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141114a,b(기쁨의 폭발)―이 근호 목사
서울 의존교회141114a,b(기쁨의 폭발)―이 근호 목사
이름 : 김창길(IP:180.150.194.146)
서울 의존교회141114a (기쁨의 폭발)―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5장 1절 할 차례입니다.
딤전 5: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하고
딤전 5:2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
딤전 5:3 참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여기서 나오는 늙은이 젊은이 할 때 여러분들이 사도 바울의 편지하고 예수님의 뜻하고 일치된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사도 바울의 뜻이 또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까? 일치될까요? 다를까요? 일치되는 겁니다. 따라서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새로운 형제, 새로운 가장을 설명할 때는 순서가 이래요. 예수님께서 자기 가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먼저 생각해 봐야 됩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인데 로마서에서 이야기하기를 가족이란 혈육에 속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그 혈육 자체가 둘로 나눠집니다. 둘로 나뉘어졌다고 했는데 저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서 두 노선으로 나뉘어졌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성경 로마서를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하나는 사라, 또 하나는 하갈로 이렇게 나뉘어졌잖아요? 나뉘어졌을 때 이 사라와 아브라함의 관계가 그냥 혈육적인 애기만 낳는, 아내를 임신해서 자식만 낳는 그런 일상적인 아버지의 관계이냐 아니면 아브라함이 품고 있는 어떤 다른 놀라운 뜻이 따로 있느냐 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거든요.
베드로전서에 보면 아브라함을 뭐라 했느냐 하면 놀라운 이야기가 있어요. 베드로전서 3장 6절에 의해서 보면 사라가 그냥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니고 아브라함의 종이 되죠.
벧전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그리고 아브라함을 뭐라고 칭합니까? 주님이라고 합니다. 그냥 보통 부부가 아닙니다. 특수한 부부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특수성이 있는데 저는 이것을 여기서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떠야한다. 경상도는 단술이라고 하는데 식혜에 잣을 넣으면 뜨지요. 물에 뜨듯이 뭔가 뜬다 이 말이죠. 일상적인 혈육관계에서 뭔가 울어 나오는 게 있어요. 뭔가 떠야 되어 있어요. 뜨게 되면 어떻게 되게 되느냐 하면 육은 육대로 이해하고 영은 영대로 이해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자기 가족을 버리는 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똑같이 사는데 뭔가 식혜 위에 잣처럼 뜨는 게 있어요. 같은 인생을 사는데 뭔가 달라요. 뭔가 다른 구석이 떠오르는 게 있어요. 떠 올라오는 게 있어야 된다 말이죠. 왜 그러느냐, 바로 성경 자체가 그런 모델을 제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고 그러면 믿는 자라면 아브라함처럼 그런 현상이 일어나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자기 가족을 통해서 일반적인 가족 말고 그 외에 이상하게 기이한 현상이 새로운 관계가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떠오르는 것이라고 했는데 떠오르는 이것을 떠오르는 새로운 어떤 관계가 있어야 됩니다. 관계가 있어야 된다면 사라는 그 당시에 누구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까? 사라는 베드로전서 3장 6절에 보면 자기 남편을 가지고 뭐라 했다고 했죠? 주라고 했죠. 그러면 이 베드로전서에서 언급하는 것은 오늘날 교인들아, 너희들은 누구 때문에 구원받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우리는 누구 때문에 구원받습니까? 주님 때문에 구원받죠. 이것을 뭐라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 하면 이것을 중보자가 작용하는 실제적인 현실이라 보면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지금 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추려보면 여러분들이 사시면서 무엇이 나와야 되느냐 하면 중보자가 나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 그러한 증거나 그런 효력들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야 되는 겁니다. 내 행동? 아니에요. 내 태도? 아니고 나의 있다는 이 자리, 관계를 통해서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여기 있어서 착한 일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 있다는 자체가 누구를 어떤 특이한 관계, 떠오르는 관계에 의해서 내가 여기에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는 그런 관계성을 내놔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 관계성이 비춰져야 돼요.
