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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 8월 9일 강의 교회를 넘어서 6, 새 언약 4강의에스겔

대구 8월 9일 강의 교회를 넘어서 6, 새 언약 4

이름 : 이근호(IP:)

011 20040809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4대구/대구040809교회를넘어서6새언약4.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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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220.♡.176.150)

09-05-19 17:07

대구040809교회를넘어서6새언약4

[04 대구강의 12] - 교회를 넘어서 6 - 새 언약(에스겔) 4

04,08,0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돌판에 새겼다 ??

오늘은 교재 ‘교회를 넘어서’ 241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언약궤가 없는 이유가 더 이상 문자로 된 돌판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돌판에 새겼다” 라는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새겨진 말씀을 하나님 쪽에서 취소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돌판에 새겼다는 것이다.

이 돌판을 중심으로 제사를 드리는 핵심공간을 차지한다는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인데,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이 신이 섬길 때는 신의 형상을 가지고 섬기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을 썩어질 버러지 형상으로 만들어서 섬긴다고, 책망하는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 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가?

아무튼 하나님은 그런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신의 형상이 있는 자리에다가 말씀을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런 점이 어려운데, 이슬람교의 경우에 나름대로는 구약을 믿기 때문에, 그래서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니, 그들은 시키는 대로 모든 것이 형상이 아니라 기하학적이라는 것이다. 즉 문자나 도안으로 되어있지 형상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한다고 구약성경을 과연 제대로 지킨 것인가?

◈ 형상 대신에 ‘말씀’으로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형상과 무형상이 있다면, 그 무형상도 종착점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해서, 자기들은 만들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실 불교도 원래는 형상이 없는 종교인데 말이다. 힌두교에서 나와서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불교는 완전히 무속신앙이기 때문에 형상이 있고 말이다.

◈ 힌두교와 불교 !!

불교는 취지는 고통을 없애는데 있는데, 그래서 힌두교가 불교를 어떻게 공격하는지 살펴보면 재미가 있는데, 인도에서 12세기가 되면 불교는 힌두교에 편입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 불교가 사라지는고 하니, 불교가 너무나 실용적으로 흘러서 그러한데, 즉 고통을 없애는 하나의 용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에서는 아프지 않는 것이 곧 진리이기 때문에, 인도의 힌두교에서 보면 참으로 천박스럽기까지 하다는 말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어놓았는데, 그런데 인간이 그런 신은 모르겠다고 하면서, 자기 고통이나 없애려고 하고, 그렇게 인간들끼리 주물럭거려서 그것이 무슨 절대진리이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는가? 정작 인간을 창조한 신은 도외시하고, 인간들끼리 모여서 고통이 어떻고 저떻고 하니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힌두교에서 하는 이야기가 일리가 있는 것이, 그런 신을 찾지 않는데 어떻게 고통이 사라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의 근원과 뿌리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런 것은 모른다고 하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어떻게 번민을 없애느냐는 것이다. 무슨 신이든지 신이 있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 고통을 없앤다고 하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즐겁다고 하는 적극적인 의미로 나가려고 하면, 반드시 신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철학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요즘 철학이 신이 없다고 큰 소리를 치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은밀한(?) 곳에 들어가면 모두 신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신은 전혀 소용이 없지만, 그러나 인간의 호기심과 궁금증은 신이 없으면 결국에는 밑 빠진 독이 되어서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말이다. 심지어 물리학이나 천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형상을 만들지 말라 !!

그러니 하나님께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 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참 잘했지요?” 라고 하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 형상의 자리에 무엇이 들어가는지 바라보면서, 즉 언약은 그냥 언약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완성상태를 일시적으로 내려다보는 상황이라고 여기면 된다는 것이다. 말이 좀 어려운가요?

다시 말해서, 이 언약이 완성된 상태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신의 형상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신 곳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언약의 마지막 최종점에 도착이 된다는 말이다.

이 성전을 건축물로 간주를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공간이 둘로 쪼개지는데, 즉 성전 안의 공간과 밖의 공간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한쪽은 가만히 있어도 세속이 되어버리고, 다른 한쪽은 가만히 있어도 거룩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러한 성전을 처음에 허락한 것은, 인간이 신을 섬긴다고 하는 것이 기껏해야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 아니, 신전이 없다니?

그러니 옛날의 헬라인들이나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신전을 지어야 비로소 신이 생기는데, 즉 그들에게 있어서 신전을 만들지 않으면 신은 없다는 것이다. 신전을 지어놓으면, 비로소 신은 신전을 찾아서 온다는 말이다. 거기에서 비로소 개별적인 만남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즉 신전이 있어야, 신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어떤 분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목사님, 교회를 가야한다면 어떤 교회에 가야합니까? 그냥 집에 있으면 좀 찜찜한데 말입니다” 라고 말이다. 오늘날 현대의 과학문명 속에서도 그러한데, 옛날에는 오죽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신전도 없이 신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라는 말이다.

◈ 성전허락은, 인간의 근원적인 한계성을 !!

아무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신전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한계성을 들추어내기 위한 일종의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은 에스겔에 의해서 예언이 되었는데, 그것을 지난 시간에 공부했는데, ‘새 성전’ 이라고 말이다.

