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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20 - 육과 감사강의잠언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20 - 육과 감사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20 - 육과 감사

14,11,1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68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재물을 모르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데, 그런데 부자가 되기를 애쓰지 말라고 하면 일찍 죽으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그것에 대한 답변으로 지혜를 내놓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도 없지만,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지 않는가?" 라고 말입니다.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오늘도 내가 참새를 기르듯이 너희들도 길렀다 !!

예수님께서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고 하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참새를 기르시니, 예수님으로서는 그것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내가 참새를 기르듯이 너희들도 길렀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사육된 닭이나 오리와도 같은데, 우리를 사육하시는 양계장 주인이 오셔서 "내가 너희들을 기른다" 라고 하니까, 닭은 닭끼리 오리는 오리끼리 서로 쳐다본다는 것이다. "저분이 누구지? 저분이 왜 그래?" 라고 하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같은 닭이면서, 같은 오리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 말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기르시는데, 왜 자기가 우리를 기른다고 하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데, 우리가 말하는 것은 가짜 하나님이고, 예수님의 경우에는 아버지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도 항상 초조하고 불안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예수님은 하나님이 진짜이니, 아버지의 하시는 일에만 집중하지, 살고 죽는 것은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만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신경을 쓸 이유도 없고, 그럴 마음도 권한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우리는 그런 차이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친히 기르신다" 라는 것은 주님이 보시기에는 굉장히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 목사님, 남편이 바람을 피워요 !!

한 가지 예를 들면, 이것을 메일로 상담한 내용인데 말이다. 자기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데, 그게 심증은 가는데 물증은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굉장히 초조하고 불안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답변을 하기를, 걱정을 끼치는 것도 육이고 걱정을 하는 것도 육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육의 세계는 양계장과 같아서, 마치 닭이 닭만 쳐다보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우리는 기른다고 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데, 실제로 기르시니까 기르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내가 알아서 살아왔다" 라는 것이 자연스럽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가짜라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런데 왜 불안하고, 왜 남편이 바람을 피우느냐는 말이다. 즉 "제가 하나님을 잘 믿는데, 왜 우리 집이 가난한가요?" 라고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난해도 하나님이야.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괜찮아" 라고 하는, 그런 하나님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소개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인가?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안 되고, 자기 가정은 자기가 지켜야하고, 그러니 결국 자기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되고, 그런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 찬란한 문명은, 곧 어두운 세대 !!

그러면 그것은 누가 만든 하나님인가? 같은 양계장에서 닭이 만들고 오리가 만든 하나님이란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면서 말이다. 그것을 가지고 '역사' 라고 이야기하고, '문화', 혹은 '문명'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세대' 라고 하는데, '어두운 세대' 라고 말이다. 그것을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이 왔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라고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러니 어둠은 자체적으로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어둠이 가지고 있는 신과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아버지는 서로 차이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대척관계에 있는데, 즉 튕겨나와서 서로를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둠 속에 있기에, 예수님을 자연스럽게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담을 신청한 그분에게,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교회에 가서 어떤 희망을 가질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라고 했는데, 교회자체가 곧 어둠인데, 거기에 무슨 희망이 있느냐는 것이다. 교회에 가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들 생각하는데,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런 구원은 없다는 말이다.

◈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교회다 !!

구원은 오직 성령이 임해야하는데, 초대교회 때 성령이 임할 때 교회는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성령이 임해서 교회가 되게 함을 차후로 확인할 뿐이란 것이다. 쉽게 말해서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교회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확인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교회가 우선이고 그 교회를 통해서 성령이 공급된다는 것은, 그런 것은 초대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간단한데, 즉 "복음의 말씀이 전달된 곳이 바로 교회가 나타난 곳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복음이냐? 아니냐?" 라는 것이 문제이지, "교회냐? 아니냐?" 라는 것은 전혀 문제 축에도 들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하게 되면, 이 고린도 교회도 교회가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교회는 사탄의 종을 당회장으로 모신 것인데, 그러면 사탄의 사상체계를 그대로 양육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제자훈련' 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고후 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 십자가의 고난을 보여주면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아마추어인 평신도가 어떻게 진짜 사도와 가짜 사도를 구분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것을 대비해서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즉 "십자가의 고난을 보여주면 사도고, 그렇지 않으면 사도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자기가 밥 먹고 살려고 목회를 하는 그런 개고생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는 고난인데 말이다. 복음을 전하게 되면 주변에 있던 것들이 액체에서 고체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는 다들 마음씨 따뜻한 이웃이고 그런 사회인데, 그런데 거기에 복음을 전하게 되면 그만 어둠으로 드러나고 만다는 것이다. 마치 어항에 잉크를 타면 시커멓게 되듯이 말이다.

그렇게 되면 핍박이 가해지게 되는데, 물론 일부로 그런 것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복음을 전할 필요는 없지만, 괜히 그렇게 해서 분위기만 깨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실 때는, 솔직하게 복음을 이야기하게 되면 상대방의 칼라가 그만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얼굴색이 말이다.

◈ 내가 어떻게 하면 가난을 면할 수 있는가?

