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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40924 미국동부오전a - 재정리자유게시판요한복음

20140924 미국동부오전a - 재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20140924 미국동부오전a

강의 이근호 목사, 정리 한윤범 목사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런 만남을 허락해주심을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씀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이 주님으로부터 시작이 되었기에, 마침과 그 모든 과정도 주님께서 개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후강의가 교회에서 신약을 하기 때문에 오전에 가정에서 하는 강의는 구약을 생각했습니다. 구약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신약부터 시작하면 흐름에서 중간부터 시작하니까, 앞의 내용이 어떻게 되었기에 예수님 오심이 복음이 되는지, 그것을 하겠다는 겁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뭐냐 하면, 그렇게 기쁜 소식이라면 천지창조부터 해서 기쁜 소식으로 집어넣으면 될 텐데, 왜 예수님이 오시고 난 다음부터가 기쁜 소식이냐는 겁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게 곧 복음이다" 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해놓고, 정작 기쁜 소식의 이야기는 마태가 전하고, 마가가 전하고, 누가가 전한 복음, 즉 예수님이 오시고 난 다음부터 시작이 되니까,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되는 거예요. 물론 요한복음도 그렇고 말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아닌, 예수님이 바로 오시면 안 되는가?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오셨는데, 아브라함이 먼저 오시고 난 뒤에 2,000년 뒤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 이야기할 때, 듣는 사람은 이것을 생각하셔야 돼요. "아브라함이 오시지 말고, 예수님 곧 바로 오시면 될 텐데" 라는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굳이 아브라함이 오시지 말고, 예수님은 다 이루셨다고 하는데, 그 이루심을 앞당겨서 하게 되면 더 편리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앞의 불필요한 과정을 생략해버리고 바로 "아담이 범죄했다. 예수님이 바로 들이닥쳤다. 그래서 천국 가서 자식들을 많이 낳아서 천국은 풍성해졌다" 라고 하면 이야기가 간단한데, "어떻게 해서 복음이 예수님부터인가? 왜 그 이전에는 복음이 아닌가? 라는 의문점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한다는 겁니다.

교수님, 질문이 있습니다 !!

이것을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교수님에게 질문을 했는데, 물론 교수가 알 리가 있습니까? 제가 수업시간에 이렇게 질문한 거예요. 마태복음에서 세례요한이 이야기하기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고 했지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신학교에서 통치개념으로 배웠는데, 그 통치개념이 맞는다면 구약은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냐는 말이죠. 그러면 구약은 인간의 통치였는가? 아니란 말이죠.

구약부터 하나님의 통치였고, 신약신학에서 전통적으로 배우는 것은 에덴동산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라고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러면 에덴동산이 하나님 나라인데, 그러니 세례요한이 이야기한, 즉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것은 어폐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교수님에게 답변을 해달라고 했는데, 알 리가 있습니까? 몰라요. 어느 누구도 답변을 못해요.

그 이야기나 "아브라함이 오시지 말고 바로 아브라함 자리에 예수님 오시면 될 문제인데, 왜 아브라함이 오시고 난 뒤에 예수님이 오시느냐?" 라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런 중요한 문제, 물론 교인들도 그런 의문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쉬쉬하고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그래, 예수님만 믿으면 되지 뭐"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신에 과연 예수님이 접목될 수 있는가?

그런데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 이야기거든요. 하지만 도서관이나 일반서점에서 책을 보게 되면 거기에는 예수 이야기가 아니고, 이슬람 이야기, 유대교 이야기, 힌두교 이야기, 부처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이죠. 인간의 종교적인 것이 말입니다. 그런 종교에서는 역시 신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렇게 신을 이야기한다면, 왜 인간이, 특히 문화인류학에서는 종교 이전의 신부터 나와요. 알타미라 동굴에 보면 신을 섬기는 내용이 나오지요. 그렇다면 그들이 섬긴 신의 내용에서 왜 예수 그리스도가 정복이 안 되느냐는 문제가 또 있다는 겁니다.

교회에서는 편하게 "여러분, 하나님을 믿습니까? - 믿습니다.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지요? -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 그래요. 그런데 이제 신약이 되었으니까 하나를 더 추가하세요. 그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입니다' 라고 하게 되면, 이미 차려놓은 밥상에 그냥 숟가락을 하나 더 얹듯이 예수님을 하나 더 얹으면 완성된 신의 체계라고, 그렇게 생각들 하거든요.

그렇다면 다른 종교가 믿는 신, 즉 절대자에다 예수님이 접목이 될 수 있냐는 문제인데, 과연 접목이 될까요? 당연히 접목이 안 되지요. 중요한 것은 이슬람이나 다른 신, 그러니까 철학적으로 말하는 신인데, 신이란 말은 공통적으로 최고의 인격적인 존재를 말하거든요. 절대적인 존재,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관리 운영하시고 마무리도 그쪽에서 처리하시면서, 그리고 인간처럼 이성을 가진 인격적인 존재를 신이라고 한단 말이죠.

