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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도행전 67강(가르침), 마태복음 58강(끝의 시선)강의전도서

사도행전 67강(가르침), 마태복음 58강(끝의 시선)

이름 : 이근호(IP:119.18.98.57)

공은주(IP:175.♡.147.179)

14-12-26 16:18

대전141125-행27장1절(가르침)67강 -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27장 1절에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라고 뒤에 여러 가지 아드라뭇데노 배에 올라타서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죽 나오잖아요. 그 다음에 보면 5절에 보면,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러” 죽 나오는데 이걸 글자로 보게 되면 도대체 이 동네가 어느 동네인지 어떤 식인지 모르는데 이런 거예요. 간단히 말해서 터키 있고 여기에 바다가 있거든요. 그리스가 있고. 여기 섬이 2개 있어요. 아드리아 반도 다음에 이태리있고 실리아섬이 있고 멜리데라는 섬이 있어요. 사도행전27장은 섬3개가 나오면 돼요. 구브로라는 섬과 그레데라는 섬, 배가 여기 가이사라에서 나와요. 빌립보가 이쪽에 있고 가이사라인데. 여기서 체포돼가지고 총독있는 곳에 가이사라 해변가에서. 원래 배가 그레데로 가서 그 다음에 바로 실리아로 가서 로마까지 올라가게 되어있었는데.

5절에 밤빌리아 보세요. 길리기아 밤빌리아 서풍을 만나가지고 배가 이리 가지 못하고 해변가로 갔어요. 7절에 디도 맞은편에 있었고 그리고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여 빌빌 기듯이 가는 겁니다. 이 과정을 죽 이야기한 거예요. 어디서 풍랑을 만났는가 하면, 뵈닉스라는 곳에서 뵈닉스 가지도 못하고 가다가 풍량을 만나가지고 뱅뱅이 돌다가 막 돌다가 여기서 몇일 걸렸는가 하면, 14일 걸렸어요. 14일 돌다가 멜리데라는 여기 섬에 가서 14일 후에 실리섬에 갔다가 로마로 가는 겁니다.

여기 가는 여정 속에서 사도행전17장에 보면 세 종류의 사람이 나와요. 세 타입의 종류. 첫 번째는 뭐냐 하면, 선원이 나옵니다. 상선인데 상선에다가 배를 태워서 인솔 하에 율리오 백부장에게 맡겨서 인솔 하에 죄수들을 데려갑니다. 두 번째 나오는 사람이 죄수가 있고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의 똑같은 자연 환경 속에서 각 사람의 반응이 다 달라요. 이 반응을 통해서 세 사람의 타입이 등장하고 그 타입에 대해서 제 삼의 인물 사도바울이 이들이 어떤 변화를 줬느냐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태풍이라는 풍랑이라는 환경 속에서 가르칩니다.

그런데 보통 가르친다는 것은 제가 방금 가르친다고 했는데 가르친다는 것은 학교에서 가르치지요. 칠판 걸러놓고 가르치잖아요. 그런 것도 가르치지만 자연 속에서 자연의 변화 속에서 가르친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자연의 변화 속에서 가르친다. 그러면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가난이나 그런 속에서 살 때, 사람들은 그걸 배운다는 생각을 잘 들지 않고 어떻게 하게 되면 이 난관을 빨리 벗어났으면 좋겠다, 이리 생각하겠지요.

가뭄이 들었다. 지지난주일 날인가 이야기한 것처럼 요셉의 꿈 이야기, 바로의 꿈을 요셉이 풀어줘 가지고 자기가 위상이 바뀌는 걸 이야기했지요. 그럴 때 바로 왕이 단순히 참 신기한 게 바로 왕이 사적인 꿈을 꿨잖아요. 사적인 꿈인데 그것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대자연의 변화로 이어졌잖아요. 집사님이 사적인 꿈을 꿨는데 갑자기 내일 대전에 눈이 온다든지 그런 게 있겠습니까? 꿈을 꿨는데 폭설이 내렸다. 그 다음날 보니까 폭설이 왔다. 이러면 집사님은 바로 왕의 위상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바로 왕의 위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를 들어서 폭설 내렸다고 하는 것은 너무 직설적이니까 예를 들어서 집사님이 옷을 갑자기 빨건 옷인데 하얀 옷을 입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고 저한테 전화하게 되면 “예, 사흘 뒤에 폭설이 온다는 겁니다.” 이러면 나는 또 요셉의 위상이 있겠지요.

자, 정리해 봅시다. 바로 왕과 요셉은 그 인간들의 자질 능력 아무 의미 없습니다. 바로가 깔고 앉는 바로의 자리하고 요셉이 작용하는 요셉이 깔고 앉은 자리가 둘 다 요소가 어디에 필요한가 하면, 야곱언약의 성취에 필요한 겁니다. 요셉이 꿈을 해몽함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후손들이 살아요. 번창하게 돼요. 그것도 풍족하게. 람세스라 하는 바로의 애굽나라 중에서 가장 살기 좋은 가장 좋은 옥토가 있는 그 땅을 애굽 사람이 차지하는 게 아니고 애굽 귀족이 차지한 것이 아니고 엉뚱한 야곱의 자손들이 그 땅을 차지해서 거기서 번창을 하는데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번창을 하지요.

출애굽기1장을 보면 산파를 불러가지고 딸이거든 살려주고 아들이거든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산파들 자신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가만히, 가만히 다 살려줬지요. 그러니까 너, 왜 아들을 죽이라고 했는데 왜 안 죽이느냐, 하니까 히브리여자들은 아주 건강해가지고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벌써 다 빠지고 없더라, 핑계를 대면서 하지요. 하지만 그 뒤에 아들을 낳으면 못 사니까 모세 같은 경우에는 아들을 키우다가, 키우다가 못 키워가지고 남의 집 밑에 내던지지요. 그리고 자기 누이가 따라가서 자기 남동생 어디로 가는가 살펴서 유모를 가장한 칭호로 유모 자리에다가 집어넣어서 이스라엘 역사, 언약의 역사를 가르친다, 그런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인데. 이름 자체도 물에서 건져냈다고 본인이 붙인 게 아니고 애굽의 공주가 재벌집안에서 버려진 아이가 다시 친모라고 만난 거죠. 그러니까 이게 개인적인 역량이 아니란 점을 감안해야 돼요.

이렇게 볼 때, 아하! 하나님께서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은 요셉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언약을 가르치는데 가르치는 그 환경과 상황이 대자연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7년 대풍년, 7년 대 환란, 그렇다면 오늘날 이 계시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된다면 똑같아요. 우리가 처해있는 이 상황, 삶의 상황이지 가정에서 배운다고 해서 알고 그런 게 아닙니다.

실제로 아는 것은 세상에 던져져서 거기서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공포, 외로움, 이런 것을 겪으면서 언약에 대해서 배워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그렇게 배우게 되면 그 사람이 잘했느냐, 못했느냐 묻지를 않고 그래서 만들어진 그 자리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 예수 안이란 자리가. 자리가 구원해요. 이 자리는 특이한 자리에요. 보통 성령 안 예수 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성령 안은 우리가 기도한다고 성령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대자연을 통해서 성령 안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식으로 이렇게 꾸며 구성을 해줘요.

