습니다. 그럼 다 죄지었다 하잖아요? 그런데 독사가 물기는 물었는데 안 죽네요? 늙은 독사인가? 이제는 힘이 없어서 독이 안 나오는 독사인가?

그때 토인들은 내가 알고 있건 나의 현실 바깥에 나를 주목하는 응시의 세계, 바로 내가 잘못 생각했다. 그동안 나의 어떤 특정 행동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고 내 행동 이전에 내가 생각했던 현실의 판이 있잖아요? 피자 판 같은, 현실 판 자체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무얼 해도 잘못된 거예요. 죄인 중의 괴수가 된 거지요.

굳이 이것 잘못 되고 저것 잘못되고 따지는 것은 아직도 현실의 판을 포기 못하는 사람이에요. 이건 뭐가 잘못 됐다 따로 꼬집어 말 할 수 없어요. 전체 다 잘못 됐어요.

내가 알고 있는 바깥의 또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토인들은 처음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외계인인 거예요. 왜 외계인이냐 하면은 그 외계인을 가지고 뭐라 하냐하면 법외라 하거든요 “치 외법”입니다. 법 바깥에.

성경에 로마서 3장에 보면 “율법 외”이고 율법의 법으로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 위해 있는 거예요. 법이라 하는 것은, 뭔가 기준이 있을 때 당신은 기준에 근거해서 옳았다! 그럼 내가 “옳다”라고 하기 위해서는 내가 지킬 것을 법으로 구체화해야 돼요.

“날 봐! 나 아침에 일찍 일어났잖아!” 여기서 일찍 일어난다는 게 뭐예요? 누가 만든 법이예요? 내가 만든 법이에요. 왜? 만들었어요? 나의 정당함을 위해서, 부자 청년이 “내가 어릴 때 부터 십계명 지켰다!” 하는 것이 이 말 이예요. “나는 정당합니다. 나는 선하기 때문에 영생 주세요”라고 온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자기가 생각하는 법 말고 “법 외”로 주지요. “모든 것을 팔아라!” 그런 법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부자 된 것은 자기가 착한 일을 해서 신이 주신 보상이거든요. 하나님께 나에게 상장을 주실 때 우리는 벽에 걸었으면 걸었지 찢지는 않잖아요?

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께 그걸 지시 하신 거예요. 착하다고? 뭐? 없어! 착하면 은혜 받잖아요? 그런데 그 착함을 저주받아라! 이 말이죠!그래서 인간으로서는 십자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어요. 어떻게 의가 저주가 되느냐 말이죠?

이 메카니즘이 들어 갈 구실을 찾지 못한다니까요. 인간은 찾질 못해요. 나쁜 놈이, 죄가 저주 받았다 이건 되는데 왜? 의인이 저주를 받아요?

이것을 12제자 중 이해한 사람 아무도 없어요. “우리 선생님은 착하다. 그래서 이렇게 기적을 일으킨다. 우리 선생님은 너무나 착하고 오병이어를 일으켰다! 그런데 내가 어디 속한다? 우린 선생님에게 속한다. 나는 선생님과 한편 이니까 덩달아 나는 착하다!

이게 바로 인간들의 타고난 종교성입니다. 내가 신을 착하다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착하게 이야기한 나도 하나님과 한 패니깐, 한편이니까 나는 굉장히 착하다. 착하다면 무엇이 주어진다? 보상이 주어지고 나는 행복해야 되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행복해야 당연한 존재.

그런데 하나님은 무얼 원합니까? 감사를 원하지요. 감사라고 하는 것은 죄인일 때 은혜에 감사. 행함 없는 구원이라고 했잖아요. 수련회 때, 행함 없는 구원이에요. 행함없이 구원되요.

제가 지난주일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이 열어 놓은 문엔 안 들어간다고 했지요? 왜냐하면 자기가 열지도 않았는데 그 문으로 들어가 버리면 자기가 뭐가 된다고 했어요? 바보가 되지요. 당신은 뭐해서 왔습니까? 할 말이 없잖아요.

당신은 어떻게 해서 천국에 왔습니까? 자기가 한 게 있어야 지요. “에이~ 지옥이 좋다!” 지옥엔 가서 자기의 옛날 과거 이야기, 좀 놀았던 그 이야길 할 수 있거든요. 지옥이 왜 좋으냐 하면 서로 잘난 맛에 싸우는 그 재미에 그 영원한 시간도 지루하지 않아요. 너무 재미 있는 것 같아요 지옥이, 그리고 거기엔 자기 보다 더 나쁜 놈이 오니깐 씹어 댈 수 있거든요.

