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4. 12. 26) 1, 2강
광주 강의(2014. 12. 26) 1, 2강
이름 : 서경수(IP:118.35.140.120)
광주 강의(2014. 12. 26) 10-1
12제자의 위치는 내부적 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부의 반대는 외부가 되겠지요. 12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 테두리 안에 들어온 것이 돼요. 그러면 12제자와 그 외 사람의 경계선이 생기겠지요. 12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합니다. 제자들은 단순히 ‘예수님은 우리의 스승이야!’ 이 정도인데,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가 치료되는 주님의 능력이 발휘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만약 음식도 전혀 먹지 않고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도인이라고 한다면, 집사님이 저와 함께 살고 난 후부터 집사님 역시 음식을 먹지 않고 사는 자가 되었다면 이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요? 12제자는 예수님의 권능 내부로 들어온 자입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이 필요할까요, 필요 없을까요?
누가 와서 나를 어떤 영역 속에 집어넣었을 때 거기에서 따로 믿음이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믿음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 안에서는. 제자들이 믿었기 때문에 권능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권능이 나타났지요. 그러면 누가 작용을 한 것입니까? 주님의 능력이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제자들을 원격조정해서 귀신을 쫓아내게 했지요. 마치 꼭두각시 인형을 다루듯이 다룬 거예요.
그러면 제자들은 수동적이 되는데, 그 때 능동적인 믿음이 나올 필요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들이 믿었기 때문에 능력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시켜서 했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피자집에서 배달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이 피자를 배달하면서 “믿습니다! 나는 주인님을 믿습니다!”라면서 다닙니까? 아니죠.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요.
여러분은 믿는 것이 쉽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쉽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내부 문제가 아니고 외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 믿는 관계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은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믿음을 생성해내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유일하게 내통하는 관계임을 12제자에게 파급시키는 작업에 들어가는 겁니다. 한 번 뽑았다고 제자가 제자다운 것이 아니고 주님이 그들과 동행하면서 그들 내부에 변화를 유발하십니다. 내부에 변화가 유발되면 이것을 내부에 포함시킨 예수님의 정체가 제자들을 통해서 나타나겠지요.
그래서 사도행전 2장 1절에 보면 12제자에게 하늘에서 성령이 오지요. 그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의 영’으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냥 ‘성령’으로 되어 있지요. 그런데 바울 서신에 보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고린도후서 3장 등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누가 줬다는 말입니까? 제자들이 아는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니에요. 성령은 예수님을 통해서 왔는데, 예수님의 아버지는 그들이 몰랐던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상상의 하나님이니까 가짜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새롭게 시작해야 돼요. 새로 시작하려면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예수님 계신 곳에 진짜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 알았던 하나님은 가짜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가짜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아쉽습니까? 미련이 남아요? 하나님 안 믿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듭니까? 하나님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나오지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아들(예수)이 존중 받는 곳에서만 아버지(하나님)가 존중 받아요. 요한복음 10장에서는 ‘내가 하는 일을 보고 아버지를 알아라.’고 했고,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했어요.
예수님을 거부하면 가짜 하나님만 남고 진짜 하나님은 거기 없어요. 불교, 천주교,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를 하나로 만들자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로 만들 때 ‘당신은 부처 내놓고, 당신은 하나님 내놓아라.’ 이렇게 되면 하나가 되겠습니까? 그들이 말하는 하나는 돼요. 왜냐? 그들이 아는 신은 사랑이니까.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은 곧 하나님이 되겠지요.
그러면 사랑 있는 곳에는 누가 있겠어요? 각자 표현은 달라도 ‘신은 거기 계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지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했어요. 아버지 품에 있는 독생자가 누구입니까? 석가입니까, 공자입니까? 예수님만이 독생자인데, 이렇게 되면 종교 화합이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될 수가 없습니다. 종교 화합이 된다는 말은, 그 자체가 거짓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12제자를 뽑은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뭘 요구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뽑은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지요?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께 해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을 시켰습니까, 못하는 것을 시켰습니까? 인간이 못하는 것을 시켰지요.
특히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 귀신이 인간들의 대장질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길을 가다가 급하게 소변이 마려울 때는 이웃집에라도 들어가서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을 사용하면 되지요. 그런데 소변을 본 후 곡괭이로 화장실을 부술 필요는 없지요?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대장이었던 귀신을 도끼로 쳐부수는 것과 같은 거예요. 소변을 본 후 화장실을 파괴하는 것과 같단 말이지요. 우리는 그럴 힘이 없고 예수님은 힘이 있어요.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니 수많은 귀신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서 바다로 들어갔지요. 그 때 그 지역 주민들이 예수님께 항의하고 떠나갈 것을 부탁했지요.
돼지가 귀신을 이깁니까, 귀신이 돼지를 이깁니까? 귀신이 돼지를 이기지요.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부리잖아요. 돼지만 부린 것이 아니라 인간도 부렸어요. 그러니까 그 청년은 자기 마음대로 못하고 무덤가에서 살았고, 마을사람들이 청년에게 쇠고랑을 채우면 그것도 풀고 난동을 부렸지요.
이 청년은 귀신이 심하게 들린 경우이고, 우리 주위 사람들도 멀쩡해 보이지만 다 귀신에 들려 있습니다. 조금 화나는 일이 있으면 술을 먹고 난동을 부리는데 인간인지 짐승인지 분간할 수 없는 사람이 많아요. 처음부터 짐승이었어요. 처음부터 귀신들린 자입니다. 남들 앞에서는 점잖은 척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술, 마약에 빠지면 자기 몸이 더 이상 자기 몸이 아닙니다.
