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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41003 미국이상현목사 교회 집회b자유게시판이사야

20141003 미국이상현목사 교회 집회b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8)

20141003 미국이상현목사 교회 집회b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끝에 제가 이런 말했지요. 예수님은 자신이 뭔가 말을 뱉어놓고 그 말을 본인이 다 수행해버려요. 자기가 던진 말을 다 거둬서 본인이 다 완성해버려요. 그리고 본인 외에 어느 누구도 개입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비유하면서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잖아요. 언약은 주신다는 것은 약속을 주시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약속을 던지게 되면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키라고 준 말씀처럼 들리는 거예요. 십계명이 대표적이잖아요. 코앞의 말씀이 왔는데 부메랑처럼 도로 가버리고 주신 분에 의해서 완성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본인이 지킬 말씀을 우리에게 왜 던져줄까요? 그것은 우리의 현재 상태가 천국에 부합되지 않다는 것은 보여주는 겁니다. 법이 없는 곳에는 죄가 없어요. 로마서 7장에서 너희가 탐내지 말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너희들이 탐내는 죄를 지을 수 없었다. 그런데 탐내지 말라는 순간부터 우리는 탐내지 말라는 그 말씀을 내가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부터 우리 속에 탐내자는 본성이 들어있을 줄이야 어떻게 알겠어요. 그것이 비로소 노출이 되고 부각이 된다는 겁니다. 이게 공자 윤리도덕과 다른 점이에요.

우리가 어떤 지시를 하게 되면 그 지시를 지킬 수 있는 것을 전제로 해서 준 거라고 오해하는데 그것은 세상의 법에서는 그럴지 모르지만 성경의 법의 목적은 우리 속에 잠재돼있던 법에 대한 위반과 반항심을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것처럼 건드림으로 일깨워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법을 준 목적이에요. 그리고 그 법이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점점 더 완성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율법의 일점일획도 폐하지 않고 다 이룬다고 돼있어요. 이룬다고 하면서 추가적인 법들을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지켰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 새롭게 도입된 추가된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보고 기겁을 하지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에 해당된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서 살인자 아닌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체가 이미 간음죄라면 이 세상 남자치고 간음죄 안 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십 년 동안 여자에 대해서 관심 없더라도 십오 년째에 정말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다면 십오 년 지킨 것 무효가 되는 겁니다. 말씀을 주신 것은 말씀을 지킬 수 있어서 준 게 아니고 못 지킨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준 말씀이죠. 코앞에 왔다가 도로 가버리죠. 예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는 허락된 자와 허락되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그 권한과 자격이 누구한테 있다고 봅니까? 예수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씨 뿌리는 비유를 했습니다. 문장이 좀 어려워졌지요. 내가 허락하면 천국이고 허락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그렇게 선언할 수 있는 자격자가 예수님 본인밖에 없는 거예요. 천국에 적합한 30배, 60배, 100배를 맺는 그런 능력은 말씀을 주신 예수님 본인만이 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천국은 공짜로 가지요. 공짜로 값없이 갑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왜 공짜이어야 하느냐고 할 때 그 다음 말이 있어야 돼요. 왜 우리는 공짜로 가지요? 이 말은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주님께서 치렀기 때문에 공짜로 간다고 해야지 그냥 내가 공짜로 들어간다고 하면, 공짜로 들어가게 하신 그 은혜를 모르면서 그냥 가버리면, “너, 어디서 왔노?” 이렇게 돼요.

분명히 씨 뿌리는 비유는 제가 율법이라 했습니다. 조건 주님께서 제시했습니다. 옥토에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조건에 부합된 사람이 없습니다. 없으면 천국은 누가 들어가느냐?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당사자가 허락하면 우리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어렵습니까? 참 쉽지요.

쉽다 하니까 이제 발동 걸렸습니다. 계속 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성도로서 주님을 만난 사람의 모든 행위와 생각들은 결국은 무엇을 낳기 위한 행위들이냐 하면, 주님에 의해서 30배, 60배, 100배를 맺을 수 있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공정 가운데 우리가 포함이 된 겁니다.

물 있습니까? 목말라서 물 마신 게 아니고 여러분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물 마신 겁니다. 제가 방금 물을 마셨습니다. 잘못된 해석부터 먼저 말씀드립니다. “주여, 주께서 물 주셔서 이 물로 힘 얻었으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힘을 얻어서 주의 일을 하게 하옵소서.” 이것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거는 일단 내가 주님 아니까 이제부터 내가 주인공이 되어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겠다는 겁니다. 이것 잘못된 겁니다. 하도 반응들이 없으니까 뒤에 해답부터 먼저 드립니다.

그러면 물 마시는 이것조차 30배 열매에 해당되는 겁니다. 주께 이미 구원받았기에 우리가 물마시게 하셨다고 할 때 그것이 주께서 정말 기다렸던 그 열매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이것 자체가 주님의 은혜라고 아는 것, 쉬울 것 같지만 쉽지 않습니다. 주의 능력이 아니면 이걸 깨닫지 못합니다.

로또를 샀는데 1등이 되어서 20만불 얻었다. 그때 우리는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라고 쉽게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로또복권을 들고 가보니까 글자 하나 틀렸어요. 괜히 좋다 말았어요. 안 맞은 것 누구 뜻입니까? 주의 뜻으로 기쁨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 30배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불가능 일이에요. 어떻게 내가 고생해서 내가 노동해서 얻은 것을 주님한테 빼앗겨놓고도 그것을 감사합니까? 이게 사람으로 가능한 일이겠어요? 이것이 바로 허락하심 속에 포함돼있는 주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내장되어 사용한 결과입니다. 참 어려워요.

전에 욥기 했잖아요. 주신 자는 하나님이요, 우린 믿습니다. 그 뒤에 뭐라고 돼있어요? 주께서 주실 때 고맙다고 받는데 그 주신 것을 도로 가져갈 때 우리는 힘을 쓰고 안 빼앗기려고 애를 씁니다. 줘놓고 도로 가져가느냐고 벌벌 떨지요.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니까 가져가실 때 잘 가져가시라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주실 때 고마운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주신 것 도로 가져갈 때 사람은 짜증을 내게 돼있습니다. 이러려면 뭐하려고 주셨습니까?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사실 인간의 힘으로 안 됩니다. 안 되는 것을 주께서 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말씀에 부합되는 자만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말씀에 부합되게 하시는 주체자가 내가 아니고 나는 주님이 하신 일에 결과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그것이 믿음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주께서는 비유만 던져놓고 그 비유를 따라서 마무리를 지어야 되는데 그 마무리가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우리가 주님이 주신 말씀을 못 지키는 그 죄마저도 주께서 홀라당 다 가져가셔서 그 말씀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의인으로 간주하시는 근거가 우리 내부에 그것이 파고 들어온 겁니다. 그것이 예수 안에서 우리가 의롭게 된 겁니다.