여기 교재 68페이지와 69페이지에 있는 것은, 68페이지에 있는 것은 "공중에 나는 새가 창고도 없다" 이라는 이야기이고, 그리고 69페이지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결국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성경책을 보는 것은 가난을 면하기 위함이다" 라는 것이다. 즉 가난을 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밖에 없다고 여기고 성경을 본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미 출발점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가난을 면할 수 있는가?" 라는, 즉 가난함이 주는 공포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넉넉하게 살아봤으면 그것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겠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성경을 보니, 특히 이런 잠언서를 보니, 그래서 잠언서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구절을 따로 뽑아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부퀘를 만들어서 던지는데, 그리고는 자기가 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6개월 안에 시집을 가야한다' 라고 나오는데, 즉 자기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잠언서를 통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해본다는 말이다.

◈ 잠언서의 모델은 오직 예수님 한 분 !!

그래서 잠언서 16장에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라고 하면, 부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께 너희의 장래를 맡기면 주께서 이루신다" 라고 하시는 것은, 그러한 잠언서의 모델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이다.

(잠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땅에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뜻대로 가는, 바로 그 길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잠언서에서 말하는 진정한 영생이고 지혜인데, 하지만 사람들은 잠언서를 보면서 개별자로서 자기만 부자가 되고, 자기 가족만 부자가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심보로서 성경을 보니까, 주님께 맡기는 척만 한다는 것이다. 맡기려면 제대로 맡겨야 하는데, 어떻게 맡겨야하는가? "부자가 되려는 이 마음도 주께서 던지든지 찢든지 마음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그것마저도 다 버려야하는데, 다른 것은 다 주님께 맡겨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맡기지 않으니, 그러니 주님이 뭐라고 하시겠는가?

◈ 과연 누가 부자청년인가?

"그것마저도 내놓지?" 라고 하면, 우리는 "이것만은 안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9장의 부자청년처럼 말이다. 즉 "영생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맡겼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맡기려고 하면 다 맡겨라. 그러니 너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에게 오너라" 라고 하니, 부자청년이 근심을 하면서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는 것이다.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러니 부자청년의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있다는 것은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인데,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을 왜 언급하시는가? "하나님을 바꾸어라" 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알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고 부자청년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같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들으면 처음에는 부자청년을 욕하는데, 즉 "예수님께서 재산을 좀 팔라고 했다고 해서 그렇게 주님을 배반해버리면, 그러면 결국 너만 손해야. 코앞에 있는 조금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영원한 지옥불에 가는 어리석은 인간이 어디에 있는가? 이런 믿음도 없는 놈아!" 라고 하면서, 그렇게 분개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막상 자기가 그렇게 힘들게 모아놓은 돈을 그만 사기를 당하게 되면 어떻게 나오는가? "나는 이제 정말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겁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15년 전에는 성경을 보면서 그렇게 부자청년에 대해서 분개하다가 말이다.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게 남의 이야기라고 여기고. 또한 자기는 주의 편이라고 여기고 마음껏 비판을 하다가, 하지만 막상 말씀의 파도가 부자청년을 거치고, 또 다른 사람을 거쳐서 막상 자기에게 벌어지게 되면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이럴 것 같으면 예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종용히 정리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삐쳐서 교회도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당시에 그렇게 부자청년을 욕할 때 자기는 누구 편에 있었다는 말인가? 자기는 주님의 편이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나중에 보니 자기는 하나의 관람객이고 구경꾼이었다는 것이다. 즉 "미리 내가 예수님의 편에서 부자청년을 욕하게 되면, 나에게는 그런 일이 닥치지 않겠지"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 물 위를 걸은 베드로, 그러나 !!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이런 것이 다 성경해석과 관련이 있는데 말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이 맞는데, 그렇게 걷다가 그만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물 위를 걸은 것을 자랑하겠는가? 빠진 것을 자랑하겠는가? 물론 걸은 것을 자랑하지 싶은데, 하지만 그 다음부터 물만 보면 걸으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베드로가 그 물 위를 걸은 것이 자기의 잠재된 능력이라는 말인가? 아니라는 말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고, 보편적인 입장에서는 자기도 다른 사람들처럼 물 위를 전혀 걸을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했을 뿐이란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기적을 주실 때, 물론 우리는 그런 주님의 은혜와 기적을 고대하고 있지만, 막상 주님이 주시면 우리는 오히려 그것이 거북스럽고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살던 것처럼 그냥 종용하게 사는 것이 더 편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받아도 그것을 얼마 유지하지도 못하는데, 즉 물 위를 걸어봤자 다시 물 속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는 오히려 누군가가 와서 "어이, 당신이 물 위를 걸었다면서? 그러면 우리 집에 수영장이 있는데, 거기서도 걸을 수 있겠나?" 라고 하면서 테스트를 할까봐 싶어서 겁이 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안 되는 것이 뻔하니 말이다. 그러니 주님의 편에 선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든다는 것이다.

◈ 사울 왕의 경우에 !!

구약의 사울 왕의 경우에, 그가 처음엔 얼마나 겸손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신이 임하고 말이다. 그런데 왕이 된 다음에 성신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그만 악신이 찾아왔는데, 그런데 그 악신은 그냥 찾아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데리고 왔는데, 다윗이라는 새로운 스타의 등장과 함께 말이다.

