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05b 울산강의-출애굽기 33장 : 영적전쟁
20141205b 울산강의-출애굽기 33장 : 영적전쟁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8)
20141205b 울산강의-출애굽기 33장 : 영적전쟁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합니다.
두 번째 강의는 첫 번째 강의보다 약간 더 심도가 있을 거예요. 약간 더 종합적이라서 어려울 수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애굽과 차이점을 알라고 했고, 왜 알아야 하는가? 영적전쟁에서 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분시켰느냐 하는 거죠. 아까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홍해가 무슨 의미냐 하면, 너희들은 절대로 죽어도 못 오는 곳에 보낸다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이 상상하고 또 상상하고 아무리 성경책 갖다놓고 온갖 번역본을 갖다놔도 상상할 수 없는 그 세계, 그건 뭐냐 하면, 너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은 세계에 가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여기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 이게 인간의 능력으로 가당치도 않는 일이지요. 안 돼요. 이건 어떻게 계산해보자. 제가 말씀 지킵니다, 이런 이야기하는 사람이 제일 미운 것이, 말씀을 지켜봐야 누굴 위해서 한 거예요? 본인 잘나기 위해서 한 거예요. 결국 본인에게 돌아오잖아요. 진짜 말씀 지킨 사람은, 백날 지켜봐야 전부 다 나 좋으라고 지킨 그런 죄인이라는 고백을 내놓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지요. 그 사람 말고 또 옆에 누가 있단 뜻이에요. 그렇잖아요.
자기만 있다면 항상 자기관리? 여기 단장품이라 했는데 누굴 위해 단장하는 겁니까? 화장품이 누굴 위한 겁니까? 남 찍어 바르라고 화장하는 겁니까? 어디 유격훈련 갔어요? 자기 예쁘게 하려고 화장하잖아요. 결국은 주님께서 이 말씀하실 때 애굽처럼 너를 위한 모든 것은 주님과 동행할 때 합당치 않은 것이다. 지금 그 세계에 그 상황의 나라에 너를 집어넣는다고 한 거예요.
이게 첫째 시간이 이야기한 거고, 두 번째 시간에 이야기할 것은 조금 난해한 겁니다. 뭐냐 하면, 그러면 홍해로 이스라엘 건너갔다. 이스라엘은 좋겠네. 우리는 애굽이니까 못 가고 너희끼리 천국에서 잘 살아라. 우리는 우리끼리 살다가 죽을게, 라고 편 가름하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이동하잖아요. 이스라엘 속에 전 세계가 다 들어있어요. 이게 어려워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은 전 세계를 반영합니다. 반영이란 말은 쉽게 말하면 그림자, 더 쉽게 말하면 모형설계도로 보면 되죠. 무슨 설계도? 세상의 모든 운명을 응축하고 압축해서 작게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면 왜 그걸 제가 강조하느냐 하면, 애굽의 종교의 특징은 나를 위해서잖아요. 나를 위해서 점괘 하듯이 미리 당겨서 예상한 것을 신이시여, 내가 예상한 그걸 달라고 비는 것이 애굽 종교라면, 결국 그것은 개인 종교에요. 기도하는 것도 나를 위해서. 남 좋으라고 기도하지 않아요. 나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가족이지만 내 가족이기 때문에 기도하지 남의 가족 위해 기도하지 않잖아요. 중보기도 해도 나와 관련된 기도를 하잖아요.
따라서 이거는 개인구원에 관한 건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구원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의 구원문제는 하나님께 관련된 문제고 이스라엘 본인들은 뭐냐 하면, 도대체 이 세상의 실재가 어떤 입장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할입니다. 축소된 전 세계. 여기서 전 세계가 축소됐으니까 두 요소로 나누면 시간과 공간으로 나눌 수 있어요. 공간은 지리적이죠. 시간이란 말은 천지창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가 이스라엘 안에 축소돼있어요.