우리는 그냥 교회 나와 성경공부하고 성경 지식을 알게 되면 그 지식이 나를 구원한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나는 그대로 있고 지식만 더 추가 될 뿐이죠. 그게 아니고 내가 소유한 지식 말고 내가 지식을 얻기 이전에 나로 하여금 뭔가 떠오르게 하는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그 무엇이 있다 말입니다. 그 무엇은 내가 뭘 행하기도 전에 주께서 이전부터 나한테 효과와 효력과 능력을 가미했기 때문에 나도 그것을 내가 했습니다. 라고 말을 못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돼요.
주여, 이번 일은 제가 했습니다. 하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나도 이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습니다! 는 그 무엇이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그것을 저는 그냥 쉽게 떠오르는 관계라고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리고 그 예를 들서 아브라함이 사라와 결혼했는데 우도 같으면 여보라고 불러야 되는데 사라가 자기 남편보고 뭐라 합니까? 주여 라고 한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주례사 한다는 것은 큰 모험인거예요.
자, 여러분 부부끼리 오셨습니까? 이제 남편을 향하여 주님이라고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이러면 큰일 날 소리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정에서 갑과 을의 관계가 어떤 관계입니까? 돈 벌어주는 쪽이 갑이고 돈 못 벌면 을이 되는데 남편이 퇴직해서 아랫목에 앉아 있을 때 주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돈도 못 벌어주는데 그것은 무리한 요구이죠.
벧전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그냥 주 정도가 아니고 베드로전서 3장 6절에 보면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이 무슨 희한한 관계가 다 있습니까? 그 희한한 관계를 저는 뭐라 했느냐, 떠오르는 특이한 관계라고 했죠. 그 관계는 사라가 그렇게 되고 싶어 한 것도 아니고 아브라함이 그것을 의도 한 것도 아니고 그것은 아브라함과 사라 관계, 아브라함을 통해서 미리 일찍이 중보자적인 그런 효력을 하나님께서 내도록 그렇게 그 사람들을 붙들고 사용하신 거죠. 복음에 순종하는 모든 성도들이 아브라함에 소속된 딸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면 주께서는 여러분을 통해서 뭐가 삐져나와야 됩니까? 중보자적인 속성이 여러분을 통해서 보여 져야 돼요. 그러면 중보자적인 속성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저는 이렇게 합니다. 목사님, 중보자적인 속성이 우리가 영의 생활하는 그것을 중보자의 속성입니까? 라고 물으시면 저는 아니요 라고 답변하죠.
그럼 뭡니까? 중보자적인 속성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이미 중보자 속성이 끝났습니까? 아니죠.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태어났을 때 그 자체로 중보자의 기능을 전부 다한 겁니까? 아니죠.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을 때 그게 중보자로서 마감입니까? 아니죠. 예수님의 중보자 기능이 뭡니까? 어디 까지 가야 돼요? 십자가 달리시고 죽어서 사흘 만에 살아나야 이게 중보자적 기능이죠. 그렇잖아요? 예수님의 생애 때 그렇잖아요.
그렇다면 우리 몸을 통해서 나오는 중보자적 기능은 뭐냐? 그것은 바로 육이 뭐며 영이 뭐며 둘 다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주께서 내가 착한 일 하기 전에 선한 일하기 이전에 뭔가 나에게 작용을 했었는데 뭔가 손을 댔었는데 손을 댔다는 흔적이 아브라함처럼 중보자적 기능으로서 밖으로 나온다면 그 중보자적 기능이 어떤 식으로 나오느냐 물으신다면 육이 뭐며 영이 뭐며 두 가지를 다 아는 거라 이 말이죠.
