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16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9-존 로크
20141216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9-존 로크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8)
20141216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9-존 로크
(강의:이근호 목사)
항상 신앙생활은 개인이 도 닦는 게 아니고 주변상황과 관련돼있거든요. 사람이 있으면 주변상황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내 말을 받아 적어서 공부하라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내가 어두운 세계에 왔다고 했지요. 내가 빛이네. 나는 빛인데 어두움이 빛을 깨닫지 못하더라, 이렇게 왔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만 알아서 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오신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를 같이 겸해서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상황을 의식해서 왔기 때문에 그걸 요한복음에서는 어두움이라 했는데 다른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세대라고 했고 세대 앞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이야기한 거죠.
예수님의 이러한 표현은 이 상황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렇게 부정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본 적이 없어요. 예수님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데 왜 우리는 같은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그렇게 나쁜 게 안 보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바로 코앞에 문제밖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걸 토마스 홉스(1588~1679)란 사람은 이것을 인간은 생존의 본능을 갖고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누구 생존 말입니까? 남의 생존 말입니까, 본인 생존 말입니까? 본인 생존의 본능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본인에서 약간 확대시키면 자기 가족이 되겠지요. 그럼 정리해봅시다. 우리는 우리 가족에 생계에 관심 둔다고 예수님이 바라보는 이 세상에 대해서 무지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겠지요.
그러면서도 만약에 우리가 나와 내 가족밖에 모른 상태에서 예수를 믿는다면 뭘 놓친 게 돼요? 예수님이 바라본 우리가 속해있는 상황이 얼마나 악하다는 것을 누락시키고 예수님만 뽑아서 믿는 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그건 엉터리 예수지요. 가짜 예수가 되는 거예요. “제가 주님 믿어드릴 테니까 주님께서는 우리 가정에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옵소서.” 이건 가짜 예수가 되는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상황, 악한 세대, 음란한 세대, 어두움의 세대라고 이야기했단 말이에요.
그러면 악한 세대, 음란한 세대, 어두움의 세대에 우리가 포함될까요, 안 될까요? 포함되지요. 포함된다면 우리가 우리 가족을 위해서 예수 믿는 이것도 악함에 속할까요, 선함에 속할까요? 악함에 속하지요. 교회 와서 예수 믿는 것이 악함에 속한다 이 말입니다. 상상도 못했지요. 교회 가면 괜히 착한 사람이고 예수 믿으면 훌륭한 사람인 줄 알고 있는데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악함의 일종에 포함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삐져서 교회 나오지 말까요, 예수 믿지 말까요? 그 다음에 반응들이 뻔해요. 그러면 하나님 믿지 말란 말입니까? 그렇게 하면 교회 잘 되겠다. 다 나가 버리고. 교회 안 되겠다. 이렇게 삐져서 이야기하는데 그걸 삐져서 이야기하지 말고 감사해서이야기하면 얼마나 좋겠습니다만 삐져서 이야기한다고, 짜증나서 이야기한다고요.
(시간 맞춰왔는데 우리가 실례를 했네요. 우리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5분까지 봐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우리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갇혀 있다는 겁니다. 어디에 속해있다는 겁니다. 어디에 속해있는가? 좋은데 속해있으면 참 좋겠는데 비닐하우스 같은데 속해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악한 세대, 어두운 세대에 속해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에 선하고 착한 사람 같으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거룩한 분이거든요. 거룩한 분이 왔으면 우리도 한 거룩한단 말이죠. 우리도 거룩을 추구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단박에 알아보고 예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뛰어난 거룩을 추구한 사람이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들이에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절대로 천국에 못 간다. 줄을 세워보세요.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제일 앞머리에 바리새인이 있어요.
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게 사울이에요. 자기가 보기에 일등 신자지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각오가 돼있는 사람. 그런 것을 열심이라 하지 않고 특심이라고 이야기해요. 하나님 섬기는 데 있어서 남한테 뒤쳐지는 것을 본인이 용서가 안 돼. 열심+열심 제곱, 열심*열심이 특심이에요. 열심은 다들 할 수 있지만 나만이 더 우뚝 앞장서서 할 수 있는 것을 특별한 존재니까 특심이 되는 겁니다.
특심이기 때문에 사울이란 사람은 스데반 죽이는데 가담했고 주도적 인물이었고 스데반 죽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가서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을 이단으로 취급해서 다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한 물 간 분이기 때문에. 과거 인물이잖아요. 이순신 장군은 죽었잖아요. 지금 이순신 장군을 욕하면 이순신 장군이 내 멱살 쥡니까? 뒤늦게 자기를 욕한다고 이순신 장군이 살아나서 욕한다고 따집니까? 그렇지 않지요. 한 물 갔잖아요. 역사의 한 에피소드로 가버렸단 말이죠.
사울의 생각은 이런 거예요. 지금 살아계신 분은 여호와지 예수가 아니잖아요. 따라서 살아계신 분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죽은 옛날에 한 물 간 인물에 순종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신의 진리에 부합된다고 그는 믿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사울에서 누가 나타났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예수님이 등장해버렸지요. 뭐지, 그러면 뭐예요?
나의 거룩이 뭐가 돼버립니까? 나의 거룩이 가장 주님을 더 아프게 찌르는 바늘이 된 거죠. 가장 열심+열심, 특심입니다. 자기 종교집단을 위해서, 요새 말로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열심 냈는데 그 열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아프게 핍박받게 만드는 짐이 된 거예요. 그렇게 열심 함으로써 노린 게 뭐였습니까? 나의 패밀리의 번영과 안정과 그리고 원상회복, 자존심회복, 가치성, 이런 거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 이 세상이 음란하고 악한 세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걸 볼 때에 나는 하나님 믿기 때문에 여기서 제외되는 줄 알았지요. 왜? 나는 하나님에 특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악하지만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악하지만 교회 다니는 나는 점잖고 진짜 빛과 소금 같은 존재인 줄 알았지요. 그러나 이 악한 세대, 어두움에 본인이 포함돼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던, 예수님을 믿던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이 악한 세대, 음란한 세대에 포함된 요소라는 것을 감안하고 우리가 예수를 믿었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저는 빠지겠습니다, 하고 믿었잖아요. 저는 예외입니다. 다른 사람은 저주해도 저는 구원해주시고, 다른 사람은 심판해도 저는 축복해달라고 우리를 빼잖아요. 그렇게 뺄 수 있는 근거가 뭐죠? 근거 있어요, 없어요? 근거가 없다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해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아담의 죄에 속했기 때문에 특별히 거기서 빠질 수 있는 인물은 없다는 겁니다. 목사가 되던 뭐든 상관없어요. 모두 아담의 죄 아래에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정리할 수 있는 것을 간단합니다. 무엇이 신자냐? 예수님 말씀 그대로에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탕자가 착하다는 의롭다는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 간다는 말이 이제야 납득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착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그것이 바로 천국 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주님의 취지가 악한 세대, 음란한 세대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에요.