영화관에서 영사기 돌리잖아요. 영사기 안에 필름이 들어있지요. 필름은 묵직하지만 요정도 되잖아요. 하지만 틀어보면 두 시간이고 오래 가잖아요. 그 안에 응축이 돼있고 압축이 돼있죠. 그래서 프로이드는 꿈을 이야기하면서 응축이란 말을 했습니다. 응축된 꿈이 나올 때는 은유로 나온다고 했어요. 환유가 은유가 있어요. 하여튼 유사성이라 해서 비유가 응축된 거예요. 정보가 필름에 담긴 거예요. 이스라엘은 우주의 필름입니다. 이게 어려워요.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개인구원을 추구할 수 없어요. 집단구원이에요. 내가 우선이 아니라 집단이 우선이에요. 그럼 이스라엘 사람에 있어서 주체는 뭐냐 하면, 구조, 조직이 주체를 만들어요. 내가 누구냐는 것은 조직이 정해줘요. 이스라엘이 정해준다고요. 이스라엘 전체가 아들이면 나도 자동적으로 아들이고, 이스라엘이 아들 아니면 나도 하나님 아들 아니에요. 다윗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다윗을 믿는 사람은 전부 다 하나님의 아들 되는 거예요. 이걸 다윗언약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그렇게 한 거예요. 그분이 왕이거든요. 왕이란 개념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백성 없는 왕 없지요. 왕이 있다는 말은, 네게 속한 백성은 누구냐? 와 같은 말을 하는 겁니다.
제가 방금 어려운 말을 했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요한복음 5장을 읽어드릴게요. 5장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들도 자기 원하는 자를 살린다는 말은, 예수님이 다윗언약에 의해서 오실 다윗의 자손입니다. 다윗은 왕이잖아요. 왕의 특징은 세습제입니다. 아버지가 왕이면 아버지가 인정하는 아들은 왕이 되고 그 아들이 또 인정해주면 딸이든 아들이든 왕이 돼요. 아들이 셋이면 아버지가 지정한 자가 왕이 되고 나머지는 왕자가 되어 귀양살이를 하든지 뒤주에 들어가든지 해야 돼요. 무조건 하나만 왕이 돼요. 왕은 두 명이 없어요. 왕은 한 명이에요.
그래서 왕 노릇이란 것은 하나의 권세에 완전히 매여 있는 것을 왕 노릇이라 합니다. 죄의 왕 노릇, 의의 왕 노릇이란 것은, 우리의 운명을 주관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오직 한 분이 따로 있고 그분에 의해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 하나님 뜻이에요.
방금 이야기한 것은 신약에 나오는 것이고 구약의 이스라엘이 인류의 설계도다. 설계도인데 구성요소가 시간과 공간이다. 공간부터 이야기하게 되면, 이 세상에 흩어져있는 모든 민족의 운명이 이스라엘이란 좁은 공간 속에 다 함축돼있고 응축돼있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인류의 시간이란 것인 지금부터 몇 천 년 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인류의 모든 역사가 이스라엘의 짧은 역사 속에 함유되고 응축이 된 거죠. 그러면 우리의 남은 역사는 따로 주어진 역사가 있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을 필름으로 환등기로 비추면 스크린에 나오는 모든 내용들이 바로 인류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용어가 다 이스라엘과 관련된 용어들이 나와요. 요한계시록이 시범으로 보여준 이스라엘인 동시에 온 인류의 역사가 요한계시록에 다 담겨있어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국과 지옥, 이것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어요. 네가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고 천국이고, 말씀대로 못 살면 저주받아서 지옥 되는 거고. 그 이스라엘 속에 함축된 정보가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외부 민족으로 확대가 되면서 다른 민족도 지옥 가고 천국 가는 그러한 대상자로 달라진 겁니다.
영어로 map이라 하는 것은 지도지요. 그 지도가 이스라엘 내부 안에 다 꼬깃꼬깃 접혀있다고 생각하세요. 접혀있는 지도를 점점 펼치면 간격이 늘어나겠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말고 바깥의 모든 민족들의 운명은 제2의 이스라엘을 닮았습니다. 접혀져있는 지도를 펼치면, 튜브 같은 게 있잖아요. 김장할 때도 어떤 분이 그걸 가져왔는데 접혔을 때는 A3 크기밖에 안 되는데 이걸 펼치니까 여러 명이 앉아서 속 버무릴 수 있다는 것, 제 휴대폰에 사진 찍혀있어요. 낙하산처럼 펼치면 돼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응축된 것을 펼치면 되는 겁니다. 응축된 것을 언약의 공동체라 합니다. 언약체. 그걸 펼치면 새 언약이 되는 겁니다. 전 세계에.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의 왕이에요. 처음 알았지요(^^). 예수님이 단군의 아들이 아니고 대한민국의 임금님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에요. 이 말은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옛날 이스라엘이 했던 그것에 대한 반복으로 일을 하시는 임금님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겠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내 임금, 단군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영원한 임금으로 이제부터 그분의 백성이 되겠다는 뜻에서 예수님을 주 예수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왕에 속한 백성이 되겠다는 뜻이에요.