이게 뭔가 특이함이 떠오른다. 제가 언제 설교시간에 떠오른다, 이야기했잖아요. 뭔가 떠오르는 것. 뭔가 떠오르는 게 분리되어서 뭔가 떠오르는 게 있어요. 내가 관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쪽에서 나를 관여하는 떠오름.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인가 믿지 말라고 했잖아요. 믿지 마세요.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떠오르는 것을 한 번 확인해 보라는 말이죠.

용감한 사람이 있습니다. 도마 같은 사람은 노골적으로 이야기했어요. 나는 보지 않고 안 믿는다. 쉽게 말해서 나는 못 믿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도마가 상당히 예리한 사람이에요. 아버지에게로 가는 내가 길이라고 하니까 도마가 하는 말이 참 명쾌한 질문을 했지요. 어디 가시는지 알려줘야 그 길을 가지요, 하지요. 이 말은 뭐냐, 못 믿겠다는 거예요. 말을 한다고 우리가 안 믿습니다. 말한다고 다른 사람같이 믿지도 않으면서 예, 예, 이러고 싶지는 않다는 거예요.

사람이 어디 간다고 하면 가는 걸 알고 그다음에 그 길을 알려주세요, 그 길을 내가 가야될지 말아야 될지 갈수 있는지 없는지 자기가 확정해야 되잖아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4장3절에 보면,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알리라, 하니까 도마가 하는 말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아야 우리가 그 길도 알지요? 라고 도마가 이야기한 거예요. 어디로 가시는지 알아야, 얼마나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을 묻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은 질문하는 것부터 시작이 돼요. 질문하는 것부터. 뭔가 질문을 한다는 것은 뭔가 감을 잡았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아는 이야기 같으면 우리가 질문할 필요가 없잖아요. 인터넷 찾아보면 되지만. 그런데 남의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잖아요. 남의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다 말이죠. 남의 질문이 내가 해야 될 질문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주께서 나로 하여금 새롭게 어떤 자리를 만들어주니까. 언약의 자리를 만들어주니까.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어요. 다시 한 번 할까요?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자연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는 겁니다. 가르치는 예가 바로 요셉의 경우에 요셉과 바로 왕 사이에 하나님께서 꿈을 가지고 가르치는 건데, 희한한 일은 그 꿈이 현실화됐다는 사실입니다. 꿈이 현실화 된 거예요. 우리의 꿈은 보통 개꿈인데, 요셉의 꿈은 개꿈이 아니었고 바로의 꿈은 개꿈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요셉의 갖고 있는 그 자리가 희한한 자리인데 어떤 자리인가, 요셉은 꿈도 해석하고 뭔가 남한테 베풀었는데 그 주변은 다 혜택을 입어놓고 막상 요셉은 점점 난국에 빠져요. 점점 자기 힘으로 출세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다 끊어져요. 우리가 절망가운데 놓여 버리지요.

보통 이 세상에서는 내가 저 사람에게 해주면 언젠가 나를 기억해가지고 베푸는 게 있어야 될 텐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의지하지 말라고 인간의 도움 준 사람을 배신 내지는 잊어버림, 방치 이런 쪽으로 끊어버려요.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그 하나님의 뜻을 실행해서 하나님의 원하는 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작살내 버리지요. 아주 작살내 버려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작살내 버려요.

딸이 시집갔는데 보고 싶은데 저희 집에 가고 우리 집에 안 온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이 아이를 낳고 엄마 봐주세요. 해가지고 그 다음부터 주의 방심으로 늘 만나게 해주십니다. 주의 하시는 방식으로. 모든 걸 다 끊어버립니다. 그렇게 해야 내 구원의 자리는 내가 만든다는 생각을 일체 못 갖도록 만드는 겁니다. 이 자리는 내가 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무슨 작정이 된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사도행전27장에 보면,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작정이란 말이 나오잖아요. 물론 인간들의 작정이겠지만, 하나님께서 이탈리아 가는 게 작정된 거예요. 나중에 사도바울이 알아요. 그 전에 이야기했어요. 니가 로마에 가야 된다. 내가 함께 있어 반드시 너는 로마에 가야 되고 사도행전27장 중간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걱정하지 말라, 너희 사람은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언지를 줍니다. 이 죄수고 선원이고 사도바울이고 아무도 생명 잃지 않고 무사히 이탈리아 도착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은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아, 무사히 고요히 갔다가 고요히 가는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그 가는 길에는 어느 세 부류, 선원, 죄수, 사도바울, 이 세 타입의 인생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다치게 되어있는 상황이 일어날 것만 같아요. 그런데 결국 우리는 일을 아니까 결과적으로 안 다쳤지만, 막상 그 현장에서 그들은 뭘 배우겠습니까? 대자연을 통해서 가르친다는데 그냥 이 칠판 놓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대자연을 통해서 가르치는데 결국 그들이 아는 것은 뭐냐, 이 대자연과 주의 손과 무관하지 않다는 겁니다.

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바람 부는 것, 날씨 찬 것, 어떤 일이 일어나도 지진과 기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 아니고 필연적인 사건이라는 겁니다. 일들이라는 겁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가르칠 때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사전에 브리핑했습니까? 아니지요. 직접 요나로 하여금 자기 마음대로 살게 하고 그 가는 길을 풍랑을 통해서 막아버렸고 자기는 안 들킬 줄 알았지요. 배 밑에 잠자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 전부 다 본인은 모르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수인들이었어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여호와를 몰라요. 여호와를 모르는데 사실은 하나님에 의해서 기계처럼 다루어지는 겁니다.

그들에 의해서 잠자는 요나는 깨어났고 그들에 의해서 하나님이 누구냐고 이실 짓고 물었고 어쩔 수 없이 요나가 그걸 감을 잡고 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인데 내 나름대로 도망치고 가다가 이렇게 들켰습니다. 그러니까 선원들이 안타까워하면서 이런 풍랑은 어쩔 수 없이 누구하나 죽어야 됩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지요. 소크라테스도 그런 일이 있어요. 그 당시에 그런 일이 있어요. 이 사회가 이 공동체가 뭔가 안 좋은 일이 갑자기 기분 나쁜 일이 생길 때는 분명히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와서 이러한 나쁜 일을 유발시킨 요인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 인간을 끄집어내서 바깥에 가서 돌로 쳐 죽이게 되면 그 불길한 요인이 삭제가 되면서 다시 평화를 찾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어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니에요? 요 이야기는 뭐냐 하면, 바로 레위기에 보면 문둥병 낫고 난 뒤에 문둥병 나았다 해놓고 새를 달래 버리듯이 대속죄일에 염소를 두 마리 잡고 하나는 잡고 하나는 죽이고 피를 바르고 다른 염소에 묻혀 저 광야에 떠나보내는 거예요. 떠나보내면서 죄야, 빠이 빠이! 죄야, 잘 가! 하고 멀리 죄를 없앰으로 말미암아 다시 대속죄일이니까 다시 모든 것이 평화롭게 원상 하나님의 복을 받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가지고 뭐냐, 희생양이라고 해요. 희생 염소라 하지요. 예수님은 누구시라 하지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희생양이죠. 재수 없는 인간이 들어와 가지고 재수 없게 만들어놓고 그 재수 없는 걸 처결하니까 평화를 이룬다. 일반적인 문화와 연결이 돼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인간 자체가 처음부터 어두움이었다는 겁니다. 그 분이 재수 없는 게 아니고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 거죠. 오히려 그 분을 희생시킴으로 말미암아 현재 인간이 갖추어진 하나의 자기 사회, 자기 평화와 자기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이 모든 것 자체가 마귀의 지배아래 있는 어두움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을 통해서 까발리는 겁니다.