그러면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뭡니까? 주께서 악한 세대, 음란한 세대에서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주님은 상황을 고려해서(이건 세 번, 네 번해도 잊으면 안 돼요) 오셨거든요. 우리는 상황 빼놓고 나와 내 가족의 생존의 보존을 위해서 신을 찾은 거예요. 그러니까 핀트가 안 맞는 거예요. 진짜 예수님과 우리가 찾고자 하는 예수가 핀트가 맞지를 않는 겁니다. 우리 신앙을 날마다 새로 시작해야 돼요.
우리는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요. 우리는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나와 관련된 것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게 세상의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부를 알고 있는 분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했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왜 죽는지 그 이유가 빠져있어요. 성경 로마서 6장에 보니까 죽는 이유가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는다고 돼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의 설교를 볼 수 있어요. 설교를 보면서 이 점을 유념하면 돼요. 사도 바울의 모든 설교는 자기가 옛날에는 이렇게 알았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안다는 그런 변화의 추이에 대해서 내용이 포함돼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분이니까 알아서 베껴서 믿으세요.” 이게 아니고 변화, 나는 이런 변화를 가졌습니다. 그 변화는 고린도전서에서 간단하게 육에서 영으로 바뀌었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육이란 뭘까요? 육이란 신체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옛날에는 신체로 본인을 위해서 살았던 그걸 육이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그걸 듣는 유대인들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고 앞뒤가 맞기는 맞아요. 문제는 우리의 경험상 나 빼놓고 날 위해서 살지 않는 경우는 스물네 시간 가운데 그런 경우가 없으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갤러리에 가서 미술작품을 보게 되면 잘 그린 건 맞아요. 아름다운 그림이 있는 건 맞아요.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그런 그림을 못 그린다는 게 문제에요. 조수미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건 좋아요. 막상 부르라고 하면 우린 그 앞에서 음치가 된단 말이죠. 사도 바울이 이건 육이고 이건 영입니다. 나는 육에서 영으로 변했습니다. 말은 참 듣기 좋은데 그걸 흉내 내고 모방하려고 하니까 그게 안 되니까 문제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묻는 거예요. 나는 왜 안 됩니까? 네가 성령을 받으면 된다는 거예요. 성령을 받으면 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더욱 더 사도 바울에게 분노를 느끼는 게 뭐냐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게 아니고 우리의 행함, 그것도 착하고 거룩하고 경건하고 열심 있고 특심 있는 행함 외에 아는 방법이 없거든요. 우리는 교회에서 지시와 명령만 받은 거예요. 지시와 명령을 우리가 좋아해요. 왜?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까.
십일조 하세요. 주일 예배 참석하세요. 제직회 참석, 크리스마스 같은 절기 때마다 목돈 내세요. 이건 되는데 문제는 그게 된다고 구원에 소용이 없다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해버리는 거예요. 환장할 이야기에요. 해도 소용이 없다. 물론 하게 되면 교회가 돈이 모아지고 친목회는 만들 수 있어요. 여전도회, 부녀회장도 있고 다 만들 수 있는데 그게 인간이 만든 거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만든 것이지 주님이 만든 것은 아니거든요. 주님이 만든 것은 육에서 영으로 만든 그 외에는 없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영이라는 것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성령이 오느냐? 그 내용을 추적해야 되겠지요. 여러분, 이제 이해되시죠. 육에서 영은 우리로는 안 되는데 안 되는 것을 사도 바울은 성령이 받아야 된다는 거죠. 그러면 사도 바울에게 좀 더 물어봅시다. 성령을 받기 전에 어떤 근거로 받게 됩니까? 물을 수는 있어요. 묻게 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태어나서 일하신 모든 것이, 한 자, 빨간 걸로 쓸게요. 죄+용서, 일차적으로 죄, 이차적으로 용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사하러 왔지요. 죄와 용서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 소개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하는 설교가 뭐냐 하면, 이 땅에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는 겁니다. 얼른 들으면 200억 횡령한 박옥수 이야기 같은데. 지금 검찰에 고발돼있답니다. 그 사람은 죄를 몰라요. 아까도 이야기했잖아요. 자기가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밖에 할 줄 모르잖아요. 그러면 죄가 뭐냐 하면 행함으로 죄 짓는 걸 죄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땡 탈락, 이게 잘못된 거예요. 나의 행함으로 죄 지을 수 있고 행함으로 의로울 수 있다는 출발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인간은 태어난 자체가 산다는 자체가 죄라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죄를 짓지 않아도 이미 죄인으로 태어난 겁니다. 누가 그렇게 했는가? 주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왜 그렇게 하셨는가? 그런 죄인을 무상으로 용서함으로써 주님 자신의 자존심과 각오로 위상을 용서하시는 구세주로 높이기 위해서 일부러 그랬어요. 성령 받는 방법은 없습니다만 받고 난 뒤에 특징이 뭐냐 하면, 자신의 자존심보다 주님의 자존심이 나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나의 생존, 나와 내 가족의 자존심, 위신보다도 주님의 위신과 체면이 이런 죄를 용서라는 이름으로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용서 속에 주님의 자존심이 들어있어요.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의와 대비가 되는 거예요. 그것 말고 이거다. 네가 만들 수 있는 의 말고 이 의라는 거예요. 부자 청년이 왔을 때 어릴 때부터 십계명 다 지켰다고 했지요. 그 사람은 뭘 챙기고 있어요? 자기의 자존심을 챙기지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봐도 완벽하진 않지만 별로 나쁜 건 없어, 이거잖아요. 주께서는 그걸 다 버리라는 거예요.
그걸 다 버린다는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출발지점을 행함으로부터 시작한 사고가 전복, 바뀌어져야 한다는 거예요. 나의 시작은 내가 아니고 창조주 되신 주님으로 시작하잔 말이죠. 주님으로 시작하면 우리는 피조물이 되겠지요. 피조물로부터 시작하면 피조물로 시작해서 피조물은 구원되지 못합니다.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용서와 구원도 창조자부터 시작해야 되죠. 그러면 창조자와 거래나 흥정, 필요 없어요.
