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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5겨울수련회 영상보기강의[수련회]

2015겨울수련회 영상보기

이름 : (IP:119.203.239.154)

2015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목: 불편한 여정

강사: 이근호 목사

*첫번째 강의 안내: 11일 일요일 저녁 8시~시50분

*두번째 강의 안내: 11일 일요일 저녁 9시~9시50분

*세번째 강의 안내: 12일 월요일 오전 10시~10시50분

*네번째 강의 안내: 12일 월요일 오전 11시~11시50분

*다섯번째 강의 안내: 12일 월요일 오후 4시~4시50분

*여섯번째 강의 안내: 12일 월요일 오후 5시~5시50분

*일곱번째 강의 안내: 12일 월요일 저녁 8시~8시50분

*여덟번째 강의 안내: 12일 월요일 저녁 9시~9시50분

*아홉번째 강의 안내: 13일 화요일 오전 9시~9시50분

링크 : http://www.youtube.com/playlist?list=PL5N4qFOJSulzE50IGAeE3-JQIIWDC9sWQ, Hit:1004

이근호(IP:119.♡.93.36)

15-01-14 07:09

링크 라는 곳을 치시고 들어가야 합니다.

관리자(IP:203.♡.42.222)

15-01-14 10:06

서경수(IP:118.♡.140.98)

15-01-14 20:47

전문가의 녹화 솜씨는 질이 다르네요. 강의해 주신 목사님과 촬영해서 올려주신 최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이근호(IP:119.♡.93.36)

15-01-20 10:37

2015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가 시작하지 않은 일이 되길 원합니다. 주께서 시작한 일이 마무리까지 아버지에게 기뻐하실만한 말씀의 모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민수기를 하면서 구원에 대해서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 구원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한다는 생각을 갖게 마련인데 성경의 민수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은 이게 있어야 돼요. 저는 이렇게 보는데 쟁반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쟁반이란 표현을 한 것은 사실은 자리, 위치를 쉽게 하기 위해서 쟁반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횟집에 가본적은 없지만 영화 같은 데 보면 가만있는데 쟁반이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골라먹을 수 있는, 빨강 쟁반, 노랑 쟁반을 본적이 있습니다. 사달라는 것 아닙니다. 그때 초밥이 쟁반에 담기지요. 어떤 손님이 오느냐에 관계없이 쟁반의 색깔은 한정돼있습니다. 노랑 쟁반, 빨강 쟁반. 안 가봤어요?

그 쟁반에 따라서 정해진 것처럼 구원은 본인의 결단에 의해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민수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 빼버려요. 인간의 구원 시도는 다 빠집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떻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걱정 되겠지요. 쟁반이 있어요. 주께서 쟁반을 쭉 갈아줍니다. 쟁반에 실리면 그 쟁반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표현하는 겁니다.

쟁반이니까 방금 제가 이야기하기를 쟁반의 색깔이 한정돼있다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는 그 자리가 종류별로 네 가지로 확정돼있습니다. 쟁반의 종류가 네 가지라는 말은, 구원이란 것은, 인간이 구원받고자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미리 준비된 미리 놓여있을 때 그 자리가 천국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그 자리가 네 가지인데 그 네 가지를 미리 말씀드리면, 정실이냐? 아니면 종이냐? 세 번째는 라헬 계통이냐? 네 번째는 레아계통이냐? 이렇게 네 가지로 끝. 네 가지로 끝나버립니다. 무슨 감리파, 침례교파 없습니다. 장로교파 전혀 없습니다.

정실 아내의 종이란, 딸려 나오는 하녀지요. 한 사람 야곱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나온 거대한 쟁반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란 쟁반이 나오지요. 이스라엘이란 쟁반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전에 정실이냐, 종이냐, 라헬 계통이냐, 레아 계통이냐? 이렇게 네 가지의 표현형이 나옵니다.

제가 표현형이라고 사용하는 것은 1865년도에 멘델이 발견한 멘델의 법칙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유전형과 표현형이 있습니다. 유전의 법칙에 우성과 열성의 법칙이 있어서 우성이 앞에 나오면 열성은 뒤에 숨어있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전에 있어서 어떤 형질이 있고 그 형질이 서로 대비가 될까 대립형질이라 이야기하는데, 멘델의 법칙에서. 대립형질로 모든 것이 정해졌다는 말은, 구원은 자신의 요구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내 쟁반을 골라잡을 입장이 못 된다는 거예요.

이러한 논리가 우리에게 오늘날 어떤 평안을 주느냐 하면 내가 설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고 어느 쟁반에 담겨서 그런 식으로 가기 때문에 구원이 결정돼버려요. 확정 내지는 결정이 된다고. 구원의 결정. 따라서 우리는 내가 뭘 하면 구원되느냐고 기도할 필요 없고 어느 쟁반에 담겼는지 이것만 생각하면 구원은 끝나는 거예요.

정실부인, 종이라 하는 것은 야곱의 정실 아내가 라헬과 레아고 그 다음에 라헬의 종은 빌하, 레아의 종은 실바가 됩니다. 빌하, 실바, 라헬, 레아, 네 명의 여인이 야곱과 결혼해서 열두 명의 자녀를 생산하죠. 열두 명의 자녀는 표현형들이 상호 겹쳐져 있는 겁니다. 겹쳐져 있다가 민수기에서 특히 레위지파가 부각되는데, 레위지파가 부각되면서 쟁반 색깔대로 정리되는 단계가 민수기 단계에요.

제가 지금 강의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 이야기는 전혀 없어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 게 아니라 서커스 쟁반 돌리기 하듯이 주님께서 알아서 유전요소, 대립형질로 게임을 벌이는 겁니다. 던지듯이.

라헬, 빌하, 레아, 실바, 이 전체가, 쟁반 색깔이 네 가지지요. 네 개의 색깔이 구성된 지평, 지평이라 하면 어려우니까 평지, 그냥 벌판, 넓은 판때기를 하나님의 구원이라 하는 겁니다. 구약 민수기처럼 봐야 되는데 신약 로마서 10장에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내가 예수 믿으면 구원되는 줄 알고 있어요. 구원에 대해서 구약은 나의 모든 손을 다 떼게 만듭니다.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경우는 없어요. 천국에 그런 식으로 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믿음을 안 믿으면 돼요. 그러면 되는데 인간은 자기 믿음을 안 믿을 수 없는 문제고.