그래서 사울은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면서도, 이스라엘이 잘 되는 쪽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잘 되는 쪽으로, 꼭 우리나라의 국회의원들처럼 말이다. 당선되기 전에는 국민을 생각하는 것 같은데, 당선이 되고 난 다음에는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4선은 해야만 본전을 뽑는다고 하는데, 그래서 자기 사람들을 집어넣으면서 자기를 중심으로 정치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도 그렇고 말이다.

사울 왕이 처음에는 분명히 성신을 받았었는데,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데, 차라리 그때 그냥 삼촌 밑에서 그냥 나귀나 키우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괜히 엉뚱한 노선으로 갔다오는 바람에 그만 악신을 받고 말았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냥 농사를 짓든지 목축업을 하고 있었다고 하면, 다윗이 등장하든 엘리야가 등장하든, 자기는 양만 열심히 키우고 있으면 점잖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괜히 성신을 받아서 왕이 되고 난 뒤에, 그만 다윗의 등장으로 인해서 자기 가문이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는데, 즉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울은 성신을 괜히 받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야 성신을 받은 사람이 맞다는 것이다. 성령의 경우도 그렇고 말이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이 "성령의 열매가 있네요. 참 온유하네요" 라고 백날 이야기를 해도, 자기는 주님 앞에서 죽은 자라는 것이다.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는데, 즉 자기는 인생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주께서는 시키는 대로, 그러니 주님이 이혼을 당하라고 하면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게 되면 피우고 말이다.

◈ 여보, 나를 용서해주세요 !!

참 조금 전에 이야기한 그 상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변을 했는데, 즉 "우리가 죽음 위에서 살고 있고, 그 죽음은 우리의 죄 때문에 나오는데,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죄를 용서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기쁨이 나오는데, 그런 기쁨을 느낀다고 하면 남편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이다.

"여보, 내가 잘못입니다. 당신이 엉뚱한 길로 가는데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큰 죄를 지었습니다. 고소를 하든지 해야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나만 사랑해서 그렇습니다. 괜히 그렇게 해서 이혼을 하면 나 혼자서 살아가기가 힘이 들어서, 그래서 당신의 잘못을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진정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서 그렇게 하지 못했음을 용서해주세요" 라고, 실제로 그렇게 한 번 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남편이 뭐라고 하겠는가? "이 여자가 미쳤나? 내가 무슨 바람을 피웠다는 말이고? 증거가 없으니 별 소리를 다하네. 무슨 의부증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뭐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과연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 여자 분은 먼저 몇 가지를 알아야 하는데, 자기가 믿음생활을 해도 이 세상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즉 "내가 올바른 소리를 하면, 남편이 눈물을 흘리면서 미안하다고 하겠지" 라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한다는 것이다. 그런 소설은 쓰지 말라는 것이다.

◈ 당신 같은 남자와는 더 이상 못 살아 !!

남자는 들키기까지는 완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데, 그렇게 하다가 만약 꼬리를 잡히면 "여보, 미안해!" 라는 것으로 끝이고 말이다. "남자가 되어서 그런 바람도 못 피우는 놈들이 더 문제지" 라고 하면서, 그렇게 끝까지 자기 잘난 척을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여자가 성질을 내면서 "당신 같은 남자와는 더 이상 살지 못한다" 라고 나와봐야, 그 다음의 문제는 무엇인가? 창피해서 더 이상 동창생들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동창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니가 얼마나 매력이 없으면 신랑이 바람을 다 피우겠는가?" 라고 나올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물론 없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한 자식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엄마, 아빠가 바람을 피우는 것이 중요합니까? 지금 우리의 장래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부모가 되어서 제발 참으세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식들은 또 자기만 생각한다는 말이다. 모두가 이기주의이니 말이다.

딸이 결혼을 하는데, 예식장에서 말썽이 일어나면 딸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엄마 아빠는 제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해주지 못합니까? 제가 앞으로 곤란해져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엄마는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너는 모르나?" 라고 나오고 말이다. 여자는 매일같이 "니 때문에 내 인생을 다 조졌다" 라고 하는데, "내가 돈을 번다고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이렇게 실수를 다 했겠나?" 라고 하면서 핑계를 댄다는 것이다.

◈ 주께서 바람을 피우게 하셨다 !!

그러므로 근본문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 전체가 육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전체가 말이다. 딱 하나만 생각하면 되는데, 왜 바람을 피웠는고 하니, "주께서 바람을 피우게 하셨다" 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내가 진정으로 남편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냥 있지 말고 후라팬으로 한 방을 날리든지 해서, 입을 다물면 본인이 천사가 되는데, 하지만 그것은 자기 사랑이지 남편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는 것은, 결국 그동안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다는 것인데, 정말로 남편을 사랑한다고 하면 "니 죽고 내 죽자" 라고 하면서 달려들어야 하는데, 같이 바람이 난 가시나를 만나서 머리카락도 쥐어뜯고 말이다. 자식이고 집안이고 간에, 그런 앞뒤를 가리지 말고 뭔가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면서, 그야말로 혼자 천사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참으면 주께서 착하다고 하면서 어떻게 알아서 일을 처리해주시겠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어디 자기의 시다바리인가? 자기의 뒤치닥거리나 해주게 말이다.

