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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도행전 68강(봉사), 마태복음 59강( 미묘한 차이)강의전도서

사도행전 68강(봉사), 마태복음 59강( 미묘한 차이)

이름 : 이근호(IP:119.18.98.57)

주향(IP:222.♡.177.93)

15-01-22 23:58

대전-행27장22절(봉사)68강 -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 27 :22-24

사도행전27장 22절부터 제가 읽어 볼게요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

이게 바로 현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은 지금 사도 바울과 함께 있는 다른 사람한테는 사실은 현실이 가려져 있는 겁니다. 그들은 현실의 전부를 모르죠, 그들은 주님 안 계시는 것을 안 계신다 간조한 나머지 현실입니다.

주님이 포함된 현실과 주님이 포함되지 않은 현실이 어떻게 생각하면 밥하나 더 추가된 숟가락 젓가락 하나 더 얹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객이 바뀌어요, 주객이. 주님이 안계시면 내가 꾸려 나가는 현실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계시면 내가 생각하는 현실이 엉터리라는 것이 들통 나지요. 그것은 항상 내가 생각한 현실은 그냥 현실이 아니고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꾸려 나가는 현실이거든요. 나를 지키기 위한,

목적이 있어요, 목적이 뭐냐 하면, 나를 보호하는 목적이지요, 나를 보호하는 목적이 엉터리예요. 사실 엉터리 현실 이예요. 엉터리 현실인 반면에 주의 계획, 주의 약속, 주님의 계획을 보여주기 위한 현실이 참된 현실입니다. 주님의 계획이,

주님의 계획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얘기 하지요. “내가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끝. 그것뿐. “내가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가 나를 보호 하지 않으면 누가 보호 하겠습니까? 내가 살기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것을 나는 현실로 봅니다.”이렇게 주장하거든요.

그럼 이것이 현실이 되고, 이런 사람들이 신을 믿어요, 하나님을 믿게 되면 그 하나님은 뭐냐하면 내가 구축해 놓은 현실에 내 뜻대로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되는 조건하에 나로 인하여, 나에 의해서 믿어져야 되는 신이 되어 버렸어요. 이 현실 자체가 엉터리기 때문에, 그 신도 그 예수, 그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도 다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엉터리 하나님이냐, 진짜 하나님이냐 차이점은 바로 주객이 바뀌지요. 주객이 바뀌어지게 되면 나의 현실은 내가 고정되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지만 주님의 계획이 현실이, 주님의 계획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면 나는 항상 유동적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걸 뭐냐 나는 연기 된다고 계속 지연되는 거죠. 계속 지연 됩니다.

지난 낮 설교에 그렇게 얘기 했잖아요. 마지막 대목에서 어떤 배우가 말하기를 너무 연기 잘한다고 하는데 송강호 정도 되는지, 연기를 할 때 가장 힘든 연기가 뭡니까? 하면 내 역할 하는 게 제일 힘듭니다.

왜냐하면 모델이 있기 때문에 모델을 그대로 모방하면 되는데 내가 나를 모방하는 “나는 남 연기하는 그 자체가 나 이기 때문에 따로 내가 없어요” 따로 나가 없기 때문에 내가 고정되어 있으면 그걸 모방하면 되는데 내가 항상 변하기 때문에 나를 모방 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스톱이 안되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계속 지연 되고 연기되는 “아이고 다음에 잘하지” 쉬운 말로 다음번에 잘 하겠습니다. 후회하고 계속 반성하면서, 다음번에 보다 더 나은 사람 되겠습니다 그렇게 얘기 하지요.

그런데 전에 이야기 했듯이 그 다음번에 더 낫다는 것은 그것을 플러스알파라고 하지요. 그 기준점이 지금을 기준점으로 해서 보태기거든요. 지금 자체가 몽땅 날아가야 하는데 지금 자체를 붙들고 요것보다 약간 더 보태기, 괜찮은거 보태기, 이렇게 되면 안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자체가 엉터리가 되지요.

겨울왕국이라는 만화, 애니메이션, 만화영화가 있어요 - let it go~ let it go~ 겨울 왕국 만화영화에 보면 눈사람이 나오거든요. 눈사람이 겨울에는 신나요. 아주 대우받고 그런데 여름되니까 나쁜 짓을 한게 아니고 몸 자체가 없어져 버려요. 우리 몸이 눈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되요. 내가 만든 현실에선 분명히 있지만 주님의 영광 앞에선 내가 눈사람 되서 내 자체가 없어져 버려요. 없어져 버립니다.

이럴 경우에 가장 분명하게 진실이 드러나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은 고린도전서 5장에보면 음행이 나오고 민수기 할 때도 음행이 나올거예요. 음행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항상 성경에서는 뜻을 모를 때는 반대말을 통해서 대비하면 됩니다. 음행의 반대말이 성령을 받지 않고 자기 자신의 현실을 유지하려는 사람한테는 음행의 반대말은 하게 되면 음행 안하기 이렇게 된다고요. 왜냐하면 음행을 그동안 안했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음행하게 되면 벌 받으면 그러면 이 코너 끝나는 거 아닙니까? 내 인생 종치는 거 아닌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성경 말씀을 볼 때 내가 어떻게 부재하느냐를 고정시켜 놓고 내가 말씀을 어떻게 지키면 계속 이것이 어찌 하면 번창하고 못 지키면 내가 침식당하고 깎여나간다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음행의 반대말은 봉사입니다. 봉사하는 것. 봉사 앞에서 내가 무엇을 지켰습니다, 못 지켰습니다 내가 나 잘되기 위해서 이거 하나 했습니다가 사라져요. 왜냐하면 봉사 자체가 나를 위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위한 일을 안 해 버리면 더 이상 내가 잘되기 위해서, 복 받기위해서 하는 모든 것들은 의미 없이 돼버립니다. 나는 간음하지 않았다, 나는 살인하지 않았다, 나는 거짓말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다 쓸대 없는 엉터리 같은 자기 지키기에 불가 한거예요.

부모가 돼서 자식을 잘 가르치면 출세케 하지 이렇게 하면 그건 봉사가 아니고 자식이 나의현실을 빛내는 하나의 재료가 되어 버려요. 그렇게 하면 안되고 주께서 주신, 어떻게 자식을, 내가 어떻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잘 가르쳐서 돌려 보내냐 그런 마음으로 자식을 가르쳐야 됩니다. 자식하고 앵벌이 하지 말고, 뭐 앵벌이 하겠어요? 대부분 김장 이만큼 해가지고 갖다 주고 “너 또 뭐 아쉬운거 없냐?” 말만해라 다가져다 받치고 안겨 줄게.” 그게 봉사인지? 안그러면 그게 장님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을 해석할 때 주님이 먼저 너를 위해서 봉사했다는 것이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20:28)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너를 위하여 봉사 하러 온 거다. 봉사를 하는데 주님이 우리한테 봉사할게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시키기만 하면 아주 잘 할텐데 봉사할게 뭐가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니 자체가 눈사람이기 때문에, 녹아 버리기 때문에, 니 자체를 죄로 지옥가기 때문에 천국가게 바꾸기 위한 봉사를 우리 본인은 못해요, 할 수 없습니다.