다시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부에는 무엇이 있는가? 내부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의 권역입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지배하는 영역이라고 해서 권역인데, 그 안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위반’이 있어요. 예수님은 율법대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만들었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은 자기가 만든 법은 자기가 어길 수가 없어요. 지킬 필요도 없어요. 왜냐? 자기가 만들었다는 자체가 법이기 때문에. 예를 들면, 여기 카메라 부속품이 있는데, 이것을 내가 가지고 왔어요. 내가 카메라 배터리를 가지고 온 것이 잘못입니까? 내가 가지고 온 경우에는 어떤 경우라도 잘못이 아니에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 있지요. 장발장이 빵 한쪽 훔쳐서 5년, 탈옥해서 14년 도합 19년간 감옥살이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늘 이야기합니다. “조카가 굶어서 빵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감은 “법은 법이다.”라는 아주 중요한 말을 해요.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법은 위반이 있어서 법의 가치가 살아나게 되어 있어요.
법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위반을 요구하는 거예요. 율법은 예수님이 만들었지요. 예수님이 법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제시했다는 것은, 사람들은 필히 법의 위반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처음부터 죄인입니다. 로마서 3장에서는 이점을 알리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기가 막힌 것을 알아 챈 거예요.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경과해서 주께서 알게 했지만, 바울은 주님을 만나고 단번에 알았어요. 율법은 우리를 위반자로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작전의 일환이라는 것을. 최초의 법이 뭡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지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선악과를 심어놓은 이유는, 우리가 범법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심어놓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졸지에 인간에서 죄인이 되지요. 인간에서 죄인으로 끌어당기는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내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잡아당기는 거예요. “네가 어딜 도망쳐? 이리 와!” 하면서 우리를 끌고 가십니다. 끌려가서 고백하는 한 마디는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때가 바로 주님의 내부에 도달한 순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에요. 아르바이트 학생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요. 주님이 우리에게 시키신 것은 주님 손에 끌려오도록 시킨 것예요. 예수님 내부에 ‘위반’이 들어있어요. 위반이 있기 위해서 법이 있고, 법의 취지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 외에는 아버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죄인인가 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만 알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알고 있는 아버지를 다른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이 죄에 모든 피조물이 다 해당됩니다. 악마, 타락한 천사는 물론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아들이 알고 있는 아버지의 영광을 예수님이 원하는 자에게 나눠줌으로 모든 세상 일을 마무리 짓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은 인간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입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심으로 모든 것이 완료됩니다.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가?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했습니다. 예수님 외에 죽음에서 부활한 자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40~50년 예수 믿으면 회의가 생겨요. ‘내가 취미생활을 하나 왜 계속 교회 다니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교회 오래 다녀서 장로가 되고 또는 목사가 되기 위함이라면 교회 안 다녀도 됩니다. 목사, 장로 안 해도 되는데 문제는 누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와 닿았다는 자체가 그 사람은 이미 예수님 내부에 있다는 거예요. 마귀에게서 벗어났기에 그런 것이 깨달아지는 겁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난 이 사실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온갖 작전을 폅니다. ‘인간들아, 네가 사는 것이 중요하고 자녀 성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소리를 하면서. 그런데 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지요? 이 대목에 이르면 교회 개척하는 것도, 교회 부흥되는 것도, 선교사 보내는 것도 아무 의미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고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 때문에 바울은 아무리 고생을 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이런 고생을 오히려 상으로 여깁니다.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이 탄생했기 때문이 아니고, 장차 구름타고 오시기 때문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살고자 하는 마음속에 낯선 죽음을 집어넣습니다. 늙어 죽는 것 말고 말씀대로 죽는 죽음이 이 세상에 얼룩을 만듭니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 프랑스 정신과 의사가 쓴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이란 책이 있는데,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고 묻는데, 유럽에서 많이 읽히고 우리나라에서 상당히 많이 팔린 책입니다.
이 작가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한가?’에만 관심이 있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요. ‘행복’에서 ‘행’을 빼면 ‘복’입니다. 이건 한국교회가 찾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복 받습니까?” 늘 여기에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의 행복에 관심을 둘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왜 죽었는가?’ 이것에 대해 언급을 했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고, 율법 외에 한 의를 만들기 위해 죽었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 죽으심이 곧 하나님의 준비된 의라는 것도 로마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왜 뽑았습니까? 사도 바울이 외친 복음 만들기 작업을 위해서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서는 예수님이 무슨 작업을 했는가? “여러분, 율법이 온 것은 하나님의 의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로 한 것이 아니고 뭔가 실재로 작업을 했어요. 그 작업의 일환으로 12제자를 뽑았어요.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의 내용을 외운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2제자는 자기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끌려 왔습니다. 이끌려오지 아니하면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의미 없습니다. 로마서 10장 13절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읽고, 듣고 알면 지식이 생기는데 이것 붙든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끌려가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저의 이런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그렇다면 로마서나 다른 성경에 ‘예수님께 질질 끌려가면 구원을 얻는다.’ 이런 내용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로마서 3장에서는 ‘율법을 준 것은 죄의 저주 아래 있게 하심이다.’ 이런 짧은 문장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그냥 이 문장 외우면 되는 줄 알아요. 성경에 있는 내용을 숙지하면 되는 줄 생각해요.