그것은 특수한 종교 말고도 아프리카의 토속 민족에게도 그게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어린양을 제물로 드리는데, 지금도 부두교 같은 경우에는 피 흘리는 닭의 목을 비틀어서 신에게 드립니다. 그러면 그런 자들에서 과연 그리스도가 접목이 될 수 있냐는 겁니다.

접목이 되도 문제, 안 되도 문제 !!

그런데 만약에 접목이 된다고 하면 그것은 문제가 큽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접목이 안 된다고 하면 문제가 더 커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방인이거든요. 한국사람이나 미국사람은 다 이방인이라는 말이죠.

같은 이방인이 믿는 이방종교에는 접목이 안 되면서, 그런데 특별히 동방의 단군의 자손이란 이방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신 개념과 접목된다면, 그것은 뭔가 반칙이라는 겁니다. 거기에는 전혀 억지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과연 천지 창조했던 조물주에 예수님을 접목시킬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그 조물주가 "너희들이 알고 있던 신이, 신이 아니고 마귀가 조작해준 상상의 절대적 존재이다" 라고, 그것을 철학적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즉 종교적 본성에 의한 하나님, 자기의 존재성을 투시한 다른 존재라는 겁니다.

포이에르바하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신이란 인간의 투시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투시한 또 다른 존재를 설정해놓고, 거기에 숟가락 하나를 더 얹듯이 부록으로, 그러니 버전을 업그레이드한 것이죠. 예수를 하나 더 집어넣으면 미흡한 것이 보충되면서, 온전한 신의 체계로 삼는 것이 과연 합당하냐는 말입니다.

접촉점으로 삼기에 '합당합니다' !!

신학교에서는 합당하다고 가르쳤는데, 왜 그것을 합당하다고 가르쳤을까요? 성경에서는 합당하지 않다고 거부하는데, 왜 신학교에서는 교회사나 역사 시간에 합당하다고 이야기를 할까요?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나면서 신에 대한 의식이 있기 때문에, 즉 접촉점으로 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 신을 다 아시죠? 거기다 예수님 이야기를 추가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 라고 함으로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포섭할 수 있는 논리적 전제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합당하고 한다는 말입니다.

가말리엘의 문하생 !!

사도바울은 과거에 여호와를 신봉하는 사람이었고, 남들보다 유난히 열심을 내서 "내가 믿는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할까?" 라고, 남들보다 더 영광을 돌릴 생각을 늘 했던 사람이었거든요. 그는 가말리엘 문하인데, 당시에 세 가지 유대교 해석노선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열심이었던 노선이 바로 가말리엘 문하였던 거예요.

이 가말리엘 문하는 요새처럼 신학의 한 부류가 아닙니다. 옛날 유대사회에서 모든 지혜의 총화예요. 즉 지혜의 총체고 궁극적인 지혜입니다. 그러한 신 밑에서 경제든 과학이든 거기서 예수든 다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신을 연구한다는 것은 다른 것과 같은 레벨이 아니고, 최고에 신에 접근된 레벨이란 말입니다.

유대교 신학을 아십니까?

이런 유대신학을 일반교인들은 모를뿐더러 신학교에서도 안 가르치거든요. 유대신학이 신학교 커리큘럼에 들어있지를 않습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분들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보고 성경에서 예수님이 욕하고 악마의 후손이라고 하니까, 자기도 욕을 하면 되는 대상인줄 알고 있어요.

그러니 유대교가 어떻게 유대교인지 몰라요. 그 유대신학이 얼마나 철저함을 기하는지, 신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말이죠. 그냥 반대하기 위해서 배우지, 그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의 체계와 합리화가 얼마나 철저한지 생각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유대교는 한 마디로 누적된 진리체제인데, 누적이란 쌓이고 쌓이는 겁니다. 이것은 곧 "진리는 역사를 따라서" 라는 겁니다. 역사가 진척이 되면 진리가 더욱 더 정확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그 멸망 자체를 신의 뜻이라고 봤거든요. 개신교 신학을 한 사람한테는 유대교의 교인들이 얼마나 하나님 중심인지 상상을 못합니다.

지금도 서점에 가보면 유대교에서 잠언서를 해석하고, 창세기를 해석한 책들이 가끔은 나와요. 물론 거의 팔리지는 않지만 유대교 해석법이 나옵니다. 탈무드가 아주 대중적인 것인데, 탈무드보다도 더 깊이 있는 주석책이 나온다는 겁니다.

쉐마, 이스라엘 !!

그들의 체계가 무엇이고, 유대교의 원리가 무엇인고 하니까, 한 마디로 이겁니다. '토라중심' 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하면 '말씀중심' 입니다. 말씀중심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 존재보다도 말씀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말이 맞아요.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이 누구나 다 자기 교회가 가장 완벽하고 제대로 된 교회임을 드러내면서, 교인들한테 할 수 있는 최고의 호소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말씀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왜 주셨는가? 쉐마, 즉 듣고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라는 겁니다.따라서 인간이 피조가 된 목적이 무엇이고, 사람이 사는 존재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첫째 되는 목적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나오는 제1조항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이미 유대교신학에 이미 담겨있다는 것을, 1648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사람들은 아마 알았을 거예요. 그런데 모른 척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그들은 감히 못했을 거예요. 자기들 인간의 이성으로, 놀라운 진리체제의 경외성에 구멍을 낼 있다는 생각을 감히 말이죠.