“너는 못했지만 내가 했잖아. 겁내지 마. 쫄지 마. 천사 앞에서 쫄지 마.”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주님께서 지시만 했다면 우리는 못 지켰다고 벌벌 떨어야 되는데 지시한 것으로 쫄지 마가 아니라 지시에 따르지 못한 걸 미리 아시고 못한 그 모든 죄를 대신 가져가서 지킨 자로 간주하셔서 찾아오신 분이 내 곁에 있는데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이게 복음이에요. 자기 잘남과 못남의 자랑이 복음이 아니고, 내 곁에 누가 있다가 복음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너무 독립적이에요. 자기 곁에 누가 있다는 걸 인정 안 해요. 그러니까 맨날 지 잘난 맛에 변명조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도는 남들이 네가 했다고 수고했다고 해도 아니요, 주께서 날 가지고 하셨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로마서 8장 9절을 제가 읽어볼게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영이란 관계라고 제가 뉴저지교회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타고난 것 말고 이질적인 것이 너희 안에 있지 아니하면 아무리 착해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너의 것만 남아있으면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이질적인 것, 전혀 낯선 것이 장착되고 내장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영이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11절을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니라”라고 돼있지요. 듣거나 보거나 했지요.

이제 문제 나갑니다. 하나님이 우리하고 상대합니까, 우리하고 상대 안 합니까? 이게 문제입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은 우리하고 상대 안 한다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여, 제가 나쁜 짓을 했습니다.” “너하고 상대 안 해.” “주여, 제가 남한테 구제했습니다.” “너하고 상대 안 해.” “주여, 제가 성경을 백독했습니다.” “너하고 상대 안 해.” “주여, 제가 이번에 큰 목돈을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나는 너하고 상대 안 해.” “헌금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아까워서 빠졌습니다.” “너하고 상대 안 해요.” “주여, 제가 남편이 다섯 있었는데 헤어졌습니다. 이제 사귀는 남자가 여섯 번째입니다.” “너하고 상대 안 해.”

주님은 애초부터 우리와 상대 안 하기로 마음먹고 예수님의 자신의 영을 넣어서 자신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우리 몸도 천사보다 더 빛나게 하십니다.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습니다. 그 횡재가 우리가 기대한 횡재도 아니었어요. 일방적으로 주께서 찾아와서 주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집어넣고 우리를 예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린 늙어가고 예쁘지도 않은데 무조건 예쁘데요. 우리는 주님을 기뻐하지도 않은데 주님 쪽에서 먼저 우릴 기쁘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사는 것과 너무 달라요.

하늘에서는 영광이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의 평화라는 말씀을 교회에서 어떤 때 많이 듣습니까? 크리스마스 때죠. 제가 크리스마스 때 십오 년 전인가 그 설교를 하면서 그 대목을 지적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기뻐하는 사람이 구원받습니까?”라는 말을 설교시간에 질문을 던진 적이 있어요. 여러분, 어느 쪽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한 공로로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기뻐하지도 않는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보고 기뻐하시고 구원하시는 겁니까? 나중 쪽이죠. 주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기쁘게 보는 거예요.

주께서 기쁜 자 중에 주의 평화로다. 기뻐하심을(수동형) 입은 자 중에서 공짜로 자신이 성령 주시고 성령 있다고 죽을 몸도 살리신다는 거예요. 도대체 우린 뭐예요? 뭔가 왔다갔어요. 마치 위치추적기 같습니다. 잠자고 있는데 배 째고 위치추적기 집어넣고 하는 말이, 네가 어디 가든지 나와 함께 있다. 심지어 죽어도 내장된 주께서 집어넣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위치추적기로 말미암아 하늘 끝에 가더라도 건져내겠다는 겁니다.

너무 좋아서 안 믿어지지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습니다. 그런데 이게 아니잖아요. 일방적으로 집어넣고, “누가 이렇게 집어넣었지?” 주님께서 우리와 놀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이렇게 사랑했지? 내 사랑이 있네. 내 사랑 가져가야지.” 하고 회수하는데 딸려 나온 사람이 누구냐? 우리에요.

여러분, 가정주부가 호일로 고구마를 싸서 구운 다음에 호일 먹습니까, 군고구마 먹어요? 어느 쪽을 먹습니까? 군고구마 먹으려면 알루미늄 호일을 벗겨야지요. 그것 벗길 때 아프다고 합니다. “주님이여, 저 착합니다. 성실합니다. 교회 삼십 년 다녔습니다.” 그런데 자꾸 우리의 껍질을 벗겨요. 벗겨놓고 하는 말이, “군고구마 여기 있네.” 하고 그것을 가지고 기쁘게 먹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주님과 소통한다고 목사한테 잘 보이려고 기도할 것도 없는데 하는 척하고 통성 기도했는데 그런 조작과 위선이 의미 없습니다. 자기 것 집어넣고 자기 것 찾아가시는 그걸 로마서 11장에서 모든 게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는 겁니다.

이제 씨 뿌리는 비유는 끝났지요. 30배, 60배, 100배는 이것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하는 거예요. 씨 뿌리는 비유에 하나 더 추가합니다. 그렇다면 돌밭에 있는 건 뭐고, 하여튼 밭에 떨어지는 건 뭐고, 그 다음에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이야기를 구태여 할 필요 없잖아요. 옥토 만들어서 씨 뿌리고 열매 맺으면 되지 그걸 왜 하느냐? 이게 주께서 일하실 때 구원될 자만 드러나게 일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인간은 기어이 내가 구원되지 못하게 했다는 주님 자신의 분명한 분류작업도 아울러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그 말씀하신 겁니다. 그 이야기가 뒤에 알곡과 가라지 비유가 연이어 나옵니다.

