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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유튜브(100강, 101강) 봉사, 기억과 과거 150101강의마태복음

유튜브(100강, 101강) 봉사, 기억과 과거 150101

이름 : 이근호(IP:119.18.98.57)

100강

101강

이미아(IP:180.♡.87.3)

15-01-02 11:18

100강-YouTube강의(봉사)150101-이 근호 목사

제 100강 제목은 ‘봉사’입니다. 봉사는 내가 남한테 대가없이 노력이나 어떤 지혜나 희생을 베푸는 것을 봉사라고 하죠. 이 봉사에 대해서 대부분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이웃사랑을, 그리고 말씀대로 실천에 옮기는, 어떤 기본 모토가 봉사라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봉사를 함으로써 이미 성령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그리스도 사랑을 이 어두운 세상에 펼치는 것을 통해서 본인이 하나님의 성령 받은 성도 맞다고 증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실천 행동을 봉사라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봉사라는 그 위대한 내용이 사실은 종교와 관계없이, 전혀 종교가 없는 사람까지라도 모든 종교를 망론해서 다 이러한 희생정신으로 하면서 그것이 신의 사랑의 실천이라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학대했던 그 당시의 유대인들도 이 봉사 정신을 높은 가치의 덕목이라고 그렇게 강조했고 그것을 권유해왔습니다. 따라서 이 봉사라는 그것을 통해서 봉사가 진정 하나님의 뜻 맞다고 단정 짓는 데는 무리가 있죠. 실컷 봉사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결국은 저주받고 지옥 가는 사람이 된다면, 뭔가 봉사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다는 것으로 단정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 이웃사랑의 실천에 해당되는 그 봉사로는 다른 기존의 종교나 다른 일반인들의, 인간들의 속성이 나오는 봉사 정신과 어떻게 차이 나는가, 그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경 마태복음 20장 26~28절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라고 돼있어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권세 있는 자를 목표로 삼아서 사적으로 노력을 하는 그런 경향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남한테 높은 사람이 되어서, 자기는 높고 남들은 자기보다 아랫사람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섬김을 받는 그것을 위하여 때로는 고생하고, 때로는 참기도 하고, 때로는 남에게 봉사도 하고, 때로는 남한테 희생하기도 하면서, 그 희생과 봉사에 어떤 은근히 노리는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봉사 자체가 수단이 되어서 남보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그 티를 내고자 그런 노력과 시도를 하고 있다고 예수님이 그렇게 세상 형편을 단정 지었습니다.

하지만 나와 함께 있는 열 두 제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투로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말씀도 상당히 어려운 말씀인데요,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해서 종이 돼버리면 결국은 종 되는 그 가운데서도 내가 자진해서 너희의 종이 되었으니까 내가 너희들보다 으뜸이라는 의식이 일찌감치 계속 여기서 생겨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까 제가 말씀한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 남들보다 섬김을 받기 위해서, 잠시 남을 섬기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그것, 그것이 주님의 뜻은 아니겠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이때까지는 일반 종교하고 겉으로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말씀이 결정적입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람이 으뜸이 되고자 하는 그 순간이 되려면 죽는 척은 할 수 있어도 정말 죽으면 안 되잖아요. 만약에 자기 자신이 죽어서 사라져버리면 으뜸이 될 그 주인공이 사라지니까. 그동안 으뜸 되고자 시도했던 섬김의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되죠. 실컷 밑천 넣어놨는데 나중에 그 투자금을 뽑을 수 있는 그런 시점이 오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일이 소용 있겠습니까?