주님은 성경 말씀을 우리 삶으로 전환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 만들기에 나서는 것입니다. 문자와 언어를 외운다고 해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분이 ‘말씀을 묵상하려면 어떤 환경이 좋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어요. 제가 답하기를 ‘말씀 묵상의 좋은 환경은 월 수입 500~700만원 되면 됩니다.’ 라고 했어요.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믿음을 만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뭘 요구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뭘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냐? 주님이 본인에게 맞춰서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루십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삶이 말씀에 위반된다는 것을 통해서 주님 말씀이 성취된다는 생각은 못하고 자기들이 주님 말씀 순종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목적을 이루려고 애를 썼어요.
대표적인 실수자가 베드로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내가 사람들에게 잡혀 고난 받고 죽을 것이다."라고 하실 때, 베드로가 "마땅히 그러셔야지요."라고 했다면 100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뭐라고 했지요? "그런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내 실패가 아니고 네 실패야!" 예수님이 하시는 일 외에 인간이 스스로 행한 일이 구원에 성공하는 일은 없어요. 왜냐? 예수님 내부에 사람의 위반의 증거물들이 주님의 주 되심의 재료로 들어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깨보면 그 속에 주님을 욕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가 믿었으리요?" 흠모할 만한 것도 없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배반한 그것이 주님 안에 가득 들어있을 때 주님은 주가 되십니다. 세상의 어느 교회가 "여러분, 올해도 복음을 위반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송구영신 예배드리는 것 보셨습니까?
제일 어려운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2015년도 죄인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죄 짓게 되면 죄 값은 저주기 때문에 2015년도 저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는 일 마다 안 되고, 모든 계획 다 깨지고, 온 가족이 다 아프고, 직장에서도 쫓겨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을 때 김치에 식은 밥도 감사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 집에 있는 음식이 뭐냐 하면, 사렙다 과부가 받았던 화수분과 같은 밀가루요, 기름입니다. 우리가 법을 위반하지 않으면 주님이 주로 빛나지 않아요. 주기도문에 나오지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는 그 심정이 어떤 심정이 될 때 '주님 나를 용서해 주세요.' 합니까? 이것은 주께만 범죄했을 때 이런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대한항공 부사장 조00 씨가 처음부터 고개 숙이면서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했으면 아무 문제없어요. 제자들이 성령 받은 후 특징이 뭐냐? 원한, 분노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 속에 자신이 주님께 복수한 증거물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지요. 내 죄가 주님 안에 있어야 거기에서 생명수가 나옵니다.
에스겔 성전에서 물이 나옵니다. 그 성전에서 그냥 물이 나옵니까? 그 성전에서 온전한 제사가 이뤄질 경우에만 성전에서 생명의 물이 나오는 겁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동산에서 네 강이 나옵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서 "이 물은 예수님 십자가 때문에 생긴 물이다."라고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왜냐하면,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보니 달랑 두 나무가 나옵니다. 생명나무, 그리고 선악과. 그래서 어쩌라고? 우리 동네 공원에 나무가 두 개 있으면 거기에서 생명수가 나옵니까?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생명나무와 선악과로 새로운 역시를 개시합니다. 선악과를 통해서 죄인을 만들고, 생명나무를 통해서 범법자로 말미암아 희생되는 기능을 발휘하면서 그 두 개의 나무를 완성시킨 분으로 인격화 되면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거기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옵니다.
이 생명수가 흐른다면 다시 창세기 2장으로 되돌아 가봅시다. 처음부터 아담은 예수님의 혜택을 입었습니까, 안 입었습니까? 입었습니다. 그러면 아담은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야 돼요?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와 먹어도 된다는 생명나무 그 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되는데 마귀가 와서 따먹으나 안 따먹으나 그리스도 이야기는 사라지고 법만 이야기한 거예요.
두 개의 나무가 있고, 아담과 하와가 있고 뱀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 무엇이 빠져 있습니까? 이렇게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있어요. 빠져있는 이상은 아담의 눈에 선악과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것입니다.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눈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후 눈이 밝아져서 자기 모습을 보게 되지요.
사람이 자기 모습을 본다는 것은 나르시시즘입니다. 내가 나를 관리하는 시대에 돌입한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도 내가 나를 관리하는 식으로 내가 예수 믿어서 내가 구원 받겠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복음입니까? 종교지. 12제자 뽑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를 쫓아낸다는 것은 마귀에게서 벗어난 영역에 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왜냐? 귀신은 악마의 하수인이기에. 귀신은 정식 직원이기 때문에 위에 누가 있어요? 상무가 있고, 사장이 있단 말이지요. 말단 직원을 쫓아낸다는 말은 무엇을 잘랐다는 말입니까? 그 위 악마의 능력이 오는 것을 차단시켜놓고 쫓아 낸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내가 귀신을 쫓아내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귀신의 우두머리인 죄의 왕 노릇, 그것이 이미 흔들리기 시작한 거예요. SF영화를 보면, 마지막 모든 것이 무너질 때는 이미지가 점으로 바뀌면서 사라져 버려요. 세상 모든 것이 안개고 이미지에 불과한 거예요.