이번 수련회의 주제가 민수기지요. 민수기의 핵심부분이 뭐냐 하면 부지중에 지은 죄를 제사를 통해서 용서하시는 겁니다. 부지중에 지은 죄를 지을 때는 우리는 그냥 지은 줄도 모르고 그냥 돌아서니깐 저게 죄였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지으면서 죄 인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확실하게 한가운데 확정을 매일같이 반복해서 확정 짓는 게 있는데 그게 "제사" 입니다. 제사는 뚜렷함, 우리의 죄지은 것은 흐릿함. 그렇다면 흐릿함이 뚜렷함이 되려면 어디를 거쳐 와야 하냐하면 뚜렷한 제사를 거쳐 와야 뚜렷해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여튼 송구영신 예배나 크리스마스 때에 흔히 상투적인 거지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복 받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은 민수기에, 레위기에 의하면 뭐냐 하면 제사 활동이 함께 반복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것이 점잖은 KFC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의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게 아니고, 산타 크로스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봉사하다가 희생당하신분이 함께 있는 거예요.

지난 낮 설교 때 뭐라고 했어요?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의 차이점이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지혜는 저희들이 살기 위해서 자기보다 더 나쁜 짓한 사람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 세상 지혜잖아요 “ 너 같은 못된 놈들 때문에 재수 옴 붙었어 그래서 너는 좀 죽어 줘야되! 그래야 괜찮고 건전한 우리만 깨끗하게 더 깨끗한 티를 내면서 살겠다.”

하나님의 지혜는 뭐냐 하면 의로운 자가 죽어요. 그게 결정적 차이입니다. 이 땅에서 잘난 사람이 살아남은 게 아니고 못난 사람이 죽는 게 아니고 가장 잘난 사람이 가장 처참한 죽음을 당하면서 형성된 현실, 그 현실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제사법,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을 경유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는 엉터리 같은 현실이 현실인줄 알고 거기에 지금 올 인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현실이 아니고 비현실이 되겠지요, 비현실이 되면 누가 피곤합니까? 우리가 피곤 하지요? 여기 땅이 있는데 땅에서 다이아몬드나 금이 나온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금광을 찾아서 몰려 왔다,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팝니다. 파낼 때는 굉장히 힘차게 파지요. 희망이 있으니깐 그런데 파보니까 금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그동안 갑자기 밀려오는 것은 피곤함이죠. 금도 없는데 금 파낸거예요. 평생을 쓸 때 없는 짓에 올인 한거예요. 쓸대 없는 곳에..

자식이 잘된다고 해서 내가 구원 받는 게 아니거든요, 삼촌이 잘된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아버지가 잘됐다고 구원 받는 것도 아니고, 온 통 전부다 그냥 아마 되겠지! 라는 희망하나 붙들고 그냥 쓸대 없는데 곡괭이 들고 금파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빵 굽는 토스트 파는 트럭 잃어 버렸다고 찾으러 다니고 드라마 이야기예요. 죽자고 잃어버린 트럭 찾으러 돌아다니고, 드라마를 보셔도 그리스도 십자가를 경유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드라마의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에..

교회 갔다 올 때는 잠깐 은혜 받았다고, 잠깐 은혜 받은 거 같지만 돌아서면 우리는 드라마속 같아요, 드라마 속입니다. 그 드라마가 현실이 아닙니다. 그러면 현실을 “어디 있는가? 사도행전 27장 22절, 23절이 현실이예요. 이 현실은 오직 사도 바울 외에는 다른 사람은 현실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모르고 있을 때는 어떻게 된다? 핍박이 가해지죠.

모세, 엘리야, 아브라함, 이삭 전부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이사야 같은 경우도 에스겔도 마찬가지고 자기의 아내도 죽고 얼마나 수난 받습니까? 예레미아는 막 울음을 달고 다녔고, 그것을 성경에서는 그것을 뭐라고 하냐 하면은 사도행전 3장 16절에 나온 것처럼 목격자라 하는 거예요. 목격자. 내가 봤는데 아니다 라고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증인, 증인이지요. 내가 봤는데.. 다름 사람은 뭐라고 하냐 하면 “너 시력 어떻게 돼? 2.0 이야? 아니야? 0.7 이야? 0.7인데 우리는 못 봤는데 왜 너 혼자 봤냐? 글세 말이야!” 그게 본인도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렀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성령 받을 때 얼굴이 천사같이 됐지요. 현실이라는 것은 이런 거예요. 참된 현실 속에서 성령 받아 천사같이 됐지요? 그럼 그것을 인간의 현실에다가 적용시키면 이렀습니다. 얼굴이 천사같이 안 되면 전부다 성령 안 받은 게 되요. 그리고 스데반 집사같이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가 되냐 하면 지금 몸의 컨디션 괜찮을 때가 아닙니다. 혈압 정상, 건강 검진하니깐 “아무 이상 없어”가 아니고 지금 돌이 날아오는 순간이예요, 세상에서 천사같이 된 얼굴은 뭐냐 하면 프로폴린 마취제를 하고 곤하게 잠들 때가 천사 같은 얼굴이예요. 평안하지요, 하지만 세상의 평안은 고통이 온다는 거예요, 고통이 와요. 반면에 스데반 집사는 고통 중에 천사에요.

희아난 현실이에요. 그것은 이유가 뭐냐하면 봉사지요.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전에는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봉사했기 때문에 성령 받으면 우리가 주님을 봉사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현실의 차이를 이렇게 한번 정리해 봅시다.

인간과 비인간으로 나눠 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사람 취급 못 받았습니다. 알튀세르 라는 철학자도 얘기 했지만 누구든 호명 받지 못하면 사람 취급 못 받습니다. 그럼 호명 받으면 되잖아요. 호명을 받으려면 이 집단에 형성된 현실에서 이용 가치가 있어야 돼요. 이용가치가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처녀가 호명을 받지 못하면 시집을 못 갑니다. 그렇지요? 시집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게 아니고 호명을 받아야 돼요.

어제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얼굴 잘 생기지 못한 여잔데 아무리 봐도 자기가 나중에 호명 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니깐 아예 여자 쪽에서 괜찮은 남자, 예쁘장한 남자를 만나 가지고 대전 인가? 사는 아가씨 인데, 직장까지 그만 두고 남자 직장이 광주에 있으니까 광주에 가서 동거를 시작했어요, 동거를 해가지고 신랑 쪽에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시키게 됐어요. 아! 이럴 수도 있구나!

그런데 그렇게 되면 결혼을 해도 행복 시작이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내가 안 좋아하고 네가 일방적으로 좋아 했잖아!” 라는 핑계를 대고 남자가 무슨 짓거리를 해도 그걸 뒷수습을 해야 하는 부담감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지는 “을”이 되고 남자는 “갑” 되면서 본인은 정식 정규직이 못되고 계약직처럼 되는 거예요, 완성이 되지 못하고 미생이 되요, 3년 살다가 계약직 끝나는 수도 있고 5년 살다가 끝나는 수도 있다고요.