사람이 상식적으로 뭘 안다는 것은, 우선 선배들이 이 대목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살펴주는 것이, 선배에 대한 존경심보다도 그게 자기 자신의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를 평가하는 방법인데, 결국 선배들의 평가와 대조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즉 "기존의 뛰어난 사람들은 이 대목에 대해서 뭐라고 해석했는가?" 라고 말이죠.

그래서 유대교나 현재 개신교 신학은 다른 것이 아니고, 선배들이 했던 솜씨에 대한 답습과 장점을, 즉 좋은 점을 뽑아서 이 시대를 살지 않은 선배들이기 때문에 혹시 그들에게 미흡하거나 빠진 부분이 있을 거예요. 그것을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보충하게 되면, 보다 완벽한 체제를 이룬다고 말입니다.

이게 바로 칼 포퍼가 이야기한 겁니다. 영국의 실용주의 철학자인데 말이죠. 진리는 항상 과오를 반성하고 거기에 대해서 새롭게 개선책을 내놓음으로서 진리는 발전한다는, 그런 그의 철학적이고 논리적 사상이 신학에서 유감없이 적용되는 겁니다.

루터보다는 칼빈이 !!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대단한 선배로서 칼빈과 루터를 제시하는데, 하지만 막상 개신교에서는 루터는 별로 관심이 없고 칼빈에게 관심이 많아요. 집사님들은 평신도지만 신학교 사정을 조금은 알고 있어야만 돼요. 왜 루터는 인기가 없고 칼빈은 인기가 있냐 하면, 그 이유를 아무도 이야기 안 해주지요. 루터는 교회 중심이 아니었는데, 즉 교회 시스템 중심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칼빈이 일단 혁명에 성공하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는 빨리 조직정비에 나서야 돼요. 왜냐하면, 사람은 보이지 않는 신은 항상 뒷전이에요. 뭔가 결실이 있어야 되고 그 결실에 가입함으로서 신적인 안정감을 누리게 돼있습니다.

교인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

그 진리가 뭐냐 하면, 평신도는 그런 것이 참 힘들어요. 하지만 진리를 외치는 교회에 등록하게 되면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예요. 특정 제도에 말이죠. 그러니 목사들은 빨리 특정 제도화를 시키는데, 그 제도화를 굳히는 것이 뭐냐 하면, "전통적인 해석을 우리는 고수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 전통적인 해석을 고수하려면 반드시 무엇과 대비가 되어야 합니까? "이런 이단들이 교회사에서 발생했고, 지금도 발생하고 있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배격합니다" 라고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교인들에게 심리적인 안정을 줄 수가 있어요. "우리 교회에 잘 나왔지. 등록을 참 잘했지. 큰일 날 뻔했어. 안식교, 몰몬교, 통일교. 요새 뜨는 신천지 등등, 내 영혼이 엉뚱한데 갈 뻔했어"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이런 좋은 교회를 주셔서" 라고, 그렇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게 되면 교회 질서가 유지가 돼요. 그러면 쉽게 목회가 됩니다. 누구를 노리고 비판하는 게 아니고, 지금 사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미 신학교부터 루터는 별로이고,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인기가 있었다는 것은, 가르치는 교수나 배우는 신학생들은 무엇이 궁금하냐 하면, 어떻게 성경에서 진리를 뽑아내고, 즉 진리에서 쉽게 칼빈과 루터가 엑기스를 뽑아내면, 그것으로 주택가 복판에 '대한예수교장로회' 라는 간판을 걸고, 그 교회에 오는 자들에게 심리적으로 구원에 대한 안정감을 제공할 때까지의 프로세스, 즉 연결고리인데 말이죠.

돌아가면서 청소합시다 !!

그것이 곧 진리이고 그 진리를 실처럼 뽑아내게 되면, 그런 논리적인 하자가 없을 때는 일이 다음과 같이 진행이 됩니다. 그러한 교회에서 하는 제직회의 경우에, "목사를 뽑을 때는 ⅔ 찬성이 있어야 됩니다. 일반 집사는 과반수 찬성하면 됩니다" 라고 하는데, "과반수가 찬성하면 됩니다" 라는 이야기는 믿음 없어도 들을 수 있는 말이잖아요.

그리고 "돌아가면서 청소합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런 것이 디모데전서에 안 나오거든요. 예레미야서에 안 나오잖아요. 그런데 "돌아가면서 청소합시다, 돌아가면서 반찬을 해옵시다" 라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손길로 접촉되어있는 진리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것, 물론 그 중간에서 목사는 카리스마가 보유돼야 하고 말입니다.

시켜만 주이소 !!

그런데 교인들은 자기 할 일이 있는데, 일주일 내내 바쁩니다. 거기에 성경까지, 즉 신학의 옳고, 그름까지 관심을 둘 수가 없어요. 관심을 두면 자기 생계를 포기해야 되니까 말이죠. 그래서 "뭘 해야 됩니까?" 라는 것까지는 전공자인 목사가 다 해주고, 교인들은 어디까지 하면 되느냐 하면, 경상도 말로, "시켜만 주이소" 라는 겁니다.

