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 뒤에 150109
장막 뒤에 150109
이름 : 이근호(IP:119.18.93.36)
공은주(IP:218.♡.196.154)
15-02-04 15:50
안양20150119a-히9장11절(장막 뒤에) - 이 근호 목사
9장 이 대목, 그리스도 하신 일의 깊숙이 들어온 셈이 돼요. 깊숙이 들어오게 되면 뭘 잊어져야 되느냐 하면, 세상을 잊어줘야 됩니다. 왜냐 하면 제가 그런 게 아니고 히브리서 전체가 죽 내용이 여기에 정치이야기, 경제이야기, 사회이야기 하나도 없어요. 정치, 경제, 사회이야기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개인이야기 없어요. 나에 대해서 관한 이야기 없어요. 성경 전체가 다 그래요. 그런데 특히 이 히브리서9장에 들어오게 되면 유독 한 분에게만 집중합니다.
아까 쉬는 시간에 성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영생은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을 아는 거잖아요. 그 취지에 이 히브리서9장이 딱 들어맞지요. 방금 뭐가 없다고 했어요? 사적인 개인문제 없습니다.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문제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라 하는 것은 생존에 관한 거거든요. “하나님, 내가 이 바닥에서 어떻게 하면 삽니까?” 하는 그런 질문 자체가 히브리서9장이 주님 앞에서는 성립이 되지를 않습니다. 성립되지 않아요.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초점이 맞춰져있습니다. 그래서 9장을 죽 하면서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야 돼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한 번 알아볼까?’라는 마음을 가지고 보셔야 되지 ‘그리스도를 나한테 어디에 써먹을까?’ 보시게 되면 성경에다가 뭘 집어넣는가 하면, 나의 이익을 여기다가 집어넣는 셈이 되기 때문에 성경은 아예 토해버립니다. 요한계시록에 토해내신다는 말이 있거든요. 그건 아예 추방시켜 버리지요. 거기에 대해서.
9장에 들어오려거든 완전히 자기 생각을 버리고 들어와야 되지 은근히 이거 알아가지고 자기 생계에, 자기 자존심에 도움 될까 이렇게 해버리면 9장 해석 자체가 이건 성사가 안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만 아시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면, 여러분들은 “그럼 그리스도가 어떤 분입니까?” 그렇게 질문을 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잘 들으신 거예요. OK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돼요. 그리스도가 누굽니까? 되어야 돼요. 그러면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면, 오늘 11절에 보니까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되어있지요. 초반부터 힘들게 나가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는데, 그리스도께서가 된다는 말은 이렇게 보시면 돼요. 장막이 철거 된다 이리 보면 됩니다. 장막이 철거된다는 말은 무대 뒤에 커튼 뒤에 어떤 분이 계신데, 우리가 앞에서 보니까 그림자만 얼렁거리는 거예요. 그래서 보는 사람이 굉장히 궁금한 게 ‘저 커튼 뒤에 도대체 어떤 모습의 분의 계실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면 처음부터 이렇게 짠! 하고 보내시면 되는데 왜 커튼 치시고 보내시는가?’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커튼 치시고 보내는 거예요.
그 커튼 역할을 놓친 자들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은 커튼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데 왜냐 하면, 성전에서 양을 잡았잖아요. 그러면 성전 짓는 벽돌 한 장 쌓는 것은 본인이 쌓으면 되고 오늘날 교인들이 자기 헌금내서 예배당 고딕으로 건물 세우듯이 예배당 세우기 돈만 있으면 수월하잖아요. 돈만 있으면 맡기면 되고, 돈이 없으면 기부하면 되고, 기부라고 하면 듣기 싫어하니까 헌금하면 되고, 옛날에 내가 헌금을 기부라고 해서 욕 얻어먹었어요. 기부하면 되고, 기부한 돈 가지고 예배당 세우면 되고 그러면 예배당 세우면 하나님은 어디서 만난다? 집에서 안 만나고 어디서 만나야 돼요? 하나님과 예배드리면서 만난다. 베일이 필요 없지요. 커튼이 필요 없어요.
하나님을 섬기는데 본인들이 섬겨서 섬긴 본인이 구원 받는 방법. 어떻습니까? 깔끔하잖아요. 뭔가 흐릿한 게 없지요. 감추는 게 없지요. 그래서 교회가 융성하게 된 겁니다. 어떤 차단막이 없이 당신이 하는 대로 당신이 구원받습니다. 라는 그것을 실감나게 보여주니까 그들에게는 별로 혼돈스럽지가 않아요. 교회 가는 것이.
“등록하면 구원받습니까?” “십일조하면 복 받습니까?” 할 때, “예, 예” 예스, 예스만 들려오기 때문에 굉장히 쉬운 거예요. 그런데 “십일조해서 구원받습니까?” “예배 참석하면 됩니까?” “아니요, 베일을 통과해야 됩니다.” 이러면 그들은 교인들은 “아휴” 혼선이 생겨가지고 “아이, 뭐 이런 가게다 다 있어. 옆 가게에 가니까 깔끔하게 드리면 복 받습니다. 깔끔하게 나오는데 왜 여기는 베일이 차단막이 있고 왜 이래?” 이리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그 점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장막을 이렇게 앞에서 보지 말고 옆에서 한 번 봅시다. 하나의 폭이 있을 것이고, 여기 인간이 있고 여기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장막은 제가 지은 게 아니고 하나님이 지신 거예요. 물론 이 장막 자체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없다고 여겼지요. 없다고 여긴 겁니다. 자기네들이 성전 만들고 거기서 양 잡고 소 잡고 하면 다 되니까. 피 흘리는 거 다 했거든요. 이걸로 충분하다고 본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가 유대교의 반복이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의 반복. 이 장막 자체가 있는데,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뭐가 안 보이느냐 하면, 하나님이 안 보이겠지요. 장막 때문에. 하나님이 장막을 치는 이유는 제가 지난 낮에 설교를 했습니다만, 직접 하나님 만나면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어요. 하나님의 장막을 치게 되는데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그들은 여기 와서 벽면에다가 뭘 하는가 하면, 자신들이 세상에서 양심적으로 알고 있던 모든 신에 대한 고상함을 여기다가 쳐발라요. 여기다가 전부 다 연극무대를 장치한다고요. 자기들이 납득이 되는, 이해가 되는 식의 신을 여기다가 쳐 바르고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만들어놓은 여기에 연극에다가 자기가 충성을 다하게 되면 구원 받았다는 안심을 마음에 평정과 안정을 얻을 수가 있어요.
우리 할머니 같은 경우는 불교라고 하지만, 사실은 토속신앙인데 그저 음력 설만 되면 부엌에 나가서 종이를 태웁니다. 전에 이야기했지요. 올라가는 것도 참 신기했지만, 중력에 위반 되는 것인데. 태우고 또 마을에 나가면 새끼가지고 늙은 큰 느티나무에다가 돌고 또 복조리해가지고 걸어놓으면 학생들이 아르바이트 하는 식으로 돈 또 얼마주고 하는 그 모든 시스템, 장치가 그게 인간에게 납득이 된다니까요.
