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자 150123
무능자 150123
이름 : 이근호(IP:119.18.93.36)
서경수(IP:118.♡.139.86)
15-02-09 09:21
광주 강의(2015. 1. 23) 11-1
마가복음 3장 29-30절에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하신 이 말(29절)이 무슨 뜻인데,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반발(30절)했을까요? 그들이 반발하는 태도를 통해서 주님 말씀하신 뜻을 역으로 추적해 볼 수가 있겠지요.
사람들은 언제 저항하고 반발합니까? 그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부정적으로 지적할 때입니다. 그 때 강하게 반발합니다. ‘네가 나한테 이런 소리하니까 정녕 너는 더러운 귀신이 들렀구나.’라고 예수님께 달려들었지요. 지적을 해도 ‘행동 똑바로 해!’ 이런 것이라면 ‘그래,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부족한 면이 있었으니까 앞으로 조심할 게.’ 이렇게 되는데,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지적할 때는 강력한 반발이 나오겠지요? 이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짓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훼방한다.’고 하셨을 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여기 지우개가 있는데 “지우개를 반듯하게 놓으세요. 지우개를 반듯이 놓지 아니하면 귀신 들린 자입니다.”라고 한다면, 지우개를 반듯하게 놓으면 되잖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기침이 나오면 다른 사람에게 침이 튀지 않게 손으로 입을 막고 기침해라.”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단 말이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못했을 때는 기적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수긍을 할 수 있지만, 아예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기적할 때는 반발할 수밖에 없어요. ‘성령을 훼방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평소에 성령에 대해 별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는데 ‘성령 훼방하면 사함을 얻지 못한다’고 하니 미칠 노릇입니다.
평소에 딸기를 먹어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딸기를 먹을 때는 맛있게 먹어라.’고 하면, ‘나는 딸기 먹은 적도 없다.’ 이렇게 나오지요. 뭔가 일을 했는데 그것에 대해 지적하면 변명하거나 반성할 여지가 있지만 내가 한 적도 없는 것에 대해 지적하면 이건 일방적 공격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고소하는 당시 유대인을 향해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다른 본문에 보면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마12:32).’고 했어요. 이럴 경우에 사람 눈에 누가 보입니까? 인자는 보이지만 성령은 보이지 않아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우리는 당신이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거야.”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나를 지적하는 것은 용서 받을 수 있는데 성령을 훼방하면 용서 받지 못한다.”고 하시니까 사람들 입장에서는 황당한 거예요. 예수님과 사람들이 대화를 하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성령을 개입시키니까 대화가 안 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디어를 하나 제시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하면서 성령을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먼저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22절에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어요.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보는가? 귀신의 권세로 만들어진 박스가 있다고 합시다. 이 박스에 예수님이 포함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사단의 권세를 힘입어 하는 짓이다.’라고 나온 거예요. 그들 생각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면 율법적인 모양새가 나와야 되는 거예요.
율법을 지키면 선이 되겠지요. 그 선을 행하는 혜택으로 병이 낫는 겁니다. 이것이 서기관들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나쁜 짓 안 하시고,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착한 일을 했다는 보상으로 그런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을 보면 율법에 어긋납니다. 서기관들이 보기에.
율법에 저촉되는데 병은 나았어요. 그러면 이것을 합리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귀신의 대장이 자기 졸병을 나가라고 명령해서 나갔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이런 생각을 한 겁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귀신이 능력이 아니야. 하나님의 뜻에 의해 병을 낫게 했어.’ 라고 하겠지요.
이렇게 말하면, 지적한 사람이 마귀에 속했다는 것이 안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야, 저들의 병이 나았는데 너희들이 오해했구나. 성령의 능력으로 병이 나은 거야. 앞으로는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라고 하셨다면 유야무야 상황이 종료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노렸는가 하면, ‘너희들이 귀신에 속했다.’는 것을 고발하는 것까지 내다보면서 귀신을 쫓아 낸 거예요.
6. 25전쟁 때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지요. 그러면 미군은 그들을 다시 북한으로 돌려보내고 휴전하는 것이 미군의 뜻이에요.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번 기회에 백두산까지 공격해서 모두 우리 땅으로 만들자는 주장을 했습니다. 사실은 맥아더 장군도 그런 주장을 했고. 그래서 중공군이 쳐들어 올 때 핵폭탄을 사용하면 인해전술도 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의 뜻은 뭔가 하면 이 참에 끝까지 밀이붙이는 거예요.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그들의 정체를 밝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강의에서 난해한 점이 나옵니다. 무엇이 난해한가 하면, ‘국가의 권력과 성령의 관계’가 언급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유대교를 바탕으로 국가를 만들었잖아요.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이 악마에게 속했다는 것은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이들 뿐만 아니라 역사가 끝날 때까지 이뤄지는 모든 국가가 악마에 의해서 조종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싶은 거예요. 예수께서 처음 이 땅에 태어났을 때 아기 예수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요. 아기니까. 그런데 헤롯왕이 발작을 합니다.
헤롯왕은 국가의 수장으로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데 그것이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한 겁니까? 신비로운 거예요? 아니면 영적인 것입니까? 아니잖아요. 너무나 자연스럽지요. 그런데 자연스럽게 보이는 그것이 마귀에 의한 자연스러움이라고 끝까지 주님이 추궁해 나가시는 거예요.
그럴 때 성령의 활동이 세상은 그냥 두고 영적인 문제만 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우리가 자연스럽다는 것, 당연하다는 것, 국가의 모든 조직, 심지어 축구 경기를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악마의 권한 속의 일인 것을 주께서는 끝까지 추궁하시는 겁니다. “말씀 들으러 가겠습니다.” 이 말은 참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러나 주께서 원하는 것은 “말씀 속에 살고 싶습니다.” 이것입니다.
“말씀 들으러 가겠습니다.”라는 말은, 내 시간 따로 있고 말씀 듣는 시간 따로 있어서 적당히 시간 안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돈도 가지고, 영생도 가지려 했는데 그것이 되었나요? 안 되지요. 돈을 버리고 예수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돈을 선택하는 순간 예수님과는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는 것이 들통이 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것이 단순히 치료현상에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셨지만 서기관들은 누가 봐도 건강한 정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그 사람도 마귀 들렸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성경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설계 도면입니다.