그런 새 성전은 무엇을 허락하지 않는고 하니, 옛 성전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는 취지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 성전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면, 옛 성전이 과연 무엇인지, 그것을 함께 질문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허물어져야만 하니 말이다. 그러니 질문을 제대로 하려면 “목사님, 허물어져야 하는 옛 성전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라고 말이다.

성경적으로 보면 사람의 손으로 지을 수 있는 것은 다 허물어져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본인이 직접 세우지 않은 것은 모두 무너지게 하시는데, 이것이 시편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어느 교회인가? 동부교회인가? 우리교회인가? 어느 어느 교회라고 지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요한계시록 2장부터 나오는 ‘일곱교회’ 라는 것이다.

◈ 일곱교회는 있는가? 없는가?

이 일곱 교회를 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실제로 이 일곱교회가 분명히 있었는데, 그런데 없다는 것이다. 이 일곱교회는 지상에 없는데, 이 일곱 교회는 인자가 되신 예수님의 오른손에 있다는 말이다. 오른손에 있는 일곱교회가 분명히 있는데, 그런데 어느 교회가 일곱교회인지는 수시로 들락거린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인 빌라델비아 교회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들어갔다가 나왔다는 말이다. 그렇게 칭찬을 받았던 빌라델비아 교회가 지금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난해한 이유는, 인간들이 지상에 있는 것을 담보로 해서 신의 뜻을 찾아가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을 하면서도 거부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굉장히 어렵다는 말이다. 거부를 하면 처음부터 용납을 하지 않으면 좋은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용납을 하는데, 나중에는 다 거부를 한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 요한계시록에는 어린양의 희생으로 인한 충돌이 !!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상과 천상 사이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어린양의 희생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어린양의 희생의, 그 피가 왜 생겼는가? 그것은 인간 쪽에서 눈에 보이는 현상을 가지고 신의 뜻이라고 간주해서, 그것을 수집하고 정리정돈하고 합리적으로 체계화를 시켜서 신의 계시라고 하면서 위로 타고 올라가는데, 그런데 그것이 위에서 내려오는 어린양과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일기예보와 같은데, 즉 밑에서 올라오는 북태평양 온난전선과 위에서 내려오는 시베리아 한랭전선이 충돌해서 엄청난 먹구름이 생기고 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줄기차게 퍼붓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말이다. 그 십자가의 죽으심이 마지막에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있어서 지금 이것보다 더 확실한 해석은 없는데, 밑에서 인간들이 이 세상의 현상을 모아서 신의 계시라고 가지고 올라오는 것과, 위에서 내려가는 어린양과 마주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밑에서 신의 계시라고 하면서 수집하는데 있어서 자기들끼리 하는가? 아니면 누구의 조종을 받겠는가?

인간의 힘으로만 수집을 했다고 여기는 것은 요한계시록 이전까지이고, 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에이, 갈 때까지 한번 가보자” 라고 해서, 드디어 바다 속에 숨어있던 옛 뱀, 궁극적인 하나님의 원수이고 적이 자기 정체를 도저히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가 없어서, 바다에서 올라와서 드디어 총동원령이 내려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새로운 천국을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신바벨론’ 이라는 말이다.

◈ 신바벨론 국가의 등장 !!

이 신바벨론에는 3가지 요소가 있는데, 왕이 있고, 그 배후에는 악마가 있고, 또 그러한 악마의 편에 서서 종교를 만드는, 즉 어린양의 흉내를 내는 종교가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 있는 바벨론 국가를 옹호하는 신바벨론, 즉 악마의 나라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결국에는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은 결국 악마의 나라가 맞잖아” 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위로 올라가면 반드시 부딪치는 것이 있는데, 요한계시록에서 있어서 밑에서 올라가는 것과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말이다. 그러니 모든 개념자체가 우리가 기존의 알고 있던 것과는 더욱 세분화가 되는데, 그 증거로서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부활을 이야기해도 둘째 부활이 있다는 것이다. 즉 부활을 둘로 나누어버린다는 말이다. 사망도 역시 둘로 나누어서,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요한계시록이 처음인데, 그 이전에는 이런 개념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왜 부활을 둘로 나누는가? 종교라는 것이 왜 있는고 하니, 영혼불멸인데, 즉 자기를 영원히 불멸하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죽기 싫다는 것인데, 물론 이 땅에서는 죽지만 다른 곳에 가서는 영원히 살고 싶다는 말이다.

◈ 신의 메시야를 믿으면 영원히 ??

그러한 불멸을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영생이라는 이름으로 통용이 되는, 그렇게 인간들에게 나올 수 있는 최후의 아이디어인데, 즉 “신의 메시야를 믿으면 영원히 살 수가 있습니다” 라는 것이 사기라는 것이 이 요한계시록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예수를 믿어서 영원히 영존하기 위해서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심보로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완전한 사기인데, 그것이 바로 지상에서 신에게로 올라갈 수 있는 인간에게서 나온 마지막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런 것이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된다는 것이다.

◈ 왜 첫째 부활이고, 둘째 부활인가?

그런데 그런 인간세상의 부활개념이 이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에 의해서 걸러지는데, 즉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가 자기를 사랑해서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첫째 부활에 의해서 다 걸려서 넘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리 호락호락하신 분이 아닌데,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다 잘려버린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들을 위해서 지옥이 준비되어있는데,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는데, 주님은 그 원칙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라는 말인데, 자기가 누구를 믿어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천국에 가는데는 돈이 들지 않지만, 그러나 !!