무지개가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무지개는 보이지 않아요. 파랑새가 하늘을 날 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지만 집에서 키우면 똥 싸고 냄새나는 새일 뿐입니다. 왜 사람들이 헛된 꿈을 꾸는가 하면, 내가 실체인 것처럼 마귀가 일러주기 때문이에요.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안개, 이미지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있는 것 같다가 흐물흐물 사라져버립니다. 나이 80되면 온 몸이 해체되어갑니다. 그 때가 오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하지요. 치매에 걸리면 제 정신이 아닙니다. 정신을 빠짝 차려도 사람을 못 알아봅니다. 정신을 안 차려서 그런 것이 아니고 바짝 차려도 자신은 이미지화 상태에 돌입한 거예요. 두뇌 세포가 제 마음대로 엉키는데 어쩌겠어요?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분간이 안 되는데, 정답은 둘 다 꿈이에요. 아버지를 모르면 다 꿈이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임시방편이지요. 그런데 왜 우리가 있는가? 주님의 주 되심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임시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법은 주께서 만들었기 때문에 예수님만 법에 위반되지 않고 모든 인간은 법에 위반되도록 만든 것입니다. 12제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을 뽑아 귀신 쫓아내고 병 고치게 하는가? 12제자를 실체라고 잘못 가르쳐 왔던 외부 세력이 있어요. 마귀죠. 그래서 주님은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뱀이 인간을 유혹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서 시작합니다. 인간은 못하지만 두 번째 아담, 진짜 인간 되시는 예수님이 뱀을 이기게 됩니다. 이긴 후 그 이긴 결과와 이기지 못한 결과(이 세상이죠)를 이 역사 속에 같이 집어넣어서 예수님 중심으로 분류시키는 작업에 12제자가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12제자의 참여에 있어 모델이 되는 시간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구약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두 번째 시간에서 이스라엘 역사와 12제자를 연관시킬 거예요. 다만 첫째시간에 유념해야 될 것은 12제자들이 인간이 하지 못할 일을 했다는 거예요.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 것 등등.
제자들이 권능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복음을 몰랐어요.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물 위를 걸었는데 예수님께 무슨 소리를 들었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는 말을 들었어요. 이게 선생님이 제자에게 할 말입니까? 요즘 같으면 폭언했다고 선생님이 고발당해요. “우리 선생님이 나보고 사단이라고 했어요.”하면서 교육청에 고발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사단아 물러가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리스도가 온 것은 우리에게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우리를 가지고 예수님 자신의 믿음, 소망, 사랑을 이 땅에서 구축하기 위해 12제자를 뽑아 세웠다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는 그 관계 속에 제자들을 집어넣은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즉 ‘우리’라는 관계망 속에 12제자 및 성령 받은 모든 사람들도 끼어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냥 좋은 곳,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하지요. 이런 사람은 천국이 받아주지 않습니다. 죄인이 천국에 가고 싶다는 것이 용납될 수 없습니다.
주님을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가 용서해 달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용서받는 것이 나를 용서하는 것이면 안 되고 주님의 용서하심에 근거해서 용서를 달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어려운 논리는 두 번째 시간에 생각해 봅시다.
(2015. 1. 7. 09:10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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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강의(2014. 12. 26) 10-2
마가복음 3장 14-19절까지는 12제자 이야기가 나오고, 3장 21-30절까지는 사단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사람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사람들만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른 것을 보십니다. 인간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이 있음을 언급하지요. 주님은 인간 배후에 있는 사단을 향해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둘째 시간에는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적 전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전쟁을 하시지요. 예수님은 너무나 사람 같아요. 보통 사람들에게는 사람 같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 같다고 하면 사람 말고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종류밖에 없기 때문에 비교 대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냐, 사람 아니냐?’ 둘 중 하나이지 사람 같다는 말은 잘 쓰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 같아요. 이 말은 원래 사람이 아닌 분인데 사람이 되셨지요. 그래서 사람 같은 모습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가 뭔가 하면, 시편에서 “인자 같은 이”라는 말이 나와요.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심으로 모든 인간은 제대로 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을 어떻게 하는가? 영적 전쟁은 우리가 못하고, 내부적으로 12제자가 이미 있다면 12제자는 본인들이 영적 전쟁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해야 합니다. 그냥 인간이 영적이 되면 인간과 영적 존재를 직접 대비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나와 같지 않고 초월적 능력이 있으면 그것을 영적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무당이 신 내림을 받으면 영적인 힘을 받았지요.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영적 힘을 받았으니까 인간은 끼어들 수 없고 따로 분류해서 인간이지만 ‘당신은 무당 류에 해당된다.’ 별로 좋게 평가하는 말은 아니지요.
“사람이면 사람처럼 살아야지 저게 뭐야? 귀신이 들려서.” 이건 좋은 평가가 아니지요. 왜냐하면, 비교 대상에서 우리는 여기 있고, 저 사람은 우리와 같지 않으니까 비인간적인 요소지요. 대표적인 것이 로봇입니다. 또는 영화에 나오는 좀비, 외계인. 이런 것들은 인간처럼 생겼지만 인간은 아니지요. 이건 괴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만든 영화에서 이런 것들이 나오는 것은 인간 본연의 모습에서 뭔가 빠져나왔다는 거예요. “요즘 내가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닙니다. 내가 기계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회사에 출근해서 종일 일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쓰러져 자고, 또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가고--” 라면서 인간에서 빠져나온 애정, 기쁨, 즐거움, 행복을 인간처럼 생긴 다른 것에다 대입시키면 그것이 하나의 영화가 되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배우자를 찾고, 친구를 찾을 때 어떤 사람을 찾겠어요? 나에게서 빠져나간 요소를 담고 있는 사람을 찾아요. 이것이 바로 나의 이상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처녀들이 아직도 결혼을 못하고 있어요. 대세가 뭔가 하면 ‘착한 남자’입니다. “내가 성질 부려도 제발 너는 나처럼 성질부리지 마라.”고 하면서 나의 미흡함을 채울 수 있는 배우자를 원합니다.
