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으로 150115
아버지의 이름으로 150115
이름 : 이근호(IP:119.18.93.36)
이한례(IP:183.♡.100.54)
15-02-23 15:14
가락-요한복음5장43(아버지의 이름으로)150115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5장 43절에 보게 되면,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고 하잖아요. 보통 사람들의 이름으로 왔다는 것은 본인이 직접 장례식이나 결혼식에 참석 못하고 다른 사람을 대리해가지고 부조금이나 이런 것을 전달할 때, “아이구, 이거 제 돈 아닙니다. 제 이름 아닙니다. 저를 보내신 자의 이름입니다.” 이렇게 할 때 된다 이 말이죠. 그런 경우에는 인간적인 관계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약에서 뭔가 기이한 활동을 할 때, 그게 전부다 하나님의 이름의 활동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뭐냐 하면은, 기능이죠. 기능. 이게 기능이에요. 기능적이거든요. 기능적으로 일한 분을 존재로 묶을 수가 없어요. 묶어버리면 뭐가 빠져나가느냐 하면은 그 기능이 빠져나가거든요. 흔히 말하는 “하나님 거기 계시죠? 저 여기 있거든요. 우리 나중에 인생 끝나고 난 뒤에 만납시다.” 이럴 경우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면서 이미 먼저 전제하는 것은 “제 존재 잊으면 안 돼요. 하나님, 저 섭섭하게 하시면 안 됩니다. 이 정도로 잘 섬기니까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저는 꼭 알아둬야 돼요. 꼭 집어서 야! 빨리 와 천국으로 제 이름 불러줘야 돼요.” 할 때는 뭐가 왕창 다 날라가냐 하면 주께서 우리를 부르기 전에 활동했던 모든 활동과 기능이 다 날라가버려요.
이거는 구약 전체를 가위로 잘라서 내버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구약에서의 기능은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죠. 홍해 왔는데, 하나님이 인도한다는데 인도한다는 것이 뭔가, 모세가 얼마나 욕 얻어먹었는지 아시겠죠. “니 혹시 계시 잘못 받은 거 아니야? 이건 아니지, 왜 이래?” 완전히 앞에는 바다냐 말이죠. 건널 수가 없는. 그 백성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건 아니지?” 라는 말은 내 말이고 그들의 말을 하게 되면 “차라리 우리를 죽이려고 작심을 했구나? 차라리, 아니 공동묘지 없어서 집단으로 공동묘지를, 이 광야에서 죽이려고 하느냐?” 이렇게 했다구요.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모세! 이건 아니지. 제대로 계시 받아야지. 이거 실수한 거야.” 만약에, 주의 이름이 그렇게 하셔요. 궁지로 몰아넣는데, 만약에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제대로 탈출구 됐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주님의 기능을 생각 안 하고 주님의 존재를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고 주의 말씀 따르면서 고생깨나 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챙기는 것, 이렇게 열심내고 훌륭하게 하나님 잘 섬기려고 애쓰는 자기행위에 대해서 계속 시선이 가는 거예요. 갈 거죠. 그리고 그걸 통해서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욥 같은 경우에는 결국 하나님의 그 기능이 욥의 예상을 어긋나버리고 마지막에 욥마저도 궁지에 빠져버립니다. 궁지에 빠진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사기이야기도 마찬가지에요. 할 도리 다했는데 더 이상 내놓을 대책 없을 때. 아예 안 하는 게 아니고 이게 뜻입니까? 이게 뜻입니까? 할 도리 다했는데 그것마저 노(No)가 되죠. 여러분 영어에서 No와 그리고 Non과 구분을 해야 해요. 노는 ‘아니오’입니다. 부정명제라고 하는데 ‘아니오.’ 이것 아니고 이것. 그러니까 빛 아니면 어두움. 어두움 아니면 할 때 이 no가 쓰이죠.
자, 그러면 남자의 부정이 뭡니까? 여자죠. “너 남자야?” “노” 할 때는 여자라는 뜻이에요. 여자보고 “당신 여자야?” “노” 할 때는 남자라는 뜻이겠죠. 그러면 좀비는 뭐죠? 좀비. 그걸 비-인간이라고 합니다. 비-인간. 왜 제가 이 비-인간이라는 말을 쓰느냐 하면은 루터부터 칼빈으로부터 이걸 해결을 못한 거예요. 루터한테 성도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하니까 성도는 의인이지. 예수 안에서. 그럼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 말은. 죄인 중에 괴수니까 죄인이지. 그러면 죄인이에요? 의인이에요? 둘 중에 하나만 이야기해야지. 그러니까 루터가 주장하기를 이걸 해결을 못해서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말하나마나죠.
non을 모르고 no밖에 몰라서 그런 거예요. 우리가 따질 수 있고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다른 차원이,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우리 이름이지만, 우리 판단 너머에, 우리 한계 너머에, 우리 궁지 너머에 있는 그 사실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그래서 이 논(non), "비"라는 말이 유용한 거예요. 홍해로 갔다 우리보기에는 실패로 보이죠. 그래서 우리는 뭐만 보이냐 하면 그걸 실패로 보니까 기껏 생각하는 것이 야! 우리 드디어 홍해 갈라져서 홍해를 통과했다. 그러면 그거 구원받은 겁니까? 우리는 노밖에 모르기 때문에 내가 살면 yes고 못 살면 no라고 생각하거든요.
주님께서는 “니 죽을 뻔했다 살았다.” “고맙습니다.” 그 고맙습니다는 그 소리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구원은 니가 살아야 되는 문제와 차원이 다른 평지에, 지평에 속한 문제거든요. 기도해서 암 나았다. 아이구 기적이구나. 아니에요. 그걸, 암을 통해서 내가 기도하지 말아야 했는데 했다는 것. 나같은 인간이 예수님의 피를 기껏 내 병이나 나으려고 이용해먹었던 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게 구원의 차원입니다. 급해서 기도하긴 했지만 내 암 때문에 기도할 내용은 아닌 겁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에 의하면 빨리 죽는 것이 축복이기 때문에. 암 걸릴 때 찬스가 왔는데 그 찬스를 놓쳤어요.
살아온 버릇이 사는 버릇이 되놓아서 죽는 것이 행복하게 느껴지질 못한 겁니다. 차원이 완전히 다른 차원에 속한 거예요. 그 다른 차원이 이쪽에 들어오니까 인간은 그 다른 차원이, 다른 차원이 생명나무고요. 이쪽에 도달되는 차원이 뭐냐, 선 아니면 악. 악 아니면 선이니까. 그걸 가지고 선악과 지평. 그게 선악과 따먹은 지평이 핫케익처럼 딱딱하게 되었어요. 이게 없어요. 폭이 없고 두께가 없어요. 이거밖에 없는 거예요.
화투 칠 때, 화투 왜 칩니까? 아참 화투 안 치십니까? 화투 칠 때 돈 따먹기 잘 치죠? 그죠? 그런데 만약에 어떤 서양화가가 있다. 서양화가가 평소 화투를 못 봤는데 화투치면서 다른 사람은 돈 따먹는데, 돈 잃는데 신경 쓰는데 그 화가는 그 그림의 48장의 화투 그림을 보면서 거기서 낯선 경험을 했다면 그 사람은 새로운 기쁨을 얻는 거죠. 그러면 다른 사람이 “어이 헬로우 당신은 돈 잃어도 왜 그리 기쁘냐?” 돈 잃어도 왜 기분 좋은지 알아요? 평소에 이런 동양식 그림은 처음보기 때문에 그게 기쁨을 준 거죠.
