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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41205a 울산강의-출애굽기 33장 : 영적전쟁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141205a 울산강의-출애굽기 33장 : 영적전쟁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8)

20141205a 울산강의-출애굽기 33장 : 영적전쟁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3장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상당히 중요한 단어들이 나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다 중요하지요. 그 다음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대비되는 반대가 되는 지명이 나옵니다. 가나안 사람, 아모리 사람, 헷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 이 사람들은 땅을 중심으로 해서 누가 차지할 것인가? 대결상태에 있습니다. 서로 다투고 싸우게 될 입장이지요.

그렇다면 제가 방금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 주신 게 뭐냐 하면, 하늘과 땅을 잇는 밧줄로 생각하면 쉬습니다. 원래 땅에 펄쩍 뛴다고 하늘에 못 가거든요. 그러면 하늘에서 밧줄을 내려줘야 땅에 있는 사람이 하늘로 연결되는데 연결되는 것이 실제적인 밧줄이 아니고 언약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한 언약입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하늘에서 밧줄 내려오면 밧줄 붙들고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 오면 곱게 올라가면 이야기가 아주 간단할 것 같은데 밧줄 또는 하나님과 언약을 이룬 이것이 전쟁상태로 이뤄진다는 거예요. 전쟁상태로 이뤄지게 되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곱게 조용스럽게 그냥 구원받으면 된다. 이것을 함축해서 존재라고 할 수 있어요.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은혜 받아서 곱게 올라가는 거지요.

그런데 전쟁이 돼버리면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뭔가 어떤 일에 참여해서 구원되는 거예요. 곱게 구원되는 게 아니고 번잡스럽게. 기능인데 무슨 기능이냐 하면, 전쟁하는 기능이란 말이죠. 그냥 곱게 낚싯대로 당겨서 올려주면 되는데 구원이 어떤 상태냐 하면, 전쟁하는 그 와중이 구원상태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신약성경에서는 영적전쟁이라고 했어요.

영적전쟁을 쉽게 예를 들면, 만약에 이웃 집 사람과 소음 때문에 서로 다투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만약에 이사하게 되면 다툽니까, 안 다툽니까? 그 사람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지면 이사 간 집에 가서 싸움 계속하자고 할 필요 없는 거예요. 이젠 전쟁이 없잖아요. 그런데 그게 육적전쟁이에요. 눈에 안 띄고 내 곁에 안 붙어 있으면 전쟁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부부가 맨날 싸운다? 그러면 이혼하면 되지요. 그럼 부부가 아니니까 싸울 일이 없잖아요. 끝났지요. 이런 게 육적전쟁이에요. 인간이 이해하는 게 육적전쟁만 이해해요.

그런데 영적전쟁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건 죽을 때까지 계속 싸워야 돼요. 거리가 얼마나 떨어졌든지, 지금 내가 직업이 있든지 없든지, 가난하든 부하든, 내가 건강하든 몸이 아프든 상관없이, 아프다고 해서 영적전쟁에서 면제해주는 것 없습니다. 논산훈련소에선 아프면 면제가 되지만 영적전쟁에는 면제라는 게 없어요. 그리고 날씨가 추워서, 이런 것도 필요 없어요. 날씨 추운 것도, 인원수 적은 것도 필요 없어요. 영적전쟁은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하는 것처럼 주께서 영적전쟁을 계속 하기 때문에 상황 없이 그냥 상황 핑계 대지 않고 계속 영적전쟁을 하게 돼있습니다.

정리해봅시다. 구원받은 사람은 존재로 곱게 구원받는 건 아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정말 구원에 들어간 사람은 곱게 구원해달라는 자기 이기주의적인 안목의 구원관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가? 구원이 되었으면, “주여, 영적전쟁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돼야 됩니다. 만약에 육적전쟁이 돼버리면 우리의 기도내용도 육적전쟁에 맞추어서 기도하게 마련이에요.

이 문제 해결해주시면 주께 감사하겠습니다. 저 문제 해결해주시기 바랍니다. 일하고 싶은데 몸이 연약해서 못하는데 건강케 해주시면 주의 일 하겠습니다. 이런 기도의 내용이 나오는 주의 일은 고상해보이지만 사실은 육적전쟁에 불과한 겁니다. 영적전쟁은 몸 아프고 그런 형편이 되고 안 되고는 전혀 핑계에 해당되는 사항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영적전쟁을 해야 되겠네, 라고 나오신다면 저는 말리고 싶습니다. 영적전쟁은 우리가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영적전쟁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영적전쟁은 우리가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고가 아니고 하는 그럴 입장이 못 돼요. 영적전쟁은 그냥 상황 속에 놓여있으면 주께서 일하시는 현장에 같이 일을 하게끔 돼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면 우리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미 영적전쟁에 돌입돼있습니다.