그러니 "내 인생은 행복해야만 한다" 라고 하는 것이 큰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죄인에게 주어진 것은 저주밖에 없는데, 그런데 죄를 지어놓고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보겠다고 하는 그 바램, 그것이 문제인데, 그런데 그만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의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가? "가난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것이 잠언서에 보면 분명히 나오는데, 그런데 그런 것은 찾아보지 않고, "어떻게 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라는 것만을 잠언서에서 찾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가난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징벌이고 저주인 줄 알고 말이다.

◈ 예수님보다 더 가난한 자가 있는가?

하지만 이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과연 목회에 성공을 하셨는가? 사람을 얼마나 모았는가? 모두가 다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결국 교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전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만 계시면 되니까 말이다.

오직 아버지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예수님의 관건이었지, 즉 "아버지의 뜻대로만 하옵소서" 라는 것, 그것이 태어나서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관심사였지, "아버지의 뜻대로 하면 나에게 무엇이 떨어질까?"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관심사에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예수님을 본받아' 라고 하는데, 지나가든 개가 웃는다는 것이다. 큰 교회의 당회장이 자기의 목표이고 모델이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인데, 무슨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제가 봐도 다 보이는데, 주님께서 그런 것을 모르시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곱게 살아간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닌데, 더 나아가서 "내가 아직도 살아남았다" 라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오기이지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나쁘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에 관한 문제인데, 자랑하는 것은 그런 우리의 본성이 아니라, 성경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예수님의 그 십자가만을 자랑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살아남았다" 라는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 4중추돌 교통사고 !!

제가 얼마 전에 남해를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뒤에 다른 차가 와서 들이박았다는 것이다. 만약에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면 큰 사고나 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때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고 하니,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은 죽은 것이 소원이라고 했는데, 저 자신도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입버릇처럼 기도했고 말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알았다. 뜻대로 해줄게" 라고 하시면서 그런 교통사고를 내서 죽게 했다면, 그러면 "나는 과연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겠는가? 섭섭해할까? 아니면 감사하다고 할까? 죽이려면 미리 언질이라고 주셔야하는데, 마음의 준비도 할 시간도 없이 그렇게 해버렸다고 불평을 하지나 않을까?" 라고, 그런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는 무엇을 느꼈는고 하니, 우리는 죽는 순간에야 비로소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평소에는 "내가 죽어야 되는데 살았다" 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 바로 그게 문제였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뒤에서 박도록 허락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것이 기적인데,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는 것은 자기 힘으로 살고, 들이박히는 것만 주의 뜻으로 여기는데, 그게 아니라 들이박히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역시 주님의 뜻이란 것을, 그러니 거기에 대한 감사거리를 우리는 놓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미국의 뉴저지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분명히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평소에는 뜯지도 않은 택배물건 안을 보고 감사가 넘쳐야한다고 해놓고는,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이 되면 또 다시 잊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통사고가 나니 또 그것이 기억이 난다는 말이다.

물론 저는 자차보험에 들어있어서 큰 손해는 없었는데, 과실이 상대방이 80프로고 저는 20프로였는데, 그쪽이 안전거리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제가 먼저 사과를 했는데, 그 사람은 그냥 뒤에서 따라온 것밖에 없는데, 손해는 80프로나 자기가 다 물어야 하니 말이다. 아마 그게 4중추돌사고였지 싶은데, 그러니 우리가 살아있고 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참새도 내가 기른다" 라고 하시는 말씀이 정말로 맞는 말씀인데, 그런데 왜 그게 귀에 들어오지 않느냐는 말이다. 우리는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내 노동으로 살았다" 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몸에 익숙해지고 말았는데, 그래서 가짜 하나님을 챙기고, 진짜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직 매를 더 맞아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교재 69페이지를 보자.

** 그야말로 "아, 진짜 내가 사는 것은 내 힘으로 사는 게 아니구나" 라고 깨닫는 순간, 그것이 바로 가난과 부함도 실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아는 사람이고, 모든 것을 주께서 기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 모든 것을 다 맡겨라 !!

이런 사람이 바로 잠언서에서 말하는 지혜의 사람인데, 즉 "모든 것을 맡겨라. 주님의 뜻대로 된다" 것이 잠언서에 분명히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교인들도 그 구절을 좋아하는데, 대심방을 하면 단골메뉴이고 말이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봉투를 내밀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다 맡겨라" 라는 것인데, 이것은 결코 하나님과 흥정하고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누가 과연 자기 것을 모두 다 맡기겠는가? 그런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고, 다른 사람들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제 낮 시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주님은 우리에게서 조금씩 조금씩 강탈해 가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나오는가? 울고불고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엄살에다가 왕 짜증을 마구 내는데, 왕 서방의 왕 짜장이 아닌 왕 짜증을 말이다(ㅋㅋ).

그래도 명색이 성도라고 하면서도 살아가는데, 그야말로 왕 짜증의 연속이란 말이다. 새벽기도에 갔다와서 돌아서면 짜증을 내고 말이다. 새벽기도를 하면서 나름 요구를 엄청 많이 했는데, 그런데 주님이 거기에 부합해주지 않으니 왕 짜증으로 나온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70페이지를 보자.