대구에서 광주로 올 때 처음 오는 사람은 지도를 보겠지요. 대구 사람이 지도 없이도 살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지도 없어도 살 수 있어요. 그런데 광주로 여행을 간다면 지도가 없어도 되지만 지도를 한 번 보고 오는 것도 괜찮지요. 그러면 지도가 다급하고 시급한 문제입니까? 그건 아니죠. 지도 없어도 지도에 그려져 있는 현실은 내가 확보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도면, 예수님의 계획 없이는 우리가 살아도 현실 속에 산 것이 아니고 가짜 현실 속에 사는 것입니다. 저는 현실을 말할 때 이런 예를 듭니다. 지금까지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확실하게 현실을 느낀 것이 뭔가 하면, 아이가 태어난 후에 밤에 울어서 내가 잠을 못 이룰 때, 이것은 기도와 말씀으로도 안 되는 진짜 현실 그 자체에요.
이것은 나의 윤리, 도덕적 삶과 아무 관계가 없어요. 내가 선을 행했다고 아이 울음이 그칩니까? 아니죠. 나는 잠이 와요. 그런데 아이가 밤새 울어요. 이건 생생한 현실이에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가 하면, 이 세상에서 내가 ‘현실은 이것이다.’ 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 내가 말하는 그것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이가 아파도 재미나는 드라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를 본다고 이가 아픈 것이 사라집니까? 여전히 아프지요. 치과에 가서 문제를 해결해야겠지요. 이게 팩트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현실을 안다는 말을 할 자격이 못되고 현실이 시키는 대로, 현실이 부여하는 대로, 현실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는 현실의 노예가 되어 살아갈 뿐입니다.
‘어머니 건강 회복하셔야지요.’ 라고 말한다고 해서 아픈 어머니가 건강해 집니까? 아닙니다. 왜 자꾸 현실을 쥐려고 합니까? 현실이 우리를 쥐고 있는데 우리는 자기 현실을 쥐고 요리하려고 덤벼요. 현실을 당할 수 없는 열등의식 때문인가?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억울함? 여기에 대한 반발?
안산에서 자기 가족을 죽인 그 사람도 세상에 대한 반발심 때문입니다. 왜 세상에 반발하지요?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왜 내가 생각하는 현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나는 따로 내 현실을 소유하고 있는데 세상 현실은 내가 소유한 현실과 왜 다른지? 욥이 이런 일을 경험했지요. “하나님이여,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욥의 이런 소리를 듣고 같잖아서 말이 안 나왔을 것 같아요. “왜 제 몸이 아픕니까?”라는 그 반응에 대해 하나님은 뭐라고 하겠어요? “어휴, 기가 찬다.” 아마 이랬을 것 같아요. 답변할 말이 없지요. 여기 딸기가 있는데, 딸기는 말을 못하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딸기 하나가 입이 생겨 “나는 왜 바나나가 아니고 딸기입니까?”라고 했다면, 제가 딸기에게 뭐라고 답해야 합니까?
이건 자기가 현실을 조작해 낸 거잖아요. “나는 바나나가 되고 싶어.”라는 일방적인 현실관을 조작해 낸 것이기에, 주님이 보시기에는 기가 찬 일입니다. “당신은 귀신에 들려 병을 고쳤지요?”라고 말하는 자들을 보면서 주님이 얼마나 기가 차겠습니까?
왜 인간이 마귀에 들려 이런 소리를 하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보면서 자연에 폭력성이 있는 것을 압니다. 폭력성이란, 가뭄, 태풍, 홍수, 지진, 질병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을 다루기 위해서 법칙을 만들어 내요. 법칙은 반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연을 다뤄야 돼요. 안 다루면 자연의 폭력에 당하기만 하잖아요. 7월에 장마가 오는데 아무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심각한 피해를 입습니다. 그래서 법칙을 찾습니다. 비가 언제 쯤 오는지 파악해서 그 때에 맞춰 대비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어요. 이게 법(법칙)이에요. 법은 자연에서 추출해 냅니다.
어떤 아이가 식사를 하면서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집어 먹어요. 그러면 부모는 아이를 꾸중하면서 숟가락으로 먹도록 강요하지요. 그래서 말을 안 들으면 회초리로 때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부모의 눈치를 보면서 어설프지만 숟가락을 사용합니다. 아이의 몸은 손으로 밥을 먹는 것의 반복입니다. 자연스럽잖아요. 그것을 바꾸기 위해 부모가 회초리로 때리니까 숟가락을 사용합니다. 그럼 숟가락으로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까, 법입니까? 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연 안에는 폭력성이 있고, 폭력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법을 만들고, 이 법을 어길 경우에는 효과적으로 법을 집행하기 위해서 국가가 필요한 거예요. 마귀의 나라가 왜 합리적인 법치국가가 된 것인지 이제 이해하시겠지요? 국가를 만들고 법을 만들어서 자연의 폭력성에 대해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하니까 잘 살지요?
그런데 그 중 어떤 사람이 피를 토한다든지 문둥병에 걸렸다든지 하면 이런 사람은 잘 살고 있는 공동체에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서 이들을 공동체에서 퇴출시키면서 법을 근거로 퇴출시킵니다. ‘미리암이 모세에게 대들다가 문둥병에 걸렸고, 그 문둥병은 저주의 상징이다.’라고 하면서 퇴출을 시킵니다.
즉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저주 받은 사람이고, 저주 받은 사람은 공동체에서 추방함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으로 확정되는 사례가 돼요. 어떻습니까?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마귀에 들린 것을 알겠어요? 모르지요. 자신들의 생각이 너무나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어서 잘 살고 있는데요.