지금부터 이 표현형을 설명하기 위해서 잠시 멘델의 법칙을 설명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완두콩이 있는데 완두콩의 특징이 자가 수정 하니까 그 신부가 완두콩의 수술을 잘라내고 꽃봉오리에 암수술에다 다른 데서 가져온 수술을 집어넣었어요. 잡종이 생기지요. 키 큰 것과 키 작은 것을 해보니까 중간 쯤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중간 쯤 되는 게 아니고 전부 큰 것만, 긴 것만 나왔어요. 그걸 우성이라 하는데 뭔가 한쪽으로 몰아준 겁니다. 저기는 숨어있고.

멘델의 법칙에서 우열성의 법칙이라 하는데 그게 섞이지 않고. 생물시간이 아니니까 그만두고요. 제가 멘델의 법칙을 사용한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에 나서면서 뽑아내려는 게 있어요. 종과 정실부인의 차이, 그 차이를 통해서 구원을 시켰다는 겁니다. 종과 정실부인의 차이로 하나님이 숨겨놓고 자신의 구원의 원리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면 종과 정실부인을 그렇게 하시고자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에 보게 되면 아브라함에게 하녀가 있었는데 이스마엘의 엄마 이름이 뭐죠? 하갈이죠. 하갈과 사라와 비교해요. 사라는 아브라함의 정실부인이고 하갈은 여종, 하녀에요. 우리 생각에는 개인의 사생활, 가정문제거든요. 하나님께서 이 가정문제를 두 개의 노선을 만들어버려요. 사라 쪽은 천국 가고 하갈 쪽은 지옥을 갑니다.

보세요. 우리가 만약에 여기 있다면, “나는 천국 갈까, 지옥 갈까?” 우리가 이렇게 생각은 하는데 그 생각이 완전히 무산돼요. 교회 다녀서 구원받아야지. 이런 생각은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그건 본인 생각이에요. “나는 이 땅에서 고생 많이 했으니까 죽어서는 편하게 살아야지.” 혼자 많이 하세요. 그것은 본인의 염원에 해당되는 것이고 실제로 성경에서는 네가 어느 노선에 있는지 묻습니다. 아까 쟁반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어느 열차에 타고 있느냐만 물어요.

종의 열차에서 나오는 것은, 제가 갈라디아서 4장을 이야기하는데 하갈 노선의 특징이 있어요. 그것은 행함으로 구원입니다. 이걸 구약에서 우상숭배라고 이야기합니다. 십일조 지켜서 영광 돌리세. 이게 전부 우상숭배에 해당돼요. 간음하지 않아서 영광 돌리고, 살인하지 않아서 영광 돌리고, 말씀을 지켜서 영광 돌리고. 전부 다 우상숭배에 해당돼요. 우상숭배란 것은 인간의 행함이 가담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 발상이 우상숭배를 만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는, 제가 나중에 강의하면서 자아와 주체를 구분할 건데, 일단 자아는 뭔가 행하게 되면 그 행함의 모든 기대가 본인 소유로 환원되게 돼있어요. “내가 했잖아. 니가 한 게 아니고 내가 했어. 내가 기도하고 내가 헌금했어.” 내게로 돌아오기 때문에 이것은 결코 누구를 믿어본 적이 없는, 믿고자 해도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행함이 자기에게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자기 사슬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어요. 어떤 묘수를 써도 이걸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누가 했지? 이러면 우리는 기분 나빠요. 어떤 계획이 있고 기대가 있으면 사람이 그 기대와 계획을 누가 해주면 기분 더러워요. 내가 세운 계획은 내가 해야 기분 좋아요.

영화에 보면 그런 것 있잖아요.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금강산에서 칼을 갈았단 말이죠. 그러다 중국집에서 만두 먹다가 만나서 이층에서 싸우는데 칼을 들고 마지막 원수의 목을 치려고 하는데 원수가 스스로 삐끗해서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어요. 내가 죽인 게 아니고 지가 실수해서 죽었어요. 십년 동안 금강산에서 무술 닦은 것, 헛수고가 될 때 기분 굉장히 더러워요. 내 목적을, 내 기획안을, 내 결재를 손 안 대고 어떻게 해결되느냐 말이죠. 회사에서 부하사원이 결재 내니까 상사가 가로채서 그는 승진해서 우리는 미생 되고 지는 완생 돼버리고. 그러잖아요.

사람은 어떤 생각, 기대를 하던 간에 그 모든 결과는 나한테 와야 돼요. 그래서 구약의 우상의 특징은 조건이 붙어요. ‘나를 위하여’ 그래서 출애굽기에 보면 너를 위해서 신을 섬기지 말라. 너를 위해서 신을 섬기는 것은 전부 다 우상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죄목이 우상숭배였어요. 이스라엘이 왜 멸망했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활동했기 때문에 멸망한 겁니다. 요새 말로 번역하면 교회가 교회를 위해서 활동하면 그게 우상숭배 단체가 돼요. 선교단체가 선교단체를 위해서 활동하면 우상숭배의 선교단체. 그게 어느 노선이냐 하면, 하갈 노선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하갈은 자식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라는 자식이 없어요.

성경에서는 어떻게 구원받느냐 하면, 멘델에서는 우열의 법칙이지만 성경 전체에서는 딱 한 개의 법칙입니다. 이게 부재의 법칙, 없는 것이 있는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미 있잖아요. 있으니까 우리가 존재하지요. 존재한 사람이 부재한 장소를 찾아가야 되는데 찾으려면 본인이 존재로 유지되어서는 못 찾고 본인이 부재에 합당한 존재가 돼야 돼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게 갈라집니다. 어떻게 갈라지느냐 하면, 우리가 그냥 내가 행동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내 행동이기 때문에 절대로 갈라지지 않아요. 하지만 외부에서 호명합니다. 너는 유다지파, 너는 갓지파, 너는 아셀지파, 이렇게 배당해버리면, 위치를 정해주면 이것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지정된 자리를 부여받고 부여받은 그 자리로서 그 자리가 뿜어내는 표현형, 구원에 합당한 구원의 무늬지요. 구원의 무늬를 보여주게 되면 그 전체가 모여서 구원의 벌판이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강의하면서 제일 강조하는 것은 이미 결정론이에요. 이미 확정된 겁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구원된다는 조건이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내가 예수 믿었으니까 앞으로 바르게 살아야지, 라는 것 자체가 성경에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르게 산다는 것이 상당히 교만한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바르게 살아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바르게 살겠는데 네가 바르게 사느냐, 바르게 못 사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바르게 살고, 못 살고 간에 자리가 먼저에요.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우리의 존재를 부재의 존재로 분열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분열의 방법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냥 여러분 알고 계세요. 나중에 물어본다고. 열두 지파가 나올 때 모세가 지팡이 들고 나왔습니다. 맞지요. 처음에는 지팡이로 물 갈라졌잖아요. 그 다음에는 지팡이는 날아가고 법궤가 있어야 돼요. 법궤를 앞장 세워서 이스라엘이 진행해요. 법궤가 되려면 지파가 여기에 전적으로 매달려야 되는데 그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 하나가 우뚝 등장하면서 요셉지파가 둘로 나눠지지요. 열두 지파가 열세 지파가 되면서 하나가 열두 지파 전체를 독립해서 대표해서 나온 지파가 레위지파가 되는 겁니다.