그 물이 분명히 수돗물인데 떠놓고 정화수라고 우긴다 말이죠. 정화수. 말 그대로 정수된 물이잖아요. 옛날에 무슨 정수기가 있었어요? 60년 전에 무슨 정수기가 있어요? 없어요. 정화수라고 하면서 그게 뭐냐 하면, 내심적으로 마음 적으로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도 감동 먹는다는 거죠. 유명한 갓 바위에요. 갓 바위 신학입니다. 정성만 빌면 3가지를 빌면 니가 욕심이 많구나, 하지만 아주 내치지는 않으니까 3개중에서 2개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6개 구하면 2개는 되고, 3개 구하고 싶으면 9개 구하면 되고. 4개 구하고 싶으면 12개 구하면 되고, 계산 나오지요.
다 안 이루어져도 소박한 소망 하나는 이것은 내가 보기에도 참 착한데, 우리 신이 보기에 하나님이 보기에 얼마나 착해 보이느냐 하는 신에다가 자기 마음을 대입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창세기4장에서 무슨 제사라고 하는가 하면, 가인의 제사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면서 받는 제사보다 먼저 앞서서 무슨 제사를 드리게 하느냐 하면, 안 받는 제사를 먼저 드리게 해가지고 치워버리지요. 그러면 신자는 두 가지를 알아야 돼요. 받는 제사와 안 받는 제사와의 차이점의 감각이 와야 돼요. 그 차이점이 있어야 돼요. 그 차이점은 뭐냐, 내 뜻대로 하게 되면 안 받고 내 뜻의 위반하는 속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래서 우상이라는 것은 반드시 조건이 있어요. 우상이 되는 조건은 뭐냐 하면, 소나 형상을 만드는 게 아니고 우상의 조건은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하여, 이게 바로 유명한 십계명 줄 때 ‘너를 위하여 만들지 마라.’ 왜냐 하면, 모든 만들어진 것은 너를 위한 게 하나도 없어요. 이 세상에 해와 달과 별과 심지어 우리가 챙기는 우리의 몸이 있잖아요. 우리 자식들, 우리의 몸. 이 몸이 나를 위한 몸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2장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위하여 십자가 사건을 증거 하라고 십자가 사건 때문에 내가 여기 존재한다고, 그것을 증인하라고 이 몸이 있음을 알게 됐지요.
다윗의 몸은 그게 간음을 하던 살인을 하던 상관이 없어요. 다윗은 간음을 안했음으로 구원받고 살인 안했음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니라 간음과 살인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내 몸이 나를 위해서가 아닌 다른 것 때문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왕이 누군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왕이 누구냐, 여호와 하나님이거든요. 그러면 지상의 왕이 누굽니까? 본인이 왕이지요. 둘 중에 하나는 가짜잖아요. 둘 중에 하나는 가짜이기 때문에 왜 가짜인가, 차이 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간음과 살인죄를 저지르도록 그렇게 유도하신 거예요.
아까 처음에 강의할 때 했지요. 이 히브리서9장에는 정치, 사회, 경제 이런 것이 배제된다고요. 그런 걸 따져서 이 히브리서9장에 들어오면 안돼요. 왜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되느냐 하면, 헤롯왕이 동방박사를 핍박하듯이 헤롯왕이 갖고 있는 게 뭐냐 하면, 현실은 이 베일이 아니고 너도 나도 다 아는 이야기를 합니다. KBS 9시 뉴스를 보면, 그거 한국에 오래 산 사람들은 다 이해해요. 다 이해하지요. 아이고, 저게 무슨 말이야? 저 땅콩회항이 무슨 말이야? 이건 뉴스를 안 들어본 사람은 모르지만, 강원도 산골 살다가 오래간만에 나온 사람은 모르겠지만, 본 사람은 다 알잖아요. 땅콩회항 다 알잖아요. 다 안다 말이죠.
그런데 히브리서9장 장차 오실 제사장이고 창조에 속하지 않고 염소, 송아지, 이거 내용 압니까? 모릅니까? 이걸 9시 뉴스에 제일 첫 번에 보내 보세요. 이거 누가 이해합니까? 왜 이해를 못하지요. 베일에 가려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베일 이전의 것을 납득을 하는데 왜냐 하면, 이 세상 자체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것을 던짐으로서 그걸 던지고 회수하기 때문에 이해 안되는 게 없어요.
이 정재하고 임 세령이 사귄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릅니까? 알거든요. 왜 아느냐 하면요, 나도 남자가 돼가지고 돈 좀 있는 여자 보고 싶다. 평소에 내심 노리는 게 있기 때문에 으이구, 내가 그런 여자가 걸려야 되는데. 노리는 게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또 돈 좀 있는 사람 같으면 아, 나도 남편 때려치우고 다시 팔자고쳐가지고 잘 생긴 이정재하고 결혼해봐. 이런 게 있기 때문에 납득이 된다 말이죠. 드라마치고 납득 안 되는 거 봤어요? 드라마는 중간쯤 봐도 납득 돼요. 이해된다고요. 왜? 평소에 우리가 갖고 있는 원초적 욕망을 펼쳤기 때문에. 던져진 것을 회수한다는 말을 아시겠습니까?
교회가 되려면 납득되는 소리를 해야 돼요. “착하고 싶지요. 착해야 복 받는 거 여러분이 아시지요. 이렇게 하시면 착합니다. 여러분, 복 받았습니다. 끝.” 이게 교회거든요. 베일 뒤를 통과할 수 없어요. 히브리서9장 속을 들어가지를 못해요. 히브리서9장가지고 “목사님, 물어봅시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에이그, 그거 몰라도 되고, 뭐 그거 몰라도 됩니다. 착하면 복 받습니다.” 본인도 모르고 몰라요. 이것이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어요.