재혼도 그렇습니다. 재혼이라고 아무 배우자나 만나 결혼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맵니다. 이 시대는 나 스스로 사람이 아니고 하나의 기계임을 자인하는 시대입니다. 식구 5명이 있으면 전부 기계입니다. 제가 지난 번 가훈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지요? ‘학교 가서 공부해서 돈 벌자.’ 얼마나 솔직한지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가족이 5명이면 5명 다 돈 버는 기계로 보는 거예요. 현실도 그렇고.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고 그것 외에는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영적 존재에 대해서 배타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의 잘못은 자신이 귀신 들렸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면 본인이 정당하다면 이 사람을 구원하러 온 사람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같은 자라면 구원시켜주지 못하겠지요.
인간들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구세주 본인이 남들 보기에는 크게 문제가 있는 분으로 보일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비참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 예수님은 ‘대신’하러 오셨는데, 이 말은 한 묶음으로 만드는 거예요. “내 모습은 너를 대신하기 때문에 발생된 사태로서의 모습이다.” 따라서 “네 모습이 진짜 네가 아니고 처참하게 망가진 내 모습이 원래 네 모습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 받았다는 것은 뭔가? 예수님의 비참함 속에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바로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을 해도 사람들은 못 알아들어요. 왜냐? 인간이 스스로 당당하고 정당하다고 여기는 배후에 누가 있다는 거예요.
누구한테 그런 교육을 받았을까요? 그것을 23절에서 ‘사단’이라고 합니다. 악마가 그렇게 한 거예요. 자, 여기서 중요한 문제 던집니다. 악마가 어떻게 생겼어요? 예수님이 악마로 지칭했으니까 실제로 있지요. 물론 현재 철학에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악마가 어떻게 생겼는가?’라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 그런 식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것은 악마가 만든 진리 체계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생겼는가?’로 그 사람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오류고, 이것이 바로 세상에 갇혀 있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했어요. ‘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짐승 세계에서는 보석이 귀하지 않아요. 어린아이한테는 5만원 지폐도 소용없고, 보석도 원치 않습니다. 그냥 맛있는 피자가 더 좋습니다.
따라서 개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보석이지만 사람들이 개와 같은 수준이어서 보석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뒤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얻을 것이라.”고 할 때, 문자적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면, ‘피자, 콜라, 빵 주세요. 구하면 주신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보면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했어요. 성령 받아서 뭣 합니까? 스데반 집사는 성령 받아서 돌에 맞아 죽었어요. 스데반 집사의 부모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자식 키워서 돌에 맞아 죽으면 기분 좋겠어요? 그러니까 “구하라 주실 것이요” 이 말의 뜻은, 성령을 받고 난 뒤에야 제대로 구할 것을 구하고 찾을 것을 찾게 된다는 말이고, 그럴 경우에 구하면 주신다는 말입니다. 결국 성도는 복음대로 모든 것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게 되고, 그럴 때 주께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개, 돼지가 바라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씀에 “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했기에 그 말씀이 우리에게 올 때 우리는 위반자임이 드러납니다. 이 때 비로소 “이런 것을 원하는 것이 내 뜻이지만 내 뜻 말고 아버지 뜻대로 이뤄지기 원합니다.” 이런 기도가 나오지요.
내 뜻과 아버지 뜻을 함께 기도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 성령의 기도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회개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어린 시절 학교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산등성이에 핀 민들레를 보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 때, 걱정과 염려는 없어지고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것만 있지요. 그야말로 동화 세계지요.
동화 세계 속에서의 어른들은 다 훌륭한 분이고 자상하고 인자하지요. 저는 피노키오가 사람이 되고 난 뒤에 서커스에 빠진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얼마나 서커스가 재미있습니까? 재미가 있으니까 학교 끝나고 집으로 오지 않고 서커스 구경하러 갔다가 납치되잖아요. 동화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유지하라는 것인데, 그 아름다움은 어디서 나옵니까? 있음 그 자체가 아름답습니다.
어린아이는 세상의 어두운 면이 보이지 않아요.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입니다. 이럴 때는 자신을 안 바라봐도 되지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저학년 교과서에 보면 “철수야, 놀자. 영희야, 이러 오너라.” 이렇게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책 삽화를 보면 철수와 영희가 뛰노는 장면이 나와요.
그리고 또 아빠, 엄마 이야기도 나오는데, 아빠는 서류가방 들고 양복 입고 출근하고, 엄마는 앞치마 입고 배웅하는 장면의 그림에 나와요. 그 때의 꿈이 뭔가 하면 ‘저런 가정을 이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 때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왜 지금 하는가 하면, 자기를 안 돌아보면 그 아름다움이 유지가 돼요.
그런데 내 나이가 되어 엄마, 아빠가 웃으며 배웅하고, 아들, 딸이 즐거워하며 놀려면 매달 수입이 500만 원 이상이 되어야 가능해요. 인간은 언젠가는 자기를 돌아보게 되어 있고, 돌아보는 순간 꿈은 사라집니다. 왜냐? 경쟁 사회니까요. 내가 사느냐, 네가 사느냐의 싸움이 세상살이입니다.