서기관은 거품을 물고 떨고 있지 않습니다. 귀신 안 들렸어요. 이성이 아주 현명해서 냉철한 판단을 합니다. 이 사람이 구원 받습니까? 아니지요. 국가가 있으면 지도자, 엘리트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 그래야 명령 체계가 섭니다. 의사, 판사는 사회의 엘리트들입니다. 이들의 판단은 남들보다 더 현명하고 똑똑해요.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판사 역할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했어요. 병 고치는 것과 귀신 쫓아내는 것은 면허를 받은 사람들이 그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면허도 없이 그 일을 해서 제지를 당했지요. 여하간 그 당시에도 그들 나름대로의 법과 질서 속에서 잘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도 나름대로의 규칙으로 잘 사회가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현실 그 자체에요.
그런데 이렇게 정상적으로 잘 살고 있는 자들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귀신들렸다’고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법 바깥에 있는 존재가 된 거예요. 그래서 누구 죽여도 문책하지 않는 대상입니다. ‘너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야.’라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인물이 있지요. 북한을 찬양하는 이석기, 황선 이런 사람들.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비난과 욕을 해도 누구도 욕하는 사람을 탓하지 않습니다. 또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문제를 일으키면 추방해 버리지요. ‘네 나라에 가서 살아라.’ 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은 ‘당신은 우리나라 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당시 사람들이 “당신은 귀신들렸다.”는 것은, ‘우리가 당신을 죽인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한 내용을 요약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냈을 때 그들은 조직적으로 예수님을 대항했습니다. 조직이란 국가 조직이고, 국가 조직이 생겨난 것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생겼다고 했지요. 자연의 폭력성에 대해 사람들이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자연의 반복성을 통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은 겁니다. 그리고 반복성을 통해서 법이 만들어집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지요. 만약 아이를 돌보지 않고 방치해버리면 짐승처럼 살겠지요? 그래서 어린 아이를 규제하고 규격에 맞는 삶으로 교육해서 공동체 내에서 법을 지키며 살도록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 나름대로의 조직체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조직에 대해서 사람들이 호응을 합니까? 아니지요. 거부했어요. 왜냐? 자기들 끼리 잘 살고 있잖아요. 병자, 강도, 세리, 창기는 몰라도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이 필요 없어요. 자기는 정상적이니까. 아무 문제없는 사람이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성령이 오면 믿는데, 그것 말고 보통 사람이 예수를 믿으려는 것은 특이한 현상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니고데모인데, 이 사람은 예수님을 안 믿어도 되는데 괜히 따라다녀서 자기편 사람들에게 욕을 먹지요. 그래서 남들이 안 보는 밤에 몰래 와요. 그렇다고 해서 니고데모가 예수님 편에 전적으로 섰습니까? 그건 아니지요. 니고데모는 어중간한 태도를 보여요.
이건 니고데모뿐만 아니고 12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 자신은 예수님 편에 섰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었어요. 예수님 품에 있을 때는 바깥의 권세가 미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 정도로 예수님은 든든했습니다. 병을 고치고, 물 위를 걷고, 수많은 기적을 행했기에 예수님 품에 있는 자신들을 예수님이 지켜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예수님이 맥없이 체포되는 순간 제자들의 믿음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체포하는 사람이 셉니까, 예수님이 셉니까? 체포하는 사람이 세지요. 그러면 제자들은 살기 위해서 어느 쪽에 붙여야 합니까? 센 쪽에 붙어야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잖아요. 이게 오늘날 우리 모습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는 예수님 때문에 욕을 먹고 죽는다 할지라도 세상 편에 서지 않는 자라고 합니다.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나왔는지 다 알잖아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와서는 ‘죽도록 충성하라’고 해요. 이 말은, ‘너를 죽인도 할지라도 배신하지 말라.’는 것이고, 이것이 성도입니다.
계시록 20장에 ‘목 베인 영혼’들이 주님과 함께 왕노릇 한다고 나옵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 마세요. 지키려하는 순간 우리는 실패합니다. 절대 우리가 못 지킵니다. 제가 성령 이야기를 아직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국가를 거론했습니다. 왜냐? 이미 권세에 속한 사람은 그 권세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 권세에 속한 사람들이 아무 일 없이 잘 살아요. 예수님 안 오셔도 잘 살아요. 지금 예수 모르는 이슬람 나라가 잘 살고 있습니다. 기름이 펑펑 쏟아져서 잘 삽니다. 중동 지역에 앞으로 지을 빌딩 높이가 1,000m 된다고 합니다. 여하간 잘 살아요. 이게 현실입니다. 높고 화려한 빌딩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고급 호텔에서 숙박하는 것이 소원이고,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요? 믿을 이유가 없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자를 거부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부하면 용서받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인간의 한계를 일러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온다는 것은 ‘너 스스로 세상 권세에서 빠져나와 날 믿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너희들은 아무리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해도 너의 자리에서 도저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인자되신 예수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닦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배후의 권세와 싸웁니다. 그래서 ‘인자를 비방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비방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신 겁니다.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은 예수님 하신 말씀을 못 알아들어서 대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소에 본인들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니까 그들은 약이 올라서 ‘성령도 우리가 알아서 잘 순종할 수 있다’고 허풍을 떤 거예요.
아직은 본문의 핵심부분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열린 문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것이 카프카의 ‘법 앞에서’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열린 문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카프카가 지적한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문을 열 수 있는 문으로만 들어가요. 사람이 자기 힘으로 문을 열면서 그것을 문이라고 인식해요.
자기가 열지 않으면 인간은 문이 열렸다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아무 한 일 없이 천국에 갔다면 인간은 그 천국에서 버티지 못하고 벗어나고 싶어 해요. 왜? 그곳에서는 무능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천국에 가면 자기가 바보가 되니까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남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막강한 경쟁률을 뚫고 대학에 들어갔고, 회사에 입사했는데, 나는 아무 한 일 없이 들어갔다면, 그 회사는 자기 회사가 아닙니다. 그곳에서는 자기 정체성을 구성할 수가 없어요. 자기가 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의 문은 본인이 열어야 돼요.
카프카는 이것을 ‘문’이라고 하면서 ‘법’으로 고칩니다. 인간의 법은 자기가 지킬 수 있을 경우에만 법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함을 얻지 못한다.”고 할 때, 성령은 인자가 아니에요. 따라서 이것은 인간들의 무능함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령의 시대가 오면 모든 인간은 자기 구원에 대해서 무능자가 되는 거예요.
