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5장21(악)141204a-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 5장21(악)141204a-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요한복음 5장21(악)141204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5장 21절부터 해봅시다. 여기 요한복음 5장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 이렇게 죽 나오잖아요.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22절에 심판이란 말이 나오죠. 그 다음에 24절에 보면 믿는 자는 뭘 얻겠고? 영생 얻고 안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고, 죽 나온다 말이죠. 그러면 심판, 그리고 살린다. 그리고 영생,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어떤 경우에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 세상 끝이 다 끝난 시점을 미리 당겨서 아는 사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심판자이거든”라고 말한 것은 이미 심판이 끝난 그 지점에 여전히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경우는 이 말이 맞아요. “한번 심판 해볼까? 한번 영생 줘볼까?” 지금 중간 과정에서는 이건 해당이 안 됩니다. 내일 되면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끝에 다 가신 분으로서 이미 세상 궂을 보면 돼요. 그걸 요지경이라 하죠. 세상은 무슨 속이다? 요지경 속이다. 세상은 요지경 속이라 하죠. 이걸 하나의 둥근 구술로 보자 말이죠. 점쟁이들이 점 칠 때 둥근 구술로 하는데 구술 자체가 이게 뭐가 있느냐 하면 한계가 있어요. 이게 갇혀 있잖아요. 이 구술 안에 있는 모든 변화들은 갇혀 있죠. 요 구술 밖에서 예수님께서 이걸 쳐다보신다면 이 안에 있는 우리가 아는 모든 시간적인 흐름 같은 것은 의미 없어요.
창세전부터 택한 자, 이래 나오면 뭐, 주께서는 이미 다 아시면서 뭘 언급하느냐 하면 심판을 언급하고 영생을 언급하거든요. 그러면 이 안에 들어있는 우리는 심판과 영생을 나름대로의 이 개념을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의 영생,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통용하는 그런 개념의 심판으로 이걸 받아들이면 제 뜻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이건 보나마나 엉터리죠. 엉터리잖아요.
유치원 애들 보게 되면 ‘너 커서 뭐 할래?’ 하면 “나 유치원 선생님 할래요.‘ 이런 애들이 많이 있어요.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하면 ”유치원 선생님이 제일 예뻐요.’ 하는 애들이 많다 말이죠. 그런데 그 애들은 어디에 갇혀 있는 거예요? 유치원에 갇혀 있죠. 바깥에 전쟁 있는 것도 모르고 바깥에 훨씬 잘 나고 예쁜 사람이 있는 걸 모르고 아침, 저녁마다 선생님만 보니까 선생님이 제일 친절하고 선생님이 제일 착하고, 선생님이 제일 예쁘고, 선생님은 화장실도 안 가고 선생님은 아침이슬만 먹고 사는 것 같다 말이죠. 밥도 안 먹고. 어떻게 선생님이 자장면을 먹어요? 그 시커먼 걸. 아주 곱게 잡수고, 이런 생각하죠. 그 세계가 전부가 아니다 말이죠.
한번 물어볼게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심판이 뭐고 영생은 뭐에요? 우리 인간들이 유치원 애들이라고 봅시다. 그럼 인간들이 생각하는 영생은 뭐겠습니까? 그걸 불멸성이라 해요. 길게 이어져 가는 것. 안 죽고 이어져 가는 거죠. 우리들이 보통 그걸 영생이라고 생각해요. 그냥 길게 오래 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엿가락을 길게 잡아당기면 그게 소시지 되는 겁니까? 아무리 엿가락을 길게 당겨도 소시지 안 되죠. 맨 엿이잖아요. 자전거 빨리 달리면 비행기 돼요? 자전거 달려도 자전거잖아요. 같은 질을 백날 살아도 나이가 천년 만 년 살아봐야 동방사기밖에 더 돼요? 딴 인간 되는 건 아니죠?
성경에서는 그걸 아담에 속했다. 아담에 속한 게 천년 만 년 살들 그게 아담에 속하지 않겠습니까? 맨 아담에 속하겠죠. 천년 만 년 산들 그게 영생입니까? 영생 아니죠. 영생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생은 전~혀 달라요. 그런데 사람은 뭔가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물만 마시면 다시 청춘으로 되돌아가는데 그 청춘 되돌아가봐야 맨 똑같은 인간이 젊어지는 것 뿐 이예요. 그렇죠?
만약에 날 때부터 얼굴에서 이마가 넓어서 커서도 그게 불만이라는 사람에게 청춘을 돌려주면 어떻게 됩니까? 무슨 신기한 샘물을 먹고 돌려보면 어떻게 돼요? 역시 이마가 넓은 아기가 되겠죠. 그게 본인이 만족스러워요? 제발 다른 인간이 됐으면 좋겠죠.