벌써 민수기 2장 시작한 거예요. 사실은 민수기 한다고 하면 민수기를 읽어 와야 하는데 그렇잖아요. 이건 예의 아닙니까. 수련회에 대한 예의거든요. 그런데 제가 전혀 그런 걸 기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오세요. 쟁반은 마련해드리겠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동남서북으로 위치 이동, 위치 변화하면서 정실부인과 종의 자식을 구분해요. 잡종과 순종을 구분하면서 열두 지파가 홍해에 왔을 때는 상호 겹침, 이게 종인지 누군지 관계없이 막 섞여서 모세가 그냥 지팡이 들고 홍해를 건너왔던 그들이 지파별로 레위지파가 부각되면서 다른 지파는 자기 쟁반으로 전부 다 정리정돈이 돼버려요. 그리고 정말 고마운 것은 어떤 쟁반이든 관계없이 중앙에 있는 법궤를 관장하는 것은 레위지판만이에요. 레위지파가 법궤를 관장한다는 말은 너희들이 어떤 위치에 있든 간에 하나님은 레위지파만 받아서 너희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레위지파는 땅이 없어요. 땅이 없다는 말은, 제가 아까 무슨 법칙이라 했어요? 부재의 법칙, 없는 게 있는 것을 구원하는 원리를 적용시키는 겁니다. 없는 것 앞에 뭘 붙이면 돼요. 개뿔도 없는 것이 또는 개 코도 없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때 머리 둘 곳도 없었어요. 개 코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뭘 달라고 하니까 뭐 이상해. 뭐 있어야 주지. 예수님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에요. 너희 것을 없애주마. 이것 줘요. 부자 청년이 주님 앞에 왔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어떻게 영생을 얻겠습니까? 할 때 모든 것을 없애주마. 모든 것을 없애고 날 따르면 너에게 영생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부자 청년이 왜 근심했는지 아직도 미스터리인데요. 저는 이렇게 봅니다. 부자 청년이 오기 전에 이미 우상숭배자고 우상숭배는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자기가 부자였다는 것은 그동안 착하게 살았기에 하나님께 보상받은 축복으로 본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축복을 없애라고 하니까 그 축복이 돈이 날아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 그동안 마일리지 쌓았던 나의 착함, 선함 없이 영생 얻는 방법을 부자는 알 수 없었던 겁니다. 왜냐? 부자는 평소에 행함이기 때문에 아무리 주님을 찾아와도 주님과 자기에 설정된 모든 관계는 나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도로 회수가 되는 거예요. 내 일에 내가 주인공이 되는 그 사슬에서 주님이란 것이 나의 일에 후원해줄지언정 거기에 내 허락 없이 끼어들 순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까 제가 한 이야기가 인간은 자기 바깥에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구원 못 받는 겁니다. 자기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기도를 해도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이미지로 상상하면서 나는 기도하고 또 다른 내가 옆에 서서 사진 찍고 있어요. “네가 벌써 두 시간 반째 기도하고 있구나. 착하기도 해라.” 기도하고 난 뒤에 귀여워, 어쩌고. 헌금 내면서 옆에서 헌금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카메라고 인증샷 찍으면서, “세상이 그 어려운 가운데서 이런 과부와 같이 생활비 다 바치고. 이렇게 대견할 수가.” 사진 막 찍는 거예요.

우상숭배는 누굴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따라서 자기를 위해서 우상숭배를 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달리 할 수 있는 행함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을 신을 위하여, 영광을 위하여, 예수를 위해서 무슨 말을 갖다 붙여도 그게 전부 다 나를 위한 우상숭배의 조치로 다시 나한테 회수하게 돼있어요. 이걸 하나님이 아시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은 너는 네 마음대로 살고, 구원은 내 마음대로 표현형, 무늬를 입혀줄 거예요. 그런데 그 무늬는 우리가 딛고 있는 쟁반에서 솟구쳐 나올 거예요.

처음에 유다고 아셀지파, 유다지파, 무슨 지파로 나오더라도 그것은 네 가지로 정립이 돼요. 아까 라헬, 레아, 빌하, 실바, 이 네 가지의 무늬로 모든 게 정리되고 맙니다. 그러니 아셀지파가 어떻고 단지파가 어떻더라도 그것은 따지지 말라는 거예요. 왜? 레위지파가 떴거든요. 레위지파가 뜨는 동시에 다른 지파는 취지에 의해서 조정이 돼있어야 돼요.

그럼 레위지파는 뭐냐? 레위지파는 해안선이라고 보면 돼요. 무슨 해안선이야 하면, 거룩과 비-거룩의 맞닿은 선, 경계선입니다. 원래 경계선은 면적을 갖지 않아요. 두 세력이 맞닿으면 끝나니까. 맞닿으면 자동적으로 생기는 거거든요. 경계선에는 폭이 몇 센티입니까? 묻는 게 잘못이에요. 경계선은 경계선 자체로 끝나는 거예요. 경계선에서 폭이 몇 센티이냐고 묻는 것은 마치 경계선이 뭔가 있음을 이야기할 때는 모르지만 경계선 자체가 흔적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폭이 없잖아요. 그게 뭐냐? 부재에요. 없어요. 없는데 생기는 거예요. 뭐가? 경계선이.

여자들이 나이 오십 넘어가면 경계선이 많이 생기잖아요. 보톡스 해서 당기고 하는데. 경계선은 자연발생적으로 주름이 잡히면 스스로 생기잖아요. 거룩과 비-거룩은 만나서는 안 되는 겁니다. 만나게 되면 한쪽이 거룩이 비-거룩을 죽입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모세에게 나를 본 자는 죽는다는 겁니다.

죽는다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사라지는 것, 없어지는 것, 처음에는 그런 뜻으로 생각하지요. 이 땅에 살다가 없어진다. 참 없어지기만 하면 좋겠는데 내가 존재로 볼 때 없어지는 것이 죽는 거예요. 그러나 역할로 보게 되면 이것이 영원합니다. 없어지지 않아요. 사람은 제가 안 죽는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온 거예요. 사람은 죽더라도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한 번 태어났으면 영원히 죽지를 않습니다. 이게 사람이 환장할 짓이에요.

