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5장9(명령으로서의 구원)141106b-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 5장9(명령으로서의 구원)141106b-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요한복음 5장9(명령으로서의 구원)141106b-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에 38년 된 병자가 이제 구원받았습니다. 헤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까? ‘아이고, 고맙습니다. 주님이여, 주님 때문에 됐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거는 구원이 아닙니다.
문둥병 열 명이 있었죠. 열 명이 다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할 때 열 명 다 나았죠? 병이 다 나은 것 맞죠? 다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죠. 딱 한명만 돌아왔죠. 한명만 돌아왔어요. 왜 돌아왔는가? ‘주님께서 내 병이나 낫게 해주려고 오신 분이 아님을 제가 병 낫고 난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일은 우리의 병이 아니고 나의 죄의 문제였던 거예요. “네 죄 사함 받아라.”하는 게 쉽습니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가 쉽습니까? 주께서 일부러 왜 중풍병자에게 그런 이야기한 줄 알아요? 너희들은 네 건강, 원상회복, 네 자신만 잘되는 것만 있었지, 내가 내 원상회복을 요청할 수 없을 정도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새벽마다 ‘주여 우리 애가 고3인데 시험 잘 치게, 욕심 안 부립니다. 실력대로만 나오게 하옵소서.’ 실력대로 나오면 그거 실력 좋은 거예요. ‘실력대로, 공부한 대로만 나오게 하옵소서. 욕심 안 부립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결국은 그 사람은 뭘 염두에 둡니까? ’우리 아들 원하는 대학에 못 가면 저 싫어요.’가 밑에 깔려있죠.
그러면 예수님은 뭣 때문에 오신 분이 돼요? 내 아들 공부 잘하라고 오신 분이 돼 버렸죠. 그게 바로 자기가 미처 몰랐던 죄였습니다. 따라서 죄 지으라고 주께서는 애 성적이 기도 안 하면 안 오르게 돼 있고 기도 하면 오르게 돼 있고 기도 안 하면 또 내려가게 돼 있고 그렇게 해서 애 죄나 엄마 죄나 같이 가도록, 그렇게 해서 기도했더니만 과연 서울대학에 들어갔다. 그때 들어가고 난 뒤에 엄마가 대성통곡 하면서 ‘주님의 피를 이런데 호작질 할 그 정도로 제가 죄인입니다.’ 하고 고백할 때 ‘주여 우리 애 서울대학 다니다가 데모해서 국정원에 끌려가서 맞아서 나중에 원치 않는 임신해서 ...’ 그런 거 있잖아요. 끝없는 사랑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죠.
주께서는 죄를 해결하려고 왔는데 마귀로부터, 죄로부터, 율법으로부터 구원하려고 왔는데 우리는 관심사가 나부터 출발하다 보니까 주님이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 많은 사람들이 오병이어 따라다니던 것처럼 예수님 당시에 우리도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주여 내 병은요. 제 병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재밌는 이야기 나오죠. 지난주일 날 설교했지만 엘리야 시대 때 그 땅에 기근이 있었는데 참 성경 재밌게 나왔어요.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참 과부라 이야기하니까 또 미혼모라고 이야기...그냥 과부, 보세요. 많~은 과부라 할 때 왜 ‘많은‘을 왜 집어넣었겠어요? 성경에서. 많~은 과부가 있었는데 오직 한 사람, 사렙다 과부에게만 찾아갔잖아요? 그러면 그 이야기를 많은 과부가 들었을 때 이 과부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찢어지겠죠. 뭐지? 이거 뭐야? 왜 많은 과부가 있다는 걸 일부러 강조합니까? 과부라고 다 찾아가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과부라는 조건이 죄 용서받는 조건이 안 된다 이 말이죠. 과부돼서 불쌍하다고 구원시켜주는 주님은 아닙니다.
주님의 근거는 뭐냐, 따로 있어요. 뭐냐, 십자가의 피로 인하여 모든 어떤 인간도 구원될 수 없는 저주 상태임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거, 그게 조건이면 조건 이예요. “어떤 누구도 손들지 마. 손들지 마. 손 내려, 손 내려. 아무도 구원 못 받아.” 이게 조건 이예요. 그런 조건하에 찾아가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떻습니까? ‘주여 안 찾아와도 되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참 백골난망입니다. 우리 애 또 죽어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내가 우상인 것을 자인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그것 때문에 십자가 지신 거예요. 십자가 져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가 이게 평정이 돼 버리는 겁니다. 그 상태를 가지고 화목이라 해요. 내가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화목 없습니다. 내가 죽은 상태, 예수 안에서 죽은 상태일 때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화목에서 우리는 혜택을 입을 뿐이지, 내가 단독적으로 주와 화목한 게 없어요. 무슨 주님하고 죄인하고 무슨 할 이야기가 뭐 있습니까? 예수님이 죄를 옹호한 것도 아니고 그런 분이 없거든요. 주님의 화목을 예수 안에서 예수 이름으로 화목 하는 것이지, 그 화목제물을 통해서 화목하지, 내가 정신 차렸다고 화목하지 않습니다. 술 끊고 담배 끊었다고 화목한 게 아니거든요.