아버지가 문방구 주인이면 얘는 어릴 때부터 문방구 점원 노릇 알아서 다 하게 돼있어요. 가정환경이 문방구기 때문에 친구들 다 전도해서 자기 집 물건 사도록 하고 옆집에 안 가도록 알아서 다 전도하게 돼있어요. 우리 집에 오면 10% 깎아줄게, 하면서. 아버지 잘못 만나서 그런 거예요. 잘 만났는지 잘못 만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다 하게 돼있어요. 아버지가 목사면 아들은 반주하게 돼있고. 다 하게 돼있어요. 환경이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 주님이 영적전쟁하고 있다면 우리가 할까요, 말까요? 그러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게 오늘 본문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아까 밧줄이라 표현했는데, 영적전쟁을 유발하는 밧줄이 오게 되면 그게 우리가 싫든 좋든 우리 앞에 적들이 나오는데 그 적은 우리 육의 대적이 아니고 주님의 영적전쟁의 원수들만 만나게끔 그렇게 돼있어요. 우리가 너와 안 맞아. 너와 안 놀 거야, 라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냥 우리한테 닥쳐오는 것이 영적전쟁의 상대방, 싸워야 될 대상들이 항상 주변에 파도처럼 늘 밀려오게 돼있습니다.

육적으로 해결하게 되면 안 보면 그만이고, 좋게 그야말로 세상적으로 말해서 술 한 잔하면 풀리게 돼있고, 떡 한 번 해줘서 사과하면 좋은 관계가 되겠는데 그건 육적전쟁이고. 친하게 지내자고 악수하고 선물 갖다 주고 마음 풀어지게 되면, 그 다음부터 원수였던 사람이 서로 상부상조 도와준다. 이게 가능하면 육적전쟁하신 거예요. 영적전쟁은 달랜다고, 선물 사준다고해서, 내 쪽에서 사과한다고 그쪽 마음이 풀어지는 그런 성질이 아닙니다. 영적전쟁은.

그러니까 개한테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거예요. 개한테 진주를 던지면서 얼마나 교육시켜야 개가, 이제는 보석이 귀한 줄 알겠다고 고개 끄덕이겠습니까? 개는 아무리 사료 많이 주고 예뻐해 줘도 개는 진주를 못 알아보게 돼있어요. 차라리 사료가 더 좋지 진주를 사료 통에 넣어주면 화냅니다.

돌 잔치할 때 돈을 쥐라고 엄마가 옆에서 엉뚱한 것 쥐니까 성경책 쥐지 않게 하겠지만 육적전쟁에서는 어떻게 전쟁에서 벗어나서 해소될 그런 기회는 우리한테는 두 번 다시없습니다. 오히려 없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존재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기능인의 자격이 되었다는 자체가 이미 구원에 둘러싸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정리해봅시다. 영적전쟁은 우리가 시작한다고 할 문제가 아니고 좋든 싫든 우리는 그 상황 속에 놓여있다고 정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파악할 게 있어요. 적이 누굽니까? 그리고 내가 전쟁할 때 어떤 자세로 임해야 되는가? 영적전쟁에서 내가 갖추어야 될 마음자질과 성품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런 문제가 생기겠지요. 출애굽이니까 출애굽 식으로 제가 이제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난해한 내용이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하도록 애를 써보겠습니다.

출애굽에서 적이 있어요. 출애굽이니까 애굽이 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어요. 출애굽할 때 애굽의 군사들이 따라 나올 수 있습니까? 합류가 있어요, 없어요? 합류가 안 되지요. 그걸 갈라놓는 것이 홍해의 갈라짐입니다. 그 이전에 어린양 잡는 것도 있지만. 홍해가 갈라졌다는 말은, 그리고 홍해에서 분명히 빠져 죽은 자들이 있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의 군대가 빠져 죽었습니다.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이 사람들은 갈 수 있으되 너희들은 어떤 경우라도 올 수 없는 곳에 이들이 가는 거예요. 히브리인들이 가는 겁니다.