다른 인간 되는 거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심판 받으세요. 다른 인간 되려면 기존의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 바꾸어주시는 분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뭐라고 심판받느냐 하면 “너는 죄지었기 때문에 너는 죽어 없어져도 마땅함”을 수용을 해주면 바꿀 수가 있어요. 수용을 하게 되면. 심판 하신 분이 쉽게 말해서 심판 받는 분에게 미리 땅겨서 심판 받으면 돼요. 땅겨서!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6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같이 죽지 아니하면 살 길이 없다.”는 겁니다. 누구와 함께? 혼자 자살하면 돼요? 아니에요. 같이 죽지 아니하면, 누구하고? 주와 함께 같이 죽지 않으면 다른 인간이 안 돼요. 인간 자체가 아담에서 새로운 아담으로, 그리스도란 아담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새롭다는 말이 나왔는데 사람은 굉장히 새로운 걸 좋아해요. 새 집, 새 차, 새 옷, 새로운 가구, 새로운 걸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이 좋아한다는 게 만약에 내가 새로운 자동차를 얻고 싶다 할 때 여기 새롭다 하는, 이게 약간 어려운 건데 한번 들어보세요. 이 차가 나한테 새롭다고 할 때 이것이 새롭다고 느끼는 그 생각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늘에서 나온 게 아니고 어디서 나왔어요? 내 머리 속에서 나왔죠. ‘아이쿠, 이 구닥다리 이 옛날 거. 이거 말고 새 차 없어?’라고 할 때 새 차는 기존의 옛 것과 새 것이라는 그 구분을 누가 먼저 하고 있었습니까? 내가 먼저 갖고 있었죠. 내가 먼저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새 차를 사도 남한테는 별로 안 좋은데 나한테는 좋은 거예요.
예를 들면 전에 우리가 리오를 탔거든요. 리오를 탔는데 올해 여름부터 뭘 타느냐 하면 소울을 탔어요. 소울을 타는데 맨 중고입니다. 누가 줬는데 우리는 새 차에요. 새 차지만 BMW 갖고 있는 사람한테 이거 타라면 타겠습니까? ‘아이 씨, 그게 무슨 새 차고?’ 1 키로미터라도 안타야 새 차지, (어서 오세요) 우리 가락 공부가 항상 늦게 오시는 분이 있기 때문에 항상 강의 앞부분을 새로 해요. 새로 하게 되면 이 강의 듣는 사람은 복습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자, 지금 요한복음 5장을 하고 있는데 요한복음 5장의 내용이 보니까 거기에 영생이란 말이 나오더란 말이죠. 요한복음 5장 24절에 영생이 나오거든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뭘 얻었고? ”영생을 얻었고“라는 말을 할 때 지금 영생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어요. 영생에 대해서 할 때 이 영생이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영생은 뭐냐 무조건 오래 사는 거죠. 그럴 때 제가 무슨 이야기 했느냐 하면 엿가락을 길게 늘어뜨리면 엿이 되겠습니까? 소시지 되겠습니까? 맨 엿이죠. 그러니까 아무리 길어도 질 적으로 바뀌어요? 안 바뀌어요? 안 바뀌죠. 안 바뀌는데 이게 무슨 영생 이예요? 오래 사는 거지. 안 죽고 오래 사는 거죠.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영생나무 따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게 선악을 아는 채로 계속 오래 가는 거예요. 그러면 계속 저주를 받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에 이런 난리가 어디 있어요? 그런 비극이 어디 있어요? 오래 사는 게 비극 이예요. 오래 안 살아도 돼요. 같은 질 오래 살아버리면 점점 자기한테 실망 느낍니다. 연세 많은 사람들 절대로 사진 찍지 말라 합니다. 나이 80돼서 셀카 봉 사는 사람 봤습니까? 안사죠. 왜, 남이 찍어도 안 찍는데 자기가 혼자서 찍을 리가 있습니까? 셀카 봉으로 찍을 리가 없잖아요. 셀카 봉은 20대가 찍어요. 한창 꽃 필 때, 그때 그걸 기념하고 두고 싶어서 찍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점점 더 늙어갑니다. 아무리 인간이 몸부림치고 아무리 세상이 내 맘대로 살았더라고 아프고 늙고 죽는 이것은 몸부림쳐도 빠져나올 수 없어요. 이건희 회장 보세요. 아직도 지금 코배기 안 보이고 있습니다. 이게 뭐에요? 돈이 수십 조 전 세계 80 몇 등의 부자? 그런데 돈은 제 맘대로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자기가 젊어지는 거, 이것은 자기 맘대로 안 되잖아요. 몰라, 미스터 백 같으면 모르지만. 34살인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건 드라마에서나 하는 이야기고.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영생이라 하는 것은 결국 오래 사는 거거든요. 그러면 주님이 생각하는 영생은 그게 아니고 질적으로 바뀌어져야 돼요. 어떻게? 천국 가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천국 갈 사람으로. 그러니까 엿가락이 소시지로 바뀌든지 뭐로 바뀌어야 돼요. 바뀌는데 뭐로 바뀌어야 돼요? 천국에서 살 수 있는 분으로 바뀌어야 되거든요.
그러면 천국에는 누가 삽니까? 예수님밖에 없잖아요. 천국에서 살기에 합당한 분은 인간 가운데 예수님밖에 없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질로 바뀌어져야 되는 거예요. 바뀌는 방법이 뭐냐 하면 바뀌는 방법이 뭘까요? 나를 죽이면 돼요. 엿을 죽이고 그 다음에 소시지 될까 안 될까는 누구 손에 맡기면 돼요? 주님 손에 맡겨줘야 돼요.
내가 만약에 나는 뭔가 새로운 인간이 되고 싶다고 한다면 그 말은 잘못된 말 이예요. 그거 설명할 때 들어오셨는데 사람들은 새 차를 좋아한다 말이죠. 만약에 내가 새 차가 있을 때 이것이 새 차라고 내가 좋아하는데 사실은 이 차가 내가 좋다하는 말은 내 머릿속에 옛 차는 이렇고 새 차는 이 정도 돼야 된다는 생각이 이미 내 안에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러면 새 차라는 것이 진짜 주님이 새 차가 아니고 누가 짐작한? 이미 누가 예상한 차입니까? 내가 예상한 새 차잖아요. 그러니 그 새 차라는 것도 어느 생각의 연장입니까? 내 생각이 늘어난 것밖에 안 돼요.