결혼도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난 너를 지켜주기 위해서 내가 너와 결혼 했다” 사실 남자 쪽에서 그렇게 나와 줘야 하는데 주례로 끝나면 안되는데..

예수님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예수님을 불러 주질 않았어요. “너는 우리 단체 집단에 끼여 들지마, 너는 귀신의 대장이야.” 그걸 바알세불이라고 합니다. “너는 귀신의 대장이야! 어디 더러운 인간이, 우리 집단에 한 일원이 될 수 없어. 나가! 나가 죽어! 자! 이 사람을 죽이기로 결정 했습니다. 자! 반대 하는 사람? 없지요? 찬성 하지요? 와아~ 죽여라!~ 죽여!~” 이것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주동자는 따로 있지만 호응도는 전체가 다 호응 한 거예요. 그러면 제자들은? 도망치지요, 잡히면 죽는데, 그런데 누가 베드로를 알아 봤잖아요. “아~ 난! 저 양반 모릅니다.” {우린 저 양반 싫어하는데..} “나도 저 양반 싫어합니다.” 이 순간 베드로는 자기가 인간이 된 줄 알았어요, 왜? 예수님 혼자 비인간이 되버리고 예수님 빼 놓고 모든 인간이 ”인간“이라고 우기게 된 겁니다.

하나님의 전략은 그거예요. 모든 인간을 인간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서 인간들은 부활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주님만 부활하시게, 지난주일 설교 중 가장 어려운 대목인데 십자가에서 죽은 장소와 부활하시는 장소가 다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가 있어야 하는 곳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가보니까 시신이 없는 거예요.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질문 : 좋아 했습니까? 실망 했습니까?

답변 : 실망 했어요.

사실은 우리가 좋아해야 되잖아요 “말씀대로 부활 하셨네요 과연 맞습니다.” 이렇게 해줘야 하는 원래의 시나리오대로 되어 줘야 하는데, “우짜노! 우짜노! 실망 했지요? 실망했다는 말은 아직도 그 여인네는 자신의 삶의 지평을 바꾸지 못했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예수이기를 원하는 거예요, 나의 현실을 지켜 주는 예수, 그 예수를 고대하고, 메시야를 원했던 겁니다. 왜 주님은 보이질 안는가? 그 일을 반복을 해서 그 일을 극복 할 수 있는 자만 신자 되기 위해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빈 무덤을 통해서 십자가 믿는 자가, 발견하는 자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교회에 나와 믿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본인이 교회오기 전에도 인간이고 교회 오고 난 후에는 더 휼륭한 인간이고 이런 식이라면 전부다 가짜신자들이에요.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진짜 “인간”은 여기 있다라고 보여 주신 거예요. “인간” 그 인간 예수는 부활했다, 단지 죽었다 살아났다 그것이 아니고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모든 인간은 “인간”도 아니다 라는 내용을 담고 부활 하신 거예요.

그래서 부활의 주님이 등장하는 그 현장이 뭐냐 하면 “너는 인간도 아니였어” 라고 그것을 통보해주고 뒤돌아서 차후에 소급해서 그것을 다기 돌이켜 지적해줄 때 그것을“성령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스데반 집사는 천사와 같이 되는 거지요. “주여! 돌 날아와서 맞아 죽어도 쌉니다. 주님만 인간이지 애초부터 저는 인간도 아니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되어 있지요. 그 뜻은 태초에 “인간”은 없었습니다. 태초에 인간은 없었어요. 태초에 인간이 없다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내가 콩 내놔라! 팥 내놔라! 할 입장이 아닌 겁니다. 그런 이야기할 처지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입장이 아닌 거예요.

빈 무덤, 십자가가 서 있다. 그러면 그 십자가를 강화하는 것, 더욱 강하게 하는 것은 빈 무덤이 반복 되면 되겠지요, 반복되면서 현실이 뻥뻥 구멍이 뚫립니다. 그 구멍 중에 하나가 사도행전 27장 23절입니다.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에 보면 바울아! 두려워 말라! 고 되어 있지요. 여기서 바울보고 “두려워 말라”라는 말은 정말 네가 생각하는 현실은 누구나, 모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이것을 확대시켜서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면 현실은 무섭다! 현실은 두렵다! 두려운 것을 억지로 이겨내려 하니깐 힘들고 피곤하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도 마찬가지고 스데반 집사에게도 마찬가지예요. 돌이 던져지면 두렵고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을 들고 스데반을 치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반복하기 위한 빈 무덤 만들기 작업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천사처럼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주여! 이렇게 해서라도 빈 무덤만 증거 될 수 있다면, 십자가가 증거 된다면, 주여! 그들이 나를 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게 뭐냐 하면 봉사 정신입니다. 주님의 계획을 지키는데 봉사 할 수 있다면 주어진 이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대만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경에 로마서에서 나오는 말씀은요 참 간단해요.{환란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이런 용어가 쭉 나와 있는 데요, 로마서 8장을 볼까요 용어 자체를 현실적으로 한번 바꿔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에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다시 말해서 “끊으리요”라고 반문 하는 건 강조하는 겁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 “성도”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진다? 안 끊어진다? 안 끊어진다. 안 끊어진다 라고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환란이죠 그러면 누구를 적용시키냐 하면은 뉴스에 보면 나오는 사람 있잖아요 누구냐 하면 조현아, 내가 조현아라고 생각을 할 때 괜히 땅콩 갖고 시비를 걸었다가 지금 구속당하게 생긴 조현아를 본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게 뭡니까? 국민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그러나 만약에 조현아가 성령 받았다면 환란가운데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여! 이것이 주의 빈 무덤과 십자가를 증거 하는 작업장이라면 주여! 제가 감당케 하옵소서! 하며 천사의 미소를 짓겠지요.

그 다음에 곤고, 곤고는 어제 나온 뉴스입니다. 서울에 있는 공원에서 잡힌 노인을 죽여 가방에 넣은 사람, 정형근. 우리가 그 본인이라고 생각하면 곤고가 되겠지요. 그 다음에 핍박이라 했으니까 핍박이라 하는 것은 요즘 미국계 한국인으로써 북한에 들어갔다가 논란이 되고 있는 사람.

그 다음 기근이니까 이건 아프리카, 아프리카 사막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 적신은 간단해요. 서울역에 있는 노숙자. 대전역에도 있어요. 사업부도 나고 부도당해 도망 한 사람들. 이렇게 놓고 보니까 하나하나 상황에 집어넣으니깐 실감나죠? 위험이나 칼이나 앞의 전제가 뭡니까?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거지요. 이 말은 사적으로 너는 사랑이 끊어진다 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끊질기고 질긴 줄을 보여주기 위해서 “너”는 너라는 인간이 나의 이 말씀을 현실화 시키는 작업에 네가 노숙자로, 조현아로 걸려들었다. 걸려 든겁니다.