그런데 천국은 재미라곤 하나도 없어요. 전부다 김 천사, 박 천사, 모두다 천사 같으니까 그곳에선 “나”라는 의미가 없어요. “에이~ 나 지옥 갈래!” 그래서 지옥 가는 거예요. 사람은. 사람은 천국이 안 좋아서 안 가는 게 아니고 재미가 없어서 안가요. 니체가 이야기 했어요. “권태롭다.”라고, 천국은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갈 때는 인간성을 바꿔 버립니다.

다시 이야기 합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 할 때 (바울이)독사에게 물렸는데 죽어야 되는데 안 죽었단 말이에요. 8절에 보면 (바울이)안 죽으니깐 추장이 자기 아버지가 열병에 걸리니까 데리고 가서 바울이 그에게 안수를 하고 낫게 해 줬어요.

자! 그러면 한번 물어 봅시다. 추장의 아버지가 병이 낫게 된 것은 추장이 사도바울에게 무슨 착한 일을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추장은 전혀 그런 생각 안 했지요? 그렇다면 소급해서 봅시다. 소급해서 보면 내가 태어났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착한 일을 해서 태어났어요? 전혀 없지요.

다만 소급해서 보니까 주님은 은혜주시는 주님이다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야 했던 겁니다.

신명기 30장19절 봅시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있게 하신 것은 구원함이 아니고 증거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도행전 1장8절에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누구의 증인이 된다? 주님이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지요.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율법의 증인, 말씀의 증인되다가 구체화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온 천지의 모든 세세한 움직임도 사실은 누구를 증거해야 돼요? 예수님만 증거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성도 입장에서는 근심, 걱정해야 하는게 있을 필요가 없는게 이미 증거하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살던지 죽던지 주의 것이 됐잖아요? 어떤 것만 차지하면 되요? 예수님께서 어떤 선물만 남기셨느냐 그것만 그 사항만 뽑아내면 되지요?

우리 할일이 굉장히 간단하지요? 모든 게 증거 되기 위하여, 만약에 사기꾼이 나에게 사기를 쳤다. 그러면 사기꾼이 왜 왔어요? 주께서 보내셨죠? 우리가 사기 왜 당했죠? 사기 당하고 난 뒤에 화가 났지요? 이게 주님을 증거하기 위한 만남이다. 모든 게..

문제는 처음 토인의 신앙에 있어서는 자연은 그냥 추상적으로 신이죠? 자연을 인격화하면 신이 되고 신에 대하여 법이 나온 다고 했습니다. 법은 누가 만들어요? 인간이 신을 일방적으로 만들어 놓고 신만 만들면 안 되니까 또 계명과 율법을 만들어 내요. 만들어 냈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내가 잘나서 내가 산다는 거예요. 강의 참 쉽지요? 항상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그 공로는, 항상 내가 무얼 했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뭔가 기여한바 있기 때문에, 신도 나를 안 살려 주고는 못 배기는 정도로 너무나 착하기 때문에 살려 주는 거고

저 인간이 죽어야 하는 것은 신이 보기에 나는 살아야 되고 쟤는 죽어야 되는 이유가 내가죽는 쟤보다 내가 더 착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 한다니까요. (가수)강원래가 오토바이 사고 났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 했습니까? 분명이 대마초나 술 했으니까 저렇게 된거지! 그러니까 저렇게 벌 내리지?

꼭 연예인들이 잘못되면 벌 받았다 생각하고 잘 되면 “저거 얼마 못 산다, 길게 못 간다.” 항상 인간은 자기 빼 놓고 남이 못 되야 돼요. 항상 인간은 팽귄박수 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아주 빠른 속도로 치지요 박수를, “ 아휴~ 고소해라!”

“많이 괴로우시겠습니다.”하면서 속으로는 웃으면서 “삼가 위로의 말씀을..” 그런데 진짜 내가 그렇게 되면 삼가 위로 하지 않습니다. 신을 향하여 드디어 본심을 드러내지요. 새벽 제단을 치면서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반항하지요.

이번엔 박수를 누가 칠 차례이냐 하면 천사들이 칠 차례지요. “아이고! 고소해라! 아이고! 고소해라! 주님 증거 하라 하니까 지 자랑 하면서 평생을 살더니 그렇지! 아이고! 고소해라! 팽귄 박수 칠 차례에요.

다시 해 봅시다!