요즘 교인들의 특징은 돈도 들이지를 않고 천당에 가려고 하는데, 물론 천당에 가는데는 전혀 돈이 들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어긋나는데, 즉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천국에 가는데는 돈이 들지 않지만, 그런데 교인들은 왜 돈을 내지 않으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해서 돈을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말씀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아는 교회를 찾아다닌다는 것은, 돈도 내지 않고 천당에 갈 수 있는 멋진(?) 곳을 찾아 다니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세금을 10%나 내어야 하는데, 여기는 그런 세금이 전혀 없더라는 말이다. 이런 것은 목사가 제 아무리 트랩을 만들어도 소용이 없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그 트랙을 통과하고 기어이 천당에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주님에게는 전혀 통하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경제가 어렵고 힘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비록 우간다나 아프간처럼 되어도 주님의 사랑은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말이다. 즉 은사이고 선물이라는 것이다.

◈ 아하,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

복음을 아는 목사의 눈은 얼마든지 속일 수가 있지만, 그러나 주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그렇게 사랑이라는 개념을 집어넣으면 인간이 “우리가 무엇을 할까요?” 라고 하는 행함이 다 깨어져버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자기의 행함을 사랑하지 않을 때, 그때 비로소 사랑이 나온다는 말이다.

어제도 그런 말을 했는데, 과거의 자기 행함을 잊어버릴 때 인간은 비로소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이 자기가 과거에 행한 것을 의식하게 되면,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무엇을 하더라도 하기 때문에, 결코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사랑하는 친구를 만나도, “이전에 내가 내었으니 이번에는 니가 밥값을 내라” 라고 하면, 그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기에 결국은 계산적으로 나가는 것이지 결코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야, 오늘 우리가 처음이지. 그렇지? 내가 낼게” 라고 해야 한다는 말이다. 언제나 만나던 친구라고 해도 말이다.

◈ 주님은 매일같이 우리를 버리고 우리를 되찾는다 !!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표현을 하자면, “주님은 매일같이 우리를 버리고 우리를 되찾는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래서 잃었다가 다시 찾는 그 기쁨을 함께 누리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아하, 나는 잃어버려도 너무나 당연한데, 주님은 또 다시 찾으시는구나” 라고 하면서. 그렇게 주님의 사랑을 느끼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형상은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옛날에 그렇게 무서웠던 십계명의 완성이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그때는 예수님이 제사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즉 우리의 모든 예배와 경배의 중심의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경배하고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할 때 비로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이다.

◈ 세 분의 시어머니를 어떻게 동동하게 ??

이것은 우리의 상식과는 어긋나는데,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은 무엇인가? 2인자에게 잘해주면 1인자가 질투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삼위일체에서 1인자가 성부이고 2인자가 성자이고, 3인자가 성령인데 말이다.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나누면 서로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니, 그레고리의 3인의 신학자들 이후에는 동등하다고 해서, ‘페리코리시스(?)’ 라는 원칙에 의해서, 한 분이 일을 하면 모두가 달려든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되니까, 하나님을 모시려고 하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프게 되는데, 왜냐하면 한 쪽을 섬기니 두 시어머니가 그만 질투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같이 동등하게 대해주려고 하니, 그 얼마나 시집살이가 고된지 모른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경배해야 !!

하지만 성경은 그러한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어서, 분명히 구약에서 이야기하기를 “하나님의 이름을 경배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다” 라고 말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주님인데, 신약 때는 그 이름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말이 맞는고 하니, 하나님의 언약 속에는 “하나님을 잘 섬겨라” 라고 하는 것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앞으로 이렇게 일을 한다”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고 어려운 말인데, 다시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섬겨라” 라고 하는 요구조건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는 이런 이런 식으로 일을 한다”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 근호야, 내가 탕수육과 잡채를 해줄게 !!

그러니 이것이 우리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것인데, 즉 “우리가 무엇을 해드릴까요” 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보따리 속에는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이 담겨있는데, 즉 “내가 앞으로 이렇게 이렇게 한다. 그러니 그것을 믿어라” 라고 말이다. 우리 인간을 무엇을 해드려야 하는지, “탕수육을 해드릴까요? 아니면 잡채를 해드릴까요?” 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오히려 “주께서 이런 탕수육과 잡채를 해주는 것을 믿는가?” 라는 말이다.

그렇게 주님이 스스로 만들어낸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오직 그런 사랑에 포착된 자들만이 사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계힉을 하나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을 시키는데, 바로 그것을 믿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는 말이다.

◈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야 !!