** "나는 참새가 되어도 좋아. 들풀이라도 고마워" 라는 기쁨이 생겨나는데, 그것은 이미 우리 가운데 지혜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내 인생에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되시는 분이 같이 살고 있었던 겁니다.

◈ 범사에 좋아. 범사에 고마워 !!

여기에 "나는 참새가 되어도 좋아. 들풀이라도 고마워"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을 "나는 ( )가 되어도 좋아. ( )이라도 고마워" 라고 한 번 해보자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 ( )에는 그 어떤 것이 들어가도 "좋아, 고마워"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서의 뜻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사람은 "범사에 좋아. 범사에 고마워"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범사에 오케이. 범사에 댕큐" 라고 말이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제가 성령 안에서 그렇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실제생활로 돌아와 보자는 것이다. 물론 성령 안이 진짜 실제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 어설프고 조작된 가짜 실제생활로 돌아와 보자는 말이다. 권사님들은 다 아시겠지만, 우리가 언제 짜증이 나는고 하니, 마음은 뻔한데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 특히 날씨가 흐리고 할 때는 온 몸이 다 쓰시고 난리라는 것이다.

◈ 머하노? 빨리 안 내려오고?

예를 들어서, 시장에 갔다오더라도, 이전에는 물건을 제대로 들고 왔는데, 이제는 질질 끄집고 온다는 것이다. 계단을 올라가다가도 입에서 비명소리가 먼저 튀어나오는데, 그래서 남편에서 전화해서 "지금 머하노? 빨리 안 내려오고?" 라고 하면서 짜증을 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몸이 따라주지 않는데도 과연 고마움이 성립되느냐는 것이다. 물론 성립이 되는데, 어떻게 되는고 하니, 우리가 추상적으로 해서 "어떤 것이라도 좋아" 라고 하게 되면, 즉 이론적으로 하면 그런 고마움이 정신적인 활동이라도 생각하는데 말이다.

◈ 몸의 컨디션 문제 !!

그런데 실제로 어떠한고 하니, 물론 이 실제도 우리가 아는 가짜 실제인데, 그 실제로는 그게 정신의 문제가 아닌 몸의 컨디션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몸은 괜찮아도 아이의 성적이 떨어지게 되면 짜증이 날 수도 있는데, 아무튼 기본적으로는 몸의 컨디션 문제라는 것이다. 즉 몸이 아프다든지 병이 생기게 되면, 이런 것이 다 날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몸을 어떻게 하시는가? 아까 참새와 들풀을 언급했는데, 그것들은 어디 몸이 없는가? 나름대로 다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세포조직도 있고 말이다. 오히려 참새와 들풀은 정신이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정신이 강렬하겠지만, 반면에 참새나 들풀은 몸이라는 실체가 강렬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몸을 일부러 아프게 하셔서, 그동안 모든 것을 자기 몸에 의존해서 짜증만 내고 힘들어했던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기 몸이 폐기처분이 되어야하는 몸인 것을 아예 수긍을 하도록 해버리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셔서 생각을 늘 정리하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죽음이라는 것이 나중에 자기가 죽을 때 죽음이 아니라, 지금도 그 죽음이 언제나 자기 밑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 그렇게 될 때 몸에서 정신으로 다시 바뀌어지게 되는 계기를 주님께서 마련해주신다는 것이다. "주여, 제가 아파서 짜증을 내더라도, 그런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라고 하도록 말이다.

◈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

죄가 있는 우리라도 아프니 짜증이 나는데, 하물며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 당하신 그 고통과 아픔, 그러니 주님께서는 얼마나 아파했겠느냐는 말이다. 그럴 때 우리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떠올리게 되는데, 4장 5절에 보면,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 '체휼(體恤)' 이라는 것은, 우리의 그런 아픔을 다 아시고 이해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은 그런 아픔도 없고, 눈물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눈물을 많이 흘려도 괜찮은데, 천국에서는 흘릴 눈물도 없으니 말이다. 아픈 것도 지금 많이 아프고 말이다(ㅋㅋ).

◈ 천국은, 상상 그 이상 !!

그러니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행복인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상상해도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그때는 꿈을 본 것과 같아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곳이 얼마나 좋은지 말이다. "어디 무슨 일이 있었어?" 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사 43: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사 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사 43:20)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거지 나사로가 그렇게 고생하고 개들이 와서 자기 상처를 핥았지만, 천국에 가서는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품에서 말이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자라고 하는데, 간이역을 지나가면서 그것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아무리 삼성그룹이 어떻고 현대그룹이 어떻고 해도, 그런 지나가는 것에 미혹에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비록 겨울수련회 교재가 어려워도 !!

이번 겨울수련회 때는 이 '미혹'에 대해서 언급하지 싶은데, 벌써 교재를 십자가 마을에 올려놓았다는 말이다. 물론 읽어보나마나 제대로 짜증을 내지 싶은데, "무슨 글을 이렇게 어렵게 써놓았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뒤에는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앞의 서론부분이 좀 어렵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경을 처음부터 잘못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려운 것도 가끔은 맛을 좀 봐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주께서 여러분들에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요한계시록을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죠. "죽도록 충성하라" 라는 말씀을 저는 다음과 같이 풀이했습니다. 이 말씀을 지키기가 불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름대로 죽도록 충성을 하려고 했지만, 아직도 죽도록 한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죽지 않았으니 말이죠.