인간은 살아있다는 게 죄에요. 물론 죽어도 죄이지만, 살아있다는 것이 죄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결코 자랑거리가 되지를 못합니다. KBS에서 100도씨 강연하는 거 있지요. 그거 다 죄입니다. 저는 이렇게, 이렇게 일어서서 이렇게 살아났습니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 소망을 가지시고 어떻게 노력하시면 세상은 알아줍니다. 그거 살아남았다는 자랑질이거든요. 그게 바로 죄가 되겠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죽으라는 얘기에요.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십자가 지고 죽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살하고 있는 중이에요. 이미 십자가 졌으니까 자살이죠. 십자가진 게 자살입니다. 십자가진 그 자체가 자살인데 무슨 또 자살을 해요? 말도 안 되는 거죠. 자기 자존심이죠.

다시 보게 되면 바로 왕과 요셉은 바로가 차지하는 그 자리가 있고 바로 왕은 자기가 본의 아니게 꿈을 꿨습니다. 요셉도 그 꿈을 해석을 못하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해석을 하니까 자리가 있지요. 요 두 개의 자리를 뽑아내보면 이게 야곱 언약의 완성입니다. 야곱 언약은 야곱 후손을 창대케하기 위해서 람세스라는 애굽에서 제일 좋은 풀이 있는 목초지가 있는 그곳을 이방민족인 바로 히브리민족에게 차지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알아야 될 것은 거기에서 목초지에서 복을 받아서 번창하는 것은 자신의 열심과 성실함과 노력이 아니고 애굽나라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기근에서 죽었다가 야곱의 약속 때문에 되살아난 그 잠재력에 의해서 그들은 축복을 받은 거예요. 그것도 모르는 애굽의 바로 왕이 그걸 잠재우려고 하다가 그 용수철처럼 튕겨 나오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장차 보면, 신약에 보면 부활의 능력이죠.

어딜 감히 부활의 능력을 얏 봐! 이래가지고 그게 튕겨 나와서 누가 깨집니까? 애굽의 바로왕이 다 죽잖아요. 바로 왕의 아들도 죽고 군대들은 홍해바다에 죽지요. 이게 분명히 역사적 실제사항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실제상황은 배후에 뭐가 있다? 언약이 있다는 겁니다. 언약이 있는 거예요.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이 교회가 그냥 예수 믿고 도 닦는 데인 줄 아는데 그게 아니에요. 자기가 예수 믿지 않고 있는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그 철딱서니 없는 그 현실이 언약적 현실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지요. 나중에 언제 아느냐, 나중에 죽어서 알아요. 그러니 불교적 사고방식이니 불쌍하지요. 지가 교수고 박사고 똑똑해도 소크라테스 말처럼 자기가 누구인 줄 몰라요. 내가 누구인 줄 몰라요. 자기 자신이 누구인 줄 몰라요.

그래서 차라리 철야를 하면 이렇게 해야 돼요. 등불 들고 “내가 누굽니까?” 하던지 “빛이 어딥니까?” 묻던지 해야 돼요. 빛을 찾는다는 것은, 대낮에 등불 든다는 것은 찾는다는 말은 정답이 없다는 말이고 그 정답이 없으니까 결국 내가 디오데? 누구인 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뭐냐 하면, 내가 누군지를 모르면서 세월을 나이를 더 먹은들 떡국 하나 더 잡숴본 들 무슨 소용 있느냐 말이죠. 내년되면 내가 또 누구인줄 모르는데. 일주일 후에도 내가 누구인줄 모르는데. 지금 내가 누구인줄 몰라서 더 답답함이 일주일 뒤에 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세월이 가면, 서로가 원한다 해도 영원할 순 없어요. 저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그러니까 참 재미있는 게 전에 어떤 글에 썼지만, 영원이라는 게 우리가 이 세상에 있으니까 영원히 있지, 영원한 세상에는 영원히 없어요. 천국가면 영원히 안삽니다. 왜, 영원 자체가 없기 때문에. 현재는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을 내다보면서 기대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 천국 가려면 여기서부터 영원을 찾지 않아야 되지요. 찾지 않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을 대자연을 통해서 가르치는 겁니다.

그 가르침이 요한복음17장2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 세상의 모든 대자연과 모든 인간을 다 다스리는 권세, 그 권세는 오직 택한 자에게만 간택되고 채택된 사람, 오직 지정된 사람에게만 영생을 주고 다른 사람은 지옥 가도록 하기 위한 조치가 지금 모든 날씨와 기후, 9시 뉴스 끝날 때쯤 하는 기상캐스터가 와가지고 오늘은 북대서양의 저기압으로, 그 저기압이 택한 백성 구원하기 위한 저기압이에요. 그래서 협력하여 모든 것을 선을 이룬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신앙생활하기 위해 남쪽으로 오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서 신앙생활하면 돼요. 문제는 지리적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성령의 자리가 중요하지 남한에 온다고 성령 받고 북한에 있다고 성령 안 받고 그런 거 없습니다. 혹시 북한에 성도 있으면 잘하고 있어요. 도와줄 필요 없어요. 북한 선교할 필요 없습니다. 북한 선교한 게 자본주의 선교한 셈이 돼요. 자처하면. 돈 맛을 주는. 돈의 맛을 주는 선교하면 큰일 나요. 정말 신앙인 같으면 남한에 와서 탈북 했다가 정말 신앙인 같으면 도로 북으로 가야 돼요. 도저히 신앙생활하기에 왜 이리 힘들어. 너무 힘들어 남한이. 그런 사람 있을까? 그런 사람 없어요. 여기서 냉면집하지.

대자연을 통해서 유라굴로라는 그 태풍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고 로마에 가기 전부터 복음 안전할 때가 없었지요. 사도바울과 예수님 관계에서 복음 안전할 때가 없었어요. 그럼 복음 전할 대상이 없었지 않느냐, 대상이 있어요. 선원1, 선원2, 죄수3, 선원과 죄수에요. 한 사람 또 있다. 토인 있어요. 토인은 대자연과 교류했던 사람이에요. 인간들하고 교류한 사람이고 대자연과 교류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죄수와 사도바울은 하나로 묶지요. 왜, 사도바울도 죄수로 갔기 때문에. 한 통으로 묶으면. 선원들은 뭐냐 하면, 대자연은 없고 인간 대 인간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들은 싸가지가 없어요. 평소에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요령부리면 사느냐, 그것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풍랑이 일었다. 닻을 내린 척 하면서 거룻배, 거룻배라 하는 것은 배가 침몰했을 때 구명하는 선 있잖아요. 그것만 내려서 도망치려했던 거예요. 걸렸어요. 그래서 아예 거룻배를 잘라버렸어요. 너희들끼리만 도망 못 치게. 그러니까 세월호 선원들이에요. 선원들이 아는 필리핀 여자들 가수하고 선장들하고 이런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평생을 인간 대 인간만 인간의 지시와 눈치만 보고 살아온 사람들이에요.