산비탈의 민들레를 보면서 놀고 있었던 한 시간 동안 집에서 부업을 했으면 수입이 생겼을 거예요. 그러니까 민들레 보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그 시간에 돌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악마는 낭만주의자란 것입니다. 자기 모습 돌아볼 기회를 허락지 않습니다. 지금은 비록 힘들지만 언젠가는 어릴 때 동화의 세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악마는 늘 우리 귀에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형편없지요. 이게 긍정입니까? 예수님은 항상 부정적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아이들은 아름다운 것,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더러운 것은 싫어합니다. 집에 거지가 찾아오면 돌 던지고, 침 뱉어요. 그러니 어린아이의 아름다움은 악한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이 아름답다고 여기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예요. 이 시선을 방해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어릴 때부터 가진 유일한 행복이 이 아름다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걸 건드렸어요. 그 아름다움은 마귀가 쳐 놓은 아름다움의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라고.
매춘부,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인들은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지요. 가정을 파괴하고, 사람 홀려서 술 마시게 하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만약 매춘부 여인에게 아기가 태어났다면 그 아기를 어떻게 키우겠어요? 예뻐하고 엄마의 사랑으로 정성을 쏟아 키울 거예요. 나쁜 여자라고요? 그 가정에 돌아가면 자상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사람은 본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아름답게 보여요. 그런데 이게 문제에요. 그러면 우리가 아름답게 보지 말고 모든 것을 미워할까요?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자기를 미워하라’고 했는데, 미워할까요? 정답은 이것입니다. 사랑도 미움도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에 대해 생각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12제자를 뽑아 세운 이유입니다.
주님은 메시야고 제자들은 뽑혀 나온 자이기에 뽑힌 사람은 본인을 생각할 권리를 발탈당합니다. 자기에 대해 미워하거나 사랑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한 것입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이미지에 불과한 것에 마음 빼앗길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정신을 어디에 팔아야 됩니까? ‘경유’ 뭔가를 거쳐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경유해야 돼요. 선택받았습니까?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경유해야 돼요.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죠. ‘나도 사람이다.’하면 인자를 경유하지 않았어요. 인자를 경유하게 되면 ‘나는 죄인이다.’라고 합니다. 왜? 진짜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100점입니다.
성경을 내가 안다고 덤벼들지 말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보세요. 시편 2편 12절에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고 했어요. 이 말씀을 순수한 12살 소녀에게 알려줬다면 그가 뭐라고 하겠어요? “아저씨, 미워요! 왜 내 아름다운 꿈을 망쳐요?” 이렇게 나올 거예요.
그런데 이 아이가 만약 예수님의 영을 받았다면 어떠했을까요? 우리교회에 10대, 20대 젊은이들이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른들이 다 놀랍니다. 예수님이 어릴 때 성전에서 랍비들과 이야기를 나눴지요. 우리교회에서도 이런 풍경이 벌어져요. 10대, 20대 젊은이들이 어른들과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12살 소녀가 예수님을 알면 그 때는 자신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주님 앞에서 죄인임이 드러나고, 주님과 자신의 관계를 아름답게 보겠지요. “저는 죄입니다.” 주님 앞에서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그런 말씀드렸어요. “제가 하는 모든 것이 죄로 드러난다는 사실에 대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나의 모든 것이 죄가 되기에 내가 나를 관리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의 매니저가 아니고 주님이 나의 매니저입니다. 나는 주님께 속한 자일뿐입니다. 주님이 다 키워주고, 홍보해 주십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과 12제자의 관계입니다. 12제자는 주님에 의해 강제로 끌려와서 본인이 할 일이 없어요. 다만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믿음을 받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무슨 짓을 해도 그 혜택을 입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주님이 관리하기 때문에 마귀가 함부로 할 수 없어요.
27절 봅시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여기서 ‘강한 자’란 인간을 지배하는 마귀를 말하지요. 예수님이 마귀를 강한 자로 봤어요. 제자들보다 마귀가 더 강하지요. 그런데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강한 자보다 더 강한 자가 왔다는 거죠. 그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럼 여기 ‘세간’은 가만히 있으면 되지요. 12제자는 가만히 있으면 돼요. 가만히 있으면 하이-카에서 다 알아서 처리해 줍니다. 동부화제, 삼성화제 보험회사에서 다 해줍니다. ‘더 강한 분이 왔다. 이것을 받아드리면 내가 일을 시작할거고 허락 못하면 일 못한다.’ 이것이 아니고, 이미 일은 개시되었다는 겁니다.
이제 12제자와 이스라엘 12지파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국가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돌출된 나라라는 겁니다. 없는데서 생겼지요. 따라서 이스라엘이 돌출된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린양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벗어났고 홍해도 건넜습니다. 이스라엘이 없는데서 생겼다는 말은 출애굽 했던 밤을 달력의 1월 1일로 칩니다. 시간의 시작이에요.
이스라엘에 출발하는 그 때부터 시간이 시작됩니다. 기존의 달력은 다 소용 없어요. 이스라엘이 시작하는 날이 첫날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생겼어요. 그것은 있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기존에 있던 모든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이것을 지난주일 설교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싱크홀이라고 했어요.