그러니 우리가 설교하면서 교인들에게 행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것만 이야기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님, 저는 믿기는 믿는데 그대로 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면, 그러면 뭐라고 하면 되겠는가? 그러한 것은 애초부터 행함이 없는 믿음이기에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야고보서는 바로 그럴 때 필요하다는 것이다. 얼마나 멋지게 써먹었는가?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행함을 강조해서 굳이 짝을 맞추어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상술이 불과하고, 오히려 “행함이 없으면 가버려라. 그것은 믿음도 아니야”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야고보서를 이야기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야고보서를 보면서 뭐라고 하는가?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어요? 그러면 이렇게 행하시면 됩니다” 라고 하니, 그렇게 믿음을 있는 것으로 보니 그것이 얼마나 수상하냐는 것이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도 아닙니다. 그냥 안녕히 가세요” 라고 끝을 내면 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성경에 이런 구절이 나오면, 돈이 되는 쪽이 아닌 그 반대로 보면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曰, ‘내가 하겠다’ !!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언약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인간의 ‘하라’ 라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예수님을 보내셔서 인간이 하지 못하는 일을 온전히 이루시는 일을 하겠다고 하는, 바로 그러한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 바로 이 언약 속에 담겨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성전’ 이라는 건축물을 허락하신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 봐. 너희 인간들은 안 되잖아” 라고 하는 것이 담겨있는데, 그러니 아무리 금반지나 은반지를 바쳐서 성전을 지어도, 그것은 바벨론의 불화살에 다 타버리고 흔적도 없다는 것이다. 지금 전혀 남아있지를 않다는 말이다. 아무리 다윗성전이 아름답고 정성껏 지어졌다고 해도 말이다.

◈ 아니냐, 아니야 아니야 !!

그렇게 소멸이 된다고 하면 교회도 없어지는가? 예레미야가 왜 기존 성전을 가로막고 “이것은 성전이 아닙니다” 라고 3번씩이나 외쳤는가? 그것은 정말이지 성전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데, 예레미야는 미래를 바라보는데, 그 미래를 바라보니 지금의 이 성전은 전혀 성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언약대로 해서 되어지는 성과는, 철저하게 인간의 노동과 공로와 의지가 조금이라도 포함이 된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결코 포함될 수 없는데, 그러면 인간을 왜 일하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죄악 된 한계와 그 범주를 알리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마치 다윗에게 성전을 허락한 것처럼, 인간의 죄가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져 있는지, 그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 에스겔서를 공부하면서, 여기서 말하는 성전구조를 마치 시뮬레이션과 같이 살펴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전에 들어가서 거기에 배치되어있는 비품들, 또한 새 성전의 구조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하실 일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모습이나 신체적 기능이 아니고 하실 일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야만 이 에스겔서를 제대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거룩을 만들어낸 하나님의 행위가 곧 ‘선택’ !!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새 성전에는 거룩이 넘친다는 것인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도 역시나 거룩이 넘치는데, 그렇다면 그런 거룩을 만들어낸 하나님의 행위를 가지고 여러분들이 잘 아는 ‘선택’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잘 모르는가?

그러한 예수님에게 따라붙는 것 가운데는 ‘택한 자’ 라는 것이 있는데, 즉 “나의 택한 자, 내 아들을 보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택한 자에게는 반드시 성령이 오시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택한 자에게 성령이 온다는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까,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지목해서 구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택한 자에게는 반드시 성령이 따라붙어서 !!

그러니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과연 저것이 복음인지, 아닌지” 라는 것을 구별하는 방법은, 스스로 자기가 지목하고 결단해서 구원이 되는 일이 일어나면, 그러한 요소가 있으면 전혀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전도를 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주께서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라는 것이 믿어질 때, 그때가 바로 복음을 제대로 전파한 순간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디오피아 내시가 빌립 집사와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내시가 이사야 53장을 언급하면서 여기서 고난받는 종이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빌립은 그 대목으로 시작해서 누구를 소개했는고 하니, 질문은 고난받는 종이 누구인지 물었는데 말이다.

여기서 빌립은 누구를 믿으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즉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을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 그 내시가 믿음으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말이다.

(행 8: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행 8:28)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
(행 8: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 사도바울의 ‘믿어라’ 라는 의미는?

물론 사도바울은 ‘믿어라’ 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그 사람 속에 믿음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사도바울이라고 할지라도, 제 아무리 ‘믿어라’ 라고 말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가 그렇게 ‘믿어라’ 라고 하는데, 왜 믿지를 않느냐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12번이 아니라 120번을 해도, 상대방에서 믿음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믿으라는 이야기를 뺀다고 해서 믿지 않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TV드라마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믿으라고 하면, 그 드라마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고 하지, 아무리 믿으라고 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관심이 있는 있는 사람은 그 드라마를 이야기만 해도 동의를 한다는 말이다. 굳이 믿으라고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 성령께서, 믿을 사람은 믿도록 !!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예수님을 이야기만 해도 믿을 사람은 동의를 하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전혀 인간이 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보내신 것도 하나님이고, 또한 믿게 한 것도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즉 누군가가 설득을 잘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믿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4절에서 뭐라고 말하는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도바울이 설교를 많이 하고 복음을 많이 전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결코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고전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 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과연 사도바울이 재벌이 되었는가?

요즘 칠곡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기존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아서 하는 일이 잘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는고 하니, 그냥 간단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천하 최고의 신앙이 누구인고 하니 사도바울이고, 복음의 도사들이 12제자들인데, 그들이 도대체 어떻게 살았느냐고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과연 그들이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살려고 했느냐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재벌이 생기고, 날로 날로 연봉이 올라갔느냐고 말이다. 인기몰이를 하고 말이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믿음이 좋은 것으로 그만이지, 더 이상 무엇을 바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믿음이 좋았으면, 돈이 더 생기지 않아도 감사했느냐는 것이다. 그 어떤 반대급부가 주어지지 않아도 말이다.