우리는 자기 구원에 너무 급하다보니 나만 달랑 구원받게 되면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천국 가는 사람은 누가 지옥 가는 사람인지 알면서 아울러 천국에 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봅니다. 천국 간다가 아니라 난 저쪽으로 가고 싶은데 저쪽 아니네, 이런 식으로 천국 가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주체를 바꿉니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는지 아시잖아요.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그 정도 이야기했으면 베드로가 괜찮은 수준에 올라온 것처럼 생각이 드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띠 띠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살면서 14년 6개월 15일 동안 원치 않는 길로 가면 그 다음부터 원하는 길로 가겠어요? 못 가지요. 그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로 원치 않는 길로 가요. 만약에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길로 가버리면 저쪽인 줄 알았다고 저쪽으로 가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베드로가 이미 자기가 갈 길을 아는 셈이 돼버리면 그때부터 주님과 베드로가 헤어져도 베드로가 알아서 찾아오는 셈이 되지요. “주님, 그동안 교육 잘 받아서 앞으로 제가 혼자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에 구원받는 길에 베드로 본인의 공로가 섞이게 되지요. 그래서 끝까지 원치 않는 길로 갑니다. 그게 구원의 모델이에요.

저나 여러분 한 명도 원치 않는 길로 가서 이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앞으로 내일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원하는 길은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나한테 사기 친 사람, 나를 싫어한 사람들은 이유도 없이 제발 지옥 갔으면 좋겠다는 복수 심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나한테 사기 친 사람을 천국에서 만나면 어떻게 하려고? 난감하지요. 천국에서 멱살 쥐고 싸울래요? 난감해 진다고요. 나를 싫어하고 내 인생을 조져놓은 사람을 천국에서 만나면 반갑다고 할 수 있습니까? “너, 왜 왔는데? 주님이여, 저를 지옥으로 보내주시옵소서.”

<밀양>이라고 전도연 나온 영화가 있어요. 자기 아들 죽인 사람이 자기가 믿는 기독교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을 믿을 때 주인공 전도연은 그때부터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자와 함께 천국 간다는 것은 자기는 견딜 수가 없었던 거예요. 이건 뭐예요? 천국 가는 길은 이제는 내 힘으로 갈 수 있다. 이 정도 신학 실력이면 갈 수 있다고 여겼던 그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없습니다. 그저 알루미늄 호일만 칭칭 감은 거예요. 신학이란 호일, 아는 지식, 이런 걸로 감은 겁니다.

주께서 여러분 속살을 보여줄 때마다 우리는 그걸 원치 않아요. 남들처럼 근사하고 싶어요. 좀 고귀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요.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 뜻대로 해서 데려가는 겁니다. 우리는 부자 되고 싶어요. 가난하기 싫어요. 하지만 그것이 내 뜻이라면 주께서는 그 뜻을 꺾어버립니다. 배제해버립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 별로 없겠습니다만 저는 부자 되기 싫어요. 정말 우리 얘 공부 잘하는 것도 싫어요. 그런데 주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부자 되게 하시고 공부 잘하니까 견딜 수가 없어요. 나는 남자 만날 때 모범생이고 키 작고 성격적으로 문제 있고 예수도 안 믿고 돈 없고 그런 남자와 결혼하고 싶은데 주께서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키 크고 성격 좋고 나만 사랑하고 돈 있고 잘 생기고 머리 좋아서 후손들 공부 잘할 것 같은 그런 남자가 왔을 때 “주여, 이것은 내 뜻이 진정 아니었습니다. 왜 저를 이렇게 난처하게 하십니까?” 그쪽으로 가야 네가 천국으로 가기 때문에. 그래서 천국 문 앞에서 이렇게 온 것은, 제 뜻이 아니었고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온 노래가 최성수의 <동행>이에요. 누가 나와 함께 가겠느냐. 이 길을. 주님과 함께 가고 있습니다.

조건이 있어요. 절대적 내 뜻대로 아니지요. 주의 뜻대로. 우리는 주의 뜻대로 하면서 이 말씀은 결코 내가 지킨 게 아닙니다. 내가 지킬 수 없었다고 늘 고백케 해서 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처럼 나도 지옥 가는 게 마땅한데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만 그쪽으로 가지 않고 이쪽으로 간 것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나를 예쁘게 보시고 일방적으로 사랑의 은덕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비유로 주신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체리 보면 유혹 되고 마귀를 못 이기고 환란 오면 다 넘어집니다. 못 넘어지게 하신 것은 내 뜻이 아니고 내 고상한 신앙이 아니라 주께서 이미 확정된 믿음을 주셔서 내가 했다는 소리를 못하게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안 가게 하신 겁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기도 내용이 바뀌어야 됩니다. “주여, 고생케 하옵소서.” 혹시나 말이죠. 통박이거든요. “고생케 하옵소서. 완전 거지 되게 하옵소서. 이게 주의 뜻입니다.” 하면 혹시나 진즉에 우리가 노렸던 부자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주께서는 그 통박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비유가 무슨 비유지요. 24절입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 같으니” 그것 하기 전에요 23절에 “좋은 땅에 뿌렸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라고 했지요. 깨닫는 능력이 우리한테 없습니다. 왜냐하면 뭘 깨닫느냐 하면, 이 모든 말씀을 우리가 지킬 수 없음을 깨닫는 거예요. 아까 세리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그럴 때 주께서 “네가 합격자야.” 그 원리와 똑같은 원리에요. 기적과 말씀, 말씀과 기적, 같은 원리가 같이 녹아져있습니다.

그 다음에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24~29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천국은 하나의 액션이다, 이 말입니다. 천국은 있는 것을 가지는 것이 아니에요. 여기 북쪽에 가면 우두머리(한국말로)? 거기 가서 사람들이 하는 일은 뭐냐 하면, 물건이 존재하는 것을 돈 주고 가져오면 되지요. 물론 남자들은 주차장에서 자고 있지만 너무 힘들어서. 존재하는 것을 가져오면 내 것 되잖아요.

지금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종들이 잘못된 게 뭐냐 하면, 가라지가 존재하면 나라는 존재자가 가라지를 뽑아내면 가라지가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주인이 어떻게 합니까? 가만두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가라지의 존재가 물건처럼 있다면 그 있음에 대해서 나라는 존재가 뽑을 수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뽑을 수 있는 자격이 없지요. 이건 어려운 게 아니고 쉬운 거예요.

