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유튜브(96강, 97강) 꿈, 중보자 141204강의[신학]

유튜브(96강, 97강) 꿈, 중보자 141204

이름 : 이근호(IP:119.18.98.57)

96강

97강

이미아(IP:180.♡.84.30)

14-12-06 18:31

96강-YouTube강의(꿈)141204-이 근호 목사

오늘은 제 96강 제목은 “꿈”입니다. 꿈. 창세기 37장에 보면 요셉이 꿈을 꿉니다. 이 꿈이 요셉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이득을 가져왔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꿈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평소에 잠자면서 꾸는 꿈하고, 아주 특이한 현상으로서 사용될 때 그 내용이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있습니다. 우리의 꿈은 보통 개꿈인데, 성경에 나와 있는 요셉이 꾼 꿈은 그 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그 약속이 담겨 있죠.

보통 우리가 꿈이라 할 때에, 그 꿈의 내용이 어떻게 구체화되는가. 그 구체화되면서 사람들은 꿈을 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상당히 좋게 생각하고 괜찮은 존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도 마찬가지죠. 요셉이 꿈을 꾸고 난 뒤에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그리고 형제들과 다른 특수한 존재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난 뒤에 자기를 대단한 존재로, 아주 멋있는 존재로 자기를 바꿔줄 줄 그렇게 알았죠. 요셉마저도 꿈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면 요셉이 꿈을 꾼다는 것은 꿈이 요셉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꿈 안에 장차 오실 예수님이 담겨 있었던 겁니다. 요셉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언약의, 약속의 완성자인 예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고, 요셉이 어리기 때문에 자기가 형보다 아버지보다 낫다는 자기 사적인 어떤 기대감 같은 게 있었죠.

그런데 그런 꿈에 대해서 오해가 있었는데, 그 꿈이 이제는 요셉으로 하여금 요셉이 꿈을 사적인 용도로 쓰는 것을 방해하고 그걸 비켜나갑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면 됩니다. 요셉이 꾼 꿈, 다른 말로 하면 요셉이 받았던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약속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예상한 뜻을 빗나갑니다. 어긋나게 되어 있어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은 사람은 자기가 뭐든지 독립하려고 하고 독자적으로 살아가서 그 나름대로의 자기 가치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거든요.

근데, 요셉이 꿈을 꾸고 난 뒤에 요셉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의 존재가치가 올라갈까 생각했는데, 그 꿈이 요셉을 그냥두지 않습니다. 요셉의 모든 기대를 산산조각 냅니다. 그렇게 되면 꿈이라 하는 것은 독자적이고, 그리고 독립적인, 우리 존재를 그렇게 독자적인 존재로 만들지를 않습니다. 그냥 존재를 찢어버린다 할까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한테 주어지게 되면, 꿈에 담긴 약속이 주어지게 되면 그 꿈을 꾼 그 사람은 자신의 모든 희망이 다 찢어지게 돼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이러한 꿈의 성격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본성적으로, 사람은 자기중심으로 독자적인 삶을 꾸려나가려고 합니다. 그 결과로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간 소속되어 있는 단체, 내가 등록된 어떤 집단, 그리고 나와 뜻이 맞는 어떤 그러한 집합체, 공동체, 그런 것을 우린 하나님의 약속의 산물, 약속의 성취라고 그렇게 여깁니다. 빙빙 돌려서 이야기할 것 없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면 교회가 그런 되죠.

내가 교회 등록하고, 등록한 교회가 크고, 흔히 말하면 부흥되고 확장이 될 때에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고 그렇게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자격을 등록을 한다든지, 뭔가 내가 여기 집에 혼자 살다가 여럿이 같이 산다는 그것이 전혀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는 그게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 등록 하나, 안 하나 구원하고는 전혀 상관없다는 그런 말입니다. 세례 받으나 안 받으나 전혀 구원과는 상관없습니다. 괜히 교회가 있어가지고 교회 활동을 함으로써, 마치 손에 잡힐 듯한, 자신이 구원받았던 열매가, 결과가 눈에 단체라는 이름으로, 어떤 활동이라는 그러한 집단의 이름으로 온 몸에 그냥 다가왔다고 그렇게 생각하죠.