자 그렇다면 좀 어렵지만 들어가 봅시다. “이 날은 안식일이라“고 돼 있잖아요. 안식일이 무슨 날이냐 하면 모든 율법을 다 엑기스로 뽑아내면 안식일이 돼요. 모든 율법을 엑기스로 뽑아내서 한 줄로 잡아당겨보면 그게 안식일이 돼요. 왜냐 하면 안식일 날이 뭐냐 창세기 1장에 보면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죠. 그러면 안식일은 주님께서 만족하시고 좋았더라고 그걸 확정짓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러면 안식일이 있다는 말은 이 세상의 어떤 뒤죽박죽, 사기꾼, 개판, 데모, 전쟁이 있더라도 주님 보시기에는 심히 좋았더라는 요소의 과정과 절차로서 그것이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필요한 거예요. 만약에 방금 제가 이야기한 요 이야기를 지금 북한에 있는 지하교회, 지하교회 난 안 믿습니다. 안 믿는데 있다 하니까 있다 하는데 난 영화 봐도 못 믿겠어요. 그런데 지하에 있는 사람은 믿어요. 그런데 그걸 교회라고 할 근거는 난 찾지는 못했어요. 예수 믿는다고 지하교회 아니거든요. 그 예수가 어떤 예수인지 알 수가 있습니까? 그쪽에 복음 전하는 사람이 없는데 알 수가 없잖아요.
어쨌든 간에 북한에서 예수 이름으로 핍박 받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남한을 내려와야 돼요? 안 그러면 북한에서 살다 죽어야 됩니까? 어느 쪽입니까? 북한에서 살다 죽어야죠. 왜, 그게 절차니까. 보기에 심히 좋은 절차기 때문에 그래야 돼요. 남쪽으로 기어이 브로커한테 돈 주고 사기당해서 내려오다 걸리고 하는 그거는 결국은 뭡니까? 주님을 빙자한 자기가 생각한 자기한테 심히 좋은 세상을 그리워서 오는 거예요. 신앙생활 자유롭게 한다고.
신앙은 신앙 자체가 자유기 때문에, 여러분 자유가 뭔데요? 환란과 핍박이 있더라고 자유가 돼야 자유가 있는 것이지, 핍박이 있다고 자유가 없는 자유는 그건 자유가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한번 보세요. 아까 집에 원치 않는데 개 키운다 했죠? 개를 이뻐해주니까 일주일 되니 사람 됐습니까? 아니잖아요? 개는 백날 이뻐해봐야 개잖아요. 그럼 개를 때리면 개가 쥐 됩니까? 개 됩니까? 맞아죽어도 개죠. 성도는 때려도 성도고 맞아죽어도 성도고 잘 먹고 잘 살아도 성도에요. 그렇잖아요. 북한에서도 성도고 남쪽에서도 성도인데 자유가 없다니 무슨 자유가 없어요? 이미 성도 자체가 죄에서 자유 했는데. 내 말 틀렸습니까? 어디 내 말 논리가 이상해요?
질문: 그러니까 인간적인 영적인 것을 목사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영적인 생활을 인간은 할 필요가 없어요. 왜 영적인 생활을 합니까? 영적인 생활을 하겠다는 것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자기가 도로 토하듯이 믿겠다 이 말 아닙니까? 믿음이 없으니까 뭔가 근사한 것이 나와서 그걸 보고서 ‘아! 내가 믿는 자 맞구나.‘ 라고 확인하겠다는데 그거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이란 것은 보지 않고 믿어야 믿음이지,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거든요. 어떤 실적 업적보고. 지금 이야기 녹음 되는 거예요. 다 올릴 거예요. 아 녹취도 할 겁니다. 글자로. 문자로 남길 거예요. 도대체 그동안 신앙생활 한 게 아니고 소설 쓰고 꿈을 꿨어요. 꿈. 제발 꿈 좀 깨세요. 그냥 살아도 영적 생활 이예요. 거리에서 오뎅 먹어도 그게 영적 생활 이예요. 1500원 주고 하나 먹어도 영적 생활이라니까요.
안식일은 지키는 게 아닙니다. 안 지킨 안식일은 보여 지는 거죠. 안식일의 완성을 보여 지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죠? 어떤 많은 철학자는 말합니다. 이 세상의 사기꾼, 강도, 절도, 강간, 폭행, IS, 전쟁, 북한 핵폭탄, 이런 게 있는데 이 세상에 어떻게 선한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이따위 식으로 이 세상을 완전히 지옥으로 만들어 놨느냐, 이게 무슨 선한 것이냐? 이렇게 하잖아요? 그게 선한 거예요. 그게 선한 거라니까요.
‘왜 선합니까?’ 물으면 안식일이 완성됐기 때문에. 안식일은 무슨 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날, 이 날이 있다는 말은 주님 보시기에 심히 좋더란 말. 그러면 이 땅에서 전쟁이 있고 지진이 있고 심지어 젖 뗀 애가 그냥 엄마도 죽고 자살하고 돈 없어서 아파트 뛰어내려서 딸 먼저 뛰어내려 죽고 그럴 때 그게 좋으냐? 주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일 이예요. 그럼 누구한테 안 좋으냐? 내가 감정이입을 할 때나 안 좋아하는 거예요. 아휴, 식은 땀 나면서 ‘아휴, 요번 월급 없었으면 나도 뛰어내릴 뻔 했다. 요번에 월급 마침 나와서 다행이다. 아이구, 요번에 내가 사채 써서 못 갚았으면 정말 자살할 건데.’ 자기 생각한다고 이 세상은 지옥 이예요. 자기 생각. 자기 생각하니까 지옥인 거예요.