밭이 있는데 가라지가 군데군데 있단 말이죠. 알곡도 있고. 우리는 가게에 진열한 물건처럼 있다고 보고 까만 것 제거하면 하얀 것만 남으니까 모든 것이 알곡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게 천국을 이해 못한 사고방식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알곡을 심어놓은 게 하나님의 원수가 심어놨죠. 원수가 심어놓은 것을 종들이 뽑을 수 있다는 발상은 잘못된 발상이라는 겁니다. 왜냐? 인간은 원수 안에 있기 때문에, 마귀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적을 물리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가 저 적을 물리치겠습니다.” 주님이, “네가 뭔데? 너도 같은 편이잖아요.” 우리는 주님 편이라고 자부하는 거예요. 우리는 아부하는 식으로 “주여, 주님의 원수가 있습니다. 내가 뽑을게요.” 하면 주님께서, “너나 잘하세요.”

하나님의 원수가 심었다는 말은, 같은 편인 우리 인간이, 자기가 마치 주님의 편에 있다고 착각해서 제가 충성되이 뽑겠다고 나서면 인간이 원수를 제거해서 그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지요. 예수님 왜 왔습니까? 예수님 오실 필요가 있습니까? 없지요. 종들만 있으면 되지요.

이 해석을 하면서 천국은 어떤 작업이냐 하면, 존재하는 가라지를 뽑을 수 있는 것은 그 원수를 심어놓은 그 존재를 다른 어떤 분, 존재가 제거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종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경우에만 가라지는 제거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원수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지요. 가만두어라. 네가 나서면 가라지 뽑다가 알곡 뽑힌다. 쉽게 말해서 가라지인지 알곡인지 네 주제에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너는 너밖에 몰라.

마치 너는 자동적으로 주님 편에 서있다고 착각하는 것, 이건 나폴레옹 정복욕입니다. 징기스칸 정복욕이에요. 저 모든 것 기독교 신자 다 만든다. 이 아파트 몽땅 우리 교회에 다 데려온다. 이거는 자기의 정복욕의 화신이 된 상태입니다. 주께서는, “너나 잘하세요.” 주께서 자기 백성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댄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나대든 안 나대든 관계없이 주님은 자기 백성 구원하는데 실패하지 않습니다.

또 여러분이 기다리는 시간이 왔습니다. 잘못된 해석 기다리지요. 잘못된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교회가 있는데 장로님 한 분이 자꾸 교회 돈을 횡령하고 있어요. 교인들이, “목사님, 저 장로님이 가라지 같이 행동하는데 우리교회 발전을 위해서 장로님을 아예 이참에 재정에서 뽑아버리죠.”라고 했을 때 목사님이, “마태복음 13장 비유에서 놔두세요. 주께서 뽑아야지. 우리가 뽑다가 알곡까지 뽑히면 안 됩니다.” 이 해석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보나마나 맞을 리가 없지요. 틀린 거예요.

왜 틀렸느냐 하면, 그 목사는 지금 주님을 생각하는 겁니까, 교회를 생각하는 겁니까? 교회를 생각하지요. 교회는 존재가 돼요. 어떤 존재에 대해서 처리할 문제는 존재가 아니고 진짜 존재인 주님만 처리할 수 있어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하나에 과정이거든요. 우리 가운데 알곡이 있고 가라지가 있다고 했을 때에 우리는 마치 우리가 존재로 생각해서 나는 마땅히 가라지가 아닐 것이고 알곡이라고 확정지어버리죠. 그런데 알곡과 가라지는 존재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알곡은 알곡대로 드러나게 하시고 가라지는 가라지로 드러나는 그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가만두어라. 마지막 때에 처리한다는 겁니다. 누가 와서? 주님이 와서 처리하는 거예요. 저 장로 잘못되었으니까 이걸 우리가 뽑자고 할 때 그 장로가 알곡이고 나머지는 가라지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 책임 누가 질 거예요? 그 생각해본 적 없습니까? 저 장로를 분명히 나쁘다고 했는데 만약에 그 장로가 알곡이고 나쁘다고 지적한 우리가 가라지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어디서 잘못된 겁니까?

실제로 이런 일이 사사기 마지막 장에 나옵니다. 베냐민 지파가 나쁘다고 공격했지요. 베냐민 지파 다 날아갔습니다. 뭔가 잘못되었어요. 자기는 정의라는 이름은 걸었지만 과연 우리 자신이 정의라는 말에 부합되는지 본인이 살필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없으면 어떠냐? 간단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 살 때 기분대로 삽니다. 누가 잘해주면 기분 좋고 못해주면 적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왜냐? 천하보다 내 존재가 중요하기 때문에 나부터 우선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나한테 잘해주면 천사고 못해주면 마귀라고 잘못된 판정을 내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가라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빼놓고 다 가라지지요. 알곡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대신 십자가 지시고 성령을 집어넣어주면 가라지가 알곡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때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 내가 상상한 주님이 나도 미처 몰랐지요. 그게 마귀의 본성인 것을.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마귀의 대장이라고 분류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처리하는 그쪽이 천사인줄 알았어요. 바라바를 풀어줄까, 예수를 풀어줄까? 할 때 누굴 풀어줬습니까? 바라바지요. 그렇다면 묻습니다. 그 자리에 본인이 계신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바라바입니다. 맞습니다. 누구도 예수님 편에 설 수 없어요. 왜냐? 의도적으로 다 끊어버리기 때문에. 나 같으면 예수님 편에 설 텐데. 그런 사람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냥 보이는 게 아니고 체포돼있습니다. 상황극입니다. 우리는 여기 앉아있습니다. 묻습니다. 저분은 내 구주라고 고백할까요, 나는 모른다고 고백할까요? 성경에 해답이 나와 있는데 어느 쪽이에요? 모른다고 할 때 정답 맞췄습니다. 갑자기 분위기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여러분, 베드로 개인의 실수가 아니에요. 베드로는 우리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권력에 포착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 부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이유에 대해서 제가 좀 알거든요. 진도 나간다고 좋은 것 아니니까 할 때까지만 하겠습니다.