죄수들은 인간의 눈치만 보다가 운이 없어서 걸려든 사람이에요. 완전 범죄가 안 되니까. 같은 죄인인데 이건 죄 아닌 것처럼 여겨지고 이 사람은 죄인인 것처럼 느껴지고. 부부사이가 언제 좋은가 하면, 한 쪽이 죄를 지을 때 부부사이가 좋아져요. 둘 다 죄지은 상태가 없으면 둘 다 잘난 존재가 돼가지고 서로 니 때문에 내가 힘들다. 이런 것을 원하지 않았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니 같은 인간을 만나, 둘 다 자기 정당화 하는데, 한쪽이 바람을 피워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너무 너무 잘해줘, 한쪽이 갑이 되고 한쪽이 을이 되어버리면 이 부부는 너무 좋은 부부에요. 평생 동안 싸운 것은 서로 잘나서 싸운 거예요. 한 쪽이 몸이 아프고 한 쪽이 일방적으로 돌볼 때, 한 쪽은 고마운 줄을 알 때 부부사이는 절로 좋아져요. 아플 때 절로 부부생활이 좋아지고. 둘 다 건강할 때는 둘 다 훌륭할 때, 복 받아서 건강하게 되면 누가 건강 하느냐에 따라서 누가 갑이냐, 을이냐, 베틀 싸움을 하는 거예요.

죄수들은 일종의 구원의 자리에요.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기 때문에. 죄수가 있기에 선원은 죄수 안 되기 때문에 얼마나 깔보겠습니까? 그래서 니 때문에 내가 죽을 수는 없잖아. 왜냐, 죄수는 을이고 선원은 갑이기 때문에. 니 하나 죽어서 잘난 나하나 살자는 식으로 자기 본색이 드러난 것이 유라굴라라는 태풍 속에서 풍랑 속에서 일어났어요.

여기 가이사에서 출발해서 해변을 비리. 비리기면서 거차하면 피신해야 하니까 풍랑 서풍을 만나서 이리 갔다가 이렇게 건너가서 구브로섬을 통해서 구레데섬으로 갔는데 여기서 바로 시실리아로 가던지 아니면 바로 이달리야 반도로 가야 되는데 여기서 풍랑을 만나서 뵈닉스에서 과동 겨울을 나야되는데 겨울 날수도 없었어요. 가는 도중에 풍랑 만나가지고 뵈닉스가지도 못하고 가보니까 멜리데라는 섬에 외딴 섬에 있는 거예요.

외딴 섬에 가서 누구를 만났습니까? 토인을 만났어요. 토인은 선원이나 죄수나 사도바울이 아닙니다. 자연과 벗 삼아서 살던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얼마나 놀랬던지 사도 바울이 불 때는데 독사가 무니까 그들은 자연을 통해서 모든 질서와 규칙을 자기 인생을 이리 살아야 된다는 경향이기 때문에 그들의 원칙에 의하면 독사에 물린 사람은 어떤 신에게 저주를 받아서 죽어야 될 사람만 독사한테 물렸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의 독사는 누가 보낸 겁니까? 보이지 않는 자연을 움직이는 신이 독사를 움직인다고 본 거예요. 얼마나 순진하고 순박합니까?

이 선원하고 이 죄수들은 얍삽해가지고 그런 거 안 믿습니다. 뱀은 신이 보내고 이런 거 믿지를 않아요. 중요한 것은 뱀이 아니고 같은 인간들 라이벌이 더 중요해요. 싸가지가 없어요. 그런데 추장의 아버지가 몸이 아프지요. 몸이 아파가지고 사도바울이 몸을 낫게 하니까 세상에 이런 기적이 다 있느냐, 지금 여기 가이사의 병원들이 많이 있거든요. 병원 구경도 못했어. 세상에 저거는 하나님이 아니면 저런 기적을 못 베푼다, 해가지고 거기서 무려 석달 동안이나 대접받고 떵떵 거리며 살았어요. 온 식구들이 276명이 전부 다 배부르고 전부 다 떵떵거리고 살았습니다. 28장까지 계속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리고 난 뒤에 겨울이 지나서 풍랑이 잔잔해가지고 섬에 가서 이달리야 가가지고 나중에 로마로 잡혀갔거든요. 로마로 가기 전에 여기서 볼 때 사도바울의 소문 듣고 많은 교우들이 와가지고 사도바울을 굉장히 대접을 많이 했습니다. 보디올이라 하는 이탈리아반도 여기에 보디올이라 곳에 와서 형제들을 만나서 사흘 동안 거기서 대접을 많이 받았어요. 받고 난 뒤에 이제 로마에 가서 정식 재판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 안에 있는 사도바울은 쉬거나 놀 틈이 없어요. 놀 새가 없어요. 본인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니고 내 숙제로서 신앙생활해가지고 이 신앙가지고 천국 가는 이런 게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가지고, 애들이 레고 랜드로 놀잖아요. 고 장난감이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장난감가지고 노는 애에 의해서 손에 달려서 장난감이 구원 받는 식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놀아요. “아이고, 이쁘다.” 하면서.

주님께서 사도바울가지고 놀아요. 사도바울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또 유로굴라라는 풍랑까지 일어가지고. 물론 풍랑이 즐겁지는 않습니다만, 뭐가 즐거우냐, 풍랑 가운데서 변화되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즐거움을 주지요. 변화되지 않으면.

주께서 내 곁에 서서 “걱정하지 말라, 어떤 한 사람도 다치지 않는다.” 그렇게 할 때,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만 가는 것이 아니고 누가 동행하고 있어요? 주님께서 사도바울과 276명의 일행과 함께 동행 하고 있었던 겁니다. 주님이 동행했기 때문에 변화가 생기는 거예요.

어떤 변화가 생기느냐, 선원들은 바로 자기가 요령껏 하면 자기가 살겠다는 자기의 삶의 방식이 다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돼요. 극한 풍랑 상황 속에서 인간의 생명이라 하는 것은 본인이 지켜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본인의 것이 아니라는 거죠. 본인이 지킨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허락에 의해서 하루, 하루 살아간다는 것을 이 선원들은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죄수들도 마찬가지지요. 죄수들은 선원을 통해서 뭘 알아야 되느냐, 죄수들은 본의 아니게 자기가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이 없잖아요. 지금 묶여있으니까. 어떻게 해보겠다. 자기는 을이니까. 갑은 선원들이고. 선장과 이 사람들은. 백부장은 갑이고 을이니까. 당하기만 하지요. 사람이 이 당하기만 하는 이 자세, 이 낮은 자세가 세상을 사는 참된 똑똑함이고 이게 지혜롭다는 거예요.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되지 나대지 말라 하는 것은 유명한 명언이 있지요. 이 죄수들은 나대고 싶어도 나댈 수가 없잖아요. 죄수들이니까. 때리면 맞아야 되고 일종의 노예들이고 죄수들이니까. 꼭 지옥 갈 놈들이 나대지요. 지옥 가기 전에 마지막 나댐이에요.