성경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뭘 받아라, 돼 있어요? “고난 받으라.” 돼 있죠. 자 묻습니다. 고난 받으면 구원받습니까? 구원받았기에 고난 받습니까? 이미 구원받았기에 고난 받죠. 자기는 이미 예수 안에서 구원 받았죠. 그러면 예수 안에서 심히 좋죠. 좋으니까 마음껏 고난을 즐길 수가 있는 겁니다. 마음껏.
말 길게 할 것 없이 스데반 집사 보세요. 스데반 집사가 돌이 날라 왔을 때 피했습니까? 어떻게 피했어요? ‘야, 너무 큰 돌 집었다. 작은 돌로 집어라.‘ 이랬습니까? 어땠습니까? 스데반 집사가 설교할 때 성령이 충만했죠. 자 성령이 충만했을 때 보통 우리 교회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 충만하게 되면 방언이 터지고 하죠. 성령이 충만했는데 그 결과가 뭐에요? 돌에 맞아 죽죠. 성령 충만 그 다음 뒤에 나옵니다. 뭐냐, “예수님이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뜻이 뭡니까? 예수님 하신 말씀이 나와요. “그들이 하는 짓을 그들이 모릅니다.” 이 말은 성령 받은 사람은 압니다. 그리고 세상을 볼 때 관점이 다릅니다. 뜻 이예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주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의 관점으로 보게 되면 세상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보이고 성령을 받지 않으면 항상 자기가 기대한 어떤 자기 탐욕의 아우르는 탐욕의 욕심이 있기 때문에 매사가 공포에 쫓기게 돼요. 맨 날 벌벌 떨면서 하는 거예요. 지난주일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기도할 때 기도 문장 하나 들춰보라고. 거기 뒤에 뭐가 묻어있다 했습니까? 공포가, 무서움이 따라와요. 기도해도 무섭고 교회 가도 무섭고 교회 안 가도 무섭고 가도 무섭고 집에 와도 무섭고 한시도 안 무서운 순간이 없어요. 자기가 기대하는 자기가 세상에 중심 노릇한다고 그렇게 스스로 스트레스를 자처하고 있어요. 피곤을 아예 자처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주신 사명이 뭡니까? 안식일이죠. 안식일이 뭐라 했습니까? 보기에 심히 좋았죠. 그러면 성도의 할 일은 뭡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주님 안목을 가지고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고 감사하면서 살다 죽으면 되잖아요. 이 말이 어려워요? 말은 어렵지 않은데 체험도 안 어려운데, 이게 어렵지 않아요. 어렵지 않습니다.
이게 왜 어렵지 않으냐 하면 이게 왜 어려운 일이 아니냐 하면 이 감사가 소급해서 감사가 되기 때문에 어렵지 않아요. 이렇게 벌벌 떨다가 감사하시고 또 벌벌 떨다가 감사해버리면 이렇게 생각해요. 벌벌 떨다가 백날 감사해봐야 또 벌벌 떨걸, 하고 미리 생각하니까 이게 감사가 안 되는데, 감사가 되는 순간이 그냥 여기에 같은 선에 묻혀있는 것이 아니고 감사 될 때는 이게 위에 올라가거든요. 올라가면 벌벌 떨든, 앞으로 벌벌 떨 일이 생기든 상관없이 전체가 소급해서 감사가 되니까 이게 그 순간 무섭지가 않은 겁니다. 아주 대범해 지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니까 세상 앞에서 누구 앞에도 담대하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니까 세상의 어떤 인간의 눈치와 그리고 아부하기 위해 고개 숙일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겁니다. 환란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이거 누가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거 주님이 만들어 내는 거예요. 누굴 통해서? 마귀를 통해서. 마귀를 통해서 마귀를 사용하는 이유는 가짜가 너무 많으니까, 워낙 가짜가 너무 많으니까 환란과 핍박 줘버리면 다 떨어져나가거든요. 돌짝 밭에 심은 씨앗처럼. 좀 믿음 좋다고 하다가 좀 어려움 당하면 다 떨어지니까 떨어지라고 그렇게 마귀를 가지고 가라지를 심어놓은 거예요. 일부러 해서 ‘아이쿠, 오지 마라. 네 자리 없어, 가, 가. 가.’
가룟 유다 같은 경우는 3년을 따라다녔습니다. 결국은 중도 탈락 했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미리 알고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그 이야기를 안 믿는 사람이 들으면 주님을 되게 나쁘게 봅니다.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아예 안 태어나게 하든지 이렇게 해야 될 텐데 태어나게 만들어 놓고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태어나지 말지, 태어나게 한 책임자가 누군데? 본인이 태어나게 해놓고 이제 와서 ‘본인 책임 없다. 나 없다.’ 이렇게 돼 버리면 비겁한 사람, 예수님 참 비겁한 사람이다. 자기가 저질러 놓고 책임 없다 해놓고.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고런 소리가 나올 때 이 사람은 두려움 속에 여전히 있는 사람이고, 감사의 안목이 빠져있는 사람이란 것을 티내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하신 거예요. 모든 것이 예스가 되고 아니오.는 없어요.