이것 뭐죠? X가 수학이나 학문에서 뭘 의미합니까? 미지죠. 보이지 않는 미지의 것이라 할 때 X라고 하잖아요. 인간은 미지의 두려움과 공포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뭔가 집에서나 여럿이 있으나 관계없어요. 개척교회를 하시든지 사업을 하든지 간에 어디서나 가만있는 그 순간도 항상 아우라처럼 미지의 공포가 두려움이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이것은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몰라요. 알 수 없는 공포에요. 얘가 공부를 잘해서 100점 맞았다고 달려올 때 잠시 기쁜데 이게 웬일입니까? 알 수 없는 공포가 우리를 둘러쌉니다. “쟤가 계속 잘해야 될 텐데 다음 시험에 90점 맞으면 어떡하지?”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옵니다.

우리가 남의 일이라고 쉽게 나 같으면 주님을 인정하겠다고 하지만 막상 그 현장에서 예수님이 체포됐을 때 내가 말한 것이 아니고 미지의 공포가 우리 몸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무섭다, 겁난다, 이 땅에서 살 길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나는 저 예수를 저주한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이러한 형편을 누가 이해하십니까? 주께서 이해하시고 돌아보지요.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그때 퍼뜩 베드로에게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했지요. 진도 더 나가지 맙시다. 지금 중요한 대목이니까.

그 다음에 묻습니다. 베드로가 그 다음부터 예수님을 구출했습니까, 울면서 그 자리를 피했습니까? “주여, 제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왔나이다.” 이렇게 했습니까? 피하고 울었지요. 통곡했지요. 왜 웁니까? 구출하고 싶어도 그걸 할 용기가 없지요. 왜 용기가 없습니까? 그걸 제가 묻는 거예요. 인간은 누가 데려다주지 아니하면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야기했거든요. 마귀가 너를 지배하고 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제가 죽기까지 따르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내가 기도하지 아니하면 너는 마귀의 손에 잡힌다. 이 말은 내가 기도하게 되면 결코 마귀가 공격해서 마귀에게 잡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 말은 뭐냐? 자기 힘으로 예수님을 구출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증명하는 식으로 주께서 인도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비겁한 자입니다. 절대로 아는 대로 실행에 옮길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점을 주께서 이해해주셔서 이미 다 영생 얻는 문제에 대해서 깔끔하게 해결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시다.

주님 믿으니까 내 힘으로 하겠습니다. 되도 않는 건방떨지 마시고요. 이천 명 모였으니까 천오백 명 될까봐 두렵고요, 삼천 명 됐으니까 이천 명으로 내려갈까 두렵고요, 재산 500억 가졌습니까? 300억 될까 두렵고요. 달랑 재산이 29만 원밖에 없는 사람이 있거든요. 전두환 전대통령. 20만 원밖에 없는 사람은 10만 원 될까 두려운 거예요. 그게 뭐라고요? 무슨 기호라고요? X에 휘둘리는 두려움에 감사합시다. 이 두려움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한계를 뽐내지 않게 하시는 겁니다. 이만하면 됐다고 했는데 강도 들어오고, 강도 퇴치하기 위해서 개 키웠는데 또 다른 일이 벌어질 때 이건 뭔가 됐다 싶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또 두려움이 찾아오고.

도대체 해결책이 뭡니까? 해결책 알려드려요? 사도 바울 같은 마음 가지면 됩니다. “주여, 어서 죽여주옵소서. 제가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빨리 이 땅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빌립보서 1장. 내가 사는 것과 떠나는 것 가운데서 나는 떠나는 것을 원합니다. 하지만 못 떠나는 것은 여러분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봉사하느라 못 떠나는 것이지 제대하고 미치겠습니다. 하지만 주의 뜻으로 제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나를 죽인다? 그건 협박, 공갈도 안 돼요. 죽는 게 소원인데 고맙지요.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그것은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해요. 다만 주의 뜻 말고 주께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영웅심리에 의해서 호들갑을 떨면서 열심 내는 것, 주의 뜻이 지시도 안 했는데 뭔가 멋들어진 결과물을 내겠다는 것, 그런 것들이 오히려 주님을 힘들게 아프게 합니다. 주께서 일하시니 우리는 그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럼 목사님,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강의 듣다 조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항상 소급해서 설명하세요. “주여, 졸았습니다. 주의 뜻에 감사합니다.” 믿으면 될 문제지 졸아서 마귀가 와서 말씀 빼앗고 되도 안 되는 소설 쓰지 마시고 모든 것은 머리카락 자라고 뽑히고 키가 자라고 다 주의 뜻입니다. 참새 보세요. 우리보다 훨씬 낫습니다. 개를 보세요. 오뉴월에 개 팔자. 개는 거의 암에 안 걸려요. 아무 걱정 없기 때문에. 미지의 X가 없어요. 개도 있을 수 있겠다. 어쨌든 간에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 우리 힘으로 해결 안 되는 두려움을 주셔서 우리 힘으로 구원받았다는 소리 못하게 하는 것, 이미 다하신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 이것이 나의 증인이 아니고 바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31절, “또 비유로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묻습니다. 나무 되고 난 뒤에 씨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그 다음에 봅시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주님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안 보이는 분이 갈 수 없는 천국에 가도록 할 때 그런 관계가 천국의 관계지요. 그러면 그런 관계 되려면 안 보이는 분이 나를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끊어버려야 돼요? 모든 보이는 것을 부정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천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할 때 천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이지요. 그걸 부정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비유 말씀을 우리가 지킵니까, 못 지킵니까? 못 지킵니다. 이번에 삼촌이 도와주셔서 이렇게 회복됐습니다. 그러면 그 삼촌, 보이는데요. 그럼 누구 공로에요? 삼촌과 나의 좋은 관계가 어떤 큰 효과를 얻었다고 되잖아요. 우리는 그런 식이니까 어려울 때 아무리 친척끼리 싸워도 역시 마지막 어려울 때 일가친척이 도와줘요. 물론 일가친척이 안 도와주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리 자식이 어려울 때 결국은 마지못해 부모가 도와줘요. 아버지는, “이놈의 자식. 너는 내 자식 아니다. 호적 파가라.” 하지만 그새 엄마는 현금 싸 들고 몰래, “아버지 성질 알지. 내가 도와줄게.” 그게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나라입니다. 이런 식으로 천국 못 갑니다.