어제도 그런 이야기했는데 제가 주일학교 하면서 기생 라합 설교를 했더니만 얘가 그 설교를 듣고 엄마한테, 엄마, 목사님이 거짓말해야 구원받는데, 라고 한 거예요. 저야 앞뒤 설명 다 했지요. 그런데 충격적인 요인만 받아들인 거예요. 그걸 첫째 시간에 뭐라 했습니다. 해석. 자기가 자기 해석을 해버린 거예요. 목사가 무슨 소리했는지 관계없이 자기 해석을 한 거예요. 뭐냐 하면 다르다는 거예요. 집에서는 절대로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천국 간다고 장담하는 목사는 거짓말해야 천국 간다고 이야기했느냐?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해서 거짓말하면 천국 간다는 이야기한 적이 없거든요. 얘가 그렇게 해석을 해버린 거예요.
기생 라합의 이야기는 이겁니다. 왜 거짓말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고 지금 쳐들어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꼬깃꼬깃 모아놓은 진짜 영원한 나라가 지금 자기 나라를 쳐들어오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자기 나라를 배신하는 길만이 자기가 사는 길이죠. 배신하는 방법이 뭡니까? 이미 자기에게 온 정탐꾼을 나는 당신의 원수가 아니고 당신과 나는 한 편이란 티를 내야 하지 않습니까? 티를 내게 되면 이방인이라도 나중에 정복했을 때 스파이를 숨겨준 공로자가 되어 한 편으로 간주하게 되면 백성인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게 되잖아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야고보서에 죽은 믿음이죠. 거기에 나오는 예가 바로 기생 라합이 거짓말한 예잖아요.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잘못한 게 있어요? 일곱 살 먹은 얘가 해석을 잘못한 거예요. 집에선 거짓말 안 해야 천국 간다고 이야기했는데 왜 교회에선 엄마 말과 다르냐 말이죠. 그 엄마가 나중에 항의조로 우리 권사님한테 이야기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아이가 교회에서 엄마 가르침과 달리 이야기하거든 엄마가 옳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걸 계기로 해서 엄마의 평소 신앙관에 수정을 삼을 기회로 삼으면 어떻겠느냐? 그냥 거짓말 안 해야 착한 아이 되서 천국 가요. 이렇게 편하게 상식적인 애굽적인 점괘 보듯이 상상한 천국 말고 목사가 정말 예상 밖으로 거짓말해도 천국 간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엄마가 자기 숙제로 받아들여야 되지 않나요? 그래. 맞아. 우리가 편하게 생각했던 천국이, 천국이 아닐 수가 있어. 오히려 내가 생각하지 않은 곳에 천국일 수가 있어, 라는 기회를 아이를 통해서 줬다고 생각하면 어떻겠어요? 정말 잘못됐으면 목사가 사과하든지 아니면 목사가 맞는다면 본인이 수정을 하든지.
왜 야고보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해놓고 착한 일을 거론하지 않고 거짓말한 기생 라합을 예로 거론했고, 착한 일 놔두고 자기 아들 죽인 아브라함 예를 왜 거론했을까요? 도대체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뭡니까? 그것은 귀신이 아무리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행함, 낯선 행함이 터져 나온다면 그 사람이 진정 믿음에 부합된 사람입니다. 그 낯선 행함이 뭔 줄 알아요? 사적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 잡은 행함, 나는 누구의 소속으로 구원받는 거지 나의 착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여러분 다 아시는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봅시다. 내가 착하냐, 나쁘냐와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구원시켜주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안다고 하면서 자꾸 잊어버리는 것이 내가 그 십자가를 믿어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오해를 하게 되는 거예요. 하루에도 몇 번씩. 뭔가 내 구원은 내 관리 하에 조금이라도 걸쳐있어야 된다는 그 의식이 왜 자꾸 드는지.