그걸 육적인 애굽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걔들은 가기는 가는데 우리가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에 간다는 생각을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에게 언급을 하셨다고 보시면 되는 거예요. 이 말이 제가 천천하면서도 어려운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상상할 수 없는 게 없어요. 다 상상할 수 있어요. 천국, 지옥, 다 상상할 수 있어요. 인간이 상상할 없는 건 없습니다. 뭐든지 상상해요. 은하계? 그 바깥도 상상합니다. 안드로메다? 그 바깥도 상상합니다. 그게 현대물리학이고 현대천문학이에요.

이 우주 말고 다른 우주가 있어서 샌드위치처럼 충돌하게 되면 여기서 중력이 생기는데 그게 평행우주론이라는 게 있어요. 이건 상상할 수 있는 거예요. 수학적으로 11차원까지 갑니다. 4차원, 5차원이 아니고 11차원도 생각할 수 있는 게 인간의 상상력입니다. 아마 11차원 나오면 12차원, 15차원 막 나올 건데. 인간의 상상력은 한계가 없습니다. 이게 신처럼 돼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어요.

심지어 저 어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얘야, 천지는 하나님이 만드셨단다.” “엄마,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데?” 보세요. 천지를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느냐 말이죠. 얘가 모르는 게 있지요. 뭐냐? 만든다는 것은, 만들어진 사람한테는 만든다는 개념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지요. 그렇지요. 만들어진 자가 내가 있기 전에 만들었던 그 취지를 만들어진 나는 몰라요. 왜? 이미 만들어진 상태에서 소급해서 들어가기 때문에 내가 없을 때 상황을 인간은 체험을 못하잖아요.

예를 들어서 “엄마, 내가 어릴 때 애 먹여서 고생 많이 했지?” “그래. 고생 많이 했어.” “그러면 엄마 고생한 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데? 알게 되면 효도하고 싶은데.” “너는 백날 해도 알지 못해.” 그런데 기껏 이야기하는 것이, “너도 나중에 아기 낳으면 알아.” 알기는 개코나 알아. 시대가 바뀌었는데. 옛날 난방시설도 없었을 때 얘 키우는 것과 지금 뜨뜻한데서 키우는 것과 같은 질인가요? 아니지요. 너도 나중에 어른 되면 알리라. 이건 유주용이 불렀던 <부모>란 노래에 있어요. 너도 커서 어른 되면 부모의 심정을 알리라. 모릅니다. 알 수가 없어요. 동일 인물이 아니거든요. 자식이나 부모가 같은 인물이 아닙니다.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시 해봅시다. 애굽 사람들은 홍해를 통해서 현재 히브리인들에게 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다면 그들의 종교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도 있지요. 여기서 출발합시다. 갈 수가 없으면서 갈 수 없는 주제에 그들이 만드는 천국은 뭐냐 이 말입니다. 중요합니다. 왜 이게 중요하냐 하면, 천국을 가지도 못하면서 히브리인들 따라 가지도 못하면서 뭔가 그 사람들이, 우리가 미래에 죽으면 이런 나라에 갈 걸, 라고 예상하겠지요. 그 예상은 실제로 될 수 있어요? 실제로 안 되지요. 왜? 밧줄이 없으니까. 아까 언약이 없으니까.

언약 때문에 홍해 갈라졌고, 언약 때문에 히브리인들만 빠져나가고 이들은 참석 못했잖아요. 이쪽이 서울이라 합시다. 이 사람들은 서울구경도 못하고 가본 적도 없지요. 그러면서도 서울을 상상할 수, 용어상 개념상 서울이란 게 있는데 이렇게 생겼다고 지어낼 수는 있겠지요. 지어내봤자 그건 100% 가짜겠지요. 그 가짜를 우리가 생각해봐야 돼요. 왜 그렇게 해야 됩니까? 영적전쟁에서 하나님의 원수가 누군지 파악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면 돼요. 예수님도 모르고 성령도 받아본 적도 없으면서 맨날 입만 떼면 천국이고, 입만 떼면 예수고, 입만 떼면 복음이고, 입만 떼면 십자가고, 입만 떼면 성령일 때 그 사람이 우리 편일까요, 적일까요? 적이지요. 상상할 수 있다니까요. 성경에 용어들이 있잖아요. 이 용어들로 얼마든지 만들어서 소설 한 권 만들 수 있습니다. 시나리오 짤 수 있어요. 간증 집회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방이고 모든 행동은 모방에서 나오니까 모방할 수 있거든요.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뭐든 상상이 되니까. 그리고 그 상상을 다른 사람이 쉽게 받아줘요. 왜? 같은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저 사람이 상상한 것을 자기 마음대로 또 편집해서 상상해요. 그 사람의 본심과 상관없이 상상한 단어로 또 다시 상상을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언어세계고 언어세계는 바로 기표의 연쇄 고리, 기표의 집합입니다. 아쉽지만 이걸 이번 수련회 초반에 할 거예요.

