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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마 17:22-23 (인자의 운명)우리교회마태복음

Re..마 17:22-23 (인자의 운명)

이름 : 이근호(IP:)

인자의 운명
2004년 8월 8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7:22-23

17: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17: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보통,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죄라고 알고 있습니다. 비록 사랑하지 않더라도 내가 남들에게 혹은 하나님에게 나쁜 짓을 안 하면 됐지 않느냐고 여깁니다.

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버티고 있느냐 하면, 착한 일이란 그저 내 노동과 애씀만 상대방에게 제공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져야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벌이 침을 쏠 때, 그 침 바늘만 상대방에서 꽂히는 것이 아니라 그 침을 감싸고 있는 벌의 피부조직까지 함께 손상을 입게 되며 그렇게 해서 나중에서 시름시름 죽게 됩니다.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이 꼬깃꼬깃 숨겨놓은 최후의 자존심마저 붕괴 당하면서 상대방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모험을 누가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냥 착한 일만 하면 그만이지 사랑까지 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나름대로 버티는 것은 자신의 토대는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외부에게 보내는 바입니다. 바로 이점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토대가 바뀌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 보시기에 배척해야만 하는 대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토대가 완전히 바뀐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부터 완전히 딴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름조차 사울에서 바울로 바뀐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스럽게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아의 죽음을 겁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차라리 늘 덧붙이는 삶으로서 오늘보다 장래가 나아지는 삶을 원하지 토대가 뿌리 채 바꾸는 지는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파스 붙이는 것이 낫습니까 수술하는 것이 낫습니까? 이구동성으로 파스 붙이는 것을 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술은 자신의 해체하고 자신의 근본 된 육체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손상당했다는 것은 마치 자신이 마땅히 그런 상처를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간주는 것이기에 그 점은 싫은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나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다 찍어 뽑아 내버릴 것이다"고 말입니다.

인간들에게 근본 토대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자기 사랑으로 다져지고 뭉쳐진 존재의 토대를 갖고 그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무엇으로 토대가 교체된 자입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입니다.

우리들의 존재 토대가 잘못되어 있다는 증거는 우리의 기초가 십자가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 외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을 고린도전서 2:2에서 이런 고백을 쏟아놓으십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여기서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라는 대목도 같이 유념해 보시기 바립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진리에 대해서 자신이 있었으면 이런 표현을 사용했겠습니까! 너무나도 틀림없이 없는 하나님의 일의 핵심이기에 그 핵심을 그는 온 몸으로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초가 십자가의 피로 교체가 되면 그 토대로부터 주님의 사랑이 올라와서 온 몸을 적시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자신의 행함에 입각해서 "내가 너에게 잘 했냐 못했냐?"를 따지다가 이 때부터는 자신의 행함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못 박히심을 중심으로 대화에 나서게 됩니다.

자연적으로 사람들하고는 소통이 안됩니다. 마치 배양액 속에 들어있는 식물처럼 성도는 '예수님의 피'라는 배양액에서 속에서 살게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세상 사람들하고는 의사소통이 되지를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소위 교회라는 이름으로 영업하는 업소 사람들하고도 의사소통이 되지를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 기초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아니라면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오로지 세상 것에 의해서 해결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마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점보는 사람들처럼 이 고통의 해소를 세상 것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손님 안 올 때 혼자서 심심풀이 화투 점을 치는 늙은 창녀와 같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취미나 낙을 가진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도 지금 교인들은 목사들이 그런 심심풀이 점이나 쳐주는 사람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고객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들의 탐욕에 맞장구 쳐줍니다.

때로서 윤리나 도덕을 원하는 고객들도 오는데 이들은 이만큼 배부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목사무당들은 적당한 윤리와 도덕을 제공하고 "참 복받겠수" 하면서 보너스로 축복을 남발합니다. 여러분들은 제발 목사를 무당으로 만들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되면 이 교회는 서로의 자존심을 보존되는 기관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0:28에 보면, 교회를 가지고 '하나님의 피 세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라는 배양액에 푹 잠겨 자라나야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야 모든 죄와 저주가 해독이 됩니다.

목사의 임무는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속에 있어 기초가 바뀐 사람만이 구원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를 받아들이면 되잖아 하고 퉁명스럽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흔히 예수님의 죽음을 즐겨 노래한다고들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사람의 자기말고 남의 죽음에 대해서 잔뜩 찬양이나 노래나 숭배의 시를 바쳐서 칭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죽음이 아니라 막상 자기가 죽을 차례라면 어디 거기서 노래가 나오겠습니다.

오직 그치지 않고 사정없이 쏟아지는 통곡의 눈물뿐입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교인들이 예수님을 멀고 먼 타인처럼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멀리서나마 그분의 희생과 죽음에 대해서 애도의 심정을 보낸다는 겁니다. 이것은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이나 나올 행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니 제자들이 단번에 '근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예수님과 자신들이 더 이상 다른 관계 놓인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배우자가 죽는다면 기가 찰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진정 십자가를 아신다면 십자가를 노래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모독이요 차라리 '십자가 안고 통곡했다'가 맞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성도나 목사의 사명이 나옵니다. 성도의 사명이란 자기 삶 속까지 이미 들어와 버린 예수님의 고통을 읽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부름 받은 자입니다. 그 아픔과 고통을 맛보는 것이 성동의 일생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초는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산 인물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원치 않아도 이미 예수님이 받았던 저주와 심판이 우리 일생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세상 것으로 자신을 장식하고 마저 채울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제가 사랑이라는 말을 했지요? 사랑이란 침만 박는 것이 아니라 침 틀까지 다 뽑혀서 상대방에게 돌진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고생하면서 예수님의 고생을 맛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주신 삶의 자리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의 길'이라는 생명의 자리를 부여받았습니다. 만약에 이것에서 이탈되면 우리에게는 영 벌 밖에 없습니다.

빌립보서 3:10-11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활에 이르기 위해 십자가 길로만 가야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 부활에는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첫째 부활이란, 오직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자들의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세상의 종교나 인간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는 않으면서 그저 자기를 사랑해서 자아를 영원불멸한 존재로 탈바꿈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짜 부활을 방지하기 위해 하나님은 첫째 부활이라는 단계를 준비하신 겁니다. 즉 예수님을 위하여 자존심을 버릴 수 있는 자만이 둘 째 부활에 참여한다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십자가와 부활이 장난이나 농담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정확한 현실임을 우리가 인식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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