그렇게 목사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것이 어디에 포함이 되어있더라는 겁니까? 하나님의 진리에, 즉 "하나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충성된 종아, 네가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했구나' 라고 납득이 될 수 있도록 목사님이 우리에게 안심과 평안을 정서적인 안정을 해결해 주세요. 그러면 존경하지 말래도 존경해드리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들은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그래서는 안 됩니다. 목사는 섬기는 사람이지 섬김을 받는 결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은 여러분이 직접 보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이 항상 묵상하고 가까이 해야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목사님 말씀이 맞지요. 하지만 우리가 뭘 압니까? 우리는 봐도 모르니까, '이것을 믿으시면 오늘밤 천국에 가있습니다' 라고, 그것까지 깔끔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켜만 주이소. 우리는 목사님 권위를, 영적 목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러면 교인들은 죽고 난 뒤의 걱정은 한시름을 놨잖아요. 세상에 그런 보험이 어디에 있습니까? 든든한 보험을 들었으니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막스 베버와 칼빈의 예정론 !!

9세기말에 '베버' 라는 사회학자가 사람이 그렇게 했는데, 즉 "자본주의의 발달은 개신교의 정신에서 나온다" 라고 해서 대 히트를 쳤습니다. 베버의 사상이 지금도 있어요.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이제는 구원걱정은 뚝 그치시고,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게 되면 여러분이 획득한 모든 재화와 재물은 신의 축복의 증거물입니다" 라고 한 겁니다. 개신교가 그렇게 편안하게 한 증거는 베버의 주장에 의하면 딱 하나였습니다. 그게 바로 칼빈의 유명한 예정론이었습니다.

"구원은 여러분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에베소서 1장 4절에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믿음이 왔습니다. 따라서 믿고 안 믿고 간에 예정론만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해도 구원되기 때문에, 교회 운영은 목사한테 다 맡겨두시고 여러분은 목사가 소명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는 치과 의사, 농사짓기, 호텔에서 서빙하기 등등, 이것조차 여러분 스스로 탓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소명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계속해서 말하기를, "따라서 여러분은 열심히 종사한 그것이, 목회자가 교회를 통해서 목회를 하는 것만이 소명이 아니고, 여러분의 일도 소명이니까 안심하고 하시면, 소명에 대한 대가는 아니지만 축복으로 여러분의 사랑하는 가족을 평생 동안 먹일 수 있는 생계비와 여유 자금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는 일에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마시고, 오히려 신의 뜻을 받든다는 심정으로 간호사를 하시고 의사를 하시고 판사를 하시고. 그렇게 여러분 생업에 종사하시면, 군인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미국과 유럽이 달라요 !!

이것이 미국과 같은 경우에 크게 작용했는데, 미국이 개신교잖아요. 그러면 미국과 유럽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유럽은 한 단계를 거친 거예요. 즉 "신은 귀족을 주시고, 귀족과 같은 레벨이 성직자이고, 그 다음에 여러분에게 왔기 때문에, 여러분이 감히 직접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건방진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직자를 주시고 귀족들을 주신 것도 하나님께서 일부러 배치해놓은 겁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미국에 건너온 사람은 귀족과 성직자 개념이 날아가고, 누구나 성직자라고, 그게 루터가 이야기한 것처럼 만인제사장설이거든요.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자본주의가 거칠 것 없이 질주하고 발휘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해준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도 바티칸 천주교와 미국 천주교가 달라요. 역시 미국에는 신부에 대한 계급의식이 희박해요. 그런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은 남미의 천주교는 신부에 대한 권한이 아주 절대적입니다. 헌금은 미국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데, 전체 천주교의 ⅓ 가량이 미국에서 나옵니다. 그러니 바티칸은 미국이 먹여 살린다고 보시면 돼요.

칼 바르트 - '그건 아니거든' !!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방금 베버 이야기를 하면서 근거를 하나 댔는데, 그게 곧 예정론이죠. 그런데 칼빈은 이 예정론을 주장하면서 미처 유대교가 말하는 예정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피지 못했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이 놀랍게도 유대교에 주장한 예정론과 똑같습니다.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몰랐지요.

여기에 대해서 최초로 시비를 건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독일의 시골교회의 목회자인데, 신학자도 아니고 박사학위도 없습니다. 그가 바로 목회자 '칼 바르트' 라는 겁니다. 혹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여기 평신도도 계시지만, 이것을 굳이 신학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상식이라 여기고 들으시면 됩니다.

칼 바르트와 칼빈의 예정론은 차이가 나는데, 그래서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합동 측에서는 그 사람을 자유주의라고 규정했어요. 그러나 다른 교파에서는 이 사람을 보수주의라고 합니다. 동일한 사람이 한 쪽은 보수주의가 되고, 다른 한 쪽은 자유주위가 됐어요. 같은 대한예수교장로회지만 통합 측에서는 칼 바르트는 보수주의로 취급했는데, 감리교에서도 그렇고 말이죠.