종교라는 게 뭡니까? 종교는 신과 인간이 거래하는 거예요. 이것 하면 복 주시겠습니까? 기도하면 응답해주시겠습니까? 전부 다 상거래에요. 좀 깎아주세요, 이런 것. 기도를 무시로 해야 되는데 하루에 두 시간한 걸로 때웁시다, 헌금을 전부를 바쳐야 마땅한데 이 번 달은 수입이 없어서 이만 원만 드리겠습니다. 피조물과 흥정하지 않습니다. 오늘 중요한 팁입니다. 창조주는 피조물과 흥정하지 않습니다. 내기를 해도 마귀와 내기 하지 우리와 내기 안 해요. 욥은 마귀의 내기에 말려든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우리가 할 게 없습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왜냐하면 태어나는 것부터 우리는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이기 때문에.
성경에선 그만큼만 이야기해놨어요. 인간은 죄인이다. 그래서 인간은 죄인이라고 하니까 설교자나 복음을 아는 분이, 인간은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 게 하나님의 전략이고 작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용서를 믿으면 여러분 죄를 씻어주십니다. 이렇게 끝나니까 이것은 개나 소나 다 아는 이야기고 선교단체, 대학생부터 유치부까지 다 아는 이야기란 말이죠.
그렇게 이야기하면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뭘 놓치고 있느냐 하면, 주님 보시기에 전체를 죄라고 했는데 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해놓고 이 죄가 실감나야 되거든요. 목회자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 우리는 죄인이고 예수님 십자가 피로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설교를 했거든요. 제직회가 어떻고, 장로 두 분 뽑아야 되고, 목사 생활이 어려우니까 월급 좀 올려주고, 사택 수리해야 되고, 이 정도 교회 되면 차도 좀 나은 걸로 해야 되고, 이렇게 나올 때 집사 하나가 목사님, 그러시면 안 되잖아요, 할 때 뭐가 죄입니까?
분명히 성경에서 죄라 해놓고 지금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을, 그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하신 말씀처럼 그들은 죄인 줄 모르는 거예요. 그 모든 것이. 그게 전부 다 개인의 위신과 자존심과 관련된 사항인 것을 그들은 놓치고 있는 겁니다. 그냥 성경에서 본 게 있어서 용어만 따와서 설교를 통해서 교회란 이름의 사업을 한 거예요. 차 파는 사람에게 얼마입니까? 이천 원입니다. 실제 먹어봤습니까? 아니요. 맛있습니까? 아니요. 파는 사람은 내용이 뭔지 모르고 계산적인 것만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토마스 홉스라는 이 사람, 오늘 존 로크 하면서 토마스 홉스와 같이 겸하여 하는 겁니다. 토마스 홉스(1588~1679, 사회학자, 철학자)는 이 세상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는 겁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몰라? 그러나 알 때까지는 알아보자. 그래서 지금부터 토마스 홉스의 이야기를 제가 잠시 해드리겠습니다.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납득이 된다면 토마스 홉스한테 아멘 할 필요는 없고요.
토마스 홉스는 두 가지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생각에 개인이 만족하면 되는데 국가(다른 말로 사회)가 왜 필요할까? 개인이 스스로 만족하면 되는데. 지리산 속에서 약초나 캐고 산초나 먹고 살면 되는데 국가가 왜 필요하지요? 지리산에 있는 사람이 결혼식에 자기가 입던 옷 입고 참석하면 돼요. 그것도 말이 안 되겠구나. 하여튼 지리산에 들어간 사람이 딸이 결혼해도 참석도 안 하고 옷도 안 입고 벌거벗고 살면 돼요. 그런데 약초 팔려면 큰 장에 나와야 되지요. 그게 사회잖아요.
이걸 홉스 말고 평소에 우리가 따져본 적 있습니까? 나 편한 대로 살면 되는데 장터에 왜 나가지? 작년보다 값이 많이 내려갔네요? 그걸 왜 따지지? 맨발이 살면 되는데 아들이 나이키 사달라고 할 때 사주면 마음이 편하고 안 사주면 마음이 찝찝하지요? 도대체 왜 그래요?
그래서 토마스 홉스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개인이 필요해서 사회가 있느냐? 첫 번째는 개인 속에 사회성이 약간이라도 들어있다고 본 경우와 두 번째, 개인은 필요 없는데 개인을 지켜주기 위해서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국가가 있다고 둘로 나눈 겁니다. 둘로 나눈 것은 세 번째, 네 번째는 없단 말이죠. 둘 중에 하나다. 내가 필요해서 사회가 있는지, 아니면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사회에 살아야만 할 존재여서 나중에 인간들이 모이다보니까 사회성이 삐져나와서 국가를 이룬 것인지 둘 중에 어느 것이냐 말이죠.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이걸 왜 알아야 되지요? 사실은 자기 일 바쁘면 알 필요 없는데 성경 말씀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해서 주님은 개인의 신앙의 열심, 특심을 보는 것이 아니고 네가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속했다는 거죠. 세대는 사회잖아요. 국가잖아요. 이건 공동체잖아요. 교회잖아요. 교회는 어떻게 돌아가던 나만 신앙생활 잘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두 번째 문제가 돼요. 개인은 착한데 사회가 악하냐? 아니면 개인부터 악해서 사회가 악하냐? 이 문제가 또 나온다니까요. 그래서 여기서 두 번째를 나눴어요. 개인은 선한데 사회가 들어가면서 인간 버렸다는 경우와 처음부터 인간 속에는 이기주의가 있어서 사회도 덩달아 이기주의다. 원, 투, 쓰리 가운데서 어느 것이냐?
내가 나빠서 교회가 나쁜 겁니까, 아니면 나는 착한데 교회만 나쁜 겁니까? 나는 착한데 기존교회가 나쁘다면 기존교회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당신 처음에 이 교회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하면, 전부 성령 받아서 온 사람들이에요. 성령 받아 온 사람이 제직회 할 때 돈 이야기하고. 어떻게 그렇게 돼요. 그 사람이 나쁜 거예요? 아니면 나도 십 년, 이십 년 있으면 뒤에 온 사람이, “권사님. 처음 올 때 믿음이 아닌데? 믿음이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뭐?” “처음엔 주님만 영광 돌리고 지금은 다른 교회와 경쟁하고 우리 교회가 커지고 기도할 때 맨날 우리 교회만 부흥되게 해달라는 식으로 너무 이기주의적입니다.” “당신도 오래 다녀 봐라. 다 그렇지 뭐.”