거지 나사로에게 “거지 나사로! 당신은 거지 되었는데 왜 그리 기쁘죠?” 거지 나사로가 왜 기쁩니까? 거지 앞에는 배치가 누가 살아요? 부자가 살죠. 자기는 거지죠. 남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이렇게 합니다. “왜 그리 못났으면, 얼마나 저주받았으면 개가 와서 핥느냐.” 이 단순한 평가는 뭐냐 하면 핫케익 같아. 납작한, 폭이 없는 납작한 것. 납작한 그런 차원이라면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폭이 넓은 거죠. 그런데 이 부자가 지옥 가서 하는 말이 동생 다섯 명이 안 왔으니까 동생 다섯 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조치를 하겠다는 거예요. 뭐냐, 죽은 나사로를 한 번 더 보내시면 “아이구 사람이 죽었다가 사는구나. 그러면 나사로보고 우리도 믿어야지.” 이렇게 할 거니까 그렇게 해달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노라고 했어요.
왜? 나사로가 살아서 다시 오게 되면 그 사람들의 인식은 사는 것은 선이고 죽는 것은 악이구나. 마찬가지 이거 no차원이에요. non차원이 아니고. 참 이해하기 힘들죠. 사느냐 죽느냐 문제가 아니고요. 구원은 사느냐 죽느냐 차원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를 그렇게 했다는 차원이어야 하거든요. 병으로 내가 아파도, 내가 나아도, 아니 내가 지금 죽는다 할지라도, 주께서 하셨다면 흔쾌히 그걸 감사히 받는 그것이 예수님께 소속된, 예수님의 소유된 마땅한 도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기 싫어서 예수님 이용하고, 병 낫고 싶어서 예수님 이용한다면 그 차원은 뭐냐 하면, non차원이 아니고 no차원이에요. 그러니까 오래 살아도 소용없고 병 나아도 소용없어요. 문둥병자가 열 명 왔는데 나았다고 다 가버렸잖아요. 같이 나았는데 한 사람은 돌아왔습니다. 왜? “제가 죄인입니다.” 죄인이라고 돌아왔어요. 주여 병 낫게 해달라고 해놓고 돌아서서는 이게 아니야. 이게 다가 아니야. 분명히 예수님은 내 병이나 낫게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주여. 이런 것 가지고 주님의 가치를 떨어뜨린 저를, 알아보지 못한 저를 용서해달라고.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온다는 것이 이게 어느 정도 어려우냐 하면, 어려우니까 제가 기능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요 기능이 무슨 기능이냐. 기능이라고 하니까 여러분들이 괜찮을 거예요. 그 다음 이야기 하면 여러분들이 놀랄 거예요. 이 기능이 무슨 기능이냐 하면 죽는 기능이에요. ‘죽는 기능’ 왜 그런가 하면은 보통 기능은 어디서 나오는가. 존재에서 나오죠. 존재라 하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 살아있네~하잖아요. 살아있을 때 기능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능력, 홍해를 갈라지게 하고 요단을 갈라지게 하는 그 능력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를 해가지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한다고 한 거예요.
그러나 그건 인간적이 생각이고. 하나님의 생각은 이거예요. 장차 죽은 예수님의 죽음의 근거해서 나온 기능이라고 본 겁니다. 그러니까 어린양의 죽음이 필요한 거예요. 어린양의 죽음이. 장차 오실 예수님을 어떻게 하든지 간에 죽음이라는 싸인, 그 징후, 징조, 그걸 심어놓고, 그 얼룩이죠. 그 흔적 위에서 기능이 나오는 겁니다. 어린양은 죽었는데, 애굽의 장자들도 다 죽었어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어린양이 죽었기 때문에 같이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 장자는 이스라엘 장자가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의 소유가 돼버리고. 하여튼 그 땅에서 애굽이든 이스라엘이든 장자라는 씨는 다 말랐어요. 씨는 한 사람도 없어요.
그 말은 다 죽였다는 겁니다. 다 죽였는데, 애굽의 장자들은 진짜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장자들은 죽었는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있으니까 그거는 노(no)가 아니고 넌(non) 차원인 거예요. 나 장자 아니다가 아니고 비-장자. 이 집안의 비-맏이. 맏이는 맞는데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과 엮어진 혈육적인 관계로서의 맏이는 아닙니다. 아니올시다가 되는 거예요. 그 장자가, 요번에 수련회 가셨으면 참 좋았는데, 그 장자가 뭐냐 하면, 그 모델이 이삭이에요. 이삭은 없는데서 생겼죠. 그걸 요번에 수련회에 참석한 사람은 압니다. 없는데서, 그걸 수학 숫자로 뭡니까? 수학수로? 0이죠.
0에서 1이 됐다는 말은, 이것은 비-존재에요. 비존재이기 때문에 1에서 다시 0으로 돌아가면서 쏟아내는 게 있어요. 구원은 이렇게 된다는 것을 쏟아내면서 홀연히 사라지죠. 그래서 세례요한이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했지요. 분명히 세례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했어요. 천국과 어린양이라고 하니까 제사, 죽음이잖아요. 죽음과 천국을 동시에 병행에서 세례요한이 이야기해버립니다. 이게 사람들에게는 낯설기 짝이 없어요.
왜냐하면 천국이 그냥 왔다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국이 왔다 하면 어디? 어디? 어디? 츤국 왔어? 왔어? 그럼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채로 그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죠? 천국은 평소에 인간들의 소망이 천국이니까. 왜? 살기 너무 힘드니까. 참, 요즘 같으면 힘드니까 차라리 죽어서 천국이나 갈까. 그러니까 천국이라 하는 것은 모든 휴식처. 모든 곤란한 것의 도피처. 그리고 경찰 따라온다, 따라왔을 때는 어디로 뛰어 들어간다? 천국으로 뛰어 들어가면 경찰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죠.
그 셜록 홈즈 책에 보면 이런 게 나옵니다. 말하는 게, 참, 도둑 말하는 게 참 의미 있는데요. 도둑이 계속해서 완전범죄를 꿈꾸면서 도망을 치는데 형사가, 셜록 홈즈가 끝까지 쫒아가서 그 도둑을 잡아요. 그때 도둑이 마지막 잡히면서 하는 말이, ‘지독한 놈’이라고 했다고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누가 지독합니까? 지 배불리기 위해서 남을 피해 입히는 본인이 지독한 거예요? 그걸 잡는 탐정이 지독한 겁니까? 사실은 도둑놈이 있으니까, 도둑질을 했으니까 잡는 거잖아요. 원인 제공을 누가 했어요? 도둑이 했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지가 지독한 놈이라고 회개하지 않고, 잡히는 순간까지라도 “재수 없어서. 니같은 놈이 아니면 나는 더 도망갈 수 있었는데.” 라고 자기 존재 빼놓고, 자기 존재는 항상 최우선적이고, 그 다음에 나한테 얼마나 유리 하냐, 불리하냐를 따지면서 말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면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제가 예를 든 이유가 어떠한 경우라도 죽음에 인간은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이 왔다. 어린양을 보라. 백날 이야기해도 천국에 못 갑니다. 천국이 왔다. 이리 오너라. 다 들어가요. 그런데 천국만 이야기해도 될 문제를 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조건을 왜 달았느냐 말입니다.