싱크홀이라고 하면 아스팔트에 구멍이 뚫려있는 겁니다. 아스팔트 표면이 0지점이라면, 싱크홀 표면은 -7지점입니다. 그러면 -7지점에서부터 이스라엘이 올라왔단 말이지요. 땅 밑에 있던 것이 올라왔어요. 그러면 이제 깊이가 아니고 표면이 되겠지요. 표면에서 통하는 원리, 원칙이 표면 밑에 있는 깊이에도 적용될까요? 아니면 대치가 될까요? 반대가 되겠지요.
이 표면을 지평이라고 합니다. 평지에서는 같은 원리의 질서가 있겠지요. 그런데 싱크홀은 지평 아닌 다른 깊이에서 나온 것이기에 땅 위의 지평과 서로 맞겠어요? 안 맞지요.
안 맞으니까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영적 전쟁이에요. 영적 전쟁은 어려워요. 어떤 연예인이 신 내림을 받아서 무당이 되었다면, 누구도 무당을 정상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무당은 비정상이라고 보지요. 연예인이 무당이 된 후에 온 가족이 무당 노릇을 반대를 했어요.
반대하면 무당은 어떻게 나오는가? ‘내가 무당 짓을 안 하면 죽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그래서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묵인을 합니다. 어쨌든 무당은 비정상이고 가족은 정상입니다. 무당도 이것을 인정해요. 여기서 사람들은 무당을 영적 존재로 보는 거예요. 이게 바로 틀려먹은 생각입니다. 멀쩡하다는 사람이 무당 이상의 무당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악마에 속한 자입니다.
우리는 무당 아니니까 멀쩡하고 무당이 된 사람을 비정상으로 보지만,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인간들보다 더 비참한 모습으로 오셨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뭐라고 하는가 하면, 22절에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어요.
인간들은 자신이 정상이고 예수님은 비정상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만약 내가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나를 비정상이라고 본 자들이 비정상이다.’라는 겁니다. 주님은 인간 전체를 영적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귀신들리고, 무당이 되었다고 영적이 아니고 멀쩡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의 아비가 마귀가 됩니다.
이런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멀쩡한 것이 귀신 들린 것입니다. 무당은 오히려 솔직하지요. 멀쩡하지 않은 자를 대표해서 티를 낸 거예요. 주께서 티 나는 무당, 귀신을 쫓아냄으로 말미암아 그들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비정상으로 봤던 자들도 다 귀신에 들려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흔히 인간들이 아는 ‘귀신 들렸다. 영적이다. 신령하다.’ 이런 것을 피해서, 그 숲을 헤칩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자기 의, ‘나는 원래 아름다운 사람이었어.’ 꽃보다 사람이 더 아름답다고 가수 안치환이 노래합니다. 이처럼 ‘자기 의’가 충만한 것이 대표적인 귀신 들린 자입니다. 그 아비가 악마입니다.
그러면 성령 받은 것은 뭡니까?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할 때 성령 받은 것입니다. 다윗처럼 ‘모친의 죄 중에 내가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잘 할게요.’라는 말을 할 이유가 없어요. 앞으로 잘하겠다고 하면 또 자기가 자기의 매니저가 되고, 자기 관리를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잘 할게’가 아니라 ‘뭘 해도 감사하겠습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딸이 엎어져서 코뼈가 부러지면, “아이고, 다른 곳은 다치지 않아 다행이다.”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실 네 죄를 생각하면 다 부러져야 하는데 코뼈만 부러져서 감사할 일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당신이 그런 일을 당해 봐라. 그렇게 되는가?’ 라고 하는데, 이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못하니까 감사한 거예요.
감사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됩니다. 안 되는데 되게 하시더란 말이죠. 주께서 지금도 나를 그냥 두지 않고 건드린다는 자체가 감사한 거예요. 나는 순전히 내 자랑만 하고 내 아름다움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게 평생 못 버릴 일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찾아오시니 내가 고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그런 현상이 와버립니다. 이것을 ‘순간’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순간이 전 역사를 지배합니다. 시간의 폭을 만들지 마세요. 폭이 있다고 해서 믿음 좋은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인 것을 노출시키는 그 능력이 복음의 능력인데 이것이 얼마나 지속되는가는 의미 없습니다. 가위로 종이를 자를 때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는 별 의미 없습니다. 종이가 잘렸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예수님께서 강한 자를 묶고 세간을 늑탈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인간은 몽땅 강한 자에게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빼놓고 모두가 갇혀 있는 거예요. 갇혀 있는데 꺼내주는 것이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제 구약 이스라엘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싱크홀에 빠져있던 것이 집단적으로 기어 나왔어요. 이스라엘 되기 위해 히브리인들은 죽음에 합류해야 돼요. 그 죽음은 어린양의 죽음이죠.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거예요. 김 집사님에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양을 죽여서 피를 발라보세요. 옆 집 사람이 피 냄새를 맡고 찾아와서 “아저씨, 뭐 하세요?” “오늘 밤 지나보면 알아요.”
피를 바름으로 우리 집 장자의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미신적이고 광적입니까? 미쳐도 보통 미친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피 바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러나 피 바른 후 장자가 살았을 때 그 장자는 나의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 이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이러나 저라나 내 맞아들은 이제 내 자식이 아니고 이미 죽은 자식이고 하나님의 것이야.”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은 위에 있던 원형이, 하늘에 있는 실루엣이 땅의 기초가 된 거지요. 그것이 ‘얼룩’이잖아요. 제가 중국 문등에 갔을 때 야외에서 하는 쇼를 봤는데 첫날밤 사랑하는 장면이 나와요. 거기에 남자의 그림자와 여자의 그림자가 동침하는 실루엣을 보여줬어요.
