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강-에스겔 40장 5절(새성전취지)150121-이 근호목사
122강-에스겔 40장 5절(새성전취지)150121-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7.51)
122강-에스겔 40장 5절(새성전취지)15012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0장 5절입니다. 구약성경 1215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0:5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면으로 담이 있더라 그 사람의 손에 척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장이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넓이가 더한 자로 육척이라 그 담을 척량하니 두께가 한 장대요 고도 한 장대며.”
에스겔서 40장의 이 대목, 5절뿐만 아니고 6절에, “그가 동향한 문에 이르러 층계에 올라 그 문통을 척량하니.” 계속해서 ‘척량하니’ 또 ‘척량하니’ 그 뒤에 40장 14절, 26절, 41장 1절에도,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에 이르러 그 문벽을 척량하니 이편 두께도 육척이요 저편 두께도 육척이라 두께가 이와 같으며.” 40장, 41장까지 천사가 측량을 하고 측량된 그 결과에 대해서 에스겔에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걸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면 좋습니까?” 저에게 물으면, 해석하지 마세요. 왜 이걸 해석하지 말아야 되느냐 하면, 이 에스겔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이 성전 자체가 우리의 해석실패에 대한 결과물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해석하는 것, 이해해서 하나님과 엮어 보려고, 하나님과 교류해보려고 시도한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났다는 증거가 천사가 일방적으로 만든 성전을 일방적으로 측량하는 일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40장, 41장을 통해서 뭘 알면 되느냐 하면, ‘아, 이래서 우리가 실패자구나.’ 이것만 받아들이면 해석 끝났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하고 우리가 행하지도 못한 것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뭔가 일을 만들었다는 것은, “나는 너하고 안 놀아. 나는 너하고 일을 같이 안 해.” 그런 뜻이거든요.
왜 일을 안 하는가? 우리는 실패자기 때문에 우리하고 일을 안 합니다.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하나님 일 한다고 나대지 마세요. 우리를 애초부터 실패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하나님 일을 우리가 못합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선교 백날 해도 그것이 선교도 아니고 봉사해도 봉사가 아니고 설쳐도 설치는 것은 맞는데 주의 일은 아니에요. 누가 하나 설쳐가지고 동영상 잘 나왔지요? 참 잘 나왔어요. 그러나 그거 한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니까.
에스겔 40장에서 언급하는 것, 우리의 실패함을 안다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최고의 기쁨이란,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지레짐작 미리 알아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게 없고 우리가 뭔가 고민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일을 다 완료를 시켜놓았다는 것, 완성을 시켜놓아 버렸어요. 우리는 완성된 성전을 바라보면서 늘 부끄럽고, 황송스럽고, 과분하고, 감사하고, 고맙고, 그럴 따름이지요. 이게 바로 에스겔 40장, 41장에 나온 측량하는 겁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내가 측량할게. 너는 구경해라” “알았습니다.” 측량하면서 치수 얼마? 6척! 3척! 측량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안했는데. 저건 내가 할 수 없었는데. 내가 할 줄도 몰랐는데. 내가 생각지도 못한 건데.’ 그런 식으로 우리 앞에 보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성전이라는 형식을 왜 우리에게, 다른 것 보여줘도 되는데 다른 것을 하나님이 하셔도 우리는 못한다는 것을 아는데 하필이면 성전측량을 통해서 우리는 실패자고 우리는 주의 일을 못한다고 그런 조로 하나님께서 일을 하셨는가? 우리가 실패하는 모델로서 왜 성전건축을 내미시는가?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 성전이 우리한테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성전이 필요 없어요. 옛날 성을 쌓을 때, 지금도 유럽에 가보면 있습니다만 성에 첨탑이 있지요. 그 탑은 뭐냐 하면, 그 마을에 적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대비해서 멀리까지 볼 수 있도록 탑을 세우는 거지요. 마을에 성을 쌓을 때 높이 탑을 쌓는 것은 감시용도로 하는 것처럼 세상 모든 건축물이나 인간이 하는 것은 다 용도가 있어요. 용도가 있는데 에스겔 40장, 41장의 이 성전은 인간에게 하등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생활을 꾸려나가고 자기 생존하는데 있어서 이 성전은 아무짝에도 소용 없습니다. 이 말은 뭐냐? 인간은 기본적으로 내 생존에 필요한 것만 원하지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실패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놓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피조물 되기를 원하는데 우리는 사고방식이 내가 원하면 움직이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고 움직일 그런 타입이 아닙니다.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성전을 들이민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한 없이 부끄럽게 만듭니다. ‘아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내가 꼭 필요하고 내가 꼭 원한 그 일이 아니고 그걸 완전히 도외시하고 배제하고 정말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만 하시고 그 일을 마감하는구나.’ 이걸 알아야 돼요.