그래서 38년 된 병자가 안식일을 합니다. 안식일의 완성은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습니다. 자, 묻습니다. 지금 보기에 심히 좋은 것이 병자가 병이 낫기 때문에 보기에 심히 좋은 겁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보기에 심히 좋은 겁니까? 예수님이 일을 하셨기 때문에. 내가 병이 나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좋아한다면 만약에 암에서 나았잖아요? 기도해서 나았다 합시다. 그러면 예수님이 감사하다면 암 또 걸리면 어떻게 할 건데요? 후라이 보이 곽 규석이 압니까? 이거 알면 30대 아닙니다. 40대는 다 알아요. 후라이 보이 곽 규석이 기도해서 암 낫다 해놓고 몇 달 살지도 못하고 암으로 죽었죠. 보세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예를 들면 38년 된 병자를 병 낫게 해놓고 좋다고 감사하고 집에 갔는데 그 병 도져서 죽게 되면, 그래도 이 사람은 죄 용서 때문에 감사해야 되죠. 이제는 병이란 자아의 욕망과 결합된 것이 끊어져 버리고 죄 용서가 그 사슬을 이어가야죠. 주님과 나 사이에는 죄 용서된 사이기 때문에 죄 용서를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병 낫나, 안 낫나, 상관없이 나는 평생 죄를 지어야만 하는 존재로 산다는 이 존재의 가벼움이 있어야 됩니다. 죄를 지어야 한다는 거예요. 죄를 지을 수도 있다가 아니고 앞으로 계속 내일 되면 내일 분의 죄를 또 지어야 돼요. 그게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에.
그러면 죄 지으면 되겠네요. 아! 그 죄 말고, 왜 내가 아는 죄는 안 돼요. 내가 아는 죄는 말고 내가 ‘이것도 죄였나?’ 하는 그 죄, 그 죄는 어떻게 확인되는가? 성령이 이렇게 두꺼운 이유가 뭡니까? 찾아보면 다 걸려요. 십계명 제일 마지막 계명이 뭐죠? “탐내지 마라”죠. 자, 백화점에 갔는데 탐이 날까요? 안 날까요? 본질상 나게 돼 있어요. ‘안 돼, 안 돼, 탐내면 안 돼.’라는 그 자체가 이미 탐을 내고 있다는 뜻 이예요.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거든요. 내가 “탐내지 마라.”가 오기 전까지는 탐심이 없었는데 “탐내지 마라“는 그 순간부터 이거는 다른 자아가 탐내고 싶어서 아주 환장을 했어요. 발작을 했어요. 부글부글 끓어.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죄 짓지 마라.“ 하면 고민에 싸일 텐데 ”죄를 지어야 된다.“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죄 짓지 않아야 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날라 가 버리는 거예요.
그럼 이제부터 내가 내 마누라 패는 죄를 지어볼까요? 해보세요. 이미 용서 받은 게 되기 때문에 그 죄 짓는 게 때리는 것보다 안 때리는 게 더 편해요. 왜냐 하면 이게 내가 알고 있는 죄기 때문에 시시해. 이거 말고 내가 미처 경험 못한 다른 죄가 나와야지, 죄도 신선해야 재미가 있지, 이미 했던 죄는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뭔가 기발한 죄, 주께서 나타나게 하십니다. 어떤 죄냐 하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을 새롭게, 전에도 알았는데 새롭게 이해될 수 있도록 로또에 당첨되는 죄, 당첨 돼서 갔을 때 그 부푼 가슴을 안고 갔던 그 기쁨, 가보니까 은행가서 보니까 글자 한자가 틀리네. 그때 등장하는 ‘요거 타면 아파트부터 옮기고 남편 차 바꿔줘야지,’ 이렇게 하다가 글자 6자를 9자로 잘못 봐서 떨어졌을 때 그 실망감, 그 와중 속에서 내가 어제 미처 몰랐던 내 죄가 로또 복권 당첨 됐다는 그 낭설에 의해서 새롭게 발굴된 겁니다. 그 기능이 바로 성도가 해야 될 기능입니다.
죄 짓는 방법은 새로운 사람 만나면 돼요. 새로운 사람 만나면 만나자 마자 벌써 눈싸움부터 시작해서 누가 기가 세냐. 네가 나한테 먹히느냐, 내가 먹느냐. 싸움이 벌어져서 거기에 모든 형제 미움과 투기와 다 나와요. 육의 열매 다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누굴 새로운 사람 만나면 육의 열매 다 나와요. 뭐 죄 짓는 거 어렵지 않아요. 새로운 사람 만나면 다 나온다니까요. 목욕탕도 아는 목욕탕 가면 반갑게 하죠. 새로운 목욕탕 가서 새로운 주인 만나면 육의 열매 다 나옵니다. 이 주인이 나한테 불친절하고 어떻고 다 나와요. 미장원도 같은 미장원에는 죄 안 져요. 새로운 미장원에 가시면 그 다음부터 죄 짓기 시작합니다.‘돈은 비싸게 받아 쳐 먹고 머리가 이렇게 나왔다.‘ 다 나온다니까. 주께서 날마다 새로운 경험을 해서 내 속에 잠자고 있던 나의 더러운 본성을 그때그때마다 타이밍 맞게 일깨워주시는 그 친절하심, 그 세세하심, 얼마나 감사한지, 교회도 자주 옮기세요.
그래서 이 38년 병자가 한 것은 딱 한가지였어요. 안식일 날 뭘 가져가라? “자리를 들고 가라“ 그거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누굴 체포했습니까? 그 병든 자를 체포했죠. 체포하면서 드디어 예수님의 증거가 시작됩니다. ”누가 네 병을 고쳤느냐? 누구냐?“ 15절에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누구라? 처음에는 이름을 몰랐는데 나중에 예수라 해서 알았어요. ”예수라“ 이야기했죠. 거기 보세요. 예수님 증거 하는 것이 본인의 의사입니까? 주변의 상황이 압박해서 그런 거예요? 압박해서 그런 거죠.