아버지가 아들 죽이는 실루엣을 지상에 구체화 시키면 어린양의 피가 뿌려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자체가 본인의 의사나 목적이 용납 안 됩니다.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이스라엘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없는 거예요. 없기 때문에 있어도 없어요.
쉽게 해봅시다. 이 세상에 성도가 있습니까? 성도가 표시가 납니까? 성도는 얼굴이 빨갛다거나, 머리카락이 초록색을 지니고 있습니까? 표시가 나지 않으면 인간 세상에는 없는 거예요. 인간 눈으로 차이가 나야 분류가 되는데 티가 나지 않으면 분류가 되지 않고 그러면 없는 거예요. 성도 본인이 “내가 성도 맞아?”라고 의심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하루에도 여러 번 “나는 성도 아닌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지요.
성도는 없어요. 그런데 행동하는 것이 실루엣, 성도의 모습을 보이도록 주님이 조치를 하지요. 내가 성도의 조치를 하면 100% 가짜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부흥회가 왜 나쁜가 하면 성도처럼 만드는 작업이거든요. 성도 아닌 것을 감추기 위해서 성도되기를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본인의 화장술로 성도이게 만드는 거예요.
하루에 3장 성경 읽으면 성도입니까? 십일조 하면 성도입니까? 착한 일 하고 남에게 구제하면 성도입니까? 성경에 나오는 온갖 일을 다 끄집어내서 자기가 해보는 거예요. 그건 성도 아닙니다. 성도는 하늘의 실루엣이 와야 되기에 인간이 성도 되는 방법은 없어요. 그러니 그냥 사세요. 그냥 막 살면 주께서 성도의 얼룩을 보여줍니다. 하늘 본체의 그림자가 우리의 얼룩이 되지요.
그런데 그 얼룩을 소유하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림자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얼룩이 오면 오고, 가면 가는 것이지 인간이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주님이 굴리면 성도가 되는 겁니다. 나는 죄인이고 모든 공로는 주님께 있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은 주님의 솜씨지 우리의 지각 능력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도 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이걸 이겨내질 못했어요.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잘 나갔어요. 초반에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런데 삶이 안정된 후에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소유하려고 시도했어요. 이스라엘은 무에서 유가 되었잖아요. 그러면 이 유 안에 무가 있어야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위반자로 남아있어야 돼요.
이스라엘이 무에서 유가 되었으면 무로 살아야 하는데 유로 살면 이스라엘을 지켜 내려고 해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등장할 때 원래 없으신 분이 유를 때리고 그 속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냈잖아요. 무 속에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없음은 언약이 찾아오면서 유로 바뀌었어요.
무에서 유로 바뀔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언약의 바탕은 없다는 것을 전제로 언약만 있어야 되는데, 무에서 유가 된 후에 ‘나 여기 있잖아.’가 되면 유가 됩니다. 유가 되면 언약이 떠나버려요. 엘리야가 바알, 아세라 선지자와 850대 1로 싸울 때 날씨가 어떠했습니까? 3년 6개월 비가 오지 않아서 큰 가뭄이 들었지요.
이런 상태는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식량이 바닥이 났어요. 그래서 엘리야도 난민처럼 살았어요.
오늘날 성도들도 난민입니다. 주께서 주시지 아니하면 못 삽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하지요. 얼마나 심각한 난민이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겠어요?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에서 유가 된 후에 이렇게 나왔습니다. “하나님, 이제 내 신앙은 내가 알아서 관리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방 나라와의 전쟁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영적 전쟁이 의미가 없다니까요. 전쟁을 한다는 것은 적이 있다는 말이고, 적이 있다는 것은 언약을 기준으로 해서 적과 아군이 분리되어야 하는데, 내 것을 가지면 주님의 적이 아니고 나의 적이 됩니다. 나의 것을 건드리면 하나님도 나의 적이 됩니다.
‘주신 것을 왜 다시 빼앗습니까?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이렇게 나와요. 욥처럼 “주신 자도 여호와시고 취하신 자도 여호와십니다.” 이렇게 나와야 정상인데, ‘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빼앗으시면 나는 어찌합니까?’ 이렇게 한 것이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입니다.
이스라엘이 12지파지요.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12지파에게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신명기 마지막에 보면 모세가 12지파에게 축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12지파를 축복하는 내용을 혹시 아십니까? 어떤 내용으로 축복하지요? 전부 다 전쟁 도구입니다. 지파 하나하나가 전쟁 도구에요. 요즘 식으로 표현해 보면, “레위는 양면이 날카로운 칼이 되고, 요셉이란 수류탄은 크게 폭발하게 하옵시고” 이런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12지파에 대한 축복은 사적인 소유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적과 싸워서 이기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지파가 모이면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이름도 이스라엘입니다. 싸워야 될 임무와 기능을 가진 나라가 되는 겁니다.
12제자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연장해서 영적 전쟁을 해야 되는데, 절대로 각자는 본인을 소유할 수 없고 주님에 의해 간택되고, 주님에 의해 소유된 사람으로 스스로 자신을 보살 필 이유가 없는 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것이라고 여길 때 주님께 화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이러한 형편을 우리가 스스로 잘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이 주셨다고 여길 때 그것이 영적 전쟁의 무기가 된다는 사실도 아울러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5. 1. 23. 16:3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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