따라서 하나님을 내편으로 끌어당길 생각하지 말고 ‘왜 나는 하나님 곁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가?’ 그 이유가 뭐냐?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내 필요한 것만 챙기기 때문에 정작 하나님이 필요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연결할 수 있는 방법 그 자체가 성립이 안 되지요. 그래서 이 성전이라 할 때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이 에스겔 40장, 41장이 남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성전 만들었다. 성전 만들어도 우리 동네 슈퍼마켓 하나 생긴 것만 못하네. 슈퍼마켓은 생필품 구입하는데 필요한데 성전 그 딴 것이 어디에 쓸데가 있다고 만드는가?” 그 말이지요. 참 하나님도 비싼 돈 들여서 그렇게 거대한 걸 만드는데 그 길이가 260미터에요. 이쪽이 260, 이쪽이 260이에요. 계산해보니까 1만6천 평이에요.
1만 6천 평에 방이 한 60개 될 걸요. 바깥뜰이 있고 그 뜰에서 계단 일곱 개 올라가면 거기 안 뜰이 있고 안 뜰에 가게 되면 거기에 성소, 지성소, 본격적인 건물이 있어요. 바깥에는 담이 있는데 오늘 본문 5절에 보니까 그 담이 6척이라 해서 3.2미터에요. 두께 3.3미터, 높이 3.2미터. 교도소 담 보다는 좀 낮은 것 같고 두께는 더 두꺼운 것 같고. 그런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담에 출입구가 세 개 있는데 서쪽은 출입구가 없고 동쪽과 북쪽과 남쪽. 서쪽은 막혀 있어요. 서쪽은 지성소 쪽이라 막혀 있는 것이고 출입구는 동, 남, 북,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출입구마다 문지기 방이라 해서 방이 여섯 개가 있어요. 그 방의 크기는 한 평 정도인데 좀 답답하지요? 그 한 평정도의 방이 여섯 개가 있어요. 동문 들어가는데 방이 여섯 개가 있고 남문으로 들어가는데 방이 여섯 개가 있고 북쪽에 방이 여섯 개가 있고,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뜰이 있고 뜰에는 제단이 있겠지요. 안뜰에는 제단이 있어서 제사장이 활동하는데 이러한 이야기를 보게 되면 마치 제사장이 거기서 움직이고 활동하고 양 잡고 소 잡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보이는데 그게 인간이 만들지를 않은 거예요.
그러면 그러한 모든 장치들, 번제 단 같은 것은 없어요, 없는데 어쨌든 간에 건물은 있으니까, 사람은 보이지 않고 건물만 덜렁 있다는 그 말이지요. 옛날 성전 같으면 거기 제사장이 있어서 활동을 해야 하는데 활동할 수 있도록 해 놓고는 어떤 활동도 마감이 되고 말았어요. 벌써 일이 끝났어요. 장이 끝나는 것을 파장이라 하잖아요. 파장분위기에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이 새 성전을 왜 인간에게 보여줍니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돼요. “왜 이 새 성전을 인간에게 보여줍니까?” 하나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너는 이것이 왜 담이 되는지, 이것이 담이 될 수밖에 없는 그 질문을 네가 할 줄을 모른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새 성전을 답으로 내놨는데 이 답과 연결되는 질문을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나 생각이 우리한테 떠오르지 않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떤 남녀가 결혼 준비를 하는데 여자 쪽은 남자한테 기대를 많이 해요. 웨딩드레스도 맞춰야 되고, 예식장도 맞춰야 되고, 신혼여행도 가야 되고, 다 해야 되는데 막상 남자를 만나면 “밥 먹었나? 그럼 나중에 만나자.” 그냥 헤어져 버리는 거예요. 아무 준비가 없어요. 아무 준비가. 결혼식의 아무 준비가 없어요.