베일 안에는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고 순간만 있어요. 베일 밖에는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과거는 지나간 거예요. 따라서 히브리서9장도 옛날이야기입니다. 옛날 동화이야기. 그래서 사람들은 베일을 통과하지 못하고 성령을 받지 못해서 베일을 통과하지 못하고 이 안에서 종교놀이 하고 있는 사람들의 주특기가 뭐냐, 요한계시록이에요. 왜? 요한계시록은 아직 안 이루어졌거든. 거기다가 승부를 거는 거예요. 십자가 잊어라! 옛날이야기다. 다 옛날이야기. 예수도 옛날이야기.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아직도 재림이 안돼서 남아있으니까 여기다가 사람들 집어넣어놓고 이것가지고 장난질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히브리서9장이야기는 9장에 나오는 요 앞의 표면이 히브리서9장입니다. 9장 같으면, 이 9장은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인간들이 던진 것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이걸 모자이크로 새긴 거예요. 주님 쪽에서 만들어내는 근거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대제사장이 양이나 소를 잡잖아요. 대제사장이 소를 잡을 때, 대중들의 본래는 “아, 우리 가운데 있는 어떤 인간인데, 그 인간이 대제사장이 되었고, 그 사람이 지금 소를 잡고 있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나 베일 쪽에서 보면, 너희들이 없는데서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고, 그 중에 대제사장 되게 한 것도 하나님이고, 소를 잡아야 된다고 지시한 것도 내 쪽이고, 따라서 이쪽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너희의 일이 아니고 나의 일이다. 따라서 너희들은 너희들이 보는 이 모든 제사장의 행동으로서는 너희들이 이해한다고 하지만, 전혀 이해 안 되는 것이고, 이게 이해되려면 나중에 하나님 쪽에서 내려온 이 전체를 해석할 해석자가 따로 오실 건데 그 분이 와서 해석해줘야 구약에 있었던 이런 아론의 제사장 모든 행동이 비로소 한꺼번에 다 해결을 보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해된 사람이 있을 거 아니냐, 있지요. “그 사람은 예수님이 오시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해가 되었습니까?” 라고 물으면 베드로전서1장10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신이 먼저 그들에게 다가갔다. 성신이 먼저 다가갔다. 성신이 먼저 다가갔지요. 노아도 마찬가지고.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이 선조들이 다 그래요. 아벨도 마찬가지고. 본인의 재주라고 생각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언젠가 제가 대전강의에서 이걸 한 거 같아요. 기억나십니까? 히브리서11장에 있는 그분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가를 본인의 자질이 아닙니다. 본인의 믿음 아니에요. 주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나중에 알고 보면 이 말이 어려운데 본인 자신이 본인에게 베일이고 장막이라는 것을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아는 거예요. 내가 비밀이에요. 내가 나에게 비밀이에요. 그 말은 나도 나를 몰랐어요. 나의 가치가 어느 정도 가치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나는 내 욕구와 자식새끼만 키우면 여자로 되는 줄 알았지요. 그게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신부였습니다. 내 새끼 내가 밥 먹여 키우면 나는 주부로서 끝! 100점짜리 주부! 아닙니다. 땡! 탈락입니다.
다른 요소가 있어요. 그냥 남편만 잘 섬기면 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나한테 내 욕구에 욕망에 이해되는 쪽으로 한다면 100% 그것은 잘못된 세상을 잘못되게 지금 읽고 있고 해석하고 있는 중이라 이리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내가 내거라고 납득이 되는 이해가 어떤 이해인가 하면, 소유 또는 소유성이라고 표현하게 돼요.
나는 무조건 나를 소유해야 돼요. 소유하고 있는데서 부터 출발해요. 나는 누구 거? 내거. 그런데 그 말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 볼펜은 누구 거? 내거. 이건 말이 되는데 볼펜을 쥐고 있는 내가 내거라는 말은 이것은 뭔가 것이 되려면 구분이 되어야 되는데 나하고, 나하고 동일한 나잖아요. 죄송합니다. 말을 너무 어렵게 하는데. 어렵게 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소유하나 안 하나 내가 여기 있잖아요. 그러면 됐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본인이 불안, 불안한 거예요. 이 세상은 나를 챙기지 않으면 누구도 챙길 사람 없다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분열되어 있어요.
따로 베일 뒤의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인간이 갖고 있는 소유성은 누군가 나를 소유해야 되는데 내가 나를 소유해버리는 겁니다. 내가 나를 소유해버리면 어떤 현상이 되느냐 하면은 살만큼 살면 되는데 자꾸 자기를 처단시키려 해요. 뭔가 조치를 취하려고 해요. 자기를 자기한테 조치를 취하는 겁니다.
요번에 사회적으로 문제된 사건이 있지요. 서초동에 사는데. 집을 11억에 사서 14억을 팔면 3억이 남아요. 그 사람이 컴퓨터회사에 다니다가 딸 둘하고 다 죽였다는 거예요. 왜 죽였느냐, 이 딸하고 내 마누라는 내 소유라는 거죠. 그 사람이 반칙하고 있는 거예요. 엄밀히 말해서 지 소유는 지 몸둥아리밖에 없어요. 저 혼자 죽으면 되지요. 언제부터 지가 딸자식을 지 소유로 삼았습니까? 이미 내 소유가 나를 내 소유한다는 것이 나한테 머무르면 아무 문제 없어요. 자살해도 저 혼자 죽으면 돼요. 그런데 점점 더 그것이 정당화되게 되면 이제는 자기 소유가 확장이 돼요.
확장이 되면서 남이 나를 안 알아주면 그 다음부터는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특히 연예인들이 인기 없으면 짜증내듯이. 이게 그 사람뿐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그래서 점점 넓어지면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근본도 없는 것들이. 천박한 것이 어디 감히 우리 집에 시집오다니? 니는 약이나 먹고 피임해서 애를 못 낳게 하고. 이런 식으로. 청담동 스캔들 오래 간다. 드라마 끝났어요.
자꾸 자기의 범위는 넓어지는 겁니다. 자식도 내거고 남편도 내거고 자꾸 넓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어디까지 넓어지느냐, 바로 하나님마저 무조건 나만 이뻐해야 돼. 이뻐해 달라는 요청하는 방법이 기도하는 방법이고 또는 목돈 헌금 내고 하나님 앞에 심리적으로 돈으로 압박감을 주는 방법을 써요. 이마한 돈 넣어놓고 씨~ 복 안 주기만 해봐라. 이런 식으로. 그렇게 되면 사람이 소유 속에 있으면요, 남한테 준다는 게 없어요. 구제, 동정, 헌금 준 게 아니에요. 투자지요. 줘놓고 30배, 60배 배나 회수하지요. 다 그래요. 다.
“당신 교회 어디입니까?” 말이 안 되거든요. 내게 속한 교회는 없어요. 왜냐, 성경에 보니까 교회는 누구한테 속했습니까? 그리스도에게 속하지요. 그리스도가 머리고 그리스도에게 속했는데 언제부터 내 교회가 생겨버렸어요. 모든 버릇이 언어적 버릇이 소유가 빠지지 않은 경우가 없어요. 그러니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뭐냐 하면, “왜 내거 내 자리에 그냥 안 있고 내거 삭제해 나가십니까?” 그리고 “주셔도 더 주셔야지 저 사람은 많이 주고 나는 조금 줍니까?” 맨 날 닦달 내는 것이 내 소유 어떻게 관리했느냐를 매일 하나님 앞에 따지는 겁예요.
그래서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인형목조르기’라고요. 여기 인형 없어요? 이래도 안 줄 거야. 안 줄 거야. 인형 목 조르기. 주님께서는 아, 목 조르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네. 새벽까지 와서 목 조르네. 새벽까지 와서 목 졸라요. 금요 철야까지 하면서 커피 마시면서 목 졸라버려요. “손 좀 놔라. 말로 하자.” “이래도 안 줄 거야?” 꼭 장희빈이 인현왕후 죽으라고 활로 쏘는 것처럼. 주님 목 조르는 것을 그걸 유형적으로 자기가 자기 목 졸라. 지가 지 목 조르면서 하나님 목 조르는 것으로 대체하고 있어요.
히브리서9장 해석은 장막을 거둬버립니다. 장막을 거둬버리게 되면 여기에 종사했던 대제사장, 모든 동원됐던 소, 염소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지 나와 연관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나와 연관되지 않았어요. 뭔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건 맞아요. 성전 짓고 제사 드린 건 맞는데 하면서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하면서.