이 말은 평상시에 고요하고 평안하다고 좋아하지 말라는 거죠. 이거는 과분한 거예요. 너무 평안 하고 고요 하면 안 되는데, 너무 조용 하니까 오히려 겁납니다. 불안 합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에 감사해야 되지요. 일용할 양식에 우리는 감사해야 하지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번 주일날 설교는 하나하나 다 어려웠어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쐐기풀로 옷을 짜듯이 짜깁기 하시는 이 현실 속에서 우리 자신이 나를 보호하는 이 어떤 짜깁기에서 손을 떼기 바라시는 거예요. 동화에서 백조왕자가 저주 받았잖아요? 저주 안에 있는 인간은 자기 저주를 유발한 상황을 본인의 힘으로는 극복 할 수가 없습니다. 극복 할 수가 없어요. 그냥 백조로 살아야 되요. 환경 자체를 바꾸려면 새롭게 뭔가를 짜야 되요. 그리고 그 짜여진 것을 가지고 환경 자체가, 저주가 풀리는 환경으로 바뀌여져야 되겠지요?

말씀으로 짜신 그 상황에 성령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졸지에 백조에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조마조마 하지요. 상황이 아직까지 활 활 타는 불 앞에서 열 벌을 짜야 되는데 아직까지 다 짜지 못했으니... 거기에 나오는 그 공주 이름이 엘리자라고 하는데.. 동화 내용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연결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비 인간이다라는 말은 그냥 “죄인이다”라는 정도가아니라 자칫 오해할 수도 있는데 즉, “제가 부족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부족한지도 모르고 당당한, 이건 인간이 아니고 기계같은 비인간이 되는 겁니다. 마귀에게 푹 젖어있으니까요.

우리는 반성하고 회개 한다고 하면서 반성하고 회개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대견스럽고 반성하는 자기에게 반해서 그걸 신봉 해 버려요. 그 정도로 우리는 엉망진창이 된 거예요. 반성하는 자기모습이 너무 예쁘다는 거예요. 실제로 금식기도 한번 해 보세요 나중에 철야하고 나면 새벽 두시쯤 되가지고 자기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내가 이렇게 새벽 두시까지 기도할 수 있다니 그래, 난 할 수 있어” 마치 기도의 대장 기도의 용사처럼 되는 착각에 빠져요.

여러분 말씀을 보면 사사기에 기드온 나오지요? 사사기에서 기드온 부분을 보면 처음에 이만 이천 명인가? 삼만 이천 명인가? 삼만 이천 명이 왔는데 거의 다 가버리지요. 그런데 달랑 남은 게 삼백 명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봐야 될 것은 왜? 처음부터 삼백 명만 오지 않았는가? 왜? 처음부터 어차피 삼백 명으로 할 껄 왜 처음부터 삼백 명이 아니였나? 그 말입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현재 주어진 인간은 현재 자기의 착한일이 원인이 되어서 착한일의 원인의 결과는 “복” 이겠지요. 잘 되는 것, 행복해지는 것, 항상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인간도 아닌 비인간 이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원인은 다른데 있고, 우리는 결과로써 여기 다른 원인의 의해서 우리가 결과물로써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그렇게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성경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원인이고 그 결과물이 “나” 이지요. 그래서 주일 낮 설교에 우리가 진리이고 우리가 지혜라 말한 거예요. 자칫하면 그 말을 오해 할 수도 있는데 앞뒤로 살펴보면 그런 뜻이 아니고 주님의 결과물로써 그렇다는 거지요.

주일 낮 설교 중 어려운 곳이 무엇이냐 하면은 충청남도 서산에 있는 감리교에서 진짜 염소를 잡았어요. 제가 하는 말이 “아니! 염소를 잡지 말고 자기 아들이나 잡지” 아브라함처럼, 그것을 동영상에 올렸지요. 자랑스러워서. 아니! 염소잡지 말고 자기 아들이나 잡지, 아들 눕혀놓고.. 문제는 그거예요 아브라함은 스톱이라는 소리가 나왔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스톱이라고 안하면 어떻게 될까? 이건 공개 석상에서 아이 잡는 거예요. 애 잡는 살인자가 되는거예요. 그게 아마 싫었던 모양이예요. 그게 아마 겁났던 모양이에요.

조작된 현실. 거기서 제가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것을 보고 경악하지 마라. 지금 주님도 우리를 잡고 있다. 우리 인생이 아니고 걸레 아닙니까? 누가 잡아요?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산제사 제물로 아주그냥 난도질 쳐 버리는 거예요, 잡습니다.

우리가 뭐다? 결과물이다. 주님이 주님의 죄 용서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잡아서 난도질 치는 인생. 그것이 곧 우리의 인생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모르고, 그걸 모르니까 내가 원인이 되어서 기도를 한다든지, 헌금한다든지, 십일조 한다든지, 내가 교회가고 내가 원인이 되어서 지금 형편보다 더 원상회복 되고 더 나아 지기를 소원하는 불교에서 빌고 갑바위 에서 비는 그런 방식으로 밖에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을 모르고 있어요.

내가 어떻게 나에게 일을 가해 가지고 어떤 행동을 조작해 버리면 그걸로 인해서 내가 원하는 기대하는 결과나 결과물이 되기를 바래요. 자! 오늘 본문을 봅시다. 지금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이 자기의 계획입니까? 아니죠. 로마로 가는 가운데 풍랑이 이는 것은 자기의 계획 입니까? 아니죠. 뭐예요? 그러면.

지금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어젯밤에 내게 서서 말 할 때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된다.” 라고 이야기 하는 이 시점이 지금 풍랑 가운데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 이야기 하는 게 아니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에게나 우리에게 뭐가 지금 굉장히 안 풀리냐 하면은 이 이야기를 그냥 곱게 유람선 타면서 이야기해도 되잖아요. 유람선 타고 페리호도 타면서, 느긋하게 VIP실에 가서 카지노를 즐기며 “네가 15일 후에는 로마 왕 앞에 설거야.” 아! 예 감사합니다.

이렇게 할 수도 있는데, 왜 배는 난파되고, 이순신 장군은 열두 척이나 되는 배가 있지만 여기선 배가 하나도 없이 되요. 뭔가 이게 해답 이예요. 주가 하시는 계획을 내 쪽에서 실행할 수 있는 어떠한 여지를 하나도 남기지 않은 겁니다.

내가 나의 구원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는 방식이 바로 빈 무덤의 방식, 십자가의 능력의 방식 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려면 예수도 믿을 수 있고, 십일조도 하려면 십일조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 방법으로는 구원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구원 안 되고, 십일조를 내도 구원 안 되고, 교회 안다녀도 구원 안 되고, 다녀도 구원 안 되고, 감사로도 구원 안 되요. 다만 안 되는 걸 되게 하시는 주님. 낙타가 있고, 바늘구멍이 있는데 낙타가 작아져서 바늘을 통과 했습니까? 내가 프로포필로 마취시켜 작게 만든 것도 아닌데, 그게 아닌데, 낙타는 덩치가 여전히 커요. 그리고 낙타가 덩치만 큰 것도 아니고 낙타가 구원받고 난 뒤에도 달라 진 게 없어요. 질적으로도 여전히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돈 좋아하고, 바늘구멍을 통과 했는데도 똑같아요. 그런데도 통과했어요.