의미는 없습니다. 어떤 것도 의미는 없어요. 단어, 이것 맞나? 마치 아가씨들이 결혼 앞두고 웨딩드레스 입어보는 것과 같아요. 아가씨들이 웨딩드레스 입어볼 때 맞는 웨딩드레스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것 입어보고, 저것 입어보지요. 그게 바로 기표, 언어의 표현이에요. 의미는 뭐냐? 몸뚱아리, 결혼할 자기가 의미가 돼요. 그런데 의미에 맞는 단어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뭔가 이것도 아닌 것 같고. 얼추 비슷한데 아니야, 아니야.

여러분들이 이걸 편하게 사용하니까 우리가 쉽게, 쉽게 넘어가는데 쉬운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아내한테 아부한다고, “여보, (목소리 깔고)사랑해!” “아니야. 사랑? 그 느낌 아니야.” “그러면 사랑*사랑.” “아니야. 왜 그렇게 느낌이 안 살지.” “그럼 사랑하고 예뻐하고 너무 좋아해.” “아니, 아니야. 그 느낌 아니야.” 뭔가 단어를 처바르긴 했는데 자꾸 사랑, 곱하기, 곱하기해도 그 느낌이 아니라니까. 딱 맞는 웨딩드레스가 없어요. 이것 입어보니까 저게 예뻐 보이고. 저것 입어보니까 이게 예뻐 보이고. 저것 입어보니까 체형이 안 맞고, 체형에 맞으면 너무 터졌고, 너무 터져서 가리면 또 안 맞고.

남자친구는 웨딩드레스부터 벌써 부부 싸움이 시작되어 짜증내면서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냥 대충 걸쳐라.” “평생에 유일한 젊을 때 사진인데 그걸 왜 대충해.” “다른 데 가자.” 다른 데 가도 소용없어. 벌써 스물네 번 갈아입었는데 뭘 또 해요. 여자들 백화점에서 기본 세 시간인데 남자는 기본 5분입니다. 그냥 우리가 맞춰 사는 게 좋아요.

그래서 인생은 우리가 의미에 합당한 단어를 찾는 것이 아니고 유행되는 단어에 우리가 맞춰나갑니다. 젊은 얘들이 신종어 사용하잖아요. 처음에 우리가 나무라잖아요. 몇 년 지나면 우리가 그 단어를 사용해요. 아이고, 더러워. 우리가 맞춰야 돼요. 직접 구매하는 걸 ‘직구’, 어디 야구합니까? 이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느새 다 사용하고 있어요. 이게 기표의 세상, 욕망의 세상.

애굽은 상상합니다. 그 상상한 애굽 나라의 상상한 종교가 뭐냐? 출애굽이 신들의 전쟁이거든요. 여호와와 애굽의 신들의 전쟁입니다. 거기서 나온 게 점괘입니다. 우리가 새순교회에서 출애굽기를 했는데 하면서 제가 약간 염려되는 게 있어요. 하고 지나가면 뒤에 것을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뭔가 차곡차곡 한 것을 밑에 깔아두고 누적되어 가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타이밍이 왔다고 생각하는데요.

애굽의 신과 전쟁할 때 애굽의 종교는 뭘 내세우고 여호와는 뭘 내세웁니까? 단답식으로 이야기하라면 저쪽은 점괘를 내세워요. 이쪽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룹니다. 그러면 점괘는 뭐냐 하면, 미리 당겨서 알겠다는 거고, 여호와의 언약은 너는 모른다는 거예요. 왜 모르느냐 하면 전쟁을 해야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어렵지요. 처음으로 돌아갈까요?

우리는 구원을 존재가 곱게 하늘나라로 가기를 원합니다. 아무 탈 없이 현재 이 상태로 가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상태, 안 받아줍니다. 만약에 우리 상태를 그냥 받아주면 애굽이 상상한 그 천국에 가게 돼요. 내가 이렇게 있는데 나중에 하늘나라 가면 금 면류관 쓰고 나는 기분 째지겠지. 거기서 영원히 살게 되면 거기는 맛있는 것도 많고 생명나무도 있으니까 헤엄치며 놀겠지. 그러면 기분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그러면 내가 행복하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미리 당겨서 예상이 되는 겁니다.