그 조건을 우리가 만약에 경험하려면 우리가 갑자기 뭐가 돼요? 세상 죄인 중에 포함된 하나이어야 되잖아요. 그걸 만약 하나 되기를 기분 나쁘다고 거절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천국을 코앞에 두고,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코앞에 두고 못가는 거예요. 지금 교회마다 다 그래요. 천국 코앞에 두고 못 들어간다니까요. 잘난 맛에 들어가려는 거예요. 여기서도 잘났고 천국 가서도 잘났고. 여기서도 살고 먹고. 거기서도 살고 먹고. 그러기를 원하지. 자기 산 것의 집대성이 면류관이라. 그 면류관을, “에이 씨. 미쳤어. 내가 이런 걸 왜 썼어. 왜 쓰고 난리야. 이거 내가 쓰는 게 아닌데.” 이런 마음가짐이 아니라니까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는 순간, 그 피, 그것만 살짝 찍어 발라가지고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죽음은 어디서 시작입니까? 동방박사가 찾아오면서부터 시작이죠. 그러니까 그걸 다 참여해야 돼요. 죽음으로 가는 길이 그거부터야 돼요. 바로 옆구리 찔러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걸 설명 드릴게요. 시간 가더라도 설명해야 되는데. 서울에 중심 되는 외곽지를 도는 처음에 만든 지하철이 2호선입니다. 지하철 여기 보면 성수역이 있어요. 성수역 다음에 건대역이거든요. 건대역. 이쪽으로 가면 잠실이 있어요. 잠실에서 이쪽으로 나와 갈아타서 두 코스 가면 송파역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오늘 제가 어디서 탔느냐 하면, 청량리에서 타고 신설동에서 갈아타니까 그 지하철이 성수역만 가고 잠실역까지 안 가니까 여기서 갈아타야 된다는 겁니다. 이거는 뭘 의미하느냐 하면, 2호선이 이스라엘이에요. 여기 개입된 것이 이방인입니다. 요 신설역에서 성수까지가 이방인이고.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처음에 이스라엘에게 복 준다는 뜻이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뭐가, 무슨 궤도가 설치되어 있느냐 하면 언약이라는 궤도가 설치되어 있어요. 언약이라는 궤도는 이스라엘에게만 준 겁니다. 이스라엘. 그러면 이스라엘이 뭔데 궤도 깔아주느냐? 이스라엘이 잘나서 궤도 깔아 준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의 기능가운데서 이스라엘을 만드는 기능이 포함이 되어 있어요.
주의 이름으로 2호선 깔렸고 구원의 노선, 언약 노선 깔렸고, 거기에 이 사람들이 그걸 거부하니까 이방인, 신설에서 성수까지 2호선, 간선해가지고 여기에 같이 돌게 만들었거든요. 자, 이렇게 보면 여러분들 어떤 게 주가 됩니까? 이스라엘이 주가 되고 이방인이 보조하는 것처럼 되겠죠. 보조하는 것처럼. 근데 구약에 보면 이런 생각이 잘못됐어요. 왜냐하면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우리아 아내에게서, 마리아에게서, 라고 남성들만 있는 족보에 여성의 이름이 등장하면서 외부인이 아니면 2호선이 완전히 탈선할 뻔했어요. 외부인이 아니면.
그 안돌아가는 언약의 구조에 외부인이, 외부인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이스라엘 본인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망했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이미 기능이 아니고 이스라엘 뭐로 굳어졌다? 기능에서 존재로 굳어졌다. 존재로 굳어지면 이번 수련회에서 한 것처럼 이 숫자가 1이 되죠. 아까 이스라엘 할 때 뭐라 했습니까? 0에서 1이 되고 1은 어디로 돌아간다? 다시 0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돌아갈 줄 모르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 세웠다. 고맙습니다. 끝났어요. 하나님께서 우리교회 세웠다. 고맙습니다. 끝난 거예요.
우리교회를 해체시켜버려도 되는데. 우리교회가 안 보이고 오직 주님만 보여야 되는데. 해체시키는 주님은 안 보이고 우리를 키워주는 주님만 계속 그 교회에서 설교하고 설교가 되고 교인들에게 세뇌를 주고 체면을 걸어주는 거예요. “여러분 이 교회에 숫자가 많은 것은 주의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렇게 해서 기적이라는 게 번창과, 해체와 소멸과 관련 없고, 번창과 관련된 요 작업을, 요런 수법을 이스라엘이 매일 해왔던, 멸망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멸망의 끝은, 나온 소산물이 유대인. 그 유대인의 권력을 쥔 사람이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 그들의 손에 죽었던 분이 바로 예수님. 그래서 예수를 죽이는 교회. 논리가 그렇게 됩니다.
자기를 위해서 한 모든 것이 우상이거든요. 자기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하면 교회가 우상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다니시는 분은 설교를 반대로 들어야 돼요. 저래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구나! 이렇게 들으셔야 돼요. 저래서, 저래서는 안 되는구나! 저게 바로 예수님 죽이는 일이구나! 라고 반대로 들으셔야 돼요. 참 그렇게 되려면 힘들어. 그렇게 들으려면 가슴 찢어진다. 자, 여기서 계속해봅시다. 외부인이 와서, 와버리면 누가 거만해져요? “이거 어디서 이방여자가!” 이래 되겠죠. “이거 뭐 시아버지하고 며느리하고 간통을 하고...뭐 이런 난리...에이구 그 씨앗은 더러운 씨앗이다.” 그게 더러운 씨앗일까요? 진짜 이스라엘을 살리는, 야곱 집안을 살리는 것일까요? 살리는 거예요.
어떻게 간통한 여인이 왕의 본처가 됩니까? 밧세바 이야기입니다. 우리 같으면 부끄러워서라도, 다방에 앉아가지고 봉투 준비해가지고 “니가 애를 낳았다고? 그래 비켜도! 우리 집안의 명예가 있으니까. 니가 근본도 없는, 못 배운 것들이, 어디 뼈대 없는 것들이 어디 집안에 들어와? 안 돼!” 하고 내보내죠. 그럼 주인공은 “나를 이 돈으로 보셨습니까?” 하고 뿌리치죠. 그럼 그 다음부터 드라마가 복잡해지죠. 이방여인이 왔을 때 철저하게 소위 텃세부린다 하죠. “어데 근본도 없는 것들이 감히 들어와” 근데 그 근본 없는 그것이 하나의 다윗 족보를 이루어요. 룻에, 증조할머니, 하여튼 오벳, 이새, 죽 해서 다윗을 낳고. 그 다윗이 이스라엘을 살려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내부에 기존에 존재만 주도권을 쥐던 것이 우습게 됐죠. 주의 이름으로 벌렸던 기능으로 오는데 그 기능이 존재가 제일 싫어하고 미워하는 모습이, 이방인의 모습으로 기능이 여기에 삽입되면서 소위 1을 0으로 만드는 작업에 나서는 거예요. 내가 여기 존재하는 그것을, 주의 기능에 합류시켜서 너의 1은 니가 아니고 내가 1이고 너는 내 1에게 소속된 0이 돼야 돼. 내 소유가 돼야 돼. 그래야 니가 사는 거예요. 왜? 마귀와의 전쟁은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하는 것을, 부조할 때 “아이구 뭐 와야 도리인데, 바빠서 우리 사장님 이름으로 제가 비서실장이라서 왔습니다.” 이래 하는 것이 이름이 아니고. 그건 존재와 존재고. 진짜 주의 이름은 뭐냐 하면, 존재밖에 모르는, 선악, no, 선악밖에 모르는 여기에, 선악을 초월한 다른 차원으로서 아주 뒤집어놓는, 쑤셔 놓는, 아주 중앙에 파괴시켜버리는 그런 작업으로 주의 이름으로 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 43절에 말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가 백날 들어봐라. 너희가 내 하는 기능과 그 의미를 아는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 영접치 아니하나는 것도 질책하는 것이 아니고. “영접하란 말이야! 똑바로 해!” 이 말이 아니고. “영접하지 않을 줄 내 알았어. 당연히 영접 안 하게 되지.” 라고 해야 바로 어린양이 되거든요. 희생 제물이 된다고요. 하늘나라에서 왔는데. 그런데 여기서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개그맨 전유성이 그런 이야기 했어요. 조영남, 이 사람이 현대 미술을 보여주니까 전유성이 하는 말이 “이게 무슨 현대미술이고 미래미술이지.” “왜?” “내가 현대인인데, 내가 못 알아보는데 무슨 현대미술이냐.” 현대 그림이냐 말이죠.