이건 자식과 부모도 마찬가지에요. 엄마는 육교 놔두고 무단 횡단하느냐? 너도 내 나이되면 다 건너가게 돼있어. 이것은 사람이 원래부터 나쁘냐, 아니면 사회가 그렇게 버려놨느냐? 인간은 도덕적인데 사회가 비도덕적 사회냐? 처음부터 그렇게 착한 인간이. 착한 인간이라면 혼자 살지. 혼자 살면 읍에 약초 팔러 내려간다니까. 지리산에 있다가.
여기에 대해서 홉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간단하게 명쾌하게 설명해요. 그동안 인간들이 사회에 대해서 오해를 한 게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를 스스로 분석 못하기 때문에 자기밖에 있는 사과나 별이라든지 나뭇잎을 통해서 인간도 대자연 속에 같은 사물이 아니냐고 본 거예요. 사과가 익으면 위로 올라갑니까, 떨어집니까? 떨어지지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란 사람부터 시작해서 세상의 모든 물체 운동은 휴식을 위해서 있다고 본 겁니다. 땅에 떨어지면 휴식하고 공중에 매달리면 불안해요.
그래서 사람들도 집에 편안히 있으면 좋고 밖에 나가서 설치면 불안하고. 그래서 인간의 모든 움직임은 휴식을 위해서 있다고 본 겁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서 휴식하는 것이 인간의 모든 행동의 원칙이라고 봤는데 토마스 홉스는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아니면 뭐냐? 물리학에 관성의 법칙이 있는데 인간 속에는 뭔가 부단히 움직이는 힘이 있는 이걸 누가 저지하지 않는 이상은 계속해서 뭔가 추구한다는 거예요. 인간의 욕망이.
지금 우리가 무슨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나쁘냐? 사회가 나쁘냐? 그 이야기입니다. 안 그러면 둘 다 나쁘냐? 나는 착한데 사회가 악해서 거기에 물들다보니까 참 좋은 내가 더럽게 변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내 속에 더러움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사회가 더럽든지 착하니 따지지 말고 혼자 살면 되는데 왜 인간은 혼자 살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그걸 따지는 거예요.
토마스 홉스는 말하기를 인간은 가만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가만있을 때는 누가 저지를 했기 때문에 가만있는 것이지 그 저지만 풀어주면 인간은 정신없이 달려간다는 거예요. 달려가는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어요. 이게 문제가 된 거예요. 토마스 홉스는 이걸 본 거예요. 인간을 원자로 봅니다. 아톰, 알갱이입니다. 알갱이는 시건도 없고 목적도 의미도 없어요. 그냥 천방지축 나대는 거예요. 왜 우리가 점잖은 체하느냐 하면, 누가 스톱 거는 사람이 있어야 그래요. 집에서는 벗고 싶어요. 그런데 밖에 나가면 못 벗는 이유가 누가 저지해서 그런 거예요.
저지하는 걸 관성의 법칙에서 더 나가서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란 게 있어요. 내가 이렇게 하게 되면 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고 반드시 멈추게 하는 반작용이 있어요. 너만 젠틀맨이냐 나도 젠틀맨이다. 사람은 누가 백화점 가면 진짜 백화점 가서 사야 되는 줄 알고 서로 충돌되지 않으면 인간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홉스는 말하기를 인간을 알갱이로 봤지만 사회적으로 봤을 때 인간은 늑대다. 인간은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란 말이죠. 자녀가 셋이면 자기를 포함해서 다섯 마리 늑대가 있는 거예요. 이걸 자연 상태라고 봅니다. 인간의 자연 상태는 누가 저지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개판 되는 세계, 늑대판 되는 세계.
우리가 혼자서 신을 찾고 도덕을 찾는 것은 누가 저지했기 때문에 나의 욕망을 저지한 상태에서 자기를 스스로 정당화하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사실은 저지가 없으면 우리는 미친 듯이 설치겠는데 누가 강하게 저지하니까 원래 착하다고 자기를 곡해하는 거예요. 신사임당 같은 그런 아줌마한테 백화점의 고급 옷을 보여주고 명품 가방을 보여주는 그 사람은 신사임당 끝났어요. 그동안 괜찮은 집안이라는 것이 장벽이어서 바깥의 세계를 몰라서 그런 계요. 그것만 풀어버리면 인간은 늑대의 본성을 유발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홉스는 사회란 뭐냐 하면, 만인의 만인에 투쟁이라고 했거든요. 만 명 모이면 만 명끼리 서로 싸우는 거예요. 투쟁하기 때문에 누가 이걸 강제로 저지할 필요가 있어요. 저지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더 센 늑대한테 약간의 자유를 양보하고 그 대신 그 사람한테 보호를 요청할 수밖에 없는 야쿠자 세계의 법칙을 따라야 된다는 겁니다. 양아치한테 우리가 자릿세 내고 다른 양아치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장사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장사하라고 누가 그래? 자릿세를 내야지. 원래 깡패 세계에요. 깡패가 왜 많이 설치지 않는 줄 압니까? 더 센 경찰이란 깡패가 있기 때문에. 경찰이란 깡패는 권력을 쥐고 있어요.
그래서 토마스 홉스 해답은 간단합니다. 절대적인 권력자가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절대군주제에요. 절대군주가 있어서 모든 권한을 위임하고 절대군주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이것이 이상적인 사회라 했어요. 이걸 자연법이라 해요. 자연권은 뭐냐 하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것, 죽든지 말든 나만 잘되면 되는 거예요. 자연 상태지요. 자연 상태에 자연법이 필요해요. 이걸 누가 질서를 잡아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권력을 누구한테 양도해야 되는데 그 양도가 두 명, 세 명 되면 안 돼요.
경상도 대통령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뭡니까? 여자와 명태는 패야 말 듣는다고 하잖아요. 군사정권 처음에 깡패들 쓸어가서 삼청교육대 보냈잖아요. 이게 협박이거든요. 까불면 맞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시절이 좋은 거예요. 민주주의가 싫은 거예요. 절대군주, 독재가 있어야 나라꼴이 돼요. 지금 위험한 말인데 제가 그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이론이 있단 말입니다. 그게 경상도 사람한테 남아있다 그 말이죠.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예수님께서 상황을 감안하고 이 땅에 오셨지요. 개인은 자기밖에 모르면서 주여, 주여 부르짖고 하나님을 부르짖으면서 상황은 고려 안 하고 자기만 착하게 되면 복 받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주님께서 상황 속에 와서 너희들이 그렇게 그 짓거리 자체도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이미 포함됐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열두 제자 다 도망갔습니다. 제자 키워도 소용없어요. 제자가 훌륭한 교육받았다고? 무슨 교육받았는데? 도망치는 교육받았어요?