천국? 진짜 천국이 아니에요. 우리는 각각 제각기, 나름대로의 천국이 다 달라요. 한 다섯 사람 모아놓고 천국을 설명해 보라 하면 다 달라요. 다 다르다고요. 남자가 말하는 천국 다르고 여자가 말하는 천국 다르고 다 달라요. 개가 말하는 천국 다를 것이고 다 달라요. 남자가 말하는 천국은 여자들이 많이 있다든지 여자가 말하는 천국은 잘 생긴 남자들이 많다든지 이런 식 이예요. 천국이란 자기 미흡함을 보상해 줄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세계를 기대하는 것, 그 천국은 진짜 주님의 천국이 아니고 우리가 미흡한 것을 보상해주고 회복시켜주는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럼 인간들 가운데 천국 아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왜, 아무도 천국을 가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이 말한 천국을 제자들이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죠. 인간은 자꾸 오해만 하니까. 그래서 예수님 모든 말을 제자들도 못 알아들어요.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알아듣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아느냐 하면 예수님 말을 가지고 자기가 자기 심성 안에서 재조립을 해요. 하나의 예를 들면 베드로가 예수님이 마지막에 잡혔을 때 불가에서 손 쬐면서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저주하고 부인했죠. 그러면 이 장면이 중요한 장면인데 예수님이 어떠하기를 원했던 거예요? 저렇게 체포 안 되기를 원했죠.
그러면 베드로 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절대로 체포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체포 된 인간들을 향하여 태권도 날리고 업포컷을 날려서 어디 하늘에서 오신 메시야를? 다 쳐부숴서 갑자기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십자가 묶으니까 십자가 밧줄이 우두둑 두두둑 끊어지고 말이죠. 십자가 거꾸로 해서 십자가 들고 빌라도 뒤통수 치고 그래서 예수님 12제자들이 내무부 외무부 장관 장관 자리 죽 앉아서 그래서 다시 민중들한테 ‘야, 호산나 잘했다. 승리했다. 이겼다.’ 하는 그런 메시야를 12제자가 원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12제자가 하늘에서 누가 높으냐. 자리다툼부터 선거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내가 밀어주면 박 근혜 밀어주면 .. 그거만 따지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가 생각한 예수님은 뭐냐 하면 예수님 말을 자기 안에서 재공략한 겁니다. 다시 구성한 거예요. 자신이 갖고 있던 구성한 거, 구성해서 내린 결론이 뭐였습니까?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입니다. 3년 동안 따라다녔는데. 물 위를 걸었는데. 오병이어를 행했는데. 심지어 예수님 힘으로 귀신까지 하늘에서 떨어지게 했는데. 병자를 고쳤는데. 그래도 몰라요? 그래도 못 알아보는 거예요. 예수님이 누군지 몰라요. 예수님의 능력을 입으면서도 예수님 당사자가 당체 누군지 몰라요. 혜택을 입으면서도. 얼마나 재미난 이야깁니까?
목사가 설교해서 천국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교인들은 앉아서 전부 다 자기 맘대로 조립해 버려요. 붕어빵 아시죠? 잡숴보셨죠? 붕어빵 특징이 뭐냐 하면 같은 틀에서 붕어빵 찍어내도 똑같은 게 하나도 없어요. 밀가루 탄 게 하나 더 붙어있다든지 대충은 맞는데 전혀 같은 게 없죠? 똑같지 않아요. 사람들이 100명의 교인들이 앉아 있으면 목사가 무슨 설교를 해도 생각이 다 달라요. 전부 다 자기 생각하고 있어요. 왜, 자기가 그 교회당 오기 전까지의 살아온 삶의 경로와 삶의 여정과 환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맺힌 한들이 달라요. 어떤 데는 살 안 쪄서 한 맺히고 어떤 데는 살 못 빼서 한 맺히고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아파서 한 맺히고 어떤 이는 이혼해서 한 맺히고 온갖 한들을 갖고 왔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이 백날 와도 이게 주의 말씀이 아니고 누구 말씀 돼요? 내 말씀 된다고요. 그러니까 엿가락 가지고 소시지 되려고 왔다가 도로 엿가락만, 이쁜 엿가락. 참한 엿가락만 돼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요.
이거 무슨 대책이 있어야 되겠죠. 예수님이 말한다고 해서 말 알아먹어서 내 것으로 소화시켜서 구원? 베드로도 실패했는데 우리야 말할 것도 없죠. 베드로는 물위까지 걸어도 실패했잖아요.
그 제자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줄곧 믿는대. 예수님이 하신 말마다 ‘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그래 제자들이 믿어서 주의 증인 됐습니까? 그 믿음도 어떤 믿음이냐 하면 자기가 평소에 눈에 보이는 걸 믿는 그 믿음이죠. 가짜 믿음, 엉터리 믿음, 아담의 속성에 나온 믿음이겠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평소에 뭐라 했느냐 하면 “네가 믿음이 있어? 믿음이 있으면 아저씨 아들 못 살렸어? 내가 너희들한테 겨자 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저 아저씨 아들 살릴 정도가 아니고 아예 산에 있는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라“했을 지라도. 갑자기 나무가 슝! 뽑히더니만 완전히 북한 미사일처럼 날라 와서 동해 바다에 풍덩하고 빠졌을 거예요. (어서 오세요. 이젠 다시 새로 못하죠.)