기생 라합이 정탐꾼, 스파이를 숨겨줬습니다. 자!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정탐꾼을 무사히 보내고 난 후에 기생라합의 직업은? <기생> 갑자기 기생 라합이 테레사 수녀가 된 게 아닙니다. 그냥 기생이예요. 그 말은 직업과 상관없이 구원은 된다는 거예요. 직업 바꾼다고 구원되고 유리한 입장이 되는 게 아니예요.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기생 라합이라고 되어있어요.

마치 해병대 나온 사람이 치킨 집을 한다고 할 때, 치킨 집을 한다고 해서 해병대 안 나온게 아니죠, 치킨 집을 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러면 해병대 나온 여부로 망했습니까? 전혀 관계 없지요. 해병대 나온 것 하고 치킨 집 망한 것 하고 아무 상관없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모든 일은 우리 구원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을 뿐더러 기쁜 소식은 무슨 짓을 해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사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무 지장 없다는 사실. 이것을 어떻게 알게 되요? 사도 바울처럼 대략 난감함 사건 속에서 알게 되지요. 사람들은 분명히 사도 바울에게 지적 질 할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본문 23절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을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하나님의 사자는 천사이지요. 하나님의 사자, 천사가 등장 하는 것 중 유명한 것이 하나 있는데, 유월절 날 집집마다 다니면서 피 없는 집마다 큰아들을 죽인 그 분이 하나님의 사자예요. 성경에 보면 천사가 와서 죽였다고 되어있어요. 아마 민수기에 나올 거예요. 천사가 와서 죽였다. 출애굽기에서는 여호와께서 죽였다. 라고 되어있지요. 하나님의 사자가 죽인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자가 죽였다면, “휴~ 우리 아들은 살았네.” 그걸 챙기라고 하나님의 사자가 온 게 아니 예요.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지시의 의해서 어떤 현실을 만들어요. 그 현실을 만들기 위해서 사람의 뜻의 의해 그것이 양보 되는 적이 없습니다. 강제로 따라줘야 되요.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또 천사가 등장 하는데.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천사 둘이 소돔과 고모라 성에 왔지요? 천사가 와서 롯이 천사를 영접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 유황불이 취소 됐습니까? 아니죠. 천사가 와서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거기서 롯은 무엇을 알아야 하냐 하면 내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그 당시 소돔과 고모라가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으니까. 워낙 에덴동산 같았어요. 에덴동산과 같이 살기 좋은 이곳이 진정 내가 살아야 할 현실이 아니라 있다가도 불에 타서 없어질 잿더미가 되는 게 진짜 현실이에요.

어릴 때 우리가 골목에서 소꿉놀이를 하는데 보통 저녁때 해질 때에 쯤 되면 골목 저쪽에서 엄마가 불러요. “얘 아무개야! 저녁 먹어야지” 그러면 금방 손 털고 가는 애가 별로 없습니다. “좀 더 놀고요!” 하고 대답하거든요 그래도 10분이 지나도 오지 않고 정신없이 놀고있으면 그땐 엄마가 오는 게 아니 예요.

오빠나 형이 와서 어떻게 합니까? “얘 아무개야 손 씻고 저녁 먹으러 가자” 이렇게 하지 않아요. 오빠는 남자기 때문에 와서 그냥 놀던 자리를 뭉개버려요 소꿉놀이 하던걸 뭉개버려요. 그러면 항상 누이동생은 울고 들어와요. “으앙~” 엄마가 그럼 너 왜 우냐고 물으면 그냥 손가락질만 해요. “뭐라고? 말로 해봐.” 그냥 “으앙~오빠”하며 손가락질만 하죠. 그럼 오빠가 “하여튼 지지배가 말을 안 들어! 말을!”

천사가 그 오빠 같아요. 아무소리 하지 않고 와서 그냥 뭉개 버려요. 얼마나 공들였는데... 딸 시집보내고 아들 장가보내고 얼마나 공들였는데 그냥 뭉개 버려요. 이게 바로 천사입니다. 가만 보니까 천사가 우릴 도와주는 분이 아니지요? 무서운 분이예요.

또 천사 이야기를 해볼까요?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정복하는데. 첫 번째 할일이 있었어요 먼저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누구냐 하면 바로 군대 장관을 먼저 만났어야 했어요. 오자마자 기부터 죽여요. “신발 벗어!” 여호수아가 신발을 벗었습니다. “이번전쟁, 내가 접수한다. 너는 구경이나 해!” 천사는 전쟁을 하고 거기서 얻어지는 콩고물은 이스라엘 백성이 챙기게 되는 것.

그런데 거기서 만들어진 현실은 우리가 기대한 현실이 아니고 우리조차도 당황스럽게 만드는. 오히려 우리가 놀래버리는 그런 낮선 현실을 유발시켜버리는 것 그걸 구멍이라고 합니다. “뻥 뚫린 구멍” 이것은 적들만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함께 거기서 현실의 엄중함에 같이 굴복하는 것.

“주여! 저나 나나 다 똑같은 인간인데 저를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런 식으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이런 식으로 오직 은혜만 드높이는 상황으로 몰아넣습니다. 자! 그럼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뭐가 와야 되는가 하면 반듯이 이게 와야하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이 오게 되어 있지요. 편안하게 되면 안와요.

여러분 사사기에 보면 알아요. 뭔가 편안하다가 갑자기 적들이 쳐들어 올 때 역량 것 자기 힘으로 지켜보겠다고 온갖 것을 다 갖다 바칩니다. 그래서 받치다 받치다 더 바칠게 없고, 이용만 당할 때, 그제서야 눈을 어디로 돌립니까?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그때 하늘에 천군 천사가 내려옵니까? 아닙니다 “네 안에 있잖아! 구원자는 네 안에 있잖아. 누구요? 네 안에 있잖아. 별 볼일 없는 깡패인 왼손잡이 ‘입다’와 방앗간 주인 ‘기드온’ 있잖아.

주께서는 아무나 들어 사용하실 수 있어요. 누구나 구원자 될 수 있어요. 이 말은 우리도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구원자 되기를 싫어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에게 봉사하기보다는 내 것, 내꺼 챙기는 거에 급급하기 때문에, 주께서 불러주시지 않으면 우린 자진해서 주의 일을 할 위인들이 아닙니다.

내 것 챙기는 재미가 더 솔 솔 한데 뭣 때문에 나가 봉사합니까? 그래도 처음에는 주를 위해서 봉사한다 하지요. 그런데 한두 번만 해 보세요 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이걸 해서 돈벌이 할 수 없나? 봉사가 돈벌이가 되는 수가 생겨요. 자기 딸이 연기를 잘하니까 얘를 연기자 한번 시켜 볼까? 처음에는 취미삼아 해보지요 이아이가 만약 잘 되서 떳다, 심지어 CF도 많이 들어온다. 그러면 그 아인 앵벌이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들의 약점 이지요 그래서 여기에 천사가 왕림했다라는 말은 사도바울은 이제 천사의 편에 서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며 희생해야 될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이 개인의 사정이라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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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마17장 22절 (미묘한 차이)59강- 이 근호 목사

마태 22 :22-23

마태복음 17장 22-23절의 말씀입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 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근심 하더라.” 이 근심 하더라의 가장 적절한 예가 “이러다 우리 코너 끝나는 거 아닙니까?” 근심 하는 이유가 그거잖아요.