인간 속에는 분노가 있다. 자연에 대해 당했던 것 때문에 울분이 쌓이고 쌓여서 분노로 누적이 되어 있다가 이것이 인간의 행동으로 나옵니다. 행동으로 나오면서 자기의 울분을 억누르는 이것마저 선하고 착한 걸로 위장하기 위해서 종교를 찾게 되고 신을 찾게 되고

“나는 이렇게 성질 급해도 잘 참잖아요? 복을 줘도 그런 나에게 줘야지 저렇게 성질내는 쟤한테 복 주면 안 됩니다.” 하는 식으로 나의 정당성을 보장 해주는 법이예요. 그러면 성경을 볼 때 어떤 기준으로 보겠어요? 내가 이렇게 잘 났다는 기질만 쏙! 쏙! 뽑아내겠지요?

그런 식으로 내가 2015년에는 내가 잘 되겠지! 내가 법을 잘 지켰으니까하며 쏙! 쏙! 뽑아 내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 바울 이야기 잠시 해보면 사도 바울은 골치 아파요. 독사에 물릴때 아예 처음부터 독사에게 안 물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독사에 물려서 깜짝 놀랐어요.

자기가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해야 되는데 풍랑이 일어서 죽을 뻔한 것도 그게 마지막 테스트인줄 알고 식겁했는데 “이제는 두 번 다시 죽는 일 없겠지!라고 했는데 주께서 독사로 하여 물게 하시는데 어떻하냐고요!” 이랬으면 사도 바울에게 문제 있어요.

독사야! 내가 보통 사람 아니거든 좀 떨어져바! 독사가 무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고 독사가 안 무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고, 남들은 사도 바울은 위대하다 당신은 신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절을 하든 말든 본인은 식겁 한거예요. “아휴~ 제발!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거예요.

뭔가 철저 하게 주님에 의해서 위기와 위기의 코너대로 다뤄지고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그렇게 다뤄지니까 앞서서 바로 왕에게 재판 받는 건 아무 것도 아닌 거예요. 문젯거리가 안돼요. 그 쪽에서 벌 받는 것 보다 언제 또 독사, 뱀, 이런 걸로 또 무슨 일이 올지 모르니까..

도대체 내 인생이 왜 이러지? 인생이 고요한 인생이 아니예요. 거기다가 추장 아버지까지 안수해서 낫게 하지요. 다른 어떤 사람이 당신이 병 낫게 했으니깐 우리 아버지도 고쳐봐라! 해서 해보니깐 그것도 안되는. 그것도 주님이 주신 일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 옆에 누가 있느냐? 주님이 옆에 계신 거예요. 왜 계시냐? 사도 바울이 그렇게 난감하고 황당하지요. 예수님의 난감이고 예수님의 황당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이 너무나 폭력적이라서 그래요.

예수님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엄청나게 폭력적입니다. 그렇게 폭력적이니까, 자신들은 착한 사람들이잖아요? 착한사람에겐 좋은 말로 해주고 서로 좋은 교재가 이루어져서 서로 동화되서 손에 손잡고 친하게 지내야 하는데 말 하는 하나하나가 폭력적이고 너무나 극단적인 부정성을 띠니깐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연에서 인간이 싫어하는 폭력성의 구체화예요. 이런 뜻입니다. 자연은 악해라 그래! 너는 잘랐다! 이겁니다. 나 하나만 저주받을께! 나를 찌른 너희들은 잘 먹고 잘 살아라! 진짜 잘 먹고 잘사는지는 내가 재림 할 때 한번 보자! 이거지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리와 창기, 강도 그런 마음 아니면 못 믿습니다. “주여! 제가 당해도 쌉니다.” 그런 마음 아니면 못 믿어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저는 개입니다.” 하자 “네 믿음 최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만한 믿음 없어!

만약 유대인 들이 그걸 봤으면 “주여! 저는 독사입니다.!” 칭찬 더 받으려고 했을 거예요. 하여튼 어떤 식으로든 모방해가지고 자기를 선한 존재로 그래서 자기 속에 있는 폭력성, 자기 속에 있는 신에 대한 공격력을 제거 하려고 또 법을 만들어요.

과부가 두렙 돈 받쳤다 하니까 자기도 헌금 받쳐 놓고 믿음 좋다고 착각하는 사람. 어떤 경우라도 법을 만들지 마세요. 성경 보고도 스스로 법을 만들지 마세요. 그리고 그 법은 내가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악마를 겨냥하는 법입니다.지난주일 오후에 이야기 했지요.