그러면 전도하는 것이 본인의 의사로 전도합니까? 압박해서 전도합니까? 압박해서 전도하는 거예요. 전도도 누가 하느냐? 예수님만 전도해요. 다른 사람은 전도 못해요. 괜히 선교 헌금 내지 마세요. 전도는 주님이 하시지 인간은 전도를 못 해요. 인간은 전도한다는 자기 자랑밖에 할 줄 몰라요. 전도는 주님이 하십니다.
그러면 전도를 안 하면 어떡합니까? 성도는 전도 안 하는 성도는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어요. 다~~ 전도하게 돼 있습니다. 다~ 정도하게 돼 있어요. 왜, 주께서 상황을 그렇게 몰아가기 때문에. 다 몰아갑니다. 전도를 하게 돼 있어요. 전도라 하는 것을 도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예수 전하는 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내가 깨지고 내가 죄인인 것을 전할 때 그게 전도가 돼요. 왜냐, 십자가 도가 복음이거든요. 십자가 도는 결국 뭡니까? 예수님 빼놓고 모든 사람은 죄인이었다. 이거 하잖아요? 그러면 전도하기 위해서는 그 ‘예수님 빼놓고’에 누가 포함됩니까? 전도하는 본인도 포함되죠. ‘내가 설교하고 강의하고 전도하는 이것도 죄입니다.‘를 해줘야 그게 전도가 되는 거예요.
제가 미국 뉴저지 강의할 때 했잖아요. 삐딱하게 서서 했잖아요. ‘오늘 이것도 죄입니다.‘ 했다니까요. 들어보세요. 녹취에 나올 걸요. 강의했는데 이것도 죕니다. 강의하는 것도 죄에요. 그게 전도라니까요. 사람들은 얼~마나 남을 의식을 하기 때문에 자기 의로움, 자기 약점은 감추고 자꾸 의로움으로 두 겹, 세 겹 포장을 해요. 아예 가면무도회도 그런 무도회가 없어요. 완전히 교회가 쌍쌍파티 하는 것도 아니고 가면무도회에요. 가면무도회! 어떤 사람은 목사라는 가면, 집사라는 가면, 장로라는 가면, 어떤 평신도라는 가면, 어떤 사람은 비판하려고 온 가면도 쓰고, 교회에서 가면 안 쓴 사람은 그 사람들 밖에 없어요. 유아 주일학교 애들, 걔들은 철도 없어, 철도 모르고 막 뛰어 다녀요.
17절에 봅시다. 16, 17절 봅시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자, 유대인들이 봤을 때 누가 일했습니까? 38년 된 병자가 했죠. 그런데 38년 된 병자는 주의 일에 포합됩니까? 빠집니까? 빠져요. 왜냐, 처음부터 주체가 뭐냐 하면 “네 자리를 들고 가라.”한 명령부터가 이미 주체의 바닥을 폭발을 일으켜요. 블랙홀을 만들었어요. 구멍이 뻥 뚫렸어요. “너는 나를 믿어야 돼.” 한 순간 나는 쑥 들어가 버리고 나는 튕겨져 나가버렸어요.
사도바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하는 순간부터 사도바울의 주체의 자리는 사도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아니고 누굽니까? 예수님이십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나니” 주체 자리에서 빠져버려요. 뭘 먹든지 뭘 해도 주께서 먹게 하셔서 했다는 피동적으로 다 바뀌고 마는 겁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죠.
자, 그 다음에 봅시다. 좀 어려운데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거예요. 아버지 이야기가 왜 나오죠? 그건 안식일부터 다시 봅시다. 안식일이 네 번째 계명이죠? 천주교와는 다릅니다만 네 번째 계명이라고 치고 십계명에서 네 번째 계명이죠. 처음에 안식일은 뭐냐 하면 천지를 창조했다고 기념해서 안식일이 된 겁니다. 처음에. 어디 나오느냐, 출애굽기 20장에 나와요. “내가 일곱 째 날에 모든 걸 완성했기 때문에 내가 쉰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말이 나와서 하지만 원래 빛이라 하는 것은 별은 언제 만들어졌어요? 4일째 만들었죠. 그런데 학교 과학에서는 별이 만들어진 것은 147억년이고 지구는 45억년이죠. 100억년이나 별이 많아요. 이거 어떻게 설명해요? 이 갭 어떻게 메워요? 처음에 지구부터 먼저, ”빛이 있으라“ 할 때 그 빛은 어디만 있는 빛 이예요? 지구에만 있는 빛이죠. 빛이 있으라 했잖아요? 그 다음에 빛은 별도 빛이고 달도 빛이고, 태양이 먼저에요? 지구가 먼저에요? 성경대로 하면. 지구가 먼저지, 태양은 나중이란 말이죠. 그런데 과학자는 태양 빛 없이는 모든 에너지가 돌아가지 않고 탄수화물이고 모든 엽록체 활동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죄 짓고 난 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죄 짓기 전의 사고방식은 뭡니까? 그건 모르죠. 왜, 우리는 죄 짓고 난 뒤에는 오늘도 내일도 죄 짓는 거밖에 안 해요. 죄 안 짓는 경우를 우리는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고 뭐한다고요? 죄 짓는 일을 한다니까요. 죄 짓고 난 뒤에 뭐 나온다고요? 과학적 사고방식만 나오는 거예요. 예수 믿고 난 뒤에. 과학적 사고방식이 나오는데 성도는 뭘 압니까? 이 과학적 사고방식, 이 진리라고 우기는 과학적 사고방식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가 된다는 것을 자인하게 됩니다. 이유는 모르겠어요. 왜 과학이 죄가 되는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십자가를 근거로 할 때 묻지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창조 과학회가 이게 문제가 있는 겁니다. 진화론만 문제 있는 게 아니고 창조 과학회 하는 것도 문제가 돼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 이게 성경에 없는 말입니다. 이게 틀린 말 이예요.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천지를 창조했죠. 예수 안에서! 그러나 과학자들은 아무리 연구해도 돌을 봐서, 화석 봐서 거기서 예수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돌 딱 대니까 안에 예수가 나왔습니까? 글자로 지저스 나왔어요? 안 나오죠? 아무리 연구해도 물리 화학 생물, 아무리 해봐도 아무리 배 째고 해도 거기서 예수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안 나오고, 누가 만들었겠는가? 신이 만들었지. 신만 냅다 거기다 퍼붓는 거죠.