그래서 성경에 사도바울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구원받았으면 자숙하라는 말이에요. 촐랑대지 말고 깝죽대지 말라 말이죠. 내일 일은 니가 모르는데 내일 어디 가서 도시 가서 장사해서 이익을 보려하지 말라.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해라. 내가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주의 뜻이면 죽기도 하리니. 여기서부터 벗어난 것은 전부 다 악한 생각이다. 그럼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죄수처럼 살아라는 말이죠. 죄수처럼. 진작에 죄수로서 저주받아야 될 텐데 구원 받았기에 이제는 기쁨으로 자진해서 죄수놀이를 해라. 즐겁게.

주님보고 “간수님, 밥 주세요.”이렇게 감옥소 놀이를 하라는 말이죠. 같이 사니까 너무 좋아, 이런 거 있잖아요. 갇혀 사니까. 너무 좋아. 만약에 여러분들이 세계 일주를 일 년에 25번을 세계 일주를 해보세요. 비행기 마일리지는 쌓일지 모르지만 피곤해요. 그런데 어떤 노인들 보면요, 제주도나 어떤 시골의 강원도 노인들 보면, 태어나서 시집가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강원도를 안 벗어난 사람이 있어요. 결코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행해 보이지만, 본인은 불행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내가 몰라야 될 것을 꼭 알아야 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죠. 더 알아야 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내가 이 만큼 알면 된 거예요.

그러니 노인들에게 옛날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에게 그때는 여자에게는 학교를 안 보냈어요. 숫자하고 한글을 가르쳐 드릴까요? 아이고, 뭐 이 나이에 내가 알아서 뭐할 건데? 아무 불편한 게 없다. 불편함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진짜 불편함이 없는 게 아니고 자기 한계 밖으로 안 나가면 된다는 뜻이에요. 자기 바깥으로 안 나가면 돼요.

여기에 있는 강아지에게 컴퓨터 하라고 해 보세요. 강아지 그 다음부터 스트레스 받습니다. 강아지는 그냥 컴퓨터 그런 거 모르고 됐어, 요것만 하면 돼! 그냥 오뉴월의 개 팔자처럼 살아가고 있잖아요. 강아지가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중국의 F.T.A 때문에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아무 걱정 필요 없어요. 다만 개한테 우울증은 뭐냐 하면, 주인이 어디 갔을 때. 말 주의 합시다. 다 듣겠네. 깨갱하고 달려든다. 왜 내 이야기하느냐고 뒷담화하지 말라고.

선원도 죄수도 전부 다 한계 상황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한계 바깥에서 한계를 보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내가 믿는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상황 속에 내가 지금 같이 놓여있다고 보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무엇이라 하는가, 프리덤, 자유라고 해요. 자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철조망 밖을 이미 나와 있는 거예요.

제가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율법이라 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순간 신이 된다. 우리가 신이 안 되면 돼요. 신을 포기하고 피조물 되려면 우리가 죄인 되려면 율법테두리에서 벗어나면 되는 겁니다. 율법에서 해방되어서 율법에서 건져내고 다시 율법 속에 들어가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죄인 됐다는 것을 아는 즐거움이 있어요. 이거 필살기입니다. 왜 필살기이냐 하면, “자기가 죄인 됐는데 왜 즐겁지?” 이건 성령 안 받은 사람이에요. “내가 죄인 된 게 왜 이리 즐겁지.” 요거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요거 필살기입니다.

죄인 되었을 때 가장 기뻐요. 왜, 죄인 되었을 때에 형광등이 나가도 괜찮아요. 왜? 컴컴한 죄인 주제에 밝아야 될 필요가 없잖아요. 죄인 주제에 통장에 돈이 딱 떨어졌다. 그래도 좋아요. 왜? 죄인 주제에 요걸로 굶어죽으면 되는 거예요. 개하고 같이 굶어죽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자기가 죄인 아니고 가치가 있다고 하는 순간 형광등 갈게 되면 짜증나. 레슨 해야 되는데. 연습해야 되는데. 에이~ 짜증나. “주여, 왜 형광등은 갈게 하십니까?” 그걸 가지고 제가 지난 오후 설교 때 징징댄다 했지요. 늘 징징대. 늘 징징대는 이유가 “저 이대로 방치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 이런 요구사항 때문에 자꾸 징징대는 거예요. 늘 짜증과 징징대는 것으로 죽 이어지는 드라마가 요새 드라마가 <미생>이라는 거예요. 케이블에서 하는 건데. 직장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그린 드라마에요. 드라마 전체 내용이 분위기가 늘 징징대. 짜증나고. 늘 대우빌딩 올라가가지고 고함지르고 과장 나와! 고함지르고 아이고, 시원해라. 아니면 담배 피우려고 폼 잡고. 드라마에서 담배 못 피우니까 담배 피우는 척하고. 회식한다고 술 먹고 여사원이 비틀거리고. 이 전체가 오늘날 자본주의 모습을 그대로 보니까 시청률이 그렇게 높은 거예요. 내 짜증과 내 징징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하여튼 24시간 찡찡대.

사도바울은 이 풍랑 속에서 짜증부릴 새가 없습니다. 주께서 도대체 이렇게 우리하고 한 통속 만들어가지고 또 무슨 일을 벌이시는가, 그것을 파악하는데 지금 사도바울은 신경 바짝 써야 됩니다. 주께서는 풍랑을 통해서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다 갔다 버리게 했어요. 짐부터 다 버리고 결국은 뭐도 날아가 버리는가? 타고 왔던 배도 날아가 버리죠.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니 로마에 가야된다, 했고 지금 배는 배의 짐도 없을뿐더러 배도 만에 걸려가지고 17절에 봅시다.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스르디스가 얕은 모래 만 같은 거예요. 그래서 짐을 풀어버리고 나중에는 메리데 섬에 가서는 배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배가 산산조각 나서 다 깨져요. 깨졌는데 마침 물이 얕아가지고 헤엄치고 의지해서 와가지고 결국은 로마에 가는데 배는 없다. 고래50마리 동원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방법이 없어요. 로마에는 가야되겠고 홍해도 아니고 거리가 너무 멀잖아요. 우리는 끝을 아니까 새로운 배를 준비해서 토인의 대접을 받아가지고 풍랑도 겨울 지나서 나온다 해서 알지만, 막상 미래를 한치 앞도 모르는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분명히 사도바울은 요새 말로 하면 뭐냐, 예수님 믿고 천국은 가야되겠고 천국갈 수 있는 신앙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이 윤제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나 믿음 하나도 없어요.”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얼마 전에 차사고가 일어났어요. 급발진으로. 그 옆에 이 윤제 권사님이 타면서 급발진이 문제가 아니고 앞에 있는 차가 BMW라 해서 “주여, 박지는 말아 주시옵소서.” 했는데 박아버렸어요. 그러면서 자신의 순간적인 느낌은 나는 믿음이 하나도 없다. 예수의 피를 BMW와 바꿔치웠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파산된 배로 간주해서 그걸 완전히 산산조각 내버려요. 우리의 믿음으로 절대 구원 못 받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 절차 없이는 주의 믿음을 받을 자리가 성립 되지를 않아요. 처음에 바로 요셉 이야기했지요.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모든 것을 절망하는. 요셉은 뭔가 하나님의 뜻대로 인데 자기는 뭔가 끊어져요. 점점 더 절망 속에 들어가요. 분명히 베풀었으면 베풀어야 되는데 잊어버려요. 요셉을 잊어버려요. 그래서 요셉이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나서 천국 갈 가망성은 전혀 없어요. 거지나사로가 갈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의도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에 의해서 가는 게 아니고 믿음에 의해서 가게 돼요. 누구의 믿음? 주님의 주신 믿음에 의해서. 주님의 믿음 그러니까 니가 니 믿음을 믿느냐, 아니면 예수님이 너를 향한 믿음을 믿느냐를 니가 선택하라. 너 믿지 말고 나를 믿으라는 말이 그 말이거든요.