제자가 다 떠난다는 말은, 사도 바울에 의하면 육의 한계가 거기까지라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행함으로 착하다는 것은 결코 예수님 것을 만나서 주님과 타협하거나 협상할 수 있는 어떤 권한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십자가의 능력이 성령을 통해서 주어질 때 인간이 착해지는 것이 아니고 비로소 나까지 포함해서 온 세상이 날 때부터 아담의 죄에 속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세리와 창기가 저 점잖은 사람보다 천국에 먼저 가는 거예요. 강도가 구원받는 겁니다.
구원이란 우리의 자존심이 아니고 누구의 자존심? 우리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시고 희생하신 주님의 공로와 자존심이 높여지는 상태를 천국이라 해요. 어떤 사람은 물이 나오는 분수 있는 곳이 천국이라 하는데 분수는 공원에 가면 있어요. 그것 보려고 천국 갑니까? 죄 용서받은 기쁨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죄 사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성도가 언제 가장 기쁘고 행복하냐 하면 자기가 죄인임을 알 때 세상의 모든 염려와 걱정은 다 부질없는 것이에요.
죄를 안다면 주어진 모든 것, 주어진 상황까지 전부 다 축복이라는 것을 그때 체험하게 됩니다. 머리카락 몇 개 빠져도 상관없어요. 백내장 와도 그것조차도 죄인한테는 너무나 과분한 축복이에요. 얘가 성적 좀 내려가도 과분한 축복이에요. 딸이 서른 넘어도 시집 안 가도 할 수 없고.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궁금해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 잘 믿고 착한데 왜 세상은 악하냐? 그러니까 세상 탓이고 이웃 탓이고 남 탓이고 우리 아버지 탓이고 새끼 탓이라고 할 게 아니고 우리 자체가 늑대로 태어났다는 거예요. 늑대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은 사는 이유, 목적을 생각하는 자체가 주제넘은 일이죠. 네가 언제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따져서 바르게 살아가느냐? 너의 원래 자체가 하나의 실존, 아톰, 원자, 알갱이밖에 없는데 그저 자기가 생존하려면 무슨 짓이든지 다 하고.
뭐, 예수 믿는다고요? 원불교에서 월급 더 준다면 대번 가버리고 통일교에서 더 준다면 대번 고개 숙일 수 있는 생존에 필요한 돈에 의해서 우리는 언제든지 행동이 바뀔 만반의 준비가 돼있는 사람인데 그게 사회 탓이라고요?
주님이 외쳤다고 해서 그 영혼을 그대로 사용한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 되게 하시는 성령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이 비로소 우리한테 현실이 됩니다. 실제가 돼요.
이게 바로 홉스의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에 결국은 뭐예요? 절대군주는 절대적이기 때문에 세습제로 돼야 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홉스 이야기 들어보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전혀 아니지요. 그러면 뭐가 필요하지요? 오늘날 민주주의가 되기까지 여러 가지 과정이 있을 건데 홉스만 같으면 절대군주제가 되니까 한 사람한테 모든 권력이 다 있으니까 일종에 전제주의고 독재거든요. 그리고 대대로 그 집안 오너가 있으면 딸이고 아들이 물려받듯이 아버지가 군주면 그 밑에도 군주가 되니까 그게 과연 옳으냐 말이죠. 그게 틀리다면 토마스 홉스가 그걸 이끌어낸 논리의 틀린 점을 찾아야 되는데 찾을 수가 없네. 말이 맞는 이야기니까.
제가 이쯤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토마스 홉스 이전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하지요. 그전에는 그걸 봉건사회라고 하는데 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요. 신이 계급까지 정해주는 사회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임금, 영주, 기사, 농민, 백정이 돼야 된다고 정해진 거예요. 정해진 것이 추상적으로만 신분 정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 지리적으로 성 안에 사는지 바깥에 사는지, 교회에서 운영하는지, 교회 가도 계급이 있어요. 실생활과 신이 정해준 계급과 일치가 되게 돼있습니다.
이상한 일 아니지요. 조선시대, 고려시대 때 그렇잖아요. 상놈은 상놈과 살아야지 어디 감히 양반집 아가씨와 연애를 해. 그리고 항상 정실부인을 따라야 돼요. 어디 서자 출신이 감히 아버지라고 불러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해서 홍길동이 반란을 일으켰잖아요. 그걸 신분사회라 합니다. 중세에서는 신분을 사회가 정해준 게 아니고 신이 정해준 거예요. 그래서 신분을 만약에 거부하려면 뭘 거부해야 돼요? 신이 내린 거미줄을 자르지 않는 한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 신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신을 부정해버리면 자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부정해야 돼요. 그럼 나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버지한테 나왔습니다. 그건 말이 안 되지요. 아버지는 또 아버지가 있으니까. 그럼 나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건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하나님이 만들었으면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있고 질서가 있을 거잖아요. 그 질서를 따르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세상 끝나고 죽고 난 뒤에 영혼이 심판 받을 때에 사람은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 이후에 심판이 있잖아요. 히브리서 9장의 말씀처럼 단독자로 신 앞에 설 텐데 “너, 누가 만들었어?” “신이 만들었습니다.” “그럼 내가 만들기만 했어, 말씀을 줬어?” “말씀을 주셨습니다.” “지켰어, 안 지켰어?” “못 지켰습니다.” “지옥 가.” 땡 탈락.
이러면 이 땅에서는 육십 년만 고생하면 되지만 지옥 가면 영원토록 못 빠져나오면 결국은 자기만 손해잖아요. 그러면 신을 부정하지 않는 한 자기 신분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지요. 그걸 봉건사회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 사회에 있다면 그 사회를 탈퇴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보세요.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2014년에 살기 때문에 그런 사회가 아니잖아요. 능력에 따라서 누구든지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만약에 이 시대에 있으니까 당연한 것 같지만 그전에 동양이라면 신분사회, 양반, 상놈. 양반, 상놈은 성씨로도 구분돼요. 김씨, 이씨나 되지 변씨, 곽씨, 이건 상놈. 이러면 변씨는 원래 양반 집안이고 족보 따지고 그런데. 하여튼 대충 중국에서 넘어온 씨들은 나중에 오래 되면 양반 행세하는데 탈락이에요. 천방지추마골피.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속으로 정의를 부르짖어도 그런 사회에서 혼자 칼 들고 설치면 임금님이 알아줍니까? 이순신 장군이 그렇게 잘나도 임금이 자르면 귀양 가야 되는데. 어떻게 사회가 상놈, 양반사회가 됐지요? 노력하셨어요, 어떻게 데모해서 바뀌었어요? 어떻게 된 거예요? 우리는 관심도 없어요. 왜냐하면 나만 예수 믿고 복 받으면 그만이니까. 그걸 지금 공부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경로로 그렇게 됐는가? 어떻게 신의 사회가 이렇게 바뀌었는가?
