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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유튜브(94강, 95강), 말씀풀이, 하나님께 영광 141120강의마태복음

유튜브(94강, 95강), 말씀풀이, 하나님께 영광 141120

이름 : 이근호(IP:119.18.98.57)

94강

95강

이미아(IP:180.♡.84.30)

14-12-03 21:40

94강-YouTube강의(말씀풀이)141120-이 근호 목사

오늘은 제 94강 제목은 “말씀풀이”입니다. 개신교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늘 먼저 언급하는 게 있습니다. 말씀은 말씀대로, 말씀으로만 풀어야 된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죠.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들 많이 합니다. “다른 교회는 예화가 많지만 저희 교회는 오직 말씀 속에, 말씀만 가르칩니다.” 라고 언급들을 많이 하죠. 그러면 듣는 사람은 “아, 여기가 참 정통이구나! 바른 교회구나!” 그렇게들 생각합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푼다 할 때에, 주의할 게 하나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은, 본인들이 말씀 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본인들이 말씀 바깥에서 이 말씀, 저 말씀, 꽃을 뽑듯이 이렇게 자기 필요한 것을 뽑아 놓고 그걸 연결시키는 것을 가지고 말씀은 말씀대로 푼다고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거는 잘못입니다. 그러면 단어놀이밖에 안 되죠. 비슷한 말 끼워 맞춰 가지고 마치 정확한 말씀풀이 한 것처럼 그렇게 해석을 해버리면 그것은 말장난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숨겨져 있느냐 하면 어떤 말씀을 채택할 때, 채택할 때 그 설교자의 의도가 숨겨져 버리죠. 말씀을 제대로 뽑았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신이 노리고 있는 노림수는 그 뒤에 숨겨져 있으니까 그런 사람은 그 주장이 말씀 그대로 인 줄로 그렇게 곡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말씀대로 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말씀대로 산다고 할 때에, 그걸 받아서 마귀가 시편 91편을 인용하면서 그러면 높은 데서 뛰어내려 봐라 그럼 말씀대로 천사가 와서 이렇게 너의 발꿈치를 받쳐 준다면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야라는 인기를 얻을 것이다. 그 테스트를 해보라고 나와 있습니다.

마귀가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갔지만, 그 마귀의 노림수는 딴 데 있었죠. 사람들이 납득이 되는 메시야 상으로 그렇게 살아가라고 요구한 게 되죠. 예수님한테.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말씀대로 푼다고 하면서 성경에서 역사를 끄집어내는 경우가 있어요. 역사를 끄집어내면 어떤 오류에 빠지게 되느냐 하면, 과거에 구약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들을 본받읍시다. 이렇게 되어 버리죠. 과거에 만약에 어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이삭이나 야곱이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께 칭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된다 하는 거죠. 근데, 그렇게 되게 되면 어떤 오류에 빠지냐 하면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살아났다면 오늘날 우리도 큰 아들이 아프다 싶으면 시장에 가서 어린양 잡아다가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큰 아들이 온전하게 구원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그리고 야곱이 이삭에게 별미를 갖다 바쳤더니만 저주받지 않고 복을 받았다. 따라서 우리도 평소에 드린 것 말고 별다른 예물을 드리면 복을 받는다. 이런 식이 돼버리죠. 또 마찬가지로 유월절 지키라고 했으니까 유월절 지켜야 되는 문제, 그 다음에 말라기에 십일조 나오니까 십일조 해야 된다는 그 문제, 십계명에 안식일 있으니까 우리도 안식일 지켜야 하는 그 문제가 바로 말씀 속에서 말씀으로 푼다고 하면서 사실은 그 속에서 어떤 역사를 끄집어내고, 역사를 끄집어냄으로서 그들은 옛날에 했던 그 행함을 지금 이 시대에 똑같은 행동, 유사한 행동을 반복하게 되면 동일한 복을 받는다는 그런 인간적인 아이디어를 이용한 셈이 되죠. 그것도 잘못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으로 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말씀을 관찰하거나 해석할 입장이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해석당하는 입장으로 말씀을 봐야 된다는 거죠. 성경 말씀은 누구를 겨냥 하냐면 바로 예수님을 겨냥합니다. 그렇다면 총체적인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말씀의 유일한 실행자와, 실천자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죠.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매 그 말씀에 응해서 예수님께서 착착 자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럴 때 주변 인물들,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그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를 못했죠.