그래서 답답해서 여자가 물었어요. 아무 준비도 없는 채로 결혼식이 이틀 남았는데 물었어요. “우리 이래서 결혼하는 것이 맞나?” “맞다.” “어디서 하는데?” “집에서.” “웨딩드레스는?” “드레스는 뭐가 필요해? 그냥 입던 옷 입고 하지.” “반지는?” “꽃반지라도 하나 해줄까? 들꽃이라도 꺾어서?” 그러면 여자가 기겁을 하지요. “이건 아니지.” 남자가 하는 말이, “내가 꽃반지 만들어주는 결혼식이라는 것을 네가 나에게 질문이라도 한 적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너는 네 생각만 한 거예요. 너는 네 생각만 하고 남자는 남자 결혼식 따로 준비한 겁니다. 이게 생각이 안 맞는 거예요.
그 안 맞음의 극치를 오늘 40장, 41장에서 천사가 일방적으로 줄로 재버리는 거예요. 끝났다. 파장이라는 거예요. 완료, 이게 하나님 일의 완료가 된다는 그 말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에서 내려갈 때에, 전에 강의할 때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내려갈 때 예수님이 나타났잖아요. 그런데 그 대목을 한 번 보세요. 참 희한한 대목이에요. 사울 혼자 내려간 것이 아니고 몇 명의 일행과 함께 내려갔거든요. 생물적으로 따져서 사울도 공기 마시고, 물 마시고, 사람이고, 다른 일행도 공기 마시고, 물마시고, 사람이고, 체중도 비슷하고, 옷도 같은 옷이고, 누가 봐도 다 같은 사람인데 예수님이 이야기한 것이 사울에게만 들렸고 다른 사람한테는 천둥소리로 들린 거예요.
지금의 이비인후과 의사 같으면 그 귀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조사를 하든지 해야 돼요. 귀가 다른가? 사울은 예수님을 봤거든요. 눈을 조사하면 되겠어요? 귀나 눈 어떤 것을 조사해도 사울이 들었던 그 음성을 다른 사람이 왜 못 들었는지의 이유가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게 희한한 거예요. 제가 정답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감질나게 할 것이 아니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답이 뭐냐 하면, ‘사울이 어떻다’가 아니라 ‘사울은 어떻게 알아들었다, 혹은 사울은 이래서 못 알아들었다.’가 아니라 예수님 기준에 맞춰서 사울을 새로운 사울로 변경시킨 거예요. 원인이 주님 쪽에 있었던 겁니다. 사울이 원인이 아니고, 알아들은 사울이 어떤 솜씨를 발휘하고 기도를 바짝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가 생각한 그 틀에 맞춤, 딱 맞추도록 사울을 이용한 겁니다. 구원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겁니다.
내가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믿게 하셔서 구원시키는 거예요. 믿게 하실 때 그 원인을 나한테 찾으면 안돼요. 기도를 바짝 했다, 금식을 했다, 백날 따라 해보세요. 한쪽은 지옥가고 한쪽은 천당 가지. 천사가 측량을 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행함이 마감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끝난 거예요. 왜 성전을 보여주느냐? 이미 성전은 멸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만든 성전은 멸망하거든요.
그래서 에스겔 그 당시의 생각들은 ‘성전이라도 무너진다. 불탄다.’ 그겁니다. 주님의 뜻은 뭐냐? 성전은 절대로 불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불탔습니까? 가짜거든. 그게 인간이 만든 거거든요. 인간이 만든 것은 왜 불탑니까? 인간이 문제거든요. 인간자체가 문제거든요. 우리 자체가 문제거든요. 이 40장, 41장을 해석을 해서 구원받고자 하는 내가 문제에요.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40장, 41장은.
설교 처음부터 다시 가봅시다. 이 40장, 41장을 보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실패했음을 만끽하면 되는 겁니다. 실패했음을 만끽하면 돼요. 주님은 우리 앞에서 약을 올리고 있습니다. “성전이 무너졌지?” “예, 무너졌습니다.” “내가 만든 성전은 이렇게 안무너졌지롱!” 안 무너졌다는 거예요. 무너지지를 않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간이 어쩔 수없이 자기 자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요.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라는 게 얼마나 허약합니까? 피곤합니까? 감기 들지요? 아무 일도 할 수 없잖아요.