상당히 의미 있어요. 뭔 뜻입니까? 그림이 있을 때는 그 그림을 통해서 내가 나답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확인하는 차원에서 인간은 의미를 주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가 현대인이잖아요? 그럼 현대인이라면 그림을 볼 때 내가 납득이 됨으로써 나는 뭐가 된다? 현대인 맞구나! 라고 확정될 때 그 그림의 의미를 그렇게 주는 거예요. 왜 이 이야기를 하냐 하면은 그 당시에 예수님 볼 때에,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에,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그 깊이를 몰라요. 모르는데 자기가 믿고자 했기 때문에 무조건 내가 납득이 되는 메시야라고 인정을 하고 싶어 해요.
그게 진짜 눈감고 아웅 하는 짓이 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그 의도를 피해가시는 겁니다. “알기는 개코나 알아. 뭘 알아” 이런 뜻이라니깐요. 그래서 전유성이가 하는 말이, 자기가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나는 현대인이 아니라고 하면 되잖아요. 근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거는 미래 그림이다. 미래 예술. 그러면 자기 책임이 없어지잖아요. 자기는 현대인으로 현대인의 가치로 남으면서 이거는 미래에 등장할 그림이지 지금은 몰라도 된다는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를 알죠. 왜 내 눈높이에 안 맞추냐? 이 말이거든요. 근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뭐냐 누가 맞춰야 돼요? 인간이 자기 자리를 변경시켜야 돼요. 방금 우리 김중우 집사님이 언급한 게 있어요. 성경을 이해하려면 내 자리부터 바꿔보고 이해해야 하는데. 사람은 성경을 모를 때 자기 잘난 것을 확인받기 위해서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일단은 자기 잘났으니까 자기변명이 되고 기분 좋은데, 뭐가 빠졌습니까? 죽음이 빠졌죠. 인간은 죽음을, 모든 버릇이 죽음을 피해서 이해하고 해석하고 의미 주는 겁니다.
만약에 “전도사님 목사 되어서 우리교회에 오세요.” 라고 한다면, 초대받을 때 “내 이래가지고 죽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좋은데, “드디어 주께서 나에게 하늘나라를 확장할 수 있는 귀한 소임을 줬구나. 주여, 보시옵소서. 내가 저 동기생보다 더 키울 것이고 그야말로 주께서 원하는 이상적인 교회, 섬기고 마음을 낮추고 오직 복음만 외치는 솜씨를 한번 보이겠습니다.” 라고 의미를 그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벌써 초빙 받으면서 뭐가 확 빠져버렸어요? 죽음이 빠져버렸어요. 죽음을 그려내지 못하는 나라는 천국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은 죽음을 그려내는 현장에서만 천국이 주어집니다. 죽음이 그려내는.
무엇 때문에 돌아가셨나를 알 때, 이미 그 사람은 천국이에요. 그 사람 왜 죽였노? 아 옛날에 유대인들이 무시해서 죽였구나! 옛날이야기고. 옛날이야기 아닙니다. 나는 주님 십자가 그거 생각해가지고 내 교회라고 해야지. 이러면 그거 천국 아니에요. 그건 또 하나의 존재로 간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것이 기능이라고 했죠. 뭐 빨리 진도나간다고 좋은 게 아니니까 다시 해봅시다. 주의 이름은, 우리가 하는 “이거 사장님 이름으로 드립니다.” 하는 여러 가지 이름은 존재로 끝나는 거예요. 근데 구약에 있는 모든 기능은 하나님의 존재에서 나온 기능이 아니고 장차 올 어린양의 죽음을 그걸 원천으로 해서 죽음의 긴 그림자가 구약의 기능이에요.
그 구약의 모든 기능은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이스라엘도 죽이고, 애굽도 죽이고, 다 죽이고. 그래서 살아난다면 이것은 주의 은혜지, 장차 오실 메시야의 공로지, 니가 잘나서 홍해 건너온 것이 아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근데 뭐 홍해 건너오자마자 이스라엘 사람들 벌써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건너 가봐라. 건너온 애굽을 뭐 배 타고 돌아갑니까? 다시 바닷물이 열려야 돌아가는데. 이미 건너 올 때는 물이 갈라져서 왔지요? 그럼 돌아가는 것도 뭐 열려라 참깨! 이래야 되는데 열립니까? 그게 뭐냐 하면, 비-죽음은 더 깊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미 죽어버렸어요.
이미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겠다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나흘 만에 살아났잖아요. 본인 좋았겠습니까? 아마 여동생 쥐어박았을 거예요. 편히 쉬려고 했는데. 생각해보세요. 군에서 제대했잖아요. 군에서 제대했는데 다시 입대통지서 잘못 발급돼서 와보세요. 그거 기분 좋습니까? 몰라, 한 주일동안 사고착오로 합시다. 본인 생각이 뭡니까? 일주일 내내 무슨 생각하겠어요? “나 제대했는데.” “나 제대했는데...” “나 제대했는데??” 그걸 가지고 뭐냐 이미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죽었고 내 안에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산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죠. 나 죽었는데, 뭐 교회 초빙해가지고, 뭐 이천년 교회라 하는데, 나보고 당회장 하라고 하는데, 에이 씨. 이미 죽었는데. 죽은 놈이 뭘 목회해? 죽었는데. 그래서 설교할 때 죽었는데. 죽었는데. 이게 유지가 돼야 돼요. 죽었는데.
이게 유지될 때 하나님의 이름의 기능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목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시체 데려다가 설교합니다.” 라는 말을 설교에다 집어넣어야 되겠죠. 왜, 산채로는 이 성경 본문 해석 못합니다. 기능으로 해석 못하고 자기 존재를 키우는, 복주는, 자기 팽창하고 지 교회 사업 잘 되고, 지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쪽으로 해석을 다 바꾸어놓습니다. 그거는 오해정도가 아니고 훼방하는 거예요. 주의 일에 대한 훼방하는 거예요. 신학교 들어갈 때 주여, 아골 골짝 빈들에도 뭘 들고? 복음만 들고 가겠습니다. 해놓고 신학교 졸업만 하면 어디에 취직할까? 취직문제. 뭐, 복음 들고 간다며? 죽으러 들어간다며? 줄 잘 서가지고 큰 교회 부흥사 되기를 바라고. 한 군데 나왔는데 친구가 먼저 원서내서 친구하고 싸우기 바쁘고. 우정 다 깨놓고.