우리는 사적 구원이 아니고 집단 구원인데 하나님은 예수님 보고 소속돼있으면 주님이 알아서 내가 원하는 자기 때문에 내가 가져간다. 이게 얼마나 기쁜 일이에요. 기쁨의 폭발이잖아요. 심지어 불이 나서 전신화상입어도 꼴보기 싫다하지 않고 그런 나를 일방적으로 주의 십자가 피에 근거해서 그런 나를 구원한다면 나는 즐거운 존재, 나는 행복한 존재가 돼야 되는데 우리는 말씀을 그만큼 듣고도 사적인 예상 상태를 고려해서 그 상태가 되지 아니하면 짜증을 내고 불평을 내는지 왜 자기를 위한 자기밖에 안 되는지 뭔가 우리한테 문제가 있지요.
그런데 그 문제는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됩니다. 왜? 그래서 계속해서 모든 공로는 나 같은 인간도 구원되는 것은 나와 의논하지 않으심에 의해 구원됨을 감사하지요. 반성하는 일기장 보지도 않고 구원하시는 주님, 회개한다고 무릎 꿇는 걸 보지도 않고 구원해주시는 주님, 얼마나 감사합니까? 무릎을 꿇게 되면 문제 생겨요. 무릎을 꿇고 몇 분 견뎌야 돼요? 30분 견디면 용서가 되고 29분에 끊어지면 구원 안 되는 거예요?
다시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시간과 공간은 all전부입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은 이스라엘 안에 응축돼있어요. 이미 집단화되었습니다. 사적인 몇 분 동안 하면 됩니까? 몇 시간 기도하면 되겠어요? 헌금은 얼마 하면 됩니까? 이건 여기서 통하지 않습니다. 십일조 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십일조 하라고 하신 이유는, 십일조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십일조 하게 하신 거예요. 십일조를 하게 되면 반드시 인간은 다시 애굽의 종교처럼 사적인 행함으로 돌아가게 돼있습니다. 저는 했어요. 쟤는 안 했어요. 이런 것.
그래서 여기에 7절 봅시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여기에 어떤 지명이 나오지요. 회막이지요. 회막이란 텐트 앞쪽이에요. 하나님의 거룩한 천막, 50규빗, 100규빗. 천막 입구가 회막이에요. 그 앞에 성소, 지성소에도 천막 있거든요. 그 앞에도 회막이 될 수도 있어요. 어쨌든 전체를 회막이라고 본다면 백성들은 진 바깥에 머물러있어야 돼요. 들어가면 안 돼요. 회막이란 수학으로 보면 점이거든요. 전체 이스라엘을 보면 하나의 점이죠. 점에 여기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떠오르거든요. 이 회막에. 그럼 이건 아까 이야기한 응축이 되지요. 응축이 되면서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진짜 이건 어렵다.
이미 인간들은 출애굽할 때부터 자기중심이란 것이 들통 났어요. 자기중심이란 세상의 옴파로스/배꼽, 점은 뭐냐 하면, 내가 있는 곳이 중심이 돼요. 그리스는 아폴로 신전이 중심이라고 본 거예요. 그리고 중국(중화민국)의 뜻이 뭡니까? 세상, 우주의 중심은 한족이라 뜻인 중국이에요. 모든 민족이 다 그렇거든요. 다 자기 있는 곳이 중심이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중심 말고 다른 곳에 중심이 있게 되면 이해를 못해요. 이미 중심이 확정된 입장에서 다른 곳에 중심이 있다? 아닌데? 내가 중심인데. 이렇게 되거든요.
<가족끼리 왜 이래> 하는 것처럼 아버지가 자식을 고소하는 드라마가 있어요. 우리 목사님 가정은 티비를 안 본다고 하니까 전혀 모르죠. <청담동 스캔들>도 모르잖아요. 가수 장윤정 엄마가 3억 내놓으라고 고소를 했어요. 이번에는 장윤정이 뭐라고 쌍방고소를 했어요. 같은 식구입니다. 엄마와 딸이에요. 같은 집안끼리 고소를 했어요. 그럴 때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겠어요? 이해를 못해요. 세상 돌아가는 중심이 내 중심이기 때문에 저쪽이 말하는 것은 저쪽 중심이잖아요. 저쪽을 이해하려고 애를 써요. understand라는 말이 남 밑에 선다는데 발판을 밑에 깔아둘 수 없어요. 깔아둔 발판이 어디서 나왔어요? 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내게로 환원되게 돼있어요.