이 말은 곧 자기 몸도 자기가 가누지를 못해요. 자기 몸을 감당을 못해요. 자기 몸도 감당 못하면서 무슨 주의 일을 한단 말입니까? 자기 주제파악도 못하면서. 그래도 인간들은 기껏 믿을게 뭐냐 하면, 무너지고 피곤하고 감당 안 되도록 아프고, 그래도 믿을 것은 자기밖에 없어요. 피곤한 이 몸으로도 일어나서 청소하고 밥하고, 믿을 것은 이것밖에 없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 평소에 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힘든 자신을 다시 용기를 줘서 일으키려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일이 사실은 본인도 헉헉거리면서 하는 거예요. 헉헉거리면서 내심은 또 하나님 앞에 복 받고 성공하기를 기대하지요.
주께서 경상도 말로 이렇게 합니다. “치아라!” ‘그만 치워버려라. 인생 그렇게 몇 년 더 살면 뭐하나. 치워버려라.’ 그 말입니다. 줄곧 자기만 믿고 자기만 의지하고 자기만 기대한다면 인생 걷어치우라는 말이지요. 살아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말고 주위의 다른 사람을 보세요. 그 사람들 살아가는 것을 보세요. 기대할만한 것이 있습니까? 자기 몸 하나 감당 못해서 헥헥헥헥, 그렇게 살아갑니다. 나이 많은 사람은 몸 약해서 푹푹 쓰러져 눕고 젊은 사람들은 천지 분간 못하고 IS 가입해서 순교자 되겠답시고 터키까지 가고, 이것은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성전에서 천사가 이미 완료의 치수를 잰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성전은 실패로 끝났다는 겁니다. 인간이 실패로 끝났다는 말은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는데 실패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될 거야’ 하는 거기에 늘 합치되지 못하고 거기에 미흡하다는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것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혼자서 거룩하고 혼자서 잘났고 우리는 못났고, 그럴 것 같으면 성전 보여주지 말지, 너는 너대로 살다 죽어라, 하면 그만이지 왜 성전을 보여줍니까?’라는 질문을 이 성전이 유도하게 돼요.
“예, 우린 못났습니다. 이 성전 우리가 안 지었습니다. 주께서 혼자만 잘나서 잘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우리가 지금 못 지은 성전가지고 약 올리기 하십니까? 왜 이 성전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까?”라고 물을 때 여기서 우리는 알아야 돼요. 중보자가 뭐냐 하는 겁니다. 도대체 중보자가 왜 필요하냐는 말이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중보자는 없어요. 하나님에게 필요한 중보자가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가 원하는 식대로 세상이 돌아가기를 원해서 중보자를 넙죽 잡지요. “나는 당신을 중보자로 인정하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 할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피한 것이 아니고 좋은 분 왔다고, 정말 우리 마음에 합한 분이 왔다고 임금 삼고자 해서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계속해서 찾아서 따라와요. 누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 예수, 찾는 것이 그러한 의도와 일치돼요. 나한테 필요한 분이 예수라는 거예요. 나한테 필요한 분.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을 봐도 오해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한테 필요한 분, 저분은 우리한테 필요한 분.
우리한테 필요한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에게 필요한 겁니다. 중보자가. “우리한테 필요하지 않은데 왜 왔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면 안돼요. 하나님께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한테 온 거예요. 그 말은 뭐냐? 실패한 우리가 하나님한테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실패한 우리가. 성공한 우리는 필요 없어요. 성공은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성공한 인간치고 지옥 안간 인간 없어요. 이것은 공식이에요. 방정식의 공식이에요. 성공한 인간치고 천국 간 사람이 없다니까요? 이래도 성공을 원하십니까? 넓은 길 가가지고 천국 간사람 없어요. 좁은 길로 가야 천국가지요.