요셉이 바로 꿈을 꿀 때 자기 속성에 그러한 요소들이 있었다는 것을 요셉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요셉도 그런 걸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꿈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꿈이 요셉으로 하여금 꿈 안에 들어 있는 진짜 꿈의 완성되시는 주님을 위하여 요셉은 그때부터 자기의 원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가 기댔던, 자기가 의지했던 모든 것은 다 조각조각 깨져버리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 성도한테 적용을 시켜봅시다.

하나님의 꿈을 꿨다는 것은, 첫째 예상 밖의 어떤 소식이 믿어졌다는 이야기죠. 쉽게 말해서 뭔가 진리를 찾아서 진리를 알아서 구원되겠다든지, 아니면 구원을 받겠다는 욕심 때문에 구원을 받으려면 교회에서, 성경에서 어떤 구절이 나를 구원시키느냐, 이런 쪽으로 먼저 시도를 했다면 그 사람은 백발백중 악에 말려들고 악마에게 조롱거리가 될 뿐입니다. 악마의 이용대상이 되는 겁니다.

많은 종교단체들이, 사람들이 거기에 운집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은 다치지 않고, 자기 자신은 멀쩡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은 정상이라고 보고, 이 정상인을 새로운 부운의 정보를 더욱더 가지고 오게 되면 멀쩡한 내가 이제는 구원까지 확보가 된다는 그러한 기대 때문에 그러한 집단의 집단에 모이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진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회라면 바로 그 점을 지적을 할 것입니다. “너희들이 왜 나를 찾고자 하느냐? 너희들이 왜 성경을 보고자 하느냐?” 그 자체를 문제 삼아요.

자기는 멀쩡하고 자기는 정상인이고 자기는 기대가 있고 희망이 있는데 그 희망을 성경에 있는 정보나 하나님께서 채워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기대한 그 약속은 요셉이 받았던 꿈하고 내용이 전혀 다릅니다. 요셉은 전혀 사전에 꿈을 꾸리라고 예상한 적이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꿈이 요셉에게 덮친 것은 요셉 본인도 놀란 일이에요. 근데 일방적으로 덮친 겁니다. 물론 꿈이 덮칠 때 요셉은 뭔가 자기가 잘 되리라는 기대가 잔뜩 있었겠지만, 하지만 그 모든 기대는 꿈에 의해서 다 무너지고 다 부서져버리고 맙니다.

기대했는데 기대마저 무너진다면, 애초부터 뭔가 구원받고자 기대해서 교회 나왔다면 진짜 복음 앞에서 그러한 기대와 희망은, 구원에 대한 욕구 이런 것이 다 무너져야 제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약속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꿈에 의해서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셉은 예상하지도 않았는데 꿈을 꿨습니다. 꿈꾸고 난 뒤에는 갑자기 욕심이 생겼습니다. 내가 형들보다 위대하게 되고 아버지, 어머니도 나한테 절한다. 이게 분명한 결말이라고 생각하고 은근히 거기에 대한 과정을 자기가 설정했겠죠.