뭐가 빠졌습니까? 영적전쟁의 기능이 빠졌어요. 우리는 기능을 빼버리고 존재로, 결국은 성급하게 존재로 나가서 곱게 구원받는 것, 그걸 원합니다. 그러나 전쟁 가운데서 우리의 상상력이 점괘가 산산조각 찢어집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율법이 보면, 누굴 살려두지 말라는 거예요? 박수무당, 점치는 사람들 살려두지 말고 죽여라.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출애굽기 율법에 보면 사람은 왜 그렇게 흔하게 죽이는지. 부모한테 욕했다고 죽여 버리고, 자식이 말 안 듣거든 돌로 쳐 죽이라 하고. 안 죽고 살아남는 것이 다행일 정도로. 안식일 어기거든 죽여 버려라.

결국 율법에서 죽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네가 살았다 해도 율법으로는 죽은 존재라고 아예 전제로 깔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우리는 살았다고 생각하잖아요. 율법, 하나님 말씀, 하나님 복음의 통 안에 들어있지 않으면 살아도 산 존재가 아닙니다. 죽은 존재입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죽은 존재에요. 요한복음 3장에서는 그걸 저주받았다 하고 그 사람이 어디 가도 저주받아요.

출애굽에서 이스라엘 나라는 어디 가도 항상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어디 가도 저주가 함께 있어요. 아파트 새로 사도 저주가 함께 있을 거예요. 인테리어 새로 해도 저주스런 인테리어에요. 그걸 영화로 찍으면 새로 인테리어 한 타일 사이에서 붉은 피가 내려오고, 밤 되면 소복 입은 아줌마가 머리 풀고 울고 있고, 새벽 두 시에는 동자 하나가 눈 시커멓게 해서 허옇게 나타나고.

국회의원 선거에 들어가면 점봅니다. 국회의원들이, 장관들이 점 본다고요. 그게 애굽 종교입니다. 출애굽할 때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살았지요. 그러면 온 몸에 애굽 종교로 감겨있는 겁니다. 점괘를 보는 이유가 뭐냐? 여러분은 노골적으로 점괘를 안 보잖아요. 그런데 과객이 지나가다가 아줌마 운수가 되게 나쁘네, 한 마디 듣고 나면 하루 종일 기분 좋습니까? 안 그러면 뭐지? 봉투 돈 들고 찾아가야 돼? 우리 얘 조심해야 되겠네. 오늘 일진이 안 좋은가? 갑자기 불안하지요.

그래서 우리 몸 자체가 점괘로 십자가 언약, 복음, 성령, 뭔가 기표, 언어의 문자적 표현을 백날 거기다 뒤집어 씌워보세요. 속에는 점괘만 기다리는데. “목사님, 오년 뒤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어서 미치겠어. “우리 얘 이름 지어주세요. 이름 잘 지으면 십 년을 보장하고 이십 년을 보장하기 때문에 목사님이 지어줘야 됩니다.” 또 어떤 교회에 가면 저한테 안수해달라고 해서 안수해주고. 이도저도 성에 안 차면 철야하고 방언 좀 해야 안심이 돼요. 그게 너무 무당 같으면 점잖은 쪽은 세례라고 물 좀 바르고 성만찬 좀 해야 안심이 되고 뭔가 신자 같기도 하고.

그 성만찬, 세례식, 방언, 축복에 안수, 결국 이 모든 것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종교지요. 그러니까 이건 홍해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애굽의 종교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적전쟁에서 원수가 되는 겁니다. 원수, 원수 하지만 가만 보니까 누가 원수에요? 우리 자신이 원수가 돼있지요.

점괘종교의 실내용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나를 위하여. 십계명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게 나 외에 다른 섬기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 다음에 궁금한 게 다른 신이 뭐지, 하잖아요. 다른 신이 뭐냐 하면, 너를 위하여 형상을 만들지 말라, 2계명,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3계명 나오는데 그런 내용을 품고 다시 1계명을 찾아가봅시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은 결국은 뭐예요? 나를 네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자신은 범죄 해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 내침을 당한 나 자신에게 동정심과 애정과 애착과 미련을 가져버리면 누가 질투해요? 우리를 내치신 하나님이 질투를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 종교입니다. 무섭지요. 정말 겁나지요.