마치 요즘 교인들이 나가면서 오해하는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 교회에 출석했십니다. 요번 주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에 복 주셔야만 됩니다. 지가 자기 소유를 못 버리고 오해하는 것처럼. 주께서 보내게 하셨는데 마치 자기가 결단 내려서 진짜 큰 마음먹고 교회 가는 것처럼 자꾸 생각해서 그런 인간의 노동은 대가 없는 노동은 없거든요. 이만큼 수고했으면 이 피곤함을 기쁨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축복 주시옵소서. 만날 몇 배 3배 하여튼 도둑놈 심보야.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것처럼. 10원 따고 500원 따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맨 날 간다 말이죠.
교회 말씀 듣는 것은 이 베일을 뚫는 일이에요. 베일을 거두는 일이에요. 이 베일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베일이 되어버리면, 예수님이 베일이다. 예수님이 커튼이다. 알아먹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예수님을 볼 때에 예수님이 베일이라면, 숨어계시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다른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그러니까 교회 올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 뜻을 나는 모르는데 요번 주간은 아버지의 뜻이 그냥 덮쳐서 내 뜻을 꺾어버리고 주의 뜻만 펼쳐지는 한 주가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가는 것이 교회인데, 그게 아니고 “내가 여기 왔나이다. 이리 오너라.” 사또 오듯이 “내가 여기 왔나이다. 예수여, 내 뜻을 위해 달라.”하면 그리스도는 더 이상 베일이 아니에요. 뒤에 숨어있는 게 없고 자기가 던진 요구대로 받는 겁니다.
원래 기도라 하는 것은요, 인간은 기도할 때 하나님은 갖고 있지 않는 해답을 지가 기도하고 있어요. 해답이 없어요. 해답이 없는데, 억지로 기도해 놓고 해답을 나중에 지가 조립해요. 억지가 그런 억지가 없어요. 응답될 거야, 하면서. 편집을 지 맘대로 하고 있는 거예요. 편집된 내용을 한 번 보세요. 그 편집된 내용하고 히브리서9장하고 비교해 보세요. 전혀 안 맞아요.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거에요.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그게 생명이기 때문에 항상 응답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데 우리가 하는 기도 응답은 뭐냐, 내 소유가 늘어나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애초부터 이게 사고가 맞을 리가 없어요. 안 맞지요. 안 맞으니까 이게 까여야 되는 거예요. 이거 안 맞다 해서 고치지 마시고 안 고쳐져요. 우리는.
우리 인생은 내가 알아서 고쳐지라고 만들어진 인생이 아니고 고칠 분이 따로 있어요. 그 분이 와서 뜯어고칠 때 성도입니다. 지가 알아서 고쳐버리면 도인돼요. 예를 들어서 아까 이야기 했지만, 중요한 말이라서 제가 언급을 합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는데 자기 마음에 안 맞는다고 오지 마세요. 이것은 지금 주의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자기 일을 주의 일이라고 착각을 하는 거예요. 본인은 예수님을 다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교주가 따로 없지요. 이리 해야 돼요. 어떤 분이 왔잖아요. 반드시 와야 되는 거 없어요. 주께서 보내셨구나! 그리고 자기가 무슨 모임이나 예배를 드렸잖아요. 우리교회에 예배를 드렸잖아요. 반드시 우리교회에 예배드리는 법은 없어요. 주께서 예배드리게 하실 경우에만 설교하고 모이게 되는 것이지 이것은 내 교회라든지 이것은 내가 목사라든지 이거 없어요.
요번 주일날 ‘충성된 자’라 하는 그 설교를 할 건데, 단단히 이야기할 거예요. 충성된 자의 구할 것은 맡은 자에게 할 것은 충성이다. 이게 재직 때 할 때마다 이 소리 나오는데 내가 벼르고 있어요. 그게 얼마나 엉터리 같은 헌신예배 하는 그게 잘못된 것인지. 누가 맡겼는데? 목사, 장로 지가 뭔데 집사를 맡겨요. 갑자기 화가 나서 강의를 못하겠네. 왜 인간이 인간을 맡깁니까? 이건 도대체 그걸 당에서 맡겼으니까 해야 된다. 그 사고방식도 글러먹었고요, 그게 무슨 자유입니까? 그리스도한테 자유해야지 사람한테 매이면 안 되잖아요. 마태복음10장20절에 보면, 성령이 임하면 니가 하는 것은 니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니 속의 성령이 이야기한다 했는데.
사람의 시선과 눈치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맡기는 것도 주께서 맡겼고 맡겼다가 한 5월달 하다가 때려치우자 한 그것도 주께서 때려치우게 하신 거고 목사 지가 뭔데 왜 그만두십니까? 더 하셔야지요. 임명제 줬는데. 임명제가 뭔데? 종이인데. 12월말까지 한다는 게 성경 어디에 나와요? 그런 게 나옵니까? 사람들이 납득이 안 되는 교회가 납득이 안 되니까 납득 되는 교회를 만드는 거예요. 종교단체를 만드는 거예요. 거기서 주께서 주신 자유를 다 잊어버리고 눈치 보는 요령만 배우는 겁니다.
주의 사자라 하는 것은 반드시 복음을 들 때만 주의 사자에요. 20년 동안 복음 전했다. 주의 사자 맞지요. 그 다음 주일날 복음 안 나오면 주의 사자아니에요. 주의 사자는 없고요, 주의 사자로 활용하시는 사람은 있지만, 자동적으로 주의 사자라는 그 기능을 소유한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소유개념으로 보지 마세요. 주께서 활용하는 활용개념으로 봐야 돼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가진 게 아니고 복음이 사도바울을 가졌어요. 고 생각을 유지해주셔야 돼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가진 게 아닙니다. 베드로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복음이 대단하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대단한 거예요. 복음 때문에 그들은 고생했고 로마에 갔지 본인이 알아서 복음 전하겠다고 간 사람들이 아니에요. 모든 게 전부 다 거꾸로 되어있어요. 거꾸로. 맡기는 자에게 충성이라. 개코나 해요. 누가 맡겼는데? 누가? 왜 그걸 재직회 때나 헌신예배 때 하느냐 말이에요. 돈 깨나 있거든. 전부 다 돈이에요. 돈. 돈. 돈. 돈 세 번 이야기했다.
이게 꼭 재직회 때나 헌신예배 때 집사 딱 해놓고 자기 세워 놓고 한 마디로 말하면 시간이 없어서 교회에 충성 못하거든 돈으로 떼워라 이 말입니다. 멀리 갈 거 뭐가 있어요. 맞벌이 한다고 교회 못 오거든 돈으로 환산해서 돈으로 떼워라, 그 이야기입니다. 그게 집사의 충성이에요. 뭘 빙빙 돌려서 이야기를 해. 딱 직구인데. 직구. 처음부터 직구로 던졌는데.