그러니 겨자 씨만한 믿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믿음은 겨자 씨만한 믿음도 없다는 말은 결국은 믿음이란 것은 양의 문제에요? 질의 문제에요? 질의 문제라니까요. 양의 문제가 아니고. 절대로 성령이 하는 일은 양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분명히 이 시간에 언급했어요. 성령에 관한 건 양이 아니고 질입니다.
그런데 왜 기도를 한 시간 해야 됩니까? 시간의 양 가지고 이야기하느냐 말이죠. 꿇어앉아서 기도해야 됩니까? 그냥 양반 다리 해서 기도해야 됩니까? 이런 게 왜 나오느냐? 분명히 질이잖아요?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헌금할 때 과부의 두 렙돈, 우리나라 돈으로 한 40원, 과부가 40원 하니까 ‘아휴,40원이 뭐고, 애들 껍 값도 안 되겠다.’ 예수님께서 뭐라 했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40원 했다고 양적으로 따지니까 주님이 반대로 양적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전부 다 바쳤다. 네가 전부 다 바칠 수 있느냐?”
헌금도 양이 아니고 기도도 양도 아니고 그리고 교회 교인수도 어떻게 됩니까? 교인 수 만 명 이상 되면 구원받습니까? 마태복음 19장에 예수님이 교인 몇 명이라 했습니까? 어디에 함께 있다 했습니까? 두세 사람이죠. 자기 마누라 있어도 두 명이고 애까지 있으면 세 명 돼요. 그런데 주님께서 “나 초청해놓고 이게 뭐고? 다 어디 갔어? 에이, 재미없어.” 라고 그냥 가십니까? 아니죠. “누구든지 내 이름에 의해서“ 그러니까 본문을 잘 보세요. ”나로 인하여“ 예수님 본인으로 인하여 모여든 곳에는 내가 함께 있다. 너희들끼리 온 곳에 나는 가지 않는다. 나로 인하여 모여든 사람에게만 참여하는 그게 교회가 되는 거예요.
교회 소집령 누가 갖고 있습니까? 당회장 목사가 아닙니다. 누굽니까? 예수님이 소집하는 거예요. 어떻게? 이미 성도한테는 성령이 가 있기 때문에 주님의 성령을 통해서 불러 모으면 그게 두 명이 되던 세 명이 되던 그리고 예수님까지 합하면 한명이 와도 예수님까지 합하면 두 명이니까 함께 계시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소집할 때 뭐로 소집하겠어요? “교회 오너라.” 이렇게 소집합니까? 복음으로 소집해요. 복음으로! 예수님 십자가 복음으로 소집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잘난 체 하려고 오지 마라. 오늘도 죄인인데 용서 받은 사람만 오너라. 오늘도 무슨 죄를 지었기에 또 용서해주려고 불러 모으시는가?’라는 취지로 모여져야 돼요.
지금까지 쉬운 거 했는데 이제부터 어려운 거 합니다. 자, 문제가 뭐냐 하면 아무리 예수님 이야기하고 아무리 복음 이야기해도 내부적으로 어떻게 한다? 자기가 자기 맘대로 편집하고 자기가 소설 써버리니까 이거는 엿가락 늘어난 것이지 절대로 소시지로 넘어가는 건 아니잖아요. 질이 다른 걸로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질이 다른 그 질이 어떤 질이냐 하면 천국에 살만한 사람이 돼야 되는데 천국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보도 못하고 우리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몰라요. 천국을 아시는 분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죠. 그러면 천국에 살만한 질이라 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같은 동일한 질을 갖고 있으면 영생 얻을 수 있겠죠.
그러면 어떻게 바뀌어야 됩니까? 현재 있는 이것을 심판을 받아버려야 되죠. 누구한테? 스스로 자살하면 안 되고 누구한테 심판 받아야 돼요? 미리 앞당겨서 예수님한테 심판 받아야 돼요. 오늘 본문에서 심판이고 영생이고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다시 해봅시다. 이게 구슬이라면 이 구슬을 예수님이 쳐다보고 있어요. 그러면 이 구슬 속에 있다는 것은 이미 바깥에서 훤히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심판이나 영생이란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심판, 영생에 대해서 이미 다 그걸 결정권을 갖고 있는 분이 모든 걸 마무리 지을 분이 쳐다보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잠실에 가면 롯데 월드에 사장님이 있다 합시다. 롯데 월드 사장님이 저 전라도 어느 시골에 가서 애가 이뻐서 ‘야, 너 롯데 월드 많이 들어봤지?’ ‘들어봤어요.’ ‘거기 내가 넣어줄게.’ 왜 그런 자격이 있는 겁니까? 본인이 누구기 때문에? 롯데 월드 사장이기 때문에 자격이 있죠. 뭐라 합니까? “나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는 말을 누가 해요?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면 이 말을 듣고 ‘이러면 구원 받겠다.’라고 하면 안 돼요. 그건 믿는 게 아니에요. 그건 자기 구원을 믿기 때문에 그건 땡 탈락 이예요. 그건 믿는 게 아니에요. 누굴 믿어야 돼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격자가 바로 예수님 당신입니다.‘라고 나는 자격자를 만난 것에 대해서 감사할 때 그게 믿음이라니까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할 때 주님 앞에 자살하지 마세요. 주님 앞에 내가 죽고 죽으면 주께서 살리겠지, 이렇게 돼 버리면 그 작업을 누가 하는 거예요? 내가 하는 거라니까요. 내가 하는 거라고요. 다시 예를 들어봅시다. 롯데 월드 사장님이 전라도 산골에 가서 어린애를 만났고 ‘야, 너 롯데 월드 보고 싶지? 내가 넣어줄게.’ 할 때 그 애가 순진하게 사장님을 ‘사장님이시죠?’ 라고 믿으면 되는데 그 애가 집에 가서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신 뭐시기,’ 맞는지 찾아본다고요. 이거 믿음 이예요? 믿음 아니에요? 그건 믿음이 아니죠. ‘당신이 뭐라 해도 내가 믿어져야 돼.’ 이러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이것은 주님의 주도권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예수 믿는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진짜 믿는 자입니다. 아이쿠, 너무 어렵게 했나. 믿지 않는 것이 믿는 자에요.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 믿습니다.’라는 말은 인간 세상에서 어떻게 통용되느냐 하면 ‘이제 예수님이 누군지 내가 컴퓨터로 찾아보겠습니다.’라는 자기 노력의 다른 표현이 ‘한번 믿어보렵니다. 한번 따져볼까요?’ 이런 식이라니까요. 따지긴 뭘 따져?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믿는 척을 해야 됩니까?