“니가 평생 동안 교회 다니면서 구축한 니 신앙 믿을래? 그거 다 때려 부술래?” 부셔버려야 돼요. 그걸 안 부수니까 사기꾼들이 달려드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믿음 좋습니다. 구원받습니다.” 다 부숴요. 구원받고 하는 것이 주님의 계획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평생에 자기가 부인되지 않는 우리를 부인되게 만드는 작업을 환경을 통해서 그렇게 의도적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이것은 우리의 숙제가 아니고 주님의 숙제고 우리의 놀기가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갖고 노시는 자기만의 장난감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장난감입니다. 물론 우리는 심장이 늘 털썩, 털썩 절망적이지요. 장난쳐도 너무 심하게 장난쳐가지고 “나 이제 또 죽었다.” 경기 나고 스트레스 받고 그리고 우리의 본색은 믿음 감사하다가 짜증나고 징징대고 “이렇게 하시면 곤란하십니다. 주님이여.” 대들고 그렇게 하지요.

마치 장에 가서 아들이 이거 사줘! 저거 사줘! 몸에 해로운 거 사달라니까 엄마가 강제로 끌고 아무소리 않고 그냥 집에 가서 맛있는 거 해놨다고 강제로 끌고 가는 것처럼. 집으로 가자. 강제로 집으로 가자고 끄는 거예요. 이것 사달라, 절대로 안 사줘요. 안 사주고 꽃 바지 사주고 “아이고, 이건 연변 촌사람들이 입는 건데. 이거 안 입어.” 하면 “그거 입어!” 무조건. 도대체 내가 입는 옷, 내가 사는 이 직장, 결혼, 환경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원치 않는 주님의 촌스런 꽃 바지 입혀가지고 내자랑 일체 못 하게 만들어놓고 강제로 끌고 가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걸 대자연을 통해서 겪었습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175.♡.147.179)

14-12-30 17:47

대전141125-마17장14절(끝의 시선)58강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마태복음17장 합시다. 마태복음17장에서 지난번에 세례요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17장에 보면 엘리야가 이미 왔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참 당황스런 말씀을 많이 하는데 엘리야가 왔는데 세상 사람들이 엘리야인 줄 알지 못했다고 돼있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엘리야가 왔다고 할 때, 사람들끼리 누가 왔습니다, 하면 그 사람 모양새 가지고 와야 그 당사자로 온 거거든요. 그 같은 몸이 엘리야라는 몸이 와야 엘리야가 온 거예요. 엘리야 몸 말고 다른 몸이 와놓고 엘리야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터무니 없는 이야기잖아요.

말라기4장에 보게 되면, 마지막 때 엘리야를 보낸다 했잖아요. 엘리야를 보낼 때, 엘리야를 보낸다 했으니까 그럼 엘리야가 와야 되는데 거기에 보면 엘리야가 오지 않고 세례요한이 이리 이야기했습니까? “나, 엘리야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소개할 때. 아니지요. 엘리야 이름이 요한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도 임마누엘 해놓고 임마누엘이란 이름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이름이 예수지요. 임마누엘이 아니에요.

그러면 구약에서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언의 성취하고는 완전히 틀어져버립니다. 자, 왜 그런가,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되겠지요. 그 이유를 모르게 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문자 그대로 짜 맞추기 그러한 해석이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바리새인이 실수한 걸 또 다시 실수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세상 종말이 죽 예언되어 있잖아요. 그 예언된 그 사항은 바리새인들이 구약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한 그 예언이 잘못된 예언임을 알려주기 위한 예언이었는데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여기는 거예요. 자꾸 안다고. 인자가 구름타고 올 것이고 뭐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불바다 될 것이고 백날 찾아봐요. 불바다 되나 불바다 안 되지요.

그럼 도대체 뭔가 자기 자신이 누군 줄 모르고 자기 자신이 주제파악이 안되니까 그런 해석 자체도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지 모르는 게 아는 체해가지고 기다리니까 엉뚱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정작 오신 메시아는 죽여 버리고. 이런 일이 또다시 인간에게 계속 반복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예수님께서 엘리야라고 언급을 하면서 세례요한과 맞추시는 고 일체시키는 그 해석법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되겠지요. 그 해석법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사람이 머리가 이리 있고 코가 있고 우리가 봅니다. 보면서 어떤 사람을 문자로 맞추는데 이게 아니고 주께서는 우리를 둘러싼 이 필드, 장이라 해요. 이 필드, 이 세력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요게 바로 예언 그리고 일치에요. 일치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을 되받아 보지 말고 우리를 보는 것, 다른 미지의 다른 시선을 볼 때 예언은 딱 들어맞게 성취가 되어있어요. 우리 시선에서 이쪽 시선으로 옮기는 걸 가지고 이게 성령을 받아야 영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으로 푸는 것이지 문자로 푸는 게 아니에요. 우리 시선을 가지고 남을 보는 것은 이것은 바로 문자로 보는 거예요. 이 세상을 문자로 보는 겁니다.

실제로 구약은 그런 게 참 많거든요. 너희들을 애굽에서 독수리 날개위에 태웠다, 할 때 독수리 몇 마리 동원됐어요? 그 독수리 없거든요. 독수리 날개로 했다고 되어있어요.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요즘 말로 하면 우리가 아는 언어로 기능적이라 하지요. 기능적으로 옮기는 겁니다. 사람의 힘으로 못 옮기니까 분명히 새는 바다를 건너잖아요. 새 중에서 제일 든든하고 높은 새가 독수리이니까 그들은 독수리에 넓은 날개에다가 너희를 업어서 애굽에서 이 약속의 땅으로 옮겼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말이죠.

독수리 몇 마리입니까? 하는 것은 우리의 시선이고 주님께서는 기능으로 다가서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은근히 기대했던 기능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싼 이 어두운 장, 환경, 상황, 이 상황에 대한 개선을 하기 위한, 바꾸기 위한 주님의 능력을 말씀에 담아서 여기다가 퍼부어대고 쏴대고 폭격을 하는 겁니다.