그런 교회자체가 뭐냐, 전부 다 베일이 없어요. 납득이 된다니까요. 이해가 돼요. 자기가 던진 것을 회수하는 식의 하나의 놀이동산이에요. 신을 갖고 노는 우상숭배지요. 이스라엘이 그래서 망한 겁니다. 제사 잘 드려, 안식일 잘 지켜, 우리의 제사장 있어, 갖출 것 다 갖췄어요. 성전 있지, 제사장 있지요. 구제하지요, 봉사하지요, 십일조하지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이레에 두 번씩 구제하고 십일조하고 다 한다하지요. 완벽하게 했잖아요. 지옥 갔는데요.
완벽히 했는데 왜 안 되지요? 숨어있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기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한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바로 알려주면 되지? 이 베일은요,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밀침을 당하는 아픔으로 당하는 찔림으로 당하는 식의 베일이에요. 커튼 자국이 완전히 피로 물들인 자국입니다. 화려한 장식의 핑크 무늬의 커튼이 아니에요. 아이고, 곱기도 하여라, 이거 웨딩드레스 아닙니다. 피로 물들었어요. 그 웨딩드레스가 피로 물들었다니까요. 누구야 이 피? 조사해 봐요. 국립조사관에 피 조사해 봐요. 예수님의 피고 피 흘리게 한 자가 바로 로마의 군인들이고 그 사주는 그 당시의 로마의 정권들에게 하였고 정권은 대중들에게 이미 권위를 인정받았고. 바나바 대신 예수님을 죽이라고 이미 대중들로부터 허가 맡은 거예요. 그 중에 대중들 속에 우리가 그 당시에 있으면 끼어있을 수도 있고 베드로 같으면 모른다고 3번 부인하고 도망치기 바쁠 거고. 세상이 그런 세상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9장 이 이야기가 원어로 따지고 할 게 없어요. 한글로 충분해요. 중요한 것은 한글의 원어라고 해서 이해되고 안 되고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지금 어느 편에 서 있는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아니면 이쪽에 서 있는가, 그게 중요한 문제에요. 예수님 안목이냐, 아니면 같은 인간들 납득되는 안목이냐, 그게 중요한 겁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안목을 유지하고 있다,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안목으로 봅시다.
11절에, 그리스도께서,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무슨 말이지요? ‘장래’지요. 이 장래라 하는 것은 어디서부터냐 하면, 지금부터가 장래가 아니고 이런 하나님의 율법을 줬던 그 때부터 장래, 미래지요. 그러니까 율법은 뭐를 뿜어내고 있다? 율법 자체 내에서 미래를 뽑아내고 있고 생산해 내고 있다 이리 보면 됩니다. 율법 자체 내에서 율법을 완성할 수 있는 요소가 율법 안에 이미 내장되어 있던 거죠. 마태복음 5장1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내가 온 것은 일점일획이라도 온 율법을 다 지킨다고 했지요. 그러면 지키면 율법에서 말하는 장래도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되고 완료가 되고 마감이 되는 겁니다. 여기 마감이 중요해요. 마감이 돼요.
우리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어요. 지금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진짜 예수님을 귀싸대기를 때려도 싸다귀를 때려도 그렇게 때리고 마감이 우리 쪽이 아니고 이미 우리 쪽이 못 되는 쪽으로 결판 나버렸고 주님 쪽으로 마감이 된다니까요.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은 예수님만 달랑 오신 게 아니고 우리가 왜 율법을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그 내막도 동반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뭐냐, “내 힘으로 아니에요. 주님의 힘으로예요.” 요 말을 하게 하는 거예요. 주님의 힘으로가 아닙니다. 나는 안 되고 주님의 힘이에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영생이라는 게 뭐냐 하면, 내 힘으로 아무리 해도 영생이 되고 안 되고? 안됩니다, 를 동반해서 믿는 거예요. 예수님만 믿지 마시고 나는 안 되고, 같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는 말씀 못 지켜요. 말씀을 지킬 수가 없어요. 그 간격 때문에.
간격, 아까 주체가 분열되어 있잖아요. 인간 두 개가 분열되어 있거든요. 분열된 이야기는 수련회에서 좀 더 자세히 하겠습니다만, 내가 나를 상대해서 내가 말씀을 지킨 나와 못 지킨 나에서 내가 지킨 나로 바꿀 때에 지켰다, 안 지켰다, 를 심사를 누가 하는가 하면, 내가 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게 아무리 우리가 지켜도 이걸 거울 속이라고 하는데. 거울 속에 있는 나는요, 내가 앞에서 행동하는 데로 그대로 해요.
거울이 예쁘게 보인다는 것은 그 거울이 예쁜 게 아니고 내가 예쁘다는 것을 반영해 주잖아요. 반영해주기 때문에 사실은 이게 동일한 건데, 동일한 것을 억지로 이걸 둘로 갈라놓았으니까 이게 무슨 해결책이 있습니까? 그림자가 뒤따라온다고 그림자를 나무란 적이 있어요? 어릴 때는 그랬을 거예요. 철이 없을 때는. “따라오지 마! 씨~” 지가 가면 따라오잖아요. “니는 말씀 지켰어? 안 지켰어? 못 지켰잖아. 못 지켰으니까 요번 주 내에 벌 받을 각오해.”이게 계속 따로 온다니까요. 이게.
나는 내가 생각한 나와 현실적인 나하고 항상 괴리가 있어요. 괴리가. 괴리가 있기 때문에 반성도 하고 후회도 하고 자기 머리를 쥐어박기도 하는 거예요. 쥐어박는다고 해서 일치됩니까? 일치 안 됩니까? 일치가 안돼요. 항상 벌어져있어요. 벌어져있기 때문에 인간은 짐을 사수하고 스트레스를 사서 받는 겁니다. 이게 항상 벌어져있어요. 이번에 부모님 장례식만 잘 치르면 일이 없다 하는데 장례일 치르고 난 뒤에는 또 일이 생기는데. 요번에 애만 대학 들어가면 아무 근심 없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백화점에 물건 살 때, 나는 저 물건만 내 손에 있다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다. 한 번 사보세요. 한 달도 안 되어서 신상 나왔습니다. 에이, 지나간 가라에 사기 당해가지고. 이미 유행 지났는데. 신상 나와 보니까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남자 면도기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면도기가 굴곡 따라서 합니다.” “아, 이거 사면 면도기 안사도 돼.” 천만의 말씀. “이제는 알아서 다 해줍니다.” 신상 나왔는데. 항상 이게 고 간격. 간격을 매울 수가 없어요.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어가지고 따먹지 말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그 따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항상 우리 속에 있으니까 “그래, 따먹지 말아야 할 것을 내가 따먹었어.” 이게 항상 있어요. 우리가 뭔가 따 먹으면 이제는 그걸 잊어야 되는데 잊을 수가 없어서 내가 뭔가 잘못했어. 뭔가 나는 쫓겨야 돼. 뭔가 죽음에 쫓기고 불안 불안해. 얼마나 스트레스 받겠습니까. 그러한 동네가, 그러한 인간상이 율법을 통해서 둘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이해합시다.