고생하고, 노력하고, 희생했던 모든 것이 오히려 더 고귀한 가치로 변모되어서 나에게 도로 돌아올 때, 그것이 우리한테 용기를 백배나 키울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될 수가 있겠죠. 이게 바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봉사정신이라는 겁니다. 결국 봉사하는 너는 위대하다. 남이 하지 않은 힘든 일을 니가 했기에 너는 그만큼 남보다 섬김 받아도 합당하다. 그런 정신을 노리면서 봉사에 나서고 이웃사랑에 나서는 것, 그것이 인간의 한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내릴 수 있는 아주 간편한 결론은 이겁니다. 예수님의 이 섬김을 자기 영역 속에 받아드리는 것, 그 사람이 진정한 복음 안에서 말하는 진정한 봉사정신에 입각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서, 살아있는 잘난 내가 못난 너를 위해서 이렇게 희생하고 봉사한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나의 가치를 알아다오. 라는 식으로 봉사하는 것이 주님의 봉사정신이 아니고 아예 극한까지 넘어서 가는 거예요. 아예 죽어버리는 거예요. 섬겼다고, 봉사했다는 그 주인공 자체가 날아가 버리는 거죠.

그게 뭐냐, 대속물이거든요. 이 대속물이라는 것은, 대속물이라는 표현을 한 그 전제가 뭐냐 하면, 죄라는 환경을 먼저 염두에 두고 일어나는 일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말은, 이것은 좀 실수했다. 부족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끝났다는 거예요. 저주 받는 자로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죄를, 본인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본인이 알아서 선을 행한다든지, 회개해서 반성해서 그 죄를, 극복할 수 있는 자리나 능력이 있으면, 죄를 지으면 또 회개하면 되니까 그거는 끝난 상태가 아닌데.

대속물이 투입되는 그 시점이 언제냐 하면은, 죄 지은 본인이 자기 죄를 없애기 위해서나 또는 그 죄에서 의로 옮겨가기 위해서 어떤 시도도 다 물거품이 되고 그럴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확정된 상태에서 투입되는 것이 대속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거예요. 니가 잘 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든지, 니가 착해질 수 있는 그러한 여지가 있는 의인을 위해서 내가 온 게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본인이 회개하고 반성해도 그 죄 처리가 불가능한 그런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 자신이 온 거예요.

보통 세상사람 사이에서 뭔가 잘해주게 되면, 그쪽에서 뭔가 반응이 좋으면 더 잘하고 싶죠. 근데, 아무리 잘해줘도 반응이 나쁘면, 시큰둥하고 모독하게 되면 봉사하더라도 출소하고 싶은 생각이 들 겁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니가 너한테 잘해준 사람에게 잘하면 그건 이방인과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어요. 그러면 원수를 사랑하게 되면, 원수가 그 사랑을 알고 개과천선해가지고, “아이고, 당신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하면서 고맙다고 돌아옵니까? 그걸 은근히 기대하고 원수를 사랑합니까?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고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것은, 그들이 감동을 받아가지고 다 천국가기를 기대하면서 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백날 은혜를 줘봐야 그들은 택한 백성 아니면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도 택한 백성이 돌아오는 것도 주님께서 그런 능력을 주지 아니하면 자체적인 능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뻔히 다 아시고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주신 겁니다. 바로 이 정신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그게 바로 봉사,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 안에서의 봉사정신입니다.

아무리 봉사해도 이 봉사로서 내 죄를 갚을 길이 없음을 명심하는 그 봉사, 그래서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는 그 봉사, 그것이 성령에 의한 봉사입니다.

이미아(IP:180.♡.87.3)