그러면 아버지한테 도움 받지 말고 주님한테 기도할까요? 아닙니다. 이렇게 해석하세요. 우리를 도와주던 어머니를 우리 주님이 보냈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참 편리하죠. 그게 사실입니다.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줄 때 얼른 받으세요. 엄마 마음 바뀌면 그것도 못 받습니다. 어려울 때는 그저 솔직한 게 최고에요. 그래놓고 누구한테? 엄마가 아니고 엄마를 보내주신 주님께서 누룩이 되셔서 제가 오늘도 주님의 혜택을 입고 사니 나는 도저히 내 힘으로 못사는 그런 존재임을 일깨워주심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제 말은 이 비유의 말을 지킨다, 못 지킨다? 우리 힘으로 못 지킨다.

그 다음에 봅시다. 13장 34절,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감추인 것을 드러낼 때 비유로 드러낸다. 비유의 말씀 끝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은 허락된 자와 허락되지 않은 자, 들을 귀 없는 자와 있는 자를 구분한 작업은 네가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한다. 따라서 네가 구원받거든 누구 공로다? 허락하시고 들을 귀 주신 오직 주님의 공로로 알아라. 그 말은 세상사람 믿지 말고 그리고 네 자신도 믿지 말고 너를 너 되게 한 주님께서 비유의 말씀 그대로 실천하는 과정에서 포함되어서 구원되는 거예요.

그래서 비유할 때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비유는 주님이 던져놓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다 지켜놓고 마치 우리가 지킨 것처럼 우리에게 그냥 그 결과를 효과를 덮쳐버리면 우리는 비유 안에서 당당하게 천국 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 비유의 완성은 바로 십자가로 드러나지요.

그 다음에 38절 봅시다.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앞에 있는 가라지 비유가 비유로 끝난 줄 알았는데 그 비유를 해석하는 조차도 비유가 되는 거예요. 비유의 확장, 비유의 연장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쪽에서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우리 쪽에서 알아듣는 것이 아니고, 낱말 하나에 이것은 천사고 이것은 원수고 또 보이지 않는 분을 붙여요. 우리는 보이는 내 힘으로 지키고 싶은데 보이지 않는 분을 붙이니까 역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 밖에서 주께서 혼자 싸우시고 그 결과만 우리에게 그냥 무상으로 제공하는 식입니다. 그 작업에 우리가 말려든 것이죠. 우리의 동의도, 허락도 없이 해놓고 너는 내 전쟁의 여파로 전리품으로 구원됐느니라. 이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원수는 우리의 원수가 아니고 주님의 원수인 것을, 그런데 주님의 원수를 우리가 압니까?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몰라요.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주님의 원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의 원수라고 하니까 반발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예수님의 피로서 의인 되었다. 분명히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 된 자로 넣는 거예요. 원수 된 자로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우리가 고칠 수 없는 육신의 소통하는 법칙인데 그것 죽을 때까지 절대로 버리지 못합니다. 갖고 있으세요. 우리 몸에 딱 맞습니다. 돈만 챙기고 지만 생각하고. 이런 우리를 주님이 그저 피로서 구원했다는 걸 알면 바로 우리 안에 성령 들어계신 겁니다.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시간은 지났지만 목사님께서 융통성을 허락해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여기에 44절 봅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이 비유의 잘못된 해석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농부는 우린데 세상 살다가 우연히 발에 채였는데 보니까 교회더라. 가보니까 천국 소식이더라. 보물이었더라. 따라서 세상에서 살던 것에서 돌이켜서 교회 가서 신앙생활 잘해서 천국에 골인했다. 이것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우선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주님이란 왜 있느냐? 나 잘 되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누가 우선입니까? 내가 우선이고 나 잘 되라고 예수님 있는 것, 그건 비유해석 잘못될 수밖에 없어요.

그 다음에 또 다른 잘못된 해석, 두 번째 해석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농부는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농부가 되셔서 귀한 보물을 챙겨다가 우리로 하여금 농부의 기쁨에 자기 성도를 집어넣었다. 굉장히 건전한 복음적인 해석처럼 들리지요. 내가 우선이 아니고 주님 우선처럼 해석되니까 참된 복음 같지요. 이것 아닙니다. 그럼 뭐냐? 존재로 해석하면 안 되고 농부가 누구며, 사람이 누구냐가 아니라 흐르는 과정 자체가 예수님의 작업입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갈든지 하다가 거기서 보물을 발견했다. 기뻤다.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러서 얻었다. 그 과정이 귀한 것 놓치지 않고 반드시 찾아내서 기뻤다. 그 기쁨이 우리 주님의 기쁨입니다. 따라서 그 기쁨이 속에 있으면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이런 주님의 기쁨이 우리 자신의 기쁨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새삼스럽게 이 사람이 누구냐? 이렇게 되면 과정으로 설명할 것을 존재로 설명해버리면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만 인정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존재를 믿어야 될 나라는 존재도 인정하면 아무리 예수님 위주라 하지만 결국 예수님 위주라고 하는 내가 위주가 되는 것이 인간의 사고의 한계거든요.

여러분, 아내를 사랑한다는 말이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한다고 보십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도 사랑 받았으면 사랑 값을 해서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야지. 하는 요구가 포함된 사랑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은 손해 보는 장사 안 하거든요. 명품 사줬는데 헤어지자. 이건 화나지요. 사주기 직전에 헤어졌다. 이건 기쁘지요. 사줬는데 얼른 받고 우리 헤어져. 이거는 남자들이 미칩니다. 뭔가 사기 당한 기분이 들잖아요.

이건 여자 쪽도 마찬가지지요. 못 배운 주제에 접대부로 있으면서 사랑하는 남자를 법대 나와서 사법고시 합격시켰는데 그 남자가 연수원에 다니면서 다른 연수생과 연애해서 자기를 버렸다. 이것 <별들의 고향>이고, 이것 실화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거든요. 결국 그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습니까, 사랑 안 했습니까? 오늘 중요한 문제인데 사랑했어요, 사랑 안 했어요? 사랑 안 했지요. 내가 그 남자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요. 그것을 정복욕, 소유욕이에요. 사랑이 아니고 소유욕을 발휘해놓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포장한 겁니다. 이런 자기 사랑에서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겠어요?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사랑하면서도 계속해서 미지의 두려움이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쁨은 우리가 참여할 수 없고 주께서 십자가 지시면서 네가 이 기쁨에 참여할 수 없다고 꾸짖으면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했을 때 나는 이 말씀에 있지도 않은 자에게 무상으로 이 기쁨을 주니 사랑도 못해놓고 사랑을 받는 그런 입장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기쁨, 그 기쁨이 바로 이 기쁨입니다.