그러니 교인들이 얼마나 성경을 보지 않고, 또 목사들이 얼마나 성경을 의도적으로 숨기고 가렸으면, “믿음이 좋으면 복을 받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느냐는 말이다. 사기를 쳐도 대낮에 그렇게 노골적으로 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 금메달을 딴 사도요한도 밧모섬에서 !!

믿음의 금메달을 딴(?)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순교를 당했는데, 아마 다른 사람 같으면 데모를 했을지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그렇게 믿음이 좋은 자기를 이렇게 섬에 처박아놓고 죽이니 말이다. 하지만 사도요한은 거기서 계시의 말씀에 취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너무나 좋아서 말이다. 스데반 집사도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해서 기쁨으로 복음을 전했고 말이다.

그러니 돈과 믿음은 전혀 별개의 문제인데, 그런데 기도를 해서 취직을 하려고 하고 시집을 가려고 하고, 또한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하니, 그것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요즘 학원이 장사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 아이들을 다단계 판매를 하는 식으로 집어넣어서, 아이를 한 명 데리고 오면 상품권 3만원 권을 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하는 말이, 자기 친구들이 돈으로 보인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이미 주일학교에서는 행운권을 발행하고, 그것도 안 되면 그 다음에는 로또복권을 나누어줄지 누가 아느냐는 것이다. 아마 이미 주는 교회도 있지 싶은데 말이다. 이전에는 사행심을 조장하니 어쩌고 하면서 비판하다가 이제는 교회가 앞장을 선다는 것이다.

◈ 자, 로또복권을 받아가세요 ??

처음에는 주일학교에서 하다가, 그 다음에는 중고등부, 그 다음은 청년회, 그러면 그 다음은 어디이겠는가? 총동원주일을 한다면서 밀가루를 주고 쌀자루를 주고, 심지어 일당도 나누어주고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러한 상술을 발휘하는 사람을 자기 종이라고 여긴 적이 없는데, 성경에 그러한 대목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교재 243페이지에 ‘텅 빔’ 이란 말이 나오는데, 한번 찾아보자.

** 지성소 안에 신의 형상은 없고 오직 텅 빈 공간만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은, 만남의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그 어떤 인간들의 노력도 하나님이 거부하고 부정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성소 안이 텅텅 비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말인데, 이 ‘텅 빔’ 이라는 것에 의미가 얼마나 함축이 되어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튼 새 성전은 이렇게 텅텅 비어있는데, 여기에는 십계명도 없고 언약도,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 교회는, 자기 죽음의 자리를 확인하는 곳 !!

그러니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온 사람들은 결국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얻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죽음의 자리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사람들을 교회로 부르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죽음의 자리를 확인하라고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최후의 모습을 말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교회는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세웠다고 하는데, 그러니 오는 족족 하나님의 피 안에 들어오게 하고, 그것이 우리 장래의 모습을 미리 맛보게 하는데, 그렇게 주님이 미리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피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모든 자들을 만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 이것으로 모든 것은 끝 !!

이렇게 그 안이 텅텅 비었다는 사실, 즉 자기의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렸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을 해야하는가? 그러니 우리가 이 땅에서 “나는 목사다, 장로다” 라고 하면서 뭔가를 가졌다고 하는 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가진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니 안에 내 피가 들어있다” 라는 것인데, 그것으로서 모든 것은 다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피로 값 주고 산 구원인지, 아니면 자기 돈을 주고 구원을 따낸 것인지, 그것을 구별을 하겠다는 말이다.

사실은 곰곰이 따지고 보면, 자기가 교회에도 다니지 않고 하나님도 믿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런데 복음을 아는 목사에게 자기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면,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예수’ 라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한 자는 어떤 직업을 가졌다고 해도, 남녀노소 모두가 다 지옥으로 가고,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 ‘예수’ 라는 양반이 내 인생을 묵사발로 ??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상대방이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 자기의 모든 것을 몽땅 다 빼앗기는 느낌이 들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만약에 그것을 믿는다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 ‘나의 인생’ 이라는 것이, 그 순간 예수님에게 공격을 받게 되는데,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자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예수라는 양반이 자기 인생을 묵사발을 만들었다고 하면, 어떻게 그것이 기분이 좋은 이야기가 되겠느냐는 말이다.

설령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믿을 수는 있을 몰라도, 그러나 그런 독선적인 이야기는 도저히 듣기도 거북한데, 더욱이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믿고 싶어도 지금 ‘나’ 라고 하는 자기의 모든 정체성이고 뭐고 간에 다 날아가 버리니 말이다. 그러한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면서 어떻게 그 예수를 하나님으로,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렇게 힘이 들어도 새벽부터 일어나서 보람찬 하루일과를 시작하곤 했는데, 하루 종이 일에 시달리면서 몸이 파김치가 되어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이제 그야말로 개뿔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렇게 자기의 자존심이 비참하게 뭉개지는 것을 어떻게 견딜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를 하겠는가? 소위 복음이라고 하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이 그따위 소리를 하는 것은, 예수를 이용해서 자기들 자존심을 세우고 돈벌이를 하려고, 그렇게 남들에게 기가 죽지 않으려고 그들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매일같이 기가 죽어서 지내는 것이 너무 억울해서 분풀이를 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그러니 지나가는 개가 짓는다고 여기고 무시해도 되는, 즉 전혀 귀담아 들을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 전혀 합당하다는 말이다.

◈ 여러분, 우리 솔직해집시다 !!