제가 지난 낮 설교 때 ‘님과 함께’라는 TV에 나오는 예능프로가 있는데 안 문숙이하고 아나운서 김범수하고 사귈 때에 안 문숙이가 하는 멘트가 있어요. 우리 믿는 척을 해서 돈만 받으면 돼. 방송국에서 우리는 연기하면 돼, 우리 사귀는 척하면 되는데 안 문숙이가 심경의 변화가 와버렸어요. ‘이 남자를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니’ 그 다음에 뭐라 그랬느냐 하면 아! 얼마나 좋은 말했는지 ‘혼란스럽다.’는 거예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척, 결혼하는 척만 돼요. 그래서 출연료 받으면 되니까. 그런데 너무 가까이 하다 보니까 갑자기 ‘이러다 우리 결혼하는 거 아닌가?’ 오, 혼란스러운 거예요.
요새 교인들이 뭡니까? 믿는 척, 사랑하는 척만 하면 돼요. 왜, 척하고 믿는 척해야 됩니까? 진짜 사랑하고 진짜 믿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누굽니까? 바로 본인 이예요. 본인만을 사랑해요. 인간은 예수님은 그냥 우리 이상규 집사님 멘트에 의하면 예수님은 도우미, 예수님은 도우미에요. 내가 날 사랑하는데 옆에 도와주는 분, 몸 아프냐? 도와줄게. 돈 없냐? 도와줄게. 사업 안 되냐? 도와줄게. 애 결혼 안 했어? 내가 도와줄게. 뭔가 도우미에요. 도우미도 돈 꽤나 들어요. 다른 교회 가면 십일조 내야 되지, 새벽기도 가면 돈 드는데, 어떤 교회 가면 돈도 안 들고 괜찮아요.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교회 봉사 안 하면 도우미가 삐져서 안 도와준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인간들이. 결국은 사랑은 누가 하느냐 하면 무조건 내 사랑은 내가 포기 못해. 내 사랑하는데 어떻게 당신이 많이 도와주게 되면 내가 내 사랑하는 몫을 떼서 당신 사랑해줄게. 그러니까 우리가 먹는 빵의 부스러기를 누가 주워 먹어라? 예수님 보고 주워 먹으라는 겁니다. 내가 나를 먹이는 그 빵의 부스러기를 떨어지거든 주워 먹어라. 완전히 예수님이 개야. 자기가 주인이지. 왜냐, 자기가 주인으로 있기 때문에 내 곁에 있는 것은 전부 다 개나 고양이밖에 안 돼요. 애완견밖에 안 된다고요. 반려동물밖에 안 돼요. 도둑 오면 멍멍 짖어대면 되고, 쥐 오면 잡아오면 되고.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그 말을 달리하면 어느 날부터 내가 싫어. 내가 싫어. 나만 챙기는 내가 싫어. 남은 죽자고 나만 위하는 내가 싫어. 그래서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데 하나를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는 미워하게 돼 있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타고 났어요. 거기다 부모가 애한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질문을 하니까 아빠가 있을 때는 아빠가 좋다 하고 엄마가 있을 때는 엄마가 좋다 하고 애는 요령을 부릴 수밖에 없죠. 왜, 같이 사랑할 수 없거든요. 한쪽을 미워하게 되면 한쪽을 반드시 사랑하게 돼 있으니까.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그때부터는 내가 그렇게 귀하고 죽도록 남만 이용한다는 그게 이제는 안 그래. 내가 나에 대해서 손을 놔버리니까 이게 혼란스러워져야 돼요. 이게 혼란스러운 거예요. 그동안 내가 교회 다닌 것이 이유가 뭔데? 뭣 때문에 교회 다녔는데요? 내가 살려고 교회 다녔는데 이제는 예수님 사랑하고 난 뒤에 ‘주여 이제는 죽여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고만 살려줘도 이제는 날 죽여도 좋아요.’ 이렇게 나오니까 ‘내가 왜 이렇게 달라졌지? 미쳤어. 미쳤어. 내가 혼란스러워. 뭐지?’ 그게 성령 이예요. 이게 성령이 충만하면 그래요. (들어오세요.) 이제는 다시 못한다.