하지만 꿈은 그 요셉의 기대에 부응하지 아니하고 요셉으로 하여금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듭니다. 결국에 요셉이 느낀 것은 절망과 절망의 연속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못했습니다. 꿈을 꾸기 전보다 더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방적으로 뜻이 임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임하고, 하나님의 십자가 능력이 임한 사람의 공통점이 바로 그겁니다. 자기도 원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십자가 복음이 들어왔을 때, 그때부터 그 사람은 자기가 예상치도 못한 절망과 어떤 자기의 모든 꿈이 좌절되는 그런 체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 가운데서 이 세상의 주인공이, 말씀의 주인공이 바로 나 구원받는 것이 성경의 목적이 아님을 비로소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 깨닫게 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내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께서는 다른 분을 준비하셔서, 그 분이 이루시는 그 약속의 나라에 우리를 강제로 거기에다 집어넣는 주님의 작업에 우리가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꿈속의 약속을 제대로 만난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미아(IP:180.♡.84.30)

14-12-06 18:31

97강-YouTube강의(중보자)141204-이 근호 목사

이번에는 97강 제목은 “중보자”입니다. 중보자. 세상의 모든 종교는 중보자가 별로 없습니다. 구원받는, 해탈되는 본인이 신과 좋은 관계 맺으면,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좋은 평가를 받으면 죽어서 천국 갈 수 있기 때문에 구태여 중보자라는 것이 필요가 없죠. 아마 중보자 대신에 사람들이 안내자, 인도자가 필요할 거예요. 천국 가는 어떤 정보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죠. 사람들은 예수님도 그런 분인 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못 가는데 그 분이 천국에서 왔기 때문에 천국은 이렇게 이렇게 하면 간다고 우리에게 언질을 주시고 좋게 인도해 주시고 정보를 알려 주시면 우리는 그 정보를 받아서 구원 받겠다는 시도를 하는 거죠. 이러한 생각은 구약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도 모세라든지 이런 선지자과 함께 할 때 그 선지자의 기능, 선지자의 역할을 자기가 모르는 것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천국에 대한 그 정보나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참조를 하게 되면 우리가 그 말씀을 순종하고 지키면 하늘나라 백성이 된다.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 쪽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의 연결 고리가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서기관들로 이어졌고 오늘날 한국교회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말씀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는데, 하나님께 뭘 지킬지 몰랐는데, 주께서 어떤 목회자를 통해서 설교자를 통해서 이것 이것 하기만 하면 된다고, 언질만 주면 우리가 그대로 지켜서 나중에 천국에서 만납시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실제로 중보자 되신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오히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그 당시의 민중들에 의해서 살해당하신 분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람은 진정 자기 자신부터 돌아볼 줄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 오시지 않고 어떤 위대한 선지자나 이렇게 오게 되면 자기들은 마중 나오고 대환영하고, 그 분 앞에 그야말로 자기를 드리면 서로서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그 오시는 분을 영접하면 또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영접할 것이라는 그 원만한 관계를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는 중보자가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세우고 죄를 지적할 줄은 상상도 못했죠. 예수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우리는 구원받거나 영생 얻거나 천국 갈 그러한 입장이 되지 못해요. 애초에 그런 자격이나 권한도, 그럴 입장도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보자나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차이점은 뭐냐 하면 우리 죄를 지적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거죠.

“진리를 알겠습니다. 또 구원을 받겠습니다. 또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진리를 알 수 있습니까?” 라는 그렇게 우리에 대한 아주 간절한 그 희망과 요구마저도 그게 바로 죄라고 지적하시는 분이 진짜 살아계신 우리 주님이요, 중보자이십니다. 그걸 니가 알고자 하는 의도가 뭐냐? 하나님만이 알고 있어야 될 것을 니가 왜, 죄인인 니가 왜 알아야 하냐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났을 때, 우리가 가짜로 상상한 하나님을 생각할 경우에는 모든 게 원만한 관계이지만 실제로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분들이 있어요. 그 만난 분들에 의하면 거기서 뭔가 삐걱거리고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장면인데요. 거기서 모세가 이걸 요구합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얼굴을 내게 보여 달라는 거예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주시옵소서.” 18절에 보면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모든 형상을 지나가게 하시면서 하는 말이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하는 말 취지를 하나님은 제대로 알아들으시고 그게 모세가 뭐냐, 얼굴을 한 번 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 보게 해달라는 그런 부탁으로 주님께서는 제대로 이해를 하신 거예요. 그런데 여기 20절에서 하신 말씀이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한다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에도 그런 말씀이 나와요.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인간 자체가 고장 났고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인간 자체가 뭘 보게 되면 그 사람이 본 형상을 반드시 우상화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보이는 족족 모든 것을 우상화해요. 가짜 신이 되어 버립니다. 실제로 그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되어 그 형상을 만들어내고 기억하고 한다면 그 자체가 진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우리 죄인된 죄 속에 품어있는 인간들이 고이 간직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의 형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형상은 우리에게 영원한 우상이 되는 겁니다.