아프잖아요. 그러면 죽으면 되는데 죽어도 안 없어져요. 누가? 내가. 왜? 내 역할 때문에. 내가 예수를 챙기지 않고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그 역할은 영원히 지옥까지 가져가셔야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게 된 역할은 천국까지 계속 가져가야 돼요. 여기서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그래요.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네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고 네 속에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히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소실시킬 수 없는 입장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과 비-거룩이 만나면 죽는다는 겁니다. 우선 일시적으로는 목숨이 끊어지는 걸 말하겠지요. 그러면 죽으면 안 만나면 돼지. 안 만나면 비-거룩 속에 거룩을 남겨서 그들 속에 하나님의 성소를 세우는 게 목적인데 이게 안 만나게 되면 비-거룩 속에 거룩을 세울 수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레위지파 속에 무슨 구멍을 만들어요. 부재의 자리인데 이 부재의 자리에는 사람이 들어가지 않고 어린양이 들어갑니다. 어린양이 들어가서 여기서 제사를 드려요. 레위지파는 그 구멍의 경계선에 위치해 있습니다. 접근하지 말라고. 그러면 이것은 시내 산에서 봤던 거룩이 지상으로 내려온 거예요. 지상으로 내려와서 열두 지파가 거룩한 나라가 되는 겁니다. 거룩한 나라가 된다는 말은, 위에 있던 거룩이 모세도 접근할 수 없던 거룩이 지상에 공존하고 동행한다는 뜻이거든요.

거룩과 비-거룩이 만나면 죽는데 그 무서운 저주에 어떻게 여기에 자리 잡을 수 있느냐는 그 문제가 생기는 거죠. 거룩과 비-거룩이 만날 때 이쪽이 다 타죽잖아요. 그러면 안 되잖아요. 비-거룩이 거룩과 유지하려면 같이 동행하면서 같이 살아야 되는데 사는 방식을 하나님 쪽에서 제사라는 방식으로 해안선, 경계선을 만들어요.

그러면 어린양이 죽으니까 죽음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지요. 가운데 죽음이 있고, 죽음 근처에 레위지파가 거룩이니까 포위돼있고 그 가운데 열두 지파가 하나님이 정해준 자기의 쟁반 색깔대로 무늬대로 재배치를 받으면서 뭘 보여주느냐? 우리는 종 출신입니다. 우리는 정실부인 출신입니다, 라는 식으로 여기서 배치하는 것이 바로 민수기 2장의 언약주변도입니다. 언약주변이 그렇게 돼있어요.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 다시 정리해드리면, 늦게 오나 일찍 오나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란 우리 계획이 아니고 우리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일방적인 하나님의 설계 도안이 제시된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호출된 거죠. 호출될 때 네 행위를 버리고, 그냥 네 행위와 상관없이. 행위를 버리고 하면 또 버리는 행위를 해야 되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그냥 막 살라 이 말이에요. 그냥 와. 그냥 와서 쟁반이나 배당받아서, “나, 이것 받았다고.”고 그 이야기하면 그것 모으면 그것이 바로 구원된 단체가 되는 겁니다. 구원의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되게 쉽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게 되면 여기서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왜 종과 정실부인으로 나누어지느냐? 갈라디아서 4장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아브라함에게 두 부인이 있었다. 하나는 하갈이고 하나는 사라인데 하갈은 종이고 이스마엘이란 자식이 있었다. 그런데 사라는 임신을 못해서 자식의 부재, 자식이 없어요. 있는 자식들은 지옥 가고 없는 자식은 천국 간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간단하게 해서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준 하나님의 계시가 우주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렇게 보시면 돼요. 전에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이순신 장군 죽었다고 지진 일어납니까? 아니지요. 이순신 장군 죽었다고 갑자기 태풍 불어요? 그런 것 없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돌아가실 때 하늘이 까맣게 됐지요. 지진이 일어났지요. 죽은 자가 살아났지요. 그동안 인간들은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고 해서 자연은 자연대로 흘러가고 인간은 인간대로 따로 흘러갔다고 본 겁니다. 자연 따로 인간 따로 이렇게 된 거예요. 죽으면 자연 품에 안기고.

그런데 이 자연을 좌지우지하는 자연을 움직이는 동력 원인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게 아브라함에게 전달됐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전달된 두 부인에게 대자연의 마지막 운명이 결정 나게 돼있답니다. 그럼 이건 뭘 뜻하느냐 하면 성경이야기가 결국 무엇과 관련돼 있느냐 하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관련돼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기 전공과목 있고 성경 전공과목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성경을 함으로써 내 전공과목, 뭐 IT분야, 어떤 분야든 괜찮아요. 농사짓는 것도 마찬가지고 성경 내용과 관련성이 있는 내용인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뭐냐 하면, 교회 다닌다든지 내가 예수 믿는다는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교회 다니는 것도 아니고 예수 믿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 현실이냐? 이걸로 끝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아는 내가 정리한 현실이 진짜 하나님이 생각한 현실과 동일한 현실이냐? 현실도 모르면서 현실 속에 산다는 것은 현실로부터 소외당하고 지금 그야말로 어긋나게 누가 힘드냐? 본인이 힘들어요. 현실 속에 있으면서 현실 원리와 다른 원리로 우기고 저항하다 보니까 본인이 되게 힘든 거예요. 그러나 현실을 알아버리면 전혀 힘들게 없는 겁니다.

그럼 현실은 어디 있느냐? 아브라함에게 내린 계시 안에 응축돼있는 겁니다. 제가 미국에서 마지막 설교가 맨해튼에서였는데 이렇게 했지요. 세상 안에 예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이지만 성경에 보니까 예수 안에 세상이 응축돼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는지 물었어요. 어떤 특정 인물, 예수 안에 세상이 다 들어있는 거예요.

전체가 큽니까, 부분이 커요? 어느 게 큽니까? 보통 우리의 상식은 부분보다 전체가 크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전체의 부분이 그 전체보다 더 큰 거예요. 세상에 속하다고 여긴 예수님이 오히려 세상을 창조한 분으로써 이 세상에 속했습니다. 속하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습게 본 거예요.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지 뭐. 똑같은 인간으로 본 겁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돌아가실 때 하늘이 까맣게 되고 지진이 일어났거든요. 예수님 안에 세상이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을 이해하려면 뭘 이해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이해해야 참된 현실이 펼쳐지는 겁니다. 이 말은 지금 내가 밥 먹고 살고 자식 키우고 하는 모든 것이 내 일이 아니고 예수님의 현실에 속한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빼앗아갔어요. 교회 가서 예수님 뵙고, “월요일부터 이 일은 제 일입니다. 손대면 안 됩니다. 제가 밥벌이 하려고 하는 일인데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예수님이 생각한 현실이 아니고 자기가 따로 만든 현실이 돼버려요. 그래서 현실에서 걱정한다는 자체가 주님에 대한 모욕이에요. 모독입니다.