해석이 뭐냐 하면, 해석은 그쪽으로 가는 게 해석이 아니고 갔다고 오는 게 해석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관계가 그렇잖아요. “오늘 회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 “그래요?” “그런데 사장님이 날 칭찬했어.” 아내가, “그래요?” “다음 달에 보너스 준데.” “그래요?” 이러면 갑자기 남편이 할 말이 있어요? 영혼 없는 답변만 들을 뿐이죠. 이게 뭐예요? reaction반응이 없잖아요. 그러면 남편이 답답해서 “왜 내 말 안 들어?” “다 듣고 있어.” 다 듣지요. 하지만 그런 말을 할 때는 어떤 기대한 반응을 회수한다는 조건 하에 했거든요.
회막에 모세만이 그 자리에 선다는 말은, 모든 인간의 중심은 하나의 비유가 되서 이해를 못해요. 그래서 지켜봐야 돼요. 지켜본다는 것은 관계자 외입니다. 공사장에 보면 관계자 외 출입금지, 있잖아요.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는가? 꼭 할 일 없는 노인네들이 배수관 공사하게 되면 하루 종일 거기 서있어요. 가라고 해도 땅 파는 것 왜 보는데, 집 짓는 것 왜 보는데. 우리 동네 어떤 할아버지가 토끼를 키우고 닭을 키우는데 온 동네 할머니들이 거기 다 갑니다. 할 일이 생겼습니다. 토끼 일곱 마리 낳았는데 다 죽어버렸습니다. 하도 주물럭거려서.
관계자 외에요. 구원이요? 우리는 관계자 외입니다. 회막에 설 수 있는 분, 중보자 한 분밖에 없어요. 이 당시에는 모세밖에 없고 모세는 모세언약이니까 섰고 지금은 새 언약이니까 예수님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한테 다 일임합시다. 내 구원에 대해서 예수님한테 일임하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뭐냐? 내가 예수를 안 믿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예수를 믿어버리면 예수에 대한 해석이 되고 해석은 반드시 갔다가 내가 납득이 되도록 회수하는 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주님을 믿는 게 아니고 나의 해석을 내가 도로 되찾는 게 돼버려요. 이건 불신앙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불신앙을 이렇게 예를 들었습니다. 네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네 믿음이 진짜 실제적으로 효과가 있다면 산에 있는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라면 빠졌을 것이다. 해봐라. 됩니까, 안 됩니까? 이명박 정부라고 안 돼요. 토목공사 잘하는 사람도 안 돼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만 믿기 때문에. 그것도 안 되면서 네가 어딜 가? 어딜 가세요. 네가 내가 추방시킨 생명나무 있는 곳에 간다고? 착각도 유분수지. 애굽 종교를 예상할 수 있는 그것, 주께서는 날마다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구원은 바로 예수님 소관이란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더 진도 나가봅시다. 회막에 모세가 섰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뭘 해야 됩니까? 여기 보니까 다른 사람은 빙 둘러섰지요. 그리고 9절에 보니까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니까 무슨 기둥이 서 있지요? 구름기둥이지요. 이게 뭐냐 하면, 군대에서 오합지졸을 질서를 잡으려면 지도자가 이렇게 합니다. 너, 기준. 기준하면 깃발이 있으면 깃발을 들고, 깃발 없으면 손을 들어야 돼요. 그래서 기준 정할 때 반드시 키 큰 병사를 기준이라 해요. 훈련소에서. 키 크니까 주변에 있는 다른 병사들이 다 볼 수 있지요.
이것은 바로 봄이죠. 뭔가 기준을 바라볼 때 누구를 안 바라보게 됩니까? 우리가 누굴 본다는 것은 그 순간만큼은 나를 안 보게 되지요. 모세가 놋뱀을 들었잖아요. 민수기에서. 놋뱀을 쳐다보잖아요. 그런데 놋뱀을 바라보기만하면 낫는다 할 때 여러분 그 점을 생각해야 돼요. 안 바라보는 사람은 왜 안 바라보지요? 분석해보잔 말이죠.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데 참 쉽죠. 바라보면 되는데 왜 안 바라보죠? 그 설명이 참 어렵지요. 언어로 표현되는 말은 어려운데 실제로 우리는 가끔 그런 일이 있어요.