보고 믿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한테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근데 사람은 자꾸 보고 믿고자 하는 거예요. 모세도 예외가 아니에요. 한 번만 보여주시면 딱 기억에 새겨놨다가 그 모습 그대로 만나면 아이구, 하나님 맞죠? 라고 반갑듯이 영접하고 싶다는 거예요. 마치 우리 인간세계에서 오랜만에 동창생을 만나고 헤어졌다면 다시 그 모습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 동창생이라고 딱 알아보는 것처럼. 정답을 알아보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런 식으로 우리 쪽에서 알아볼 수 있겠다.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근데, 이렇게 되어 버리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자체가,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자체가 감추어져버립니다. 이게 드러나지 않아요. 죄인이라는 것은, 죄인의 특징이 뭐냐, 자기가 본 것을 섬겨서 그것이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활용하겠다는 그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다 철거해버립니다. 자, 그렇다면 그 다음 문제입니다. 우리가 보지 않고 어떻게 구원받는가.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데. 보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자꾸 상상이 되는데. 상상은 항상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보는 것은 확실하니까. 애매모호한 그런 식의 믿음보다도 봐서, 확실하게 봐서 이거다! 하고 길게 오래 새기는 그것이 믿음 같은데. 그건 우리 생각이고요.

하나님을 그런 생각 자체가 죄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고 거절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진짜 중보자를 만났다고 확정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기능적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죄와 관련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로마서 9장 21절에서 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 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서, 담기 위해서 그릇을 일방적으로 만들었다는 거고, 그 만들어진 그릇을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흔히 우리가 우리 죄인의 입장에서 성도라고 할 때, 내가 나한테 어떤 선한 것들을 꽉꽉 채워서, 그래서 내 마음이 개과천선해서 나는 전에는 나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착한사람이 되었다는 내가 착한사람 되는 어떤 존재를 그냥 가져오는, 그냥 붙드는 거, 그걸 성도의 본 모습이라고 여기는데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고 우리가 우리한테 어떤 어떤 조치를 할 게 전혀 없습니다.

그냥 만들어진 그릇 자체가 하나님의 자비를 담고 사랑을 더 담는 그릇으로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말고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만들어진 기능적인 그릇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한테 내리는 어떤 조치는 일체 없다는 이야기죠. 이것에 대해서 섭섭하게 여긴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예수님을 중보자로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보자의 십자가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라면 오리려 이러한 기능을 굉장히 용납을 하게 되고 반기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너무너무 기뻐할 겁니다.

앞으로 우리 인생이 어떻게 꼬이고 어떻게 진짜 쳐 박힌다 할지라도 전혀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그릇을 담는 그릇으로 만들어주셨다는 이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악한 경우라 할지라도 우리는 기쁨으로 용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자기 자신에 구원에 대해서, 영생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가 필요치 않다는 이것에 대해서 격분합니다. 격분하고 화내고 짜증내고 분노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에 특징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중보자란 우리가 봐서 믿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면 어떤 예수든 간에 우상숭배로 자리 잡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 우리가 봐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지금도 우리가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늘 용서와 자비를 담는 그릇이라고 우리한테 깨우쳐주시는, 성령의 깨우침이 중보자의 능력이고 중보자의 만남입니다.

◁ 이전글

다음글 ▷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81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