젊은 분들은 잘 모르겠는데 사람이, 성도가 실패해보세요. 그 때만큼 자기가 성도되었음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경우가 없어요. 실패했을 때 ‘아, 정말 내가 성도 맞구나.’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공하게 되면 이제는 성도고 뭐고 없어요. 자기가 잘났어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왜 하나님이 일을 그렇게 하느냐 하면, 뭔가 일이 성공적으로 되어버리면 하나님이 나를 위한 하나님을 변경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가짜 하나님, 우상하나님으로 휙 달라져 버려요. 그런데 내가 실패했다는 말은 ‘아,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구나. 바보같이 또 잊었어, 또 잊었어. 또 잊어버렸어.’ 하나님을 위한 내가 되어야 하는데 나를 위한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는 하나님인데 우리는 진짜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이익을 얻어내느냐가 중요하다 보니까 ‘나를 위한 예수, 나를 위한 하나님’을 꼭 붙들고 있는 거예요.
붙들어 봐야 자고 일어나면 인형 붙들고 있고 귀신 붙들고 있는 거예요. “으악, 무서워라.” 전설의 고향 보면 그래요. 자기 남편인줄 알고 손잡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허수아비나 이런 것을 붙잡고 있을 때, 심약한 아이들이나 임산부는 전설의 고향 못 봐요. 가슴이 털컥 내려앉아요. 너무 무서워서. 그런데 우리는 그것 보면서 무서워하면서 본인은 늘 무서운 짓을 계속 하고 있어요. 있지도 않은 예수를 짚으로, 인형으로 만들어서 손에 손잡고 “주여, 오늘도 도와주시옵소서.” 뭘? 뭘 도와주는데? 전설의 고향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어요.
성경 어렵지 않습니다. 천사가 하나님이 만든 완료된 성전을 측량하면서 “어때? 괜찮지?” 지금 이러고 있다니까요. 우리는 “저렇게 될 걸 가지고 쓸데없이 우리가 성전 만든다고 웃겨, 웃겨.” 지금 그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하면 돼요, 그렇게. 그 성전은 이미 성전이 실패한 것을 감안해서 하나님이 만든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전에 공간적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실패한 사람이에요.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은 성전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삶의 목적은 현재 이 땅에서 뭔가 잘난 사람이 되고 이 땅에서 생존이 보장받기를 원하지요.
이제 어렵지만 그 이야기를 해야 되겠습니다. 주님의 성전이 이 세상에 따로 공간 없는 공간으로 등장했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부터 떠돌이생활을 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에요. 나그네 생활을 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너희가 각 나라 흩어져도 네가 있는 곳을 네가 성전이라고 생각 안 할 것이니까, 하나님이 만든 성전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할 거니까 네가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곳에서 성전 만들 생각을 아예 안하는 그것이 오히려 너한테 편하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가? 이제 오늘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 나왔는데 이렇습니다. 프로이트라는 정신분석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엄마가 집에 있다가 장에 갔어요. 애는 집에서 놀고 있는데 심심하니까 어떤 놀이를 하느냐 하면, 실패(실감아 놓은)를 가지고 놀아요. 실패를 툭 던져요. 실은 쥐고 실패만 던진 뒤에 실을 잡아당기면 실패가 다시 자기 앞으로 되돌아오겠지요. 툭 던지면서 “아!” 하고 던지고 다시 잡아당기면서 “오!” 하고 잡아당기고. 아와 오, 아!(엄마 없어) 오!(엄마가 다시 장보고 오는 거야.) 엄마 없어, 다시 오는 거야. 이게 하나의 놀이고 게임이 되는 겁니다.
거기서 프로이트는 인간의 언어가 그렇게 만들어진다고 한 거예요. 언어란 개인의 심정과 마음을 담아서 언어에 표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건축을 한다는 것, 하나님이 무슨 집이 필요하겠습니까?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사무엘하 7장에 나오거든요. 이 땅에 하나님이 거주할 건축물은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과 접촉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언어를 만드는 겁니다. 인간들이 평소에 사용했던 그 언어, 건축구조, 측량, 치수, 이거 전부 다 인간세계에서 활용이 되었던 거예요. 그걸 사용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언어를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객관화한다는 거예요. 객관화. 하나님의 주관이 바깥으로 드러나도록 객관화 하는 거예요.