그래서 저는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윽박지르는데, “여러분들이 그런(?) 결론을 내어야 합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 결론에 도달해야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 그렇게 해야 그들이 다 가짜임이 들통이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결론도 없이 어물쩍 교회에 나오면, 다른 사람들이 속아서 넘어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형제이고 신자인 줄 알고 말이다. 그러면 목사도 설교하기가 참으로 힘드는데, 신자도 아닌데 신자로 여기고 설교를 해야하니 말이다.

방금 한 이야기를 명심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우리 곁에 오게 되면, 자기가 의사든지 변호사든지 간에, 그런 직업이나 돈을 얼마나 잘 벌든지 간에, 그런 것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자식이 공부를 잘 하든지 말든지, 재수가 아닌 삼수를 하든지 간에 말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롯의 경우에, 그의 사위들이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는데,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복음을 농담으로 여기고, 복음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을 하찮게 여기는데, 아닌가? 그렇게 해야만 정상인데, 그런데 자기는 돈과 복음을 다 중요하게 여긴다고 하니,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장사를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돈을 챙기겠다는 것은 자기 품위를 유지하겠다는 것인데, 하지만 십자가에서 벌거벗은 주님 앞에서 무슨 품위가 필요하고, 교회에 나와서 무슨 품위가 필요하냐는 것이다. 못난 인간들만 골라서 모였는데 말이다. 이혼을 하고 사고를 쳤다고 교회에 나오지 않고 말이다. 그것이 무슨 교회의 모습이냐는 것이다.

◈ ‘텅 빔’에 드디어 십자가가 꽂힘으로서 !!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텅 빔’ 인데, 물론 마지막에는 이 텅 빔의 자리에 무엇인가를 채우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새 성전이 텅 비었다는 것은 중간 과정이기 그러한데, 마지막 종착점에는 이 텅 빔에 무엇이 들어가는고 하니, 우리의 죽음, 다른 말로 하면 어린양의 피가 채워진다는 것이다. 어린양의 피가 말이다.

이렇게 되어서 ‘텅 빔’에 드디어 십자가가 꽂히게 되는데, 그렇게 됨으로서 이 세상에서 자기들끼리 자미나게 살고 있던 인간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무슨 일이 터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평소에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일이 터졌음을 말이다.

제가 여러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무엇인고 하니,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 속에 내려왔다는 것인데, 천지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냥 하늘에 곱게 계시면 되는데, 왜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에 친히 찾아오셨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백성만을 골라서 건져내기 위해서 그러한데,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냐는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늘을 보면 푸른데, 그렇게 푸른 하늘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냥 가만히 있다는 것인데, 안개만 끼고 얼마나 고요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번개가 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늘과 땅이 연결되었다는 말인데, 그래서 골프를 치다가 번개에 맞아서 죽고 말이다.

◈ 일단 하나님의 번개에 맞게 되면 !!

그렇게 번개가 친다는 것은 일단 연결이 되었다는 말인데, 그런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은 무엇인가? 푸른 하늘이고, 안개만 낀, 그냥 고요하고 조용한 하늘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시고, 이 땅에서 우리 인간들이 분주하게 일을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도 그것으로 그냥 만족하면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만 번개를 내리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손가락이 맞닿게 되는데, 마치 영화 ‘E.T’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미 와버렸는데, 그 다음부터 인간은 그렇게 오신 분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지, 새로운 숙제를 부담감으로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농담이라고 하면 모르겠는데, 그것이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다음부터는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오신 분을 어떻게 대하고 처신할 것인가?” 라고 하면서, 엄청난 부담감을 한 평생을 끌어안고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 근호야,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지만 주님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어떻게 착하게 살 것인가?” 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라”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 무엇인가? “니 죄를 알렸다” 라는 것인데, 즉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이다. 자기 중심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말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성령의 임해야 하는 것이지,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제단의 피가 중간과정으로서 !!

아무튼 이러한 ‘텅 빔’의 공간에 십자가의 피가 가득하게 되는데, 즉 제단의 피가 거기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제단의 피가 그 중간과정임을 우리가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마지막에 십자가가 꽂히니 그 중간 과정으로서 일년에 한 차례씩 피가 제사가 드려진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왜 제사의 제물이 변했는가?

이제 교제 245페이지를 보겠는데, 여기에 보면 제사의 물이 나오는데, 즉 어떻게 제사의 제물이 변했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텅 빈 공간에 이제 성신이 가득한 분에게 모든 거룩과 영광성과 기능을 양도해주어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제사제도가 변화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먼저 출애굽기를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민수기를 이야기하고, 마지막에 에스겔서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일부러 그렇게 제물을 순서대로 정리를 해놓았다는 것이다. 즉 제사가 어떻게 변천하는지, 그 과정을 한번 살펴보자는 말이다. 또한 변천을 하면서도 어떻게 보편성을, 즉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일단 교재 245페이지를 살펴보자.

** (1) 상번제
* 매일 어린양 두 마리를 드리되, 아침에 양 한 마리, 저녁에 양 한 마리를 드린다(출 29:38).
* 수컷 어린양 두 마리를 드리되, 아침에 양 한 마리, 저녁에 양 한 마리를 드린다(민 28:3).
* 아침마다 일년 된 흠 없는 어린양 함 마리씩 잡는다(겔 46:13).