남편이, “여보” 하면 안 봐요. 왜 안 보지요? 놋뱀 쳐다보면서 남편 얼굴을 왜 안 보지요? 짜증나서. 신경질 나서. 신경질 났다는 것은, 이미 남편마저 내 해석의 장 속에 일개의 남편으로 머물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가 무슨 소리해도 어떤 의도로 했는지 다 안다. 귀찮다. 듣기 싫다.” 그 표현이 등 돌리고 안 보는 거예요. “여보, 왜 이래.” “저리 가라.” “여보.” “놓으세요.” 안 보지요. 왜 안 볼까요, 설명하려면 힘든데 가만 보니까 우리가 평소에 하는 행동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지요. 모세야, 네가 무슨 행동을 해도 나는 너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늘 엑서더스란 영화를 봤는데 이드로란 사람이 있어요. 이드로가 모세의 장인어른이죠. 그 장인어른 하에서 모세와 십보라가 혼인을 해요. 혼인을 하면서 혼인 멘트가 나옵니다. 서로 마주보면서 똑같이 혼인서약하면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사랑하게 하옵시고 당신이 알고 내가 모르는 그것에 대해서 내가 신뢰하게 하옵소서.
뭐냐 하면,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당신도 나를 모를 텐데 둘이 한 몸이 되었으니까 당신이 사랑한다면 나도 같이 얼마든지 사랑할 용의가 돼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내가 몰라도 되는 것, 당신이 나한테 알려주지 않는 당신의 과거가 어떠했든 간에 당신이 그 과거를 감추든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내가 당신이 과거를 감추며 신뢰하는 것처럼 나도 같이 신뢰하겠다는 뜻이에요. 당신이 입을 열고 싶지 않은 그 내용을 나도 캐묻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남자 다섯 명 사귀다 여섯 번째 사귀는 여자도 결혼할 만하죠. 결혼이란 이제는 당신의 과거 생활의 연장이 아니고 너, 나라는 개체가 우리 안에서 녹아져 사라져버린 거예요. 너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지고 우리로 나타나기 때문에. 너의 과거를 묻지 않고 나의 과거를 묻지 않고 이제는 우리로 통합되는, 통합되는 원리가 사랑이거든요.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나의 사랑으로 공통분모로 삼겠다는 겁니다. 그걸 적용시키게 되면, 만약에 결혼한 사람이 전처의 자식이 있다면 당신의 사랑을 나도 후처로서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그런 말도 되지요.
하여튼 이처럼 말이란 것은 그냥 점괘에요. 전혀 현실성이 없어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던가요? 말이란 그냥 말뿐이에요. 이 땅에 의미는 없어요. 다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아가씨가 웨딩드레스 입어보는 것처럼. 참 말이 어려운데 쉽게 그래요. 웨딩드레스에 맞추어야 돼요, 내 몸에 맞추어야 돼요? 처음에 입을 때는 내 몸에 맞는 웨딩드레스를 고르지만 그 집의 웨딩드레스가 고만고만해서 그게 전부라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돼요? 지가 살을 빼든지 찌든지 해서 웨딩드레스에 맞춰야 되겠지요. 세상에 통용하는 단어에 내가 맞춰야지 내게 맞는 단어를 새로 만들면 그건 사회에서 왕따 당합니다. 살 수가 없어요. 세상을 따라가 줘야 내가 밥 먹고 살 수 있어요.
구름기둥이 나오는데 이게 뭐냐 하면, 하늘나라의 기표, 하늘나라의 언어표현입니다. 회막이 있다면 구름기둥이 피어오릅니다. 우리는 나를 내 중심으로 봤기 때문에 구름기둥을 있다고 봐요. 처음에 한 강의 계속입니다. 있다가 존재지요. 저기 구름기둥 있네, 하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구름기둥을 있는 걸로 보지 않고 여기서 뭐가 튀어나오느냐 하면, 기능이 나와요.
예수님을 보면, 제가 어제 유튜브 동영상에서 한 건데,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 예를 들어서 꿈속에 예수님이 등장하면 그 예수는 우상이 돼버려요. 그래서 예수님이 만약에 다른 모습으로 나오면 다른 모습으로 나온 예수는 마귀가 돼버려요. 왜 전에처럼 안 생겼는데?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는 옛날 네 모습인 줄 아나? 달라졌는데.
예수님의 모습이 부활 전의 모습과 부활 후의 모습이 다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한데 나타날 때 전혀 몰랐습니다. 삼 년 동안 따라다녔는데 얼굴을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요.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이. 약 먹었습니까? 음주 측정했더니 만취수준이에요?