마귀가, 착한 마귀가 우리를 고소 할 때, 무조건 나의 죄를 고소 할 때는 마귀가 하는 짓이에요. 그리고 로마서 8장(34절) 말씀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너를 고소하겠느냐!” “내가 고소 안 하는데 네 속에 마귀 들었지? 그래 너 마귀한테 시달려라!” 맨날 고소하고 {이번 실수만 안 했어도 내가 잘 될 건데! 아휴~ 잘못 안 했으면 점잖은 사람 되는 건데} 매번 자책하고, “많이 시달려 봐라! 그래!”

인간의 잘 잘못이 어디 있습니까? 태어나서 부터 예수님만 증거 하라고 만든 인간인데 잘나서 뭐하려고, 잘난 인간? 뭐 없어! 잘나봤자 뭐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잘나서 구원 받는거 아닙니다. 천국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바보가 되서 들어가는 거예요.

고린도 전서1장에서 “어리석은 자가 지혜롭다.” 고린도전서 1장에도 나오고 3장에도 나오지요? 차라리 네가 어리석은 자가 되라! 바보이기에 천국 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바보 된겁니다. “주여! 다시는 독사에 물리는 일이 안생기면 좋겠습니다!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독사에게 자기가 물리는 일을 당해야 해요. 주님 마음대로에요.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고 왜? 자기 잘남이 아니고 예수님도 수모를 당해서 십자가 졌다는 것을 자기의 온 몸을 통해서 표출해야 될 임무로써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사도 바울은 제2의 예수로써 복음을 모르는 사람. 어두운 세계 앞에서 다른 원리를 복음이라는 이름 앞에서 접하고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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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마17장 24-27절 (고소) 60강 - 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17 :24-27

본문 24절을 보면 평신도나 목회자도 마찬가지로 많은 의구심을 가지고 “이게 무슨 뜻이지?”라는 질문이 많이 나올 대목입니다. 어떤 대목이냐 하면 “성전 세”를 반 세겔 내는데 그 사람들이 세를 달라고 했지요? 반 세겔을 달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17:24-27)

예수님이 굉장히 궁색한 것 같아요. 반 세겔이 없어서 낚시까지 해가면서 돈을 내야 되는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가? 그리고 돈 줄 때 이왕에 줄 거 그냥 주면 되지 그런 소리까지 할 필요 없이 제자들에게 뭘 묻고 하냐 말이죠?

특히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때 바다에서 낚시 할 때 고기에 원래부터 동전이 물려 있었느냐? 아니면 낚시에 걸렸을 때 동전이 물린 거냐? 그런 질문, 며칠 전 부터 고기는 동전 물고 그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가 딱 타이밍 맞춰서 낚싯대 왔을 때 물었느냐 하는 그런 질문.

그리고 신기한 것은 동전이 백 원짜리, 십 원짜리도 있는데 하필 반 세겔 짜리 동전이 들어 있었느냐 하는 절묘한 타이밍이지 안았느냐!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있느냐 말이죠?

지금 부터 설명 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고발이고 고소입니다. 아까 첫 째 시간에 한 것 정리해 봅시다. 하도 어렵게 했어서 어려우니까 여러 번 해도 괞찮아요! 자연에는 폭력성이 있다. 이것을 감당 못해서 고분고분 하지요? 자연이 그렇게 한다. 화산 터져도 인간이 연약 하니깐 이렇게 하지요!

자연의 폭력성에 대해서 가만있지 않고 인간은 뭐를 하느냐? 여기서 법을 뽑아낸다 했지요? 법은 일종의 질서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 다음 부터는 가뭄이 안들더라! 야~. 자연의 법칙을 발견 한 겁니다. 또 이렇게 했을 때는 홍수가 나더라! 다시는 그런 짓 안 해야지!

그래서 자연을 가지고 의인화 시키죠? 마치 자연 자체가 거대한 인간처럼 생긴 얼굴인양, 살아 있는 괴물처럼 그렇게 간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은 무생물이 아니고 생물체로 여겨 버리면 비로소 인간도 생명체가 되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성립되냐 하면 소통이 가능 하지요? 같은 생명체니깐. 감정이 통하니깐.

“지성이면 감천이다”라고 아까도 얘기 했지만 감정이 통하니까 “당신에게 법이 있는 모양인데 그 법! 우리가 지켜 드릴 테니까 우리를 너무 힘들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게 로마와 그리스의 신화지요? 로마 그리스신화 입니다.

바다에도 신이 있고, 동양이나 한국에도 마찬 가지고 어디에 가도 전부 다 사주팔자 봐야 되고 그게 질서다 말입니다. 질서. 그런데 법이 있게 되면 이 법은 드디어 인간들의 국가 속에 들어 와요.