이렇게 뭔가 다른데, 즉 처음에는 아침저녁으로 드리다가, 에스겔서에서는 아침에만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녁에는 제사가 없는데, 그것은 바로 제사가 점점 더 단순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제사가 함유하고 있는 핵심이 되는 내용을 향해서 질주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2) 안식일
* 일년이 되고 흠 없는 수양 둘을 바친다(민 28:9).
* 왕이 번제를 드리되, 흠 없는 어린양 여섯과 흠 없는 수양 하나를 상번제 외에 추가한다(겔 46:4)

그런데 안식일에 드리는 제사는 그만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데, 왜냐하면 추가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에스겔서에서 중요한 것은, 이 제사는 왕이 드린다는 점인데, 물론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는 제사장이 드리고 말이다. (그러면 오히려 복잡해지지?)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3) 월삭 - 매월 첫 날에 드리는 제사
* 수송아지 둘과 수양 하나와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일곱으로 번제를 드리고, 속죄제로는 수염소 하나를 바친다(민28:11).
*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와 어린양 여섯과 수양 하나를 드린다(겔46:6).

◈ 제물이 왜 바뀌는가? - 맹구야, 집에 가자 !!

제가 게을러서 그런지 몰라도 이렇게 복잡한 것은 싫은데, 원래 복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간단한 것을 좋아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무엇을 해도 예수님처럼 ‘단번에’ 라는 식이라는 말이다.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제물이 다른가? 처음에는 수송아지 둘과 수양 하나와 수송아지 하나로 드리다가, 나중에 에스겔에 가서는 어린양 여섯과 수양 하나로 제사를 드리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성경에서 상세히 설명을 하지 않기에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신학자들은 이런 아이디어를 내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제사에 들어가는 제물의 세칙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 환경에 따라서 조종을 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그렇게 짐작을 해본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당시 상황을 거의 알지 못하기에 왜 그렇게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4) 1월 1일
*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정월 달은,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탄생한 달이다(출 12:2).

(출 12: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시간’ 이란, 국가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이름의 일을 보조해주고 지시해주는 기능이 될 뿐이다. 정월 달 이 날은 모세가 성소를 처음 세우던 날이다(출 40:17).

(출 40:17) 제 이년 정월 곧 그 달 초일일에 성막을 세우니라

◈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은?

여기에 나오는 ‘시간’ 이라는 것이 참 어려운 말인데, 이것을 그림으로 설명을 해보면, 아무튼 이러한 성경에 나오는 인식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대적인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상당히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시간개념이 무엇인고 하니, ‘처음부터 새로 다시’의 개념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시간이란 흘러간다고 보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서 새로 시작하는, 그런 개념이라는 말이다.

◈ 월요일은 안식일을 위해서 !!

무슨 말인고 하니, 안식일은 시간에 포함되지 않는데, 오히려 시간을 멈추게 한다는 것이다. 즉 ‘멈춤’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안식일 속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데, 즉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단지 시간은 안식일을 향해서 지향하는 것으로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월요일은 왜 있는가?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데, 그러면 또 화요일은 왜 있는가? 역시 안식일을 위해서 있다는 말이다. 물론 수요일도 역시나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어떠한가? 월요일을 과연 누구를 위해서 있는가?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화요일도, 수요일도, 목요일도, 금요일도, 토요일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어느 조사를 보니, 현대인들의 69%가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데, 사실은 99.9%인데 말이다. 즉 목적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러니 “왜 사는가?” 라고 묻지를 말라는 것이다. 그때그때 목적이 나오면, 그 목적을 보고 그냥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월드컵을 하면 월드컵을 보는 재미로 살고, 올림픽을 하면 올림픽을 보는 재미로 살고 말이다. 주말에는 드라마 ‘파리의 연인’을 기다리면서 살고 말이다. 또 월요일에는 야구가 없는데, 그래서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월요일이 제일 재미가 없고 말이다. 아주머니는 곗돈을 타는 재미로 살고, 부모는 자식을 결혼시키는 재미로 살고, 고3은 대학에 들어가는 재미로 살고 말이다.

◈ 니체 - 너 자신을 발견하라 !!

그렇게 인간은 한시적으로 목적을 창안해내는 재미로 살아가는데, 그래서 니체를 뭐라고 했는고 하니, “너 자신을 발견하라!” 라고 말이다. 우리는 니체라고 하면 “신은 죽었다!” 라는 것만을 생각하는데, 그러나 이 말도 역시 유명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의지로 하기 나름인데, 그런 인간의 의지는 신도 말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기 속에 있는 신을 개발함으로서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단계 판매의 영업방식과도 일치되는데, 나아가 오늘날의 모든 경영학의 인간개발 프로젝트는 이런 니체의 사상도 일치가 된다는 것이다.

◈ 현대에서는, 목적이 없으면 시간도 소멸 !!