“욕심도 허락 맡아야 합니까?” 하는데 그래요 욕심도 허락 맡아야 돼요. <미생>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거든요. 욕심도 허락 맡아야 된다니까. 더 나가서 화내는 것도 허락 맡아야 돼요. “니가 왜 화내지? 어쩔라고. 화내는 이유가 뭔데?” “제가 몸이 아파서 화냈습니다.” “니 몸이가? 니 몸 내가 아픈데 니가 왜 화나지? 이상하네. 니가 현실을 착각해도 보통 착각한 게 아니네. 네 현실 따로 있고 내 현실 따로 있나?” “그건 아니고요.” “그럼 합칠까, 우리?” “합칩시다.” 합치는 대신 너는 니 현실 자체를 포기해야 돼요.

종교를 갖는 게 기독교 신자 되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신자는 하나에 오락이에요. 게임이라니까요. 취미활동이에요. 기독교 신자 아무 의미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 의미 없어요. 우리가 생각한 현실 그 자체지 나를 죽이는 현실 그 자체지 따로 어떤 모임을 만든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예수를 믿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니가 뭔데 예수를 믿어요? 주님 안에 속하면 그만이지 왜 예수를 믿습니까? 만약에 아침에 눈 떠서 여러분 아버지한데 “아버지?” “왜?” “아버지를 믿습니다.” “미쳤나. 갑자기. 뭘 믿어.” “여보, 당신을 믿습니다.” 그동안 안 믿었던 모양이지. 갑자기 생뚱맞게 믿기는 뭘 믿어요. 믿는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주심에 대한 모욕이죠. 주님을 모욕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믿는 거예요.

어떤 여인이 이렇게 예수 믿습니다. 주님, 주님 앞에 저는 개입니다. 세상이 이만한 믿음을 처음 봤다고 합니다. 주님 앞에서 내가 개입니다. 주님이 아들에게 주기 위해서 빵을 만드는데 그 빵이 나한테 걸려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왜? 개니까. 이거는 아들 먹이기 위해서 있는 빵이, 아들이 아마 너무 많이 먹었던 모양이지, 아들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내 입에 들어오다니. 세상에 내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현실에 개로서 한 다리 낀 것에 대해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최고의 믿음인 거예요. 왜? 본인이 소유한 믿음이 아니고 내가 펼쳐놓은 그 현실을 현실로 자기 현실 버리고 주님 중심의 현실을 인정한 게 되니까.

여러분, 살 때 고민한다는 자체가 이거는 어처구니없는 착각에서 비롯된 겁니다. 고민을 한다니요? 그럼 목사님은 고민 안 합니까? 저, 고민해요. 고민할까봐 고민한다는. 발걸음을 세신다. 다른 말로 하면 고민하지 말라. 머리카락을 세신다. 다른 말로 하면 고민하지 마라에요. 고민하지 마라를 바꿔서 말하면 범사에 감사하라. 데살로니가 3장 16절 말씀. 그러면 그것 보고 감사하는 사람 있어요. 그 감사를 모독한 거예요. 그냥 사는 게 감사지 그걸 따로 감사하게 되면 감사하는 현실을 따로 구축하게 된다니까.

두 시부터 네 시까지 감사. 오늘은 두 시부터 네 시까지 곗돈 타서 너무 감사했다. 그러면 네 시부터 여섯 시까지는? 얘 성적이 내려갔다. 이건 감사 보류. 이렇게 돼버리면 주님이 만든 현실 속에 나만의 현실을 따로 장착한 셈이 돼버려요. 그러면 부재의 세계 속에 존재의 세계가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셈이 돼버려요. 그러면 두 개의 현실이 충돌되고 대립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자식이 하나는 존재의 자식 이스마엘이고, 없는 자식이 이삭이에요. 이삭은 어디서 왔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투입으로 왔기 때문에 이삭이 오는 순간에 이스마엘은 비-약속 다른 말로 비-현실, 현실이 아닌 게 끼어든 거예요. 오물이 끼어든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에서 태어난 것이 하갈 계통입니다. 노선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하갈 계통이고 하나는 사라 계통이 있는데 하갈 계통은 인간의 행함과 인간의 육에서 나온 자식들입니다. dna 물려받은 자식들, 전부 다 지옥 갈 자식이에요.

사람 보고 지옥 간다고 하면 기분 나쁘지요. 저도 기분 나빠요. 기분 나쁜데 사람들끼리 노력해서 모인 것을 역사라고 하고 19세기 역사주의가 들어오고 난 뒤에 그걸 현실로 본 거예요. 현실은 역사고 역사는 인간의 행함이고 행함은 극복과 인내와 노력으로 늘 발전한다는 것이 20세기 초반까지의 철학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인간들끼리 존재에 의해서 역사가 만들어진다고 본 겁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은 역사에 끼어들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 이삭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삭을 모를 때까지만 그게 정당하지요. 없는 자식이 옴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비-약속으로 바뀌면서 약속을 위해서 이들은 지옥을 가주셔야 됩니다. 지옥 가는데 존댓말 쓰지요. 이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주셔야 돼요. 왜? 이들만 차지하기 때문에 약속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러면 약속에서 자식을 낳으면 되지 않습니까? 약속은 자식을 못 낳아요. 긍휼을 통해서 그 갈라짐인데 갈라짐 속에서 약속이 나와요.

이삭의 자식이 두 명이었습니다. 쌍둥이인데 한 사람은 야곱이고 한 사람은 에서에요.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둘 다 천국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다만 둘이 태어나서 둘이 간격이 돼요. 그러면 야곱이 천국 갑니까? 에서가 지옥 갑니까? 그렇게 묻는 게 아니에요. 야곱이 보여줄 게 뭐고, 에서가 보여줄 수 있는 게 뭐냐고 물어야지요. 표현형이니까. 이건 괜히 물었다. 물은 것, 취소.