한 틈 쉬어갑시다. 전부 다 그동안 사기적으로 신앙 생활했어요.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내친 그 존재를 같이 우리가 내치면 되는데 그놈의 미련 때문에, 애정 때문에 내친 내가 나를 동정하고 어쨌든 그걸 살려서 나왔던 에덴동산, 그 천국에 하나님 계신 곳에 집어넣어보려고 사교육 등 온갖 것 다해서 기어이 엉덩이 들이밀어서 천국 가려고 그렇게 애를 쓰면서, 십자가 알까요, 언약 알까요, 복음을 공부하면 됩니까, 성령 받으면 되겠어요? 온갖 아이디어는 다 집어넣는데 그것이 결국은 주님 좋으라고 있는 게 아니고 나 좋으라고 있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우리 구원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까? 우리 구원 여기서 끝났네요, 라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을 잊으신 겁니다. 영적전쟁은 누가 시작한다 했어요? 우리가 시작하지 않고 주님이 시작하지요. 뭐로 시작합니까? 언약으로 시작하지요. 언약이 오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가 나타나지요. 그러면 이런 모든 작업에 우리가 원치 않게 이미 우리는 말려들었지요. 그러면 우리는 내 존재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주께서 하시는 일에 말려든 겁니다.

그들이 바로 현재 출애굽기 33장에 나온 히브리 사람들이에요. 홍해 건넌 게 모세 아이디어였습니까? 아니지요. 하나님 아이디어였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모세보다 앞서가셔요. 여러분보다 앞서가신 어떤 분이 계셔요? 이제 그걸 말씀드리겠어요. 모세가 하나님이 자기보다 앞선 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눈에 보입니까? <엑소더스>란 영화가 개봉했는데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로 나타나요. 저는 이걸 줄거리를 쓰면서 ‘꼬마’라고 했어요. 성경에 없는 소리를 영화에서 하고 있단 말이죠. 아마 영화감독은, 네가 어린아이처럼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걸 의미해서 그리 했는지.

어쨌든 간에 주님이 앞서간다는 것을 모세가 어떻게 알았어요? 시력이 2.0이라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앞서간다는 게 나오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생각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기본에 속하는데. 모세가 신앙이 좋아서 알아봤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는 지 마음대로 살아요. 막 살았어요. 모세가 알고 있어요. 자기와 함께 하나님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행동, 어떤 결정을 해도 주께서는 가만 두지 않고 키로 방향조정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걸 느끼는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을 본다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 수증기를 본다? 이것도 어렵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를 본다? 옛날 아리스토텔레스는 진공은 없다고 했어요. 이건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하여튼 눈에 보이는 것만 했어요. 소리가 어떻게 전달되는지 몰랐어요. 소리는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현대과학은 그걸 밝혀냈지만 공기가 있고 질소가 74% 있는데.

옛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본 거예요. 모세도 마찬가지이에요. 여기 있으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겠는데 없잖아요.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있느냐 말이에요. 모세는 항상 자기 결정과 자기 의지대로 해요. 해놓고 항상 얻어터질 준비가 돼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모세가 주춤주춤 자기 선택과 의지를 포기할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의지와 자기 선택을 포기할 위인들이 아니에요.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그걸 이겨보겠다고 달랑달랑 번화가에서 두부 종을 흔들어대는 구세군 냄비에 돈을 넣게 되면 돈을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그게 화근이 되어 “주님, 보이지요. 이만 원 넣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주 내로 사만 원 내지 곱빼기 십만 원은 채워주셔야 그 다음에 또 할 보람을 느끼겠습니다.” 항상 뭔가 선한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빠져있는 빈 자리는 추가적인 30배, 60배, 100배, 흔히 나오는 그걸로 채워질 때 자기가 신앙인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인간이에요. 인간은 손해 볼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돈을 사랑 안 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이 돈을 언제 사랑하지 않는 순간이냐 하면, 자기가 있는 상황이 낯설게 느껴질 때 어렵지만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낯설게 느껴지게 되면 자기 존재가 여기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은 어떤 존재가 되게 되면 그 존재에서 어떤 세계관을 만들면 이 세계는 항상 내 존재를 확인해줄 수 있는 세계관이 되는 겁니다.

“미국 이렇게 좋네. 그런데 집에 가고 싶다.” 보세요. 미국 가도 무슨 생각해요? 집을 생각해요. 보일러 불은 잘 들어가고 있는지. 집 생각할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계관은 아무리 내가 먼 곳에 왔다 할지라도 나를 일단 의식하고 나한테 참 좋은 구경이었다. 이것은 예상되는 세계입니다. 점괘의 세상이에요. 애굽 종교에요. 나를 빠지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앞서가시는 세계는 어떤 세계냐 하면, 우리 점괘로 예상 안 되는 낯선 곳으로 가는 거예요.