인간이 사람이 자기를 믿게 되게 되면 자기를 포기를 못합니다. 자기를 포기를 못하게 되면 뭐든지 나를 건드리면 다 죽이고 싶어요. 예수든 하나님이든 나 건드리면 다 죽이고 싶어요. 그래서 교회 보면 예수님을 복수하는 방법들을 사용해요. 갑자기 집을 팔아서 헌금을 교회다 바친다든지 금식을 한다든지 이거는 주님에 대한 극도의 반항심의 표현입니다.
내가 주일 날 이야기했죠. 선생님이 숙제를 낼 때 학생이 선생님을 가지고 노는 방법은 선생님이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은 분량의 숙제를 해 와서 두 번 다시 선생님으로 하여금 자기한테 지시 못하게 만들어요. 선생의 간섭을 끊어버려요. ‘선생님 당신보다 내가 더 잘났어. 이것만이 선생으로부터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이나 예수님한테 벗어나는 방법은 뭡니까? 시키는 것보다 더 착하면 되죠. (어서 오세요.) 주님이 시키는 것보다 더 착하면 돼요. 착하면 주님도 딴 사람은 그렇게 지적 해도 감히 나한테는 ’아이구, 요렇게 착할 수 가 있나.‘ 이렇게 해서 복을 안 줄래야 안 주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참~ 인간 못 됐죠? 주님과 어떤 라이벌 관계를 느끼는 겁니다. 당신이 나한테 요구한 것보다 내가 더 착해져 버리면 더 이상 당신이 나한테는 복만 주고 다른 거는 일체 간섭 안 할 수 있으니까 나는 자립하게 되죠. 어떤 자유? 어떤 절대성? 이걸 느끼게 되죠. 그게 바로 도 닦는 거예요. 교회 와서 도 닦는 사람, 그게 바로 저는 최종적인 모습이 그거에요. 주님이 시키는 것보다 더 착해지는 거, 그걸 목표로 살아가는.
그래서 그런 나를 만약에 힘들게 한다면 전적으로 그 책임과 잘못은 누가 지는 겁니까? 예수님 쪽에서 나쁘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안 나빠. 왜, 나는 금식했기 때문에, 나는 집안까지 모든 걸 다 교회 갖다 바쳤기 때문에. 이처럼 천사 같은 인간 나와 보라 그래. 없거든요. 이게 믿음입니까? 극도의 자기 사랑이죠.
근본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했는데 이 말은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뜻 이예요.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믿도록 돼 있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게 돼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못 벗어나요.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당겨서 물에 빠진 내 팔이 내 머리를 잡아당겨서 물에서 못 빠져나와요. 내가 나한테 믿는다. 믿는다. 그거는 자기 체면이죠. 믿는다. 믿는다. 하지를 않죠. 어떻게 합니까? 믿쓥니까? 믿쓥니까? 그걸 가르쳐 주니까 새벽기도나 철야기도할 때 ‘믿쓥니다. 믿쓥니다.’를 가지고 밑에 타이머로 ‘믿습니까?’ 할 때마다 한 번씩 눌러보죠. 한 3천 번 하게 되면 나중에는 자기 체면에 걸려서 ‘그래 나는 성령 받았어.’ 해서 랄랄라, 룰룰루, 헛소리 나오고 자기가 한 소리인데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무슨 뜻이냐 하면 뜻도 모르고 횡설수설하면서. 그거는 소주 두 병 까보세요. 맨 그런 현상이 또 나와요. 소주 두병 먹으면 똑같은 현상이. ‘난 성령 받았네.’ 티내려고. 티내서 뭐 할 건데? 티 내봤자 엿가락은 엿가락이 소시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그 인간을 같이 죽어야 돼요. 로마서 6장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경우에만 비로소 질이 다른 생명이 나옵니다. 그게 영생 이예요. 질이 다른 생명. 그러면 그 작업을 그 사실을 우리가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믿으면 되겠네요. 글쎄 그걸 믿을 사람이 없다니까요.
늦게 오신 분들이 있어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어떤 대상에 대해서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는 것이 원래 어느 자리에 있었어요? 내 자리에 있었죠. 내 자리에 믿음 소망 사랑이 내 자리에 있었던 거잖아요. 그럼 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내 자리가 무슨 자리입니까? 죄가 지배하는 자리죠. 죄가 지배하는 자리에서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이 이게 올바른 믿음 소망 사랑이겠어요? 안 그러면 죄 덩어리이겠습니까? 이게 죄 덩어리 되는 거예요. 이게 죄 덩어리에요.