15-01-02 11:23

101강-YouTube강의(기억과 과거)150101-이 근호 목사

이번에는 제 101강 제목은 ‘기억과 과거’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나오죠.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과거일이라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과거일이라는 것은, 기억되는 조건하에 과거죠. 기억되지 않으면 그거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거는 과거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거를 생각한다는 것은 곧 무슨 뜻이냐 하면 본인이 알고 있는 범위내의 내용만 끄집어내서 회상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어떤 실제적으로 일어난 일을 우리가 “실제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라고 아무리 남한테 이야기해도 다른 사람이 “그건 당신이 일방적으로 과거 일을 당신의 기억에 맞춰서 해석한 결과일 뿐입니다.” 하면 우리로서는 할 말이 없죠. 그래서 사람들이 과거 이야기를 할 때에 항상 이거는 본인이 독보적인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똑같은 과거 일을 겪더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하면 끝나는 문젭니다. “나는 그때의 일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지 않다.” 라고 그렇게 주장해버리면 똑같은 과거 일이 제 삼자가 볼 때, 어느 일이 진짜 과거에 일어났는지 알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과거라는 것은 어떤 체험이 있더라도, 어떤 일을 겪었더라도, 그 과거를 현재로 만드는데 있어서는 그만한 한계가 있는 겁니다. 그 한계가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은 자기를 생각하는 독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이 과거의 이야기가 쭉 나열되어 있어요. 이 과거이야기가 나열되어 있을 때, 어떤 분들은 이 성경을 보면서, 여기 예를 들면 히브리서 11장 25절 같은 경우에는,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이렇게 성경에 나와 있으면, “뭐, 모세 생각은 그랬겠지.” 라고 그냥 모세 개인적인, 독보적인 자신의 경험으로써 그렇게 치워버리는 경향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고생했다면, “그래 본인의 입장에서는 고생했겠지.” 라고 생각하는데, 그래 돼버리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계시로 적용될 수가 없죠. 왜냐하면 과거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이 각자각자 경험한 것이, 독보적인, 사적인 경험에 불과하다면, “니는 니고 나는 나다.” 그렇게 하고 끝날 문제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11장을 보는 이유가 이게 개인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어째서 이 개인에게 일어난 일이 개인 문제로 끝나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여기 히브리서 11장에 끝나고 난 뒤에 12장 초반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여기 ‘증인’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증인’이란 말은 혼자 자신을 증인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를 증인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나 말고, 나 외에 다른 분에 의해서 나는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 하는 것이 증인입니다. “나 잘났소.” 하는 것이 증인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이 앞에 있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아벨, 노아, 아브라함, 그리고 야곱, 모세, 줄줄이 나오는 많은 사사들, 이 모든 이야기가 각자각자 다 다른 기억과 과거를 가졌다고 우리는 그렇게 짐작을 하지만 공통점이 있어요. 그 모두 다 증인이라는 겁니다.

누굴 증인하느냐, 예수님을 일찍부터 증거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거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한번 얼마나 신기한지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동네 사람들이 청와대 초청 받아서 똑같이 대통령을 만나고 나왔습니다. 대통령을 본 것은 다같이 봤죠? 다같이 봤는데 그 사람들이 증언하는 것들이 내용이 다 달라요. 왜냐하면 아까 말한 것처럼 인간은, 인간의 과거와 기억이 독자적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안 만난 다른 동네 사람들은 누구 말을 듣고 어떻게 대통령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정리해야 할지 혼선이 생기죠. 그럼 이 사람 말도 주워듣고, 저 사람 말도 주워들으면 그렇게 주워들은 이야기가 본인뿐만 아니고 같은 청와대에 간 적 없는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열 사람이 들었다면 그 열 사람이 들어서 정립된 그것도 각자마다 좀 다 다르죠.