야곱이 보여주는 것은 처음에는 나는 처음에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아니고 야곱과 에서를 갈라내는 경계선, 해안선, 그 해안선을 주목하게 돼요.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출현하지요. 자기가 에서에게는 지기 싫어요. 하지만 구분하는 경계선이 약속 따라 들어왔을 때 그분 앞에서 야곱이 살려주세요, 했어요. 제가 존재라고 착각했습니다. 내가 존재로서 존재 값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은 이 땅에 없는 존재가 와서 그분만이 구원을 받는데 나는 여기 있음, 마땅히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기에 나를 구원하리라고 오해를 한 것이 저라고 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구원받아요? 야곱을 죽여야지요. 야곱을 죽이지 야곱 인생은 끝나고 하나님이 심어준 새로운 인생으로 살아가는데 이름이 바뀝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이젠 이스라엘 존재 안에 야곱이 들어있습니다. 이게 신약적 표현으로 예수 안에 있는 자만이 의롭다함을 받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 이 땅에 보이지 않는 예수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거예요. 전에는 내 안에서 우리 아버지 안에서 경주 이씨 안에서 이랬는데 이제는 하갈 안에서가. 없는 존재 안에서 새로 만들었다.

없는 존재를 파악하려면 있음이 없음으로 내려가야 돼요. 어떻게 있음에서 없게 할 수 있느냐? 있음에서 없음으로 하려면 멘델의 법칙이 필요해요. 내가 열성이고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주님의 뜻이 열성을 짓밟는 우성으로 등장하면 돼요. 우성으로 등장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우성으로 등장하고 나는 졸지에 그 앞에서 쭈그려야 돼요. 나는 죄인입니다.

네가 어느 지파야, 라고 묻는 것은, 레위지파가 등장하고 난 뒤에서는 그렇게 묻는 게 아니에요. 레위지파가 등장하면 너는 레위지파 앞에서 어떤 쟁반을 부여받았어? 나는 종의 출신이래, 나는 정실부인의 출신이래. 이렇게 분배받지 나는 갓지파, 아셀지파, 스블론지파, 이건 의미 없는 거예요. 왜냐? 모든 표현형은 레위지파가 가져가서 레위지파가 죽음의 구멍 안에서 자기는 죽은 자로서 땅이 없는 부재의 지파로서 버티고 있기 때문에 필요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레위지파가 오래 갔겠습니까? 오래 가지 못했어요. 민수기에 보면 레위지파 안에 내분이 일어납니다. 모세, 네가 뭔데? 민주주의로 하자. 너만 은혜 받았나, 나도 은혜 받았다. 레위지파 안에 분열이 일어나면서 레위지파가 깨지면서 표현형이 요셉지파로 옮겨가서 요셉지파와 유다지파가 대결 상태가 있다가 유다지파가 승자가 되면서 메시아가 유다지파를 통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전부 다 쟁반 싸움이지요. 레위라는 쟁반, 거기다가 요셉 쟁반, 유지지파 쟁반. 시편 68편 7절에 유명한 말이 나오지요(나 혼자 유명하지만^^).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지파를 싫어한바 되고 요셉지파를 싫어한바 되어서 유다지파를 택하여 세웠다는 말이 나와요. 그러니까 “목사님, 개인적으로 얼마나 착해야 구원받아요? 이런 질문 자체가 성경에 없다니까요. 십일조 하면 복 받습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목사 말 듣고 섬기면 됩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당신은 어느 지파에 올라서있습니까? 요 질문만 성립 돼요.

야곱이 에서와 싸울 때 자기는 승리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법칙이 뭐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게 어디서 나오는 목소리냐 하면, 야곱과 에서와 갈라놓게 하는 기준에서 나오는 음성이에요. 세미한 음성이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하니까 우리로선 불만이에요. 처음부터 작은 자를 큰 자로 만들면 결과는 마찬가지니까 헷갈리지 않는데 왜 큰 자, 작은 자로 해놓고 순서를 뒤바꾸느냐 말이죠. 왜 어긋맞게 축복하느냐 말이죠.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리 안 바꾸고 하느냐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너 보지 말고 너와 너를 갈라지는 경계선 보라. 경계선에 구원자가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경계선이 뭐냐? 이것 이야기 안 하고 쉬면 곤란하니까, 경계선은 뭐냐? 먼저 난 자가 나중 되고 의인이면서도 죄인 취급받아서 죽게 되고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 인간은 저 높은 것을 향하는데 주님은 저 낮은 곳을 향하고 하여튼 간에 우리의 행함으로 도저히 내놓을 수 없는 색다른 현실, 낯선 현실을 그 경계선에서 피라는 모습으로 이게 번져 나오네요. 그래서 예수 안에서 우리가 예수라는 쟁반 위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5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민수기 2장에 보게 되면, 회막이 있고 회막 주변에 열두 지파가 포위돼있습니다. 중간에는 레위지파가 있지요. 열세 지파에서 레위지파가 중앙에 하나님의 거룩을 보존시킵니다. 열두 지파는 이 거룩을 지향하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거룩이 이스라엘을 만들었기 때문에 나에게서 나온 행위는 나에게 소환됩니다. 거룩에서 나온 것은 거룩으로 소환되게 돼있어요.

여기에 아셀지파가 있는데, 제가 A:라헬, b:빌하, B:레아, b:실바, 라고 정했습니다. 원래 야곱이 라헬과 결혼하고 싶어 했는데 삼촌이 야곱을 속였지요. 우리 동네에서는 1+1이라 해서 언니를 덤으로 가져가라 했는데 언니는 못 생기고 시력이 안 좋고 여동생은 예뻤습니다. 남자가 되서 예쁜 것 취하는 건 당연한 거고. 그래서 이걸 끼워 팔기라는 거예요(허니버터칩에 끼워 팔기 한다고). 끼워 팔기하면서 레아를 넣지요.

그렇다면 여기 아셀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Bb가 돼요. 단은 라헬의 여종에서 나와서 Aa. 그 다음에 납달리는 역시 Aa. 라헬이 아기 못 낳습니다. 빌하한테 넘기지요. 그러니까 네 명의 여인이 한 사람 야곱의 자식을 낳게 되면서 하나가 자식을 낳게 되면 나머지는 스톱이 돼요. 스톱이 되면서 거기에 나오는 표현형들은 순전히 주님의 계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들의 집합이 돼요. 이스라엘이.

그 다음에 베냐민지파는 마지막 때 라헬이 야곱의 자식이 되어서 AA. 그 다음에 에브라임은 원래 요셉지파는 하나인데 레위지파가 중앙에 대표로 하면서 요셉지파가 둘로 나눠졌어요. 므낫세와 에브라임으로. 요셉지파니까 라헬 계통이죠. AA. 그 다음에 므낫세지파도 AA. 그 다음에 잇사갈은 BB, 그 다음에 유다는 BB, 스블론도 BB. 그 다음에 갓지파는 Bb. 그 다음에 르우벤지파는 BB, 시므온지파도 BB.