그건 그거고 안식일에 제가 왜 그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인터스텔라’ 하는 영화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개봉한 영화에요. 웜홀을 통해서 가는 그게 우리나라 인기일 가능성이 많아요. 진화론 영화거든요. 안식일 날 처음엔 천지창조해서 기념해서 했잖아요? 그런데 신명기 보면 안식일 날 기념하는 이유가 달라집니다. 십계명에서는 천지창조해서 기념하라 했는데, 신명기에 가면 같은 십계명인데 뭐냐 하면 애굽에서 너를 종 되었던 그것을 기념하여 안식일을 지키게 돼 있어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냐 하면 안식일이 6일과 그 다음날 다시 업그레이드 돼 있는 첫 날과 사이가 안식일이잖아요? 그렇죠? 보통 토요일이라 하죠. 토요일, 토요일 다음에 안식일 다음에 첫 날이니까. 첫 날과 금요일 사이가 안식일이잖아요. 이런 식으로 누가 이해한다? 인간이 이해하겠죠. 왜, 인간들은 시간의식이 있으니까. 해와 달, 별이 뭐 때문에 있습니까? 인간에게 시간의식을 조작하기 위해서 있는 거잖아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 하루고, 그것이 7번 지나면 그것이 안식일 되잖아요.
인간들이 안식일에 대해서 안다? 모른다? 안식일은 금요일 지나고 일요일 오기 전에 안식일이라고 알죠? 그 앎이 이게 틀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아는 게. 이게 틀렸다는 말은 인간자체가 아무리 연구하고 안식일 공부해도 여전히 틀린 안식일 의미만 토해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틀렸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 다음에 안식일 날 할 때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에서 안식일을 한다고 신명기에. 출애굽하고 달리. 그러면 사람들은 뭘 해야 돼요? 주께서 이미 안식일 지키는 의미가 뭔가 풍부해졌다? 함축돼 있다? 이렇게 달라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한번 비교해 봅시다. 천지창조, 안식일, 7,1,2,3,4,5,6,7,1,2,3,4,5,6,7, 7번 7, 이렇게 이해한 그것이 뭐를 야기 시켰습니까? 애굽에 종이 되는 사태를 야기 시킨 거죠. 주께서 그렇게 이끌어 가신 거죠.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식일이 안식일 완성이다? 완성 아니다? 절대로 완성이 아니죠. 왜, 예수님이 안식일 주인이잖아요? 주님이 오실 때까지 무슨 절차가 요구된다는 거예요. ‘왜 절차가 요구되느냐’고 물어야 돼요. 왜, 왜, 뭐가 문제기에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게 올 때까지 왜, 그 절차가 필요하냐 말이죠.
만약에 창세기부터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면 알아듣겠어요? 못 알아듣겠습니까? 못 알아듣죠. 왜냐 하면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누가 주인 이예요? 뭘 해도 안식일 지켜도 내가 지키고 교회 가도 내가 가고 예배도 내가 ‘오늘도 안식일 지키고 왔다.‘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 해도 나를 대체하고 싶지는 않다 이 말이죠. 그런 자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 이예요. 오늘날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그들도 마찬가지에요. 7번째 날 제사지내라 하니까 그것 참 쉽다. 왜, 1,2,3...계산하면 되고 제사 드릴 때 양하고 소하고 잡으면 되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면 이미 방법이, 매뉴얼이 나와 있잖아요. 그걸 못해요? 바보도 아니고, 누가 못해? 양 주고 날짜 계산사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어디에 잡혔습니까? 애굽에 종으로 잡혔죠. 만약에 그들의 안식일이 정당하다면 애굽에 잡혔더라고 그들 힘으로 애굽에서 해방이 돼야 되는데 됩니까? 안 됩니까? 애굽의 죄악 된 우상 세력에 매어 있다는 말은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어떤 정당함이나 거룩함은 그들 자체 내에서 생산이 불가하다는 뜻이겠죠. 그렇죠?
모세가 처음에 도망칠 때 그냥 도망친 게 아니에요. 뭔가 일을 벌였잖아요? 이 백성, 불쌍한 백성, 내가 안중근 의사 돼서 한번 지도자 돼서 한번 살려보겠다고, 진짜 의사 모세 돼서 한번 해봤잖아요? “나를 따르라” 했는데 실패로 끝났잖아요? 실패로 끝나서 현상수배 돼서 도망쳤다 이 말이죠. 도망쳤다는 말은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들이 구원된다? 안 된다? 구원될 위인은 아무도 없는 거죠. 왜, 안식일 아는데? 이미 전통으로 안식일 다 알고 있는데. 안식일 1,2,3,4,5,6,7 다 알고 있는데 제사 드리면 된다고 다 알고 있는데 왜 안 되지? 왜 애굽에서 못 벗어나죠?