합동 측에서 그를 자유주의라고 칭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칼빈의 예정론을 안 따랐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달리 칼 바르트의 사상을 연구한 게 아니고, 단지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칼빈의 예정론과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차이점이 뭐냐 하면, 간단해요.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예정했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예정하셨다 !!

칼 바르트의 예정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거수투표에 들어가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했다는 것이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집사님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아니라고요? 공부를 많이 하셨네요. 그러면 틀렸다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어디서 틀렸는지를 알아야 되겠지요.

여기서 칼 바르트는 이야기합니다. 뭔가 하나가 빠졌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예정하셨다" 라고 함으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에게 과연 예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경로가, 그게 이스라엘을 통하지 않고서는 마련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이해될까 걱정이 되는데 말입니다.

유럽은, 통 채로 이스라엘을 무시하면서 !!

이방인에 대한 창세 전의 예정이 이스라엘이란 경로를 통과하지 않고도 예정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예정이 안 된다고 본 겁니다. 유럽 자체가 이방이니까, 칼빈 당시에 말이죠. 로마인이나 게르만 민족은 이방인들이에요. 이방인들은 성경을 다이렉트로 봤거든요. 그들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구약성경 자체가 하나님을 애먹인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그들을 통째로 빼버린 거예요. "이런 믿음도 없는 인간들, 세상에 그렇게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께 대항하다니" 라고 하면서 말이죠. 거기에 비해서 로마인과 게르만족은 얼마나 착한지 몰라요. 이스라엘이 버렸던 하나님을 통째로 믿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은 직접 우리와 상대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나온 겁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오딘'에, 예수님만 넣으세요 !!

이렇게 되니까, 사실 게르만 민족은 북방민족이잖아요. 476년인가 로마가 멸망하고 난 뒤에는 국교를 기독교로 바꿔버렸어요. 물론 바꾸는 과정에서 그들은 신학이고 뭐고 없습니다. '오딘' 이라고,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신이 오딘인데, 오딘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졸지에 성경에 나오는 용어로 바뀌어버린 거예요. 그게 수월하니까 말이죠.

그리고 선교나 전도하는 사람이 세세하게 신학을 따지면 일이 안 돼요. "여러분, 알고 있는 그대로에 숟가락만 얹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신은 맞는데 빠진 게 하나 있습니다. 그분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만 부록으로 집어넣으시면 됩니다" 라고 하면서, 그러니까 바탕은 남겨둔 채로 덜렁 예수님만 집어넣은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여호와를 믿던 사람이잖아요. 사울이 직접 예수님 만날 때 무슨 소리를 듣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지금 사울이란 사람이 하는 행동이 본인의 명예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여호와지요. 여호와가 모세와 독대해서 모세에게 말씀을 주신 그 하나님이잖아요. 그러한 하나님을 믿는 연장선에서 활동한 것이, 거기에 예수님을 보태면 될 문제가 아니고, 즉 숟가락만 하나 더 얹을 문제가 아니고, 그게 핍박하는 문제였다는 겁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능력이 삭제를 !!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연장선 위에서의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통째로 전부 다 삭제시킨다는 거예요. 자기가 알고 있던 여호와가 여호와 아니었음으로, 삭제시키는 그 능력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즉 페인트칠을 다 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제가 창세기를 시작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것인데, 이것은 이슬람교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힌두교, 그리고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에서 신의 이름이 조물주예요. 그 뜻은 모든 세상을 창조하신 분인데, 교회에 다닌 적도 없는 돌아가신 할머니도 다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조물주라든지 모든 것을 예수님이 삭제해요. 삭제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라는 식으로 창세기 1장 1절을 해석할 용의가 되어있냐는 겁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다가 숟가락을 하나 더 얹는 것처럼, 그분의 아들이 곧 예수님이라는 내용을 보태는 것이 아니고,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다" 라고 고백하는 우리 자신이, 그것이 예수님을 핍박할 이유로서 작용할 수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러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이여, 모든 천지만물을 신이 만들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 고백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요인임을 누가 자인하겠습니까? 누가 감히 그런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있으니, 눈에 보이니, 창세기 1장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하면, 거기에 '아멘'을 붙여가면서 받아들이면, 이제부터 자기는 신자의 생활이 스타트가 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죄라고 하니, 그러면 마귀라는 유령이 자기를 속여서 그런 고백을 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과연 그런 건가요? 성경은 "과연 그렇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무슨 수로 그런 고백이 나옵니까? 이것은 우리 자존심이 걸린 문제입니다. 40년, 50년을 교회에 다니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신학박사가 되어도, 이 자존심은 항상 남아있는 것이란 말이죠.

우리는 뭔가가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

우리는 뭔가가 빠졌다고 생각했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고백하는 것도 맞고, 그러면 빠진 게 뭐냐 하면, "골로새서 1장에 보니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었다' 라고 하니, 그러면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일단 맞는 이야기고, 거기에 추가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했다는 내용을 보완해 가면, 그러면 나도 맞고 주님도 맞고, 그로 인하여 옛날보다 더 확실해지고, 그럼 그 동안 믿었던 내 자존심도 유지될 수 있으니 즐겁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신학과 철학이 구분되지 않았던 중세시대 !!