주님이 어떻게 되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나” 살리기 위해 주님이 있다는 겁니다. “나 살리기 위해서”그러면 여기서 주님의 방해물이 되는 건 누구예요? 바로 내가 주의 일에 훼방꾼이고 방해물이 되는 겁니다.

지금 하는 두 번째 시간은 첫 번째 시간 보다 더 난해 합니다. 어떻게 난해하냐 하면 “인자” 인자란 의미를 지난번에 설명해 드렸는데요. 인자라 하는 것은 즉, 참된 인간은 주님 밖에 없다는 뜻 이였어요. 사람의 아들이지요.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사람의 아들들은 사람의 아들이 아닌 것을 폭로 시키는 겁니다. 하나님은 누구만 귀하게 여기느냐 인자만 귀히 여기지요.

어떻게 인자를 귀하게 하십니까? 시편 8편에 나오지요. 어떻게 인자를 이렇게 귀하게 보십니까?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나중에 천사보다 뛰어나게 하시고” 천사보다 못하게 해놓고 천사로 부터 섬김을 받는 프로그램을 계획을 누구로 부터 전수 받지요? 히브리서2장에 보면 그 계획은 우리에게는 적용 안 되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게예요.

그 다음에 예수님에게 적용 된 사실이 반복을 통해서 누구에게 적용되지요? 이 세상 성도에게도 적용 죄지요. 예수님께서 천사보다 못하다 하는 것은, 이 땅에 지지리 궁상으로 왔다는 거예요. 완전 거지꼴로 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가 되고 나신 후에 누구에게 받들리십니까? 천사로 부터 지요. 천사로 부터 존대를 받아요.

이것은 우리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단독 인생이지요. 그게 바로 인자예요. 그래서 인자를 뭐라고 표현하냐 하면, “인자”라 하는 것을 방금 길게 이야기 했지만 이 말로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언약 상대자”

언약 상대자. 하나님은 인간을 볼 때 그냥 보시는 게 아니고 언약 상대자로써 인간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언약 상대자로써 탈락 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첫 번째 인간 말고 두 번째 인간을 보내셨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 하고는 언약 상대자가 되지요.

언약 상대자가 되는 것을 바로 “인자”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언약 상대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 없이는 일을 안 하신다라는 말은 틀린 말 이예요. 하나님은 예수님 없이 일을 안 하신다 라는 말이 맞는 말이예요. 하나님은 인자하고만 일하지 사람하고는 일하지 않습니다.

첫째 시간에 이야기 했듯이 모든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사실 비인간이지요. 인간은 “인자”로써의 인간만이 인간입니다. 인자로 관계될 때 예수님은 사람이지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언약대로 된 결과물이 사람이니깐 그래서 이 사람 빼놓고 나머지는 전부다 저주해 버립니다.

여러분 한번 물어 봅시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창조 하시고 난 후 저주한 것이 있습니까? 첫째 날, 둘째 날.. 저주 한 것이 있습니까? 없지요. 마지막 여섯 째날 사람을 만드시고 축복 했지요? 그 상태로 돌아가는 거예요. 오직 예수님의 몸만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자만 복 받아요. 나머지는 복 못 받습니다.

인간 속에 뭐가 들어 있다고 했습니까? 계약이 들어 있다고 했지요. 계약이 들어 있어야 인간이라고 했으니깐 그게 바로 “심히 좋았더라” 가 되니까 그 조항이 바깥의 환경으로 이어 집니다. 환경으로 어떻게 이어지냐 하면은 인간이 사는 특정 지역을 만들어요.

희락의 동산,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네 갈래의 강을 흐르게 하셨어요. 강에는 뭐가 있냐하면 물이 흐르고 그 물 때문에 주변의 모든 것이 푸르고 번창하고 풍성하게 됩니다. 이 물이 흐르는 지점이 뭐냐 그 지점이 바로 두 나무가 서 있는 지점 이예요.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이 두개의 나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사는 거예요. 이 두개의 나무가 합쳐지면 뭐가 되냐 하면 언약이 되겠지요.

“언약”이 있어야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악마가 와서 언약을 위반하게 하고 그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못살고 추방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추방당한다는 것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됨과 동시에 “언약 밖”으로 추방되는 거와 마찬가지예요.

에베소서2장에 나옵니다. 이방인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방인은 흑인이다 백인이다 색깔에 따른 인종하고 관계없어요. 이스라엘의 언약이 아닌 것은 다 이방인이예요. 언약이 아닌자는 다 이방인이에요. “그 때에 너희는 언약 밖에 있었더니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는 언약 안에서 하나가 되었지요. 이스라엘이 되었단 말이예요. 이제는 예전의 이스라엘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언약 안에서 숨겨진 이스라엘이 따로 있어요. 이제는 예전의 그 이스라엘이 태초부터 “언약 완성에 의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 중에“ 울면서 기도 하세요” 이런 말 없지요? 인간의 사적인 감정, 정서. 많이 울게 되면 주께서 감동 하십니까? 아니지요. 너무나 주님은 구조적으로 냉철하시지요. 주님이 너무 비정해 보이지요. 그래서 우리 자신이 스스로의 감정에 휘말려서 감정이 풍부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본다면 하나님은 비인간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겁니다. 너무 차갑다고..

그런 우리가 부활되지 않고 주님을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감정 풍부한 우리가 악마의 앞잡이고 진짜 인간은 예수님이 되겠지요. 그러면 비인간인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은 진정한 믿음, 소망, 사랑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아니지요. 진짜 믿음, 소망, 사랑은 따로 있지요.

이번 수련회에서 민수기 강의를 할 때 “음행” 부분이 나와요. (민 5: 21-22) “어떤 여인이 간음 할 때 저주의 물이 넓적다리를 마르게 하고” 그 음행에 대해서 미리 앞당겨서 예고편으로 보여드리고 언급하자면, 상당히 예민한 문제예요. 성경에서의 음행이 뭐냐 하면 자식 출산에 관련된 질서에 관한 문제예요.

그런데 현대에서는 “음행”이 뭐로 바뀌냐 하면 인간의 행복에 관한 것으로 바뀌었어요. 이 음행 개념은 잘못된 개념 이예요.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상당히 충격적 이예요. 자식이 어느 계통이냐 하는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음행을 말을 해 줘야 나중에 음녀와 연결 되어져요. 음녀와 연결되지 않는, 바벨론의 음녀와 연결되지 않는 음행은 음행이 아닙니다.