너희가 영접치 아니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일은 혼자 한다 이 말입니다. 너희들이 영접하나 안 하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영접 안 하는 그것이 내가 해야 될 일이에요. 그래서 영접하도록 조치하겠다가 아니라 앞으로 계속해서 영접하지 못할 발언만, 일만 쏟아내겠다는 겁니다. 완전히 약 올리는 거죠. 니가 무슨 수로 나를 믿어. 웃기고 있네. 그럴 수는 없어. 만약에 니가 니 방법으로 믿었다? 그러면 니 이름으로 구원 받어. 그 사람은 그 사람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한다는 말은, 죽음에서 나온 이름이기 때문에 살았다고 여기는 사람한테는 절대로 거기에 그 질이 섞이질 않습니다.
죽음의 힘이 산 인물보다 더 세거든요. 왜?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기 때문에. 요번 수련회 했죠. 부재자가, 존재하지 않는 자가 존재를 살리기 때문에. 죽은 예수님이 우리를 살려내듯이, 이삭의 죽음이 그 뒤에 복을 유지시켜 주는 거예요. 야곱의 고난이. 이삭의 낭패가. 이삭의 낭패란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분명히 자기가 큰 아들을 밀어줬는데, 하나님이 개입해가지고 거짓말이라는 이 나쁜 짓을 통해서, 자기는 큰 아들을 밀어줬는데 대표자가 누가 됐는지 알아요? 얍삽한 야곱이 될 때에 이삭은 비로소 자기 뜻대로 안 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게 됩니다. 자기 자리의 변경이 일어나죠.
어떻게 일어난 줄 알아요? 에서가 와가지고 “아버지에, 접니다. 저 몰라요?” “알지.” “아버지 고기 좋아하시죠? 제 고기 좋아하잖아요?” “그렇지.” “제가 큰 아들입니다.” “큰 아들 맞지.” “그런데 왜 저한테는 복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게 하나님 뜻이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이 뜻이에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라는 말은 내 뜻이 따로 있다? 없다? 있어요. 있는데 그걸 있게 해놓고 그 뜻대로 안 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냥 불쌍히 여겨서 구원받지 주님하고 동업해서 구원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닌 것을 보여주죠.
그래서 내 이름으로 구원되지를 않습니다. 근데 인간은 자기 이름을, 자기 자존심과 체면을, 위신을, 어떤 경우라도 존재가 있는 이상, 육이 있는 이상은 자기 힘으로 못 버립니다. 못 버리는 것을 주께서 하게 하시면 이게 바뀌어 지면서 성도는 감사합니다. “주여, 제가 안 되는 일을 하셨군요. 저는 죽을 의사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죽은 자로 만들어 주신 것은 주님의 숨어 있는 능력입니다.” 하고 감사하죠. 그게 바로 베드로가 한 말이에요. 내가 지금부터 띠 띠고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고백이 그 고백입니다.
44절에 봅시다. “너희가 서로의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나니” 요 대목을 설명하겠습니다. 서로의 영광을 원하고 그 다음에 그냥 하나님께 하면 되는데 ‘유일하신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숫자로 치면 1이죠. 그러면 ‘서로의 영광’이라고 할 때 ‘서로’는 뭐냐 열 명 있으면 1+1+1+1+1....이렇게 해서 10이 돼요. 그냥 10이 아니고 8, 9가 아니고 7같으면 분해하는 거예요. 1+1+1+1+1+1+1 이게 7인 거예요. 그래서 7이라는 것은 허구적이에요. 7을 쪼개보면 일곱 개 들어 있어요. 이걸 다수성이라고 합니다. 다수성이라는, 왜 이렇게 어려운 말은 쓰는가 하면 다수성이 모이면 나름대로의 1자 하나밖에 없는 존재를 만들어내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이게 신입니다. 신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은 뭐냐 너희들이 신을 믿고, 신을 믿는다는 자체가 사실은 신의 영광을 위하여가 아니라 그런 신을 만들어낸 너희들의 영광을, 신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핑계로 삼아 본격적으로 자기 영광을 취하겠다는, 노리겠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속에 포함되지 않죠. 영접치 아니했으니까. 외부인 이니까. 아까 이야기했죠. 그럼 외부인은 여기서 숫자에 안 넣어주고 제로가 되죠. 제로가 되니까 이게 유일자인 거예요. 오늘 유일자 집사님 오셨네. 이게 유일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2000년 신학은 뭐라고 했어요? 이 유일자를 숫자로 붙잡았어요. 유일자를 뭐로 본다? 1로 봐버렸어요. 왜 그랬을까요? 왜 그런 엄청난 오류를 범했을까요? 이천년 신학은 진리를 위함이 아니고 교회 성장을 위함입니다. 권력을 쥐는데 납득할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신학이었습니다. “신학자님, 어떻게 하면 이 교회가 부흥될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성경을 가지고 대안을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성경을 가지고 합니까? 성경을 봐야 사람들이 신의 계시를 인정해주기 때문에. 권위를 가지기 때문에. 이러한 교회 행사에 그냥 행사하면 사람들이 참석을 안 하지만 성경 말씀에 이런 게 있다고 하게 되면 그들은 거기에 대해서 권위를 가지고 동의할 것입니다.
주께서 그걸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하겠죠. 그게 뭐냐, 전부다 1의 가치, 서로의 영광, 본인이 갖고 있는 1이라는 나의 가치를 위해서 신이고 뭐고 이용할 대로 다 이용해먹겠다는 인간의 1속에 품은 타고난 것. 그것이 바로 옛날 이스라엘이 멸망했던 반복했던 것이 이겁니다. 왜냐하면 왜 반복했다고 하냐면 그 당시 이미 주의 이름이 있었잖아요. 동행했잖아요. 동행했는데 그들은 자꾸 주의 이름이 이렇게 해요. “너희들은 우상을 섬긴다. 우상을 섬긴다.” 이게 이사야, 예레미야 줄줄 부어놨어요. 심지어 사사기 같은 경우에도 우상 섬겨서 문제에요.
그러나 본인들은 절대로 우상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바알 하지만 우선적으로 여호와가 우선이에요. 하지만 그게 우상 섬기는 거예요. 왜? 만날 입술로 여호와를 부르면 뭐합니까? 이스라엘 자기 영광을 위해서 여호와를 이용해먹는데. 우리도 교회라는 말 안 해도 복음만 전하면 주께서 알아서 교회라고 합니다. 자꾸 복음은 안 전하고 “여러분 이거는 교회입니다. 역사는 몇 년 됐고, 이 교회 짓는데 어느 장로가 기도했는데, 이 땅 사라고 해서 땅 샀는데 땅 값이 올라가지고” 만날 이런 소리해가지고. 하여튼 역사적인 정통성을 자꾸 갖추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제 수요일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어떤 목사님이 질문하기를 성만찬에 대해서 성경적 근거가, 구약적 예언이 뭐가 있습니까? 내가 없다고 했죠. 인간의 행위로 반포할 수 있는 것은 예언 자체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지. 다시 이야기하면 그리스도가 왜 죽으셔야 하는지, 증거 하는 것이지 살아서 우리가 뭘 합니까?는 증거 한 적이 없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여러분들 우리나라 애들이 갖고 노는 키드, 또는 부속품을 조립해서 풀어가지고 짜맞추면 뭔가 비행기 되고 동물 되고 하는 것 있죠?