그게 바로 둔스 스코투스란 사람이 말하기를 이런 아이디어를 냈어요. 신이 있다. 맞는데 신의 법칙이 외부에서 거미줄처럼 있는 게 아니고 여러분의 양심 속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신을 외부에서 찾다가 이제는 내부에서 찾으면 되죠. 내가 바르게 살면 곧 내가 신부요, 목사가 되는 거죠. 내가 장로가 되는 거죠. 장로란 직이 없어도 바르게 살면 장로보다 더 큰 장로가 되겠지요. 그러면 내가 하나님 보기에 합당한 사람이라면 비록 신분적으로는 뒤떨어져도 어떤 재주와 능력을 발휘하게 되면 하나님이 내 안에 그런 능력을 준 게 되기 때문에 나는 떳떳하게 사회에 나가서 장사하면서 이득을 보면 되지요. 그렇게 나온 게 바로 상업자본주의 시대가 되는 거예요.
옛날에는 신분을 표시하는 그 지역에 살아야 되지만 이제는 그 지역을 떠나서 무역을 하면서 돈만 벌면 양반이 되는 시대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도 누굴 인정해줍니까? 돈 없는 장로겠습니까, 돈 많은 집사겠습니까? 교육관 짓는데 헌금 내라. 그래서 집사를 헌금 받고 장로로 승진시켜주는 거예요. 교회가 돈 없을 때는 무조건 제직회 열어서 많은 직분 세워서 돈 뜯어내고 또 교회 짓고 하는 겁니다.
이제 농사만 짓던 시대에서 근대산업화가 되면서 돈이 신분을 대체하는 시대로 들어오면서 거기에 맞추어서 정치제도가 민주주의로 바뀐 거예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사실 솔직하게 이야기해야지요. 돈 있는 인간이 최고고, 사무장은 탈락이고 오너의 딸이 최고다. 그런데 사무장은 그렇게 당하지 말고 지도 돈 벌어서 항공사 세우면 되는 거예요. 욕 할 것 없어요. 땅콩이고 아몬드고 간에. 누가 하지 말라 합니까? 해보지, 왜?
항공사 사무장은 한 마리의 늑대인데 큰 늑대, 여자한테 물린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 소리 말고 나중에 퇴직금 받을 때까지 참고 있어야 되지. 갑질이 없으면 을이 없잖아요. 갑이 을을 살려줘요. 살려주기 때문에 갑을 갑이라고 호칭해줘야 됩니다. 그게 이 세상이에요. 세상 더럽다고요? 너는 안 더럽나? 온 세계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인데.
뭔가 신문에 떠드는 것은, 사람 속에 태어나면서 인간에게는 뭐가 있느냐? 청소년의 모든 행동 속에 알 수 없는 분노가 들어있어요. 본인은 분노의 이유도 몰라요. 이게 계속 점잖은 분노로 이어져요. 그 분노가 직접 힘이 없어서 못 때리니까 언론의 힘으로 내 대신 때려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분노가 좀 풀리는 거예요. 그것도 저것도 안 되면 교회 새벽기도 있어요. 두 시간 동안 기도해보세요. 분노가 풀려요.
결국 교회란 인간이 자기의 분노를 풀어서 의로움이라고 지칭해주는 장사하는 데에요. 본인이 누군지 몰라요. 원한과 분노, 그 모든 짜증의 마지막은 누구한테 향합니까, 손가락을? 하나님, 예수님입니다.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 당신의 자존심과 위신만 챙기면 다냐. 나는 어떻게 되고 무너져도 당신은 좋아, 그런 거야? 우리 같은 동업자인데 당신이 영광 받으려면 나도 내가 원하는 걸 채워줘야 당신한테 합당한 영광을 돌릴 것 아니냐.”라는 흥정논리로 장사논리로써 교회가 세워지는 겁니다. 교회 무서운 데에요. 진짜 악하고 음란한 데입니다. 그 내막을 모르지요.
모든 것이 상업적으로 나갈 때 그 다음에 나오는 게 홉스 다음에 존 로크입니다. 존 로크(1634~1704) 이 사람이 내과의사입니다. 홉스의 말이 다 맞아요. 문제가 끝이 이상하게 끝나요. 절대군주제.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죄를 지어도 더 센 늑대(리바이어던, 괴물) 큰 괴물한테 매 맞는데 괴물 자체는 어떤 법을 지켜야 되느냐? 이 문제가 생겨요. 절대군주는 무슨 짓을 해도 질책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걸 질책하면 그 위에 갑이 되니까. 그 사람이 을이 되고.
제 말을 추상적으로 듣지 마세요. 교회에서 목사가 절대군주 노릇하잖아요. 그러면 목사가 잘못할 때 누가 합니까? 교인들이 그동안 어떻게 교육받았어요? 목사 잘못은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거예요. 목사치고 하나님 믿는 사람이 없어요. 목사는 하나님을 안 믿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할 뿐이죠. 왜? 하나님이란 속성을 갖고 있으니까. 목사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사도 바울처럼 복음만 전해버려요. 복음만 전하면 그 꼴이 사도 바울 꼴이 돼요. 순교자가 돼버려요. 그건 자기 가족의 생계를 보장할 수 없어요.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내 가족이 살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을 존경한다고 말을 하면서 존경을 상품으로 삼고, 사도 바울이 연예인이라면 자기가 매니저가 되는 거예요. 예수의 매니저로 밥 먹고 사는 거예요. 예수의 매니저, 사도 바울의 매니저, 성경말씀의 매니저, 연예사업하고 있는 겁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절대군주, 교회에서 목사한테 모든 권한이 있을 때에, 그래서 아까 둔스 스코투스 말했지요. 중세 때는 신부가 잘못됐으면 하나님이 친다고 했잖아요. 둔스 스코투스가 하는 말이, 신은 우리 속에 우리의 의지로 한다고 하니까 본인 각자가 절대자가 돼버린 거예요. 이제 남은 것은 그걸 알아주는 여부는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영적 카리스마 주장하던 목사가 언제 고개 숙이느냐 하면 교회에 돈 많은 교인 올 때. 하여튼 여 교인이라고 못 생기면 싫어. 이게 수녀원에서 그래요. 예쁘고 공부한 수녀는 대우받고 못 생기고 공부 못하면 수녀원에서도 하녀노릇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홉스 이론은 어느 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갑질하고. 왜냐하면 본인 자체가 저지할 수 없는 그야말로 자기가 조절할 수 없는 충동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하나에 아톰, 알갱이기 때문에. 알갱이는 목적을 따지는 게 아닙니다. 딱딱한 물체가 뭘 따져요.