인간들이 예수님을 자기가 거울 앞에 서는 것처럼 존재의 동일성(라캉의 거울단계), 거울에 있는 자기와 동일시하면서 드디어 자아가 형성돼요. 6개월에서 12개월 이후에. 거울 속에 자기와 동일시되는 것처럼 인간은 자기처럼 생긴 사람한테 호감을 주는 겁니다. 자기한테 이질적이면 호감이 가질 않아요. 참 얼마나 그동안 인간들이 자기중심의 세계관을 그런 식으로 유사성과 인접성에 의해서 따로 구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여러분들이 꿈속에 혹시 마귀 나타나는 걸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아마 있을 거예요. 피곤했을 때 가위 눌릴 때 마귀 등장해요. 그런데 그 모습이 내가 싫어하는 모습일 거예요. 내가 싫어하는 모습은 졸지에 마귀가 돼요. 마귀가 나타나는 게 아니고 내가 싫어하는 다른 모습이 등장하는 거예요. 몸이 불편해서. 자고 있는데 팔이 꺾였다든지 무거운 걸 얹어보세요. 대번 꿈에 마귀 나타납니다. 안 돼, 하고 식은 땀 흘리며 깨보면 망치가 얹어있어요. 몸이 답답하면 꿈도 답답하게 돼있어요. 명언입니다. 사람은 자기와 닮지 아니하면 자기 원수로 간주해요.
이사야 53장에 누가 나를 믿었으리요? 누가 나를 믿겠느냐? 누가 메시아를 믿겠습니까? 자기 모습을 닮은 메시아를 사람들이 고대하는 그 공통점 속에 전혀 낯선 모습으로 왔을 때 누가 예수님을 영접하겠습니까? 영접 못하지요. 십자가에 달려서 흉측한 모습이 될 때 심지어 예수님의 마리아까지 포기하고 다 물러갔잖아요. 예수님을 알아준 사람은 딱 한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만을 예수님을 알아보고 다른 사람은 못 알아봤어요. 물론 예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알았지요. 백부장 같은 사람이 있었지만 소수고. 소수라도 지가 나서서 주님 이러시면 안 된다고 대신 희생할 입장은 안 되고요.
기능이란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네요. 오늘 강의에서 기능이라는 것. 왜 기능을 강조하느냐? 우리는 항상 뭘 원합니까? 나와 닮았으면 친구가 되고 내가 싫어하면 예수님이라도 나의 원수로, 상종 못할 위인으로 간주해요. 우리의 분류체제가 그래요. 왜냐하면 내 존재 우선이기 때문에.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존재가 우선이 아니고 기능이죠.
그렇다면 주님께서 모세를 사랑하는 겁니까, 주께서 보내신 구름기둥으로 모세를 이용한 거예요? 모세를 이용하는 거예요. 모세를 사랑했다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런데 모세가 실수 한 번 했다고 영원히 못 가게 만들어요. 그리고 모세뿐만 아니고 그 모세를 추종했던 애굽에서 나왔던 모든 사람을 40년을 뺑뺑이 돌게 해서 기어이 두 사람 빼놓고 다 죽여 버리죠. 유다지파의 갈렙과 에브라임지파 대표자 여호수아 빼놓고 다 죽여 버려요.
그리고 들어가는 민족은 홍해 이후, 홍해를 경험하지 않은 어린아이 그때부터 다 들어가요. 무슨 뜻일까요? 구세대와 새 세대를 구분한다는 뜻이잖아요. 그럼 구분하는 기준은 뭡니까? 그게 바로 모세였지요. 모세 못 들어가니까 같이 못 들어가지요. 정권이 바뀐 거예요. 김정일 추종했던 세력은 김정은 시대에 와서 숙청이 돼버리지요. 주님께서 모세 시대에 있던 사람들은 숙청해버립니다. 모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모세언약이 중요하니까. 모세에 젖었던 사람이 어느새 모세의 모든 기억들이 자기의 우상으로 자리 잡게 되는 거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란 바로 모세마저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예속되게 하는 겁니다. 물론 불기둥이란 밤이고, 낮에는 구름기둥이죠. 구름기둥으로 있다는 말은, 이 모임에 이 집단의 인도자는 오직 보이지 않는 분밖에 없다. 이걸 좀 설명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날씨가 추우니까.