◈ 요한계시록의 주제 - '너도 한 번 당해봐라' !!

잠언서를 하다가 여기서 요한계시록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 이 요한계시록을 신천지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외운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신천지에서는 요한계시록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천지에 속해있는 우리들은 어떠한가? 어렵다는 이유 때문에 잘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요한계시록의 전체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다음과 같은데, 즉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난 뒤에, 그렇게 예수님을 죽였던 이 세상이 고난의 값을 치루는 내용이 곧 요한계시록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너도 한 번 당해봐라"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당하는 가운데서 성도도 같이 당하게 되는데, 그런데 성도가 당하는 것은 승리로 간주하신다는 말이다. "어휴, 살았구나!" 라고 하도록 말이다. 참으로 희한한데,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주여,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고난을 받아서 짜증을 제대로 내는데 말이다.

그러니 "신이시여, 우리에게 이렇게 나오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해도 너무 하십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귀에게 속한 인간들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성도는 당하면 당할수록 감사를 하면서 "주님, 아예 끝장을 보게 하옵소서. 아예 우리의 목을 베옵소서" 라고 하는데, 그러한 자들이 천년동안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 결국,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그러면 여기 잠언서를 이야기하면서 제가 왜 요한계시록을 언급했는고 하니, 이것이 가난의 문제가 아니라 마지막 때는 죽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가난보다도 더 내려가게 되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잘 사느냐? 그냥 보통으로 사느냐?" 라고, "상류층으로 사느냐? 중류층으로 사느냐?"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에 달린 가장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서,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이미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요한계시록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내가 상류층이냐? 중류층이냐? 하류층이냐?" 라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라는 것을 결정지을 근거가 이 마지막 때에 이미 개시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 라고, 자기의 죽고 사는 영생의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상류층이냐? 중류층이냐? 하류층이냐?" 라는 것은 사실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말이다. 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 사도요한이 어디에 있었는가? 밧모섬에 있었는데, 거기에 멋있는 팬션이 있어서 휴양을 즐기고 있는가? 휴양이 아닌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몇 개월 전에 그런 영화가 있었데,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 라고 해서 말이다. 그 영화평을 십자가 마을에 올려놓았는데, 그 영화의 시작이 밧모섬이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 팔자는 편하겠다고 하는데, 하지만 외롭게 사는데 그것이 과연 그러하겠느냐는 말이다.

◈ 여자의 이혼과, 존재의 이유 !!

조금 전에 이혼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물론 이혼을 하게 되면 생활비도 그렇지만,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참 외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기피증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심해지면 자살로 이어지고 말이다. 자기 존재의 이유가 없으니, 당연히 살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 이유가 없으면 사는 만큼 고통스러운데, 그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은 알아서 죽은 것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개인기피증이 생기면 그것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는가? "모두 너 때문에 그렇다" 라고 하는데,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가정은 니가 파탄을 내었어"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남자는 바보등신이 되어서 그런 것을 모르는데, 여자의 그 아픔을 말이다. 그래서 남자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면 된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게 남자라는 말이다.

◈ 여자는, 남자의 '마이너스' !!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여자' 라고 하는 것은 자기보다도 비어있는 어떤 자리와의 관계에서, 즉 어떤 비어있는 자리와의 관계에서 여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남자가 보기에는 무엇인가? 남자가 따로 있고 여자가 따로 있는데, 하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자가 보기에 여자는 '마이너스 남자' 라는 것이다. 즉 뭔가 남자가 있고 나서, 그 남자의 여자가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남자가 여자를 실망시키게 되면 여자는 그야말로 몸 둘 바를 모르는데, 즉 자기 정체성이 파괴되고 만다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에는 말이다. 그런데 남자는 결혼을 해도 '너 따로, 나 따로' 라고, 그렇게 결혼을 하기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서로의 그림자가 따로 있듯이 말이다.

◈ 여자는 무조건 보호를 해주어야 !!

하지만 여자는 이미 남자가 자기의 그림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여자는 남자하기 나름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가정은 남자가 하기 나름인데, 남자가 따뜻하게 여자를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대전에서 결혼식 주례를 하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혹시 주례사를 읽어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무조건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니 시비를 거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즉 "내 아내가 이단에 빠졌는데도 보호해주어야 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단에 빠진 것은 자진해서 남자의 보호를 거부한 것이기에 보호대상이 아닙니다" 라고 답변해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결혼하게 되면 모든 것을 남자에게 다 맡기기 때문에, 또한 남자들은 그것을 눈치채고서 그 다음부터는 부담을 느낀다는 말이다.

◈ 너희들 요즘도 그것을 하나?

이것은 여담이지만, 나이가 50줄이 된 아줌마들이 모여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노닥거리는데, 강의가 여기까지 이렇게 은밀하고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누군가가 "너희들은 요즘도 그것을 하나?" 라고 물으니, 그 답변이 무엇인고 하니, "가족끼리 무슨 그것을 해!"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이게 참 거시기한 것인데, 남자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남자를 여자들은 평생을 믿고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이것이 둘 다 '육(肉)'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빨리 제대를 하라는 것인데,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무슨 믿을 게 없어서 남편을 다 믿는가? 차라리 사도바울처럼 혼자 살아라" 라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믿지 말아야될 인간은 믿었구나" 라고 하는 것을, 사실은 따지고 보면 남편을 믿은 것이 아니고 이용한 것인데, "내가 낳은 자식과 나를 위해서 너는 고생해" 라는 식으로 말이다. 돈을 버는 머신으로 사용한 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둘 다 똑같은 입장이 되고 말았는데 말이다. 이용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전혀 다른 기준이 왔어요 !!