아무 한 것도 없는데 천국에 간다는 소리가 처음 들을 때는 기분 좋을 수 있어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런 소리가 반갑지 않습니다. 인간은 평소 습관을 마귀가 얼마나 질을 잘 들여놓았는지, 선악과 따먹으라고 누가 권했습니까? 마귀지요.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했어요. 이 사단의 유혹에 인간이 넘어갔어요. 즉 사기를 당한 거지요. 성경에 보면 원래 마귀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면서도 신이 되어야만 한다는 찢어짐이 있어요. 아기가 울어 잠을 이룰 수 없어서 짜증이 나고, 이가 아파 신경질이 나는데, 이처럼 현실도 제 마음대로 못하는 신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인간은 동물과는 달라요. 동물은 자연에 순응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순응하는 것이 아니고 대듭니다. 누가 미친 거예요? 바로 인간들이 미친 거예요.
그 미친 것 중에서 주님께서 하나 건져냈는데 그것도 모르고 귀신 들린 자들은 자기가 정상이라고 여깁니다. 감기 환자는 낫게 했지만 자기는 암에 걸려 못 고친다고 버티는 것과 같아요. 주께서 병은 고쳤는데 자기는 암에 걸린 것도 모르고 건강하다고 버팁니다. 아마 암 환자 중에 이런 사람이 많을 거예요.
본인이 고집을 부리면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요. 몸이 아플 때 아프다고 하고 순순히 병원에 가야됩니다. 괜히 오기를 부리면서 버티면 가족들이 힘들어요. 내 존재 때문에 다른 존재를 힘들게 하면 그것은 가해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병은 자랑하라고 하잖아요. 그게 좋아요.
29절에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을 본격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인간은 자연을 투영해서 자기 살 궁리를 해요. 그것이 법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연을 뚫고 들어옵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자연에 속합니까, 하나님께 속합니까? 이건 하나님께 속한 거지요. 자연은 인간에게 준 거예요.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인간에게 준 거니까 이것저것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에덴동산에서 추방하고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했어요. 이 말은 생명나무는 인간이 다스릴 대상이 아니란 뜻입니다. 생명나무, 선악과에서 물이 나옵니다. 이것이 원류입니다. 출원지. 생명나무의 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뚫고 들어올 때는 ‘죄냐, 의냐?’를 물어요.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했는데, ‘사하심’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용서하심이죠. 용서하고, 말고를 하나님 쪽에서 이야기한다는 말은 ‘네가 건강하냐, 귀신 들렸냐?’ 이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너는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묻지요.
하나님께서 자연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을 보면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본문의 근본적인 말씀은 ‘지금 잘 살고 있으니까 문제없다.’는 인간들에 대해서 ‘그 생각이 하나님 차원에서 죄인지 의인지를 생각해 봤냐?’고 묻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성령은 어느 쪽입니까?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잘 살게 됩니까? 부자 되는 거예요? 행복하고 건강해 집니까? 아니지요. 성령이 오면 최초로 죄와 의에 대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십자가와 죄에 대해 언급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2,000년 동안 성경의 내용을 언급했습니다. 칼 바르트 이전의 신학자들이 제일 중요한 것을 빠뜨렸어요. 하나님의 언약을 빠뜨렸습니다. 교회사에도 언약이 나오긴 하는데 그 언약은 ‘내가 어떻게 이 땅에서 잘 사느냐?’ 하는 것처럼, 죽어서 필요한 것이 언약이라고 본 겁니다. 그래서 구약은 ‘행위 언약’이고, 신약은 ‘은혜 언약’이라고 해요.
그런데 칼 바르트는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내가 살기 위해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 자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 이전 신학자들의 주장과 많이 드리지요? 칼빈과 다르지요? 칼빈은 교회를 어떻게 잘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가? 이것을 위해서 성경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바르트는 그것이 바로 칼빈의 잘못이라고 지적했어요.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가 있다는 겁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따로 교회가 필요 없습니다. 교회는 필요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단체가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교회가 필요 있다, 없다는 말을 할 입장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칼 바르트가 미흡한 점은 언약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겁니다. 다만 바르트는 언약이 곧 예수님이라고 본 거예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언약을 위하여 예수님이 계신 거예요.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언약을 위한 것입니다. 언약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예수님 보다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관계에서 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상은 예수님의 주 되심과 관련해서 갖춰지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서경수(IP:118.♡.139.86)
15-02-25 15:29
광주 강의(2015. 1. 23) 11-2
인간은 생존이 우선입니다. 밤에 아이가 운다면 제발 울음은 그쳐 편안히 잠자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이가 아프면 뽑든지 약을 먹든지 해서 통증을 그치게 해야 합니다. 세계 평화를 외치고, 남녀평등을 부르짖다가도 치질이 걸려 통증이 심하면 그 모든 것은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인간의 이상이 아무리 높고 고결해도 자기 몸 하나 감당 못합니다. 그런데 감당하는 척하는 자들이 서기관,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마치 신인 것처럼, 하나님의 대변자인 것처럼, 하나님과 직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낼 수 있는 것처럼, 자기가 기도하면 즉각 응답이 오는 것처럼 행세를 하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인정했고.
성령께서는 이것을 따지거나 묻지를 않아요. 왜? 인간을 아니까. 우리가 세상을 감당 못하고, 바꾸지 못한다는 것은 뻔히 아시기에. 다만 우리로 하여금 ‘네가 죄인임을, 즉 선악과 따먹은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가?’를 묻는 거예요.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에 인자가 먼저 와요. 예수님이 먼저 오신 거예요.