이렇게 해서 진행방향이 동쪽으로 진행하면서 정실부인 중심으로 배치하고 뒤에는 종으로 배치해서 이미 레위지파가 특수한 지파로 대표로 있는 이상 레위지파가 갖고 있는 위상, 레위지파가 품고 있는 거룩과 비-거룩의 접촉적인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파는 헤쳐 모이되 종이냐, 정실이냐, 라헬 계통이냐, 레아 계통이냐, 그 표현형을 보여주는 데서 전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러한 전략, 이러한 모든 구조는 순전히 하나님께 숨겨진 비밀이지 개인적으로 손들고, “구원받고 싶습니다.” “손 내려!” 그런 식의 구원은 없어요. 성경에 나오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제가 아까 했잖아요. 예수 믿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 어림도 없는 통하지 않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것도 우상이니까.

제가 아까 예를 들었지요. “여보, 이제부터 당신을 믿겠습니다.” 이건 오히려 “수상하다. 왜 갑자기 왜 믿는다고 해.” “아버지, 오늘도 잘 주무셨습니까? 전 아버지를 믿습니다.” 하면 좋아할 줄 압니까? “미쳤나. 아는 사이에 갑자기 왜 구분 해.” 이렇게 나온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따로 어떤 종교적인 어떤 티를 내겠다는 말은 사실은 그걸 빌미로 해서 나만의 영역을 구축하겠다는 얄팍한 수에 지나지 않아요. 드릴 것 드릴 테니까 내 것은 잘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거래 같은 정신이 있어요.

종과 정실부인의 배치는 나중에 약속의 땅에 가서 그리심 산과 에발 산, 높이가 900미터 쯤 되는 두 산에서 정실부인 쪽은 그리심 산 쪽에 서고, 에발 산에는 종 출신의 잡종의 표현형들이 섭니다. 그래서 이쪽은 축복을 선포하고 저쪽은 저주를 선포하는데 축복과 저주, 거룩과 비-거룩을 유지시키고 연결시키는 가운데 뭐가 있느냐? 바로 법궤가 있어요. 레위지파가 있다니까. 한 지파가 땅도 없이, 부재의 존재지요. 땅 있는 동네에 땅이 없다니까 이상하죠. 땅 없는 곳에 가서 너희들이 이 땅에서 사는 그것이 그냥 생존 차원이 아니고 거룩 차원으로 재편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레위지파가 개입돼야 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은 레위지파에서 왔느냐고 묻고 싶을 거예요. 아니요. 예수님은 유다지파입니다. 그럼 처음부터 유다지파를 대표로 내세우지 레위지파를 내세웁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레위지파의 제사행위마저 죄가 돼요. 아, 이것 결정타입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다니는 것이 죄가 돼요. 하나님 섬긴 게 죄가 돼요. 기도한 게 죄가 되고, 헌금한 게 죄가 되고, 전도한 게 죄가 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 확장하겠다고 설쳐대는 게 죄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모든 손이 빠지길 원합니다. 관여하지 않길 원합니다. 전부 다 주님에 의해서 구원이 돼야지 우리가 협조했습니다, 동조했습니다. 동업했습니다, 도와드렸습니다, 우리가 애를 썼으니까 하늘나라 확장되는데 효과적이었지요, 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전부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게 아니에요. 다 빼는 겁니다. 빼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구원의 실패자가 되지요. 그게 바로 정답이에요. 구원에 우리가 실패가 될 때 비로소 구원이 되는 것은 나로 인해서가 아니라 실패자마저 구원시켜주는 그분에 의해서 이뤄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레위지파가 결국 유다지파에게 물려준다면 레위지파는 어디에 속하느냐? 레위지파는 열두 개 속에 포함이 돼버리고 이 안에는 누가 있느냐? 그야말로 부재, 유다지파에서 온 임금님이 오심으로써 완전히 새 성전이 완료가 되는데 이것이 에스겔 48장에 나오는 새 성전의 구조입니다. 새 성전의 구조에서 레위 문, 유다 문, 르우벤 문, 요셉 문, 베냐민 문, 단 문, 납달리, 아셀, 갓, 스블론, 잇사갈, 시므온, 이렇게 해서 유다지파 중심으로 재편성하면서 지금의 민수기는 이동하지만 완성된 고정된 배치에서는 유다지파로 완료하는 겁니다.

그러면 유다지파가 왜 레위지파를 대신해서, 스블론 해도 되고 아셀 해도 되는데 왜 유다지파가 그게 되느냐 하면, 먼저 레위지파가 등장하게 된 것은 레위지파 BB잖아요. 레위가 누가 자식이냐 하면 레아지요. 야곱이 누굴 사랑했는가? 라헬을 사랑했어요. 야곱의 본처가 먼저 결혼했다고 레아가 본처가 아닙니다. 라헬의 본처에요. 그게 마태복음 2장에 나옵니다. 베들레헴에서 헤롯 왕이 동방박사 못 잡고 난 뒤에 화가 나서 베들레헴 얘들 다 죽였어요.

오늘 오후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거기에 보면 송일국 아들 세 명도 있고 이휘재 아들 두 명도 있고 추사랑도 있고. 자기 보기에 예쁘다 하는 얘들 다 죽었어요. 누가 우느냐? 레아가 우는 게 아니고 라헬이 울지요. 라헬이 이스라엘의 본처입니다. 이스라엘의 통곡소리지요. 이스라엘은 라헬 중심으로 성립한 겁니다. 남편인 야곱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새로운 이스라엘은 주님으로 인해서 고난에 합세된 자가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로 탄생한다는 이야기지요.

헤롯 왕이 베들레헴 얘들 다 죽였는데 예레미야에서는 그걸 미리 예언한 거예요. 예고한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헤롯으로 하여금 베들레헴에 있는 귀한 자식들 죽게 한 것은 주님이 의도한 작품이에요. 왜 그렇게 하느냐? 새로운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수님 외에는 어떤 기쁨을 못 갖게 하기 위해서. 주님 잔인하지요. 예수님 빙자해서 예쁜 딸, 예쁜 아들, 일체 성질나서 못 봅니다. 그리스도에게 갈 그 기쁨을 절대로 주께서 남한테 빼앗기지 않아요. 왜냐하면 해안선, 경계선이니까.