그런 것도 있지만 우리집 같은 경우에는 옷걸이를 사요. 인터넷에서 사게 되면 조립이 와요. 그걸 하게 되면 제일 걱정되는 것이 뭐냐 하면, 혹시 부속하나 빠졌으면 어떡해하나. 다시 환불하면 귀찮은데. 그게 딱 맞으면 기뻐요.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빠진 게 아니고 하나 더 오는 수가 없어요. 아무리해도 필요 없는데 하나 더 오는 수가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다 완성됐으니까, 아이구 하나 더 주고 실수했구나, 하고 그거는 갖다 버리겠죠. 바로 죽음이 그런 거예요. 구원의 장치를 주는데 사실은 제일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십자가에 죽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구원을 뭘로 아느냐 하면 산 인간이 더 살아보려고 줬다고 받아가지고 ‘야,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성만찬하고 세례식하면 되는구나. 이걸 기념하면 되는구나. 반복해서 하면 교회되겠지.’ 그런 것만 하는데 나중에 남는 게 있어요. 보니까 십자가 죽으심이라.
이거 부활됐는데. 이미 부활해서 십자가 이후의 사건. 부활이 있으면 부활의 새 생명만 하면 되고. 부활해서 성령 받아서 말씀대로 살면 되는데, 십자가 남아도네. 갖다버려라. 이제 십자가는 잊어라. 그래서 십자가는 잊어라가 나온 거예요. 십자가를 잊어라가. 교회 갖추었으면 이제 십자가는 필요 없다는 거예요. 교회 될 때까지는 십자가를 외쳐서 교회되는데, 교회를 갖추고 난 뒤에는 이 십자가가 거추장스러운 거예요. 너무 부정적 사고방식이니까. 고객들이 뭐 하나 얻고자 하는데, 부정적 사고방식이...자기들은 그릇이고 뭐 담으려고 하는데, 그릇을 찢으세요. 이거는 말이 안 되잖아요. 그릇에 복을 담고자 왔는데, 자기 그릇을 부정하고, 자기 그릇을 찢어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날 따라오너라. 이런 이야기 하면 곤란하다 이 말이죠. 자기를 부인하고. 그러니까 이게 남아도는 거예요. 십자가가.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자기를 전제로 바쳐요. 붓는다. 전제 또는 관제. 마지막에 붓는 제사가 관제입니다. 또는 다른 말로 전제. 뭘 붓는가. 포도주를 부어요. 피를 붓는 거예요. “주여, 내가 이만큼 했는데 이 역시 피로 덮어주시옵소서. 주의 피로 덮어서 나의 나 된 것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그게 교회에요. 교회 지어놓고 피로 완전히 덮어버려야 돼요. 여러분, 교회 오시는 것은 여러분 무덤 속에 온 겁니다.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성공을 기대하고 기도하러 왔는데, 말씀 속에서 주님이 이 땅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고 왜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고, 진작 죽어야 될 존재인 것을 말씀을 통해서, 세상 생활 속에서 한번 연결시켜 보세요. 죄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마지막 때 디모데 후서 나오죠. 3장에 마지막 때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서로 미워하고 여기에 안 걸린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돈이 없으니까 돈을 사랑하지 않지. 돈이 있어 보세요. 돈이 있는데 왜 하나님 믿죠? 말이 안 되거든요. 돈이 있는데 하나님 왜 믿죠?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돈 자랑할라고. 또 한 가지는 뭐냐, 더 벌게 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딱 두 가지 밖에 없어요. 돈 있다고 마다하는 사람 없어요. 들뢰즈 라는 철학자는 이런 이야기 했거든요. 자본주의는 멸망하지 않는다. 왜? 왜, 자본주의가 멸망하지 않느냐 하면 이게 경제가 아니고 욕망이기 때문에 그래요.
욕망은 우리가 건드리지를 못합니다. 그동안 욕망 대신 하나님이 정해진 규율을 규격대로 갑니다. 그게, 신의 질서가 있거든요. 뭐냐 하면 땅이었습니다. 땅을 줬으면, 땅만 있기 때문에 이거는 하늘의 조치를 수용할 수밖에 없어요. 비 오면 농사 잘 되고. 비 안 오면 농사 안 되고. 이게 끝나는 거예요. 왜, 농경시대기 때문에. 따라서 그걸 관장하는 제일 높은 직위가 제사장이에요. 그래서 봉건 계급이 확정된 겁니다. 그 기초가 뭐냐, 땅에 붙박여 사는 존재기 때문에. 이 땅, 농경시대가 언제 깨졌냐 하면, 사람이 바다를 볼 때 깨졌어요. 이태리, 스페인, 포르투칼. 1492년 콜럼버스가 바다 구경하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무역이 번창하면서, 땅 없는 게 돈을 더 잘 버네. 땅 없는 게.
농사 백날 지어봐야 가난한 사람만 다 망해버려요. 그러나 무역은 바다만 도와준다면 이게 잘 되네요. 그리고 잘 되는 것이 아니고 농사짓는 것보다 더 잘되니까. 농사짓는 대지주 귀족들은 몰락하고 누가 사회에 발언권을 쥐느냐 하면 상공업자들이 발언권을 쥐면서 처음으로 바로 금융자본주의가 섭니다. 그 금융자본주의가 산업자본주의가 되고, 그게 현대자본주의가 되고, 그 자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수많은 기술과 과학자들이 월급 받고 매달리게 되는 거예요. 옛날에 과학은 취미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산업의 일꾼이에요. 그 산업이 발달하면서 무기가 발달하게 되고, 그 무기가지고 서양 이백년 내에 동양을 다 쳐버린 거예요. 동양과 서남아시아를 다 쳐버린 거예요. 아랍 제국을 다 쳐버린 거예요. 소총가지고 대포가 밀어버리는데 중국이 당해낼 수가 없죠. 일본은 미리 항복해버리고. 졌습니다. 하고.
자본주의가 그냥 아이디어만 만든 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역사의 모든 숨겨진, 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버렸을 때 나오는 대체물이 뭐냐 하면 그게 자본주의에요. 자본주의는 뭐냐, 자본의 자기증식 전개다. 증식, 증식 이게 괴물이거든요. 이만하면 됐다 없어요. 왜, 욕망의 바깥 모습이 자본이고 내부는 뭐냐, 자기 욕망이에요. 욕망을 스스로 멈춰요? 뭐 그런 사람이 다 있나? 욕망은 욕망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욕망은 한 대상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히딩크가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오천 명 당회장한테 물어보세요. “목사님. 이만하면 됐죠?” “아직도 배고프다.” “예배당 이만큼 컸으면 됐지요?” “아니야. 헐고 헌금해서 딴 데 이사 가서 더 크게 지어야 해.” 왜? 아직도 배고프니까. 그에 딸린 교인들도 같이 배고파하면서 자기 욕망에 자기 살을 자기가 도려내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그게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재산, 돈 다 빼앗기고, 청춘 다 날아가고. 지는 상급 받는다고. 천국도 못 가는데 무슨 상급 받아요. 자기를 믿는데 무슨 예수를 믿어요. 자기 자신을 믿는데, 자기가 만든 교회를 믿는데, 어떻게 예수를 믿어, 교회가 예수를 가리고 있는데, 안 돼요.