국가 속에 들어와 버리면 자연의 폭력성이 국가가 돼버려요. 국가 속에 들어와 버리면 국가의 폭력성이 형성되어 버려요. 이 폭력성이란 것이 어렵고 난해한 게 뭐냐 하면 있냐하면 폭력을 행사 할 수 있는 권한 있는 사람은 법에서 예외가 되요.

칼 슈미트란 독일의 유명한 법 철학자가 이야기해서 유명해 진 거예요. 반드시 법을 집행하자는 어떤 법에도 저촉 받지 않는 예외의 자리를 갖추어 줘야 법이 돌아가게 되있습니다. 그래서 주권이라 하는 것은 독재자가 주권을 쥐고 있어야 되요.

왕 또는 최고 권력자가 있어야 되요. 그래야 국가의 모양새가 잡히고 돌아갑니다. 창세기4장에 보면 라멕이 뭐라고 합니까? 가인을 해친 사람은 벌을 칠배로 받지만 나를 해친 사람은 칠십 칠배라고 하지요? 그럼 본인이 남을 때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법의 저촉을 안 받는거예요.

여러분들이 라멕 보고 얼마나 욕합니까? 지가 뭔데?..하잖아요? 그럼 이것도 한번 봅시다. 여리고 성에 기생 라합이 있지요. 여리고 성안의 모든 사람은 하나의 공동체로써 이스라엘이라는 외부인이 정탐해 왔을 때 발고를 해야 하는데 기생 라합은 어떻게 합니까? 정탐꾼을 숨겨 주지요?

숨겨 주었을 때 숨겨준 것이 뭐가 되냐하면 이 쪽의 법 , 여리고 성 내의 법에 의하면 이 여자는 배신자가 되는 겁니다. 반역자가 되지요 . 그런데 이스라엘 입장에선 뭐가 되요? 세상에서 이 여자는 그렇게 휼륭할 수가 없는 거예요. 숨겨 주었으니까

그러니까 기생 라합은 뭐냐 하면 결국은 여리고 성은 누구에게 잠식되게 되어 있다? 이 법 바깥에 있는 이스라엘이 이성 안에 있는 법을, 이스라엘에게 침범하는 정당성을 갖고 있다고 본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구원이예요.

법을 안 지키겠다는 거예요. 그럼 법을 안지키겠다는 것을 “나는 법 안 지킨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자기 혼자 안지킨다고 소리해도 안되고 법 쪽에서 뭐가 들어 와야 하냐면 고소, 고발이 들어와야 되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했다”고 하시잖아요. 꼭 기생 라합이 여리고 성 앞에 바깥에 있는 이스라엘 같아요. 주님이 이스라엘 속에 있다 하면 여리고 성은 인간세계예요. 그러면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이 왜 세상에 옵니까?

이 세상 속에 즉, 대전 바닥에 여전히 대구나 한국에 주님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의 사고 방식은 희안한 사람이 되야 되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살아야 되요. 뭐! 착한 일을 해야 되고 그런거 아닙니다.

성도는 그게 아니예요. 주여! 제가 이 말씀 지켰습니다. 기도 몇 번 했습니다. 이게 아니고 그게 뭔데 그건 아무 것도 아닌데..

세상에 있으면서도 일체 율법에서 부터 벗어난 사람이 되야 돼요. 그리고 이런 소릴 해야 됩니다. “ 율법은 내게 쏠게 없어!” 만약 율법이 나를 쏜다면 나의 예전 껍데기 보고 쏘는거야! 나는 전혀 안 아프거든!. “누가 너를 정죄 하리요 누가 너를 고소 하리요”

이미 주께서 고소 당 할 줄 알고 먼저 십자가를 깔아 놓으신 겁니다. 마치 컴퓨터에 바이러스 걸릴 줄 아고 백신을 미리 깔아 놓은 것처럼 백신이 있는 이유가 뭡니까? 바이러스가 곧 찾아온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너가 조금 있다가 이런 수모를 당할거야! 이런 고소를 당 할거야! 너를 고소 할꺼야! 남이 너를 고소하기 전에 너부터 고소 할꺼야! 하지만 니가 당할 때 미리 깔아 놓은 백신의 고마움을 알고 감사가 나오도록..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증인이되기 위해 그렇게 하기 위해 오신 계예요.

그런데 성경 적으로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게 현실적이냐? 이 말입니다. 그 점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성경에서 이곳을 끄집어 낼 수 있는데 “목사님! 그게 실제입니까? 라고 했을 때는 우리는 실제적인 경험을 하는 것을 찾아보기가 참 힘들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론이 있기 전에 먼저 실제를 경험하고 나중에 뒤 늦게 “아하!그 때 바다에서 고기 잡았을 때 아하! 이것 때문에 물고기까지 동원 되었구나! 뒤늦게 알게 된거지요.