경계선은 뭔 뜻이냐 하면, 누구도 거기에 경계선에 폭이 없기 때문에 디딜 수 없어요. 지옥 갈 사람 에서도 디딜 수 없고 야곱도 디딜 수 없고. 따로 다른 분에 의해서 발생되는 선이 경계선입니다. 따라서 경계선에서 솟구쳐 나오는 그분이 우주의 본주인공이에요. 우리는 피조물로써 무대 중앙에 등장할 그분을 위하여 잠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거예요. 우리는 박수 칠 준비가 돼있어야 돼요. 심지어 지옥 갈 사람까지도. 우린 천국에서 치고 저기는 지옥에서 치고. 주가 주 되심을. 땅이 갈라지면서 인물 등장하게 되면 우린 박수치면 되는 거예요. 그게 찬양이라는 겁니다. 주에 대한 찬양.

그런데 그 자리를 사랑하는 내 딸과 내 아들이 차지하고 있으면 솟구쳐 올라오시는 분의 머리에 뭔가 받치거든. 이것 뭐야. 보니까 추사랑이라. 뭐 이런 게 다 있어. 치고 올라오면 그 얘는 난데없이 죽어야 돼요. 그래서 주님에 의해서 받쳐죽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성경에서. 성경은 희한해요. 살아있다는 것은 슬픈 소식이고 죽었다는 것은 기쁜 소식이고 성경은 모든 게 뒤바뀌어있어요.

“주여, 살았습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아직도 살았나? 다른 사람은 낙원에 가 있는데. 뭐 하려고 네가 살아있노, 뭐 하려고 니가 아직 살아있노. (아주 랩을 해.) 뭐 하려고 살아있노. 우짤라고 살아있노.” “그렇지 않아도 주님 만나려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그렇게 이야기해야지.” 어떻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라 주님 덕분에 이만큼 살았습니다. 랍스타 뜯으면서 주께서 주셔서 살았습니다. 랍스타 사달라는 이야기 아니에요. 전혀 아닙니다.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란 말이요. 이것이 주님의 표현형을 드러내기 위해서 오늘날 이같은 상황으로 몰아세운 겁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너희들에게 믿음을 준 것은 세상을 눈에 있어서 즐겁게 주님과 함께 고난 받기 위해서 믿음을 줬다는 겁니다. 그래서 환란 중에 기뻐하라. 환란이 뭐냐? 그 예를 방금 들었습니다. 랍스타 뜯는 것. 이빨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환란이에요. 그리고 유럽여행가는 것, 얼마나 피곤한 줄 압니까? 지금 서 목사님 사모님 고생 많아요. 죄수도 아닌데 노예선 타는 것처럼 힘들어요. 유럽여행, 스위스여행 얼마나 피곤한지 몰라요. 자식 결혼해서 잘 사는 것, 더 잘 살아야 할 건데. 김장 해주고 다 퍼주는데 아직도 모자라. 더 퍼주고 싶어. 환란이에요. 네가 이렇게 사니까 더 해주고 싶잖아. 못 해주는 그 갭만큼 아파. 집 사줄까? 집 사줘도 안 돼. 왜? 더 좋은 집 못 사줘서 가슴 아파요. 안 사주고 그런 소리 못할 입장입니다만.

지금까지 첫째 시간, 둘째 시간 이야기한 것이 부재의 존재가 간격을 만들고 튀어나온다. 이게 끝이에요. 부재, 이 땅에 없는 존재가 간격, 틈을 만들고 균열을 만들어서 그 틈새로 뛰쳐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뛰쳐나오는가? 죽음의 모습으로, 피 흘리는 모습으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따라서 부재의 원칙을 위해서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먼저 시간적으로 앞서서 있음을 드러내게 해요. 있음을 마음껏 보이게 해놓고 있음을 차버립니다. 이것 아니거든. 이스마엘? 아니거든.

여러분, 제사를 최초로 드린 인물이 누굽니까? 가인입니까, 아벨입니까? 가인이죠. 요새 같으면 최초로 예배드린 사람이죠. 예배드리고 그 예배를 주께서는 안 받으시잖아요. 왜냐하면 있음은 하나님과 접촉이 되지 못합니다. 이유가 뭐냐? 있는 존재를 주께서는 추방했기 때문에 그래요. 너는 에덴동산에 살지 말고 이 땅에서 나가버려라. 나갔다면 쫓겨나간 거죠. 쫓겨나갔다는 말은 가짜란 이야기입니다. 안 받아준다는 이야기에요. 받아줄 속성이 있다면 받아주지요. 그런데 쫓아냈다는 말은 그것도 혹시 들어올까 싶어서 아예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시켜버렸지요. 이것은 주님의 단호함입니다. “오지 마!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추방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느냐? 있는 데서 천국 가기 위해서 시도를 합니다. 자꾸 들이밀어요. “하나님, 예배드릴까요? 하나님, 호박고구마 좀 드세요.” “갖고 오지 마.” “주님, 십일조.” “십일조? 너나 써.” 하나님은 돈을 안 받거든요. 왜 안 받느냐? 더러워서 안 받아요. 창녀의 돈을 안 받듯이 더러워서 안 받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전세를 내라 했잖아요. 성전세는 내게 해요. 내면서 낼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인간은 뭔가 행하게 되면 행함으로 뭐가 발생된다 했습니까? 그 행함에 따라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순환구조가 새롭게 발생 되지요. 쟤는 안 했는데 저는 했거든요, 라고 어떤 선이, 거미줄이 형성돼요. 그래서 되돌아보면 옛날에 내가 어느 교회에 다녔고 부교역자 생활 멋지게 했고, 전도사 생활 신나게 했고, 부흥사로 한 것을 자랑스런 영웅처럼 했고. 그게 거미줄처럼 하나의 역사가 형성돼요. 그것 안 받습니다. 받질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부재지만 주님 보시기에 누가 부재입니까? 누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있으나마나한 존재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아무 보탬이 안 되는 종입니다. 어떤 여인네가 향수를 모아놨어요. 그 향수를 주님 발 앞에 깼습니다. 왜 깹니까? 두 가지의 의미가 있어요. 하나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향수보다 더 귀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향수>란 영화가 있지요. 그 영화는 인간의 향기가 어느 정도까지 심오할 수 있는지 얻기 위해서 처자의 피부를 벗겨서 거기에 있는 냄새를 수집합니다. 살인자지요. 하지만 그는 살인자라는 것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완벽한 향수를 얻기 위해서 어떤 것도 허용돼야 된다고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사람이 향수를 잃었을 때 내 피부 내놓으라고 죽여 버립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사슬을 일시 빌려줄 수 있고 양보할 수 있지만 영원히 스스로 자기를 부정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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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2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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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