중세에는 신학과 철학이 구분되지 않았어요. 이건 상식적으로 아는 이야기인데, 이 말은 중세 신학이 뭐냐고 물으면서 이미 그 사람 본인도 알지 못하게 중세 철학으로 빠졌다는 생각과 같은 뜻이에요. 신학과 철학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말은, 신학을 하고 있다는 말이 곧 철학을 하고 있다는 말과 동일하다는 말이 된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돼요.

그렇다면 중세 철학이 뭐냐 하면, "빛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진리에 가깝고, 빛에 멀리 있는 사람은 진리와 멀어진다" 라고 하는, 이것이 유명한 어거스틴의 신학입니다. 하여튼 중세 때 무슨 이야기만 하면 그 말도 맞는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어요. 빛에 가까이 가게 되면 진리에 가깝고 빛과 멀어지게 되면 지옥에 가깝다고 하는, 여기서 발생된 것이 천주교의 연옥설이거든요.

사람들은 천주교의 이론들이 마구 나온 줄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철두철미한 체계 앞에서, 누가 따져도 결국 성경과 연결되도록 해놓고, 그렇게 해서 7성사가 나왔다는 사실을, 그것을 개신교에서는 공부를 하지 않으니 모르는데, 이런 철학체계가 다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못난 사람이나 죄를 짓는 사람에 대해서 저주를 받는다고 이야기하는, 그렇게 선언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판결은 정당화가 돼버려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계급을 7단계로 구분되면서 정당화를 유지한 겁니다. 유대교에서 빛에 가까운 사람이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들은 말씀과 가까웠다는 겁니다.

아까 제가 유대교 해석의 기본이 말씀중심이라고 했잖아요. 따라서 말씀과 접촉을 덜 갖거나 평소에 율법, 혹은 토라를 적게 보거나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돈을 벌어도 7단계에서 아래 단계에 있으면서 그들을 통째로 죄인으로 분류한 겁니다. 왜냐하면, 토라 중심, 즉 말씀이 중심인데, 그래서 사람이라고 하면 말씀으로 사는 게 목표인데, 어디 천박한 돈을 번다고 말씀을 등한시하느냐는 겁니다.

천박하게 돈만 버는 인간들이, 어디 감히 목사에게 !!

그러므로 "나 같은 목사들은 그저 말씀만 하기 때문에 존경을 받아야 되고, 천박하게 돈만 버는 인간들은 저주받아 마땅하다. 따라서 신의 권위에 입각해서 신의 카리스마에 입각해서 너희들은 내 말에 무릎을 꿇어라" 라고 하는, 그런 지시와 명령이 정당화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미 어거스틴 신학체제 자체가 "빛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 진리에 가깝고, 빛에서 멀리 있는 사람은 저주에 가깝다" 라고 하는데, 이러한 사상이 사회적으로 체계화되고 구체화되거든요. 사회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관념의 체제예요. 그래서 이 사회라는 것이, 희한하게도 모르는 사람은 아는 사람에게 굴복하게 돼있고, 그런 굴복의 사슬이 연결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탈피하기 위해서 자본주의는 사유재산 중심으로 체인이 돼있어서, 개인의 재산이 많은 사람은 위에 적은 사람은 밑에, 아무튼 그렇게 돼있는데, 물론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정신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어쨌든 그 시대는 그렇게 돼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다 보니, 여기서 빛이 있다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과 예수님과 충돌을 일으켰고,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 라고 해서, 주님은 그렇게 밑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는 말이죠. 거꾸로 올라오니까, 단순히 이것은 "너의 자리 내놓아라" 라는 게 아니라, 사상의 방향이 위에서부터 내려오는데, 그게 위로 올라가니까,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너무나 위험한 요한복음 !!

여기서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어느 쪽이 빛입니까? 현재 인간들이 하나님이 빛이라는 그게 빛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쪽에서 출발한 게 빛이 되는 겁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빛이 되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빛이 되면 자동적으로 소위 여호와를 섬긴다는 이쪽은 빛의 반대말, 즉 어둠이 되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에 처음부터 나와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의 사상적 환경이 이렇습니다. 뒤집기예요. 빛은 어둠이 되고 어둠이 빛이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을 교회에서 해석을 제대로 한다면, 그 목사는 아주 위험합니다. 정말 위험해요. 오래된 장로는 졸지에 어둠이 되어버리고, 새로 온 신참이 빛이 되는 수가 생겨버려요. 그러면 교회 체제, 정서적인 안정, 심리적인 안정에 혼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러면 반드시 강력한 반발이 나오게 돼있어요.

십자가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 !!