내가 영적 생활한다는 이것은 아니라고 했죠. 주여! 제가 영적 생활합니다. 이렇게 우기는 것은 그것은 주님의 특이성이 아니라 했죠.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 저 물위를 예수님 덕분에 걸은 적이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오병이어를 맛보았습니다. 또는 우리가 귀신을 쫓아냈는데 귀신이 떨어졌습니다. 그것으로 해서 그것이 주님의 성도 생활의 다라고 했습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12제자가 예수님의 특이성, 중보자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들은 필히 예수님을 배반해야 되고 예수님 곁을 떠나야 되고 떠날 때 사도 바울에서는 그것을 바로 육 된 요소, 육의 요소이죠.
그렇다면 예수 믿고 난 뒤에 이제는 가족과 따로 떨어져 살고 기도원에 기도 간다. 이게 아니고 현재 있는 가족과 그리고 교회 가족들에게 육적인 사람들이 하는 그 상황을 우리가 깊이 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우리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일반인이 살아가는 그 모습, 그대로 살게 하면서 거기서 특이성을 떠오르게 한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제가 지금 까지 길게 이야기한 거예요.
수녀 되기 위해서 ‘어머니, 이제 저는 수녀니까 저를 잊으세요.’ 이런 게 영적 생활이 아니고 뭐 특이한 게 없어요. 뭐 우리가 특별이 할 수 있는 없어요. 그냥 사는데 어떤 생활을 하느냐, 육적인 생활을 하는 거예요. 육적인 생활을 하면서 그 하는 가운데 뭐가 배어져 나온다? 영이 배어져 나올 때 우리는 중보자적인 기능을 보여 준다 이 말입니다.
치매 걸린 부모님을 섬기는데 그 치매 걸린 부모님이 잘해 줘도 욕을 하고 행패를 부리고 욕을 어디서 배웠는지 뭐, 애들하고 치매 걸린 노인들이 이상해요. 욕을 배운 적이 없는데 애들이 욕을 하고 평생을 권사로서 교회에서 찬송하고 기도 하고 했는데 막상 치매 걸리니까 욕이 막 나오더라 이 말이죠. 도대체 그 욕은 성령의 역사인지 어디서 욕이 나오는지 그런 부모를 섬기면서 힘들어할 때 하나님께서 너 힘드니까 따로 기도 할 테니까 이 힘든 것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너 혼자 기도 한다는 것이 그게 신앙생활 아니고 영적인 생활이 아니란 말이죠.
그런 부모와 함께 같이 섞여서 살면서 내가 얼마나 육적인가를 깨닫는 그것이 영적이다 말이죠. 제가 언제가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 세상을 초연해야 합니다. 세상이 없는 듯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듣고 지금 여기 신월동 한번 살아보죠. 지금 비행기 소리 나잖아요. 비행기 소리 들어보세요. 이게 사람이 가만히 듣나요? 짜증나죠. 돈만 벌면 이사 가야지 도저히 비행기 소리 때문에 못살겠다! 하죠. 그리고 아무리 초연하고 싶어도 이빨이 아프다, 잇몸이 흔들린다 하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데 지장이 많다 하면 인사돌 먹어야 소용도 없다, 이빨이 아파서 욱씬 욱씬 하는데 그것이 초연입니까?
애를 낳고 애를 키우는데 주여, 주여, 하고 마음의 평화, 내게 강같은 평화하고 있는데 애가 우는데 새벽 2시고 3시고 관계없이 마구잡이 울고 똥 싸고 하는데 그게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됩니까? 이게 어디서 똥 쌌어 하고 때리죠. 이게 초연이에요? 똑같습니다. 성령 받아도 전혀 달라질게 없어요.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아도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고 난리를 쳐도 세상은 전혀 바뀌지 않아요. 내가 성령으로 전도해도 상대방은 까딱도 하지 않아요. 까딱 거리는 것은 내 고함소리에 촛불만 흔들리지 그 사람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아무렇지도 않는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내가 특이함이 증명이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