율법 속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죄인을 양산해요. 아까같이 분열된 자기 불안함을 양산하고 또 뭐냐 하면, 이걸 완성하신 분을 증거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오실 장래 일이에요. 장래 일에서 율법이 있기 때문에 율법에서 장래 일을 하는 동시에, 여기에 장래 일이 되면 인간은 율법 안에서 누구나 죄인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 쪽에서 율법을 통해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면 이 사람은 구원받는 사람이 돼요. 율법의 완성 자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끊어진 상태에서 율법을 바라보게 되면 계속해서 자기변명과 자기가 최선을 다했다는 식으로 계속 변명의 변명을 의지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이게 성화론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씀처럼 거룩해지려고 하다 보니까 이 거룩이 날로 증가돼요. 숙제가 점점 많아지네요. 초등하고 5학년 때는 통분배우더니 중학교 들어가니까 삼각함수 배우는데. 고등하고 들어가니까 미분, 적분 배우는데. 왜 그래 배울 게 많은지. 대학교 가니까 공업수학은 더 어려워요. 확률 이런 게 더 어렵다 말이죠. 숙제가 계속 있어요. 숙제가 계속 많아져요. 같은 일이라도 자기보다 더 뛰어나게 완벽하게 하는 사람이 눈에 띠일 때, 새로운 라이벌로 느껴지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고 나는 잘만하면 내 힘으로 죄인에서 의인 행세할 수 있다고 자꾸 우기는 거예요. 앞서가는 차를 따라 붙일 수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앞에 가면 의인, 뒤에는 죄인. 내가 아무리 완벽해도 나보다 더 완벽한 사람이 있어버리면 그 간격만큼 나는 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죄인이 되고 못하는 존재가 되거든요.
그래서 목사들이 예수님 이야기하니까 교인들이 기가 죽는 거예요. 나는 언제 예수님 따라 가는데? 따라가는 그 간격. 나는 한 20m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는데 말씀 듣고 보니까 70m 더 늘어나 버렸네요. 니 이웃을 사랑하라 하니까 예수님에게 거의 가까이 온 줄 알았는데 이제 머리 둘 곳도 없다, 하니까 머리 둘 곳 전세방이 있으니까 이건 아직 멀었네. 부모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면 합당치 않다, 이런 거 하게 되면 한 150m 멀어져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던진다, 할 때는 한 2.5Km 더 멀어지는 것 같아. 더 멀어져버렸어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라고 하니까 이건 한 26만Km돼요. 완전히 멀어졌어요. 나중에 지가 지쳐서 나 예수님 안 믿어요. 지가 지 발에 지쳐가지고. 누가 뭐랬어?
장래는 시간이 없어요. 순간이라니까요. 죄인은 순간이지 나쁜 짓한다고 죄인 되는 게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찰칵’ 요 순간은 웃은 거 요거 영원히 가요. 10년 뒤에도 타임캡슐하면 계속 그 시간 있어요. 정지화면이라.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됨, 정지화면. 죄수번호 2545번, 줄무늬 옷 입고 죄수복 입고 이 정지화면. 정지화면이에요. 죄인된 것을 감사히 여겨야 돼요. 오히려. 누가 이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있어요? 성령이 아니고서야 누가 우리의 본 모습을 찍겠습니까? 아무리 해도 예수님을 몰랐던 내 본 모습을. 예수님께서 카메라 들고 자, 웃으세요. 김치! 하고 찍어줬는데 우리는 찍혔고 누가 찍었고? 주께서 찍어주시고.
그런데 이걸 왜 셀카봉들고 교회 와서 지가 찍습니까? 십일조 하는 거, 지가 찍고 철야하는 거, 지가 찍고 돈 내는 거, 지가 셀카봉 해가지고 폼 내어 찍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셀카봉해가지고 찍은 거예요. “이제는 어느 누가 와도 우리는 구원 받은 백성이다.” 주께서 하는 말이 “본 백성은 쫓겨나고 너희들이 욕하는 백부장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히브리서9장에서 장래에 좋은 일, 그 다음에 11절에 보면, 어디에 속하지 아니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결정적인 이야기에요. 아주 결정타입니다. 창조에 속하지 아니했다 하니까 우리의 인간은 어디에 속합니까? 창조에 속했지요. 피조물이죠. 창조에 속한 인간이 지금 율법의 완성은 어디서 이루어진다? 창조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창조 이전에 분이 와서 율법을 이뤄보니까 이것은 닭 쫓던 개꼴이 된 거예요. 주님 따라 가려하다가 닭이 지붕으로 올라가니까 개가 무슨 수로 날아올라 갑니까? 개가 어디 날개 있습니까? 따라갈 수가 없는데.
처음부터 차라리 시원하게 생각하세요. 처음부터 우리가 우리 된 것은 창조에 속한 게 아닙니다. 이 말은 내가 내 관리에서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창조에 속하지 않는 분이 우리로 하여금 창조에 속하지 않는 존재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육에서 영으로.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 속한 것은 영이다. 고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바로 14절에 나와요.
14절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하물며 영원하신” 그 다음에 뭡니까?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가 우리에게도 말미암아로 주어지는 겁니다.
율법이 소 잡고 염소잡고 죽 하면서 우리한테 성령께서 하면서 내미는 거예요. “옛날에 소 잡았다, 염소 잡았다, 무슨 뜻이지 알지?” “예, 주께서 다 이루었습니다.” “옳지!” “자, 소 잡고 염소 잡았다. 너희는 죄인.” “옳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참, 쉽습니다. 정말 쉬워요. 찰칵! 하고 찍히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카메라에 찍히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찍힐 때 화장하지 마세요. 어차피 이래도 화장발 안 나옵니다. 전부 다 죄인입니다. 롯데백화점 옷 입어도 소용없어요. 그 때는 옷이고 뭐고 재래시장에서 산 것인지 세곡동 시장에서 산 것인지 롯데백화점에서 산 것인지 표 안나요. 그냥 죄인이에요.
13절에 그게 나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죄로 그 다음에 무슨 자에게? 부정한 자에게. 부정한 자는 더러운 자. 누가 우리보고 더러운 자라고 합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여러분보고 더럽다고 하는 사람 만나면 그냥 감사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누가 우리보고 더럽다고 합니까? 그 더럽다 하는 순간 그게 들어오는 순간, 한의사의 이만한 장치, 침이 꽂아져야 기가 돌아가. 비로소 살맛이 나요. 침 좀 맞으세요.
이제 교회 가서 복음 듣고 장침 좀 맞아가지고 더러움을 다시 확인하는 그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218.♡.196.154)
15-02-04 15:55
안양20150119b-히9장11절(장막 뒤에) - 이 근호 목사
자, 지난시간에 장막 커튼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전에 있던 모든 제사제도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로 이어지거든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리스도에게 이어진 그 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올라갑니다.
순서가 이렇게 돼요. 여기 율법이 있잖아요. 율법 같으면 율법을 어디에 줬는가, 이스라엘 내부에 율법을 줬습니다. 그러면 율법의 본 장래일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해서 어디에 가느냐 하면, 아버지께로 가요.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은 아직 이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어요. 다만 그들은 하나님과 주신 율법과 만났지요. 율법과 만났고 그들에게 율법을 준 동시에 율법을 이루실 하나님도 함께 동승, 동행하게 되는 겁니다. 어쨌거나 저렇거나 그들은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어요.