폭격이란 말이 나왔는데, 여기서 폭격이란 말이 적절해요. 왜 적절한가 하면, 독일의 어떤 소박한 마을이 있습니다. 보통 광장이 있고 3층 4층 건물이 있습니다. 이게 퓨리(Fury)라는 영화가 있어요. 지금 개봉하고 있는 영화가 있는데, 2차 세계대전 때 전차를 한 대 몰고 싸웠던 영웅적인 실화에 대한 영화에요. 퓨리라는 뜻은 분노라는 뜻인데, 탱크에다가 이걸 써가지고 브래드 피트가 주인공이 되어서 지금 영화하고 있습니다. 인터스펠라도 개봉했지만, 같이 개봉한 것이 퓨리라는 거예요. 그 영화를 보게 되면 어떤 순진한 이등병이 전차를 탔는데 이등병이 점령했던 독일 마을에 자기 나이 또래의 순진한 처녀를 만나고 사랑을 나누게 되었어요. 그런데 계속 다른 마을도 점령해야 되기 때문에 만나자 마자 30분 되어서 헤어져야 된다 말이죠. 헤어질 때 그 아가씨가 우리 다시 만나요, 주소 적어주세요, 했는데 자기 상사가 가자! 가자! 다음 전쟁을 해야 되니까 연애할 시간이 없잖아요. 탱크를 몰고 가는데 연합군이 있으니까 비행기가 폭격을 했는데 눈앞에서 폭격해가지고 그 사랑했던 아가씨가 벽돌 사이에서 죽어 있었어요. 그럴 때 절규를 하지요. 독일군에 의해서 그 아가씨가 죽은 거예요.

결국 이것은 뭐냐, 본인이 죽인 게 아니고 같이 있다는 그 넓은 공간에 폭격하다 보니까 그 아가씨가 죽은 거죠. 이 공간이 문제인 거예요. 공간이. 우리가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지적질하고 우리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이 공간에 속해있다는 겁니다. 한 통속이 되어서 같이 속해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의 힘으로서는 이 공간을 벗어날 수 없지요.

이런 장난감이 있잖아요. 유리 거울 속에 해저도 만들어 놓고 물고기도 만들어놨지요. 이것은 프라스틱으로 압축을 해놨기 때문에 못 빠져 나오지요. 하지만 요 안에 다른 세계가 그럴싸하게 들어있습니다. 어떤 두뇌 철학자가 이런 예를 들었거든요. 두뇌만 딱 떼어가지고 병 속에 넣고 병 속에서 연결해서 컴퓨터에 연결해 놓고 이 두뇌가 이 병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겠느냐, 이런 질문을 했어요. 두뇌에다가 정밀한 회로를 꽂아가지고 컴퓨터에 연결해서 컴퓨터에 스피커가 있을 게 아닙니까. 두뇌에서 모든 생각하는 것이 나오거든요. 과연 병 속에 내 두뇌가 들어있다는 것을 요 두뇌가 알아채겠느냐는 문제입니다. 참, 희한한 이야기에요.

영화 <만다라>라는 영화를 보면, 거기에 불교의 참선하는 사람이 마지막 화두가 뭐냐 하면, 병 속에 들어 있는 새가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느냐, 병이 막혀있는데 어떻게 빠져나가느냐,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면 너는 해탈한다. 이거 모르면 해탈 못 한다고. 그러니 선불교가 다 이런 식이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만다라 마지막 장면에 이런 게 나와요. 병 속의 뇌가 알겠느냐, 이런 질문들 자체가 인간들의 지혜를 끄집어내겠다는 하나의 몸부림이죠. 인간의 자기 한계에요. 이런 질문들의 정답은 복음적인 정답이 뭡니까? 주 예수를 믿어라, 이거지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온도계는 섭씨20~30도 사이를 측정하지요. 이 온도계를 가지고 오후2시인지 3시인지 측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측정 못 하지요. 시계가 아니니까.

인간이 생각하고 인간 속에서 끄집어내는 모든 측정 기구는 이런 만다라 이야기나 병 속의 뇌 이야기는 자기를 제대로 측정할 수 있는 측정 기구가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가 아무리 되돌아봐도 인간은 모르게 돼있어요.

인간을 창조하신 분에 의해서 질문이 주어져야 돼요. 어떤 질문?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아야 돼요. 이것은 사도바울이 누구한테 받았습니까? 예수님한테 받았지요. “사울아 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러니 이것은 돌발적이고 낯선 거예요.

엘리야가 세례요한이다. 어떻게 일치됩니까? 키도 다르고 시대도 다른데 어떻게 말이 안 되지요. 하지만 그게 주님이 보기에 일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윌리암 오컴이라는 14세기 유명한 철학자가 있어요.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법칙이 있어요. 항상 제일 단순한 것이 진리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그 사람이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간음해라 하면 간음해야지 간음 안 한 것도 죄라 했어요. 참 의미 있는 말이에요. 내가 까라면 까지 왜 말이 많으냐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내가 납득이 가서 이해해가지고 내가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역량을 다해서 지키는 것, 그것은 율법을 주신 목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주제 넘는 짓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지키지 못하기 위함이고 그리고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본인이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개혁주의에서 문제되는 것은 뭐냐, 우리가 말씀을 못 지키기 때문에 예수가 필요하다 하는데 그것은 사기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말씀을 지킬 수 없다, 를 우리는 알 수가 없어요. 우리는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없다니까요. 지가 율법을 몇 개 어겼다고 지가 알아요?

제가 광주강의 때 전체이야기를 했잖아요. 전체 맥락을 모르는 이상은 내가 지켰다, 안 지켰다, 안다, 모른다, 의미가 없는 거예요. 전체의 맥락을 모르거든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시장에서 콩나물을 파는데, “아이고, 내가 콩나물을 파는 것은 누가 뭐래도 착한 짓입니다. 나는 이거 해서 우리 자식 먹여 살리니까 나 정말 착한 엄마입니다.” 라고 콩나물 팔지만 그걸 사는 사람이 묻기를 “아줌마가 지금 다른 데서 일어나는 상황을 알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당신이 콩나물 파는 것과 다른 상황과 상호 연결되어 있고 연동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금 아줌마는 일부러 끊어버리고 지금 코앞에 있는 요것만 해도 내가 요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당하다, 그 소리밖에 안하는 거예요.

“아줌마가 지금 콩나물 파는 것이 정당하려면 뭘 알아야 되는가, 손 연제 선수가 올해 여자 체조계 여자상을 받은 걸 알아야 이걸 알 수 있습니다.” 이리 이야기하면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리 이야기할 거예요. 손 연제하고 콩나물 파는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관계있어요. 그게. 관계있다니까요.

해변가에 밀려오는 그 조개, 지금도 해운대에 가면 조개 주운다고 여인들이 나 잡아봐라 해가지고 가시나 잡히면 죽인다, 하고 따라가는데 그 조개를 줍는 거 그 행동, 그 행동과 미국의 국방부 장관의 사임하고 관계가 있어요. 이 세상에 관계없는 게 없어요. 아까 했잖아요. 모든 권세가 주님한테 나왔고 그 권세는 자기 택한 백성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한 겁니다.