그것을 통해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일점일획이라도 말씀을 귀히 여겼던 그들이, 나름대로의 말씀을 귀히 여겼지만 사실은 말씀 바깥에서 말씀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어떤 특권의 자리에 그들이 놓여 있다는 것이 그만 들통 나고 말았습니다. 특권의 자리에서 말씀을 해석하는 그것이 결국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악마적인 태도로 그렇게 연결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푼다는 것은, 그 성경 말씀을 다 이루었던 예수님한테 우리가 지적을 받는 식으로 말씀을 보면 되는 겁니다. 그 지적을 받을 때, 어떤 특정 단어 이것 가지고 행함으로 지적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지적받는, 총체적으로 믿음으로 지적받으면 되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왜 너는 나를 믿지 않고 너의 행함과 너의 믿음과 너의 소망과 너의 사랑을 믿느냐? 그런 식으로 지적받아야 되겠죠.

왜, 주님의 행함과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소망으로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생각을 못하고 말씀이라는 것을 가지고 잡아당겨 와서 자기가 실천해하는 자기의 행함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이러한 심리적인 정신적인 마음의 변화에다가, 거기다가 맞추어서 자기 행위가 주체가 되어서 행동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느냐 라고 주님한테 지적 받으면 그것이 바로 말씀에 대해서 말씀의 풀이에 합당한 태도라고 봅니다.

히브리서 4장에 보면,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하는 일은 우리를 벌거벗은 채로 우리의 골수와 모든 사고와 생각과 행동을 낱낱이 쪼개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말씀 가지고 우리를 쪼개고 우리는 쪼갬을 당하는 그런 입장에서 우리는 말씀을 대하고 있습니다. 자, 그 다음 문제죠.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말씀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지적받기 위해서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데 어떤 식으로 들어가게 되느냐 하는 그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빌립보서 1장 29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여기 보면 이 짧은 문장,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러니까 은혜라 하는 것은 내가 말씀을 풀어서 그 풀어진 말씀 가지고 나를 구원하겠다는 자신의 종교적인 희망과 기대를 만족하기 위해서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고, 그게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거죠. 그리스도를 위하여.

따라서 은혜를 받게 되게 되면, 내가 챙길 어떤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 지켜서 나한테 유리하게 되고, 이런 말씀 지켜서 나한테 어떤 해답을 얻겠다. 그러한 노림수들은 일단 제대로 은혜를 받아버리면 그런 것까지 죄가 된다는 사실이 차후에 밝혀지게 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존재, 그리스도를 위한 기능적인 존재로서 우리가 여기에 만들어져 있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거죠.

그래서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은, 빌립보서 1장 29절 말씀은 우리가 어떤 경우라도 자의적으로, 스스로 자기에게 독려해서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개척교회 하면서 고생하는 것, 그거는 고난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어떤 바른 일 했는데 남들이 안 알아줘서 왕따 당하는 그것도 고난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런 고난은 출발점이 내가 이렇게 시도를 한 번 해봤는데 주위에서 그걸 호응해주지 않으니까 상대적으로 외로움을 느끼고, 서러움을 느낄 때, 슬픔을 느낄 때, 우리는 곧장 그걸 고난이라고 해석을 해서 자기 정당성을 보장하는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해버립니다. 그거는 잘못입니다. 여기서 은혜를 주신 것은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서 고난도 받게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고난 받은 것 자체가 이게 하나님께 특혜 받았다는 사실을, 감사함으로 우리에게 피어오르도록 하는 겁니다.

내가 뭔데 주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 그런 입장이 되었지? 이건 나한테 넘치는 은총이야! 넘치는 축복이야! 이렇게 감사케 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 달성이 되는 겁니다. 말씀 해석은 바로 이 은혜를 통해서 날마다 주님으로부터 지적받고, 그러면서도 지적받는 그런 대상이 되었다는 자체가 하나님과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주님과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게 되는 겁니다.

이미아(IP:180.♡.84.30)