홍해에 섰을 때 홍해가 갈라져서 길이 나온다는 생각은 모세를 비롯한 사십 만 대군 어느 누구도 뒤따라오는 애굽 군대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낯선 세계에 들어가면 뭐가 부끄러워요? 나를 위해서 한 그것이 너무나 무가치하고 정말 추잡스럽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꼼수를 썼다는 것이 후회될 정도로 낯선 세계에서는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 짧은 순간만큼은. 짧은 순간을 강조해야 돼요.

얘가 수학시험을 쳤는데 분명히 얘는 수학을 너무 못하기 때문에 기껏해야 50~60점밖에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수학 100점 맞아서 전교 일등 했어, 라고 한다면, 그 얘가 오기 30분 전에 물세 오천 원 더 나온 것이 문제가 될까요? 그건 문제도 안 되지요. 물세 오천 원 더 나온 것이 예상 밖의 기쁜 소식 앞에서는 그게 아무 의미 없지요.

내가 용서받았다는 이 사실 앞에서 집에 불이 나고 내 몸이 5도 화상을 입어도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자비의 그릇, 사랑의 그릇으로 만들었다는 이 사실 앞에서 5도 전신화상 입은 그것조차도 사랑의 그릇으로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상숭배 아니에요. 낯선 세계에요.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돈을 준 게 아니고 취직자리 준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가정화목 준 게 아니고 자기 생명을 줬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내 생명에 대한 미련이 일시에 날아가 버려요. 도대체 내가 한 평생 무슨 짓을 하고 살아가는 거야. 내가 신경 쓰는 것이 머리 잘 나왔는지, 화장 잘 됐는지, 되도 않는 이런데 신경 쓴 거예요. 주님은 생명을 줬는데.

오늘 본문을 33장 4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황송한 말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다음에 뭡니까? 단장하지 않았다. 화장품을 사용하지 않은 거예요. 이건 뭡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섬길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집어넣은 기능인이 되고 난 뒤에 자기 존재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을 안 쓴 겁니다. 순간적으로 내가 얼마나 예쁠까 신경을 안 쓰는 거예요. 이 낯선 상황은 애굽 사람들이 자기 종교로 점괘로 예상한 상황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면 목사님,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져야 우리가 바로 이 시대에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앞서간다고 할 수 있는데 왜 우리는 매일같이 이런 상황, 나를 잊어버리는 상황이 안 생기지요? 낯설게 된다든지 수학 50점 맞던 얘가 100점 맞는 그런 좋은 일이 왜 안 생깁니까?” 그런 일이 생기려면 우선 얘가 수학 50점 맞아야 돼요. 그런데 얘가 맨날 수학 100점 맞으면 그런 일 안 생기거든요. 남편이 바람을 피워야 돼요. 그러다가 잘못했다고 해야 낯선 새로운 상황에 감격하여 당신을 용서한다고 눈물 흘리고 그럴 텐데 남편이 너무 반듯해. 하자가 없어. 하자가 없다보니 가정에 기쁨이 없네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왜 부부 싸움하는지 아십니까? 부부 싸움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둘 다 나쁜 짓을 안 했기 때문에 부부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왜? 둘 다 정당하니까. 둘 다 너무 반듯하게 살았어. 평생 동안. 크게 흠 잡을 데 없이 살았기 때문에 항상 큰 소리쳐요. 가정에서. “이것도 밥이가?” 이런 식으로. “이것도 월급이가?” 왜냐하면 자기가 잘못한 게 없는기라. 아무리 회개하려고 해도 회개할 게 있어야지. 너무너무 반듯하게 잘 살아왔기 때문에. 특히 새순교회 교인들은 얼마나 반듯하게 살았겠습니까? 목사님 본받아서. 그런데 행복하질 않아.

도대체 무슨 이게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폭이 큰 기쁨의 폭발이 없는 거예요. 원래 잘난 존재기 때문에 원래 행복해야 되고 원래 편안해야 되고 원래 나는 이 정도 대우받아야 정당하다고 그렇게 마음이 높아졌거든요. 마음이 낮아지질 않았기 때문에. 우리 얘는 원래 수학 100점이라 거기에 뭘 더 추가해.