“목사님, 그 뜻이 무슨 뜻입니까?” 이런 뜻이에요. 온 세상이란 하나님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이 관여합니다. 다만 어디에 초점을 모으는가? 새성전이 있음을 알려주는 식으로 온 세상의 모든 일을 관장하고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관여하지요.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까지 세시면서 하지요. 그런데 아까 말한 다메섹에 내려가는 사울, 똑같은 말을 예수님이 이야기했어요. “사울아, 사울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분명히 언급을 했거든요.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해서 자기의 상징화, 자기언어로 했습니다. 그런데 같이 가는 일행은 그것을 못 알아들어요. 알아듣지를 못하는데 놀라운 사실은 사울은 그 소리를 알아들었다는 겁니다. 어느 게 이상할까요? 어느 게 신기합니까?
이 질문을 다시 하겠어요. 에스겔 40장, 41장에 나오는 이 성전측량, 천사가, 사람이 아닙니다, 이게 중요해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측량을 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역사가 마감된 거예요. ‘아직’이라고 여겼던 것이 주님한테는 ‘이미’가 된 겁니다. 이미 성전이 만들어졌어요. 이걸 보면서 ‘아, 우리가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성공하시네.’라고 알아보는 사람이 신기합니까, 아니면 ‘이 성전 치수가 나오는데 우리가 한 번 만들어볼까?’하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그 사람들이 정상일까요?
이것은 우리보고 만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성전 없습니다. 만 6천 평짜리 성전 없어요. 넓이가 가로 세로 260미터의 엄청난 성전은 없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성전도 그 넓이 아니에요. 더 간단하게 말해서 이 성전 없습니다. 어디에?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말합니다. “없어야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없어야 됩니다. 왜? 우리는 당연히 없어져야 될 실패자기 때문에. 실패자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면 이 성전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의 언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이 성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진짜 현실입니다. 이해 못하면 다시 할게요. 다메섹에 내려가는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했을 때 사울이 장님이 되었거든요. 그 옆에 함께 가던 일행이 “사울아! 주님이 뭐라고 하시던데?” “주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더라.” “난 못 들었는데?” 그러니 이 측량이라는 게 뭐냐 하면, 이게 경계라니까요, 경계. 너하고 들을 만한 사람에게는 들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안 들리는 거예요.
지금 세상이 어떻게 하든 간에 이 세상전체가 하나님의 새성전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움직임, 전쟁, 선박, 차량, 병원에 새 환자가 들어오는 것, 아파트에 불나는 것, 이 모든 것이 새성전과 관련된 것이라고 알아먹는 사람, 그 사람은 사울과 같이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왜 세상은 이렇게 있습니까?” 물으면 그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내가 실패자고 네가 실패자고 세상 자체가 실패자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금 이 세상을 이끌고 가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에스겔 40장의 이 성전과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새로운 성전과 비교해보면 통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성령 안에서 하나의 성전이 되어간다고 할 때 그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집회를 했습니까? 아닙니다. 각자각자 흩어져서, 그리고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상관없이 그들은 각자 자기 지점에서 자기 평소의 하던 일을 해요. 그런데 성령 안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왜? 그들은 그 자리에서, 나는 실패해도 주님은 성전 되는데 성공했음을 생각하면서 자기 일에 종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하나가 사울이에요. 예수님의 계시를 받았던 사울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의 새성전입니다. 성전의 치수가 이런 식으로 죽 진행되어 가면서 다음시간에는 성전의 치수에 좀 더 깊이 나아갑니다. 깊이 들어가 보면 뭔가에 접근하고 있어요. 미리 말씀드리면 어디로 접근하느냐? 출입구부터 해서 바깥뜰, 안뜰, 점점 더 접근해서 지성소까지 가는데 그 안에 뭐 있느냐 하면, 우리의 모든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덕분으로, 그 피의 희생에서 나오는 은혜 덕분으로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면 우리는 성령 받아서 내가 실패자인 것을, 실패자 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그것을 느끼는 그것마저도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새성전은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어요. 새성전. 그렇다면 우리 할 일은 이제 하나밖에 없습니다. 왜 새성전이 답인지를 질문으로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깨달아야 될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이미 완료된 그 새성전이 있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가 실패자임을 오히려 감사합니다. 저희들 성공하려고 했기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습니까? 이제는 무거운 짐을 다 놓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22강-에스겔 40장 5절(새성전취지)150121-이 근호목사.hwp (64.0K), Down: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