하나님께 영광, 찬양을 외치던 인간들이 예수님을 보는 순간 “당신은 꺼져!”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죄는 반드시 예수님과 관련 되어야 해요.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서 죄가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아멘’하고 받지를 못하고 우리는 서기관, 바리새인처럼 대들게 되어 있어요. 왜냐? 예수님이 그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유발시켜요.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을 주님은 비켜가요. 예를 들면, 여기 딸기가 있는데 “딸기에 관해서 시험 칩니다.”고 하니까, “아, 딸기가 몇 개 남았는지 묻겠구나.”하고 정답을 말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 딸기의 원산지는?” 이렇게 문제가 나옵니다. 이건 우리가 예상 못한 문제입니다.
딸기의 원산지, 이 대자연이 왜 있어야 되는지를 물으니까 우리는 답변을 못해요. 우리는 내가 밥 먹고 사는 것에 관해서만 정답을 모아 놓았기에 내가 원천적으로 왜 죄인인가에 관한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죽어도 마땅한 죄인이란 생각을 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제가 수련회에서 민수기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강도가 와서 죽이려고 하면 아마 신고할 걸요? 아무리 죽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강도가 와서 죽이는 것은 원치 않아요. 왜 그런가?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가 문을 열지 아니하면 그것을 문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비로소 ‘나는 내 힘으로 문 열고 이곳에 왔다.’가 됩니다. 천국의 문을 남이 열어주면 안 돼요. 기분 나빠서 그런 천국에는 안 가요. 값없이 주는 것은 싫어요. 내 힘으로 천국 문을 열어젖힐 때 우리는 천국에서 살면 살수록 내가 열었다는 자긍심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게 얼마나 보람된 일입니까?
선악과 따먹은 인간에게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한 이유를 하시겠지요? 생명나무는 값없이 주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따먹을 수 없는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의 가치, 값없이 주신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하시고, 생명나무는 못 따먹게 하신 후, 생명나무를 값없이 주심으로 말미암아 ‘네가 들어갈 천국은 네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들어 너를 넣어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천국이 있어도 못 들어가고, 안 들어갑니다. 자존심이 있기에 값을 지불하지 않고는 안 들어갑니다.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는 사사기를 강의할 작정인데 사사기 말씀이 참 재미가 있어요. 그들이 배부를 때는 하나님을 안 찾아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주변에 있는 개(이방나라)들을 풀어 이스라엘을 물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찾습니까? 아닙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역량을 총동원합니다. 그래도 안 될 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부르짖고 난 후 하나님께로 돌아옵니까? 그러면 사사기가 아니지요. 사사가 여러 명이라는 것은 각자의 사사가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몰랐어요. 사사를 통해서 메시아를 발견하지 못한 겁니다. 다만 자기들 생존에 도움 되는 자로 사사를 하나님이 사용했다는 정도로 알지요. 따라서 그들은 아무리 도움을 받아도 원천과 접촉하지를 못했어요. 성경 사사기 다음에 나오는 룻기를 보면, 사사기는 이스라엘 내부 이야기인데 룻기는 이스라엘 내부에 구멍이 뚫렸어요. 구멍이 뚫려 모압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면 이 자리는 비어있는 자리지요?
모압으로 갔다가 되돌아 올 때, 되돌아 온 나오미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룻이라는 이방 여인을 데리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드디어 이방 요소가 퍼집니다. 그런데 이방 요소에서 누가 나오는가 하면, 다윗이 나와요. 룻은 다윗의 고조 할머니입니다(마 1장 족보 참조). 그렇다면 이곳이 다윗과 연결되었다면 이곳만 진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칭 이스라엘은 무슨 역할을 합니까? 진짜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핍박했습니까, 아니면 못살겠다고 나온 겁니까? 그들은 못살겠다고 나온 거예요. 그래서 어려워요. 사람은 주님을 안 찾습니다. 살기 힘들 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고, 그 행동을 한다고 해서 진리를 안다든지 주님께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못살겠다고 떠났던 그들을 하나님이 대동하고 나옵니다. 롯을 대동하고 나오면서 이 전체 이스라엘을 살려냅니다. 이전까지는 어떻게 살려냈습니까? 사사기를 다시 해봅시다. 이전까지는 적들이 공격해 오니까 그들이 자기 살겠다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요. 왜냐하면 자기들은 택한 백성이니까.
그런데 택한 백성과 하나님 사이가 끊어졌지요. 나중에는 중보자적인 기능이 있지만 처음에는 중보자적 기능이 없지요. 깨져 버렸지요. 그냥 부르짖는 거죠. 중보자 의식 없이 그냥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어요. 이것을 출애굽 사건의 반복이라고 합니다. 사건이란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틈을 사건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적은 남한이고 남한의 적은 북한이죠. 둘 다에 다른 적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예를 들어, 북한 주민이 IS에 참여하면 어떻게 됩니까? IS가 사건화 되지요. 이전에는 남북 대결인데, 제 3의 요소가 들어오면 나선 요소가 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사건입니다. 사건은 기존 토대로는 해석 불가입니다. 구원이 바로 그런 사건입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백화점 옷을 보고 또 탐을 내고 말았습니다. 이제 탐내지 않을 게요.”하면서 자책하지요. 특히 부모가 자식을 키우면서 “자식을 사랑으로 키우겠습니다.” 해놓고, 사춘기 자식을 보면서 화가 나서 욕을 하고 미워했는데, 그리고 돌아서서는 “자식에게 내가 모범을 보이지 못해서 자식들이 날 무시하는데 이 모든 것은 다 내 탓이다.” 이게 뭡니까? 하루 종일 선과 악, 악과 선을 왔다 갔다 합니다.
“내가 다시는 자식을 미워하며 때리지 말라야지.” 하고 있는데, 주님이 나타나셔서 “손대지 마. 너는 손댈 자격도 없어. 때려도 내가 때려. 내가 너의 죄를 사한다.” 이것이 사건이고, 복음입니다. 이 때 우리는 놀라운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발견하게 되지요.
십자가 복음을 깨닫기 위해 강의 듣고, 녹취록 읽으면서 “주여, 오늘도 강의 들었습니다. 제가 잘 했지요?”할 때도 있고, “또 오늘 강의 듣는 것을 못했구나. 이 나태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 식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주님이 나타나서 이어폰을 뽑으면서 “강의 듣지 마. 내가 구원하지 강의 듣는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야.” 이게 복음적 사건입니다.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선악과의 틈새에서 나옵니다. 그러니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언급한 성령에 대해 반발할 수밖에 없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선과 악의 대립되는 개념으로 둘 중 어느 쪽에 설까 궁리하는데, 그 틈새에 성령이 오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슨 짓을 해도 죄인입니다.