그들은 새로운 사태가 오기 전까지는 내 죄가 뭔지를 알 길이 없었던 겁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걷게 하실 때 베드로는 자기 죄를 몰랐어요. 오병이어를 할 때도 자기 죄를 몰랐어요. 물고기 아가리 벌려서 동전 끄집어낼 때도 자기 죄를 몰랐습니다. 신났지, 자기들이 권세를 받아서 병을 고칠 때 하늘에서 귀신이 떨어질 때 그거는 아주 큰 성과 된 줄 알았어요. 그래서 자랑 질을 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 우리가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 봤습니다.” “그거 좋아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걸 좋아해라.” 그렇게 이야기했잖아요. 그들은 마치 주님과 자기가 한 통속이고 한 패인 줄 알았죠. 죄를 알기 위해서 12제자 됐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꿈에도.
예수님 십자가 지신다 할 때 베드로가 뭐라 했습니까? “아서라, 그럴 리 없습니다. 제가 그런 사태 오기 전에 제가 용납 안 합니다.” 할 때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뭐라 했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 결국은 그 12제자 전체가 베드로가 대표니까 예수님 빼놓고 주변의 모든 상황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 못 죽게 만드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걸로 인하여 죽었지만 주님의 구원의 일을 못하게 만드는 방해자로 나선 거예요. “죽지 마세요. 예수님” 그거는요, 주님께서는 “죽지 마세요. 예수님”에 대해서 주님은 어떻게 나옵니까? “내가 죽어야 일이 된다.”는 게 주님의 뜻 이예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내가 죽어야 일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나 때문에 주님이 죽을 정도로 난 뭘 해도 죄인이다.“라고 고백한 사람만이 뭐다? 성령 받은 사람 이예요. 그래서 목사가 복음을 설교 할 때 ”죄인 맞죠?“라는 설교를 해줘야 되는 겁니다. ‘당신은 이렇게 하게 되면 경건한 사람이 된다.‘라고 이런 식으로 설교하면 안 돼요. ’당신은 이제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설교하면 안 돼요. ’당신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공동체를 아름답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돼요. 공동체고 뭐고 간에 ’여러분, 우리가 뭘 해도 죄입니다.‘ 그걸로 끝! 그걸로 끝내야 돼요. 모든 성경 말씀이 그걸 이야기하니까. 삐지면 할 수 없고, ’목사님, 그래서 저 대신 주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예수님 증거 하게 되면 자기 백성이고, 이거는 복궐복이야. 도 아니면 모에요.
왜냐 하면 아버지 일하시니 예수님이 일할 때 그 예수님의 일이 뭐냐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일이 뭐냐? 예수님의 일이 뭐에요? 다 이루었다를 어디서 이야기했습니까? 산상설교한 후에 “다 이루었다. 이제 알았느냐?“ “알았습니다.“ 끝났습니까? 아니에요. ”다 이루었다.“가 어디서 터져 나온 말씀입니까? 오직 십자가에서.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이 아니에요. 새 생명 운동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다 이뤘어요. 십자가에서!
사도바울이 부활이 복음 이예요? 십자가가 복음 이예요? 부활이 복음이 아니에요. 십자가가 복음 이예요. “예수 그리스도 죽은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에서 ”나는 너희들이 십자가만 자랑하기를 원한다.” 부활이 아니라니까요. 십자가라니까요. 그러나 인간들이 자기 구원 욕에 빠져버리면 십자가 지고 그 다음 순서는 부활이니까 부활되고 난 뒤에는 십자가 차버려도 된다. 마치 지붕위에 올라가면 사다리는 필요 없으니까 차버리면 그만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다른복음이 되는 거예요. 인간의 구원 욕구에 만족하는 그러한 사이비한 교회, 그래서 그렇게 등장하는 거예요. 그 교회는 자기 자존심 덩어리.
우리 십자가 마을에 의존교회 김 명현 목사님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아예 교회 안에서 뽕을 키운다고 했어요. 마약을 심어놓고 마약을 교인들에게 먹인다고. 예수 십자가는 없고 ‘여러분 훌륭합니다. 대단합니다. 여러분 하면 됩니다.’ 그런 마약만 입에다 담아놨다는 겁니다. 마약만. 그러니 그들이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서만 일하거든요. 인간은 누가 잘한다 하면 미친 듯이 해버려요. 왜, 외롭기 때문에. 강아지들 보세요. 강아지들 다 좋아하잖아요. 하물며 인간일까 보냐. 인간이 얼마나 외로움을 타는지 몰라요. 어디 가도 사랑받고 싶어서 행동하고 외로움을 감추기 위해서 일하고 싶은데. 그것을 위락시설 만들어서 오락단체로서 교회 만들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이름으로 성령이름으로 잘한다, 잘한다. 하면 그들이 왜 목 내놓고 충성하라 하면 충성하죠. 자기 자존심이 걸린 문제인데.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말은 이것은 그냥 일하는 것이 아니고 누굴 지적 질 하신다? 모든 인간은 죄인의 자리로 돌아가라. 그 일을 말하는 겁니다. 아버지 일하신다고 아버지 이렇게 떡 떼고, 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그 일이 어디에 도착돼요? 바로 우리에게 도착이 돼요. 주께서 일하셨기 때문에 비로소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죄인인 것을 알 때 내가 노력해서 알게 된 것이 아니고 주의 일이 방사능 쬐듯이 주의 일이 도달했기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뭘 해도 죄가 된다는 이 행복감! 이 축복! 이 감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떨어져 나갑니다.