칼빈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예정하셨다" 라고 할 때 칼 바르트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유대교의 예정론과 차이점이 없다는 겁니다. 유대교는 "우리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정되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성경적 근거가 뭐냐 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예정된 것이죠. 하지만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그 언약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는데"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의미하는 게, 그냥 양적으로 미흡한데 완전하게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했다는 말도 맞는데, 다만 미흡했지요. 그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그게 맞기는 맞는데, 플러스 알파가 들어가는 식으로 예수님을 넣으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언약을 완성할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을 했잖아요. 그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예수님이 피해자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피해자가 있다는 말은 곧 가해자가 있다는 말인데, 그렇지요?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그럼 그 가해자가 누구냐는 겁니다. 가해자의 정체가 뭐냐 하면, 가해자가 품고 있던 성경 해석적 사고방식이 뭔지를 따져보자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그 당시에 "우리는 언약으로 하나님이 택해서 창세 전부터 예정하신 민족이다" 라는 것이 예수님을 가해할 수밖에 없는 동기로서 작용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유대인이 누구의 후손입니까? 아담의 후손이지요. 그럼 우리는 누구 후손이지요? 당연히 아담의 후손이지요. 그러니 우리 안에 유대교가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지금,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있다면 그분을 가해할 수밖에 없는 가해 동기가 우리한테 발생되고 있다는 겁니다. "신은 우리편이다" 라고 하는 게 이슬람 테러집단의 구호가 아닙니까? "신은 우리와 함께 있다" 라고 하는 게 유대교뿐만 아니고 힌두교도 마찬가지예요. 모든 철학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물론 그렇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하셨는데, 즉 "너희는 내 앞에서 얼마나 의인인지를 생각하지 말고, 왜 죄인이어야 하느냐고 나에게 물어라" 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가져가셔서 다 이루셨지만, 그 언약의 구체화는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반사된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무엇을 해도 죄인이 되게 하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윤리와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

그런데 죄인이 되게 하는 그 능력이, 우리는 기껏 생각하는 것이 윤리와 도덕적인 죄를 끄집어내면서 죄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은, 피아제 심리학까지 공부를 안 해도 일반적 교양공부만 해도, 윤리는 진화하게 돼있어요. 도덕과 윤리는 서양역사에서 진화했습니다. 페스탈로치 교육철학은, 나중에 피아제 교육심리로 보면 발전되게 돼있어요.

이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도덕과 윤리라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나의 개인적인 양심이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양심과 어떻게 부딪치지 않을 수가 있냐?" 라는 것인데, 그게 도덕이고 윤리예요. 즉 사람은 혼자서 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음 시간에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철학을 공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것과 관련이 돼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 플라톤이거든요. 플라톤이 "신이 창조하고, 이 땅에 있는 것은 안개와 같은 환상에 불과하다" 라고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게 중세 철학까지 연결되고 오늘날에도 역시 그러하다는 겁니다.

집사님, 누가 만들었어요?

중세 철학이고 뭐고 목사고 뭐고 간에, 그냥 장사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양심을 쪼개보면, "집사님, 집사님은 누가 만들었어요? -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떠합니까? - 이 세상은 나그네지요" 라고 하는데, 그게 플라톤의 철학이라는 겁니다. "그럼 집사님, 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 그저 이 땅에서 살다가 나중에 죽어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라고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그냥 아무런 꾸밈도 없이, 어떤 깊은 신학과 같은 것을 따지지 않고 장사를 하면서 느낀 양심이 뭐냐 하면, "살아보니까 믿을 놈 없고, 그저 믿을 사람은 주님밖에 없어서 나중에 주님께 갑니다" 라고 하는, 그래서 "주님은 누구십니까?" 라고 하면, "주님은 하나님이고, 그리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입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세례를 받을 때 잠시 교육을 받으면서 이야기했어요. 그때 목사가 하는 말이, "집사님, 이것만 알고 있으면 돼요.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누구시지요? - 하나님이고 인간이십니다. - 예수님이 왜 인간이 돼야 되지요? - 인간이 되셔야 우리 죄를 대속하기 때문입니다. - 됐습니다. 합격입니다. 세례를 주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요즘은 그 정도만 가는 것도 대단한 목사죠. 하지만 아무리 바쁘고 해도 그 정도는 가야 됩니다.

이게 혹시 유대교 역사가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아담이 품고 내려왔던 상식의 이어짐이라고 생각해볼 때, 그것을 다시 수술대에 끄집어내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세워놓고 다시 점검을 해야 돼요. "이게 혹시 유대교 역사가 아닌가? 내가 믿는 예수님을 내가 싫어하는 요인이 아닌가?" 라고 점검해봐야 되지요. 점검하는 방식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끄집어내는 게 복잡하지, 점검하는 방식은 쉽고 결론은 굉장히 쉬운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끝", 이렇게 결론은 너무 쉬워요.