백날 믿어봤자 내가 믿는다. 백날 사랑해도 내가 사랑한다. 이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라고 돼 있잖아요. 이거 우리보고 하라는 거예요? 예수님 본인이 하겠다는 이야깁니까? 예수님 본인이 하겠다는 거예요. 이쯤에서 다시 예를 들어봅시다. 롯데 월드의 사장이 저 전라도에 있는 어떤 산골에 있는 애한테 ‘너 롯데 월드에 넣어줄게.’라고 했을 때에 그 애가 생각할 것은 ‘아, 뭐 타면 되지? 버스 탈까?’ 이걸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가나 그걸 생각하지 말고, ‘누구지?’ 이거만 생각한다니까.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나로 하여금 그 비싸다는 롯데 월드를 그냥 공짜로 넣어주느냐? 누구지?‘ 누군지만 생각하면 돼요. 그게 지금 전라도든 속초든 제주도든 미국 가도 괜찮아요. 그분은 미국 가 있는 나도 롯데 월드에 넣어줄 수 있고 북한에 가도 넣어줄 수가 있고 알래스카에 있어도 넣어줄 수가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왜 그렇게 사망에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 우리 상태가 무슨 상태냐 하면 사망의 상태입니다. 사망의 상태인데 사망한 자를 영생 주는 것은 우리가 사망했을 경우에만 해당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 안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았다고 생각하는 자로서는 아무리 해봐야 사망에서 생명이 아니고 산 채로 생명이기 때문에 이거는 요한복음 5장 24절에 해당이 안 되는 이야깁니다. 이거는 우리의 소설 이예요. ‘내가 살았는데 예수 믿으면 영생이다.’ 이거는 우리가 짜낸 소설이고 드라마지 이거는 실제도 아니고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 같으면 우리가 사망에 속해야 돼요. 사실은 정확한 말은 우리가 죽었다가 정확한 말이 아니고 사망에 속했다가 정확한 표현인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어려우니까 그냥 우리가 죽었는데 죽은 자를 주님께서 어떻게 한다? 생명으로 옮기는 겁니다.
여러분 에스겔 37장에 보면 뭐 나오죠? 거기 에스겔 인자 데리고 어디로 갑니까? 뼈, 그것도 그냥 축축한 뼈가 돼서 암모니아나 탄수화물이 생겨서 가능성이 없어요. 바짝 마른 뼈에요. 바짝 마른 뼈를 보고 하나님이 인자에게 “이 뼈가 살겠느냐”고 묻잖아요? 물을 걸 물어야지, 이게 살겠느냐. 물어봐? ‘헉헉헉’ 이러면 이해돼요. 잘하면 다리미질해서 살겠는데 지금 그게 아니고 “바짝 마른 뼈인데 살겠느냐?” 그거 여러분 이해됩니까? 그 뼈가 살겠어요?
과학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가설이 또 다시 반복이 될 때 가설이 정설로 돼요. 맞죠? 과학이란 것은. 실험실에서 해봤는데 공장에 가면 영 안 돼요. 여기서 하든 저기서 하든 항상 똑같이 반복이 돼야 돼요. 그렇다면 과학적 인식을 교육을 받은 우리가 뼈가 산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디 가서 개뼈다귀 주워서 ‘주여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테스트 해봐야 됩니까? 전라도에 있는 골짜기에 있는 애가 롯데 월드 넣어준다니까 인터넷 쳐서 그 사장님 정체가 누군지 가짜인지, 사기 치는지 그거 검색해야 돼요?
그렇게 한다는 게 뭐냐, 이게 못 믿겠다는 뜻 이예요. 못 믿겠다는 것은 뭔 뜻입니까? 믿을 놈은 누구밖에 없다? 나의 지식과 이성과 나의 감정과 의지밖에 믿을 게 없다. 이런 뜻 이예요. 성령의 믿음하고 완전히 별개라니까.
죽음에서 살아나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가 살았다고 여기는 자를 주께서 뭐로 바꾸느냐 하면 죽음으로 이걸 바뀌어져야 돼요. 그 바뀌는 작업이 우리가 바꿉니까? 우리가 살았는데 한 눈 뜨고 이러면 죽은 거 돼요? 그건 연기죠. ‘주여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가슴 치면 이게 죄인 됩니까? 자기 가슴만 아프지 그게 죄인 돼요?
죄인 되는 방법 간단해요. 기도 응답 안 되면요, 순간적으로 죄인으로 돌변합니다. ‘에이’ 하고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영어로 ‘에이, 비타민 C, 에이 비타민 C’ 그게 바로 그렇게 되고 싶은 죄인 이예요. 뭐 기도 응답 안 되니까 대번 되네. 대번 되는 거예요. ‘에이, 비타민 씨.’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사망 된 자를 생명으로 옮기는, 사망되게 하는 그것도 누구 몫이냐? 주님이 하시는 몫이고 생명으로 옮기는 것도 주께서 하실 몫이고 그건 주님의 숙제지, 우리 숙제가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 인생의 어떻게 되는 것에 대해서 제발 손을 놔버리세요. 손을 놓으세요. 절벽에서 손끝에 달렸다. 놓으면 죽고 기어 올라가면 산다. 그 둘 중에 어떻게 해야 될까요? 절벽에 떨어지는데 독수리는 날라 오네. 하필 매달려 있는 손가락 두 개를 쪼아대네. 불교의 선불교에서는 거기에 대한 답변 같은 게 없어요. 그냥 문제만 던져줄 뿐 이예요. 답변은 네 맘대로 하세요. 이렇게 돼요. 그러나 그런 경우가 실제로 있다면 복음에서는 간단합니다. 그것도 누구 일이냐? 그 독수리가 시속 60킬로로 날라 오는 것도 누구 일이냐? 주님께서 하는 일인데 주님은 무슨 일을 하느냐 하면 바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손을 놓을까요? 가만있으세요. 언제까지? 힘 빠질 때까지. 그냥 사시면 되는 겁니다. 그 매달리는 걸 가지고 세 자로 막 산다고 하는 겁니다. 그냥 막살면 되는 겁니다. 그냥 막 살면. 막 살아도 주께서 내린 그 막사는 조치도 주의 조치라고 믿어지는 것은 이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주께서 주신 주의 영이 임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첫째 시간 결론은 간단하죠. 막 사세요. 이게 결론 이예요. 막 사세요.