10분 쉽시다.
이한례(IP:183.♡.100.54)
15-02-23 15:35
가락-요한복음5장43(아버지의 이름으로)150115b-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자본주의 이야기를 왜 갑자기 했느냐 할 때, 예수님 당시나 이스라엘 당시나 그들이 거기에 미혹될 수밖에 없던 여건이 있었어요. 상황이라는 게. 여러분 상황이 우리가 지배하는 상황이 아니고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인간이 놓여져 있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어쩔 수 없다. 그 이스라엘 이런 사람들이 어쩔 수 없었던 거예요. 여기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교회라는 것도 자본주의 분위기속에서 교회가 자본주의화 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이름이 필요한 거예요. “하나님 반듯하게 해가지고 좋은 교회 만들어서 갖다 바치겠습니다.” 이거는 상황을 몰라서 그래요. 이 상황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헛소리하는 거예요. 마치 베드로가 “주님, 제가 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하는 것과 똑같은, 철딱서니 없는 거예요. 베드로가 그런 소리 할 때 갑자기 소녀가, 베드로가 자기 권력자를 생각했거든요. 예수님을 뭐하는 최고 권력자를 생각했지만. 막상 지적질 한 것은 누구냐, 연약하고 연약한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것은 없지만. 그 연약한 여학생이 “아저씨 나 봤는데. 한패잖아?” “고 입 안 다물어!”
평소에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그걸 통해서 이만기라는 거대한 천하장사가 넘어져요. 천하장사가. 골리앗이 다윗 앞에 넘어지듯이. “나는 수제자다. 나는 된 사람이다. 내가 얼마나 큰일을 많이 했는데. 내가 물위를 걸었고, 오병이어에 참석했고, 내가 귀신을 쫓아냈고.” 하는 그 거목이 예수도 안 믿은 그 착한 애한테 넘어진 거예요. 그래서 좀 안다고, 제가 민수기 끝에 그 이야기 했잖아요. 좀 안다고 목사가 갑질하지 말라고. 남들 보기에는 존경받죠. 마귀는 웃고 있습니다. “백날 니가 위대한 목사? 어린애 하나한테 니가 넘어질 거야.” 항상 빨리 되돌아가야 돼요. 우리 자리는 죄인의 자리지, 뭔가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자의 자리, 그런 자리는 없습니다.
그런 자리는 없어요. 남들이 그렇게 씌어주더라도 본인은 빨리 그 자리를, 그 가면을 벗어 던져야 돼요. “내가 뭐 했나? 뭐 했는데?” 이래 되어야 되죠. 그것이 바로 주의 영광이야기, 너희들이 나의 영광보다도 무슨 영광? 너의 영광만 하니까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이 영광 문제를 계속해서 거론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45절, 46절, 47절, 거기에 모세이야기 나오는데, 거기 모세 율법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방금 한 것과 관련되어 있는데요. 아까 2호선 이야기했었습니다. 2호선은 누가 깔았다? 주님이 깔았다. 깔아놓고 거기에 이스라엘을 달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탈선해버렸죠. 그래서 이방 사람이 수시로 들어가서 한 거죠.
그럼 그 이방사람,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가서 운전사가 되는 겁니다.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님이 그것을 몰고 하늘로 올라갔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간 것은 이스라엘도 함께 하늘로 올라간 거예요. 그렇다면 남아있는 율법의 기능이 뭔가 하는 거죠. 율법의 기능이 뭐냐 하는 겁니다. 제가 수련회 할 때 이게 상당히 난해했을 건데, 설명을 친절하게 충분히 못해드렸습니다. 율법은 한 예를 들었죠. 율법은 속죄제가 있잖아요. 속죄제가 있다는 말은, 속죄제가 죄를 씻어주는 제사를 위하여, 죄가 무엇인가를 만들어질 필요가 있어서 여기에 필요한 법이 만들어져요.
우리는 생각하잖아요. 법 만들어 놓고 못 지킬 때는 제사 동원하면 되잖아. 이래 하잖아요. 그걸 순서를 바꿔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갈 어린양, 예수님 중심이기 때문에. 모든 율법은 예수님을 겨냥해서 하잖아요. 예수님이 이미 제사제로 확정된 이상은, 죄는 우리가 짓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서 나와야 그게 죄가 돼요. 우리가 백날 지어도 우리는 죄 못 지어요. 말이 이상하죠. 우리가 아무리 해도 내가 느끼는 죄와 주님이 느끼는 죄가 달라요. 아직도 멀었어. 그거는 죄 근처도 못 갔어. 계속 더 지어야 돼. 이래 된다 말이죠. 아무리 따라 바쳐도 죄의 궁극성은 우리는 몰라요.
왜? 유일하게 저주받으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그 분만이 죄를 알아요. 우리는 그 죄에 접근해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죄가 뭐냐, 예수님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해달라는, 지난 수요일에 한 건데, 주님이 말씀을 지켰으니까 의인이잖아요. 그게 자기 뜻이에요. 근데, 의인인데 그 의인을 저주받게 만드는 그 것이 누구 뜻이냐, 아버지의 뜻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의가 저주를 받습니까? 그래서 자기는 안 하려고 한 거예요. 하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 의가 저주를 받겠나이다. 이렇게 한 겁니다.
의가 저주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저주 속에서 비로소 의가 나와요. 의는 어디서 나온다? 십자가에서 나오거든요. 십자가는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저주받는 거예요. 저주에 가담되지 않으면 의를 구현할 수가 없어요. 이 저주에서 나온 게 뭐냐, 율법이에요. 모세는, 율법은, 제발 좀 저주받으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뭐냐, 율법을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하니까, 제발 저주를 피하고 복 쪽으로 달려가는 겁니다. 복이 있는 쪽으로. 그러면 뭘 놓치느냐 하면, 자기 존재만 생각했지 중보자를 놓치는 셈이 돼요.
성경 여호수아에 보면 그리심산과 에발산이 나와요. 둘 다 900M 가까이 되는데, 여기에 에발산이 있는데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법궤가 있어요. 여기서 서로 마주보면서 6:6, 6지파, 6지파, 12지파를 나누어서 6대 6으로 나눠가지고 서로 뭐냐, 여기 그리심산에서는 축복을 앞에 보고 외치고 이쪽 에발산에서는 앞을 보고 저주를 외치는 겁니다. 그렇게 외칠 때, 저주를 외치는 지파에서는 거의 90퍼세트가 종의 자녀들이에요. 잡종이죠. 종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족보에서는 구원받지 못할 족보가 종이죠. 하갈 출신들. 그리고 이쪽에서는 정실부인, 라헬과 레아 출신들은 축복을 선포합니다.
자, 이렇게 할 때, 그들은 상대방이 저주한다는 말은, “이런 거 하면 저주받습니다.” 하면 상대방이 화답을 해야 해요. “아멘. 그러합니다.” “이런 거 하면 복 받습니다.” 하면 상대방이 “아멘. 그러합니다.” 화답을 해줘야 돼요. 근데, 이것이 민수기에 가면 온통 저주만 이야기하고 아멘을 해야 해요. 또 화답을. 자, 그렇다면 사람들은 율법을 봅니다. 율법은 뭡니까?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할 때에, 방향이 복을 받아야 돼야 겨우겨우 이스라엘이 유지된다는 인식이 들겠어요? 안 들겠어요? 당연히 들겠죠. 심방 가서 신명기 28장 펴놓고 할 때, 대심방 할 때,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할 때 그 뒷부분 이야기 안 해요.