아까 이야기 다시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앞서간다는 걸 모세가 어떻게 알았느냐? 그걸 이야기해볼게요. 모세도 애굽 사람입니다. 항상 예상해요. 예상만 하는 게 아닙니다. 예상을 고려해서 결정하고 결단을 내립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할 때 지시대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그런 인간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지시는 하나님의 언어체계, 하나님의 언어체계니까 쉬운 말로 마음,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지시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걸 해석하는 해석자는 어디에서 통용되고 있느냐 하면, 같은 죄인들끼리 통용되는 언어를 사용해요. 언어를 사용할 때 골라잡아 사용하잖아요. 언어를 골라잡아 사용할 때 자기의 본심이 실리겠지요. 내가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앞뒤 문맥에 맞추어서 내 심정, 본심은 이렇다고 고집한 거예요. 그 심정을 순간적으로 문장으로 만들어서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지시가 와도 해석은 누가 해요? 본인이 하는 거예요. 본인이 해석해서 결정하니까 이것이 주님의 본심이겠습니까? 터무니없지요. 이것은 완전히 애굽의 점괘라니까요. 이렇게 지시대로 할 테니까 그렇다면 이런 복을 주시겠습니까? 뒤에 붙는 (이런 복을 주시겠습니까?) 이건 항상 괄호 쳐요. 그건 안 들켜요. 누가 기복신앙이라고 째려볼까 싶어서. 아아, 요거 시선.

그래서 우리교회는 오후에 기도 안 하려고 해요. 기도 잘해도 문제야. 기도 똑똑히 하면 믿음 별로 없네. 무슨 소리가 전 세계로 울려 퍼질까 겁이 나서 차라리 아예 기도의 기표를 사용하지 않는 거예요. 왜 하지 않을까요? 미리 예상하기 때문에. 미리 예상한다는 것은 뭐라 했습니까? 애굽의 종교, 점괘를 봐서 기도를 했다가는 오늘 일진이 안 좋다 싶을 때는 미리 쳐보는 겁니다.

새순교회는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다 같이 기도를 못하면 아주 거리낌 없이 기도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기도는 할 줄 모르면서 기도 비평은 한껏 높아져 있으면 막상 지가 기도하게 되면 뒷담화 들을 게 뻔하기 때문에 겁나서 못하는 겁니다.

모세로 하여금 맡겨요. 하나님께서 모세야. 네 뜻대로 네 해석대로 해봐라. 해보면 거기서 뭐가 드러납니까? 불평불만이 나오지요. 그것을 네 선에서 해결해봐라. 해결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안 될 때 주님께서 그들을 새롭게 낯설게 해버리면 어떻습니까? 알아서 몸단장 안 하게 하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똑같은 인간인 모세를 믿겠습니까, 인간은 아니면서도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분을 믿겠습니까? 그분을 믿겠지요. 그게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오늘 낮에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질문을 했어요. 아주 상당히 민감한 질문인데 그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에요. 목사님은 막 살라고 했는데 성경에는 말씀대로 살라고 돼있는데 이게 틀리지 않습니까? 답변하세요. 성경에는 지키라고 돼있는데 왜 목사님은 막 살라고 했습니까? 목사님 설교와 본문 자체가 다르다면 어떻게 목사님을 해명하시겠습니까? 지우지 못하도록 공개적으로 한 겁니다.

제가 답변하기를 그 말씀이 우리가 지키면 된다는 그 지킴이 바로 막 살기입니다. 자기 해석이 옳다고 생각하고 해버리는 거예요. 구세군에 냄비에 돈 던지면 그건 돈을 사랑함이 아니라고 지 마음대로 해석한 거예요. 그럴 때마다 십자가의 용서가 다 빠져나오겠지요. 그게 마귀의 전략입니다. 그러면 성경말씀은 누가 지킵니까?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성령님께서 앞서가셔서 그 말씀을 지켜서 지킨 것도 없는 우리에게 지킨 그 혜택을 천국을 우리한테 공짜로 줄 때에 우리는 누구 공로로 돌리겠습니까? 자기 공로가 아닌 주님만의 공로지요.

그래서 제가 막 산다는 것은 뭘 의미합니까? 인간이 애굽의 점괘, 다시 말해서 이 말씀 지키면 이것 주겠지요, 라고 생각하면서 어쩔 수 없이 육적인 요소를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그 모든 것, 성실하게 지키는 모든 것이 막 살기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41205a 울산강의.hwp (52.5K), Down: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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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81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