그래서 존 로크는 문제 있다. 어디서 잘못됐는가? 인간이 진리가 있다는 자체가 과연 그런가? 홉스가 존경스럽지만 이런 사람의 문제점은 자기가 안다는 것을 스스로 비판 못했다. 그래서 존 로크는 뭘 보느냐 하면, 정부, 국가 하기 전에 먼저 진리가 무엇인지를 따졌습니다. 진리를 단순개념과 복합개념으로 나눴는데 단순개념이란 그냥 감각적으로 이게 만지면 딱딱하잖아요. 이건 누가 만지든지 다 딱딱하지요. 이런 게 단순개념이에요. 딱딱하니까 아마 나무로 된 모양이다. 이렇게 따지는 것은 복합개념이에요.
이 개념 자체를 대상과 개념으로 나눌 때 1차 성질과 2차 성질로 나눴어요. 강의할 때 나누면 듣는 사람이 괴로워요. 저도 마찬가지로 괴롭거든요. 1차 성질은 그냥 눈에 들어오는 것, 감각으로 들어오는 건 1차 성질이고, 2차 성질은 뭐냐? 두뇌에서 머리에서 정신에서 조립하는 건 2차 성질입니다.
이 세상에는 처음부터 진리라는 것이 만들어진 게 아니고(데카르트가 이야기한 생득관념), 생득관념이 아니고 처음부터 빈종이(타블라 라사)라고 해서 인간은 자기가 경험한 대로 누적이 되어 진리로 형성된다고 한 거예요. 그 이야기를 왜 먼저 로크가 하지요? 국가, 사회 이야기하다고 왜 하지요?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네가 아는 진리와 내가 아는 진리와 모르지요. 그러면 임금이 아는 진리와 내가 아는 진리가 같을 필요가 없지요. 그렇다면 군주, 네가 뭐 안다고 나한테 지시하느냐 말이죠. 갑자기 군주에서 민주주의로 넘어가는 기운 들지요.
지금 홉스는 군주가 법적으로 이건 네 재산이라고 사유재산을 정리해줄 때만 사유재산이 돼요. 같은 힘이 없는 늑대들끼리 판결은 센 늑대가 와서 판결을 해줘야 되는 겁니다. 아직도 토마스 홉스는 군주가 있지만 종교적인 카리스마가 더 지배하는 세계에요.
모세의 장인 이름이 이드로에요. 출애굽기 18장에. 모세가 혼자서 다 하나님의 법을 정하니까 힘드니까 이드로가 제안하기를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으로 정해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맡기고 어려운 것은 모세한테 물어라.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으로 나눈 것 같이 큰 문제는 나한테 맡겨라.
종교적인 사회 속에서 이건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한테 물어야 돼, 나보다 성경공부한 사람한테 물어야 돼. 그냥 단순히 상담 정도인데 종교세계에서는 힘의 복종 위치가 돼요. 한 가지만 묻는 게 아니고 영혼까지 맡겨야 될 그런 질서체제에 있단 말이죠. 우리가 민주주의에 살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잘 안 받아지는 모양인데 지금 민주주의로 옮겨가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존 로크는 말하기를 그게 아니고 각자가 갖고 있는 인생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진리가 다르다는 이야기에요. 그 말 들으니 그 말이 맞지요. 부자 집 얘들이 땅콩 때문에 하는 것은 부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거고, 가난한 집 얘들은 그만한 것 가지고 내리라고 하느냐? 각각 다른 거예요.
단순개념이 아니고 단순관념, 복합관념. 관념이라 할 때는 두뇌만 생각하면 돼요. 그래서 물체의 표면이 있고 표면에서 나오는 색깔, 크기 이런 것은 1차 성질이고, 저것은 아마 호두일 거야, 땅콩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은 두뇌에서 오는 것이다. 두뇌 없는 인간 없듯이 진리는 자기가 챙기면 된다. 자기 나름대로 진리가 된다. 그러면 이렇게 되면 누구 하나가 진리를 몽땅 알아서 일방적으로 조언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지요. 여러분, 이해되시죠?
그렇다면 사유재산은 어떻게 되는가? 국가가 판정하는 것이 아니고 뭐로 판정되는가? 노동으로 판정되는 겁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아니고 갑자기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기운이 들잖아요. 제가 강의 처음에 주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왔다고 했을 때 우리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만들어낸 이 세대가 우리를 만들었거든요. 우리는 이 세대는 생각 못하고 그냥 만들어진 나만 어떻게 챙겨볼까 싶어서 했단 말이죠.
홉스에 의하면 그것이 하나에 원자에 불과한 물체 덩어리가 성경적으로는 육이죠. 육 덩어리가 생존 본능 때문에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기도를 하던 금식을 하던 무조건 나만 잘 되면 된다. 이게 주의 축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점점 보니까 우리는 사회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이 사회는 분명히 신이 지배하는 거룩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지상에서는 누구 하나 늑대가 되어 몽땅 가져가는 이 모순점, 거룩한 신이 지배하는 사회인데 거기서 도둑놈 하나 생겨버리면 틀려도 중간에 뭔가 틀린 게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의 재산은 개인의 역량에 따라서 본인이 놀면 가난하고 부지런하면 자기 것 되는 게 맞는다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지극히 당연한 건데 이것을 일하지도 않고 뺏는 사람이 있을 때는 서로가 공평하게 의논해서 공론화하는 의미에서 계약을 해야 돼요. 이게 바로 존 로크의 사회계약설입니다. 그런데 계약한다고 동사무소에서 도장 받은 적 있습니까? 아니죠. 묵시적인 동의가 된 상태를 이미 계약이 체결된 상태로 보는 겁니다. 반대하지 않으면 찬성한 걸로 쳐주는 거예요.
혹시나 반대할 때는 kbs 6시 55분에 신문고 비슷한 게 나와요. 그 프로그램에 보면 지금 도로 공사한다고 갑자기 내 밭에 갈 길이 막혔으니까 어떻게 해 달라. 그런 건 계약을 약간 바꿀 수 있지만 전체적인 계약은 동의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존 로크가 이런 이야기할 때 뭔가 날아갔지요. 무엇이 없어졌을까요? 절대적인 군주가 없는 동시에 절대적인 군주는 하나님이 내려준 자리니까. 그게 바로 로마서 13장에 하나님의 사자가 국가의 집권자라는 이야기나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네가 임금과 왕에게 기도하는 내용은 다 날아가 버렸지요.