평소에 음행 안 하고도 지옥 간사람 굉장히 많아요. 본인이 음녀란걸 모르기 때문에 본인 자체가 음녀이면서 음행 안 했다 이거예요. 음녀인데 어떻게 음행을 안 해요. 음녀는 음행을 하게 되어 있는데. 그게 언약을 경유하지 않아서 그래요. 언약을 배제하고 본인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래요. 배우자의 행복, 본인의 사적인 행복을 추구한 음행은 음행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음행을 다룰 때 남자보고 이야기 하지 않고 부녀자 보고 이야기해요. 희안하죠? 남자가 음행했다함은 우상 숭배 할 때를 음행으로 칩니다. 잠언서에 나오지요? 네가 음녀와 관계했다. 즉 “네가 다른 종교의 여자와 관계했다.” 가 되지요.

제일 크게 언약에 위반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은 날 때부터 행복을 추구한다는 거죠. 영화 꾸베 아저씨의 행복여행에서 묻는 게 “행복하십니까? 행복하십니까?” 그거 왜 묻는데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존재가 무슨 행복을 원해요. 그러니까 언약 밖에서는 행복만 찾는 거예요. 행복만 추구하는 거예요.

마치 수많은 정자가 난자에 들어오지 못하고 계속 머리 들이 미는 것처럼, 행복하십니까? 어떤 특정 장소에 유토피아 파라다이스가 있는 것 같아요. 낙원이 있는 거 같아요. 그걸 차지하려고 계속 가는 거예요.

전에 초등학교 고과서 5-1 학기에 수록된 김동인의 “무지개를 찾아서”라는 동화가 나온다 했지요. 내용은 보면 이런 것 같아요. 무지개를 찾아 가는 건데 거기서 애들이 말하는 무지개가 실체잖아요. 그런데 막상 무지개 아래에 가보세요. 무지개가 보이는지..? 아니죠. 멀리 있으니까 무지개가 있지, 가까이에선 무지개가 없는 거예요. 손에 쥐면 없는 거예요. 무지개는 없는 거예요. 행복은 없어요.

행복은 무엇이냐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곧 행복 이라는 게 “ 꾸베의 행복여행”의 주제고 김동인의 무지개도, 큰 바위 얼굴도 같은 주제 일 거예요. 어떤 마을에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여 작은 꿈을 키워가던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어른이 되서 나이 들게 되었을 때 본인의 얼굴이 큰 바위와 닮아 있음을 알게 되죠.

인간의 욕망에는 절대적인 세계가 있다는 겁니다. 절대적인 세계. 그걸 사람들은 뭐라고 얘기 하냐하면 천국이라고 하거든요? 인간이 천국을 생각하는 자체가 바로 마귀의 술책이라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천국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없기 때문에, 천국을 찾는 내가 무지개거든요. 무지개는 멀리에서는 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물방울 이잖아요?

야고보서 4장에 보며 이걸 뭐라고 합니까? 안개, 나는 안개예요. 최 안개. 박안 개. 김 안개처럼 하나의 안개라니까요. 살아 있을 때 는 있는 것 같지만 죽으면 없어 보이지요. 없어요. 없다니까요. 사라져버리는 무지개 같아요. 그래서 만화에서 보면 순간이동을 할 때 앞에 모양은 분명히 있는데 점점 흐릿해 지는 게 있지요. 사람이 만약 60까지 살았으면 그 앞에는 다 없어지는 거예요. 70까지 살았다면 그 이전 건 다 날아가 버린 거예요. 그래서 인생을 이미지라고 해요. 앞에 이미지만 남게 되지 죽으면 다 날라 가요. 그래서 안개예요. 아무것도 없어요.

내 코너 죽을 때 다 없어져요. 죽음이 인생의 끝이잖아요. 그러면 죽으면 되겠네요? 이게 바로 잘못된 생각 이예요. 이런 생각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처럼 난관이 되는데, “나는 여기 있다.” 가 죄 때문에 죽는다 그러면 죽으면 그만이지. 사람은 자기로부터 내가 여기 있다로 시작해서 없다로 끝내버려요. 인생을,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거든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있다, 없다로 그 앞에선 빛을 잃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야 될 우리가 자기만 생각해서 “그래 살다 힘들면 죽으면 그만이지”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에서 삼일 만에 살아나면 주의 영광이 회복 되지요.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잠시 이 땅에 와서 영광도 포기하시고 사셨지만 죽고 난 후에는 만유의 주가 되신다고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11절에 나오잖아요.

그런데 이 영광에 대해서 인간에게 생각해보라고 한 것인데, 제자들은 근심을 한거예요. 왜 근심을 하냐하면 예수님이 하신 것이 고난 받고 그 다음에 죽음이 더해지면 자기가 평소에 생각 했던 것처럼 고생하고 그 다음엔 죽으면 남는 게 없다는 거예요. 끝. 자기 신세와 주님의 신세를 같이 놓고 본거 예요. 그들은 “죽으면 안 되는데.. 죽으면 끝인데” 이러거든요.

제자들에게 주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무수한 힌트를 줬어요. “아들이 죽어 우는 과부를 보시고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가까이 가서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니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거든요. 그때 주위 사람들이 예수를 통해서 주의 영광을 돌렸다고 되어있어요. 그 영광 앞에 내가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사업 실패하고, 어떻게 늙어죽고 이것은 문젯거리도 안 되는 거지요.

우리에게 내 인생 잘 챙기라고 인생이 주어 진 게 아니지요. 시작을 나의 출생부터 생각하면 안되요. 출생 이전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우리가 출생이전을 어떻게 알겠어요? 죽고 난 후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지만 주께서 우리의 인생에 뭔가 힌트, 암시 같은 것을 계속 주님은 기적을 통해서 뭔가 밀알처럼 씨앗처럼 계속 뿌려 주신 게 있어요. 예를 들면 어떤 패쇠된 공간에서 누군가가 참지 못해 그만 방귀를 뀌었어요.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던 시간대 이전에 누구하나가 먹은 음식이 소화가 안됐구나! 당겨서 알 수 있잖아요? 예를 든게 참 더럽지만...

나의 이전 것은 낯설게 여겨지는, 내 노선에선 감히 예상치 못한 툭툭 하고 붉어진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내가 알고 있는 이전과 이후로 데려가는 싸인 같은 것이 우리에게 터지는 겁니다. 그것을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적이라 해요. 기적이란 우리가 고대하고 기대하는 우리가 못 하는데 이것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처럼 “저기 저 빌딩 나 줬으면 좋겠다.” 이런 걸 기대하고 어떤 사람이 내 죽고 난 뒤에 유산을 당신이 가져라 이러한 기적은 절대 안줍니다. 이러한 기적을 안주고 뭘 주냐 하면 표적을 줘요. 표적을 줘버리면 소유가 성립이 안 됩니다. 오히려 소유가 아니고 우리의 해체가 일어나요.

첫째 시간에 이야기 한 것처럼 우리는 뭐라고 했습니까? ‘눈사람’ 이라고 했지요. 여름 되면 다 녹아 버리지요. 우리의 현실에선 내가 살아있는 거지만 주님의 현실 앞에선 우리는 하나의 흔적이나 표적으로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성도한테나 흔적이지 성도 아닌 자에겐 흔적도 아니지요.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증인, 목격자라고 하지요.