아무튼 이런 것이 바로 육인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 라는 것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기존의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전혀 다른 기준이 왔다는 것이다. 즉 "니가 얼마나 행복한가? 불행한가?" 라는 것은 논의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상류층인가? 하류층인가?" 라는 것은 요한계시록에서는 전혀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죽도록 충성하라 !!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라는 것, 그것으로 끝이란 말이다. 즉 "차라리 예수님을 위해서 죽어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기준자체가 얼마나 과격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렇게 "죽도록 충성하라" 라고 했으면 충성의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평소에 인간은 누구에게 충성했는가? 자기 자신에게 했는데,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누구를 조지려고 그런 위험한 이야기를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주님은 왜 "죽도록 충성하라" 라고 하셨는가? 그게 여기 교재 70페이지 중간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자기 힘으로 죽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의 힘으로 죽이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인가? 이 땅을 힘들게 살아가도록 하시는데, 그러니 결국은 죽음으로 조지신다는 것이다.

◈ 아하, 주께서 조지시는구나 !!

그것을 미리 아는 사람은 성도이고, 하지만 "나는 살아야하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살아가는데 힘들게 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짜증을 내면서 따지는 사람은 마귀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제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기적입니다. 살려주실 때까지만 살겠습니다" 라는 사람은 성도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살은 하지 말고, 또한 돈을 잘 버는 신랑과 이혼도 하지 말고 말이다. 만약에 남편이 바람이 나더라도, 만약에 제가 그 입장이라고 하면, "주여, 물증이 나오지 않게 하소서" 라고 하면서 살지 싶은데, 남편이 무엇이라고 말이다. 먼저 자식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게 되면 불똥이 자식에게 튀는데, 부모가 되어서 자기들 감정만 챙겨서, 정신적으로 어린 연약한 아이들에게 트라우마를 줄 수 있는데, 계속해서 살아가면서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자시들이 "엄마 아버지가 싸워서 우리 인생의 좋은 기회를 다 날려버렸다" 라고 하면 곤란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 제발 물증아 나오지 마라 !!

그러니 남편이 바람을 피운 것에 대해서 심정이 생긴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하면, 물증이 아직 생기지 않은 것도 역시 누구의 뜻이란 말인가? 그것도 역시 주님의 뜻으로 여기고 감사한 마음가짐으로, 즉 "제발 물증아 나오지 마라" 라고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물증이 나와도 가만히 있는 것은, 그것은 바보가 아니라면 같이 살아도 남남으로 살아가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그러면 조치를 취해야하는데, 그것은 또한 힘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경고를 몇 번 던지게 되면, 남자는 또 그것을 아는데, 그래서 "자기야, 우리 너무 자주 만나지 말고, 일주일에 한 번만 만나" 라고 하면서 조치를 한다는 것이다(ㅋㅋ).

성경에 보면,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믿음 외에는 더 나가지 말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과 이벤트들은 주님이 다 알아서 설치를 하고 배치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것들에게 대해서 너무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 가정주부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게 문제 !!

집에서 노는 가정주부들이 문제점이 바로 그것인데, 아이들을 키운다고 정신이 없는 주부는 예외이고 말이다. 시간이 남아도니 자꾸만 상상을 해서 그 비밀의 영역을 넓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제일 좋은 것은 집에만 있지 말고 직장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집에 오면 피곤해서 어떻게 되는가? 그냥 씻고 자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자기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지, 꽃뱀에게 걸려서 헤매고 있는지, 그런 것은 관심도 없고 그냥 씻고 자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런 것이 편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일일이 다 챙기게 되면 남편들이 참 힘든데, 왜냐하면 완벽해야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완벽하고 퍼펙트한 남자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 나는 죄인입니다 !!

아무튼 "죽도록 충성하라" 라는 것은, 스스로 순교하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주어진 상황이 주님의 뜻인 줄 알고 감사하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감사하는 것이 자기를 죽이는 것인데, 그런데 감사가 나오지 않고 짜증이 나온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범사에 감사하는 자는 어떻게 나오는가? "나는 이미 죽은 놈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그 상황에 대해서 자기가 판단하기에 앞서서, 먼저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언제나 간주하고 판단을 하든지 해야한다는 것이다.

◈ 돈은, 더러움과 더러움이 만나면서 !!

지난번에 천안에서 오신 아가씨의 경우에, 안양의 성경공부에도 참석했는데 말이다. 그분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어둡고, 또한 모두가 다 위선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지금 자기가 하는 일들보다는 조금은 더 깨끗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깨끗한 곳에서는 돈이 생기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돈이란 것은 무엇인고 하니, 더러움과 더러움이 서로 주고받고 하는 그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러니 손에 떼를 묻히지 않고 돈을 벌겠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돈이 그렇다는 말이다.