그래서 “인자를 비방해도 너는 용서 받는다. 하지만 마지막 때에 성령이 오시는데 이 성령을 거역하면 사함을 받지 못한다.” 이 말은, 성령을 믿으란 말도 아니고 성경 말씀을 지키라는 말도 아니고 성령은 하나의 사건이 되어 우리에게 덮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열지도 않은 문, 내가 행한 것도 없는 나라에 성령을 통해서 도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마가복음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남학생 전체가 머리카락을 잘라 빡빡머리였습니다. 그 때 고등학생의 소망은 빨리 학교 졸업해서 머리카락을 기르는 거예요. 그런데 성질 급한 녀석들은 학생시절에도 선생님 눈을 피해 머리카락을 기르려고 안간힘을 섰습니다. 그러다가 선생님께 적발되어 바리깡으로 머리에 고속도로처럼 길을 냅니다.
한 번 깎였잖아요. 그런데 여러 번 깎이면 돈도 안 드리고 이발이 된 셈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머리에 고속도로가 난 것을 부끄러워해요. ‘내가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세상에 이 말씀을 못 지키다니. 이것만 지켰으면 괜찮은 성도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텐데.’라고 할 때, 주님은 머리를 다 밀어버립니다. 아예 자랑치 못하게 만들어요.
머리를 다 깎으면 남는 게 뭡니까? “주여,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녀가 말썽을 부립니까? 그것도 은혜고, 부모가 치매에 걸려도 그것 역시 은혜고, 모든 것은 은혜요 감사가 됩니다.
어제 미국에서 어떤 분이 전화를 걸어왔어요. 국제통화를 30분 이상 했어요. 중국에 있는 선교사가 자기 여동생인데, 자기한테 전화해서 ‘한국에 이근호 목사님이 계시니까 그분 설교 들어봐라.’고 해서 언니가 제 설교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너무 공감이 된다는 거예요.
그분이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아서 자신이 맡은 사역이 번성하게 해달라는 마음으로.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직 잘 납득이 안 되고, 이렇게 자유롭게 신앙생활 해도 되는가 싶어서 저에게 전화를 했어요.
이분에 제일 먼저 질문한 것이 뭔가 하면, ‘어떻게 막 살아도 됩니까?’ 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어떻게 막 살 수 있는가?’ 물어서 제가 답변을 했어요. ‘처음부터 막사는 것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막사는 것이 나와야 됩니다.’ 처음부터 막살면 안 되고, 성령을 받고 보고 ‘예전에 성령 받았다고 했던 그것도 사실은 내가 막 산 것이었구나.’를 깨닫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자신이 죄인임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성령 받고 난 뒤에 성령을 훼방할 수 있습니까?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할 때, 이 말은 성령 받고 난 후에 죄를 짓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지옥에 간다는 말과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성령 받지 못해서 지옥 가는 일가친척을 보면 안타깝지요. 그 안타까운 소리를 그들한테 해보면 확 달려들어요. 그들은 말합니다. “미쳤구나!”라고.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선악 외에는 다 미친 거예요. 주류와 비주류 외에는 다 미친 거예요. 제 3의 지대는 우리한테는 나올 수가 없어요.
미국에서 저에게 전화하신 분이 이런 말도 했어요. “내가 십자가 복음을 알아서 ‘이제 선악을 헤매지 않고 복음과 더불어 살겠다’고 생했는데 이것이 드디어 죄인 줄 알았다.”는 말을 해요. 복음을 알게 된 것도 죄라는 거지요. 왜냐하면 복음을 알면 복음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복음 아는 나’가 우선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 죄지요.
즉 복음 잘 알 때는 선이 되고, 복음에 소홀하고 복음을 잊어버릴 때는 악이 되니까 이것 역시 선과 악이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반복되어야 해요. 매일 반복되어야 합니다. 또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그 사건은 누가 일으킨 사건이냐? 성령이 일으킨 사건입니다. 왜?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만드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29절에서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러면 성령은 잘 살고, 못사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뭘 생각했는가 하면,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에 ‘내가 성령을 알게 되면 복을 받아 잘 산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잘 사는 것이 성령 받은 증거가 됩니다.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이 축구를 하는데 한국이 먼저 한 골을 넣었어요. 그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했겠어요? “주여, 1점 지켜 이기게 하옵소서!” 하면서. 그런데 한 골을 또 넣어 2대 0이 되었습니다. 초반에는 1대 0으로 이기기를 원했는데 2대 0이 되니까 이것은 추가적인 은혜지요.
2대 0으로 경기가 끝 난 후에 기도한 사람은 뭐라고 할까요? 한국은 우즈베키스탄을 2대 0으로 이길 자격이 있다고 해요. 이게 바로 복음 뒤에 ‘나’가 붙은 거예요. 이걸 어떻게 뗍니까? 이제 여유 있게 일본과 이라크의 경기를 지켜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올라갔다는 거지요.
여유가 있다는 말은, 이제 자만하고 나도 뭘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반드시 죄를 지적합니다. 인간은 구원 받은 자신이 지평이 되지요. 이 지평에 주님은 구멍을 냅니다. 구멍 내는 방법은 생존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키는 거지요. “복음은 믿는데 올 해는 수입이 왜 줄지요?” 이런 생각은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주께서 구멍을 내는 것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폭로하기 위함이고, 그 구멍에 다시 성령을 집어넣지요. 이렇게 되면 내가 노력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반복적인 희생덕분에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알지요. 그러면 복음만 감사하게 되지요. 3초 지나면 복음 뒤에 뭐가 붙습니까? “드디어 복음을 알게 된 나.” 여기서 ‘나’가 또 붙어요.