베드로가 닭이 울 때 세 번 부인하게 된 것도 다 주님께서 주님의 원리를 뒤늦게 깨닫기 하기 위해서 한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미 구원 받는 입장에서 실컷 내가 나한테 정죄하고 고발하고 “차라리 너 같은 건 약 먹고 죽는 게 나아! 너 같은 게 살면 뭐해?“ 내가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막 하거든요!

이렇게 하면서 뒤늦게 우리는 십자가의 피를 흘린 이유가 이런 바이러스를 염두해 두고 미리 백신을 깔아 놓은 거예요. 율법외의 한 의가 나를 구원한다는 것이 날마다 반복해서 새롭게 느껴지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고소와 고발을 당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지금 유대인들이 법을 들고 왔지요? 법을 들고 왔으니까 예수님은 이렀습니다. 그 법이 어디서 나왔냐를 제자들에게 알려 주고 싶어 합니다. 법이 어디서 나왔냐? 제자들은 모르죠?

법은요 유대인들이 만든겁니다. 유대 사회가 만든거예요. 그런데 아니예요. 만약에 법을 인간들이 만들거 같으면 바다의 고기가 필요 없습니다. 인간들끼리만 모이면 되는 돼요. 사실 법을 만드실 때 누구까지 초청했냐? 바다에 있는 고기까지 초청해야 되요.

오징어야! 부탁해! 오징어, 고기, 코스모스등 다 동원해야 되요. 심지어 발람 선지자 때는 법 만들 때 누구 까지 동원 하십니까? 당나귀까지 동원되서 말해야 되요. 당나귀도 말할려고 하잖아요? “왜! 때리십니까?”라고 말했잖아요.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사적인 것 때문이 아니고 온 우주가 다 동원된 사건이예요. 예수님 오신 것이 우주가 동원된 사건이라는 말은 우리가 뒤늦게 차후에 소급해서 보게 되면 내가 이 땅에서 사는 것, 밖에 눈 내리는 것 이게 다 누구와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의 고소, 고발 사건과 연관 돼 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사건과 관련돼 있는 일들 중에 하나가 눈이 내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참새도 내 허락 없이는 떨어 지지 않고, 친히 기르시나니” 친히 기르시나니,

뭐 말씀 많이 알 것도 없이 이 “친히 기르시나니” 이거 하나만 알아도 지금까지 고민하던 것, 걱정 할 거 없이 그런데 “친히 기르시나니“ 이것조차도 우리는 몰라요. 바다의 고기를 친히 길러서 입에다 동전을 물게 하시나니 제자들보고 낚시하게 해서 끄집어 내게 하시나니

이 모근 것이 예수님의 고소, 고발 사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법을 만들 때 이것이 성전 법이다 그리고 이것을 모세의 법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은 성전세, 성전 세금입니다라고 짧게 이야기 한 것을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바다까지 확장 시킨겁니다.

모든 것을 확장 시켜요. 모든 것이 나를 위한 법체제이다. 내가 누군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바다의 고기까지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확대시켜서 알려 주시는 겁니다. 이제 이 본문 이해되시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그저 예수님의 어깨를 살짝 건들였을 뿐인데 예수님께선 “으악~” 하고 오바 하시는 거예요. “배가 고파요”하니깐 에이! 막 먹어라! 먹고 “배부르지?”12광주리나 남게 하시지요? 자꾸만 오바 하시는 것은 인간의 모든 법이라 하는 것은 자기안에 굴레에 갇혀 있는 법,

즉 나의 정당성에 갇혀있는 법이기 때문에 그 테두리를 끈어 버리고 온 우주를 비춰 볼 때 네가 과연 정당하냐를 묻는 겁니다.

온 우주 앞에서 “제가 오늘도 나쁜 짓 안하고 무얼 했습니다.” 굉장히 착해 보이죠?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리카의 난민들, 어떤 사람들에겐 절실히 돈이 필요한데 내가 왜 돈을 안 보내 주지요? 지금도 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안 보내 주지요?

왜 안 보내 줍니까? “형편이 안되서요” 하지요. 형편이 안 되서가 아니고 우리는 전부 항상 나에게 귀환되는 식으로 자연을 법제화 시킨 다니까요. 이 법이 유대인들의 법이 아니고 사실은 각자 각자에 내제되어 있는 자기 잘남의 법이에요.