이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난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아무도 아버지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만나요. 원래 하늘나라의 법칙이에요. 법칙. 중보자 없이는 만날 수 없습니다. 중보자 없이는 만날 수 없다는 말은 중보자가 안 오면 인간은 영원히 하나님과 대척관계에 있지요. 그게 바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의 취지입니다. “나가!” 끝났어요. 하나님께서는 늘 인간이 못 만난다는 것을 분명히 확정지었습니다. 짓고 난 뒤에 만나는 경우는 생기는데 어떤 경우냐 하면 조건이 있어요.
중보 자에 의해서 받아진 사람만 그것도 니 이름이 아니고 나 착함의 이름이 아니고 중보자를 중보자라고 인정하는 조건하에서만 아버지와 함께 살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그 때는 너희가 나와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의 내용은 뭐냐, 사람에 대해서 기록한 게 아니고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시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겁니다. 이걸 개인이 하나님 만나기 위해서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다는 것도 우리가 알아서 아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알려주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그것은 아버지하고 예수님 사이만 아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라는 조건에서만 찾아가고 다른 사람은 안 찾아갑니다.
항상 우리가 주님을 알겠다. 또는 주님을 믿는다. 할 때는 안 믿게 해주심을 항상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이걸 놓쳐버리면 자신이 얼마나 특혜를 받았고 얼마나 큰 배려와 사랑을 받았는지를 우리가 놓치게 돼버려요. 내가 주님을 알았다는 말은 분명히 모르게 하신 분이 모르게 하는 대상이 따로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이야기해야 돼요. 내가 부지런을 떨어서 알게 되고 저 사람은 게을러서 모르고, 그게 아니고 아무리 부지런 떨어도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절대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지런해도.
자꾸 어긋난 길로 가요. 자꾸 노력해봐야 어긋난 길로 가요. 바리새인만큼 부지런한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요. 없어요. 최고로 율법대로 살았던 사람들이 바리새인이지요. 그런데 그 바리새인마저 전교1등이 탈락인데.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하니까 천국이라 하는 것은 피라밋 제일 꼭대기에 있는 사람도 천국에 못 간다면 그 밑에 있는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세리와 창기를 구원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그 세리와 창기를 구원한 것은 세리와 창기 때문에 구원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들이 필요해서, 창기라는 세리라는 그 직업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로 해서 한 겁니다. 그래서 백날 창녀질 해봐야 주께서 찾아오지 않으면 창녀도 해봐야 구원 못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율법을 통해서 뭘 알아야 되는가 하면, 율법 안에 택한 백성만 따로 건지고 나머지는 배제된다는 그 내용도 율법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같이 찾아내야 율법 해석이 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 15절에 나옵니다. 점점 이렇게 세상을 배척하고 히브리서9장만 들어가니까 어렵지요? 어렵지만, 우리가 좀 냉철하게 차갑게 세상을 볼 필요가 있어요. 너무 감정 넣지 마시고요, 자기 눈물, 콧물 의미 두지 마시고요, 좀 차갑게 얼음장처럼 차갑게 “내가 없더라도, 내가 죽더라도 주께서 하실 일이 뭐지?” 이렇게 되어야 되지 “내가 여기 있나이다. 어떻게 저를 사용하실지” 그렇게 하지 말고 “너 같은 거 필요 없어.” 해도 주의 일은 차질 없을 정도로 뭔가 차갑게 진행되는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 새 언약의 중보,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의 중보니,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 ‘새’라는 말이 영어로 하면 NEW가 됩니다. 새로운 언약이거든요. 새로운 언약이라는 것은 올드(old), 옛날 언약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요. 여기서 여러분한테 물어봅시다. 왜 언약이 하나면 하나지 통일되지 않고 왜 구와 신, old와 new로 나눠질 이유가 뭐지요? 성경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 안 들었던가요? 옛날에. 왜 둘로 나눠져 있지요? 깔끔하게 약 하나 먹고 회충, 십이지장충 다 떨어지면 되는데 이거 뭐 해야 되고 뭐하다 보면 우리는 짜증나서 안 하잖아요. 한 알만 딱 주고 먹고 나면 쫙 모든 게 마무리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따로 주시느냐 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한테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한테 이유가 있어요. 이럴 때는 결론부터 내리는 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철저하게 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저주받아야 돼요. 그럼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죠. 그럼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저주 받을 때 가장 하나님다워요. 이거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저주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은 완성이 돼요.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 줄 알아요? 저주라는 말을 제일 싫어해요. 우리는 저주받는다고 하면 제일 싫어하잖아요. 반대로 은근히 축복을 기대하기 때문에 저주라 하면 마치 나한테는 해당사항 안 되는 것으로 하는데. 이 저주가 없는 사람은 저주를 모르면 안 되게 돼있어요. 왜냐 하면, 하나님 본인이 저주를 없애는 게 아니고 오히려 저주를 살리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저주를 살렸어요. 우리가 싫어하는 저주를 하나님 쪽에서는 확대시켜버린 겁니다.
그리고 그 저주에 본인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옛 언약은 어떤 언약인가 하면, 저주가 있는 언약이에요.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저주가 있을지어다. 신명기28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지키면 복 받고, 못 지키면 저주 받는다.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가 출제위원이거든요. 자기가 문제 내놓고 틀린 답을 할 리가 없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결코 저주받을 이유가 없지요. 정답이니까. 하나님 자신이 정답이니까 저주받을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왜 예수님이 저주받지요? 본인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히브리서1장부터 나오는 게 그 분은 죄가 없다고 되어 있잖아요. 죄가 없는데 저주가 있다? 이거 뭐가 이상하잖아요. 죄가 없는 상태에서 저주가 온다? 인간으로서는 제일 납득하기 힘든 신비에 속합니다. 죄 없는데 저주 때려보세요. 숙제를 해왔는데 숙제 안 한 사람과 똑같이 때려보세요. 학교 안 가려고 하지.
사람이 뭔가 행동을 제대로 하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고 행동한 만큼 저주가 삭감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재수 없음이 사라지기 때문에 희망품고 바르게 행동합니다. 만약에 행동 하나 안 하나 상관없이 똑같이 저주가 온다면 아무도 행동 반듯하게 할 생각 없어요. 그래서 제가 막 사세요, 라고 한 거예요. 인간이 그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막 사세요, 라고 할 때 예상대로 울끈불끈 나오잖아요.
이 문제를 다시 해봅시다. 죄가 없는데 저주받는다. 그렇게 함으로서 뭐가 성립되는가 하면, 저주를 받음으로서 비로소 뭐가 만들어지느냐, 죄가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이 자진해서 저주받음으로서 하나님의 저주를 이해 못하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죄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죄가 나왔지요. 죄가 나왔으면 하나님이 갖고 있는 모든 개념은 다 나온 게 돼요.