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보면, 유대인 악덕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 이라는 자가 약속대로 돈을 갚지 못한 대가로 상대방의 살점을 요구하는데, 그런데 재판관이 뭐라고 하는가? 살점만 찢어내는데, 단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말라는 판결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애초부터 말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주님보다 더러운 곳에 간 자가 있는가?

그러니 자기도 한 통속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세상 속에 자기가 놓여있다는 것 자체가, 주께서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해놓으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것보다 더 더러운 곳까지 내려가셨는데, 그러니 우리가 무엇이 잘났다고 발만 담그고 있다가 빼내려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그런 곳을 찾아서 가면 안 되는데, 사창가를 가든 그 어디를 가든, 그런 것은 일종의 마귀의 시험이니 말이다. 다만 현재 주어진 것은 우리에게 다 주님의 뜻이 있어서, 즉 "너는 이 정도다" 라고 하시면서 주신 환경이라고 하면, 그 환경에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권사님의 경우에도 평생을 살아온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하는데, 좋은 신랑을 만난 것도 감사해야하고 말이다. 물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권사님은 속으로 "목사님은 잘 몰라요. 제가 다 키웠습니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웃으시는 것을 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ㅋㅋ).

◈ 인간은 죽음의 바탕 위에서, 매일 기적적으로 !!

우리 인간은 본디 죽음의 바탕 위에서 매일같이 기적적으로 살려줌을 당해서, 그렇게 해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런데 인간은 어떠한가? 물에 빠진 것을 건져놓으면 자기 보따리를 달라고 하듯이, 자기가 잘나서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 욕망을 펼치게 되는데,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이 전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은 그야말로 사람을 완전히 조져놓는데, 7년 대환난이 문제가 아니라 종말 자체가, 즉 예수님이 떠나버린 세상 자체가 지옥이고, 우리는 그런 지옥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 다시는 보지 못할 지옥을 앞당겨서 실컷 맛보도록, 그래서 성도를 이 세상에서 살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70페이지를 보자.

** 잠언서 27장 24절에 보면,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하나니" 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존재가 늘 비존재의 바탕 위해서 출몰한다는 말입니다. 또 잠언서 28장 22절에는 아주 재미있는 말씀이 나오지요.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급하다" 라고 되어있는데, 펀드매니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존심을 버리라는 겁니다.

(잠 27:24)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

(잠 28:22)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잠언서에서 이런 구절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른 편에는 장수가 있고, 왼 편에는 부귀가 있다" 라고 하는, 그런 구절들을 좋아하는데, 물론 그것도 자기가 원하는 의미가 아니지만 말이다. 재물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잠 3: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리고 성경의 다른 곳에 보면, 그런 재물로서는 자기의 죄를 속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그러니 이게 얼마나 결정적인 말씀이냐는 것이다. 돈이 많다고 해서 환영을 받는 것은 이 지옥과도 같은 세상에서 국한된 일이고, 천국에는 돈이 많다는 것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기의 돈으로 자기 생명을 건져낼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은 돈을 주고 구걸할 대상이 아닌데, 어차피 우리 생명은 죽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미련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 예수님의 생명으로 교체 !!

그러니 그런 죽은 것을 다시 살리겠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인데, 다림질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의 생명으로 교체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어린양을 피를 발라서 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어린양의 피로서 우리의 피가 교체되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생명에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그것은 예수님의 살았던 한 평생이 우리에게 들어온다는 의미이고, 그러면 예수님의 믿음, 소망, 사랑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왔다는 의미이고, 그러니 이제 죽고 사는 것은 아버지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우리가 신경을 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그야말로 개뿔도 아닌 마귀 !!

그렇게 죽고 사는 것을 우리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하면,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쓸데없는 것에, 그러한 염려와 공포와 두려움, 그렇게 우리가 마귀에게 시달리면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개뿔도 아무 것도 아닌 것에게 우리가 협박을 받으면서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억울한지 모르는데 말이다. 우리는 아무런 권리도 없는 존재에게 "너는 죄인이기에 지옥에 간다" 라고 하면서 협박을 당해왔다는 말이다.

그런 마귀의 종들이 바로 목사들인데, 신부들이고 말이다. 주님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런데 목사와 신부들이 정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용돈이라도 좀 주면서 잔소리를 하면 몰라도, 오히려 월급을 받는 주제에 말이다. 사실은 돈을 주는 것이 더 큰 문제일 수도 있는데, "집사님, 요즘 많이 힘들죠?" 라고 하면서 생활에 보태라고 돈을 주는 동시에 목사는 갑이 되고 상대방은 을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박힌 눈알이 악하기에 !!

그리고 여기 교재에서, 잠언서 28장 22절에는 아주 재미있는 말씀이 나온다고 했는데, 거기에 무슨 재미있는 말씀이 있는가?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급하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게 과연 재미가 있는 말씀인가? 이 문장의 순서를 한 번 바꾸어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재물을 얻기에 급급한 자는 그 눈이 악하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얼마나 박힌 눈알이 악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돈밖에 없느냐는 말이다. 이 말씀이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혜라는 것인데, 즉 "나 예는 결코 이렇게 하지 않았다. 반면에 너희들은 이렇게 살기 때문에, 나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너희들이 나를 죽였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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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8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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