더 이상 내 자존심을 챙기지 않아도 되고, 자존심이 없다 보니까 남이 뭐라고 이야기해도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까 좋고, 그야말로 죄에 대해서 모든 것에서 자유케 되는 겁니다. 죄에 대해서 자유케 되는 그것이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아는 그것이 죄로부터 자유케 되는 거예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것이 죄에서 자유케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내가 아는 선악과에서 나온 죄가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서 나온 죄기 때문에. 왜 예수님은 너를 위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나를 보여주는 거기에 필요한 그림자로서의 죄를 짓기 때문에 이미 그것은 용서가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왜 용서가 돼야 돼.‘라는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오는 일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성경에 마리아가 울면서 향수를 뿌렸잖아요? 마리아가 향수를 뿌려서 구원받았어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향수를 뿌린 겁니까? 구원받았기 때문에 향수를 뿌렸죠. 그러면 우리도 똑같이 향수 뿌리면 그게 의로운 행동 이예요? 그게 죕니까? 그게 바로 죄인 거예요. 왜 남 따라 합니까? 우리는 그 향수 뿌리지 말고 오뎅 먹으면 되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오뎅(어묵)을 먹는 건데, 우리는 남을 자꾸 따라 해요. 그래서 제가 구제하지 말라 했잖아요. 용서하지 말고 구제하지 말라 했죠? 3종 세트에도 나와요. 용서하지 말라는 말은 용서를 하게 되면 상대방이 나의 종이 됩니다. 그러면 나의 종이 되면 상대방은 주의 종이 아니고 나로부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내 종이 돼 버려요.
따라서 나는 당신을 용서한 적이 없습니다. 해줘야 나도 용서된 사람 티가 나도 그 사람도 용서된 티가 나는 거예요. 왜, 어떤 인간도 나를 용서 없었는데 주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용서 했구나,를 알아야 주님만 바라보게 되죠. 이해 되십니까? 그렇잖아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주의 이름으로 하라 이 말입니다. 네 이름으로 하지 말고.
그 다음에 나온 구제하지 말라는 말은 어떤 자기 물건을 맡긴 사람에게 돌려주는 구제를 의미하거든요. 우리가 생각하는 구제는 뭐냐 하면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게 구제잖아요? 그런 구제는 해서는 안 돼요. 성경에서 말하는 구제는 내 물건을 맡겨 놓은 것을 다시 찾아가는 것을 구제라 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달라 할 때 어떻게 하라? “거저 주어라“ 왜?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내 것을 줘 버리면 그 사람은 나한테 늘 나한테 와야 돼. 또, 그러면 나는 부담돼. 내 것이 없는데. 사실은 내 것이 없거든요. 내 것이 없는데 줬는데 받는 사람이 ‘당신 것 내게 줬잖아.’ 이렇게 오해를 하니까 상대방으로 하여금 신앙을 가리는 역할밖에 안 한 거예요. 괜히 구제해서. 구제하지 마시고 내 것 줘, 할 때는 그냥 줘버리는 된다 말이죠. 어차피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니까.
이쯤 하니까 아버지 일하실 때는 아버지 일하고 나는 그냥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통해서 줄기차게 우리 주변에 깔려있는 마귀에 속한 그 면면을 들추어내는데 주께서는 구원받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매일같이 일거리 줘서 매일같이 사용하셔서 주님만 증거 하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게 ‘아휴, 온유하기도 해라. 겸손하기도 해라.’ 이렇게 할 때 온유하고 겸손한 게 아니고 ‘주께서 일하신 결과입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내가 일한 게 아니고 주께서 나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하신 거죠. 용서가 됐든 구제가 됐든 기도가 됐든.
아까 중요한 질문했는데, 기도를 어떻게 하십니까? 할 때 간단해요. 기도하게끔 하십니다. 어떻게? 속에 화가 나서. 사람이 기도 안 하고 싶어도 난처하고 당황스러운 일이 갑자기 터져버리면 원망과 더불어서 기도 안 할 수가 없어요. 대체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로부터 시작해서 기도가 좔좔 쏟아져 나옵니다. 하다가 방언도 터지고 하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니까 기도를 할 때 시작을 주께서는 기도를 하게 만들어요. 그리고 끝날 쯤 되면 응답을 받게 되면 ‘주여 일어나야 될 조치 맞군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끝나야 돼요.
그런데 기도했는데 20분, 30분 지나도 계속 내 화만 나오고 감사가 안 나올 때는 쉬었다 하세요. 45분 띄고 10분 쉬었다 하세요. 그리고 결국은 마지막에 응답케 하십니다. 기도 할만 해서 기도했는데 우리의 기도는 그냥 화풀이고, ‘제대로 주의 뜻을 분간 못하고 또 죄 짓는 식의 화 기도를 했습니다. 이런 죄까지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로 기도가 마감이 되게 돼 있어요. 내 인생은 없기 때문에 주의 만들은 인생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주님 살아 일하는데 우리는 내가 일한 것만 느껴집니다. 그런데 때로는 내가 주 앞에서 주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욕심쟁이로서 나만 챙기면서 이기주의로 살아간다는 걸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의 일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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