14-12-03 21:41

95강-YouTube강의(하나님께 영광)141120-이 근호 목사

자, 두 번 째 95강 제목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흔히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제 1계명이 뭐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사항이지, 이미 선악과 따먹은 인간에게는 지킬 수 없는 조항입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라 하는 것은 결론부터 먼저 내리면, 영광이 되지 못하는 자를 가지고 영광이 되시는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영광이 되지 못하면서도 끝까지 영광이 된다고 우깁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러한 오해, 곡해를 하고 있는 인간을 통해서 영광 받는 다른 방법을 주께서는 실시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내가 헌금을 하게 되면 영광이 될 것이라고 보통 생각합니다. 헌금을 할 때, 헌금을 하는 그 순간 정신 바짝 차리고, 그때는 온전히 돈을 사랑하지 않고, 그저 헌금한 것에 대해서 감흥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드리면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헌금한 그 순간뿐만 아니고, 헌금한 그 순간 오기 전에 10년, 이후에 10년을, 그 자기가 헌금했던 그 순간을 다시 10년 후에 되돌아보고, 또는 10년 미래를 예상해 보면, 언젠가 그것은 자기의 의로움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건 전도도 마찬가지고 특히 선교도 마찬가지고. 구제도 마찬가지고. 어떤 경우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방법은 없습니다. 로마서 3장에서 그 대목을 이렇게 단정적으로 언급을 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해놓고 그 뒤에 말을 우리가 모른다고 치고, 빈 괄호를 쳐놓고 그 괄호에다가 우리들의 생각을 뒤에 한 번 이어봅시다. 그 문장을 이어나가 봅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제 성령을 받은, 어떤 사람이 그 뒤에 문장에다가 주관식으로 자기 생각의 의중을 적는다면 아마 어떤 사람은 이렇게 적을 수도 있어요.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영광을 돌렸다.) 이런 아이디어도 뒤에 나올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 뒤에 빈 괄호에다가 (회개하고 난 뒤에는 정신 차려서, 정신 바짝 차려서 다시 말씀을 보고 지켰더니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다.) 하는 그 아이디어를 집어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어떠한 특별한 사람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화의 삶을 살았다.) 이렇게도, 뭐 비슷한 이야기지만 그런 이야기도 집어넣을 수 있어요. 그 세 가지의 견해는 다 틀렸습니다. 왜 틀렸을까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했던 것을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례로, 그런 경우로서 그걸 이해해버립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는 말을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 눈앞에 계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다그친다면, 주님의 그 뒤에 말을 우리가 끊어버리고 성급하게 우리가 나서서 하는 말이 “이제 우리가 잘못을 알았으니까 이제 우리가 제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는 성급한 우리의 의견이 주님의 말을 끊어버리고 아마 이어져가게 될 거예요. 잇게 될 것입니다.

바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는 주님의 말씀은 바로 이 문장 뒤에 우리 나름대로의 성의와 격려를 다해서, 이제는 제대로 정신 차려서 반성하고 회개해 가지고 두 번 다시 영광 못 돌리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하는 그러한 의견마저도 바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라는 그 노선과 동일한 노선에 끼어들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는 것은 과거에 우리가 이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그것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본성 자체를 두고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니가 아무리 정신 차리고 니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본성 자체가 죽을 때까지 영광 돌리는 본성이 되지를 못한다는 단언입니다. 선언이십니다. 성령 받아서, 정신 차려서 그래서 말씀대로 사는, 그래서 영광 돌리는 그러한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취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을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나름대로의 단단히 제가 언질을 줬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인간의 힘으로 영광 돌리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단단히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나올 24절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 뒤에 말씀, 그 뒤에 말씀, 그렇다면 영광이 되는 그 방식은 뭐지? 그 방식은 뭐지? 그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방식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도입되죠. 예수님이 개입하시는 겁니다. 중보자가 개입하시는 겁니다. 모든 인간과 예수님 한 분과 지금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했지만 오직 예수님만은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그런 식으로 사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은혜를 받아서, 믿음이라는 것은 선물을 받아서 이 사실을 알았다 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젠 예수님을 떠나보내는 게 아니에요.

“그래, 예수님 고생하셨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젠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는 것도 하나의 과거지사니까 우리는 잊어버리고 이제는 미래로 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잊어버리고 이젠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지.” 라고 십자가를 후딱 떠나버리고 다시 자신의 행함으로 돌아오는 그런 아이디어를 가지고 저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는 그 죄에 해당되는, 그 죄의 극단적인 모습이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어이 예수님마저 차버리고, 다시 본래의 자신의 가치와 정당성으로 되돌아오는 이 모습은 아무리 은혜 받았다, 성령 받았다, 믿음 받았다, 우겨도 그거는 제대로 성령 받은 것이 아니고 여전히 악령 속에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고백입니다. 공통적인 고백이고 악령 받았으면서도 악령 안 받은 티를 내는, 종교적인 그러한 술책에, 위선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겁니다.

빌립보서 2장 11절에 보면,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다시 말씀 드립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은 십자가 잊어버리고, 이제는 십자가 능력을 내가 소유해서 내가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고 모든 입으로 주라 시인하여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주 되심이, 정면에 나서지 않고 뒷면에 나선다든지, 그냥 보조 기능으로 한다면 그거는 마귀가 가르친 가르침입니다. 그거는 성령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령 받지도 않았으면서 성령 받은 척을 하면서 경건의 티를 내는 사람들이 주로 주장하는 주장이 바로 성령 받고 난 뒤에 옛날에는 영광 못 돌렸는데 영광 돌렸다는 겁니다. 그거 사기고 거짓말입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겁니다. 주라 시인한다면 우리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위해서 화형당할 그런 입장, 그런 존재에 속할 뿐입니다. 다시 로마서 3장으로 돌아온다면 “예수님께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그 피로 말미암아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심이라” 따라서 예수 믿고도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함으로써, 예수님의 의로움이 드러날 때, 그것이 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영광 되는, 유일한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유일한 방식의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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