영생을 주기 위해서 내가 스스로 겸손에 빠져가지고 “나는 모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그런 어설픈 그런 연기, 연출 그거 집어치우고 그건 니 생각에서 하는 거고 실제로 이 대자연 상황, 대자연의 현상 속에서 그걸 느끼도록 만들어버려요. 그걸 누구한테 지적질 받아야 되느냐, 주님한테 직접 지적질 받아야 돼요. “주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손들겠습니다.” “손 내려! 손 내리고 니가 당당하게 살아. 그게 죄수다워. 그게 죄수다운 모습이야.” 우리가 아는 죄인은 죄를 지었으면 벌 받아야 되고 하나님의 벌은 무섭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벌은 내가 때려야지.

그래서 “이제부터는 꿇어앉아서 주기도문 열 번 쓰고 매일같이 기도 30분하겠습니다.” 하면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오컴처럼 “내가 시키지도 않는 소리 하지도 마라. 내가 시키거든 해라. 시킨 짓이 나쁘다고 옳다고 니가 판단하지 마라. 시켰다는 자체가 그게 옳은 거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리니. “주여, 저 죽어요.” 하면 “죽는 것도 선한 일이니까 하라. 내가 시켜서 죽어라 하면 니가 죽어!” 그럼 우리는 죽지는 않고 죽는 시늉을 하거든요. 그건 아니에요. 죽는 시늉을 하려고 진짜 죽어야 돼요. 그러면 죽는 것이 내가 죽는 게 아니고 내가 순종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순종 안 되는 인간을 순종케 하는 식으로 죽이게 되는 겁니다.

그 예로 대표적인 사람이 마르다, 마리아 오빠 자기 본인은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자기가 아프다는 것을 알잖아요. 폐암 말기인 걸 알지요. 하나님께서 폐암 말기라도 연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하셔서 감사합니다. 김 자옥처럼 그런 고백을 하면서 권사로서 봉사했지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오래 살겠네, 했는데 오래살긴 뭘 오래 살아. 죽어버렸는데. 그것처럼 얼마나 낫기를 기다렸겠습니까? 나사로가. 그래서 급한 마음에 예수님 모셔오라고 그렇게 닦달했잖아요.

예수님께서는 니가 죽는 것은 내 일이 아니고 내가 죽여줘야 내 일이 되는 거예요. 그래야 죽어도 살겠고, 를 보여주는 하나의 교육 자료로서 쓰여 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죽여 버렸어요. 죽고 난 뒤에 나흘 만에 도로 살려냈지만. 하나님의 허락 없이 참새가 떨어지는 법이 없듯이. 세상의 모든 죽는 인간은 주의 허락 없이는 사는 법이 없어요.

지금도 고속도로에 사건 많이 일어납니다. 고속도로에 사건이 지금 하루에 100건이 일어나는데 인간 같으면 100명 다 죽어야 돼요. 죽는 사람은 2~3명밖에 없어요. 나머지 98명은 다음으로 미뤘어요. 다음에 죽이려고. 살고 죽는 것은 사고 났다고 죽는 것이 아니에요. 안전벨트 안 맨다고 죽는 게 아니고. 주께서 죽여줘야 되는 거예요. 늘 매던 사람이 하필 딴 짓 하다가 안 매서 죽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주께서 딴 짓하게 만들었고 생각 안 나게 만든 거예요.

지금 해석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가 우리 자신에 의해서 우리 자신을 구원하겠다는 우리의 본성이 내 인생 관리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내 인생의 매니저라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역사를 구성합니다. 항상 자기 역사를 따로 구성하고 그 구성하는데 본인이 희생자가 돼요. 그래서 이게 나온 게 행함이라는 거예요. 행함.

모든 인간의 행함은 자기를 희생자로 만들어요. 무엇을 위한 희생자? 찬란한 자기역사를 위해서. 내가 이런 희생을 남겨서 이런 찬란한 역사를 만들었노라.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그 소리하려고 인간은 모든 행동을 해요. 자기희생 없는 행동은 하나도 없어요. 막나니가 좋은 집의 재벌 집에 가면 맵시 단정히 하고 예~ 공손한 채 하는 이유가 자기가 그만큼 희생을 하고 있는 거예요. 희생하니까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평소의 하던 짓 안하고 특별한 짓하려고 하니까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사람들이 거기에서 죄인하면 되는데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려고하니까 교회 오면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이쁜 짓! 뭘 이쁜 짓이야.

기능적인데 그 기능은 뭐냐 바로 저주를 유발시켜요. 엘리야가 오는 날이 저주받는 날입니다. 이것이 바로 끝이에요. 인간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끝입니다. 집사님 요새 개그콘서트(개콘) 보십니까? 거기에 보면 ‘유 인상 장가 보내기 프로젝트’가 있잖아요. 그 코너에 보면 어떤 신인개그맨이 이런 소리를 해요. “그러다가 장가가시면 이 프로 끝나는 거 아닙니까?” 늘 물어요. “이렇게 되면 하나밖에 없는 이 코너 끝나는 거 아닙니까?” 벌벌 떨면서 늘 물어요. 옆에 있는 선배가 “이 한심한 놈아! 뭐? 없어! 안 돼. 장가 안가.” “그래, 유 인상 점잖아. 뭐? 점잖은데 없어!” “이러다가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이걸 코너에서 몇 번 물어요.

문제는 끝이에요. 끝. 끝이 아직 되지 않아야 자기 가능성, 자기 가치가 유지가 돼요. 끝이 되어버리면 아무리 가치를 유지해도 끝은 이걸 포크레인으로 짓밟아버려요. 저 서울의 사당동 재개발지역에 가보세요. 봉천동 거기에. 지금 재개발 끝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못사는 동네에. 영등포 동네에 다 못 사는데 그 재개발 지역에 가게 되면 어떤 모습이 있느냐 하면, 그 포크레인이 와서 집을 밀잖아요. 한옥을 밀어버리면 그 찢어진 구닥다리 벽지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 애들이 크면서 낙서한 게 나와요. 애들 키 클 때 표시한 게 있어요. 하지만 이건 완전히 폐허인데. 폐허. 이것만 남았어요.

지붕 뜯기고 벽만 싸늘하니 벽에다가 애들 키 클 때 줄만 보이고 옆에는 벽돌이 널려있고 쓰레기 날려있고 포크레인 왔다, 갔다 하고 완장 찬 반장만 왔다, 갔다 하고 황랑한 그 풍경. 얼마나 많은 추억이 있습니까? 세월이 가면, 모든 게 잊혀 져요. 그리움도 잊혀지고. 세월이 가면 가슴에 그리운 마음이 있는가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람 다 잊혀지고. 세월이 가면 모든 게 다 날아가 버려요. 사람들은 결국은 해놓고 밟히고 밟힐 걸 또 하고. 제일 싫어하는 게 끝이에요.

그런데 끝에 가지 아니하면 내가 누군 줄 몰라요. 주님은 끝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으로서 엘리야와 세례요한을 연관시킨 겁니다. 니가 끝에 섰다고 다시 봐라. 그러면 니가 생각하지 못한 예언의 완성은 바로 누가 이렇게 우리를 끝장내놨습니까? 바로 나다. 구약에 있는 모든 선지자의 예언은 장차 심판주가 올 것이고 그 심판주가 와가지고 세상을 모든 것을 전멸을 시킬 때 그 날이 바로 너희들이 기다리는 하나님의 나라다. 내가 바로 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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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8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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