보물은 우린데 그렇게 한 개념에 존재 하나를 집어넣지 마시고 대입하지 마시고 전체에 흐르는 과정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같은 내용이 그 다음에 나오는 비유, 어떤 보석상하는 사람이 귀한 보석 얻고 기뻐했다. 누가 기뻐했습니까? 혼자 기뻐했지요. 주님 혼자 기뻐하신 거예요. 과정에서 주님이 기뻐하는 과정에 우리가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내 기쁨 말고 주님의 기쁨이 따로 있음을 깨닫는 식으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겁니다.

너무 갈수록 설명이 부실하고 성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여러분 실력을 믿으니까 그냥 넘어가고 마지막 끝으로 하나만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비유가, 천국은 마치, 보세요. 이건 설명해야 되겠어요. 천국은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처럼 그 자리에 물건이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방금 뭐라고 해석했습니까? 천국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과정으로 흐름으로 있는 거예요. 흐름에 휩싸이면 여기가 천국이네 하고 느끼는 겁니다. 천국이 따로 있으면 우리는 그걸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거든요. 그런데 천국이 흐름 같으면 우리도 같이 흐름이 되는 거예요.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천국의 기쁨에 포함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 좋은 것을 가짐으로서 내 안에서도 계속 좋다고 여기는 그런 버릇으로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말 어렵게 하지 말고 쉽게 합시다. 하늘의 파랑새가 예쁘지요. 그 예쁜 것을 손에 잡으면 예쁩니까? 비린내 나요. 멀리서는 아름답지만 내 손에 파랑새는 예쁘지 않아요. 온통 냄새납니다. 사람들은 자꾸 행복을 소유하려고 했어요.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행복한데 남이 가진 소유물을 나도 가지면 같이 행복하겠다고 여기는 자체가 이것이 행복을 날려 보내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미지의 두려움이 같이 찾아오게 돼있어요. 이것 잃으면 안 되는데. 돈 가진 사람의 걱정이 뭐냐? 가진 것 날아 갈까봐 걱정이에요. 걱정이라도 갖고 싶지요. 걱정은 걱정이고.

그 다음 마지막 비유가 뭐냐 하면, 47절,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언제 말입니까? 세상 끝이지요. 끝의 일을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5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라고 돼있어요.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신약과 구약, 마지막 때 모든 것을 최종 정리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나는 지금까지 비유로 이야기했다. 곳간에 있는 것을 가지고 온다. 피동적이죠. 우리는 피동적이에요. 우리는 곳간에 있다면 주께서 분류해서 좋은 고기는 따로 나쁜 고기는 따로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야곱이 착한 일을 하기 전에 에서가 나쁜 일을 하기 전에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걸 구체화시킨 것이 인류역사고 역사 속에 야곱과 에서가 실제로 나타났고. 결국은 구원받는 것은 누구의 권한이며 누구의 일방적인 권리행사입니까?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허락된 사람만 구원받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기분 나쁘십니까? 그렇다면 그건 나쁜 고기고, 여기에 대해서 고맙다고 하면, 그것은 좋은 고기가 되는 겁니다.

바로 주님이 자신이 던진 말씀을 스스로 십자가까지 지고 가면서 스스로 완성해놓고 소급해서 나는 전에 이런 비유를 던진 적이 있지. 그 비유가 성령 안에서 이미 그것이 완료가 되었기에 너는 죄 지었지만 나로 인하여 깔끔하게 정리되어서 말씀 지킨 사람으로 간주되어서 천국에 합류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과정입니다.

어디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택한 백성을 끄집어내는 그 과정, 주님만이 할 수 있는 과정을 우리는 지금 뒤늦게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주님 홀로 하셨다고 고백하면서 주님을 찬양하면서 우리는 지금 남아있는 인생에 비유의 혜택이 덮치는 가운데서 즐겁게 기분 편안한 가운데 이미 결과가 끝난 상태에서 드라마 재방송 보듯이 축구 재방송 보듯이 즐거운 마음으로 “주여, 이렇게 못난 인간을 십자가로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비유의 완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던진 말씀을 홀로 이뤄주시니 우리는 웬일인가 싶었는데 따지고 보니까 우리는 나만 우선 챙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바뀌려고 해도 이 성질 죽을 때까지 안 바뀔 걸 미리 아시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말씀 취지에서 죄인 되게 하셔서 용서하시니 용서하심에 대해서 다시 감사하고 찬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질문 있으면 하십시오.

-우선 천국 비유를 해주시면서 알곡과 가라지부터 과정을 얘기하셨거든요. 그전에는 과정이란 말씀 안 하셨는데 전환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군데군데 들어가는 주께서 주신 구약에서 인용된 말씀을 집어넣을 때 처음에 인용한 것이 이사야 6장이죠. 너희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이건 총괄적으로 일방적으로 내가 이뤄가는 것이다. 너희는 끼지 마라. 너희는 하나님 원수인 것도 분간 안 되고 마치 예수님 편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런 식으로는 내 작업에 못 낀다. 내가 하겠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비유로 이야기하신 것은 그 비유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수용되고 참여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처음에는 물체로 이야기하지요. 나중에는 뭡니까? 어떤 사람, 보석, 장수, 드디어 사람 이미지가 강렬하게 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기로 나는 사람을 분류하면서 지옥 갈 사람은 이렇다는 걸 보여주면서 너는 천국 오너라. 저 사람이 지옥 가는구나. 아울러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나는 저 사람을 지옥 가도록 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지옥 가게 하시는구나. 그렇다면 이 조치는 이 분류는 내가 한 게 아니고 주님께서 하셨다면 내가 천국 가는 것도 내가 선택해서 가는 게 아니고 저 사람이 지옥 가는 분류의 능력에 동일하게 나는 지옥 쪽이 아니고 천국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리고 이 말씀과 더불어 기적이 일어나면서 구체적으로 인간과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끝나면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여러분들이 그냥 사세요. 사시면서 자신이 얼마나 아무리 말씀 지키고 싶어도 못 지킨다는 정도는 착한 사람이에요. 그게 아니고 지킬 마음이 없어요. 왜? 살기 바쁘니까. 사람 낳고 돈 낳기 때문에 사람이 중요하다고요? 그건 구색에 불과하고 실제로 내가 중요한 것은 돈이 최고 중요하고 내 명예가 최고 중요하다는 그러한 모습을 살아가면서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재방송이지요. 죄인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작업에 참여된 사람이에요.