어떤 개념도 우리가 만든 개념은 오염된 개념이고 엉터리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스스로 수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방식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잖아요. 살아가는 그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죽을 때 죽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살아서 영화 보고 골프 치고 하는 모든 것을 다 죽었다고 보는 거예요. 골프장에 가서 캐디 희롱하고 하는 거 있잖아요. 그 전체를 다 죽은 걸로 간주하고 또 지하철에서 딸랑딸랑 하면서 자선냄비 하는 거 있잖아요. ‘그래 구세주는 믿을만하다. 딴 거는 누가 먹는지 모르지만 구세군은 절대로 그런 일 없을 거야. 바른 이웃을 찾아 진짜 줄 거야.’ 하고 만 원짜리, 너무 심했나? 그럼 천 원짜리 해줘도 그 자체도 무슨 일이냐 하면 그게 죽을 일 이예요. 자선냄비에 돈 던져주는 것도 그게 구원 받지 못할 지옥 갈 죄가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자체가 죄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 지래 아래. 그러니까 사적으로 우리에게 행동을 따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어떤 행동을 해도 우리보고 따지지 않아요. 우리를 지배한 마귀 보고 따지지 우리보고 따지지 않아요. 괜히 우리가 죄 진적 착각해서 ‘주님이 날 미워할 것이다.’ 뭘? 미움의 대상도 안 돼. 주님이 날 미워할 것이라는 것은 결국은 말을 이렇게 연결해 보면 논리가 뭡니까? ‘주님께서는 내가 강의 중에 물을 마시면 날 미워할 것이다.’ 하는데 목마르게 하신 분이 누군데요? 주님이시고. 마침 물 있네. 누가 물 있게 했습니까? 주께서 물 있게 했잖아요. 그럼 날 나무라면 누가 누굴 나무란 거예요? 주님이 자기가 설정한 자기가 배치한 세트를 미워한 셈이 되니까 이거는 모순되잖아요. 그렇잖아요.
내가 말을 너무 어렵게 했는데 가룟 유다보고 뭐라 했습니까? “네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지금 가룟 유다보고 한 소리입니까? 어떻습니까? 그걸 태어나게 하신 태어난 가룟 유다보고 물을 그런 말이 아니죠. 집사님 애보고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아야지.’ 태어나게 해놓고 왜 그걸 자식한테 묻습니까? 부모 자기 책임이지. 애가 ‘엄마 태어나게 해주세요.’ 이래서 태어난 건 아니잖아요. 피동형 태어난 자식 보고 ‘야야, 너는 왜 태어났노?’ 그걸 자식 보고 묻는 게 아닙니다. 한 맺혀서 그런 경우는 있죠.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라고 울면서 하는 경우는 있지만 진지하게 자식 보고 할 문제는 아니죠.
그런데 주님은 누구보고 한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다.“ 이 말은 가룟 유다야. 네가 태어나서 이런 짓 하는 것도 누구 아이디어다? 예수님 본인의 아이디어에요. 나는 저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은 내가 만들 권한이 오직 누구한테? 이 세상에 남아있는 거예요. 우리에게 주는 것은 주께서 주시는 우리의 행복도 아니고 우리가 기대한 영생도 아니고 우리가 기대한 천국도 아니에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바로 자비의 항아리, 자비의 그릇으로 만들어주는 겁니다. 이건 우리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주님이 일방적으로 조치한 조치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거부를 하던 뭐를 하던 간에 그 자비는 여전히 자비로워요. 심지어 5도 화상 입어서 온 몸이 벌겋게 데어도 그 자체가 ‘아이구, 이쁘기도 하여라.’ 주님의 그릇이 되는 겁니다.
그런 능력으로 바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깁니다. 이게 천지 창조의 능력 이예요. 왜, 이미 끝을 다 아니까. 심판도 아시고 끝을 다 아니까. 그래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마는 어떻게 믿게 됩니까? 먼저 주님한테 된통 심판을 받게 돼요. 잘못해서 심판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잘못한다고 지적하는 게 아닙니다. 괜히 우리가 자기 발에 자기가 스스로 책벌하고 자기가 벌 내리고 자기가 ‘이러면 안 되지.’라고 자기가 때려서 그래요.
주님은 우리를 책벌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 싼 우리를 덮치고 있는 이 거대한 솥뚜껑을 치고 있는 거예요. 솥뚜껑을 가지고 공격하거든요. 주님께서 이 솥뚜껑에서 사망에서 사흘 만에 살아났잖아요. 그렇잖아요. 잘 들어보세요. 사흘 만에 살아난 분이 우리한테 침투하게 되면 뭐도 같이 우리가 느껴집니까? 주님이 뚫고 들어온 뭐도 함께 느껴져요? 우리가 잘못이 아니고 우리는 악한 영이, 악마가 지배한다는 그 사실도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면서 이것도 동반해서 이것이 느껴지게 만들죠.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우리가 나쁜 짓해서 죄인이 아니고 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될 경우는 이미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알게 되는 거예요. ‘야, 이거 내가 착한 일 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구나.’ 비로소 아는 거예요. 주님이 이야기한 것보다 착한 일 더 많이 한다고 주께서 복 주는 게 아니고 복과 저주에 관한한 우리의 뭣이 덮어진? 주의 은혜가 덮어졌으면 무조건 복이고, 그거 말고 딴 게 악마가 있으면 무조건 저주가 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뭘 하든 간에 판사, 검사, 의사가 되도 그건 저주가 함께 있다는 말을 그렇게 하신 거예요. 괜히 자기 행동에 쫄지 마세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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