다시 말해서, 현대에 있어서 시간개념은 무엇인고 하니, 시간이 흐르는데, 그런데 그것은 자신이 만든 목적이 있으면 시간은 흘러가지만, 그러나 목적이 없으면 시간도 소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나이 70을 먹어서 할 일이 없을 때는, 이 시간은 가는지 안 가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렇게 엄청나게 심심한데, 그런데 벌써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간개념이 희박해지는데, 그런데 이 시간이 언제 튀어나오는고 하니까, 시간이 지향하는 목표점이 등장할 때, 비로소 시간은 그 목표점과 함께 등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애인을 만나려고 하면 시계의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기말고사를 치는데 주관식 수학문제를 좀 풀려고 하면, ‘그만’ 이라고 하면서 답안지를 거두어간다는 것이다. 아직 절반도 못 풀었는데 얼마나 아쉬운지 말이다. 물론 그것도 수학을 좀 하는 학생의 경우이고, 여학생들은 대부분이 그냥 이름만 쓰고 엎드려 잔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학생들의 경우에는 그 시간이 너무나도 지루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군대에서 사랑하는 애인이 면접을 와서 만났을 했을 때 시간은 어떠한가? 외박도 단 하루밖에 주지 않는데, 시간이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는데, 마음의 상처까지 내면서 정말로 냉혹하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손도 제대로 잡지 못했는데 하루가 다 지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전혀 기다려주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애인과 헤어지고 난 다음에는 그렇지 않고 말이다.

◈ 베르그송 - 시간은 단선이 아닌 다발성 !!

그래서 이것을 두고 ‘베르그송’ 이라는 철학자는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시간은 단선이 아니고 다발성이다” 라고 했는데, 즉 시간은 복선인데, 여러 가지 선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여러 선이 있는데, 어떤 목적이 등장하게 되면 거기에 맞는 시간이 나타나고, 또 다른 목적이 나타나면 거기에 적합한 선이 또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의식의 시간’ 이라고 해서, 베르그송이 그런 주장을 했다는 말이다.

아무튼 하나님에게 있어서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안식을 바라보는 자에게만 그런 안식이 느껴지는 것이지, 그렇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시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현대교회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안식의 자리에다가 자기의 구원을, 또 자기의 천국을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시간은 모두가 다 사기이고 거짓말이라는 말이다.

◈ 자기의 안식을 위한 시간은 모두 엉터리 !!

그런 가장 대표적인 것이 ‘666’이 마귀의 숫자니 어떠니 하고, 또 머리에 인을 맞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주장들인데,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 주장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성도라고 하면 오로지 하나님의 안식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인간들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이 아닌, 자기 구원을 말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구원에다 무엇을 집어넣겠는가? 자기 구원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런 시간 속에 당연히 자기가 구원받기 위한 조치들을, 즉 자기의 성화가 된 삶이라든지, 자기의 전도나 기도나 봉사 등을 마구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시간들은 엉터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대로 하면 하나님의 안식의 시간은 누가 쥐고 있는가?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데, 그러니 예수님 안에서는 시간이 없고, 매일같이 일하시는 예수님의 활동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죄인이고, 매일같이 의인이 된다는 말이다.

◈ ‘사귐’이 있다면, 그것으로 OK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이렇게 육신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가 40세에 교회를 세우고 50세에 무엇을 했고, 그러한 것들이 자기 구원이 안식이 된다고 하면 의미가 있는데, 하지만 하나님의 안식에, 즉 예수님 안에 있다고 하면, 자기의 육신은 전혀 의미가 없고, “주여, 저의 어떤 죄 때문에 십자가를 졌습니까?” 라고 하는 현재적인 예수님과의 교류만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귐’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지금의 사귐이 중요한 것인데, 과거에 얼마나 사귐이 있었는지가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지금 ‘나’의 주님의 되어서, 지금 ‘나’에게 명령을 하고 지시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나’를 인도하시는, 지금의 주님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안식 속에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즉 ‘그리스도 안’에 말이다.

◈ 출애굽을 하면서, 새로운 달력을 !!

그렇게 볼 때, 여기 ‘1월 1일’ 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는 4월인데, 그런데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면서 자체적으로 달력을 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의 4월은 아무 의미가 없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안식이 함께 있는 하나님의 날짜가 시작되는데, 그래서 그때부터가 1월 1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1월 1일에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게 되는데, 즉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월을 같이 겪으면서 동고동락을 하시면서, 즉 함께 동행을 하면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순간에 이스라엘은 돌입하게 되고, 1월 1일의 절기를 지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일단 안식일을 지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그 다음의 다가오는 안식일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식일에는 큰제사가 있는데, 즉 안식일 제사가 있는데, 물론 상번제는 매일같이 드리고 말이다. 그렇게 안식일에 제사가 있으면, 나중에 그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 예수님인데, 그러니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시간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 이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 안에 !!

그러니 한국교회에서 연말연시가 어떻고, 또 새해에는 어떻고 저떻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데, 그런 숫자가 적힌 달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구약에서는 매주 안식일마다 거룩한 날이 되는데, 그런데 신약에서는 그런 것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일성수는 말도 안 되고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내일 염려는 내일 염려하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매일같이 하루하루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성도라고 하면 이제는 단 하루라도 주님이 없는 살지 못하는, 그런 인생이 되었다는 말이다.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그러니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다음 돌아오는 주일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단장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것은 잘못인데, 이제는 다가올 주일을 내다보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한 순간 한 순간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단 한 순간이라도 주님이 없는 날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목사의 그러한 말을 아주 쉽게 번역하면, “다음 주일에 돈을 좀 많이 가지고 오세요”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4) 1월 1일
* 새로운 성전을 기약하는 에스겔에서 이날을 절기로 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수송아지 하나를 바치는데 성소를 청결케 하고 제사장이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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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9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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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