그래서 (자기 잘남의) 법이 필요해요. 왜? 나의 잘남으로 소환되어야 할, 귀환되어야할 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법이 있어야 안심을 해요. 왜 자기가 착한 존재란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를 증거해요. 태어 날 때부터 자기 잘남의 증거 입니다.

사춘기 병이에요. 자기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전부 엄마, 아버지 탓이고, 형 탓이고 동생 탓이고, 자기 증거에 몰두 하는 겁니다. 여기에 제자들도 역시 같은 한 통속입니다. 한 통속이에요.

예수님께서 고소, 고발 하시는데요 “여기서 부터 어려워요!” 예수님이 죽으실 때에 누가 고소를 하느냐?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고소해서 그 고소에 자신이 벌을 받는 그런 양식으로 인간들에게 비취도록 그렇게 해요. 그러나 예수님에게 벌주신 분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잖아요?

그런데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는 숨어 계시는 분이에요. 그러니 바깥에서 보게 되면 예수님 스스로 그야말로 자살하는 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실제로 요한복음 10장(15-17절)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냐 하면 “누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알아서 죽는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성경의 대목 대목들 하나하나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자진해서 목숨을 버린다.목숨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린다.

그러면 이왕 얻을 목숨 애초부터 안버리면 어떻습니까? 처음부터 그 목숨 그대로 하는 것과 버렸다가 얻는 것과 어떤 차이가 나느냐 하면 그 가운데서 숨어계시는 아버지의 원리가 예수님의 죽음 과정 속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내비취게 되는 겁니다. 그걸 포착 해야되요.

예수님이 계시고 인물도 멀쩡하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 이러면 안되요. 예수님은 너무 자비롭고 사랑이 많다. 이러면 안되고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그 과정에 주목해야 거기서 아버지와 진짜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이 나와요.

이 부분이 어렵고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해보겠습니다. 창세기 32장에 얍복강 이야기가 나오는데 얍복 강가에서 야곱이 어떤 사람을 만나지요? 얍복강가에서 천사가 뭐라고 하냐 하면 둘이 붙들고 싸우다가 천사가 뭐라고 하냐 하면 “놔줘! 그때가 밤이거든요. 날이 밝으려니까 떠나야 되니 (나로 가게 하라) 하지요?

여기서 천사는 어떤 경계선을 가지고 있어요. 밤에서 낮으로 되는데 있어 낮에는 없어요. 사라져 버려요. 밤에만 현존합니다. 인간은 이게 없어요. 사라질 어떤 선이 없어요. 예를들면 빵 사이로 칼자국을 내서 홈이 나서 그사이에 잼을 바르고 놓아두면 쨈을 발랐는지 안발랐는지 벌려 보기 전엔 모르잖아요?

그것처럼 뭔가 이 현실에 금이 가면서 금에서 튀어 나오고 금에서 사라지는 어떤 요소가 있는데 겨울 수련회때 그것을 부재의 지점, 경계선, 또는 해안선이라고 표현 했거든요. 막상 가보면 없어요. 분명히 있었는데.. 비슷한 예로 인터스텔라라는 영화를 보면 책장 뒤에는 5차원 세계고 앞쪽은 3차원 세계인데, 책장 뒤에서 주인공이 아무리 외쳐도 안들려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만약에 개미 보고 “위로 뛰어! 뛰어 보란 말이야!” 라고 했을 때 뛰단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개미는 2차원이어서 그냥 기어 다니고 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인데 “뛴다”라는 말이 3차원 세계에서만 나오는 언어지 2차원은 몰라요. 그게 무슨 뜻인지를, 천사가 하는 행동과 말은 다른 차원에 속해요.

예수님은 다른 차원에 속해 있거든요. 다른 차원에 속한 것이 아버지의 차원 또는 영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른 차원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과 만남이니까 기껏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금, 선, 경계선 이것 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뭐가 나오냐 하면 피가 번져 나오는 겁니다.

꽉 찡겨 버리면 터져서 피가 나오지요? 뭔가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사이에서 유일하게 저쪽세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가 부활도 아니고 멋있는 예수님 얼굴도 아니고 수염난 얼굴도 아니고, 착한 행동도 아니고 오직 피 밖에 없어요.

그것을 성령이 아니고서는 모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피를 소개하면서 성경은 뭐냐 얘기 하는가 하면 죄로 말미암아 피 흘렸다고 이야기하고 그럼 죄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법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법은 어디서 나왔는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 했지요? 자연의 폭력성에서 나온 거예요.