목격자의 특징이 뭐냐하면 본인도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자기가 본걸 “안봤다” 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본 것 때문에 인생이 힘들어져 버려요. 내가 뭘 본 게 아니고 본 게 나를 소유해 버리니까 본 것 때문에 뭔가 딴 짓을 할 수가 없어요. 띠 띠고 원치 않는 곳을 갈 수 밖에 없어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아놓은 이유가 행복하라고가 아니에요. 이런 표적을 담은 하나의 싸인처럼 살아가라고 그렇게 한 거예요. 제자들이 그걸 허용 못하죠. 자기들도 남들처럼 살아가고 싶어요. 자기들도 인간이라고 우기니까, 그래서 베드로 같은 경우는 “나는 저 분 모른다” 하잖아요. 그런데 그러한 베드로의 어떤 실수나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장애물이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베드로하고 계약 한 게 아니고 인자하고 계약했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인자하고만 계약하지 베드로하고 계약하지 않으니까요.

하청 공사를 따 낼 때 공사만 따내면 공사 따낸 사람은 직접 일을 안해요. 자기 팀이 있어요. 목수, 미장 등 그 팀이 있어서 소집을 해요. “야! 일거리 생겼다 일요일 날 시간 비워놔라! 어디 인테리어 하나 해야 한다.” 그리고 나면 조그만 팀이 구성이 되지요. 영화 미션 임파서블처럼 일이 끝나면 돈을 나눠 가지고 헤어졌다가 다음에 연락하면 또 팀이 되어 일하는 거지요.

꼭 영화 촬영하는 것 같아요. 스텝을 하거나 주연을 하거나 조연을 해도 흩어지면 뒤에서 뒷 담화하고 그러다가도 다시 만나면 “아이고 언니 전에 촬영할 때 너무 좋았죠?” 그렇게 잘 보이려 하다가도 뒤 돌아선 “내가 다시는 저 언니 하고는 안 해야지! 내가 사실 돈 때문에 이거 하지”라고 하지만 돌아서면 또 다시하게 되고, 문제는 만만치 않다는 거지요.

인간들이 인자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라고 예수님 쪽에서 무슨 이야길 해도 인자가 이야길 해도 다시 말해 언약이 이야길 하는데 언약은 창세전 이야기이기 때문에 창세 이후에 태어난 인간이 인자의 말을 수거할 수가 없지요. 수거는 못해도 재밌는 사실은 본인이 아는 것을 내뱉어요. 바로 나타내요 근심을 한다든지 걱정을 한다든지 실망한다든지 아까 말한 것처럼 빈 무덤보고 실망한다든지 “우리 예수님은 말씀대로 사흘 만에 살아 나셨구나.” 이게 아니고 “아이고! 누가 우리 예수님 시체 가져갔냐?” 이렇게 나타내는 거예요.

자기 지평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때려 죽어도 자기 지평을 포기 못 하는 것. 자기가 만든 꾸려 놓은 현실을 포기 못 하는 것. 그래서 문제는 인간이 이렇게 하니까 그 다음에 메카니즘. 과정을 바꿔놓는, 과정이 어떻게 되나 흥미 진진 한 거예요.

안되는데 되게 하는 것. 도저히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안에 무엇이 들어있나? 안 되는 것도 되게 하시는 요소가 예수님 속에서 나오지요. 인자는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난다. 다시 부활한다 이것은 얼른 들으면 예수님의 사적인 일로 예수님에게만 국한된 사적인 일로 보여 지지요. 그런데 이것이 이 일을 위하여 제자들이 있다는 말은 제자들의 동의와 상관없이 이것이 파급 됩니다.

천에다 잉크 물 들이 듯 스펀지에도 물들이면 처음에는 닿는 부분만 물들어 파랗게 되다가 조금 후에는 전체에 다 스며들듯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말씀을 못 믿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것이 주의 구원의 능력이 파급될 줄을 지켜보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이 꼭! 필요한 거죠. 그들이 예수님을 불신하고 “안 믿는 다”는 점에서 그들이 꼭! 필요하지요. 무슨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다는 점에서 꼭! 필요한 거예요.

요한복음 2장에서 말씀드렸어요. 성전이야기. 사십 육년간 지은 성전을 사흘 만에 짓는다 했을 때 그 당시에 제자들은 “이 건물을 사흘 만에 짓는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그들은 머릿속으로 계산할 거예요. 도대체 오늘밤에 요정이 몇 명이나 필요할까? 목수일 잘하는 요정, 미장일 잘하는 요정, 벽돌쌓기 달인인 요정, 인간이 그런 식으로만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생각 못해요.

그러면 그 말은 너희가 생각하는 그 생각. 사십 육년간 지은 건물을 사흘 만에 짓는다는 생각. 성전 생각. 그 자체가 해체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성전이라고 여기는 그 발상, 인식 자체를 허물어뜨리는 겁니다.

사람에게는 신을 위하여 신전이 필요 하지요. 이게 인간의 발상입니다. 이 발상을 기독교 식으로 하면 뭐냐하면 교회고, 예배당이지요. 이 자체가 교회가 아님을 밝히는 새로운 발상이 있어줘야해요. 그게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에 “아! 성전이 기능이지 건물이 아니였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건물이나 집회장소가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걸 성전이라는 설교를 할 때 이야기 했는데 그 설교도 무지무지 난해한 설교인데 그걸 어떻게 통과했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설교하면서 계속 장애물이 있습니다. 계속 장애물이 있어가지고 100미터 허들 게임하듯 걸려 넘어지도록. 자! 그러면 또 하나의 허들이 있어요. 어떻게 바꾸느냐, 바꾸기 전에 인간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그것부터 보겠습니다.

본문 22절 23절 다시 한 번 볼게요. “인자가 죽고 삼일 만에 살아나심” 이 말을 제자들이 듣고 나온 게 뭐냐 하냐하면 근심 했지요.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림자가 최초로 나타나는 지점이 어디냐 하면, 해 시계라는 막대기라든지 제일 더운 하지 때 밖에 있는 물체에 그림자가 생길 때, 최초의 그림자가 생길 때가 언제입니까? 해가 정상에 있다가 기울 때 그림자가 생기지요.

그림자가 생길 때 그림자의 위치가 동일하지 않고 그림자가 생겼다는 자체가 이미 그 자리가 틀어진 거죠. 안틀어지면 그림자가 안 생기니까 그러면 제자들이나 이 세상 모든 것이 주님외의 그림자거든요. 그림자라는 말은 보는 각도와 시선이 애초부터 이미 틀어졌다는 거죠. 동일한 말을 해도 주님의 말씀하시는 본뜻과는 이미 틀어 진거에요. 그러면 주님의 방법이 뭐냐 그 틀어짐을 갈 때까지 가도록 하는 거예요.

노을 지는 때가 되면 그림자가 길게 끝까지 가겠죠? 점점 더 끝까지 틀어지겠지요. 극한적으로 반대가 되겠지요. 반대라면 결국은 제자들은 무얼 배반 합니까? 전에 얘기했던 “사실은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고 가짜였어!” 하고 손 터는 순간이 오겠지요? 그 손 턴 순간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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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2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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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