주님이 우리를 결과로 만들었지 내가 나 되는데 기여하고 보탬이 된 적이 없습니다. 나의 기도나 헌금, 봉사, 충성으로 오늘의 내가 된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언급한 것은 사사기의 룻의 기능과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모압 여인이 투입된 것, 이 기능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 받을 때는 외부적이다. 나를 지적하기 위해서 외부에서 오신 분이다. 그런데 돌아서면 그 성령도 내가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성령에게 소유 당하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내가 열지 않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주께서 채워주시는 겁니다.
제가 요즘 입맛이 없어서 뭘 먹어도 맛이 없는데 좀 전에 보니까 ‘허쉬 초콜릿’이 눈에 띄어 제가 한개 먹었어요. 그런데 도적질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먹었어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초콜릿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미리 생각했다는 이유 때문에 나의 열심과 노력으로 장악했다고 생각합니다.
내 자식도 내가 키웠고, 내 사업을 내가 성장시켰고 모든 것이 나의 노력과 땀으로 일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됩니다. 그 죄를 깨닫는 자가 영원히 구원 받는 사람입니다.
31-32절 봅시다.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고 하면 우리 같으면 “잠시만 기다리세요. 지금 강의 중인데 강의 끝나면 나가겠습니다.” 이렇게 할 텐데, 예수님은 아니에요.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33절)고 했어요. 이 말씀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예수님 자리에 누구 앉는가? 아버지를 아는 자만 예수님 자리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자리가 예수 안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안면이 있으면 예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것을 가위로 잘라버립니다. 그러면 모든 육적인 관계는 의미 없게 됩니다.
인간사회에서 모친과 동생이라면 아는 정도가 아니라 혈연관계입니다. 엄마를 엄마로 부르고 동생을 동생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모친과 동생이 예수님께 오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게 이어지는 이것을 주님은 가위로 잘라버리는 셈이 되지요.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자기 그림자는 있는데 예수님 그림자는 없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림자가 없고 자기 그림자는 있다면 지금 그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의 그림자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그 자리에만 있지 다른 곳에는 예수님의 그림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그림자가 없다는 말은 예수님이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들이 보고 있는 예수는 없는 겁니다. 이게 바로 스크린 현상입니다. 제 아내가 ‘민수기 교재(수련회 강의 안)’를 읽은 후 하는 이야기가 “왜 이렇게 어렵게 섰나?”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내용은 이해되나?”라고. 그 때 “내용은 이해하지만 어렵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당신이 이해한 내용을 설명해 봐라.”고 했어요.
그 교재에 스크린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요. 인간은 눈이 있어서 현실을 그대로 본다고 생각합니다. 안경을 통해서 보지요. 그런데 안경을 낀 것도 모르고 안경이 가까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스크린이 가까이 온다면? 스크린이 가까이 오면 인간은 자기가 본 것을 뒤받아 오잖아요. 그런데 이 사실을 인간은 모릅니다.
예수님이 저기 있으니까 동생들과 모친이 왔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예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있다, 없다’고 하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에 나처럼 있으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너처럼 있는 것은 ‘있다’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있어야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있음은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 있을 때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자리는 현재 비어있는 거예요. 모친과 동생이 있다는 것은 혈육적으로 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말하는 혈육은 혈육이 아니고 예수님이 말하는 아버지를 아는 자들이 혈육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자리를 새롭게 시작해야 돼요.
어떻게 시작하는가? 실패해야 됩니다. 인간은 절대 자기 일을 실패로 느끼지 않습니다. “네가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갔느냐?” “예, 들어왔습니다.” 이게 실패한 겁니다. 실패가 없으면 구원이 안 됩니다. 탕자가 되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실패를 해야 돼요.
그러면 실패한 인간은 유능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능한 자가 되지요. 오늘 강의 제목이 ‘무능한 자’입니다. 무능한 자가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이 보입니다. 누가 무능하게 만들었습니까? 주님이 날 구원하시려고 나를 무능한 자로 만드신 거예요. 결국 십자가의 랜즈에 의해서 예수님이 보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피 흘리는 예수가 보입니다.
멀쩡한 예수와 피 흘리는 예수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했어요. 피 흘리는 예수님 앞에서 그 예수님은 외면하고 멀쩡한 예수님, 혹은 피 흘린 후 영광스럽게 된 예수님을 보려고 합니다.
제가 박사교회에 있을 때 말썽꾸러기 꼬마가 있었어요. 지붕위에서 놀다 떨어져서 팔이 부러진 적도 있었는데, 그 아이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 때 아이가 묻기를 “할머니 어디 가셨는데?”라고 해서 사람들이 “할머니 천국 가셨다.”고 하니까, 병풍 뒤에 시신이 놓여있는 것을 알고는 병풍을 젖히면서 “여기가 천국이가?”라고 했어요.
왜 병풍을 쳤을까요? 인간은 죽지 않고는 죽음에 갈 수 없는데, 그 아이는 멀쩡하게 살아서 병풍 뒤를 들여다보니까 ---. 살아 있을 때의 천국은 천국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지요. 우리가 죽었다는 상표(부채표)가 있어야 돼요. 죽었다는 상표가 붙어야 비로소 아는데, 우리가 죽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죽으면 행함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유능한 자가 됩니까, 무능한 자가 됩니까? 무능한 자가 되지요.
축구 경기를 하는데 한쪽 팀은 11명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상대 팀은 11명 모두 힘이 빠져 운동장에 누워있어요. 그러면 활발하게 움직이는 팀이 공을 몰고 가서 골을 넣으면 되는데, 이상하게 공을 차면 튕겨져 나옵니다. 계속 그러다가 종료시간이 다 되어서 운동장에 누어있던 선수 1명이 일어나 골을 넣어 활발한 11명 팀이 졌는데 이것이 천국입니다.
이것이 시편 8편에 나옵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권능을 나타내셔서 승리케 하십니다. 젖먹이가 어떻게 승리했습니까? 엄마 젖 빨면서 응원해서 이겼습니까? 아니지요. 그냥 자신이 손대지 않은 결과(승리)에 초대받았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열지 않은 문을 주께서 열어놓고 우리에게 들어가라고 하실 때 자존심을 이겨내야 됩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높이 들고, 그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했는데 왜 사람들이 안 쳐다봤을까를 생각해 봤습니까? 본인이 유능하기 때문에 안 쳐다 본 겁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놋뱀을 쳐다 본 자는 낫는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그 말이 굉장히 기분 나쁜 거예요.