여러분, 여러분이 피를 흘렸습니까? 피는 누가 흘렸지요? 예수님이 흘렸습니다. 그 피로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왜 그분이 피 흘렸는데 우리가 구원을 받지요? 그분의 피 안에 대신해주는 요소가 있기 때문인데, 따라서 그 대신을 받는 자는 가만있어야 돼요.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라고 하는, 이게 대리 요소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어려워지는 것은 뭐냐 하면, 대신 요소라고 할 때 "내가 대신해줄게" 라는 것을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피를 흘렸다는 말이거든요. 그건 우리가 요구한 게 아니고, 우리 아이디어가 아닌데 어떻게 합니까? "죄인, 너 이리 와. - 여기에 왔습니다. - 너, 죄인이지? - 예, 죄인이 맞습니다. - 걱정하지 마. 대신 용서해줄게" 라고, 이렇게 말로 해도 될 것을 피를 흘렸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피를 흘려야 되지요? 말씀으로 되는데 말이죠. 우리는 말로 해도 알아듣는 사람인데, 우리는 거기에 감동할 준비가 된 사람이거든요. "너, 죄인이야. - 저도 압니다. 하지만 밥을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어요. - 하지만 걱정을 하지마. 내가 다 해줄게. -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그렇게 피를 빼고도 할 수 있는 문제잖아요.

피가 아닌, 사랑의 하나님 !!

실제로 자유주의적 성향의 교회에서는 피를 다 빼버립니다. 피 자리에 하나님의 사랑을 집어넣었어요. "하나님은 사랑을 베풉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죄인이기에 그 사랑을 받아야만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할 때, 그 교회는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받게 돼있어요. 그러다가 보니까, 그쪽 교파 교인들은 감리교, 불교, 천도교 등등, 어떤 종교 지도자와도 충분히 대화가 돼요.

모든 종교는 무엇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말입니까? 티벳 불교도 마지막으로는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사랑이죠. 요한일서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하잖아요. 산의 정상은 하나라도, 어떤 종교로 올라가도 사랑의 길로 가게 되면 다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사랑이니 말이죠. 기독교만 해서는 독선적이 되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신은 사랑이다. 끝!",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중간에 뭐가 빠졌지요? 피가 빠졌다는 겁니다. 성공회 교수가 지은 이만큼 두꺼운 책이 있는데, 그 책을 보고 제가 서평을 한 게 있습니다. 그 두꺼운 책의 결론도 마찬가지예요. "신은 사랑이다. 죄에 대한 우상의 사랑이다(?)" 라고, 하여튼 기독교에서 하는 이야기 다해요. 그런데 무엇이 기어이 빠져요? 굳이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는 겁니다.

햇빛과 공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태복음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랑이고 자비죠. 우리가 사는 것도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피가 들어갈 틈이 없어요. "이상하게 피가 왜 들어가지? 피는 그때 유대인들이 흥분해서 죽였구나. 피는 하나에 에피소드이고, 그러니 지금에 와서 피 이야기는 하지 말자" 라고 하는 겁니다.

피, 피, 피 !!

그러나 막상 신약성경을 보세요. 히브리서 마지막을 보면 뭐라고 합니까? '피 언약' 이라고 돼있어요. 그리고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피로 하얗게 된다고 한다는 겁니다. 성경은 이렇게 끝까지 피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히 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히 13: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계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첫째 강의를 마무리하면 !!

이제 첫째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에서 피로' 라는 것이, 이게 지금 해결이 안 됐습니다. 사랑에서 사랑이 되면, 그때 죄인을 용서할 때는 이 죄는 아까 이야기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거든요. 그런데 공동체에 따라서, 그리고 사람이 나이가 많을수록 윤리, 도덕, 양심이 더욱 더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죄인이라고 간주할 때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되는 거예요.

윤리와 도덕 앞에 법이 있는데, 그 법을 못 지켜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만약 법이 없다면, 법이 없는 곳에 죄가 안 나오게 돼있죠. 아까 제가 법이 진화한다고 했잖아요. 인도 사람들은 숟가락으로 음식을 먹으면 죄가 돼요. 그들은 문화적 요인에 의해서 손으로 먹는데, 그러나 미국 사람들은 포크로 먹잖아요. 우리는 부모님이 손으로 먹으면 안 된다고 하고 말입니다.

어릴 때부터 공동체가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법칙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나요. 그러면 인간들에게 심리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구축된 모든 죄의식은, 그것은 일생동안 살아온 공동체의 보편적인 윤리체계에서 나온 것이죠. 그것을 일반적이 아닌 보편적이라 하는데, 이것은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하겠지만, 하여튼 대충 알아들으세요.

나는 죄인입니다. 과연 그럴까?

아무튼 보편적인 윤리 도덕에 의해서 그들은 그것으로 죄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이미 보편화돼있었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뒤집어버린다는 겁니다.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역시 간음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법이 없는데 자기가 죄인이라고, 그런 죄의식을 알 수가 있습니까? 그게 바로 인간이 주님 앞에서, 자기가 아무리 죄인이라 해도 죄인이 아닌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는 10분만 쉬고 하겠습니다.

2014,10,30 재정리함 - 녹취 '구'

첨부파일 : 미국강의모음(총25강)(재정리).zip (1.3M), Down:13

구득영(IP:203.♡.97.152)

14-12-14 19:45

먼저 두 분의 목사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누린 즐거움을 여러분도 누리시길...

이상현(IP:24.♡.214.33)

14-12-28 07:48

감사합니다.

직접 듣고 필기했던 요점이 명확해졌습니다.

피! 피!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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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80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