보이지 않는 분을 믿어라. 참 난처한 이야기에요. 어렵지요. 그럼 말을 바꿔보겠습니다. 보이는 사람을 믿지 말라. 같은 말인데 둘 중에 어느 게 쉬워 보입니까? 보이는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게 쉬워 보이지요. 왜냐하면 많이 사기 당하고 주식 실패한 사람들, 친구한테 배신당한 사람들, 그리고 이혼한 사람들, 아멘이에요. 내가 사람 믿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자식도 못 믿겠다고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보이는 사람을 믿지 말라는 이게 쉬운 말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보인다고 간주한 해석을 내린 사람이 본인이잖아요. 그러니까 보이는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은 누굴 믿지 말라? 본인을 믿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래야 같은 말이 돼요.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분이 이스라엘과 동행한다는 말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나의 선택과 나의 결단과 나의 의지가 믿을만하지 못한 것을 계속 경험해야 될 그러한 행로로 갖게 돼요. 그게 불편한 여정, 이번 수련회 교재 제목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 번씩이나 모세한테 원망하게 되는 겁니다. 편하면 원망하겠습니까? 안 편하다는 이야기에요. 안 편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뭔가 일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만약에 내 뜻대로 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건 신앙에 큰 위기입니다. 내 뜻대로 되는데 예수 왜 믿어요? 믿을 필요가 없지요.
아버지 돈 잘 벌고, 엄마 돈 잘 버는데 아들이 왜 일해야 돼요? 돈 쓰기만 하면 되는데. 재벌 2세, 3세 행세하면서 여자들 만나면서 유흥가에서 돈 뿌리는 재미로 살면 되지 골치 아픈 경영학을 왜 공부해야 돼요. 할 필요 없어요. 아버지, 엄마가 돈 다 벌고 쓰기만 하면 되는데. 노골적으로 말은 안 하지만 이미 몸이, 아빠, 돈? 엄마, 차? 다 사주고. 해외여행? 다 보내주는데 일을 왜 해야 되는데. 너도 아르바이트해야지? 아르바이트하게 되면 자기 뜻대로 돼요, 안 돼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하는 말은 애굽에서 출애굽시켰다는 말은 결국 내 뜻대로 내 마음 먹은 대로 안 되는 곳으로 보내신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믿고 싶어도 내 힘으로 믿을 수 없는 분이 사시는 동네에 우리를 넣어주는 거예요. 그러면 늘 뭐가 깨져야 돼요? 내 믿음의 불실성과 내 믿음이 말도 안 되는 엉터리라는 것을 날마다 깨닫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그게 신앙이에요. 자기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내가 왜 그럴 능력이 없는가를 날마다 소급해서 깨닫게 되는 사람입니다. 내 힘으로 믿을 수 있는 대상이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을 늘 깨닫는 거예요.
그런 불신앙, 믿음 없는 우리를 날마다 주님이 계신 곳에 이끌어주시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고백하게 되면 그게 바로 신앙인이 되는 거예요. 믿는 자가 되는 겁니다. 믿는 자라는 내용 속에 뭐가 필요 요소로 들어가는 거예요? 믿지 못하는 내가 필수 요소로 들어갈 때 우리는 구원이란 내 일이 아니고 구원이란 주님의 일에 기능인으로 이미 합세가 된 상태로 돼있습니다.
주님이 구름기둥 앞에 서 있어요. 우리는 구경하고 있습니다. 이게 오늘 9절, 8절 말씀이에요. 모세와 이야기할 때 마치 친구처럼 이야기하고 그 덕분에 다른 사람도 마치 친구처럼 이야기하듯이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11절)
이럴 때 모든 사람은 뭘 안 봐요? 지금 모세가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그 순간에 자기 자신의 사적인 행동에 의미 두지 않지요. 내가 쌍꺼풀수술 잘 됐는지, 이것 생각 안 하지요. 내가 종기 낫는데 지금 종기가 문제가 아니고 죽으냐,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느냐, 그 문제에 종기 몇 개 있는지는 문제 거리도 안 돼요.
성령께서는 바로 우리 자신을 못 믿게 만드는 순간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영적전쟁의 기능인으로 사용했음을 수시로 확인시켜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옛날 세상의 모든 설계도가 되고 중심이 된 이스라엘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에 우리를 하나님께서 넣어주셔서 우리의 모든 행동이 사실은 세상의 모든 인간의 행동을 대변하고 있음을 주님 앞에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지 우리 뜻이 아닌 것을 다시 한 번 감격하면서 믿음으로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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