안 쳐다 본 사람이 정상입니다. 쳐다 본 놈이 이상한 거예요. 우리는 미칩시다. 미쳐야 됩니다. 늘 쳐다봅시다.
제가 문제 냅니다. 예수님이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이냐?’고 할 때, 모친과 동생은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1) 삐쳤다. 2) 예수님과 다시는 상종치 않는다. 3) 호적에서 제했다. 4) 사건이다. 몇 번이 해답입니까. 4번이죠. 평소에 예수님이 모친과 동생들에게 “어머니는 내 어머니가 아니고, 동생들도 내 동생이 아닙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까? 안 했겠지요.
평소에는 어머니와 동생을 인정하며 살았겠지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나오는 것은 타이밍이 사건을 만든 거예요. 평소에 서로 가족으로 지냈기 때문에 오래 집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어머니와 동생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잖아요. 예수님이 평소에 가족과 원수처럼 지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찾아온 가족을 이런 식으로 대했다는 말은, 사건이라고 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 해석을 어떻게 하는가? 예수님 모친은 모친이 아니고 동생은 동생이 아니란 말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이 말 속에는 ‘ ~이다, 아니다’를 넘어서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킵니다. ‘아, 주님은 내가 아는 주님이 아니구나.’
내가 아는 주님은 반드시 뒤에 ‘나’가 붙는데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내가 원인이 되고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간 천국이기를 원하는 우리. 하지만 주께서는 ‘네가 문을 연 것이 아니라 내가 열었고, 네가 미치지 않는 이상은 내가 연 문으로 들어갈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미치게 만들 게. 성령을 보내 줄 게.’
성령을 받으면 내가 하지 않은 것을 찾아다니는 미친놈이 됩니다. 이게 바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고백입니다. 미친 인간이 아니면 이런 고백이 안 나옵니다. 죽도록 공부해서 서울대학에 입학해서는 하는 소리가 “내가 서울대학에 입학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하는 거지요. 주위 사람들이 ‘믿음 좋은 척한다’고 얼마나 빈정대겠습니까?
35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이게 엄청나게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서기관, 바리새인이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셨어요. 예수님이 이야기했다는 말은 결론부터 말하면, ‘내 가족이 되는 것은 너희들 소관이 아니고 내가 담당해야 될 나의 숙제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그 숙제를 하기 위해서는 오해의 소지가 있더라도 그런 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아는 식으로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모친이 되는데 본인이 기여하고 노력했던 것이 계속 기억에 남겠지요? 그렇게 되면 일이 파토가 납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네 기억을 지워라.” 이런 식으로 합니까? 이게 말이 돼요? “기억을 지워라.”는 말도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기억하는 그것도 죄다.”라고 마중 나와야지요. 왜? 우리는 잊지 못하니까. 만화영화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외계인이 와서 돌멩이를 던지니까 지구수비대 독수리 5형제는 방패를 들고 나가요. 그 다음에 외계인이 총을 쏘니까 독수리 5형제는 레이저 광선 폭탄을 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왜 처음부터 레이저 광선을 들고 나오지 않았을까요? 저는 여기에서 뭘 느꼈는가 하면 하나님은 인간 수준에 맞춰서 놀아요. “내가 술을 끊었으니까 착하지요?”라고 나오면, 주님은 “그것도 죄야. 아직 담배는 안 끊었잖아.” 그래서 담배도 끊으니까 주님은 또 다른 것을 거론하면서 “그것은 안 끊었잖아.” 이렇게 나와요.
항상 하나님은 보조를 맞춰줍니다. 이것이 구약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십자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죄를 숙성시키는 거예요. 죄를 계속 키워나가고 그 죄의 수준에 따른 용서를 해줘요. 계속 죄인과 보조를 맞춰 갑니다. 마지막에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이때는 죄를 다 보여줬으니까 더 이상은 없습니다. 이때는 예수님도 죽어지내고, 아버지가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끝났지요.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구원 받을 권리는 없지요.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지요. 로마서 7장에서 ‘살기 위해서 법을 봤건만 법이 나를 죽였다.’는 말씀이 있어요. 내가 선을 행하기 위해 법을 따랐습니다. 왜 선을 행하기 위해 법을 찾지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왜 선이 안 되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인간은 자기가 문을 열 때 결과를 눈으로 볼 수 있어요. 자기가 문을 열어야 그 문으로 들어갑니다. 가만히 있으면 선인지 아닌지 몰라요. 그런데 시킨 대로 하니까 되더란 말이지요. 사춘기 아들이 엄마를 약 올리는 방법은 엄마의 말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고 엄마가 시키는 것보다 더 과분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시킨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게 만들어서 자기가 승리하고 싶은 거예요.
시킨 것보다 더 많이 하면 자기가 승리한 것이 됩니다. 엄마는 1시간 공부하라고 했는데 2시간 공부하고 식식거리면서 나옵니다. “엄마, 나 2시간 공부했어.” “잘했다.” “엄마, 나 2시간 공부했다니까.” “그래, 잘했어.” “아니, 나 2시간 공부했다니까요.” 왜 아이가 자꾸 2시간을 강조하는 것입니까? 플러스 의로움이 내 죄를 씻는 것은 물론이고 그 플러스가 있으면 엄마는 더 이상 나에게 잔소리 하지 못한다는 것이 담겨 있어요. 이게 엄마와 아들의 암투입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즉각 식탁에 모여라.’ 이것이 엄마의 요구입니다. 그런데 늦게 온다고 잔소리를 들은 후, 다음에는 식사 시간 30분 전에 식탁에 앉아 있으면 이건 뭡니까? 이건 반항하는 겁니다. 왜 반항하지요? 엄마가 법을 만들었잖아요. 그 엄마의 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함으로 내가 당당하게 되고 승리를 맛보는 것입니다.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