1절부터 15절까지만 지켜야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했지. 나머지기, 무려 세 배, 네 배 되는 분량이 뭐냐 하면, 빌어먹는 거거든요. 심지어 레위기 같은 경우에는 니가 빌어먹으려고 작심을 했어. 백날해도 빌어먹게 되어 있어. 이게 레위기나 신명기나 마지막 대목이 그리 되어 있어요. 니가 하나님을 알아? 아이구 진짜 웃는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저주받게 돼있어. 너희들이 딴 나라에 팔려 갈 때에, 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몰랐구나. 그렇게 후회하면서, 팔을 치면서, 다리를 치면서 가거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독수리 날개 업어서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나오니까 사람들은 일이 끝난 줄 알고 “고맙습니다.”를 한 거예요. 집어넣어 놓고 빼내간다는 생각을 못하고. 집어넣어 놓고 빼내가야 제 2의 출애굽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지금 인간들은 연극배우들이거든요. 연극배우가 연극을 너무 하다보니까 이게 실제인줄 알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최불암 하고 김혜자 하고 너무 전원일기에 부부로 나오니까 사람들은 뭐로 봅니까? 전부다 부부인줄 알고 있어요. 부부 아니거든요. 둘이 잘 맞아서 부부 같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연극배우로 한 거예요. 요렇게 은혜로 왔다가 은혜로 온 것을 잊어버리고 까불거든, 까불게 되기 마련이고, 그래서 왔던 걸 그대로 다시 없애버린다. 그것은 뭐냐, 주께서 이 땅에서 구원할 때 오라고 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나를 부정하고 죽이고 그래서 아무도 자력으로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주께서 부활의 영으로, 성령으로 오셔서, 다시 부활의 능력으로 건져간다는 고걸 미리 보여주시기 위해서 구약에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구약에서.
이게 창조에 있어요.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땅하고 바다하고 동시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가 먼저 있고 바다가 물러가니까 땅 됐잖아요. 그렇잖아요? 바다는 2일이고 땅은 3일이니까. 바다가 주도권을 쥐고 있어요. 그게 예레미야에 나옵니다. 예레미야 31장에 보면 “바다야 땅을 침범하지 마!” 이게 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어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게 왜 언약 안에 포함 돼요? 기류에 의해서 바다는 땅을 침범하지 않는데, 이걸 왜, 약속 때문에 침범 안 하지 약속만 없으면 얼른 침범 했다는 뉘앙스를 준다 이 말이죠.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다니엘에 보면 바다에서 짐승이 나와요. 바다가 땅을 지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다에 사는 짐승이 땅에 모든 권세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통제력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동안 주님께서 바다야, 침범하지 마라는 말은 “바다야, 내가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와 있데이. 그러니 니가 어디를 쳐. 내가 있는데.” 주님이 떠나가 난 뒤에는 “바다야 니 맘대로 해!” 요한계시록에 짐승이 완전히 땅을 난도질을 해버려요. 온 천지에 완전히 인을 박아가지고 지 사람 다 만들어놨어요. 자기 사람 다 만들어놨어요.
그러면 바다가 땅을 침범한다는 것은 창세기 1장에 대한 부정이죠. 이게 혼돈이에요. 혼돈. 혼돈입니다. 창조의 의미는 창조 그대로 유지한다고 창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창조가 다시 원위치, 혼돈으로 가야 비로소 그때에 이 땅이 누구를 위하여 창조했는가를, 주인공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걸 제가 지난 설교에, 며칠 전에 주일 낮 설교 했잖아요. 창조로부터 출발하지 말고 창조에서 어디를 거친다? 창조에서 다시 혼돈으로 가서, 그러니까 살았다고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해야 누가 나를 살려주시죠? 주님. 천지를 창조하신 그 분이 우리를 살려주는 거예요.
천지를 창조하신 모든 프로그램, 원리가 우리를 살리는데 이것이 적용이 돼요. 우리를 살리는데. 그럴 때, 죽었다가 사는 거예요. 탕자가 그러하듯이. 탕자이야기 아시죠? 항상 맏아들과 대비해야 돼요. 맏아들은 뭘 기억하느냐 하면, 창조의 과거를 기억해요. 그러나 아버지는 탕자를 맞이하면서 뭣에 입을 다뭅니까? 자신의 아들에, 탕자의 과거에 입을 다물죠. 근데 누가 지껄입니까? 큰아들은 자꾸 말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지금 내 앞에 있다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왜? 이게 과정은, 아들이 탕자된 것은 하나의 오기 위한 과정이란 말이죠. 근데 니가 그게 누락된 거예요. 잃어버린 경험이 없으니까.
이거는 천국백성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경험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이 없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거든요. 뭐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들어가지 않으면 천국에서는 안 받아 줍니다. 안 받아 줘요. 거지나사로와 부자이야기에서 부자가 죽은 나사로의 존재를 보여준다는 데, 존재가 아니고 그 나사로는 연극배우에요. 실제 존재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아내지 못하면 동생들 다 지옥 갑니다. 성경에서 예수님 어떻게 찾아냅니까? 니가 죽지. 왜 죽을까? 늙어죽겠죠. 늙어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여서 죽는 거다. 주님이 죽여서 죽는 거예요. 왜, 주님이 먼저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내가 죽은즉, 예수님이 죽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는 거예요. 장신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성경에서는 복음을 찾는데 장신에서는 뭘 찾는 줄 알아요. 인권문제 찾아냅니다. 이게 옛날에는 안 그랬어요. 근데 십 수 년 전부터 바람이 불었어요. 인권문제, 그리고 통일문제. 미쳤어. 미쳤어. 이거는 미쳤어. 문재인, 뭐 박근혜 문제. 이게 성경에 왜 나옵니까? 좀 젊은 사람은 생태학문제. 환경문제. 세상에 지금 말아먹으려고 하는데 환경 따져서 뭐하는데. 유기농법. 여러분 유기농법이 환경 망치는 거 몰라요? 환경 망치는 거예요.
유기농법은 환경은 망치고 인간은 살겠다는 수법이에요. 놀랍게도 유기농법이. 땅과 더불어 산다? 인류는 땅을 살릴 수가 없어요. 인류는 가만히 놔둬도 땅이 썩게 되어 있어요. 거기다가 뭔가 농사라도 짓는다 하면 더 썩어버려요. 소금기가 계속 있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한다는 자체가 죄입니다. 존재하면 죄에요. 바르게살기, 바르게 살고 말고 내가 여기 있다는 자체가 주변에게 피해를 줘요. 주변에. 집에 화장실이 하나인데 식구 네 명이 있으면 피해줘요. 아버지가 들어가서 신문 보죠. 마누라하고 딸은 나오라고 쿵쿵거리죠.
내가 여기 있는 게 왜 피해를 주느냐 하면 이 세상은 경쟁사회거든요. 내가 이 회사에 취직했다. 다른 사람이 울고 있어요. 뭐, 바르게 산다구요? 니 때문에 밟힌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뭐, 무역회사에 미생 되어서 슬프다고요? 장그래가 어떻고? 거기 못 들어 간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지만 생각해요. 이 율법이, 모세 율법은요, 오실 그리스도를 위해서 한 것이지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주신 율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