그럼 자연의 폭력성에서 법을 만들 때 인간이 결국 노리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살아남고자 하는 것. 내가 살아남고 보자, 살아남는 방법은 뭐냐?

법적으로 살아남는 방법은 내가 착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착하기 때문에 살아남아야 될 가치가 있고 내가 안착하면 죽어도, 죽여도 할 수 없지만 “ 자연이시여! 제가 남보다 착하니깐 저 집은 홍수에 떠내려가 죽어도 우리집은 안떠내려가게 해 주세요!”

왜? 우리 식구는 전부다 착하기 때문에 착한 사람은 살 권리가 있고 착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이 이렇게 법제화되어 있다니까요. 법에 대해서 찡겨 죽은 사람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고소하는 거예요. 고소를 해야 그쪽 법이 실체가 들어 나지요.

야곱은 형하고 날 때부터 싸웠습니다. 이 야곱이야기는 따져보면 굉장히 난해한 이야기인데요. 수련회때도 이야기 했지만 처음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마지막 결말이 나왔으니 복잡하게 얘기 할 것도 없어요. 그냥 애초에 야곱을 먼저 태어나게 했으면 아무 문제없었을 것을,

야곱을 형으로 태어나게 하고 에서를 동생으로 태어나게 해서 태어 날 때부터 에서가 야곱에게 “형님” 이러면 뭐 문제될게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야곱이 마지막에 손자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 할 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했으니깐 그냥 “자리 바꿔! 자리 바꿔!” 바꿨으면 요셉이 나설 필요 없었다고요. 둘을 자리에 세워 놓고 팔을 엇바꾸니까 요셉이 “아버지! 그건 뭡니까? 아버지 왜 힘들게 팔을 어긋나게 바꿉니까?”

차라리 편하게 큰 자는 오른 손으로 작은 자는 왼손으로 하면 되는데.. 그럴 때 요셉의 아버지가 “이거 안 보이나? 어긋나게 한게 안 보이나?” 다른 차원에 가려면, 천국에 가려면 이렇게 되야 돼요. 이렇게 안되면 못 간다니까요. 이걸 이해 할 줄 알아야 천국에 가요.

천국가는 사람은 이걸 아는 사람만 모인거예요. 모세도 엘리야도 예레미야도 마찬 가지고 특히 베드로가 그렇지요? 예수님 모른다 해 놓고 가기는 천국에 가요. 야곱이 처음엔 이렇게 된거예요. 처음부터 싸웠습니다. 싸웠다는 말은 지금, 게임이 안 끝났다는 겁니다.

세상이 끝나지 안았어요. 야곱의 게임이 끝나는 날이 세상이 끝나는 날 입니다. 왜냐하면 야곱과 에서가 보여 줄 우주의 비밀이 그 두사람을 통해서 다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야곱은 처음부터 사랑받기로 작정되어 있고 에서는 저주받기로 미리 작정 되어 있는거예요.

인류가 아무리 시간을 오래 끌어 봐야 원리는 하나 밖에 없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구원했지 사랑받을 짓을 했기 때문에 구원한게 아니고 아무짓도 하기 이전에 사랑이 사랑답게 하기 위해서 너는 사랑받아야 될 짓을 한거고. 똑같은 짓을 했어도 너는 그것이 미움 받을 짓이라고 판정을 해버린다니까요.

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법에 예외되는 사람이 있어서 그 다음에 법이 있는 겁니다. 전두환이 독재한 이유를 알겠지요? 전두환의 법은 전두환한테는 해당이 안됩니다. 이번에 헌법에 고소했잖아요. 전두환 법 문제있다고..

그런데 지금은 우리나라 헌법이 독재가 아니잖아요. 대통령도 법의 저촉을 받잖아요. 그렇다면 지금 현재 법의 치외 법권은 어디 있지요? 북한이예요. 북한의 김정은있잖아요. 그럼 우리나라엔 누가 있어요? 노숙자가 있어요. 노숙자를 공격함으로써 법은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법이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법의 치외 법권은 비참한 모습으로 떨어져 나간 저쪽에도 있어요. 어떻든 간에 법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뭔가 바깥에 있어 줘야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예로 “ 너! 까불면 저 사람처럼 된다!” 엄마들이 애 공부 잘하라고 뭐라고 합니까? “너! 공부 못하면 저 사람처럼 되거든!”라고 할 때 애가 공부하기 시작해요.

“엄마! 난 저렇게 안되지요?” “그래” 이래야 법권 안에 들어 올수 있어요. 애를 때리는 것은 법 안에 집어넣기 위한 겁니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고 통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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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2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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