그러면 이게 성경 같으면, 백사람이면 백사람이 증거 하는 예수님이 다 달라버리죠. 그것은 어느 한계를 못 벗어 나냐, 본인이 독자적인 한계, 그러니까 예수님을 증언 한다, 대통령을 증언한다, 하지만 사실은 대통령을 증언하는 자신을 증언하고, 하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을 증언하는 본인을 증거 하는, 그 한계를 못 벗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여기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한결같이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이런 경험 속에, 주님이 주신 경험 속에서 내가 경험했다가 아니라 주께서 경험했다를 받아서 그들은 방주를 지었고,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면서도 고난 받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며, 예수님만 갖고 있던 어떤 요소가, 그들, 우리보다 선배 되는 그들 속의 인생에 깊숙이 개입한 거예요. 개입하니까 여기 믿음의 선배들이 뭘 증거 하냐면, 나는 아니고 내 속에 투입된 예수님의 것을 증거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와중 속에서 어떻게 되느냐. 나는 아닐려고 했는데, 나는 이런 일을 안 하려고 했는데, 강제로 주님께서 이런 일을 시켰다는 겁니다. 하나 예를 들면, 모세가 바로의 공주 아들로서 애굽의 모든 보화 능력을 더 좋아하고 싶었는데, 주께서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백성과 고난 받기를 강제로 밀어 넣었다는 식으로 증언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믿음의 선배들이 뭘 증언 하냐. 이것은 내 뜻이 아니오를 증언하게 돼있어요. “내 뜻이 아니오.” 내 뜻이 아니오를 증언하게 돼버리면, “그러면 니 뜻이 아니었는데 니는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되었냐?” 할 때, 누가 손가락을 겨냥하게 될 겁니다. “나 아니고 저 분입니다.” 할 거예요. 또 하나 예를 들면 히브리서 11장 12절에서 14절에 나오는 말씀에 의하면, 여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 땅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나그네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이 나그네 삶을 살 때, 우리는 이렇게 편하게 생각하거든요. “아, 아브라함이 구원받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천국가기 위해서, 아! 내가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천국 가지? 그래 나그네 삶을 살면 천국 가는구나! 그래, 어떻게든지 나그네 삶을 살기 위해서 애를 써야지. 그러면 나중에 본향에 올라간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그게 바로 오해라는 거예요. 잘못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 삶을 살려고 애를 썼고,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노력했기에 구원받았다는 이런 것은 결국 자기 증거지 예수님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그거는 사적이고, 독자적인, 자기 믿음 생활에 불과한 거지 그거는 자기를 구원하는 믿음에 해당되지를 못합니다. 본인은 이 땅에서 정착하고 싶고, 본인은 이 땅에서 더 잠을 자고 싶었지만, 자기 인생 속에 깊숙이 개입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 먼저 나타나서 자기를 강제로 이 땅에서 나그네 삶을 살도록 강요했다는 그것, 그것만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성도는 나그네 삶을 산다는 것을 증거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날,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성도는 어떤 삶을 사느냐. 이 중에서 어떤 하나를 선택하면 안 돼요. 사실은 여기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노아나, 아벨이나, 여기 아브라함이나, 그리고 모세나, 그리고 많은 사사들이나, 그리고 선지자들, 이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한평생 가운데 다 섞여서 한꺼번에 들어오게 됩니다. 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가 십자가 진 그 이후의 혜택을 받게 된 것이기에.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면서 갖고 있던 모든 내용이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다 적용이 되게 돼있어요.

그리 돼버리면 어떤 때는 우리가 노아처럼, 어떤 때는 우리가 아벨처럼, 어떤 때는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하고 동일하게 예수님만 증거 하는데 그렇게 살게 된 그것은 결코 내 뜻이 아니고 내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 잘하면 신앙생활 좋다고 천국 가겠지?” 이런 꼼수를 우리는 쓸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냥 이들처럼 우리는 우리의 욕망대로 그냥 살아야 돼요. 사는데, 강제투입 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우리가 잊을 수가 없고, 우리의 본성을 우리 스스로 이렇게 외면할 수가 없어요. 이거는 우리의 본성이니까.

하지만 그 본성가운데, 본성 속에 우리의 허락도 없이 강제로 쳐들어와서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선배들이 했던 그 일을 우리에게 재생시키고 반복시킬 때, 이미 우리 가운데 주님이 침투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증거 해야 될, 우리의 기억과 우리의 과거를 통해서 증거 해야 될, 우리의 몫이고 주님이 작업하는, 작용하는 현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선배들과 똑같은 입장에 놓여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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