여기 키위가 있고, 사과 있고, 식혜가 있고, 도넛이 있다고 봅시다. 제가 이걸 가방에 안 보이게 놔뒀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제 딸이 있다가 “아빠, 키위 먹고 싶다. 키위 줘” 라고 할 때 내가 키위를 준 게 아니고 사과를 내놓은 거예요. “아니, 아빠, 그거 말고. 내가 먹고 싶은 키위 줘” 내가 찹쌀모찌를 줬어요. “아니, 그거 말고 왜 자꾸 아빠는 달라는 것은 주지 않고 아빠 가방 속에 있는 것은 왜 자꾸 끄집어내는데?” 이게 창조라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만들 수 있는 건 다 끄집어내는 게 창조에요. 뭐도 만든다? 의도, 어둠도, 빛도, 죄도, 지옥도, 천국도, 여러분 하나님이 지옥도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 인자하다고 유명한 하나님이.
지옥 만들면 그 지옥에 누가 가겠습니까? 직사리 고생하겠지요. 그걸 보고 주님께서는 에스겔에서 뭐라고 하시는지 알아요? 아이고, 이제 내 속이 시원하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변태 같아요. 마음이. 아니 자기가 만든 피조물이 그렇게 영원토록 빠져나오지 못하고 불에 고생하는 거 보고 “앗다, 내 속이 시원하네. 칠성사이다 먹는 것 같네.” 캔 맥주 새로 따는 것처럼 속이 시원하다는 거예요.
자신이 구상한 모든 것을 끄집어놓고 펼쳐놓는 것. 마치 세 살짜리 애가 새롭게 엄마한테 인형 받아가지고 인형 옷 입히기 하면서 온 방에 다 펴놔가지고 지가 재미있게 노는 것은 다 늘어놓는 거 있잖아요. 애들 키즈 보면 오만 것 다 있어요. 병원놀이 있고 학교놀이, 심지어 포크레인도 있고 기차도 있고 다 있듯이 비행기, 총, 다 펼쳐놓을 때, 엄마가 뭐라고 합니까? 니 방은 정신 사납다고 하잖아요. 그거에요. 하나님은 다 펼쳐놔요. 뭐까지? 저주까지 펼쳐놔요.
펼쳐놓은 저주에 일대일 대응으로 만나야 될 피조물이 있습니다. 그게 지옥 갈 사람들이에요. 사람이 잘못했다고 지옥 보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저주와 죄에 부합되도록 어떤 사람에다가 거기다가 붙여놓는 겁니다. 이마에다가 테이프를 딱 붙여놓는 겁니다. 지옥을 보여줘라. 딱 붙여놓는 거예요. 그러면 염소가 되는 거죠. 니는 천국을 보여줘라. 이마에 붙여놓으면 그게 바로 양이 되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마에 도장 찍어서 하듯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마귀도 그런 짓하고. 너는 내 편이야. 하고 마귀가 손목에다가 인을 찍지요. 그렇게 하듯이.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분류 작업하는 거예요. 분류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마귀하고 갈라먹기 하는 것 같고. “마귀야, 니 지옥 간다며 이 사람을 부탁해! 지옥 갈 사람을 니가 알아서 다 끌고 가! 하지만, 요 베드로는 안 돼. 니가 베드로까지 청구하는데 베드로는 내 사람이다.” 간절히 기도하면서 베드로는 지옥가지 않도록 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다 가져가고. 택한 백성은 따로 건지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본래의 언약을 갖춰놓은 거예요.
옛 언약을 주신 것은 창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잖아요. 창조한 세계에 하나님 창조자가 들어오는 그것이 옛 언약을 만든 이유입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창조세계에 본인이 스스로 적용시키는 거예요. 어떤 할머니가 이불을 만들었잖아요. 이불을 만들어놓고 이불에 본인이 뒤집어쓰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율법이 주는 저주를 그대로 다 받는 겁니다. 죄도 없으면서 율법이 준 저주를 받는 거예요. 그 이불을 주님께서 받으면서 그 이불을 너도 한 번 이불을 덮어써보지. 이불을 덮은 사람은, 모든 인간은 다, 아담에 속한 인간은 전부 다, 저주를 받아요.
그 저주를 받을 때, 예수님의 저주도 같이 받아요. 온 세상이 저주의 바다에요. 몽땅 다 저주의 세계에요. 하나님 아버지 빼놓고 저주의 세계에요. 천사와 성령 빼놓고 예수님마저 저주에 들어가요. 다 저주의 세계입니다. 그걸 가지고 주일 낮에 이렇게 했어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혼돈’입니다. 혼돈에서 그 다음에 뭐가 오느냐, 어떻게 보면 난해한 거예요. 창조에서 혼돈으로 도로 돌아가서 혼돈에서 오면서 여기에 뭐가 끼어드느냐 하면, 이 창조는 누구를 위해서 만들었다? 예수님의 주되심, 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하여 만들었다는 것을 새겨놓고 창조가 만들어졌거든요.
이 숨겨진 것을 끄집어내는데 예수님께서 이 율법의 죄를 받음으로서 저주마저도 쉽게 말해서 지옥마저도 누구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누구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예수님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지옥이 있는 거예요. 내가 가면 아프다.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가족이 가면 얼마나 고생하겠노. 자기 가족이 들어가면 고생하고 남의 가족이 들어가면 괜찮고 그렇습니까?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었어요.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늘 켕기는 게 뭐냐 하면, 사랑하는 딸이 복음을 안 받아 지옥 간다. 얼마나 가슴 아파요. 그러면 가슴 아프다는 말은 은연중에 감사가 삭제된 거잖아요. 감사가 가슴 아픈 것까지는 점령을 못한 거죠. 미진한 그 부분은 결국 누구 부분이냐 하면, “지옥도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지옥이 있어야 되는데 나는 다른 딸은 몰라도 내 딸 만큼은 지옥에서 빠져야 나는 마음이 기쁠 텐데, 왜 하나님께서 내 딸은 지옥 보내가지고 내가 모든 게 다 감사, 감사인데, 그 대목만 걸리면 감사가 안 돼.” 이렇게 한다고 했을 때, 그 여자 분의 잘못은 뭡니까? 지옥이 자기 기쁨이 아니고 누구 기쁨?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지옥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놓쳐버린 거예요.
그러면 그 여자 분은 어떻게 해야 그게 바꿔지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주님의 저주에 합류가 되어야 되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와 못 박혔나니,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가 주는 저주에 예수님도 저주 받았고 그 장에 누가 있었다? 나도 같이 저주 받았고. 따라서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산다면 내 딸을 지옥 보내는 것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필요한 조치라면 감사할 일이지. 아~ 너무나 말을 해놓고도 너무 차가워. 꼭 기계 같아. 꼭 스텐레스 같아. 알루미늄 같아. 너무 차가워. 피도 눈물도 없는 거 같아.
주님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 그냥 흘릴 피만 있지, 피도 눈물도 없이 웃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은 피도 눈물도 없이 묵묵히 자기 일을 다 하시는 겁니다. 그걸 냉철하게 히브리서에서 하는 겁니다. 옛 언약에 의해서 본인이 죽는 거예요. 예수님 하나님 본인이 옛 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