우리가 흔히 말하잖아요. 저 사람은 불쌍하다. 용서해 달라. 주께서 너나 잘하세요. 남 불쌍하다고 하지 말고. 생각해보세요. 불쌍함의 정도가 뭡니까? 사람마다 다 달라요. 어디 일방적으로 자기 기준을 남한테 적용시킵니까. 우리 집 개나 옆집 개에게 수작 걸다가 거절당할 때 우리 집 개가 너무 불쌍해. 우리 얘가 코 파다가 코피나면 불쌍하잖아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그게 어른들 보기에 불쌍함에 들어갑니까? 안 들어가잖아요. 다른 사람은 그것보다 더 불쌍한데.

그러니까 우리는 자꾸 나를 정당한 기준을 동원시키게 돼요. 그런데 그것이 문제 있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하게 하셨던 거예요. 뭐든지. 나는 예수 믿었다고 자신만만했는데 주께서 일으킨 상황 속에서는 그게 전혀 믿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믿음이 아니고 사랑한 게 사랑이 아님을 들춰내는 그런 사태가 우리에게 자꾸 밀려옵니다. 그런데 그게 이상한 일이고 잘못된 길로 가는 게 아니고 그게 정상이에요. 자꾸 주님께 감사하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구원이 허락된 사람이라면 제가 만약에 중보적 기도를 할 때 이미 이 사람은 지옥 가려고 결정한 사람이라면 내가 이 사람을 위해서 구원을 해달라는 그런 기도는 잘못된 기도인가요?

인간의 어떤 기도도 다 잘못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중보기도를 시킨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중보기도하지 다른 사람은 중보기도하면 안 돼요.

-하여튼 어떤 가족이나 어떤 친척이나 이미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은 허락된 사람이잖아요(그럼 존재가 돼요). 제가 만약에 주의 의지로 이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해서 계속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요?

대상을 내가 정했다는 것이 잘못이죠. 주님의 기도 대상은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미 정해져있는데 우리의 기도 범위 내에 원수가 포함될 수 없지요. 왜냐하면 원수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원수가 발생돼야 되는 거거든요. 원수가 없는데 기도 못하잖아요. 주이 말씀대로 하면 원수가 있어야 되죠. 그런데 원수를 내가 사랑해버리면 그 사람이 원수에요, 동료에요? 내가 사랑한 순간 원수가, 원수가 아니고 나의 동료가 돼버렸죠.

-그럼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건 우리의 본성이죠. 우리의 본성은 날 위해서 기도하게 돼있어요. 마태복음 6장에 우리는 나한테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가 정합니다. 쇼핑할 때 “주여, 뭐든지 사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안 하지요. 이것은 살 것, 안 살 것을 내가 하지요. 기도할 때도 내가 정하잖아요.

-그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백성을 구원했거든요. 멸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

모세 안에 예수님이 들어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선지자 안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기 때문에 모세는 그렇게 한 겁니다.

-사람들이 하는 어떤 중보기도는 그런 것은?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일체 응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계속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는 사건이어야 되는데 사람의 기도는 재주가 되고 말았어요. 기도 시작, 끝. 재주가 되는 것은 숙달된 기능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기도 외에는 이러한 이적이 없다고 한 그 말씀은 무엇인가요? 누가복음에서.

그 말이 제 말인데요. 주님이 사건을 일으켜서 하는 기도, 그 기도하는 당사자는 절대로 내가 기도했다는 생각이 들 수 없지요. 왜? 주님이 직접 나한테 관여했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이 관여하지 않고 마음을 답답할 때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데 기도할 때부터 결과를 우리가 예측하잖아요. 그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에 해당 안 돼요. “내 뜻대로 해주옵소서.”라고 협박조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지금 기도하면서 사람은 그냥 기도하는 게 아니고 기도하는 내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 달라는 요구가 함께 들어있어요. 그게 문제라니까요. 기도했는데 안 들어주기만 해봐라. 그 마음이 함께 들어있어요. 그런데 제가 강의 끝나면서 뭐라고 합니까? 그게 우리의 본성이에요. 하시라고요. 기도를 하세요. 한이 맺혔는데 터뜨려야지 안 터뜨리면 암 걸립니다. 터뜨리되 의미두지 마세요.

히브리서 7장 25절, 본인이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는 항상 살아있어서 저희를 위해서 기도하지요. 주님의 기도가 응답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되지요. 우리 응답이 왜 필요하지요? 우리 대신 100% 응답되는 분이 기도하고 있는데 내 기도가 왜 필요하냐 이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뭐냐 하면, 내가 원하고 내가 보고 싶은 것에 대해서 한이 맺혔기 때문에 기도 안 하면 답답해서 못 견뎌서 기도하는 거예요. 답답할 때는 기도하세요. 하시고 그 가운데서 내 기도는 의미 없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해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에 내가 기도했다고 하지 마시고, “주님이 내 안에서 기도했습니다.”라고 하면서 이 모든 것을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붙이세요.

답답한데 가만있다? 이건 폭발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우리의 기도를 일체 듣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기도하세요. 답답하면 달라 하지요. 강권 하에 하세요. 강권 하에 하시면 주께서 응답하십니다. 어떻게 응답하는 줄 알아요? 네 기도 개판이다. 내 기도 때문에 산다는 응답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일 2부 예배 때 설교할 걸, 뉴저지교회 11시 예배 설교제목이 [주기도문]이에요. 중보기도 없다는 것 이야기할 거예요. 중보자가 있는데 중보자도 아닌 우리가 왜 중보기도해요. 성경에 도고란 좋은 말도 있는데 왜 갑자가 중보기도가 유행됐는지.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행위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행함이 왜 가치가 있어야 돼요? 큰일 날 일이거든요. 주님이 피에다 우리 행함을 섞으면 이건 복음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은 복음이 아닌 걸 왜 그리 좋아하는지.

그래서 기도한 내용이 뭐냐? 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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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8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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