지금 뭐가 날아갔는지 아시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내용들이 다 날아갔지요. 그전까지는 신의 말씀의 세계기 때문에 군주한테 기도하고 군주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곧 천사의 말을 복종하는 것이 신의 뜻을 복종하는 것이 되는 시대에서 갑자기 군주의 의미가 날아가고 개인적 노동으로 가버리면 절대적인 군주만 날아가는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진리도 함께 날아간 것을 여러분, 감 잡았습니까?
존 로크는 따져요. 도덕이란 뭐냐? 전에는 말씀에 순종하는 게 도덕이죠. 그러나 사회가 연대가 공동체가 동의하면 그게 도덕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교회로 말하면 제직회에서 2/3가 도덕이에요. 내용은 묻지 마세요. 다수가 찬성하면 그게 도덕이 돼요. 그게 선이 돼요. 따지지 마세요. 왜? 다수가 공동체가 진리기 때문에. 공동체는 하나님의 사회계약에 의해서 공동체가 있어야 돼요. 공동체에서는 어떤 내용이 있느냐 하며 내가 노동한 것은 내 재산으로 쳐주기로 작정한 거예요.
대통령이 주는 게 아닙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주는 게 아니고 왕이 있어서 주는 게 아니고 군대를 어떻게 하느냐? 군대는 각자가 세금 내어 군대를 만들어서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줄 때 그게 사회가 되는 겁니다. 그 대신 이런 유도리가 있지요. 돈 많이 버는 사람은 세금을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사람은 사회적 복지혜택이 있어서 적게 내도 되는 거예요. 건강한 사람은 건강할 때 돈을 내고 건강한 사람의 돈을 아픈 사람한테 줌으로써 의료보험제도가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회에요. 뭐가 날아갔습니까? 공감이 곧 진리가 되는 거예요. 그 사회에 계속 살아보실 랍니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인데.
전에는 수동적이었습니다. 로크는 말하기를 단순관념은 수동적이다. 하지만 복합관념은 능동적이다. 두뇌에서 만드는 것은 능동적으로 만드는 거예요. 능동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내가 자율적 존재라는 뜻이에요. 자율적 존재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사회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그 시대가 존 로크의 시대입니다.
존 로크의 주장에 근거해서 세운 나라가 있어요. 그게 바로 미국의 독립선언문입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귀족을 인정하지 않아요. 모든 인간은 자기의 능력에 따라서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다고 확정한 나라입니다. 그게 미국의 민주주의에요. 그 민주주의가 한국의 민주주의가 된 겁니다. 북쪽은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되고. 그래서 남북이 갈라진 거예요. 그 악하고 음란한 세대, 우리가 여기 부산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한 시간 몇 분 걸렸습니다.
사시기 어떻습니까? 참 좋지요. 왜 좋으냐 하면, 그게 진리인데, 진리는 뭐냐? 진리는 습관이에요. 지금 이 사회 살기 좋지요. 다시 옛날로 선비, 상놈으로 돌아갈까요? 안 돼요. 우리 몸 자체가 습관화 됐지요. 습관화 된 그걸 진리라고 간주한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님이여, 내가 습관화 되어 이만큼 됐으니까 이 습관을 인정해주시고 이 습관대로 내가 원하는 걸 더 채워달라고 우리는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지요.
그런 기도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속했다는 것을 도저히 우리는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이야기 안 해주니까.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지요. 그게 육이라고. 그럼 우린 또 묻지요. 육은 뭡니까, 영은 뭡니까? 다 잊어버렸지요. 습관이 자기 가진 것만 신경 쓰고 내 자식만 신경 쓰다보니 다 잊어버렸어요.
뭐가 죄냐 하면, 주님의 의가 없는 게 죄고 주님의 의가 있으면 세리나 창기라도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의, 주님의 명예, 주님의 자존심, 주님의 공로, 주님의 은혜를 아는 것, 이게 천국 가요. 안 그러면 지옥 가요. 다른 사람은 지옥 간다고. 자기 자존심은 지옥 간다고.
그런데 내 몸의 습관과 이 사회의 습관은 무엇을 자꾸 유도합니까? 네 것이나 챙겨라. 네가 하는 대로 하는 게 진리야. 그게 도덕이고 공감이야. 그리고 더 나가서 말하기를 사람이 즐거우면 선이 되는 거예요. 쾌락은 선이 되고 불쾌하면 악이 되는 세계에 우리는 놓여있습니다. 늑대 한 마리가 전부 귀족의 탈을 써버렸어요. 우리는 거기서 문제 삼지 않기로 한 거예요.
그게 민주주의, 현재 용어로 자본주의사회입니다. 돈 있는 자가 갑질하는 사회, 돈 없으면 완생이 될 수 없는 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사회. 그 사회 속에 우리는 역사적 의미를 띠고 태어났습니다. 의미 없어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냥 살다고 나중에 몸에 석탄 떨어지면 치매 걸려 죽는 거기, 뭐. 링거 꽂고 백날 해도 자식이 빼버리면 죽는 거예요.
민주주의사회, 성경적입니까? 성경적이 아니지요. 아닌데 교회에서는 걸핏하면 민주주의로 하자고 하잖아요. 그게 습관이 그래요. 민주주의가 진리인 줄 알고 있어요. 군주제도 진리 아닙니다. 민주주의도 진리 아닙니다. 그럼 진리는 뭡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주님의 은혜 앞에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게 진리입니다. 그걸 십자가 안, 또는 예수 안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 안에서 내가 어느 사회, 어떤 사회라고 그 사회는 악하고 음란한 사회며 예수님께서 그 사회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이미 십자가 피를 흘렸다는 겁니다.
흘림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옛날 구닥다리 일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님 앞에 나왔을 때 제가 처음부터 죄인이었군요. 이건 내 잘못이 아니고 아담의 잘못으로 처음으로 죄인인 것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우리가 민주주의든 자본주의든 이 땅에 살면서 뭔가 임무를 주신 것은 주께서 친히 길러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덕분으로 그걸 알게 하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그 은혜 속에 주님의 자존심이 담겨있고 주님의 명예가 담겨있다는 걸 안다면 주기도문 기도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그것이 바로 새로운 성도가 할 수 있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복음이 오늘날 이 시대에도 유효함을 저희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습관대로 살면서도 잘난 척하는 우리 이제는 말씀을 성령을 통해서 제대로 알았으니 뭘 해도 죄인이고 주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던 그 취지를 우리가 듬뿍 담고 사는 저희들 남은 인생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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